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S. 밀의 『자유론』

1. 밀의 공리주의의 사상적 근간 - 자유


우리는 밀의 공리주의를, 벤담의 ‘양적 공리주의’와 구별하여 ‘질적 공리주의’라고 부른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것을 잘 드러내 주는 말이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라는 밀의 유명한 말이다. 그러나 공리주의에 대한 밀의 입장보다 더욱 중요한 문제는 그의 ‘공리주의’의 사상적 근간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이다. 공리주의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개개인의 자유가 전제되어야 한다. 자유가 전제되지 않는다면 합리적인 결과 예측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밀의 생각은 자유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형성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런 점에서도 우리는 밀이 말하는 ‘자유’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

『자유론(On Liberty)』에서 밀이 주장하는 기본적인 자유는 양심의 자유 즉 사상과 감정의 자유, 취미와 직업의 자유, 단결의 자유이다. 주지하다시피 이러한 자유를 존중하지 않는 사회는 그 사회가 어떤 종류의 사회이건 자유로운 사회가 아니다. 밀은 이와 같은 자유들이 ‘행복 추구의 자유’로 귀결된다고 보고, 자유라는 이름에 걸맞는 유일한 자유를 ‘우리들 자신의 방법으로 우리들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자유’ 라고 주장한다.

2. 사상과 토론의 자유

밀은 자유를 이와 같이 규정한 후에 『자유론』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사상과 토론의 자유’에 대해 제 2장에서 집중적으로 논의하고 있다.

만일 한 사람을 제외한 모든 인류가 같은 의견인데 단 한 사람이 그것에 반대하는 의견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인류가 한 사람을 침묵케 하는 것이 부당한 일임은, 그 한사람이 힘을 가지고 있어서 인류를 침묵케 하는 것이 부당한 것과 완전히 같은 것이다.

이 말 속에는 다수결의 원칙이 항상 좋은 것이 아니라는 뜻도 담겨 있다. 아니, 더욱 정확히 말하면 밀은 절대자에 의한 언론 통제보다 모든 일을 다수결의 원칙으로 해결하려는 다수파의 언론 탄압이 더욱 나쁘다고 보고 있다. 왜냐 하면 그와 같은 행위는 창조적인 소수의 의견을 말살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상과 토론의 자유가 세론(世論)과 무관하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밀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사상과 언론의 자유를 억압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만일 다른 사람의 의견이 바른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억압한다면 우리는 진리를 알 수 있는 기회를 잃게 된다. 그리고 그 의견이 틀린 것이라 하여 그것을 억압한다면 우리는 그 논쟁 속에서 얻을 수 있는 한층 더 명확한 진리를 알 수 없게 된다.

결국 의견 발표를 억압한다는 것은 전 인류에게서 행복을 빼앗는다는 말과 다를 바가 없다. 따라서 누구의 의견이 옳던 그르건 토론을 통해 그 진리성을 검토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 밀의 기본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3. 행복의 하나의 요소로서의 개성

『자유론』제 3장 ‘행복의 하나의 요소로서의 개성’ 에서 밀은 “독창성이 인간 사회에서 하나의 귀중한 요소임”을 지적하고 있다. 천재는 자유라는 분위기 속에서만 자유로이 호흡할 수 있기 때문에 밀은 독창성을 지닌 천재들을 확보하기 위한 토양 마련을 위해서라도 자유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천재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더 많은 개성을 지니고 있다. 자유가 없다면 천재는 개성을 발휘할 수가 없다. 천재가 사회에 기여하는 바를 생각한다면 사회 전체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자유는 절실히 필요한 것이다. 이 말에서도 우리는 자유가 행복을 위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식 할 수 있다.

사람에게는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본질적인 자유가 있다. 그러나 개인의 행복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의 행복을 위해 그러한 자유가 필요하다고 해도, 사회 구성원 개개인의 무조건적인 자유를 허용할 수는 없다. 아주 단순하게 생각하더라도,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는 자유는 엄청난 사회적 혼란을 야기하기 때문에 최소한의 제약이 필요하다. 사람들은 우선 서로의 이해를 침해하지 않아야 하며 다음으로 사람들은 사회와 사회 구성원들을 외부의 위험이나 간섭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자기 몫의 일을 해야 하며, 자기 몫만큼의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 따라서 사회는 이 두 조건을 이행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이행을 강제할 수 있다. 밀은 “사회가 할 수 있는 일은 이것뿐이다.”라고 말한다.

4. 개인에 대한 사회의 권위와 한계

『자유론』 제 4장 ‘개인에 대한 사회의 권위와 한계’에서 밀은 위와 같이 말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다음과 가은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어리석은 말이나 행동을 한다고 할 때,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우리는 그의 말과 행동을 막아야 하는가? 아니면 그대로 두어야 하는가?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말과 행동이 어리석은 말이나 행동이라고 해도, 심지어는 그 자신이 엄청난 손해를 보는 말과 행동이라고 해도,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만 않는다면’ 그것을 허용해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무엇이나 할 수 있는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억제든 억제는 그것이 억제라는 점에서 하나의 악이다.” 따라서 사회 역시 사회 구성원들이 서로의 이해를 침해하거나 사회의 존립을 해치는 행위가 아니라면 사회 구성원들을 억압하거나 탄압해서는 안 된다.

이런 생각을 밀고 나가면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정부의 역할이 적으면 적을수록 그 사회는 행복한 사회이다. 이와 같은 생각은 자유주의를 옹호하는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생각이다. “개인은 자연권적 권리로서의 자유 및 소유에 대한 권리를 가지며 어떤 사람이나 집단도 그에 대해서 함부로 행할 수 없는 것이 있다.”라는 ‘소유권적 정의’를 주장하는 노직(R. Nozick)과 같은 자유주의자도 마찬가지이다. 현대의 자유주의자들도 밀이 ‘자유론’에서 말하는 기본적인 이념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밀의 자유주의에 대한 옹호가 그의 ‘공리주의’로 이어질 수 밖에 없는 이유도 결국은 개인의 자유로운 결정을 그만큼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5. 자유론의 의지

밀의 『자유론』은 사회와 집단을 중시하는 사람들에게 개인의 가치, 더 나아가 개인이 향유해야 할 자유의 가치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역설적으로 보여 주었다는 데 그 의의가 있다. 이것은 밀이 개인보다 사회와 집단을 중시하는 사람들을 꾸짖는 듯한 경고의 말로 『자유론』을 마무리하고 있다는 데서도 알 수 있다. 그 말을 밀의 『자유론』을 소개하는 이 글에서도 결론 대신 사용해도 좋을 듯하다.

한 국가의 가치는 궁극적으로는 그 국가를 구성하고 있는 개인들의 가치이다. 개인들의 정신적 확충과 향상이라는 이익을 무시하고 세세한 사무를 처리하는 능력, 혹은 경험에서 얻게 되는 사이비 재능을 조금이라도 더 늘리기를 원하는 국가, 또는 국민을 위축시켜 국민을 자기 손으로 좌우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국민이 위축되어 있다면 어떠한 위대한 일도 성취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또한 국가가 모든 것을 희생시켜 이룩해 놓은 완전한 관료 기구도, 그 기구의 원활한 운행을 기하기 위해 배제해 버린 바로 그 활력의 결여 때문에 결국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저자 소개

존 스튜어트 밀(John Suart Mill)』은 1806년 런던에서 태어나 1873년 프랑스의 아비뇽에서 죽었다. 그의 아버지 제임스 밀은 공리주의(功利主義)를 창시한 벤담(Jeremy Bentham)의 제자였고, J.S. 밀은 아버지로부터 공리주의와 자유방임주의를 배웠다. 그는 다양한 저서를 남겼는데, 그 가운데 『논리학의 체계』, 『자유론』, 그리고 『공리주의』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고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나는 일을 마쳤다.”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생각해 볼 문제

1. 밀은 한 사람이라도 전체에 대한 반대 의견이 있다면 그의 의견을 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어리석은 말이나 행동을 한다고 할 때, 우리는 그를 막아야 하는지 아니면 그대로 두어야 하는지 친구들과 토론해 보자.
2. 정부의 역할이 적으면 적을수록 그 사회는 행복한 사회라고 자유주의자들은 말한다. 이러한 관점이 복지 국가를 지향하는 국가(예. 우리나라)에서는 어떤 문제점을 갖는지 우리 주변의 사례를 통해 생각해 보자.
3. ‘대한민국은 자유 민주주의 국가이다.’라고 할 때, 여기서의 ‘자유’의 한계를 밀의 관점에서 생각해보자.

 

 

[자료출처-대성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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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의 『사회 계약론』

1. 『사회 계약론』의 의의

루소는 사회의 온갖 부조리의 원인은 인간 본성이 악하기 때문이 아니라 사회 제도와 정치적 부조리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루소는 모든 사회 현상이 결국 정치에 따라 좌우된다고 생각했으므로, 정치 사상은 그의 사상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루소의 정치 사상을 집약해 놓은 것이 『사회 계약론』이다. 루소는 인간의 선한 본성과 자유를 토대로 국민들의 동의에 따라 국가가 형성된다고 보았다. 이러한 국가 권력의 근거는 국민들의 동의인 ‘사회 계약’에 의해서이다. 루소에 따르면 사회 계약의 구성적 실천 속에서 인간들은 이성과 도덕에 따르기로 약속하게 되는 것이다. 루소의 『사회 계약론』은 이상적인 사회 질서와 정부 수립을 논하면서 오늘날 민주주의가 지향해야 할 목표를 제시해 주고 있다.

2. 루소 정치 사상의 시대적 배경

루소가 살던 시대는 절대주의 말기였다. 봉건적 토지 소유와 신분적 지배를 기반으로 하고 있던 당시의 프랑스 절대 왕정은 겉으로는 험한 위세를 자랑했지만 안으로는 날이 갈수록 심한 사회적 갈등과 모순을 겪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루소는 모든 사회악(社會惡)의 근원이 ‘절대주의’라는 사회 제도에 있다고 생각했다. 소수의 특권자들을 위하여 선량한 절대 다수의 국민들을 고통 받게 하는 절대 왕정이야말로 모든 악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루소는 ‘인간의 자유를 보장하는 사회 제도는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3. 루소의 자유와 평등

인간의 자유를 보장하는 사회 제도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먼저, 루소가 생각하는 인간의 자유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루소는 인간의 자유를 두 가지로 나눈다. 그것은 자연적 자유와 사회적 자유이다. 자연적 자유란 개인의 힘 이외에는 어떤 것에 의해서도 제한될 수 없고, 얻고자 하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 무제한의 자유를 말한다. 이러한 고립된 동물로서의 자연적 자유는 사회 속에서 현실성이 없지만 실현되어야 할 자유의 원형으로 존재한다. 이에 반해 사회적 자유는 시민적 자유로 구체화되는데 자신이 만든 법률에 복종하면서 자기 자신이 주인이 되는 것이다. 사회적 자유는 ‘공동의 자유’라는 성격을 내포하므로 이러한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시민은 자신이 속한 사회가 정당한 법을 가졌을 때 자유롭게 된다.

이러한 루소의 인간 본성론에서 또 다른 한편으로 평등 개념이 도출된다. 인간은 홀로 존재하는 개체로서는 ‘참된 인간’이 될 수 없고 사회 속에서만 도덕적 존재가 될 수 있다. 도덕성에 의한 인간은 사회에서 자유로운 개인들의 논의를 가능하게 하고 이로부터 존재의 통일성을 부여받을 수 있다. 여기에서 사회 상태의 인간은 전제의 일부로 통합되는데 이것이 곧 참된 인간이다.

이처럼 루소에게 인간의 자유는 인간의 본성이고 자격이며 인간으로서의 가치이다. 그것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양도되거나 포기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결코 억압될 수 없는 존엄한 가치였다. 다라서 자유를 보장하는 문제는 루소에게 가장 근본적인 것이었다. 루소가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로 태어났다.’고 한 것은 그의 사상의 기본적인 전제가 된다.

4. 국가 권력의 근거는 무엇인가?

인간 본성으로서 정치적 자유가 겉으로 드러나게 되면 반드시 국가 권력의 권위와 충돌하게 되므로 자유는 곧 자유와 권력의 문제가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권력이 자유를 보장하게 되는가? 국가 권력의 근거가 무엇인가? 루소 사상의 기본적 출발점은 이처럼 권력의 정당성 문제로 집약된다.

국가 권력의 근거에 관하여 루소는 독특한 정치 이론을 제시하고 있다. ‘국가는 동의에 따라 성립된다.’ 즉 우리가 복종할 의무가 있는 정당한 국가 권력은 국민들의 자유로운 의지에 따른 약속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그에 다르면 인간 상호간에 자연적, 육체적 불평등이 있기는 하지만 인간은 본질적으로 평등하기 때문에 서로 평등한 조건 위에서 ‘공동의 힘으로 공동의 이익을 실현할 것’을 약속하게 되고 이 약속으로부터 개개의 인간들을 대신해 ‘정신적이고도 집합적인 하나의 단체’가 형성되는데, 이것이 곧 ‘국가’라는 것이다.

이처럼 국가 권력의 근거는 국가 구성원들의 자유로운 동의에 따른 사회 계약이다. 그런데 국가 권력이 이렇게 구성되고 행사될 때 개인의 자유와 이익을 올바로 보장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그는 사회 계약에 따라 성립된 국가 권력이 가장 상위에 위치한 ‘일반 의지의 지도’에 다를 때 비로소 개인의 자유와 이익을 보장하고 나아가 전체의 목적도 수행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5. 일반 의지란 무엇인가?

일반 의지는 루소의 독창적이고도 핵심적인 개념으로 국가 구성원의 동질성을 전제로 성립될 수 있다. 동질적인 사회 집단의 구성원들이 다 같이 바라는 공공의 복지와 의지가 곧 일반 의지이다. 일반 의지는 공동체 전체의 의지이므로 ‘언제나 공동의 이익만을 지향하고 항상 옳은 것’이며 그것은 개인의 사적이익에 반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시만 사회의 정당성은 오직 일반 의지의 차원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일반 의지는 구성원들의 입장에서 볼 때 항상 정장하고 항상 공공의 이익을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파괴되거나 분할할 수 없는 절대성을 갖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루소는 특수 의지의 단순한 양적인 합인 전체 의지를 일반 의지와 구분한다.

일반 의지가 공동체의 일반적 이익을 의미하는 것이고 항상 평등을 지향하는 데 반에 특수 의지는 개인의 사적 이익만을 추구하므로 본성상 사회의 정당한 기초가 될 수는 없다. 특수 의지가 공공 복지를 지향하는 일반 의지에 우선할 때 사회의 동질성은 무너지고 사회는 분열되어 국가의 안정성은 유지되기 어렵게 된다. 그러므로 시민으로서 가지는 의지와 개인으로서 가지는 의지가 다른 것이라면 공동체 내에서는 이들의 조화가 필요하다. 자유로운 인간들의 결합에 의해 형성된 일반 의지가 지배하는 사회는 인간 본성에 합당한 정당한 사회이기 때문이다.

일반 의지에 대한 복종은 타자와의 관련선상에서 자신의 이익을 결정하는 덕성의 표현이며 시민 사회가 가능하게 되는 도덕적 자유인 것이다. 루소에게 조국을 만드는 것은 영토나 국경, 법적 소속성이라는 형식적 속성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 실현을 위해 결합된 공동체와 그 구성원과의 관계라는 도덕적 측면이다. 그러므로 루소의 일반 의지가 구현되는 이상적인 정치 공동체의 구상은 개인의 자유와 완전한 사회 질서의 이상을 화해시키고자 하는 시도였다.

인민에 의해 형성된 일반 의지는 입법권으로 나타나고 그것의 실현은 집행권으로서 그 권리는 정부가 가진다. 일반 의지란 동질적인 사회에 토대를 둔 국가의 최고 이념이라고 할 수 있고 이러한 일반 의지를 행사하는 것이 주권이다. 다시 말해서 국가에서 일반 의지를 집행하는 최고 권력이 주권인 것이다. 그러므로 주권은 일반 의지의 주체인 모든 사회 구성원, 즉 인민의 주권이 되나. 주권이 군주에서 인민으로 옮겨간 것은 획기적인 의의를 가진다.

결국 루소의 일반 의지는 단순히 권력을 장악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서로 이해관계를 일치시킬 수 있을 만큼 평등하고 동질적인 사회 구성원들이 함께 지향하는 공동의 목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평등한 사회가 구현되지 않는 한 일반 의지는 나타나기 어렵고 일반 의지를 실행하지 않는 구각 권력은 정당한 권력이 될수 없다. 중요한 점은 권력 장악 그 자체가 아니라 권력이 일반 의지를 실행하고 있는지의 문제이다.

저자 소개

쟝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 ; 1712~1778)』는 1712년 6월 28일 즈네브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종교 전쟁 당시 프랑스에서 이주해 온 이래 거의 100년 이상을 즈네브에서 살았지만 경제적으로 그리 넉넉하지 못한 생활을 하였다. 루소는 태어난 지 불과 9일 만에 어머니를 여의고 형과 함께 숙모의 손에서 자라면서 내성적이고 수동적인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그 후 아버지가 즈네브를 떠나고 형마저 집을 나가, 가정을 잃어버린 루소는 모험과 방랑 생활을 시작한다. 비록 아무도 도와주는 이 없는 고아에 불과했지만 선량한 마음으로 일하고자 했던 그에게 사회의 부조리와 특권 계급의 온갖 만행은 인간 본성과 사회 제도에 대한 그의 사상적 기반을 형성하게 해 주었다.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그는 독학으로 철학과 문학뿐 아니라 음악과 자연 과학 및 신학에 대해서도 상당한 소양을 쌓았다. 그 후 가정 교사와 프랑스 대사의 비서일을 하면서 모든 사물은 결국 정치에 따라 좌우되고 국민은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정부의 성질에 따라 제한받는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그는 『학문과 예술론』 으로 디종의 아카데미 현상 모집에 합격하면서 파리의 관심을 받게 된다. 그 뒤 『인간 불평등 기원론』, 『정치 경제론』을 발표하면서, 그의 사상을 하나하나 정리해 갔다. 1758년 이후로 그는 저작에 전념하여 1761년 여름에는 『에밀』과 『사회 계약론(Du contratsocial)』을 완성하였다. 이 두 저작은 오늘날 무소를 불멸의 사상가로 만들어 주었지만 현실적으로는 그에게 심한 박해를 가져다 주었다. 현실의 개혁을 부르짖는 무소는 다시 방랑 생활을 하면서 1770년에 『고백록』을, 1776년에는 『대화ㅡ루소, 장 자크를 심판하다』를 완성하였으며 그 해 가을부터 『고독한 산보자의 꿈』을 쓰기 시작하였으나 1778년 7월 2일 글을 다 끝내지도 못한 채 생애를 마감하였다. 루소는 개인적으로 무질서하고 불안정한 방랑의 생활을 계속하였으나 자유와 인간애에 기초하여 끊임없이 절대주의의 부조리와 싸워 온 위대한 인물이다. 프랑스 혁명 이 후 구민 공회가 루소를 ‘위인의 전당’에 묻으면서 그의 위업이 후대에 높은 평가를 받게 되었다.

생각해 볼 문제

1. 루소는 일반 의지, 전체 의지, 특수 의지 등을 각기 구별하여 사용하고 있다. 각각의 의지들이 무엇을 뜻하는지 생각해 보고 그 예를 찾아보자.
2. 마르크스는 국가란 지배자와 피지배자 간의 갈등 속에서 생겨난 지배자의 억압, 착취 수단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을 루소의 사회 계약론의 관점에서 비판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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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

『유토피아』의 핵심 내용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발달하기 이전인 근대 이전의 시대에도 역시, 아무 데도 존재하지 않는 이상향을 그리는 갖가지 유토피아 사상이 있었는데,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가 그 대표적인 저술이다. 나아가 『유토피아』는 지금까지의 모든 유토피아 사상의 원천이 되고 있는 저서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 모어는 대양 한가운데의 외딴섬 『유토피아』를 찾아간 포르투칼인의 말을 받아 적는 식으로 이상향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모어가 『유토피아』를 집필했던 그 당시의 유럽은 어디나 할 것 없이 종교개혁에서 야기된 정치 문제로 시끄러운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각각의 종교적 파벌이 지닌 정치적 야심은 실제로 그 당시에 일어나고 있었던 근대 경제 체제, 즉 자본주의 체제가 낳고 있었던 중대한 경제 문제와 그 의미를 은폐시키고 있었다. 모어는 이 문제를 들고 나와 근대 경제 체제의 비인간적인 양상을 신랄하게 비판하고자 했다. 즉 이 책을 쓴 그의 의도는, 전쟁이 끊일 새 없이 계속되고, 양모 공업의 발달과 함께 빈부의 격차와 도시적 퇴폐가 확대대고 있던 당시 영국의 현실을 비판하는 데 있었다. 그런데 유토피아(utopia)란 단어는 그리스어의 우(u, 없다)와 토포스(topos, 장소)를 가지고 모어가 만들어 낸 것으로서 ‘아무 데도 없는 곳’이라는 뜻이다. 또한 이 책의 원제목은 『사회생활의 최선의 상태에 대한, 그리고 유토피아라고 불리는 새로운 섬에 대한 유익하고 즐거운 저서』인데 이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이 책에서 그리고 있는 유토피아는 비록 현실 속에는 ‘아무데도 없는 곳’이지만 인류가 반드시 도달해야 할 ‘이상향’임을 강력하게 암시하고 있다.

이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데 제 1부는 모어와 그를 방문한 라파엘이라는 학자와의 대화 형식으로 쓰여져 있다. 라파엘은 외국의 여러 문물을 많이 접하고 돌아온 인물로서, 대부분 그의 입을 통해 당시 영국 사회의 비참한 현실과 죄악이 낱낱이 폭로되고 있다. 그는 귀족들을 수벌처럼 남의 노동으로 하는 일 없이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로 평하며, 소작인을 쥐어 짜먹고 있다고 보았다. 또, 귀족이나 지주들이 양을 키우기 위해 경작지를 목장으로 만드는데 대해 신랄한 비판을 퍼붓기도 한다. 이는 바로 당시 영국에서 광범위하게 행해지고 있었던 '인클로저 운동[종획운동]'에 대한 비판이다. 당시 영국에서는 양모 공업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양의 방목지를 확보하기 위해 기존의공유지를 사유화하는 운동이 광범위하게 벌어졌고 그에 관한 법령도 제정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인클로저 운동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그 곳에 농사를 짓던 농민들이 쫓겨나 유랑생활이나 거지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책의 제 1부에서는 그와 같은 상황을 비판하면서 여러 병폐를 제거하기 위해 부자들이 모든 것을 매점매석하지 못하도록 규제하고 땅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정직한 생업을 갖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절도 행위를 사형으로 다스리는 제도에 대해서, 남의 돈을 훔쳤다고 해서 목숨을 잃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지적한다. 모어는 재판 제도, 전쟁 등에 대해서도 라파엘의 입을 빌려 비판하는데, 특히 왕은 그 나태성이나 자만성을 바로잡아야 하며 남에게 폐를 끼치지 말고 스스로의 수입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촉구한다. 또한 왕은 그의 신하들을 올바르게 가르쳐서 범죄를 예방해야지, 범죄 해우이가 만연하도록 해 놓고 그 다음에 처벌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혹독하게 비판한다. 그 밖에도 당시의 제도에 대한 여러 가지 문제점을 제기하며, 이런 문제를 해결하며 살고 있는 유토피아라는 곳에 대한 얘기가 진행된다.
이 책의 제 2부는 다음과 같은 9개의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번호는 편의상 매겨 놓은 것으로서 원저(原著)에는 번호가 없다.)

1. 유토피아 사람들이 사는 섬 / 2. 도시와 아마우로툼 / 3. 공무원 제도 / 4. 생업 / 5. 사회관계 / 6. 여행 기타 / 7. 노예 제도 기타 / 8. 군사 / 9. 유토피아의 종교

1. 유토피아 사람들이 사는 섬

유토피아 사람들이 사는 섬은 자연적으로나 인공적으로나 요새화되어 있어 조그만 힘으로도 외부의 침략을 막을 수 있다. 농촌에는 도처에 서로 적당한 간격을 두고 농기구들이 잘 갖추어져 있는 농가들이 있으며, 이 농가에는 도시에서 사람들이 번갈아 와서 산다. 매년 세대원의 반수가 도시로 돌아가고 각 개인은 2년마다 교대로 농촌과 도시에서 사는 것이다. 한 농가의 인원은 남녀를 합해서 40명 이상이며, 30호의 농가를 한 단위로 하여 한 부족을 이루고 이것을 ‘필라르크’ (phylarch)라는 우두머리가 다스린다.

2. 도시와 아마우로툼

시가는 교통과 방풍에 알맞도록 잘 짜여져 있다. 또한 집들은 모두 길을 향한 문을 가지고 있고, 뜰에 이르는 뒷문을 가지고 있다. 그 문들은 쉽게 열리고 스스로 닫히는 문들이라서 누구나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다. 즉, 아무것도 사유 재산이란 없는 것이다. 이 곳 사람들은 10년마다 집단적으로 집을 서로 바꾼다. ‘아마우로툼’(Amaurotum)은 유토피아의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는 수도로서 모든 점에서는 다른 모든 도시들과 같지만, 이곳에서 의회가 열린다는 것이 이 도시의 특징이다.

3. 공무원 제도

시민들은 삼십 가구를 한 단위로 하여 한 사람의 공무원을 뽑는데, 그들을 ‘필라르크’라고 부른다. 열 명의 필라르크와 그 필라르크들이 대표하는 가구에 대해 ‘프로토필라르크’(protophylarch)라 불리는 공무원이 있다. 필라르크는 모두 200명인데, 이들 모두는 비밀 투표로 뽑는다. 공통의 이해가 걸린 문제를 프로토필라르크 회의나 총회 이외의 장소에서 토의하면 사형에 해당하는 벌을 받는다.

4. 생업

주민의 기본적 생업은 농업인데, 성별에 관계없이 시민이면 누구나 농업에 종사하게 되어 있다. 각 개인은 그 외에 모직 · 면직 기술이나 석공 · 철공 · 목공 등의 일을 한 가지씩 배우게 되어 있다. 이들은 하루에 여섯 시간만을 일하며, 잠자리에는 여덟 시경에 들어 여덟 시간의 수면을 취한다. 저녁식사가 끝난 다음에는 한 시간 동안 오락을 즐기는데 여름에는 뜰에서, 겨울에는 식사를 하는 공공 회당에서 즐긴다. 유토피아에 사는 사람들 중 노동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서 노동을 면제받은 사람은, 학문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 등 전제 인구의 0.5% 이하이다.

5. 사회 관계

도시는 가정을 기초로 이루어지며, 인구의 과소 현상이나 과잉 현상이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하여 어떤 가정도 성인의 수가 열 명 이상 열여섯 명 이하가 넘지 않도록 규제한다. 또한, 한 가정에 초과 인원이 생기면 이것을 수가 적은 다른 가정으로 옮기며, 도시 전제의 가정을 합쳐 규정된 한도를 넘게 되면, 그 남은 만큼의 성인 인구를 인구가 적은 다른 도시에 보내서 그 곳의 수를 채우게 된다.

6. 여행 기타

여행은 필라르크와 프로토필리르크에게 허가를 받아야만 할 수 있다. 여행은 단체로 떠나는데, 이 때 시장이 서명한 여행 허가 증명서를 가지고 가며 거기에는 돌아올 날짜가 적혀 있다. 한편, 유토피아의 주민들은 옷이나 보석, 돈에 대한 욕망이 없고 남녀 관계에서는 엄격한 도덕을 지키고 건강과 자연 감상 및 학문에서 즐거움을 찾는다.

7. 노예 제도 기타

유토피아에서 노예란 전쟁 포로라 하더라도 유토피아 사람들이 직접 싸우다가 잡은 포로도 아니고 세습적인 노예도 아니며 외국의 노예 시장에서 사들인 자들도 아니다. 여기서 노예는 자기 나라의 죄수들이거나 아니면 외국의 사형수들이다. 이 중 전자가 더 나쁜 대우를 받는데, 왜냐하면 도덕적인 생활을 영위하도록 훌륭한 교육을 받고서도 죄를 범한다는 것은 다른 어떤 경우보다 더 나쁜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남녀 관계는 엄격하게 통제되어 부부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혼할 수 없으며 평생을 해로해야만 한다.

8. 군사

유토피아인들이 전쟁을 수행하는 유일한 때는 미리부터 충분히 상의해왔고, 또한 전쟁의 원인이 정당하며, 보상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해서 전쟁수단밖에 남지 않은 경우에 한한다. 그렇게 평화적인 방법이 불가능할 때에는, 앞으로는 겁이 나서 같은 짓을 다시 하지 못하도록 엄중히 처벌한다. 전쟁을 수행하면서 그들은 칭송이나 명예를 얻으려 하기보다는 위험을 줄이기 위해 더욱 노력한다.

9. 유토피아의 종교

유토피아에는 여러 가지 종교가 있는데, 이것은 이 나라 전체에서나 각 도시에서나 마찬가지이다. 어떤 사람들은 태양이나 달을 신으로 모시고, 또 어떤 사람들은 여러 유성(遊星)을 섬기기도 한다. 그런데 대다수의 사람들은 물질이 아닌 권능으로서의 어떤 유일한 존재를 믿으며 이 존재를 그들은 ‘아버지’라고 부른다. 유토피아인들은 설령 누가 그리스도교를 믿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믿는 것을 막지는 않는다. 물론 개종의 자유도 있다.

모어는 이 책에서 “섬 전체의 생활은 단일한 가족과 같은 것입니다.”라고 쓰고 있지만, 통제에 의해서 평등을 보장하는 이러한 이상 사회는 결국 잃어버린 과거의 세계를 추구하는 것이었다. 농업적 생활로 돌아가는 것과 결부하여 사유 재산 제도의 폐지와 화폐의 폐지를 주장한 것이 바로 그 증거이다. 모어는 라파엘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래서 사유 재산권이 추방되지 않는 한 평등하고 공평한 분배는 이루어지기 어렵고 우리들 사이에 완전한 행복도 확립되기 어렵다는 것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사유 재산권이 존속하는 한 대다수의 인간의 등에는 가난과 고난이라는 피할 길 없는 무거운 짐이 언제까지나 남아 있겠지요.”

이런 점에 근거해 볼 때, 모어가 생각한 유토피아는 근대화와 자본주의화에 저항하는 보수적 심성에 기반을 둔 근대화 비판이었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근데 이전 시기의 유토피아의 전형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저자 소개

토마스 모어(Sir Thomas More : 478~1535)』는 영국의 사상가이자 정치가이며 근세 유토피아 사상의 대표자이기도 하다. 런던에서 판사의 아들로 출생한 그는 14세에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하고, 이후 국회의원, 왕의자문관, 하원 의장, 대법관 등의 권력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그러나 헨리 8세가 앤과 결혼하여 앤의 소생을 왕이 계승자로 한다는 법안을 통과시킬 때, 이에 반대하여 반역죄로 사형 선고를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유토피아(Utopia, 1516)』는 토마스 모어의 사회 풍자 소설로서, 사유 재산제도 폐지와 도덕 혁명을 핵심으로 하는 그의 유토피아 사상을 담고 있다. 이 책이 쓰여 질 당시 영국에서는, 한편으로 자본주의가 성장하고 있었던 반면, 또 한편으로는 거지와 실업자가 들끓었는데 이런 사회적 모순 속에서 이상향을 추구하는 그의 사상이 형성되었다.

생각해 볼 문제

1. 『유토피아』의 제도에서 볼 수 있는 장단점을 오늘날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자.
2. 토마스 모어가 『유토피아』를 이상향의 사회로 생각했다면, 허균은 『홍길동전』에서 『율도국』을 이상 사회로 제시했다. 모어의 『유토피아』와 허균의 『율도국』의 공통점과 차이점에 대해 생각해 보자.
3. 인간이 꿈꾸는 모든 이상 세계와 실제 현실 세계의 근본적 차이점에 대해 친구들과 구체적인 예를 들어 가면서 이야기해 보자.

 

 

[자료출처-대성학원]

출처 : 대학입시수능정보(재수,점수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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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 :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

『유토피아』의 핵심 내용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발달하기 이전인 근대 이전의 시대에도 역시, 아무 데도 존재하지 않는 이상향을 그리는 갖가지 유토피아 사상이 있었는데,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가 그 대표적인 저술이다. 나아가 『유토피아』는 지금까지의 모든 유토피아 사상의 원천이 되고 있는 저서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 모어는 대양 한가운데의 외딴섬 『유토피아』를 찾아간 포르투칼인의 말을 받아 적는 식으로 이상향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모어가 『유토피아』를 집필했던 그 당시의 유럽은 어디나 할 것 없이 종교개혁에서 야기된 정치 문제로 시끄러운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각각의 종교적 파벌이 지닌 정치적 야심은 실제로 그 당시에 일어나고 있었던 근대 경제 체제, 즉 자본주의 체제가 낳고 있었던 중대한 경제 문제와 그 의미를 은폐시키고 있었다. 모어는 이 문제를 들고 나와 근대 경제 체제의 비인간적인 양상을 신랄하게 비판하고자 했다. 즉 이 책을 쓴 그의 의도는, 전쟁이 끊일 새 없이 계속되고, 양모 공업의 발달과 함께 빈부의 격차와 도시적 퇴폐가 확대대고 있던 당시 영국의 현실을 비판하는 데 있었다. 그런데 유토피아(utopia)란 단어는 그리스어의 우(u, 없다)와 토포스(topos, 장소)를 가지고 모어가 만들어 낸 것으로서 ‘아무 데도 없는 곳’이라는 뜻이다. 또한 이 책의 원제목은 『사회생활의 최선의 상태에 대한, 그리고 유토피아라고 불리는 새로운 섬에 대한 유익하고 즐거운 저서』인데 이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이 책에서 그리고 있는 유토피아는 비록 현실 속에는 ‘아무데도 없는 곳’이지만 인류가 반드시 도달해야 할 ‘이상향’임을 강력하게 암시하고 있다.

이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데 제 1부는 모어와 그를 방문한 라파엘이라는 학자와의 대화 형식으로 쓰여져 있다. 라파엘은 외국의 여러 문물을 많이 접하고 돌아온 인물로서, 대부분 그의 입을 통해 당시 영국 사회의 비참한 현실과 죄악이 낱낱이 폭로되고 있다. 그는 귀족들을 수벌처럼 남의 노동으로 하는 일 없이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로 평하며, 소작인을 쥐어 짜먹고 있다고 보았다. 또, 귀족이나 지주들이 양을 키우기 위해 경작지를 목장으로 만드는데 대해 신랄한 비판을 퍼붓기도 한다. 이는 바로 당시 영국에서 광범위하게 행해지고 있었던 '인클로저 운동[종획운동]'에 대한 비판이다. 당시 영국에서는 양모 공업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양의 방목지를 확보하기 위해 기존의공유지를 사유화하는 운동이 광범위하게 벌어졌고 그에 관한 법령도 제정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인클로저 운동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그 곳에 농사를 짓던 농민들이 쫓겨나 유랑생활이나 거지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책의 제 1부에서는 그와 같은 상황을 비판하면서 여러 병폐를 제거하기 위해 부자들이 모든 것을 매점매석하지 못하도록 규제하고 땅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정직한 생업을 갖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절도 행위를 사형으로 다스리는 제도에 대해서, 남의 돈을 훔쳤다고 해서 목숨을 잃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지적한다. 모어는 재판 제도, 전쟁 등에 대해서도 라파엘의 입을 빌려 비판하는데, 특히 왕은 그 나태성이나 자만성을 바로잡아야 하며 남에게 폐를 끼치지 말고 스스로의 수입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촉구한다. 또한 왕은 그의 신하들을 올바르게 가르쳐서 범죄를 예방해야지, 범죄 해우이가 만연하도록 해 놓고 그 다음에 처벌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혹독하게 비판한다. 그 밖에도 당시의 제도에 대한 여러 가지 문제점을 제기하며, 이런 문제를 해결하며 살고 있는 유토피아라는 곳에 대한 얘기가 진행된다.
이 책의 제 2부는 다음과 같은 9개의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번호는 편의상 매겨 놓은 것으로서 원저(原著)에는 번호가 없다.)

1. 유토피아 사람들이 사는 섬 / 2. 도시와 아마우로툼 / 3. 공무원 제도 / 4. 생업 / 5. 사회관계 / 6. 여행 기타 / 7. 노예 제도 기타 / 8. 군사 / 9. 유토피아의 종교

1. 유토피아 사람들이 사는 섬

유토피아 사람들이 사는 섬은 자연적으로나 인공적으로나 요새화되어 있어 조그만 힘으로도 외부의 침략을 막을 수 있다. 농촌에는 도처에 서로 적당한 간격을 두고 농기구들이 잘 갖추어져 있는 농가들이 있으며, 이 농가에는 도시에서 사람들이 번갈아 와서 산다. 매년 세대원의 반수가 도시로 돌아가고 각 개인은 2년마다 교대로 농촌과 도시에서 사는 것이다. 한 농가의 인원은 남녀를 합해서 40명 이상이며, 30호의 농가를 한 단위로 하여 한 부족을 이루고 이것을 ‘필라르크’ (phylarch)라는 우두머리가 다스린다.

2. 도시와 아마우로툼

시가는 교통과 방풍에 알맞도록 잘 짜여져 있다. 또한 집들은 모두 길을 향한 문을 가지고 있고, 뜰에 이르는 뒷문을 가지고 있다. 그 문들은 쉽게 열리고 스스로 닫히는 문들이라서 누구나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다. 즉, 아무것도 사유 재산이란 없는 것이다. 이 곳 사람들은 10년마다 집단적으로 집을 서로 바꾼다. ‘아마우로툼’(Amaurotum)은 유토피아의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는 수도로서 모든 점에서는 다른 모든 도시들과 같지만, 이곳에서 의회가 열린다는 것이 이 도시의 특징이다.

3. 공무원 제도

시민들은 삼십 가구를 한 단위로 하여 한 사람의 공무원을 뽑는데, 그들을 ‘필라르크’라고 부른다. 열 명의 필라르크와 그 필라르크들이 대표하는 가구에 대해 ‘프로토필라르크’(protophylarch)라 불리는 공무원이 있다. 필라르크는 모두 200명인데, 이들 모두는 비밀 투표로 뽑는다. 공통의 이해가 걸린 문제를 프로토필라르크 회의나 총회 이외의 장소에서 토의하면 사형에 해당하는 벌을 받는다.

4. 생업

주민의 기본적 생업은 농업인데, 성별에 관계없이 시민이면 누구나 농업에 종사하게 되어 있다. 각 개인은 그 외에 모직 · 면직 기술이나 석공 · 철공 · 목공 등의 일을 한 가지씩 배우게 되어 있다. 이들은 하루에 여섯 시간만을 일하며, 잠자리에는 여덟 시경에 들어 여덟 시간의 수면을 취한다. 저녁식사가 끝난 다음에는 한 시간 동안 오락을 즐기는데 여름에는 뜰에서, 겨울에는 식사를 하는 공공 회당에서 즐긴다. 유토피아에 사는 사람들 중 노동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서 노동을 면제받은 사람은, 학문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 등 전제 인구의 0.5% 이하이다.

5. 사회 관계

도시는 가정을 기초로 이루어지며, 인구의 과소 현상이나 과잉 현상이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하여 어떤 가정도 성인의 수가 열 명 이상 열여섯 명 이하가 넘지 않도록 규제한다. 또한, 한 가정에 초과 인원이 생기면 이것을 수가 적은 다른 가정으로 옮기며, 도시 전제의 가정을 합쳐 규정된 한도를 넘게 되면, 그 남은 만큼의 성인 인구를 인구가 적은 다른 도시에 보내서 그 곳의 수를 채우게 된다.

6. 여행 기타

여행은 필라르크와 프로토필리르크에게 허가를 받아야만 할 수 있다. 여행은 단체로 떠나는데, 이 때 시장이 서명한 여행 허가 증명서를 가지고 가며 거기에는 돌아올 날짜가 적혀 있다. 한편, 유토피아의 주민들은 옷이나 보석, 돈에 대한 욕망이 없고 남녀 관계에서는 엄격한 도덕을 지키고 건강과 자연 감상 및 학문에서 즐거움을 찾는다.

7. 노예 제도 기타

유토피아에서 노예란 전쟁 포로라 하더라도 유토피아 사람들이 직접 싸우다가 잡은 포로도 아니고 세습적인 노예도 아니며 외국의 노예 시장에서 사들인 자들도 아니다. 여기서 노예는 자기 나라의 죄수들이거나 아니면 외국의 사형수들이다. 이 중 전자가 더 나쁜 대우를 받는데, 왜냐하면 도덕적인 생활을 영위하도록 훌륭한 교육을 받고서도 죄를 범한다는 것은 다른 어떤 경우보다 더 나쁜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남녀 관계는 엄격하게 통제되어 부부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혼할 수 없으며 평생을 해로해야만 한다.

8. 군사

유토피아인들이 전쟁을 수행하는 유일한 때는 미리부터 충분히 상의해왔고, 또한 전쟁의 원인이 정당하며, 보상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해서 전쟁수단밖에 남지 않은 경우에 한한다. 그렇게 평화적인 방법이 불가능할 때에는, 앞으로는 겁이 나서 같은 짓을 다시 하지 못하도록 엄중히 처벌한다. 전쟁을 수행하면서 그들은 칭송이나 명예를 얻으려 하기보다는 위험을 줄이기 위해 더욱 노력한다.

9. 유토피아의 종교

유토피아에는 여러 가지 종교가 있는데, 이것은 이 나라 전체에서나 각 도시에서나 마찬가지이다. 어떤 사람들은 태양이나 달을 신으로 모시고, 또 어떤 사람들은 여러 유성(遊星)을 섬기기도 한다. 그런데 대다수의 사람들은 물질이 아닌 권능으로서의 어떤 유일한 존재를 믿으며 이 존재를 그들은 ‘아버지’라고 부른다. 유토피아인들은 설령 누가 그리스도교를 믿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믿는 것을 막지는 않는다. 물론 개종의 자유도 있다.

모어는 이 책에서 “섬 전체의 생활은 단일한 가족과 같은 것입니다.”라고 쓰고 있지만, 통제에 의해서 평등을 보장하는 이러한 이상 사회는 결국 잃어버린 과거의 세계를 추구하는 것이었다. 농업적 생활로 돌아가는 것과 결부하여 사유 재산 제도의 폐지와 화폐의 폐지를 주장한 것이 바로 그 증거이다. 모어는 라파엘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래서 사유 재산권이 추방되지 않는 한 평등하고 공평한 분배는 이루어지기 어렵고 우리들 사이에 완전한 행복도 확립되기 어렵다는 것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사유 재산권이 존속하는 한 대다수의 인간의 등에는 가난과 고난이라는 피할 길 없는 무거운 짐이 언제까지나 남아 있겠지요.”

이런 점에 근거해 볼 때, 모어가 생각한 유토피아는 근대화와 자본주의화에 저항하는 보수적 심성에 기반을 둔 근대화 비판이었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근데 이전 시기의 유토피아의 전형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저자 소개

토마스 모어(Sir Thomas More : 478~1535)』는 영국의 사상가이자 정치가이며 근세 유토피아 사상의 대표자이기도 하다. 런던에서 판사의 아들로 출생한 그는 14세에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하고, 이후 국회의원, 왕의자문관, 하원 의장, 대법관 등의 권력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그러나 헨리 8세가 앤과 결혼하여 앤의 소생을 왕이 계승자로 한다는 법안을 통과시킬 때, 이에 반대하여 반역죄로 사형 선고를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유토피아(Utopia, 1516)』는 토마스 모어의 사회 풍자 소설로서, 사유 재산제도 폐지와 도덕 혁명을 핵심으로 하는 그의 유토피아 사상을 담고 있다. 이 책이 쓰여 질 당시 영국에서는, 한편으로 자본주의가 성장하고 있었던 반면, 또 한편으로는 거지와 실업자가 들끓었는데 이런 사회적 모순 속에서 이상향을 추구하는 그의 사상이 형성되었다.

생각해 볼 문제

1. 『유토피아』의 제도에서 볼 수 있는 장단점을 오늘날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자.
2. 토마스 모어가 『유토피아』를 이상향의 사회로 생각했다면, 허균은 『홍길동전』에서 『율도국』을 이상 사회로 제시했다. 모어의 『유토피아』와 허균의 『율도국』의 공통점과 차이점에 대해 생각해 보자.
3. 인간이 꿈꾸는 모든 이상 세계와 실제 현실 세계의 근본적 차이점에 대해 친구들과 구체적인 예를 들어 가면서 이야기해 보자.

 

 

[자료출처-대성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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홉스의 『리바이어던』

1. 홉스의 『리바이어던』이란 무엇인가?

철학자들은 어느 시대나 그 시대의 중요한 문제를 분석하고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다. 철학자이며 수학자인 홉스 또한 17세기 당시 유럽 사회의 무질서를 종식시키고 계속적으로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 나름대로 방법을 제시하였다. 그것은 ‘인간은 어떠한 본성을 가지고 있는가.’에서 출발하여 ‘국가 권력의 근거는 무엇인가.’라는 국가 권력의 정당성 문제로 나아가고 있다. 즉, 근대 자연법 사상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홉스는 인간 본성과 자연 상태에 대한 이론적 구성을 통해 국가 권력을 정당화하면서 근대적 권리와 의무에 관한 이론을 전개하고 있다.

홉스의 『리바이어던』은 인민과 군주의 정당한 통제 관계를 제시하며 세계를 전망하고 있다. 근대 민주주의의 기초를 쌓은 그는 국가를 거대한 괴물인 ‘리바이어던(Leviathan)’으로 상정하고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서로 잡아먹으려는 이리에 비유하면서 그 탐욕을 억제하기 위한 규제로서 통치자와 피치자(被治者) 간의 ‘계약’을 제시한다. 탐욕스러운 인간의 이기심에 대한 공포를 규제할 수 있는 대상이 곧 국가인 ‘리바이어던’인 것이다.

2. 홉스의 인간 본성관은 어떠한가?

홉스에 의하면 인간의 모든 정념(情念)은 ‘욕구’와 ‘혐오’로 이루어지고 여기에서 인간 행동의 기본적 원리가 나온다. 홉스는 모든 인간의 공통적인 심리와 행동을 분석해 냄으로써 인간 행위의 법칙을 밝히고 안정된 사회가 가능한 조건들을 체계화하고자 하였다. 그는 ‘욕구’와‘혐오’라는 단순한 심리적 장치로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감정을 설명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즉, 모든 인산 행위의 생물학적 원리는 ‘자기를 보존하고자 하는 힘’이며 자기 보존은 생물적 존재의 지속을 의미했다.

이러한 인간은 자기 보존을 위해 힘을 무제한으로 추구하게 된다. 왜냐하면 공권력이 없는 평등한 상황에서 상호 불신과 공포(두려움)는 힘에 의한 자기 보존을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공포(두려움)’는 자연 상태에서 나타나는 가장 일반적인 감정인데, 이러한 공포 때문에 겸허하게 자신의 한계 내에서 안락을 즐기려는 사람들조차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힘을 증대시키게 된다.

홉스는 이처럼 인간 존재를 기계적으로 끊임없이 운동하는 자연물의 중의 하나로 보기 때문에 자기 보존은 ‘이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힘의 추구’에 의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자연물이 운동하거나 힘을 추구하는 것은 목표점이 없기 때문에 어떤 상태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욕구에서 욕구로 끊임없이 나아가는 것이다. 여기에서 인간의 지극히 이기적이고 비사회적이며 자기 보존의 욕구에만 충실할 뿐, 타인과는 본능적으로 ‘경쟁’과 ‘투쟁’의 관계를 가지게 된다. 사람들 사이에서 분쟁을 유발하는 원인은 ‘경쟁’, ‘불신’ 그리고 ‘영광(지배)’ 등으로 이러한 것들만 존재하는 자연 상태는 결국 전쟁 상태가 되고 그 전쟁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된다.

그러므로 인간들은 이 상태를 변화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때 인간은 적나라한 폭력을 경험하면서 평화를 지향하게 되고 이성에 의해 타인과 ‘동의(同意)’를 하게 된다. 이성에 의한다는 것은 바로 자연법의 발견이고 이 자연법은 인간들이 전쟁 상태에서 벗어나 자기 보존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원리가 된다.

3. 홉스의 자연법 사상과 사회 계약

자연 상태를 종시시키고 시민 사회의 평화로운 상태로 넘어오게 만든 것이 바로 자연법이다. 홉스에게 자연법이란 이성에 의하여 발견된 계율, 또는 일반 법칙이다. 그러나 이것은 자연권을 침해하거나 자연권에 제한을 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보존의 욕구, 힘의 확장의 욕구를 최대한 달성하고자 하는 법칙이다. 즉 홉스에게 이성 능력이란 욕망 충족을 위한 수단으로의 도구적 합리성에 불과한 것이다.

이러한 자연법에 따르면, 결국 자연 상태에서 죽음의 공포를 피하기 위한 유일한 길은 서로를 죽이지 않겠다는 약속이고 이것은 자기 보존을 위한 무한한 힘의 추구라는 권리를 포기하고 상호 양도하는 ‘사회 계약’을 의미하게 된다. 그러나 다양한 개인들의 집합에 불과한 시민 사회에서 계약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점을 증명할 수 없어서 국가라는, 강제력을 독점하는 ‘거대한 괴물(리바이어던)’을 상정하게 된 것이다.

리바이어던의 본질적인 특징은 국내외의 평화를 지키고 회복하는 데에 필수적인 독점권을 가진다는 점이다. 홉스는 이러한 독점권이 신민들에게 분할되거나 양도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절대 국가 불가피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이 곧 도덕적인 우월성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국가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닌 수단이고, 목적은 인간의 평화롭고 안정된 생활의 보장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권자는 자연법에 의해 ‘신민의 안전’을 보장할 의무가 있고 신민 또한 폭력의 공포로 부터 해방되어 자유로운 삶을 누리기 위해 국가 권력에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하는 것이다. 자연 상태에서 벗어나 ‘국가’는 질서의 유지자로서 ‘계약’에 의해 창조되고, 인민은 그 국가에 전적으로 복종해야 한다는 점이 홉스의 사회 계약 원리이다.

4. ‘리바이어던’의 사회 계약적 의의

봉건적 질서가 해체되고 모든 개인이 공동체로부터 독립한 자율적 실체가 되었을 때, 개인들이 어떻게 사회를 구성하고 질서를 유지하는가에 대한 문제의식과 대답이 바로 근대의 『사회 계약론』이라고 할 수 있다.

홉스의 사회 계약론은 물리적 힘이 자연적으로 동등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즉 본질적으로 도덕적인 지위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 사이의 권리의 동등성은 물리적 동등성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이러한 홉스의 사회 계약론은 존재론적 개인주의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들은 사회를 단순히 개인의 집합으로 간주할 뿐 아니라 사회의 성격 또한 개인의 성격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 본다. 자유주의가 존재론적 · 도덕적 개인주의를 자신의 뿌리로 삼고 있다는 것은 곧 사회나 어떤 사회적 집단보다도 개인에게 더 높은 도덕적 가치를 부여하며 개인의 권리와 요구가 우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홉스에게 사회 계약이란 자기 보존이라는 최고선(最高善)의 관점에서 목적 · 수단 관계를 효율적으로 계산한 도구적 합리성의 결과이며 결국은 ‘국가(리바이어던)’라는 지배 장치에 의존하는 시민 사회의 모습을 만들게 된 것이다. 홉스의 사회 계약에 등장하는 국가가 근대 국가의 모습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의 권리 이론에서는 근대적 권리의 단초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권리를 외부적 힘에 귀속시키는 것이 아니라 권리의 양도라는 ‘계약’에 의해 국가와 인민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 소개

홉스(Thomas Hobbes ; `1588~1679)』는 1588년 4월 5일 영국의 가난한 목사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16세기 문법 학교에 다니면서 르네상스적 교육을 통해 라틴어와 희랍어를 능숙하게 익히게 된다. 16세기와 17세기 유럽에서의 이러한 재능은 하층 계급 소년에게 사회적 출세의 구단을 제공해 주었다. 그는 귀족 가문의 입주 교사로 채용되었는데 이것은 가족의 유대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과 많은 제도들로부터 그를 격리시켜, 급진적이고 독특한 지식을 형성하게 하였다.

홉스는 1640년 말에 ‘철학의 여러 요소’를 기점으로 ‘자연법과 정치법의 여러 요소’, ‘법의 여러 요소’ 등을 통해 ‘자연법’의 원리를 핵심으로 ‘법’의 요소들을 설명하고자 하였다. 홉스가 ‘리바이어던(Leviathan)’을 저술한 것은 지병으로 기력이 쇠진해졌을 때였는데, 1651년 출간되면서 영국 내의 ‘왕정주의’라는 대의명분을 배신하는 글이라고 비난받게 된다. 특히 정통 신학에 대한 배반이라고 여겨지는 무신론적 언급은 대단한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 그 이후에도 홉스는 ‘영국 보통법에 관한 철학자와 학생의 대화’, ‘이단(異端)과 그 처벌에 관한 역사적 담론’, ‘거대한 야수’, ‘교회사’를 통해 영국의 보통법에 관한 훌륭한 논의를 제시하였다. 그는 1679년 병으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인간의 자기 보존 속성과 주권자의 권위 그리고 이단(異端)에 대한 끊임없는 문제를 정리하였다.

생각해 볼 문제

1. 국가(리바이어던)라는 것이 왜 필요한지, 그것의 정당성은 무엇인지 홉스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자.
2. 홉스가 생각했던 국가(리바이어던)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국가의 차이점을 생각해 보자.
3. 홉스의 인간관과 맹자의 인간관(성선설)을 비교하여 바람직한 인간관은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보자.

 

 

[자료출처-대성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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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의 『방법 서설』

『방법 서설』의 핵심 내용

1637년에 출간한 『방법서설(Discours de la methode)』의 원제목은 『이성을 잘 인도하고 학문의 진리를 탐구하기 위한 방법 서설, 그리고 이 방법에 관한 에세이들인 굴절광학, 기상학 및 기하학』이다. 이 책은 모두 6부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에서는 기존 학문들에 대한 자서전적인 고찰을 시도하고 있으며, 제2부에서는 학문 방법의 네 가지 규칙을 설정하고, 제3부에서는 이 방법에서 끌어 낸 도덕 규칙들에 대해 논하고 있다. 제4부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구절이 나오는 대목인데 형이상학의 기초로서 하느님과 인간 정신이 현존하는 근거들을 다루고 있는 부분이다. 제5부에서는 자연학 문제들의 순서를, 제6부에서는 자연탐구의 조건과 집필 동기들을 각각 서술하고 있다.


1. 기존학문들에 대한 자서전적 고찰

거짓된 것에서 참된 것을 구별하고 올바로 판단하는 능력이 이성이다. 이것은 자연적으로 동등하게 누구나 타고난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것을 잘 사용하는 것이다. 올바른 방법에 의한 학문 탐구를 통해서만 인간의 정신은 진리의 길로 인도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어릴 적부터 많은 학문을 배웠는데, 공부를 하면 할수록 내가 무지하다는 것만 점점 더 발견할 뿐 그 어떤 이득도 없는 것처럼 여겨질 정도로 많은 의심과 오류에 빠져 곤혹스러웠다. 한 가지 것에 대해서는 단 하나의 참된 의견만 있을 터인데, 아주 많은 의견들이 학자들에 의해 실제로 서로 주장되고 있음을 보고서, 나는 단지 그럴 듯하게 보이는 것을 거의 거짓된 것으로 간주했다. 다른 사람들의 학문을 공부하고 생활 방식을 관찰해 보았을 때, 나에게 확신을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로써 나는 선례와 관습을 통해 확신하게 된 것을 너무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후 나는 세상이라는 책 속에서 공부하고 경험을 쌓으면서 내 안에 있는 이성의 길을 따라 진리를 추구하게 되었다.

2. 학문의 진리를 탐구하는 네 가지 규칙

① 명증적으로 참이라고 인식한 것 이외에는 그 어떤 것도 참된 것으로 받아들이지 말 것(명증성의 규칙). 즉, 속단과 편견을 피하고 명석 · 판명한 것 외에는 그 어떤 것도 믿지 말라는 것이다.

② 검토할 어려움들을 각각 잘 해결할 수 있도록 될 수 있는 대로 작은 부분으로 나눌 것(분해의 규칙).

③ 생각들을 순서에 따라 이끌어 나갈 것(종합의 규칙). 즉, 가장 단순하고 알기 쉬운 것에서 시작하여 가장 복잡하고 어려운 것으로 순서를 상정하여 생각해 가라는 것이다.

④ 아무것도 빠뜨리지 않았다는 확인이 들 정도로 완벽한 열거와 전반적인 검사를 어디서나 행할 것(열거의 규칙). 즉, 문제의 모든 요소를 다 열거하고 그 중의 단 하나라도 빠뜨리지 말라는 것이다.

3. 세 가지 도덕 규칙

참된 인식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올바른 실천이다. 그러나 참된 인식이 아직 발견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잠정적으로 다음과 같은 규칙을 따라야 한다.

① 내 나라의 법률과 관습에 복종하고, 어렸을 적부터 신의 은총에 의해 배워 온 종교를 확고하게 견지하며, 나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 가운데 가장 사려 깊은 사람들이 실생활에서 보통 취하고 있는 가장 온건하고 극단에서 먼 의견에 따를 것.

② 행동할 경우에는 되도록 확고하고 결연한 태도를 취하고, 아무리 의심스런 의견이라고 일단 그것을 취하기로 결정했다면 아주 확실한 것인 양 따를 것.

③ 언제나 운명보다는 나 자신을 이기려고 노력하고, 세계의 질서보다는 내 욕망을 바꾸려고 노력할 것.

4. 방법적 회의 :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의심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의시함으로써 조금도 의심할 수 없는 것을 찾아내야 한다. 왜냐 하면, 과거의 불확실한 지식의 체계들을 무너뜨리고 다시는 흔들리지 않는 확고부동한 지식의 기초를 세워야 하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의심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전적으로 거짓된 것으로 간주하여 던져 버리고, 이렇게 한 뒤에도 내 신념 속에 확실한 것이 남아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렇게 해 보면, 모든 것이 거짓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동안에도 이렇게 생각하는 나는 반드시 어떤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든 것을 아무리 의심해 보아도, 모든 것을 의심하면 할수록 ‘의심하고 있는 나’를 부정할 수는 없다. 따라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는 아주 확고하고 확실하며, 다른 명제들이 근거하고 있는 제일 원리가 되는 것이다.

한 명제가 참되고 확실하기 위해 요구되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것의 확실성은 도대체 어디에 근거하고 있는가? 만일 내가 생각하기 위해서는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아주 명석하게 알지 못했다면,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가 진리라는 것을 확신시켜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명석하게 그리고 판명하게 인식하는 것은 모두 참이라는 것을 진리의 일반적 규칙으로 삼을 수 있다.

저자 소개

‘근대 철학의 아버지’라 부리는 『르네 데카르트(Rene Descartes ; 1596~1650)』는 브르타뉴 지방 고등 법원 평정관인 조아셍 데카르트의 셋째아들로 프랑스 중서부 투렌의 라 에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13개월 만에 어머니를 여의고 외할머니와 유모의 손에 의해 자라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명상하는 습관이 형성되었고, 학문의 길에 들어선 뒤로는 줄곧 고독을 찾아 숨어 살면서 사색에 잠기곤 했다. 또한, 그는 좋지 못한 건강 상태로 말미암아 아침에 늦게 일어나는 버릇이 있었다. 데카르트는 10살 때부터 18살 때까지 제수이트 교단이 창설한 라 플레슈 학교에서 공부했다. 여기서 그는 고전적 학문과 스콜라 철학을 배웠다. 이 학교를 졸업하고 푸아티에 대학에 입학하여 법학과 의학을 공부했다. 대학을 나온 데카르트는 기사(奇思)적인 생활을 즐기다가 이윽고 사방에서 30년 전쟁이 터지자 기사(騎士)로서 전쟁에 참여하였다. 그러던 중 23세 때 울름 근교의 작은 마을에서 꾼 꿈을 통해서 ‘놀라운 학문의 기초를 발견’하는 영감을 받고 인간의 모든 지식을 하나의 통일성 있고 질서 있는 체계로 수립하고자 하는 사명감을 얻었다. 이때부터 그는 자기 인생의 목적을 정하고 그 목적을 위하여 일로 매진(一路邁進)한다. 데카르트의 저서로는, 『정신 지도를 위한 규칙들』, 『방법 서설』, 『철학의 원리』, 『정념론』, 『인간론』, 『자연의 빛에 의한 진리 탐구』 등이 있다.

생각해 볼 문제

1. 데카르트는 방법적 회의를 통해 기존의 모든 지식에 의문점을 제기하고, 그 지식이 자신에게 확신을 줄 때만 그것을 참진리로 인정하였다.
2.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이 명제를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를 통해 과연 참진리인지 생각해 보자.
3.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는 모든 진리와 존재의 근거를 ‘나의 의식’에서 찾고 있다. 이러한 인식의 태도는 흔히 주체 중심주의, 이성 중심주의라는 비판을 받고 있는데, 이 점에 관해 친구들과 토론해 보자.

 

 

[자료출처-대성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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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가의 『북학의』와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

1. 자본주의를 싹트게 한 두 학자

박제가는 1750년(영조 26)에 서자로 태어나 온갖 수모와 멸시를 당하며 성장했지만, 어려서부터 문장, 글씨, 그림 등에 뛰어난 재능을 보이며 조선 시대의 사회상을 바라보는 눈을 키워 갔다. 그는 19살 때 박지원의 문하에서 실학을 연구했고, 국가의 의로움과 백성의 평안함을 위해서는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사상을 토대로 그 당시 선진국인 청나라의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북학론'을 주장했다. 29세가 되던 1778년(정조3)에는 채제공의 수행원 자격으로 청나라에 가서 새 학문을 배우고 귀국한 후, 청나라의 풍속과 제도를 소개한 『북학의』를 저술하게 된다. 박제가는 이 책에서 실생활에서 실제로 필요한 것부터 먼저 배우고 개량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차제를 개선하고, 도로를 개량하여 교통을 편리하게 한 후 물자의 거래를 촉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농기구의 개량과 농업 기술의 개선을 역설하는 한편 상공업의 발전과 적극적인 무역 활동을 권장 하는 등 중상주의 정책을 펼치며 당시의 정치, 사회 현실로서는 매우 혁신적인 주장을 펼쳤다.

1923년 영국에서 세관원의 아들로 태어난 아담 스미스도 1763년부터 3년 동안 프랑스를 여행하면서 그 당시 농업을 경제의 중심으로 여기는 중농학파 경제학자들과 많은 교류를 나눴다. 그 역시 귀국 후 여러 가지 저작물을 남겼는데, 그 중 1776년에 출판한 『국부론』은 자유방임주의 경제 이론의 효시이자 고전파 경제학의 기초를 형성하는 경제학 분야의 가장 중요한 저서이다. 『국부론』에서 그는 국가의 부를 증대시키는 방법으로 분업의 역할을 강조했으며,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자유방임의 효과를 최대한 살려 자유 무역을 통해서 각국의 이익을 증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국부론』은 근대 자본주의 체제의 특징적인 모습을 체계적으로 분석한 최초의 저작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처럼 박제가는 중상주의 정책을 펼치면서 조선의 발전을 갈망했고, 아담 스미스는 중상주의를 배격하면서 자유 방임주의를 주장했다. 물론, 두 사람이 처한 역사적 상황과 경제관은 서로 달랐지만, 이 두 사람에 의해 그들의 사회에 자본주의가 싹트기 시작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럼 박제관의 『북학의』와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을 통해 이들 두 학자가 추구하려고 했던 바를 알아보자.

2. 박제가의 『북학의』

 (1) 『북학의』의 저술 배경

박제가는 1778년 조선의 사신으로 청나라에 가는 채제공의 수행원 자격으로 청나라에 가서 청나라 학자들과 교류하며 새로운 문물을 접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그 동안 자신의 연구한 것을 실제로 관찰, 비교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얻었고, 3개월 동안 청나라를 여행하고 1개월 동안 연경 시찰을 할 수 있었다.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그 동안 자신이 연구한 선진 문명과 연경에서 직접 본 경험적 사실에 자신의 견해를 더해 북학론을 저술한 것이 바로 이 『북학의』이다. 『북학』이란 북쪽의 학문, 그러니까 청나라의 학문을 뜻하며, ‘의(義)’는 논의하다 또는 거론하다 정도의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북학의』는 ‘청나라에서 새롭게 접한 학문에 대하여 논의하는 책’ 정도의 의미를 지니는 셈이다.

당시의 시대 풍조로 보아 청나라인 중국을 선진국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매우 진보적이면서도 혁신적인 사상이다. 왜냐 하면 현실적으로는 정치적인 대외 정책으로 말미암아 청나라와 사대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도,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를 멸시하는 풍조가 더 팽배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청나라의 지배 민족이 한족이 아니니 만주족이라는 사실은 이러한 이유를 대변해 주기도 한다. 박제가는 이러한 시대 풍조에 반론을 제기하면서 받게 될 박해를 무릅쓰고 조선이라는 나라를 구하고, 백성의 가난을 구제하는 길은 오직 『북학』밖에 없다는 소신을 바로 『북학의』를 통해 펼쳤던 것이다.

 (2) 실학의 의미

실학(實學)은 조선 후기에 대두된 새로운 학풍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 그 이전의 학문인 주자학이 현실과는 동떨어진 철학적 관념론에 치우쳐 있었던 것에 비해서, 현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했던 학풍이 바로 실학이다. 그러나 실학은 그런 의미가 대두되기 이전부터 사용되었는데, 주자학자들도 자신들의 학문을 실학이라 불렀고 사실상 유학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했다. 이들은 유학이 아닌 모든 다른 학문을 허학으로 불렀으며, 특히 불교를 대표적인 허학으로 취급했다. 즉, 주자학자들의 실학이라고 불렀던 유학은 다른 사람들과 부대끼며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상과, 그러한 일상 가운데 형성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로 이루어지는 세계이외에는 그 어떤 것에도 절대 관심을 두지 않는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유학이 곧 실학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조선 후기에 새롭게 대두된 학풍으로서의 실학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한 마디로 말하자면 우리가 오늘날 실학자들이라고 규정하는 당시의 학자들은 자신들을 유학자로 여겼을 뿐,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실학자’로 자처하지 않았다. 요컨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실학 또는 실학자라는 개념은 어디까지나 역사적 관점에서 오늘날의 우리가 조선 후기의 사상, 사상가들을 분류하고자 고안한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박제가 역시 유학자였으며, 역사적으로는 조선 후기의 실학자였던 셈이다.

 (3) 『북학의』의 주요 내용과 의의

박제가는 그가 생존하던 당시의 중국 문물제도를 자세히 소개하면서, 그러한 선진 기술을 도입하여 농업을 중심으로 한 여러 분야의 혁신을 이루려고 했다. 이런 내용을 중심으로 한다는 측면에서 『북학의』는 기본적으로 조선 후기의 실용서라고 할 수 있다. 박제가의 입장에서는 병자호란 이후 별다른 전란 없이 백여 년 동안 평화가 지속되고 백성들이 호화스러운 생활를 하지 않는데도 조선이 늘 빈곤한 까닭은, 과학 기술과 문물제도가 낙후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그는 그러한 빈곤과 낙후의 원인을 앞서가는 중국의 선진 기술을 도입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북학의』를 단순하게 실용서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 박제가는 이 책에서 자신이 청나라에서 접한 문물을 단순하게 소개해 놓은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의 자신의 입장도 자세하게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내용과 의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이용후생

박제가는 『북학의』의 서문에다 다음과 같은 언급을 한다.

"대게 삶을 이롭게 하고 넉넉하게 하는 것에 하나라도 빠진 것이 이으면, 올바른 덕을 해치게 된다."

이처럼 박제가의 『북학의』에서는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정신을 일관되게 추구한다. 특히 여기에서는 일상 생활 속에서 유용하게 쓰이는 많은 도구, 물건의 제작법, 사용법 등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윤리, 도덕과 같은 공허한 관념에 몰두했던 이전의 유학자들과는 아주 다른 태도와 시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구체적인 문물과 제도의 개선을 통해 백성들의 삶을 이롭고 풍요롭게 하는 것이야말로 윤리, 도덕을 바로 세우는 기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용후생의 측면에서 보면 이전의 주자학은 심각한 문제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고, 그래서 그는 『북학의』의 병론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실속이 없는 말을 잘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으나, 도무지 실천하여 구체적인 효과를 거두는 데에는 부족하다."

이러한 이용후생의 정신은 박제가의 자연관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전통적인 주자학에서는 이미 주어진 자연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하면 도덕적, 윤리적으로 올바른 삶을 살 수 있을 것인지를 궁리한다. 이에 비해서 박제가는 이용후생을 위해 적극적으로 개발해야 할 대상으로 자연을 이해한다. 동아시아 전통 사상에서 자연을 이루는 기본적인 요소로 이해되어 온 오행에 대해서도 백성들이 이용하여 생활하는 것으로서, 날마다 사용하여 빠뜨릴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오행을 철학적인 원리로 이해하지 않고 일상생활 속에서 널리 이용하는 구체적인 사물, 즉 이용후생의 수단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박제가에게 오행은 일종의 생활 필수품이었다. 이용후생을 위해 적극적으로 개발해야 할 대상이 자연이라면, 그러한 자연 개발의 도구, 즉 농기구와 같은 것의 중요성은 두말할 나위 없었던 박제가는 그래서 이렇게 말했는지도 모른다.

"우리나라에 농기구가 변변치 않은 것은 예나 지금이나 남이나 북이나 모두가 꼭 같다. 쟁기와 보습을 사용해서 흙을 갈고 나면 더 이상 사용할 수 있는 농기구가 없다."

  ② 전통적인 검약주의에 대한 비판

전통적인 유학에서는 물질적인 욕심을 극도로 경계한다. 나라를 부유하게 하는 방법도 비용을 절약하고 백성들의 사치를 금하는 정도에 머물렀던 것이 보통이다. 욕망을 억제하여 검소한 생활을 하는 것, 그래서 도덕적으로 흠이 없는 삶을 사는 것을 이상(理想)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나라를 망친 왕들은 대부분 극도의 사치를 부린 왕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그런데 박제가는 유학의 이러한 관점에 정면으로 이의를 제기한다.

"사치가 날로 심해진다고 말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그들은 근본을 알지 못한다. 다른 나라는 진실로 사치로 인해 망하기도 했지만, 지금 우리나라는 검소 때문에 쇠퇴하고 있다."


"물질을 소비하고 사용하는 방법을 모르면 만드는 방법을 모르게 되고 만드는 방법을 모르면 백성이 날로 궁핍해진다. 재화는 우물에 비유할 수 있다. 퍼내면 가득 차고, 사용하지 않으면 말라 버린다."

즉, 화려한 무늬의 비단 옷을 입지 않으니 비단 짜는 기계가 없어지고 그 기술도 쇠퇴하여 기술자가 없어진다. 그렇게 되면 결국 직조 기술 전반이 쇠퇴하여 백성들은 언제나 남루한 옷을 입을 수 밖에 없다. 이러한 박제가의 견해는 결국 초보적이나마 근대적인 경제 원리를 지적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소비가 촉진됨에 따라 그에 부응하는 생산 증가와 생산 기술의 혁신이 이루어지고, 전체적으로 경제가 발전하여 삶이 윤택해지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셈이기 때문이다.

도덕적인 삶, 윤리적인 삶에 주안점을 두었던 전통적인 유학자들과는 달리 박제가는 윤택하고 넉넉한 삶, 물질적인 이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소비하는 삶을 중시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박제가가 그런 삶을 중시했던 것은 단순히 인간이 욕망을 마음껏 충족시키며 살아야 한다는 쾌락주의와는 맥락이 다르다. 전통적인 검약주의에 대한 박제가의 비판은 어디까지나 궁핍한 백성의 삶을 개선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③ 중상주의 정책의 강조

박제가는 중국이 부유한 이유를 상업의 발달에서 찾는다. 중국과 조선의 상가를 비교하면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 종로 상가는 그 전체 거리가 일 리도 되지 못한다. 그러나 중국의 마을을 지나가면 가게가 계속 이어져 몇 리나 된다. 또한 수출입이 번성한 것과 품목의 다양함은 우리나라 전체를 더해도 미치지 못한다."

이처럼 박제가는 상업을 진흥시켜 각 지역 간의 물자 교류를 원활하게 만들고 소비를 장려하여 생산 활동을 진흥시키며 생산 기술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는데, 이 역시 전통적인 유학의 입장에서 보면 매우 혁신적인 생각이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는 전통적인 사회 계층 구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장사꾼을 천시하고 선비만을 존중하는 풍토가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 박제가는 이렇게 말한다.

"수륙 교통을 통해 물품을 판매하고 무역하는 일을 모두 사족(士族)에게 허락하여 호적에 돌릴 것을 청합니다."

박제가는 국내의 상업 유통뿐만이 아니라 더 나아가 외국과의 무역을 활성화할 필요성도 강조한다. 그 구체적인 방안이 『북학의』 의 통강남절강상박의(通江南折江商舶議)에 나와 있다. 이 제목을 풀어 옮기면, '중국의 강남 및 절강 지방과 상선을 통해 교역하는 것에 대한 견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의 등주, 내주의 배가 장연에 정박하고, 금부, 해개의 물건을 선천에서 교역하며, 장강, 절강, 천주, 장주 지역의 여러 재화를 우리나라의 은진, 여산 사이에 모이도록 합니다. 그렇게 하면 영남 지방의 면(綿)과 호남 지방의 모시와 서북 지방의 실과 삼베 등이 중국의 비단, 담요와 교환될 것이고, 각 지방의 산물을 중국의 금, 은, 병갑, 약재 따위와 교환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선박, 수레, 궁실, 기물의 이로움도 배울 수 있습니다."

요컨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지리적 특성을 이용해서 중국과의 해상 무역을 활성화 시키자는 견해이다. 이 글 다음에는 중국뿐만 아니라 안남(베트남), 유구(오키나와 지역), 대만 등으로까지 차차 무역 범위를 확대해야 한다는 의견이 이어진다. 이러한 박제가의 견해는 결국 조선의 문호를 여러 나라에 개방하자는 주장이나 다름없었으니, 당시로서는 무척 혁신적인 주장이었다.

 (4) 박제가는 자신의 주장을 실현했는가?

그렇다면 『북학의』에 나타나 있는 박제가의 주장들은 얼마나 실현되었을까? 안타까운 일이지만 박제가의 주장은 모두 『북학의』라는 책 속의 주장으로만 끝나고 말았다. 물론 박제가 뿐만이 아니라 실학자라 불리는 사상가들 대부분의 주장은 이와 같은 운명이었다.

박제가가 『북학의』에서 전개한 여러 주장은 당시 지배층의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만큼 그의 주장은 혁신적이었고, 어떤 의미에서는 시대를 앞선 주장이었다. 그가 양반의 서자 출신이라는 사실도 이러한 그의 주장과 연관 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비록 정조의 각별한 정책으로 서자 출신들도 제한적이나마 능력에 따라서 등용되기는 했으나 그들이 실질적으로 국가 정책의 입안과 집행에 참여할 수 있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러한 좌절 속에서 서얼 출신의 지식인들은 기존의 현실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지닐 수 이었다. 기존의 체제에 안주하기만 하면 가문과 일신의 영달을 누릴 수 있었던 고위 관료들에게 기존 체제의 개혁을 기대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박제가는 자신의 뜻을 제대로 펼치지 못한 실패한 사상가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의 모순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그것을 고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용기 있게 발언한 사람이라면, 비록 그의 발언이 현실화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그는 결코 실패한 사상가가 아니다. 오히려 위대한 사상가일수록, 어느 정도는 시대를 앞서 나가는 것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2.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은 과학적 경제학의 시작은 언제부터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아담 스미스가 『국부론』을 발간한 1776년부터라고 답한다. 아울러 경제학 분야를 대표하는 한권의 고전을 선택하라고 할 때에도 스미스의 『국부론』을 선택하는 사람이 많다. 이와 같이 스미스의 『국부론』이 가장 대표적인 경제학 저작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

 (1) 분업의 강조

『국부론』의 서두에서 아담 스미스는 『인간은 본성적으로 교환자이다.』라고 주장한다. 『국부론』의 1편 1장에 따르면, 노동 생산력의 향상, 곧 노동 과정에서 발휘되는 숙련, 기교, 판단이 향상되는 원인의 대부분은 분업의 결과였다. 그런데 수많은 이익을 가져오는 분업은 인간이 자신의 지혜로 그것이 가져다 줄 일반적인 풍족을 예상하여 사회에 도입한 것은 아니다. 분업은 인간성의 어떤 성향으로부터 매우 천천히 나타나게 된, 점진적이긴 하지만 필연적으로 발생한 결과이다. 그 성향이란 하나의 물건을 다른 물건과 교환하고 거래하는 성향이라고 말한다.

물론, 아담 스미스는 이 성향이 더 이상 설명할 수 없는 인간 본능 중의 하나인지 또는 이성과 언어의 속성에서 나오는 필연적인 결과인지는 『국부론』에서 다룰 주제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인간은 교환하려 하지만 동물들은 교환하려 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아담 스미스는 인간이 인간인 것은 교환하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결론짓고 있다. 따라서 인간은 본성적으로 교환자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인간은 교환자일 때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이다. 이는 곧 경제주의적 인간관을 나타내고 있는데, 경제주의에 따르면 경제행위 혹은 상업 행위는 인간이 자신의 사회적 혹은 합리적 본성을 삶 속에서 드러내 보여 주는 하나의 고유한 표현 양식이다. 결국 아담 스미스는 『국부론』의 출발을 경제주의적 태도에 맞춰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단지 아담 스미스가 가격 기구만을 분석했다면 시장 경제가 확립된 이후인 현대에 과연 『국부론』이 기여한 점이 있을까 의문시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국부론』의 분업 이론과 가격 이론, 나아가 아담 스미스가 윤리학, 법학, 신학 분야에서 남긴 다른 저작을 통합적으로 이해한다면, 아담 스미스가 현대 사회에도 여전히 기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국부론』에서 부의 원천은 노동이며, 부의 증진은 노동 생산력의 개선으로 이루어진다고 주장하고, 생산의 기초를 분업에 두었다. 그는 분업과 이에 수반하는 기계의 사용을 위해서는 자본의 축적이 필요하며, 자유 경쟁에 의해서 자본 축적을 꾀하는 것이 국부 증진의 정도(正道)라고 역설하였다.

(2) 보이지 않는 손과 개인의 이기심

자유 시장 경제 체제에서는 무엇을, 어떻게, 그리고 누구를 위하여 생산할 것인가라는 경제의 기본 문제를 결정짓는 요인이 바로 가격이다. 각 경제 주체는 가격의 변동에 따라 행동을 조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격 변동의 신호에 따라 소비자는 효용(만족)이 최대가 되도록 소비하고, 생산자는 이윤이 최대가 되도록 생산한다.

아담 스미스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의 처지를 개선하려고 하는 자연적인 이기심에 따라 행동하면 이른바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하여 모든 경제 활동이 조정되고 개인과 사회의 조화가 실현된다는 낙관론을 펼쳤다. 즉 가격의 능동적인 자동 조절 기능에 의해 경쟁 시장은 수요, 공급의 균형이 부지불식간에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에 아담 스미스는 개인의 이기심 추구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우리가 저녁 식사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정육업자, 양조업자, 제빵업자들의 자비심 때문이 아니라 그들 개인의 이익 추구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생산물의 가치가 극대화되는 방향으로 자신의 자원을 활용하려고 노력한다. 그들은 공익을 증진하려고 의도하지 않으며 또 얼마나 증대시킬 수 있는 지도 알지 못한다. 그는 단지 자신의 안전과 이익을 위하여 행동할 뿐이다. 그러나 이렇게 행동하는 가운데 보이지 않는 손의 인도를 받아서 원래 의도하지 않았던 목표를 달성할 수 있게 된다. 이와 같이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열심히 추구하는 가운데 사회나 국가 전체의 이익을 증대 시킨다."

아담 스미스가 말하는 ‘보이지 않는 손’이란 가격의 자동 조절 기능, 가격의 매개 변수적 기능을 말한다. 이 기능에 의해 경쟁 시장에서는 수요, 공급의 균형이 부지불식간에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유방임과 시장의 자동 조절 기능을 믿기 때문에 아담 스미스는 정부 정책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여러분은 선의의 법령과 규제로 경제에 도움을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자유방임하십시오. 간섭하지 말고 그대로 내버려 두십시오. ‘이기심이라는 기름’ 이 ‘경제라는 기어’를 거의 기적에 가까울 정도로 잘 돌아가게 할 것입니다. 계획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통치자의 다스림도 필요 없습니다. 시장은 모든 것을 해결할 것입니다."

결국 국가의 부를 증가시키기 위해서는 국민으로 하여금 자기의 본성을 자유롭고 안전하게 발휘하도록 해 주는 일밖에는 아무것도 필요 없다는 것이 그의 저서 『국부론』의 또 다른 핵심이다. 정부는 국토를 방위하고 정의롭고 평등한 법질서를 유지하며 개인이 할 수 없는 공공사업을 수행하는 일에만 전념하고, 그 나머지의 분야는 모두 개인에게 맡겨 두라는 자유방임주의를 추구한 것이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전통적 의미의 도덕 개념은 사회적 이익의 개념으로 대체된다는 낡은 도덕 개념은 사라지고, 새로운 도덕 개념이 등장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도덕 개념은 사익을 추구하는 개인에게 보이지 않는 손의 자비를 베풂으로써 도덕적 자유를 준다.

 (3) 중상주의 배격

사실 아담 스미스가 경제학 연구를 시작하던 1750년대는 시장 경제 체제가 확립된 환경이 아닌 중상주의 시대로서 자유로운 영업 활동을 막는 규제가 많은 시대였다. 스미스는 이러한 규제를 철폐해야만 경제가 발전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으므로, 『국부론』의 시대적 의미는 중상주의 비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중상주의에 의해 주로 진행되는 것은 부자와 권력자의 이익을 위한 산업뿐이다. 가난한 자와 빈궁한 자의 이익을 위한 산업은 너무나 자주 무시되거나 억압받고 있다."

아담 스미스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국가 중심적 무역 패러다임이란, 국가가 권력과 부를 유지하고 증대해야 한다는 책임과 목표를 가지고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경제 활동에 간섭하며 무역에 직접 관여하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일종의 보호 무역 등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러한 정부의 규제는 시장 중심적인 패러다임의 입장에서 용인될 수 없는 것이다. 왜냐 하면 국가의 통제에 따른 부작용은 곧 가난한 자에게 피해로 돌아간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고, 그 대안은 결국 자유방임이었던 것이다.

중상주의자들은 권력이 부를 창조하고 부는 다시 권력을 증대시키며, 이렇게 증대된 권력은 더욱 많은 부를 가져와 결국 안전과 번영을 가져다 준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담 스미스는 권력과 부의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형성하기 때문에 결국은 권력과 부의 악순환을 초래한다고 파악했던 것이다. 그는 바로 이 부분을 지적하는 동시에 극복하고자 자신의 경제 이론을 강조했다.

 (4) 『국부론』의 의의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을 통해서 우리는 세 가지 핵심적인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첫째, 필요에 의해서 일반적으로 만들어지는 사물의 질서는 어느 나라에서나 인간의 자연적 성향에 의해 촉진된다. 인간이 만든 제도가 이러한 자연적 성향을 방해하지 않는다면, 도시는 어디에서나 주변 지역이 개량, 경작될 수 있는 것 이상으로는 성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인간의 자연적 성향이란 합리적인 경제 행위를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인류 역사의 발전 단계를 보면 개인의 처지에서 우선적으로 가장 합리적인 행위는 농업에 투자하는 것이고, 그 다음에는 국내 상업에 투자하는 것이며, 마지막에는 해외 무역에 투자하는 것이다. 개인의 이러한 행위 유형의 변화에 따라 인류 사회는 농경 사회로부터 상공업 사회로, 최종적으로는 국제 무역 사회로 발전한다.

아담 스미스의 이러한 경제주의는 인류 사회의 역사 발전으로 이론화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아담 스미스 이론의 방법론적 특성인 개인 행위로부터 사회 질서와 구조를 유추하는 태도와, 역사적 관점과 초역사적 관점을 결합시키는 태도를 확인하는 동시에 이것의 방법론적 한계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둘째, 자유로운 개인들의 경제 행위로부터 사회 질서가 형성된다는 주장은, 사회 질서가 개인의 자유를 완전히 보장하지 않는 상태에서도 적용되기 때문에 더욱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더불어 모든 개인이 자신의 상태를 개선하려고 하는 자연스러운 노력은 자유롭고 안전하게 개인이 쏟을 수 있게 허용될 때, 그것만으로도 사회에 부와 번영을 가져다 줄 수 있다. 더욱이 인간이 만든 어리석은 법이 이러한 개인의 자연스런 노력을 방해하는 수많은 장애물을 만들고 있다. 그러나 개인의 자연스러운 노력은 인간이 만든 이런 장애물들이 개인들의 자유를 항상 침해하거나 자신들이 꾸준하게 노력하는 것을 방해하더라도, 이런 모든 방해와 장애를 극복할 수 있다. 경제적 자유주의는 한 사회의 정부나 입법가가 개인의 경제 행위를 방해할 필요가 없으며 방해해서도 안 된다는 주장만 하는 것에 멈추지 않고, 그러한 방해조차도 자신의 상태를 개선하려는 개인의 자연스런 노력인 경제 활동을 통해 극복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경제주의의 전형적 주장을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는 사회의 질서와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다른 어떤 것보다 자체 내의 상업과 제조업의 발전을 도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개인의 경제 행위에 대해 자유를 보장하기만 하면 인간 사회를 조화롭고 평화롭게 할 법과 정부, 그리고 다른 여러 가지 사회 제도가 저절로 생겨난다. ‘경제 발전이 민주 질서를 낳는다.’는 명제가 이 주장의 현대작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주장은 단순히 ‘경제주의’라고 하는 주장을 벗어나서, 인간의 역사 발전에 대한 이론, 그리고 미래에 대한 이론으로까지 발전한다는 측면에서 경제학이 역사 과학으로 발전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고 있다. 이것은 『국부론』이 단순한 경제주의로만 머무르지 않고 인간 사회에 대한 정치 경제학으로 자리를 잡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생각해 볼 문제

1. 박제가의 『북학의』는 실학적 태도를 취하고 있는 실용서이다. 그가 제시한 실학적 태도 중 현대 사회에서 적용하여 계승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2. 『북학의』의 서술 방식은 ‘중국 문물을 소개한 후 우리 것을 비판하고, 중국 문화를 도입했을 때의 이로움을 설파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서술 방식이 쉽게 빠질 수 있는 오류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3. 아담 스미스가 강조한 ‘보이지 않는 손’이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떻게 실현되고 있는지 예를 들어서 설명해 보고, 경제적 이기심이 갖는 긍정적 효과에 대해서 자신의 견해를 말해 보자.
4. 박제가는 중상주의를 강조하면서 조선이 발전되기를 원했고, 아담 스미스는 중상주의를 배격하면서 자유 방임주의가 실현되기를 원했다. 이들이 처한 역사적 상황은 달랐지만, 이들에 의해 자본주의가 싹트기 시작했다는 과정을 고려하면서 두 학자 간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말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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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의 『군주론』

1. 『군주론』집필의 시대적 배경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집필한 개인적 배경보다도 중요한 것은 『군주론』에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정신이며 이러한 정신을 낳게 한 시대적 배경이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을 통해서 자신의 조국인 이탈리아를 재건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자 했고, 이는 그 당시 이탈리아가 처한 상황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탈리아는 로마 제국의 영광을 뒤로 한 채 외부의 끊임없는 침입으로 사회 혼란이 가중되어 있었고, 이탈리아 반도는 통일되지 못하고 여러 도시 국가들로 분열되어 있었다. 즉, 15세기 말 이탈리아의 정치적 상황은 프랑스와 독일이 통일된 국가 형태로 진전되어 가는 것과는 달리 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부터 지속된 국가 분열이 더욱 악화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마키아벨리로 하여금 사회 안정과 이탈리아 통일의 해결책을 찾도록 했으며, 이러한 맥락에서 집필한 저작이 바로 『군주론』이라 할 수 있다.

2. 군주론의 주요 논점

‘이탈리아의 통일과 안정은 어떻게 이룰 수 있는가?’ 마키아벨리는 이에 대한 답으로 ‘강력하고 전제적인 군주’를 제시했다. 사회 혼란을 잠재울 수 있는 사람은 군사력과 지도력을 가진 전제 군주라는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사회 혼란의 해결점을 일인 독제의 강력한 군주에서 찾았고, 이러한 군주에 대한 논의가 바로 ‘군주론’의 핵심적인 내용이라 할 수 있다.

‘이상적 군주’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논의는 크게 세 가지 내용으로 나뉜다. 첫째는 군주가 갖추어야 할 외적 요건에 해당하는 내용이며, 둘째는 군주의 인물됨에 대한 내용, 그리고 셋째는 군주에게 실질적으로 할 수 있는 조언에 대한 내용이다.

3. 군주의 외적 요건

먼저, 첫째로 ‘군주가 갖추어야 할 외적 요건’에 대해 알아보자. 이는 다름 아닌 군주 ‘자신의 군대’이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는 자신의 군대를 가져야만 자신의 지위와 국가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마키아벨리는 권력을 장악하고 유지하는 최선의 방법으로 군사력을 중시했다. 실제로 이탈리아에서 권력을 상실한 통치자들은 모두 ‘군사적 취약성’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 마키아벨리의 주장이다. 그러므로 마키아벨리는 군주에게 강력한 ‘자신의 군대’가 필수적임을 역설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마키아벨리는 군주는 항상 기본적으로 전사로서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며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의 군대를 직접 통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4. 군주의 인물됨

둘째로 ‘군주의 인물됨’에 대해 논의한 내용을 살펴보자. 마이카벨리는 군주의 관후(寬厚)함과 인색함, 잔인함과 인자함, 사랑받는 것과 외경(畏敬)받는 것 등, 군주의 인물됨과 그에 따른 행동들 중 어떠한 방향이 바람직한지에 대해 논의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마키아벨리는 ‘군주는 사적 개인이 아닌 공적 개인인 만큼 사적 개인이 가졌을 때 바람직하다고 생각되는 덕을 가질 필요는 없다.’고 본다. 예를 들어 사적 개인은 인색함보다는 관후함을 가지는 것이 좋지만 군주의 경우는 꼭 그렇지는 않다는 주장이다. 마키아벨리는 사적 개인이 가졌을 때 바람직하다고 평가되는 관후함, 인자함, 신의(信義)등은 군주에게 커다란 해악을 미칠 수 있다고 본다.

마키아벨리는 관후함을 가진 군주는 자신의 평판을 유지하기 위해 모든 자원을 과시적으로 낭비해야 하고, 이를 유지하기 위해 신민들에게 더 많은 세금을 거두어야 하는 역설적인 상황에 봉착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이에 비해 인색함을 가진 군주는 오히려 세입을 풍요롭게 하여 외적으로부터 몸을 지킬 수 있으며, 또한 신민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대사업(전쟁)을 추진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인색함을 가진 군주가 진정으로 관후한 군주라는 주장이다. 도한 마키아벨리는, 군주는 신민들을 단결하게 하고 충성스럽게 하려면 잔인하다고 불리는 것에 개의치 않아야 한다고 본다. 또한 군주는 사랑받기보다는 외경의 대상이 되어야 신민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다고 본다. 사랑받는 것과 외경을 받는 것을 모두 겸비하기란 어려운 일이므로 한쪽을 택해야 한다면 외경을 받는 것이 더 좋다고 보는 것이다. 인간이란 원래 은혜를 모르고 변덕이 심하며, 위선자요, 염치를 모르는데다가 몸을 아끼고 물욕에 눈이 어두운 속물이기 때문에 군주에게 금세 등을 돌릴 수 있다. 인간은 외경하는 자, 즉 두려워하는 사람보다 애정을 느끼는 사람을 더욱 쉽게 배반하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군주는 사랑받기 보다는 외경을 받아야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 민중을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통해 우리는 마키아벨리의 인간관도 알 수 있다.

군주의 인물됨에 대해 마키아벨리는 마지막으로 ‘군주는 신의를 어떻게 지킬 것인가.’ 에 대해 논의한다. 약속을 지키는 일이 기본적인 덕으로 알려져 온 바와는 달리, 마키아벨리는 군주라면 과감히 약속을 깰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약속을 지키는 일이 자신의 이익에 반하면 약속을 지켜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무릇 군주라면 나라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신의도 저버릴 줄 알아야 하며, 자비심을 버리고 인간미를 잃고 때때로 반종교적인 행동도 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실제 군주는 인색함, 잔인함 등의 덕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사적 개인으로서 바람직하다고 여겨지는 덕들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비록 군주가 보통 존경할 만하다고 여겨지는 성품을 갖지 않았더라도 갖추고 있는 것처럼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군주에게는 위장의 기술이 필요하다. 그러나 물론 군주는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전통적인 덕을 무시할 수 있어야 하며 필요하다면 비행을 저지를 수 있어야 한다.

5. 군주에 대한 조언

그렇다면, 이러한 군주의 인간됨이 좀 더 이상화된 군주의 모습이라면 실제 군주에게 어떠한 현실적인 조언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셋째로 마키아벨리는 군주에게 할 수 있는 실질적인 조언들을 제시하기 시작한다. 이는 ‘경멸과 증오를 피하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군주가 구축하는 요새 및 그 비슷한 것들은 과연 유익한가.’, ‘명성을 얻으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등의 내용이다.

마키아벨리는 ‘군주가 자신의 영토를 요새로 방비해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이에 대해, 마키아벨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만약 군주가 신민들의 증오를 두려워한다면, 군주는 확실히 자신의 요새를 구축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마저도 궁극적으로 통치자를 인민의 불만으로부터 보호해 줄 수 없다. 군주가 가질 수 있는 최선의 요새는 신민에게 미움을 받지 않는 것이다. 즉, 마키아벨리는 군사력뿐만 아니라 신민의 신임도 역시 중요시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신민의 미움과 경멸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마키아벨리는 군주가 미움을 받지 않기 위해서는, 반드시 신민의 재산을 강탈하거나 부녀자의 명예를 깎지 말아야 한다고 제안한다. 또한 군주가 변덕이 심하고 경박하며 여성적이고 무기력한데다가 결단력이 없다고 보이면 경멸을 받게 된다고 본다. 이러한 일들을 피해야만 군주는 자신의 지위를 견고하게 유지할 수 있다. 군주가 경멸을 받지 않는 또 다른 방법은 간신을 피하는 방법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마키아벨리는 모든 사람이 군주와 그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다면, 군주는 매우 쉽게 존경을 잃고 경멸의 대상이 된다고 본다. 즉, 군주는 완전한 논쟁의 자유를 허용해서는 안 된다. 군주는 단지 소수의 조언자에게만 귀를 기울이고 자신이 논의하기를 원하는 주제에 관해서만 상의해야 한다. 마키아벨리는 군주의 변덕스럽고 우유부단한 행동이 군주를 경멸스럽게 만들고 있으므로 소심함의 징표인 중립을 피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6. 『군주론』의 해석

이렇듯 마키아벨리는 그의 『군주론』에서 이상적인 군주의 상을 제시했다. 『군주론』의 가장 근본적인 주장은, 군주는 만약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있다면 악행을 저지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마키아벨리는 사회 불안의 해결책을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통치자에서 찾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단지 자기의 권력과 세력을 팽창, 유지하기 위해서 아무것에도 구속받지 말고 도의 정신, 종교심, 논리성을 저 버리며, 오로지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정치사상이라고 해석할 수는 없다. 이러한 해석 방식은 흔히 마키아벨리즘이라 불리는 해석 방식으로서 마키아벨리의 사상에 대한 단편적인 해석이라 할 수 있다. 왜냐 하면, 『군주론』은 15세기 이탈리아의 시대적 상황을 함축하고 있으며 분명 통치자의 정치 행위에 대한 깊은 통찰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군주론』의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고 『군주론』의 의미를 해석해야 하겠다. 물론 그 후에 『군주론』이 갖는 현대적 의미에 대한 지적도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다.

저자 소개

마키아벨리(Machiavelli : 1469~1527)는 1469년 5월 3일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 태어났다. 귀족 집안에서 태어난 마키아벨리는 1498년 피렌체 공화정에 참여하여 주로 외교 업무를 담당하는 중책을 맡았다. 그 당시 이탈리아에는 프랑스와 독일이 끊임없이 침입하여 사회 불안이 격하되고 국가 재정이 파탄 지정에 이르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키아벨리는 ‘독일 정세’, ‘프랑스 정세’, ‘국가 재정에 관한 진언’ 등의 논문을 발표했다. 그 후 1512년에 스페인의 공격에 의해 피렌체 공화정이 무너지고 메디치가의 왕정이 복원되었고, 이에 따라 마키아벨리는 공직에서 추방되었다. 메디치가의 전제 시대가 시작되면서 마키아벨리는 구정권에 봉직하였다는 이유로 1년간이나 억류 생활을 했다. 그 후 다시 공직에 봉직하지만 반(反) 메디치 혐의로 다시 구속되었다.

다시 석방된 후 마키아벨리는 메디치 정부의 공직에 참여하기 위해 1513년 말경에 『군주론(Il Principe)』을 집필했다. 이것이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집필한 개인적 동기였다고 할 수 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을 ‘각하’께 바치며 현재 자신이 ‘얼마나 엄청나고 지속적인 부당한 운명의 학대를 받고 있는가.’를 알아 달라고 호소했다. 이는 군주의 신임을 얻고 다시 공직에 참여하려는 의도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기대는 실현되지 않았고, 그 후 마키아벨리는 반메디치적이고 공화주의적인 다른 지식인들과 어울리게 되었고, 『전술론』과 자신의 공화주의적 사상을 담은 『로마사론』을 집필하게 되었다. 그 후 메디치 왕정은 프랑스의 로마 약탈, 이로 인한 교황의 도주 등의 이유로 붕괴되었고 피렌체에는 공화정이 복원되었다. 그러나 공화정이 복원된 후에도 마키아벨리는 공직에 복귀하지 못했으며 결국 1527년에 세상을 떠났다.

생각해 볼 문제

1.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서는 군주가 갖추어야 할 덕목들을 제시하고 있다. 제시문을 중심으로 각 덕목들을 정리해 보고, 자신이 생각하기에 좀더 추가될 덕목이 있는지 생각해 보자.
2. 마키아벨리의 『군주론』과 맹자의 ‘왕도 정치’를 비교해 보자.
3.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많은 비판점을 가지고 있다. 현대의 관점에서 『군주론』을 비판해 보고, 그처럼 비판받을 수 있는 요소들을 지니면서도 『군주론』이 현대의 고전으로 남아 있을 이유를 생각해 보자.

 

 

[자료출처-대성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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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국가』

■『국가』의 핵심내용

『국가』로 번역한 이 대화편의 원래 제목은 『폴리티아(Politeia)』이다. 이 대화편의 전체 분량은 플라톤 전집의 약 18%를 차지한다. 그 방대한 분량만큼이나 내용도 다양하다. 여기에는 비단 국가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고대 그리스의 모든 지혜가 망라되어 있다. 즉 철학, 정치, 경제, 교육, 문학 등 인류 문화의 원형이 담겨 있다. 또한 이 책은 철학적 이상주의의 가장 위대한 소산의 하나로서 오늘에도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뛰어난 이상주의에도 불구하고 플라톤의 국가는 역시 그리스적인 토대 위에 서 있다. 고대의 헬라인들이 생각하는 나라는 ‘폴리스(Polis)’였는데, 플라톤의 국가 이상은 결코 터무니없는 몽상이 아니라 실제로 그리스 공동체의 혼란을 구제하려는 데 있었으며, 이러한 의도에서 ‘국가’가 쓰여진 것이다.

플라톤은 국가의 기원과 발전에 관한 역사 철학적 고찰에서도 현실주의자였다. 그는 국가의 경제적 기반을 솔직히 인정하고 국가가 처음에는 경제적 필요에서 발생하였다고 서술하고 있다. 기술의 발달로 말미암아 산업이 발전하고, 교환 가치로서의 화폐가 널리 유통되면서 영리적, 군사적, 지배적인 여러 계급이 점차로 형성된 과정이 여기서 매우 명백하게 제시되어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 『국가』대화편은 유토피아 사상을 담고 있다. 지상의 어디에도 있을 수 없는 'paradeigma' - 플라톤의 경우에 ‘이데아’나 ‘형상’으로 불리는 것-의 성격을 갖는 국가를 말하고 있다. 그래서 이 국가를 ‘아름다운 국가’ 또는 ‘훌륭한 국가’라는 뜻으로 ‘kallipolis'(제 7권 527c)라 부르기도 한다. 이 국가의 목표는 단지 철학에 의해서만 학문적으로 인정되고 또한 실천될 수 있는 최고의 덕에 기초한 ’만인의 최고 행복‘이다.

플라톤의 사상에서는 마치 인간이 소규모의 유기체인 것처럼, 국가는 대규모의 인간 유기체가 된다. 그러므로 이른바 세 가지 영혼의 능력에 대응하여 세 가지의 분리된 계급이 생기게 된다.

(1) 욕구적인 것에 상응하는 것은 ‘서민’이다. 즉 일상생활의 여러 가지 수용에 대한 배려 - 이것은 욕구에서 비롯된다 - 를 하는 자로서 농민, 수공업자 및 상인 등이 있다. 그들은 다른 두 계급의 ‘보수와 영양을 공급하는 자’ 이며 국가의 경제적인 토대를 이루고 있지만 통치에는 전혀 관여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두 계급의 보호와 장려를 받는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여전히 사유 제산과 가족이 존재한다.

(2) 기개 있는 자에 상응하는 것은 군인, 즉 ‘수호자’ 또는 ‘보조자’로서, 밖으로 적을 방위하고 안으로 질서을 유지하여 국가를 확보해야 할 임무를 갖는다. 그들은 사욕을 가급적 소멸시키기 위해 교육과 부인 및 자식 그 밖의 모든 것을 공유해야 한다. 개인적인 이해가 전체에 대한 그들의 헌신을 방해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모든 사유(私有)가 해악으로 간주되며 모두가 하나의 대가족을 형성한다. 부인은 대체로 남자와 동등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

(3) 이성적인 것에 상응하는 최고 계급, 즉 통치자 또는 철학자는 국민 중에서 가장 고귀하고 현명한 자가 되게 마련이다. 이는 철인 치자로서 세상의 명예나 물욕을 초월하고 있는 자이다. 그는 지성(nous)의 화신이다. 이들의 사명은 입법과 그 실시, 특히 교육의 감독이다. 그들은 순번대로 최고의 관직에 취임하고 나머지 시간은 철학적 고찰에 소모한다. 즉 학문과 ‘선의 이데아’에 바치는 것이다. ‘선의 이데아’는 플라톤 윤리학의 정상이다. 그 본질적인 특성에서 보면, 플라톤의 국가는 최고의 도덕적 이상 실현을 위한 인간 사회의 교육 기관이다. 국가는 미래의 수호자와 통치자의 재능을 미리 아이들 때부터 배려하고 있다. 즉, 가장 고귀하고 건정한 남자는 가장 고귀하고 건정한 부인과 결합해야 한다. 철학자는 이 목적을 위해서 성적 생활에 대한 간섭도 주저하지 않는다.

플라톤은 『국가』제 5권에서 이러한 그의 이상에 대해 실현 가능성을 검토하고 있다. 그의 국가는 하나의 원형으로 어느 이데아도 다 그렇듯이 경험에 의해 완전히 도달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거의 도달할 수는 있는 것이다. 왜냐 하면, 이 국가의 여러 가지 요구는 사물의 본성에 입각해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이러한 국가의 존립을 원한다면 국민 생활은 물론 전혀 새로운 도덕 정신으로 충만되어 있어야 한다. 플라톤 자신이 아카데미아에서 실현하려고 한 새로운 교육이야말로 이것을 조성할 임무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당시의 성인들이 새로운 국가의 많은 혜택으로 말미암아 쉽사리 이 새로운 국가에 동의할 것이라고 플라톤은 낙관했다. 그러므로 실제로 “철학자들이 통치하기에 이르거나 혹은 국왕 및 권력자 등이 참으로 철학적 사색을 하게 되지 않는 한, 그 때까지 여러 나라들에서 아니 인간 족속에게서 해악이 그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한 그의 유명한 대목은 진지하게 도출된 결론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철인의 출현도, 그리고 이런 사람의 수용도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그는 노년에 이르러 '법률‘ 편에서 훌륭한 국가의 윤곽을 설계하고 있다. 즉 최고의 지성들이 모여서 입법을 하는데, 이들이 중지를 모아 모든 법조문 속에 지성을 최대한 반영한 다음 개인이 아닌 법이 국가를 다스리도록 하는 것을 제도화하고 있다.

또한 예나 지금이나 제 몫보다 더 차지하려는 인간의 탐욕이 얼마나 많은 문제를 야기하는지를 이 대화편은 잘 보여 주고 있다. 외국에서 전쟁 보다 더 무서운 내란도, 이 탐욕으로 인한 상호 불화에서 비롯되며, 이로 인해 이름으로는 하나인 국가이지만 더 이상 ‘하나의 국가’가 아닌 ‘여러 국가’로 분열된 상태에 있게 된다.

플라톤의 『국가』는 무엇보다도 인간이 어떻게 사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잘(훌륭하게) 사는 것’인지를 첫째 권부터 마지막 권까지 다루고 있다. 무분별하며 한없는 탐욕의 자제는 진정한 의미의 ‘잘(훌륭하게)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이해를 가질 때만이 기대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올바름의 문제도 이런 문제와 맞물려 다루어지고 있다.

저자 소개

플라톤(Platon : 기원전 427년~기원전 347년)은 아테네의 부유한 귀족 출신으로 이름은 아리스토클레스이며 유난히 어깨가 넓다고 해서 플라톤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는 글 쓰는 재주가 뛰어나 처음에는 시와 비극을 썼으나, 소크라테스의 문하에서 철학을 공부하게 된 후로는 이른바 애지자로서 진리 탐구에 주력했다. 후년에 그는 아카데미아를 세워 철학 강의를 생애의 주업으로 삼았다. 실제로 이 학원에는 각 분야의 학자들이 모여들어 학문 활동을 했으며, 여러 나라의 입법이나 정치적 자문에 응해 이 학원의 동료들이 파견되기도 했다.

그가 아카데미아의 입구에 “기하학을 모르는 자는 들어오지 말라.”고 써붙였다는 고사가 전해지고 있는데, 그것은 기하학이 무엇보다도 “이데아(Idea)"의 세계로 인도하는 좋은 길잡이가 되어 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경험적인 사물을 초월하는 이데아의 세계를 실재로 간주하고 개개의 사물을 그 이데아의 모사로 보았으며, 그 최고의 이데아를 ‘선의 이데아’라고 해서 역시 행동에 큰 비중을 두었다. 즉, 이 세상의 모든 훌륭함이란 완전한 이데아의 불안정한 영사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이다. 떠 이 이데아설은 혼의 불멸성과 성패를 같이한다. 이는 배움을 상기(想起)의 과정에서 설명한다. 이 지상에서 실재의 연약하고 불완전한 영상이 우리들로 하여금 과거에는 이미 알고 있었으나, 혼이 육신의 물질적인 불순물에 오염됨으로 말미암아 망각해 버렸을 것을 상기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국가관에서 지성의 화신인 철인에 의한 정치를 주장했다. 균등한 분배, 토지 개혁, 산아 제한 등의 선진적 개념도 이미 이 국가관에 내포되어 있었다. 특히 그의 철인 정치론은 ‘국가’편의 중심 사상으로 자리잡는다.

생각해 볼 문제

1. 플라톤의 ‘국가’에 나타난 사상 및 제도를 오늘날의 자유 민주주의 국가의 제도와 비교해서, 허용될 수 없는 부분은 어디인지 생각해 보자.
2. 플라톤은 국가를 사람의 신체에 비유해 설명하고 있다. 철학자는 머리, 군인은 가슴, 서민은 배에 해당한다. 앞의 글을 토대로, 이 비유가 갖는 오류에 대해 생각해 보자.
3. 플라톤이 현대 교육 제도에 끼친 영향을 생각해 보자.

 

 

[자료출처-대성학원]

출처 : 대학입시수능정보(재수,점수공개)
글쓴이 : 교육길라잡이 원글보기
메모 :

장자의 『장자』

『장자』의 핵심 내용

장자는 노자의 사상을 이어받아 자신의 사상을 심화시켰다. 그리고 그는 우화의 형식을 빌어, 즉 사람이나 사물에 의탁하여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있다. 장자의 사상은 인간관, 지식론, 자연관, 미학 사상 등 방대한 체계를 가지고 있다.

1. 장자의 인간관

장자는 인간을 일상적인 사람과 이상적인 사람으로 나눈다. 이상적인 사람은 도(道)를 깨달은 사람으로서 진인(眞人), 지인(至人)으로 표현된다. 반면 일상적인 사람은 공간적, 시간적으로 제한되어 있는 미미한 존재이다. 이러한 일상인은 환경과 교육에 얽매어 있기 때문에 더불어 도(道)를 논할 수 없다고 했다. 장자는 이를 우물 안 개구리에 비유한다.

우물 안 개구리와 더불어 바다에 대하여 말할 수 없는 것은 그가 살고 있는 터에 국한되어 있기 때문이오, 여름 벌레와 더불어 얼음에 대하여 말할 수 없는 것은 그가 살고 있는 때에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2. 장자의 지식론

장자는 인간의 감각 기관가 인식 능력의 한계 때문에 인간의 지식 역시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다고 설파한다. 즉 인간의 마음은 끊임없이 변화하며, 또 인간은 외부 사물에 의존하면서 그 마음이 밖을 향해 치달리기 때문에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얻은 지식은 상대적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특히 사람들은 자기를 기준으로 하여 선악과 시비를 판단하기 때문에 객관적인 제 3의 척도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장자에 의하면 지식은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즉 크다, 작다 하는 개념과 있다, 없다 하는 개념은 모두 상대적이다. 큰 것은 작은 것보다 크지만, 그것보다 더 큰 것의 관점에서 보면 작다. 지식은 사람과 지역, 시대,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을 뿐 아니라, 인간의 관점에서 보느냐 인간 이외의 사물의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다. 예컨대, 아름다움의 기준은 물고기, 새, 사슴의 입장마다 각각 다르다는 것이다.

장자는 인간이 누구나 승인할 수 있는 보편적 지식이 있는지에 대해 회의하였을 뿐만 아니라 삶과 죽음, 꿈과 생시, 나와 나 아닌 것을 구별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회의하였다. 그 유명한 호접몽(나비의 꿈)의 비유가 그것이다.

옛날에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된 일이 있었다. 훨훨 나는 나비가 되어 스스로 기분 좋게 느낀 나머지 장주는 자기 자신인지를 몰랐다. 갑자기 깨어 보니 놀랍게도 장주 자신이었다. 장주가 나비가 되었는지, 나비가 꿈을 꾸어 장주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장자는 참된 지식의 가능성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장자는 “진인(眞人)이 있은 뒤에 진지(眞知 : 참된 지식)가 있게 된다.” 고 말했다. 진(眞)이란 개념은 인위(人爲 : 억지로 무엇을 함)를 거치지 않은 ‘자연(自然 : 스스로 그러한 것)’ 그 자체를 의미한다. 여기에서 ‘자연’은 공기, 흙, 물, 동물, 식물 등 우리의 감각이나 의식의 대상을 뜻하지 않는다. 우리가 우리의 감각과 언어와 의식의 대상을 뜻하지 않는다. 우리가 우리의 감각과 언어와 의식의 대상으로 삼고 그것에 의존하며 살아야 하는 시공간적 존재는 ‘물(物)’ 또는 ‘만물(萬物)’로 표현된다. 자연은 이러한 만물을 만물되게 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자연은 곧 도(道)의 본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자연 곧 도에 관한 지식이 참된 지식인데 이는 인간의 감각이나 사유의 대상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내면세계에서 체득할 수 있는 것이다.

장자는 참된 지식을 얻기 위한 구체적 방법으로, 마음을 깨끗이 하는 심재와 마음을 오로지 한 뜻으로 모으는 전심일지와 세계를 잊는 좌망(坐忘)을 제시한다. 마음의 재계(齋戒)는 마음과 정신을 깨끗이 씻고, 사려 분별하려는 지적 활동을 신중히 하고, 오로지 구도자의 자세를 취하는 것이다. 심지(心地)를 전일(專一)하게 하는 공부는 분산된 의식을 하나로 집중하는 수양이다. 천지 만물의 뿌리는 둘이 아닌 하나이기 때문이다. 좌망은 정좌한 자세에서 자아, 사회, 자연 등 일체의 현상을 잊어버리는 정신의 경지이다.

그렇다면 장자가 말한 참된 지식을 얻은 경지는 어떠한 것일까? 장자는 포정해우(소 잡는 사람이 소의 살과 뼈를 분리하는 것)의 우화에서 득도의 경지를 묘사하고 있다. 그 경지는 두께 없는 칼날 즉 허심(虛心 : 마음을 비움)으로 골절 사이의 빈틈 즉 사물의 자연스런 결(天理 : 하늘 또는 자연의 이치, 理는 玉의 무늬결을 뜻하는 글자) 속에 있는 틈에 접하는 것이다.

포정(疱丁)이 문혜군을 위하여 소를 풀어내는데 손을 대고, 어깨를 기울이고 발로 짓누르고, 무릎을 버티며 소를 풀어 낼 때, 피륙이 갈라지면서 휙! 샹! 소리를 내고, 칼을 밀어 넣을 때 훅! 하며 내는 소리가 음악 소리에 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 탕임금 때의 악곡인 상림(桑林)에 맞추어 추는 춤과 합하며, 요임금 때의 함지(咸池)라는 악곡 가운데 하나인 경수(硬水)의 음절에도 들어맞았다. 문혜군 : 오! 훌륭하도다! 기술이 어떻게 이런 경지에까지 이를 수 있을까? (칼을 놓고) 포정 : 제가 좋아하는 것은 도(道)로서, 기술의 경지를 넘어선 것입니다. 처음 제가 소를 풀어 낼 때는 온통 소만이 보였습니다. 삼년 뒤에는 소의 몸체가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신명(神明)으로 만나되 눈으로 보지 않고, 감관과 사려 작용은 멈추어지고 신명이 움직이게 되었습니다. 소의 자연스러운 결(天理)을 따라 힘줄과 뼈의 틈 사이를 치고 칼을 골절 사이의 빈 곳으로 집어넣습니다. 소 몸체의 자연을 따르니 경락과 뼈에 엉킨 힘줄조차 부딪히지 않는데, 하물며 뼈이겠습니까? 훌륭한 백정은 해마다 칼을 바꾸나니 자르는 방법을 쓰기 때문이요. 보통의 백정은 달마다 칼을 바꾸나니 빠개는 방법을 쓰기 때문입니다. 지금 저의 이 칼은 19년을 사용하였고 풀어 낸 소도 수천 마리나 됩니다. 그러나 칼날은 아직도 숫돌에서 방금 갈아 낸 듯합니다. 소의 골절에는 틈새가 있으나, 칼날에는 두께가 없습니다. 두께가 없는 칼날로 골절 사이의 빈 틈에 넣으니 넓고 넓어서 칼날을 늘림에 반드시 넉넉함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19년이 지나도록 칼날이 숫돌에서 방금 갈아 낸 듯한 것입니다. 비록 그렇더라도 매번 뼈와 힘줄이 엉켜 붙어 있는 곳에 이르면 저도 쉽게 하기 어려움을 보고, 삼가고 조심하는 마음으로 경계하여 시력을 집중하고, 움직임은 서서히 하여 칼을 매우 가볍게 움직여 흙덩이가 땅에 쏟아지듯 휙 풀어냅니다.

3. 장자 사상의 현대적 의의

고전적 의미는 각자가 그것을 읽고 자신의 삶의 조건에서 그 의미를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장자의 가르침은 현대의 물질문명에 매몰되어 살아가는 우리에게 자신의 삶을 반성하게 하는 화두를 던져 준다. 장자의 사상에서 여러 가지 의의를 찾을 수 있겠으나, 여기서는 두 가지만 서술하겠다.

첫째로 상대주의적 관점이다. 사람마다 마음이 같지 않음은 그 얼굴이 갖지 않음과 같다는 말이 있듯이, 자신의 마음만을 표준으로 삼아 생각하고 말한다면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다. 특히 정치의 세계에서 독단에 기초하여 어떤 절대적인 기준을 강요하는 것은 전제적인 폭압이다. 사물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나아가 타인의 삶을 존중하여 더불어 살기 위해서는 상대주의적 관점이 필요함을 설파한 것이다.

둘째로 현대의 기술 문명사회에서는 전문가를 중요시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전문가들에게는 장자가 말한 참된 지식은 없고 기능만 있을 뿐이다. 참된 지식은 사물의 자연스런 결, 곧 천리(天理)를 깨닫는 것으로, 세속의 영달을 위해 추구하는 지식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참된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먼지가 끼고 오염된 마음 즉 사심(私心)을 정화하여 본래의 마음 즉 허심(虛心)으로 돌아가야 한다. 참된 지식에 도달하면 자신의 마음도, 사물도 해를 입지 않고 신명나게 어울릴 수 있게 된다.

저자 소개

장자(莊子)의 생애에 대한 기록은 매우 적다. 사마천의 ‘사기’에 다르면, 장자의 성은 장(將)이고 이름은 주(周)이다. 장자는 몽(蒙)땅에서 칠원리를 지냈으며, 맹자와 동시대 사람으로 생졸(生卒) 연대는 대략 기원전 369년에서 기원전 282년으로 추정되고 있다.

장자의 저술로 알려진 ‘장자(莊子)’ 라는 책은 ‘남화진경’, ‘남화경’ 등으로도 불린다. ‘장자’는 내편, 외편, 잡편을 합하여 총 33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편 7편은 장자의 직접적인 저작으로 여겨지며, 그의 주요한 사상은 대략 여기에 갖추어져 있다. 외편과 잡편은 장자의 문인과 후학들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장자 철학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생각해 볼 문제

1. 장자가 추구한 절대 자유의 정신세계는 개인 중심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공자는 사회적 관계를 중심으로 자신의 사상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장자가 정치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하였을까 생각해 보자.
2. 장자의 자연관에 근거를 두고, 현대의 환경 문제에 관하여 생각해보자.

 

 

[자료출처-대성학원]

출처 : 대학입시수능정보(재수,점수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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