박제가의 『북학의』와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
1. 자본주의를 싹트게 한 두 학자
박제가는 1750년(영조 26)에 서자로 태어나 온갖 수모와 멸시를 당하며 성장했지만, 어려서부터 문장, 글씨, 그림 등에 뛰어난 재능을 보이며 조선 시대의 사회상을 바라보는 눈을 키워 갔다. 그는 19살 때 박지원의 문하에서 실학을 연구했고, 국가의 의로움과 백성의 평안함을 위해서는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사상을 토대로 그 당시 선진국인 청나라의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북학론'을 주장했다. 29세가 되던 1778년(정조3)에는 채제공의 수행원 자격으로 청나라에 가서 새 학문을 배우고 귀국한 후, 청나라의 풍속과 제도를 소개한 『북학의』를 저술하게 된다. 박제가는 이 책에서 실생활에서 실제로 필요한 것부터 먼저 배우고 개량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차제를 개선하고, 도로를 개량하여 교통을 편리하게 한 후 물자의 거래를 촉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농기구의 개량과 농업 기술의 개선을 역설하는 한편 상공업의 발전과 적극적인 무역 활동을 권장 하는 등 중상주의 정책을 펼치며 당시의 정치, 사회 현실로서는 매우 혁신적인 주장을 펼쳤다.
1923년 영국에서 세관원의 아들로 태어난 아담 스미스도 1763년부터 3년 동안 프랑스를 여행하면서 그 당시 농업을 경제의 중심으로 여기는 중농학파 경제학자들과 많은 교류를 나눴다. 그 역시 귀국 후 여러 가지 저작물을 남겼는데, 그 중 1776년에 출판한 『국부론』은 자유방임주의 경제 이론의 효시이자 고전파 경제학의 기초를 형성하는 경제학 분야의 가장 중요한 저서이다. 『국부론』에서 그는 국가의 부를 증대시키는 방법으로 분업의 역할을 강조했으며,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자유방임의 효과를 최대한 살려 자유 무역을 통해서 각국의 이익을 증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국부론』은 근대 자본주의 체제의 특징적인 모습을 체계적으로 분석한 최초의 저작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처럼 박제가는 중상주의 정책을 펼치면서 조선의 발전을 갈망했고, 아담 스미스는 중상주의를 배격하면서 자유 방임주의를 주장했다. 물론, 두 사람이 처한 역사적 상황과 경제관은 서로 달랐지만, 이 두 사람에 의해 그들의 사회에 자본주의가 싹트기 시작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럼 박제관의 『북학의』와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을 통해 이들 두 학자가 추구하려고 했던 바를 알아보자.
2. 박제가의 『북학의』
(1) 『북학의』의 저술 배경
박제가는 1778년 조선의 사신으로 청나라에 가는 채제공의 수행원 자격으로 청나라에 가서 청나라 학자들과 교류하며 새로운 문물을 접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그 동안 자신의 연구한 것을 실제로 관찰, 비교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얻었고, 3개월 동안 청나라를 여행하고 1개월 동안 연경 시찰을 할 수 있었다.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그 동안 자신이 연구한 선진 문명과 연경에서 직접 본 경험적 사실에 자신의 견해를 더해 북학론을 저술한 것이 바로 이 『북학의』이다. 『북학』이란 북쪽의 학문, 그러니까 청나라의 학문을 뜻하며, ‘의(義)’는 논의하다 또는 거론하다 정도의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북학의』는 ‘청나라에서 새롭게 접한 학문에 대하여 논의하는 책’ 정도의 의미를 지니는 셈이다.
당시의 시대 풍조로 보아 청나라인 중국을 선진국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매우 진보적이면서도 혁신적인 사상이다. 왜냐 하면 현실적으로는 정치적인 대외 정책으로 말미암아 청나라와 사대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도,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를 멸시하는 풍조가 더 팽배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청나라의 지배 민족이 한족이 아니니 만주족이라는 사실은 이러한 이유를 대변해 주기도 한다. 박제가는 이러한 시대 풍조에 반론을 제기하면서 받게 될 박해를 무릅쓰고 조선이라는 나라를 구하고, 백성의 가난을 구제하는 길은 오직 『북학』밖에 없다는 소신을 바로 『북학의』를 통해 펼쳤던 것이다.
(2) 실학의 의미
실학(實學)은 조선 후기에 대두된 새로운 학풍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 그 이전의 학문인 주자학이 현실과는 동떨어진 철학적 관념론에 치우쳐 있었던 것에 비해서, 현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했던 학풍이 바로 실학이다. 그러나 실학은 그런 의미가 대두되기 이전부터 사용되었는데, 주자학자들도 자신들의 학문을 실학이라 불렀고 사실상 유학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했다. 이들은 유학이 아닌 모든 다른 학문을 허학으로 불렀으며, 특히 불교를 대표적인 허학으로 취급했다. 즉, 주자학자들의 실학이라고 불렀던 유학은 다른 사람들과 부대끼며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상과, 그러한 일상 가운데 형성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로 이루어지는 세계이외에는 그 어떤 것에도 절대 관심을 두지 않는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유학이 곧 실학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조선 후기에 새롭게 대두된 학풍으로서의 실학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한 마디로 말하자면 우리가 오늘날 실학자들이라고 규정하는 당시의 학자들은 자신들을 유학자로 여겼을 뿐,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실학자’로 자처하지 않았다. 요컨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실학 또는 실학자라는 개념은 어디까지나 역사적 관점에서 오늘날의 우리가 조선 후기의 사상, 사상가들을 분류하고자 고안한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박제가 역시 유학자였으며, 역사적으로는 조선 후기의 실학자였던 셈이다.
(3) 『북학의』의 주요 내용과 의의
박제가는 그가 생존하던 당시의 중국 문물제도를 자세히 소개하면서, 그러한 선진 기술을 도입하여 농업을 중심으로 한 여러 분야의 혁신을 이루려고 했다. 이런 내용을 중심으로 한다는 측면에서 『북학의』는 기본적으로 조선 후기의 실용서라고 할 수 있다. 박제가의 입장에서는 병자호란 이후 별다른 전란 없이 백여 년 동안 평화가 지속되고 백성들이 호화스러운 생활를 하지 않는데도 조선이 늘 빈곤한 까닭은, 과학 기술과 문물제도가 낙후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그는 그러한 빈곤과 낙후의 원인을 앞서가는 중국의 선진 기술을 도입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북학의』를 단순하게 실용서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 박제가는 이 책에서 자신이 청나라에서 접한 문물을 단순하게 소개해 놓은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의 자신의 입장도 자세하게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내용과 의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이용후생
박제가는 『북학의』의 서문에다 다음과 같은 언급을 한다.
"대게 삶을 이롭게 하고 넉넉하게 하는 것에 하나라도 빠진 것이 이으면, 올바른 덕을 해치게 된다." |
이처럼 박제가의 『북학의』에서는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정신을 일관되게 추구한다. 특히 여기에서는 일상 생활 속에서 유용하게 쓰이는 많은 도구, 물건의 제작법, 사용법 등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윤리, 도덕과 같은 공허한 관념에 몰두했던 이전의 유학자들과는 아주 다른 태도와 시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구체적인 문물과 제도의 개선을 통해 백성들의 삶을 이롭고 풍요롭게 하는 것이야말로 윤리, 도덕을 바로 세우는 기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용후생의 측면에서 보면 이전의 주자학은 심각한 문제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고, 그래서 그는 『북학의』의 병론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실속이 없는 말을 잘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으나, 도무지 실천하여 구체적인 효과를 거두는 데에는 부족하다." |
이러한 이용후생의 정신은 박제가의 자연관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전통적인 주자학에서는 이미 주어진 자연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하면 도덕적, 윤리적으로 올바른 삶을 살 수 있을 것인지를 궁리한다. 이에 비해서 박제가는 이용후생을 위해 적극적으로 개발해야 할 대상으로 자연을 이해한다. 동아시아 전통 사상에서 자연을 이루는 기본적인 요소로 이해되어 온 오행에 대해서도 백성들이 이용하여 생활하는 것으로서, 날마다 사용하여 빠뜨릴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오행을 철학적인 원리로 이해하지 않고 일상생활 속에서 널리 이용하는 구체적인 사물, 즉 이용후생의 수단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박제가에게 오행은 일종의 생활 필수품이었다. 이용후생을 위해 적극적으로 개발해야 할 대상이 자연이라면, 그러한 자연 개발의 도구, 즉 농기구와 같은 것의 중요성은 두말할 나위 없었던 박제가는 그래서 이렇게 말했는지도 모른다.
"우리나라에 농기구가 변변치 않은 것은 예나 지금이나 남이나 북이나 모두가 꼭 같다. 쟁기와 보습을 사용해서 흙을 갈고 나면 더 이상 사용할 수 있는 농기구가 없다." |
② 전통적인 검약주의에 대한 비판
전통적인 유학에서는 물질적인 욕심을 극도로 경계한다. 나라를 부유하게 하는 방법도 비용을 절약하고 백성들의 사치를 금하는 정도에 머물렀던 것이 보통이다. 욕망을 억제하여 검소한 생활을 하는 것, 그래서 도덕적으로 흠이 없는 삶을 사는 것을 이상(理想)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나라를 망친 왕들은 대부분 극도의 사치를 부린 왕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그런데 박제가는 유학의 이러한 관점에 정면으로 이의를 제기한다.
"사치가 날로 심해진다고 말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그들은 근본을 알지 못한다. 다른 나라는 진실로 사치로 인해 망하기도 했지만, 지금 우리나라는 검소 때문에 쇠퇴하고 있다." |
"물질을 소비하고 사용하는 방법을 모르면 만드는 방법을 모르게 되고 만드는 방법을 모르면 백성이 날로 궁핍해진다. 재화는 우물에 비유할 수 있다. 퍼내면 가득 차고, 사용하지 않으면 말라 버린다." |
즉, 화려한 무늬의 비단 옷을 입지 않으니 비단 짜는 기계가 없어지고 그 기술도 쇠퇴하여 기술자가 없어진다. 그렇게 되면 결국 직조 기술 전반이 쇠퇴하여 백성들은 언제나 남루한 옷을 입을 수 밖에 없다. 이러한 박제가의 견해는 결국 초보적이나마 근대적인 경제 원리를 지적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소비가 촉진됨에 따라 그에 부응하는 생산 증가와 생산 기술의 혁신이 이루어지고, 전체적으로 경제가 발전하여 삶이 윤택해지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셈이기 때문이다.
도덕적인 삶, 윤리적인 삶에 주안점을 두었던 전통적인 유학자들과는 달리 박제가는 윤택하고 넉넉한 삶, 물질적인 이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소비하는 삶을 중시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박제가가 그런 삶을 중시했던 것은 단순히 인간이 욕망을 마음껏 충족시키며 살아야 한다는 쾌락주의와는 맥락이 다르다. 전통적인 검약주의에 대한 박제가의 비판은 어디까지나 궁핍한 백성의 삶을 개선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③ 중상주의 정책의 강조
박제가는 중국이 부유한 이유를 상업의 발달에서 찾는다. 중국과 조선의 상가를 비교하면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 종로 상가는 그 전체 거리가 일 리도 되지 못한다. 그러나 중국의 마을을 지나가면 가게가 계속 이어져 몇 리나 된다. 또한 수출입이 번성한 것과 품목의 다양함은 우리나라 전체를 더해도 미치지 못한다." |
이처럼 박제가는 상업을 진흥시켜 각 지역 간의 물자 교류를 원활하게 만들고 소비를 장려하여 생산 활동을 진흥시키며 생산 기술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는데, 이 역시 전통적인 유학의 입장에서 보면 매우 혁신적인 생각이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는 전통적인 사회 계층 구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장사꾼을 천시하고 선비만을 존중하는 풍토가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 박제가는 이렇게 말한다.
"수륙 교통을 통해 물품을 판매하고 무역하는 일을 모두 사족(士族)에게 허락하여 호적에 돌릴 것을 청합니다." |
박제가는 국내의 상업 유통뿐만이 아니라 더 나아가 외국과의 무역을 활성화할 필요성도 강조한다. 그 구체적인 방안이 『북학의』 의 통강남절강상박의(通江南折江商舶議)에 나와 있다. 이 제목을 풀어 옮기면, '중국의 강남 및 절강 지방과 상선을 통해 교역하는 것에 대한 견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의 등주, 내주의 배가 장연에 정박하고, 금부, 해개의 물건을 선천에서 교역하며, 장강, 절강, 천주, 장주 지역의 여러 재화를 우리나라의 은진, 여산 사이에 모이도록 합니다. 그렇게 하면 영남 지방의 면(綿)과 호남 지방의 모시와 서북 지방의 실과 삼베 등이 중국의 비단, 담요와 교환될 것이고, 각 지방의 산물을 중국의 금, 은, 병갑, 약재 따위와 교환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선박, 수레, 궁실, 기물의 이로움도 배울 수 있습니다." |
요컨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지리적 특성을 이용해서 중국과의 해상 무역을 활성화 시키자는 견해이다. 이 글 다음에는 중국뿐만 아니라 안남(베트남), 유구(오키나와 지역), 대만 등으로까지 차차 무역 범위를 확대해야 한다는 의견이 이어진다. 이러한 박제가의 견해는 결국 조선의 문호를 여러 나라에 개방하자는 주장이나 다름없었으니, 당시로서는 무척 혁신적인 주장이었다.
(4) 박제가는 자신의 주장을 실현했는가?
그렇다면 『북학의』에 나타나 있는 박제가의 주장들은 얼마나 실현되었을까? 안타까운 일이지만 박제가의 주장은 모두 『북학의』라는 책 속의 주장으로만 끝나고 말았다. 물론 박제가 뿐만이 아니라 실학자라 불리는 사상가들 대부분의 주장은 이와 같은 운명이었다.
박제가가 『북학의』에서 전개한 여러 주장은 당시 지배층의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만큼 그의 주장은 혁신적이었고, 어떤 의미에서는 시대를 앞선 주장이었다. 그가 양반의 서자 출신이라는 사실도 이러한 그의 주장과 연관 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비록 정조의 각별한 정책으로 서자 출신들도 제한적이나마 능력에 따라서 등용되기는 했으나 그들이 실질적으로 국가 정책의 입안과 집행에 참여할 수 있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러한 좌절 속에서 서얼 출신의 지식인들은 기존의 현실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지닐 수 이었다. 기존의 체제에 안주하기만 하면 가문과 일신의 영달을 누릴 수 있었던 고위 관료들에게 기존 체제의 개혁을 기대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박제가는 자신의 뜻을 제대로 펼치지 못한 실패한 사상가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의 모순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그것을 고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용기 있게 발언한 사람이라면, 비록 그의 발언이 현실화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그는 결코 실패한 사상가가 아니다. 오히려 위대한 사상가일수록, 어느 정도는 시대를 앞서 나가는 것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2.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은 과학적 경제학의 시작은 언제부터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아담 스미스가 『국부론』을 발간한 1776년부터라고 답한다. 아울러 경제학 분야를 대표하는 한권의 고전을 선택하라고 할 때에도 스미스의 『국부론』을 선택하는 사람이 많다. 이와 같이 스미스의 『국부론』이 가장 대표적인 경제학 저작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
(1) 분업의 강조
『국부론』의 서두에서 아담 스미스는 『인간은 본성적으로 교환자이다.』라고 주장한다. 『국부론』의 1편 1장에 따르면, 노동 생산력의 향상, 곧 노동 과정에서 발휘되는 숙련, 기교, 판단이 향상되는 원인의 대부분은 분업의 결과였다. 그런데 수많은 이익을 가져오는 분업은 인간이 자신의 지혜로 그것이 가져다 줄 일반적인 풍족을 예상하여 사회에 도입한 것은 아니다. 분업은 인간성의 어떤 성향으로부터 매우 천천히 나타나게 된, 점진적이긴 하지만 필연적으로 발생한 결과이다. 그 성향이란 하나의 물건을 다른 물건과 교환하고 거래하는 성향이라고 말한다.
물론, 아담 스미스는 이 성향이 더 이상 설명할 수 없는 인간 본능 중의 하나인지 또는 이성과 언어의 속성에서 나오는 필연적인 결과인지는 『국부론』에서 다룰 주제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인간은 교환하려 하지만 동물들은 교환하려 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아담 스미스는 인간이 인간인 것은 교환하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결론짓고 있다. 따라서 인간은 본성적으로 교환자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인간은 교환자일 때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이다. 이는 곧 경제주의적 인간관을 나타내고 있는데, 경제주의에 따르면 경제행위 혹은 상업 행위는 인간이 자신의 사회적 혹은 합리적 본성을 삶 속에서 드러내 보여 주는 하나의 고유한 표현 양식이다. 결국 아담 스미스는 『국부론』의 출발을 경제주의적 태도에 맞춰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단지 아담 스미스가 가격 기구만을 분석했다면 시장 경제가 확립된 이후인 현대에 과연 『국부론』이 기여한 점이 있을까 의문시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국부론』의 분업 이론과 가격 이론, 나아가 아담 스미스가 윤리학, 법학, 신학 분야에서 남긴 다른 저작을 통합적으로 이해한다면, 아담 스미스가 현대 사회에도 여전히 기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국부론』에서 부의 원천은 노동이며, 부의 증진은 노동 생산력의 개선으로 이루어진다고 주장하고, 생산의 기초를 분업에 두었다. 그는 분업과 이에 수반하는 기계의 사용을 위해서는 자본의 축적이 필요하며, 자유 경쟁에 의해서 자본 축적을 꾀하는 것이 국부 증진의 정도(正道)라고 역설하였다.
(2) 보이지 않는 손과 개인의 이기심
자유 시장 경제 체제에서는 무엇을, 어떻게, 그리고 누구를 위하여 생산할 것인가라는 경제의 기본 문제를 결정짓는 요인이 바로 가격이다. 각 경제 주체는 가격의 변동에 따라 행동을 조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격 변동의 신호에 따라 소비자는 효용(만족)이 최대가 되도록 소비하고, 생산자는 이윤이 최대가 되도록 생산한다.
아담 스미스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의 처지를 개선하려고 하는 자연적인 이기심에 따라 행동하면 이른바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하여 모든 경제 활동이 조정되고 개인과 사회의 조화가 실현된다는 낙관론을 펼쳤다. 즉 가격의 능동적인 자동 조절 기능에 의해 경쟁 시장은 수요, 공급의 균형이 부지불식간에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에 아담 스미스는 개인의 이기심 추구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우리가 저녁 식사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정육업자, 양조업자, 제빵업자들의 자비심 때문이 아니라 그들 개인의 이익 추구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생산물의 가치가 극대화되는 방향으로 자신의 자원을 활용하려고 노력한다. 그들은 공익을 증진하려고 의도하지 않으며 또 얼마나 증대시킬 수 있는 지도 알지 못한다. 그는 단지 자신의 안전과 이익을 위하여 행동할 뿐이다. 그러나 이렇게 행동하는 가운데 보이지 않는 손의 인도를 받아서 원래 의도하지 않았던 목표를 달성할 수 있게 된다. 이와 같이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열심히 추구하는 가운데 사회나 국가 전체의 이익을 증대 시킨다." |
아담 스미스가 말하는 ‘보이지 않는 손’이란 가격의 자동 조절 기능, 가격의 매개 변수적 기능을 말한다. 이 기능에 의해 경쟁 시장에서는 수요, 공급의 균형이 부지불식간에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유방임과 시장의 자동 조절 기능을 믿기 때문에 아담 스미스는 정부 정책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여러분은 선의의 법령과 규제로 경제에 도움을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자유방임하십시오. 간섭하지 말고 그대로 내버려 두십시오. ‘이기심이라는 기름’ 이 ‘경제라는 기어’를 거의 기적에 가까울 정도로 잘 돌아가게 할 것입니다. 계획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통치자의 다스림도 필요 없습니다. 시장은 모든 것을 해결할 것입니다." |
결국 국가의 부를 증가시키기 위해서는 국민으로 하여금 자기의 본성을 자유롭고 안전하게 발휘하도록 해 주는 일밖에는 아무것도 필요 없다는 것이 그의 저서 『국부론』의 또 다른 핵심이다. 정부는 국토를 방위하고 정의롭고 평등한 법질서를 유지하며 개인이 할 수 없는 공공사업을 수행하는 일에만 전념하고, 그 나머지의 분야는 모두 개인에게 맡겨 두라는 자유방임주의를 추구한 것이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전통적 의미의 도덕 개념은 사회적 이익의 개념으로 대체된다는 낡은 도덕 개념은 사라지고, 새로운 도덕 개념이 등장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도덕 개념은 사익을 추구하는 개인에게 보이지 않는 손의 자비를 베풂으로써 도덕적 자유를 준다.
(3) 중상주의 배격
사실 아담 스미스가 경제학 연구를 시작하던 1750년대는 시장 경제 체제가 확립된 환경이 아닌 중상주의 시대로서 자유로운 영업 활동을 막는 규제가 많은 시대였다. 스미스는 이러한 규제를 철폐해야만 경제가 발전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으므로, 『국부론』의 시대적 의미는 중상주의 비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중상주의에 의해 주로 진행되는 것은 부자와 권력자의 이익을 위한 산업뿐이다. 가난한 자와 빈궁한 자의 이익을 위한 산업은 너무나 자주 무시되거나 억압받고 있다." |
아담 스미스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국가 중심적 무역 패러다임이란, 국가가 권력과 부를 유지하고 증대해야 한다는 책임과 목표를 가지고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경제 활동에 간섭하며 무역에 직접 관여하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일종의 보호 무역 등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러한 정부의 규제는 시장 중심적인 패러다임의 입장에서 용인될 수 없는 것이다. 왜냐 하면 국가의 통제에 따른 부작용은 곧 가난한 자에게 피해로 돌아간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고, 그 대안은 결국 자유방임이었던 것이다.
중상주의자들은 권력이 부를 창조하고 부는 다시 권력을 증대시키며, 이렇게 증대된 권력은 더욱 많은 부를 가져와 결국 안전과 번영을 가져다 준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담 스미스는 권력과 부의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형성하기 때문에 결국은 권력과 부의 악순환을 초래한다고 파악했던 것이다. 그는 바로 이 부분을 지적하는 동시에 극복하고자 자신의 경제 이론을 강조했다.
(4) 『국부론』의 의의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을 통해서 우리는 세 가지 핵심적인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첫째, 필요에 의해서 일반적으로 만들어지는 사물의 질서는 어느 나라에서나 인간의 자연적 성향에 의해 촉진된다. 인간이 만든 제도가 이러한 자연적 성향을 방해하지 않는다면, 도시는 어디에서나 주변 지역이 개량, 경작될 수 있는 것 이상으로는 성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인간의 자연적 성향이란 합리적인 경제 행위를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인류 역사의 발전 단계를 보면 개인의 처지에서 우선적으로 가장 합리적인 행위는 농업에 투자하는 것이고, 그 다음에는 국내 상업에 투자하는 것이며, 마지막에는 해외 무역에 투자하는 것이다. 개인의 이러한 행위 유형의 변화에 따라 인류 사회는 농경 사회로부터 상공업 사회로, 최종적으로는 국제 무역 사회로 발전한다.
아담 스미스의 이러한 경제주의는 인류 사회의 역사 발전으로 이론화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아담 스미스 이론의 방법론적 특성인 개인 행위로부터 사회 질서와 구조를 유추하는 태도와, 역사적 관점과 초역사적 관점을 결합시키는 태도를 확인하는 동시에 이것의 방법론적 한계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둘째, 자유로운 개인들의 경제 행위로부터 사회 질서가 형성된다는 주장은, 사회 질서가 개인의 자유를 완전히 보장하지 않는 상태에서도 적용되기 때문에 더욱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더불어 모든 개인이 자신의 상태를 개선하려고 하는 자연스러운 노력은 자유롭고 안전하게 개인이 쏟을 수 있게 허용될 때, 그것만으로도 사회에 부와 번영을 가져다 줄 수 있다. 더욱이 인간이 만든 어리석은 법이 이러한 개인의 자연스런 노력을 방해하는 수많은 장애물을 만들고 있다. 그러나 개인의 자연스러운 노력은 인간이 만든 이런 장애물들이 개인들의 자유를 항상 침해하거나 자신들이 꾸준하게 노력하는 것을 방해하더라도, 이런 모든 방해와 장애를 극복할 수 있다. 경제적 자유주의는 한 사회의 정부나 입법가가 개인의 경제 행위를 방해할 필요가 없으며 방해해서도 안 된다는 주장만 하는 것에 멈추지 않고, 그러한 방해조차도 자신의 상태를 개선하려는 개인의 자연스런 노력인 경제 활동을 통해 극복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경제주의의 전형적 주장을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는 사회의 질서와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다른 어떤 것보다 자체 내의 상업과 제조업의 발전을 도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개인의 경제 행위에 대해 자유를 보장하기만 하면 인간 사회를 조화롭고 평화롭게 할 법과 정부, 그리고 다른 여러 가지 사회 제도가 저절로 생겨난다. ‘경제 발전이 민주 질서를 낳는다.’는 명제가 이 주장의 현대작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주장은 단순히 ‘경제주의’라고 하는 주장을 벗어나서, 인간의 역사 발전에 대한 이론, 그리고 미래에 대한 이론으로까지 발전한다는 측면에서 경제학이 역사 과학으로 발전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고 있다. 이것은 『국부론』이 단순한 경제주의로만 머무르지 않고 인간 사회에 대한 정치 경제학으로 자리를 잡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생각해 볼 문제
1. 박제가의 『북학의』는 실학적 태도를 취하고 있는 실용서이다. 그가 제시한 실학적 태도 중 현대 사회에서 적용하여 계승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2. 『북학의』의 서술 방식은 ‘중국 문물을 소개한 후 우리 것을 비판하고, 중국 문화를 도입했을 때의 이로움을 설파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서술 방식이 쉽게 빠질 수 있는 오류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3. 아담 스미스가 강조한 ‘보이지 않는 손’이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떻게 실현되고 있는지 예를 들어서 설명해 보고, 경제적 이기심이 갖는 긍정적 효과에 대해서 자신의 견해를 말해 보자. 4. 박제가는 중상주의를 강조하면서 조선이 발전되기를 원했고, 아담 스미스는 중상주의를 배격하면서 자유 방임주의가 실현되기를 원했다. 이들이 처한 역사적 상황은 달랐지만, 이들에 의해 자본주의가 싹트기 시작했다는 과정을 고려하면서 두 학자 간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말해 보자. |
출처 : 대학입시수능정보(재수,점수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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