홉스의 『리바이어던』

1. 홉스의 『리바이어던』이란 무엇인가?

철학자들은 어느 시대나 그 시대의 중요한 문제를 분석하고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다. 철학자이며 수학자인 홉스 또한 17세기 당시 유럽 사회의 무질서를 종식시키고 계속적으로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 나름대로 방법을 제시하였다. 그것은 ‘인간은 어떠한 본성을 가지고 있는가.’에서 출발하여 ‘국가 권력의 근거는 무엇인가.’라는 국가 권력의 정당성 문제로 나아가고 있다. 즉, 근대 자연법 사상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홉스는 인간 본성과 자연 상태에 대한 이론적 구성을 통해 국가 권력을 정당화하면서 근대적 권리와 의무에 관한 이론을 전개하고 있다.

홉스의 『리바이어던』은 인민과 군주의 정당한 통제 관계를 제시하며 세계를 전망하고 있다. 근대 민주주의의 기초를 쌓은 그는 국가를 거대한 괴물인 ‘리바이어던(Leviathan)’으로 상정하고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서로 잡아먹으려는 이리에 비유하면서 그 탐욕을 억제하기 위한 규제로서 통치자와 피치자(被治者) 간의 ‘계약’을 제시한다. 탐욕스러운 인간의 이기심에 대한 공포를 규제할 수 있는 대상이 곧 국가인 ‘리바이어던’인 것이다.

2. 홉스의 인간 본성관은 어떠한가?

홉스에 의하면 인간의 모든 정념(情念)은 ‘욕구’와 ‘혐오’로 이루어지고 여기에서 인간 행동의 기본적 원리가 나온다. 홉스는 모든 인간의 공통적인 심리와 행동을 분석해 냄으로써 인간 행위의 법칙을 밝히고 안정된 사회가 가능한 조건들을 체계화하고자 하였다. 그는 ‘욕구’와‘혐오’라는 단순한 심리적 장치로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감정을 설명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즉, 모든 인산 행위의 생물학적 원리는 ‘자기를 보존하고자 하는 힘’이며 자기 보존은 생물적 존재의 지속을 의미했다.

이러한 인간은 자기 보존을 위해 힘을 무제한으로 추구하게 된다. 왜냐하면 공권력이 없는 평등한 상황에서 상호 불신과 공포(두려움)는 힘에 의한 자기 보존을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공포(두려움)’는 자연 상태에서 나타나는 가장 일반적인 감정인데, 이러한 공포 때문에 겸허하게 자신의 한계 내에서 안락을 즐기려는 사람들조차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힘을 증대시키게 된다.

홉스는 이처럼 인간 존재를 기계적으로 끊임없이 운동하는 자연물의 중의 하나로 보기 때문에 자기 보존은 ‘이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힘의 추구’에 의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자연물이 운동하거나 힘을 추구하는 것은 목표점이 없기 때문에 어떤 상태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욕구에서 욕구로 끊임없이 나아가는 것이다. 여기에서 인간의 지극히 이기적이고 비사회적이며 자기 보존의 욕구에만 충실할 뿐, 타인과는 본능적으로 ‘경쟁’과 ‘투쟁’의 관계를 가지게 된다. 사람들 사이에서 분쟁을 유발하는 원인은 ‘경쟁’, ‘불신’ 그리고 ‘영광(지배)’ 등으로 이러한 것들만 존재하는 자연 상태는 결국 전쟁 상태가 되고 그 전쟁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된다.

그러므로 인간들은 이 상태를 변화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때 인간은 적나라한 폭력을 경험하면서 평화를 지향하게 되고 이성에 의해 타인과 ‘동의(同意)’를 하게 된다. 이성에 의한다는 것은 바로 자연법의 발견이고 이 자연법은 인간들이 전쟁 상태에서 벗어나 자기 보존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원리가 된다.

3. 홉스의 자연법 사상과 사회 계약

자연 상태를 종시시키고 시민 사회의 평화로운 상태로 넘어오게 만든 것이 바로 자연법이다. 홉스에게 자연법이란 이성에 의하여 발견된 계율, 또는 일반 법칙이다. 그러나 이것은 자연권을 침해하거나 자연권에 제한을 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보존의 욕구, 힘의 확장의 욕구를 최대한 달성하고자 하는 법칙이다. 즉 홉스에게 이성 능력이란 욕망 충족을 위한 수단으로의 도구적 합리성에 불과한 것이다.

이러한 자연법에 따르면, 결국 자연 상태에서 죽음의 공포를 피하기 위한 유일한 길은 서로를 죽이지 않겠다는 약속이고 이것은 자기 보존을 위한 무한한 힘의 추구라는 권리를 포기하고 상호 양도하는 ‘사회 계약’을 의미하게 된다. 그러나 다양한 개인들의 집합에 불과한 시민 사회에서 계약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점을 증명할 수 없어서 국가라는, 강제력을 독점하는 ‘거대한 괴물(리바이어던)’을 상정하게 된 것이다.

리바이어던의 본질적인 특징은 국내외의 평화를 지키고 회복하는 데에 필수적인 독점권을 가진다는 점이다. 홉스는 이러한 독점권이 신민들에게 분할되거나 양도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절대 국가 불가피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이 곧 도덕적인 우월성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국가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닌 수단이고, 목적은 인간의 평화롭고 안정된 생활의 보장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권자는 자연법에 의해 ‘신민의 안전’을 보장할 의무가 있고 신민 또한 폭력의 공포로 부터 해방되어 자유로운 삶을 누리기 위해 국가 권력에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하는 것이다. 자연 상태에서 벗어나 ‘국가’는 질서의 유지자로서 ‘계약’에 의해 창조되고, 인민은 그 국가에 전적으로 복종해야 한다는 점이 홉스의 사회 계약 원리이다.

4. ‘리바이어던’의 사회 계약적 의의

봉건적 질서가 해체되고 모든 개인이 공동체로부터 독립한 자율적 실체가 되었을 때, 개인들이 어떻게 사회를 구성하고 질서를 유지하는가에 대한 문제의식과 대답이 바로 근대의 『사회 계약론』이라고 할 수 있다.

홉스의 사회 계약론은 물리적 힘이 자연적으로 동등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즉 본질적으로 도덕적인 지위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 사이의 권리의 동등성은 물리적 동등성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이러한 홉스의 사회 계약론은 존재론적 개인주의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들은 사회를 단순히 개인의 집합으로 간주할 뿐 아니라 사회의 성격 또한 개인의 성격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 본다. 자유주의가 존재론적 · 도덕적 개인주의를 자신의 뿌리로 삼고 있다는 것은 곧 사회나 어떤 사회적 집단보다도 개인에게 더 높은 도덕적 가치를 부여하며 개인의 권리와 요구가 우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홉스에게 사회 계약이란 자기 보존이라는 최고선(最高善)의 관점에서 목적 · 수단 관계를 효율적으로 계산한 도구적 합리성의 결과이며 결국은 ‘국가(리바이어던)’라는 지배 장치에 의존하는 시민 사회의 모습을 만들게 된 것이다. 홉스의 사회 계약에 등장하는 국가가 근대 국가의 모습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의 권리 이론에서는 근대적 권리의 단초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권리를 외부적 힘에 귀속시키는 것이 아니라 권리의 양도라는 ‘계약’에 의해 국가와 인민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 소개

홉스(Thomas Hobbes ; `1588~1679)』는 1588년 4월 5일 영국의 가난한 목사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16세기 문법 학교에 다니면서 르네상스적 교육을 통해 라틴어와 희랍어를 능숙하게 익히게 된다. 16세기와 17세기 유럽에서의 이러한 재능은 하층 계급 소년에게 사회적 출세의 구단을 제공해 주었다. 그는 귀족 가문의 입주 교사로 채용되었는데 이것은 가족의 유대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과 많은 제도들로부터 그를 격리시켜, 급진적이고 독특한 지식을 형성하게 하였다.

홉스는 1640년 말에 ‘철학의 여러 요소’를 기점으로 ‘자연법과 정치법의 여러 요소’, ‘법의 여러 요소’ 등을 통해 ‘자연법’의 원리를 핵심으로 ‘법’의 요소들을 설명하고자 하였다. 홉스가 ‘리바이어던(Leviathan)’을 저술한 것은 지병으로 기력이 쇠진해졌을 때였는데, 1651년 출간되면서 영국 내의 ‘왕정주의’라는 대의명분을 배신하는 글이라고 비난받게 된다. 특히 정통 신학에 대한 배반이라고 여겨지는 무신론적 언급은 대단한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 그 이후에도 홉스는 ‘영국 보통법에 관한 철학자와 학생의 대화’, ‘이단(異端)과 그 처벌에 관한 역사적 담론’, ‘거대한 야수’, ‘교회사’를 통해 영국의 보통법에 관한 훌륭한 논의를 제시하였다. 그는 1679년 병으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인간의 자기 보존 속성과 주권자의 권위 그리고 이단(異端)에 대한 끊임없는 문제를 정리하였다.

생각해 볼 문제

1. 국가(리바이어던)라는 것이 왜 필요한지, 그것의 정당성은 무엇인지 홉스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자.
2. 홉스가 생각했던 국가(리바이어던)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국가의 차이점을 생각해 보자.
3. 홉스의 인간관과 맹자의 인간관(성선설)을 비교하여 바람직한 인간관은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보자.

 

 

[자료출처-대성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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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의 『방법 서설』

『방법 서설』의 핵심 내용

1637년에 출간한 『방법서설(Discours de la methode)』의 원제목은 『이성을 잘 인도하고 학문의 진리를 탐구하기 위한 방법 서설, 그리고 이 방법에 관한 에세이들인 굴절광학, 기상학 및 기하학』이다. 이 책은 모두 6부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에서는 기존 학문들에 대한 자서전적인 고찰을 시도하고 있으며, 제2부에서는 학문 방법의 네 가지 규칙을 설정하고, 제3부에서는 이 방법에서 끌어 낸 도덕 규칙들에 대해 논하고 있다. 제4부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구절이 나오는 대목인데 형이상학의 기초로서 하느님과 인간 정신이 현존하는 근거들을 다루고 있는 부분이다. 제5부에서는 자연학 문제들의 순서를, 제6부에서는 자연탐구의 조건과 집필 동기들을 각각 서술하고 있다.


1. 기존학문들에 대한 자서전적 고찰

거짓된 것에서 참된 것을 구별하고 올바로 판단하는 능력이 이성이다. 이것은 자연적으로 동등하게 누구나 타고난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것을 잘 사용하는 것이다. 올바른 방법에 의한 학문 탐구를 통해서만 인간의 정신은 진리의 길로 인도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어릴 적부터 많은 학문을 배웠는데, 공부를 하면 할수록 내가 무지하다는 것만 점점 더 발견할 뿐 그 어떤 이득도 없는 것처럼 여겨질 정도로 많은 의심과 오류에 빠져 곤혹스러웠다. 한 가지 것에 대해서는 단 하나의 참된 의견만 있을 터인데, 아주 많은 의견들이 학자들에 의해 실제로 서로 주장되고 있음을 보고서, 나는 단지 그럴 듯하게 보이는 것을 거의 거짓된 것으로 간주했다. 다른 사람들의 학문을 공부하고 생활 방식을 관찰해 보았을 때, 나에게 확신을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로써 나는 선례와 관습을 통해 확신하게 된 것을 너무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후 나는 세상이라는 책 속에서 공부하고 경험을 쌓으면서 내 안에 있는 이성의 길을 따라 진리를 추구하게 되었다.

2. 학문의 진리를 탐구하는 네 가지 규칙

① 명증적으로 참이라고 인식한 것 이외에는 그 어떤 것도 참된 것으로 받아들이지 말 것(명증성의 규칙). 즉, 속단과 편견을 피하고 명석 · 판명한 것 외에는 그 어떤 것도 믿지 말라는 것이다.

② 검토할 어려움들을 각각 잘 해결할 수 있도록 될 수 있는 대로 작은 부분으로 나눌 것(분해의 규칙).

③ 생각들을 순서에 따라 이끌어 나갈 것(종합의 규칙). 즉, 가장 단순하고 알기 쉬운 것에서 시작하여 가장 복잡하고 어려운 것으로 순서를 상정하여 생각해 가라는 것이다.

④ 아무것도 빠뜨리지 않았다는 확인이 들 정도로 완벽한 열거와 전반적인 검사를 어디서나 행할 것(열거의 규칙). 즉, 문제의 모든 요소를 다 열거하고 그 중의 단 하나라도 빠뜨리지 말라는 것이다.

3. 세 가지 도덕 규칙

참된 인식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올바른 실천이다. 그러나 참된 인식이 아직 발견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잠정적으로 다음과 같은 규칙을 따라야 한다.

① 내 나라의 법률과 관습에 복종하고, 어렸을 적부터 신의 은총에 의해 배워 온 종교를 확고하게 견지하며, 나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 가운데 가장 사려 깊은 사람들이 실생활에서 보통 취하고 있는 가장 온건하고 극단에서 먼 의견에 따를 것.

② 행동할 경우에는 되도록 확고하고 결연한 태도를 취하고, 아무리 의심스런 의견이라고 일단 그것을 취하기로 결정했다면 아주 확실한 것인 양 따를 것.

③ 언제나 운명보다는 나 자신을 이기려고 노력하고, 세계의 질서보다는 내 욕망을 바꾸려고 노력할 것.

4. 방법적 회의 :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의심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의시함으로써 조금도 의심할 수 없는 것을 찾아내야 한다. 왜냐 하면, 과거의 불확실한 지식의 체계들을 무너뜨리고 다시는 흔들리지 않는 확고부동한 지식의 기초를 세워야 하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의심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전적으로 거짓된 것으로 간주하여 던져 버리고, 이렇게 한 뒤에도 내 신념 속에 확실한 것이 남아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렇게 해 보면, 모든 것이 거짓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동안에도 이렇게 생각하는 나는 반드시 어떤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든 것을 아무리 의심해 보아도, 모든 것을 의심하면 할수록 ‘의심하고 있는 나’를 부정할 수는 없다. 따라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는 아주 확고하고 확실하며, 다른 명제들이 근거하고 있는 제일 원리가 되는 것이다.

한 명제가 참되고 확실하기 위해 요구되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것의 확실성은 도대체 어디에 근거하고 있는가? 만일 내가 생각하기 위해서는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아주 명석하게 알지 못했다면,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가 진리라는 것을 확신시켜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명석하게 그리고 판명하게 인식하는 것은 모두 참이라는 것을 진리의 일반적 규칙으로 삼을 수 있다.

저자 소개

‘근대 철학의 아버지’라 부리는 『르네 데카르트(Rene Descartes ; 1596~1650)』는 브르타뉴 지방 고등 법원 평정관인 조아셍 데카르트의 셋째아들로 프랑스 중서부 투렌의 라 에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13개월 만에 어머니를 여의고 외할머니와 유모의 손에 의해 자라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명상하는 습관이 형성되었고, 학문의 길에 들어선 뒤로는 줄곧 고독을 찾아 숨어 살면서 사색에 잠기곤 했다. 또한, 그는 좋지 못한 건강 상태로 말미암아 아침에 늦게 일어나는 버릇이 있었다. 데카르트는 10살 때부터 18살 때까지 제수이트 교단이 창설한 라 플레슈 학교에서 공부했다. 여기서 그는 고전적 학문과 스콜라 철학을 배웠다. 이 학교를 졸업하고 푸아티에 대학에 입학하여 법학과 의학을 공부했다. 대학을 나온 데카르트는 기사(奇思)적인 생활을 즐기다가 이윽고 사방에서 30년 전쟁이 터지자 기사(騎士)로서 전쟁에 참여하였다. 그러던 중 23세 때 울름 근교의 작은 마을에서 꾼 꿈을 통해서 ‘놀라운 학문의 기초를 발견’하는 영감을 받고 인간의 모든 지식을 하나의 통일성 있고 질서 있는 체계로 수립하고자 하는 사명감을 얻었다. 이때부터 그는 자기 인생의 목적을 정하고 그 목적을 위하여 일로 매진(一路邁進)한다. 데카르트의 저서로는, 『정신 지도를 위한 규칙들』, 『방법 서설』, 『철학의 원리』, 『정념론』, 『인간론』, 『자연의 빛에 의한 진리 탐구』 등이 있다.

생각해 볼 문제

1. 데카르트는 방법적 회의를 통해 기존의 모든 지식에 의문점을 제기하고, 그 지식이 자신에게 확신을 줄 때만 그것을 참진리로 인정하였다.
2.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이 명제를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를 통해 과연 참진리인지 생각해 보자.
3.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는 모든 진리와 존재의 근거를 ‘나의 의식’에서 찾고 있다. 이러한 인식의 태도는 흔히 주체 중심주의, 이성 중심주의라는 비판을 받고 있는데, 이 점에 관해 친구들과 토론해 보자.

 

 

[자료출처-대성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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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가의 『북학의』와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

1. 자본주의를 싹트게 한 두 학자

박제가는 1750년(영조 26)에 서자로 태어나 온갖 수모와 멸시를 당하며 성장했지만, 어려서부터 문장, 글씨, 그림 등에 뛰어난 재능을 보이며 조선 시대의 사회상을 바라보는 눈을 키워 갔다. 그는 19살 때 박지원의 문하에서 실학을 연구했고, 국가의 의로움과 백성의 평안함을 위해서는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사상을 토대로 그 당시 선진국인 청나라의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북학론'을 주장했다. 29세가 되던 1778년(정조3)에는 채제공의 수행원 자격으로 청나라에 가서 새 학문을 배우고 귀국한 후, 청나라의 풍속과 제도를 소개한 『북학의』를 저술하게 된다. 박제가는 이 책에서 실생활에서 실제로 필요한 것부터 먼저 배우고 개량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차제를 개선하고, 도로를 개량하여 교통을 편리하게 한 후 물자의 거래를 촉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농기구의 개량과 농업 기술의 개선을 역설하는 한편 상공업의 발전과 적극적인 무역 활동을 권장 하는 등 중상주의 정책을 펼치며 당시의 정치, 사회 현실로서는 매우 혁신적인 주장을 펼쳤다.

1923년 영국에서 세관원의 아들로 태어난 아담 스미스도 1763년부터 3년 동안 프랑스를 여행하면서 그 당시 농업을 경제의 중심으로 여기는 중농학파 경제학자들과 많은 교류를 나눴다. 그 역시 귀국 후 여러 가지 저작물을 남겼는데, 그 중 1776년에 출판한 『국부론』은 자유방임주의 경제 이론의 효시이자 고전파 경제학의 기초를 형성하는 경제학 분야의 가장 중요한 저서이다. 『국부론』에서 그는 국가의 부를 증대시키는 방법으로 분업의 역할을 강조했으며,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자유방임의 효과를 최대한 살려 자유 무역을 통해서 각국의 이익을 증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국부론』은 근대 자본주의 체제의 특징적인 모습을 체계적으로 분석한 최초의 저작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처럼 박제가는 중상주의 정책을 펼치면서 조선의 발전을 갈망했고, 아담 스미스는 중상주의를 배격하면서 자유 방임주의를 주장했다. 물론, 두 사람이 처한 역사적 상황과 경제관은 서로 달랐지만, 이 두 사람에 의해 그들의 사회에 자본주의가 싹트기 시작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럼 박제관의 『북학의』와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을 통해 이들 두 학자가 추구하려고 했던 바를 알아보자.

2. 박제가의 『북학의』

 (1) 『북학의』의 저술 배경

박제가는 1778년 조선의 사신으로 청나라에 가는 채제공의 수행원 자격으로 청나라에 가서 청나라 학자들과 교류하며 새로운 문물을 접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그 동안 자신의 연구한 것을 실제로 관찰, 비교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얻었고, 3개월 동안 청나라를 여행하고 1개월 동안 연경 시찰을 할 수 있었다.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그 동안 자신이 연구한 선진 문명과 연경에서 직접 본 경험적 사실에 자신의 견해를 더해 북학론을 저술한 것이 바로 이 『북학의』이다. 『북학』이란 북쪽의 학문, 그러니까 청나라의 학문을 뜻하며, ‘의(義)’는 논의하다 또는 거론하다 정도의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북학의』는 ‘청나라에서 새롭게 접한 학문에 대하여 논의하는 책’ 정도의 의미를 지니는 셈이다.

당시의 시대 풍조로 보아 청나라인 중국을 선진국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매우 진보적이면서도 혁신적인 사상이다. 왜냐 하면 현실적으로는 정치적인 대외 정책으로 말미암아 청나라와 사대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도,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를 멸시하는 풍조가 더 팽배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청나라의 지배 민족이 한족이 아니니 만주족이라는 사실은 이러한 이유를 대변해 주기도 한다. 박제가는 이러한 시대 풍조에 반론을 제기하면서 받게 될 박해를 무릅쓰고 조선이라는 나라를 구하고, 백성의 가난을 구제하는 길은 오직 『북학』밖에 없다는 소신을 바로 『북학의』를 통해 펼쳤던 것이다.

 (2) 실학의 의미

실학(實學)은 조선 후기에 대두된 새로운 학풍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 그 이전의 학문인 주자학이 현실과는 동떨어진 철학적 관념론에 치우쳐 있었던 것에 비해서, 현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했던 학풍이 바로 실학이다. 그러나 실학은 그런 의미가 대두되기 이전부터 사용되었는데, 주자학자들도 자신들의 학문을 실학이라 불렀고 사실상 유학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했다. 이들은 유학이 아닌 모든 다른 학문을 허학으로 불렀으며, 특히 불교를 대표적인 허학으로 취급했다. 즉, 주자학자들의 실학이라고 불렀던 유학은 다른 사람들과 부대끼며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상과, 그러한 일상 가운데 형성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로 이루어지는 세계이외에는 그 어떤 것에도 절대 관심을 두지 않는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유학이 곧 실학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조선 후기에 새롭게 대두된 학풍으로서의 실학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한 마디로 말하자면 우리가 오늘날 실학자들이라고 규정하는 당시의 학자들은 자신들을 유학자로 여겼을 뿐,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실학자’로 자처하지 않았다. 요컨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실학 또는 실학자라는 개념은 어디까지나 역사적 관점에서 오늘날의 우리가 조선 후기의 사상, 사상가들을 분류하고자 고안한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박제가 역시 유학자였으며, 역사적으로는 조선 후기의 실학자였던 셈이다.

 (3) 『북학의』의 주요 내용과 의의

박제가는 그가 생존하던 당시의 중국 문물제도를 자세히 소개하면서, 그러한 선진 기술을 도입하여 농업을 중심으로 한 여러 분야의 혁신을 이루려고 했다. 이런 내용을 중심으로 한다는 측면에서 『북학의』는 기본적으로 조선 후기의 실용서라고 할 수 있다. 박제가의 입장에서는 병자호란 이후 별다른 전란 없이 백여 년 동안 평화가 지속되고 백성들이 호화스러운 생활를 하지 않는데도 조선이 늘 빈곤한 까닭은, 과학 기술과 문물제도가 낙후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그는 그러한 빈곤과 낙후의 원인을 앞서가는 중국의 선진 기술을 도입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북학의』를 단순하게 실용서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 박제가는 이 책에서 자신이 청나라에서 접한 문물을 단순하게 소개해 놓은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의 자신의 입장도 자세하게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내용과 의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이용후생

박제가는 『북학의』의 서문에다 다음과 같은 언급을 한다.

"대게 삶을 이롭게 하고 넉넉하게 하는 것에 하나라도 빠진 것이 이으면, 올바른 덕을 해치게 된다."

이처럼 박제가의 『북학의』에서는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정신을 일관되게 추구한다. 특히 여기에서는 일상 생활 속에서 유용하게 쓰이는 많은 도구, 물건의 제작법, 사용법 등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윤리, 도덕과 같은 공허한 관념에 몰두했던 이전의 유학자들과는 아주 다른 태도와 시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구체적인 문물과 제도의 개선을 통해 백성들의 삶을 이롭고 풍요롭게 하는 것이야말로 윤리, 도덕을 바로 세우는 기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용후생의 측면에서 보면 이전의 주자학은 심각한 문제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고, 그래서 그는 『북학의』의 병론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실속이 없는 말을 잘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으나, 도무지 실천하여 구체적인 효과를 거두는 데에는 부족하다."

이러한 이용후생의 정신은 박제가의 자연관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전통적인 주자학에서는 이미 주어진 자연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하면 도덕적, 윤리적으로 올바른 삶을 살 수 있을 것인지를 궁리한다. 이에 비해서 박제가는 이용후생을 위해 적극적으로 개발해야 할 대상으로 자연을 이해한다. 동아시아 전통 사상에서 자연을 이루는 기본적인 요소로 이해되어 온 오행에 대해서도 백성들이 이용하여 생활하는 것으로서, 날마다 사용하여 빠뜨릴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오행을 철학적인 원리로 이해하지 않고 일상생활 속에서 널리 이용하는 구체적인 사물, 즉 이용후생의 수단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박제가에게 오행은 일종의 생활 필수품이었다. 이용후생을 위해 적극적으로 개발해야 할 대상이 자연이라면, 그러한 자연 개발의 도구, 즉 농기구와 같은 것의 중요성은 두말할 나위 없었던 박제가는 그래서 이렇게 말했는지도 모른다.

"우리나라에 농기구가 변변치 않은 것은 예나 지금이나 남이나 북이나 모두가 꼭 같다. 쟁기와 보습을 사용해서 흙을 갈고 나면 더 이상 사용할 수 있는 농기구가 없다."

  ② 전통적인 검약주의에 대한 비판

전통적인 유학에서는 물질적인 욕심을 극도로 경계한다. 나라를 부유하게 하는 방법도 비용을 절약하고 백성들의 사치를 금하는 정도에 머물렀던 것이 보통이다. 욕망을 억제하여 검소한 생활을 하는 것, 그래서 도덕적으로 흠이 없는 삶을 사는 것을 이상(理想)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나라를 망친 왕들은 대부분 극도의 사치를 부린 왕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그런데 박제가는 유학의 이러한 관점에 정면으로 이의를 제기한다.

"사치가 날로 심해진다고 말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그들은 근본을 알지 못한다. 다른 나라는 진실로 사치로 인해 망하기도 했지만, 지금 우리나라는 검소 때문에 쇠퇴하고 있다."


"물질을 소비하고 사용하는 방법을 모르면 만드는 방법을 모르게 되고 만드는 방법을 모르면 백성이 날로 궁핍해진다. 재화는 우물에 비유할 수 있다. 퍼내면 가득 차고, 사용하지 않으면 말라 버린다."

즉, 화려한 무늬의 비단 옷을 입지 않으니 비단 짜는 기계가 없어지고 그 기술도 쇠퇴하여 기술자가 없어진다. 그렇게 되면 결국 직조 기술 전반이 쇠퇴하여 백성들은 언제나 남루한 옷을 입을 수 밖에 없다. 이러한 박제가의 견해는 결국 초보적이나마 근대적인 경제 원리를 지적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소비가 촉진됨에 따라 그에 부응하는 생산 증가와 생산 기술의 혁신이 이루어지고, 전체적으로 경제가 발전하여 삶이 윤택해지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셈이기 때문이다.

도덕적인 삶, 윤리적인 삶에 주안점을 두었던 전통적인 유학자들과는 달리 박제가는 윤택하고 넉넉한 삶, 물질적인 이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소비하는 삶을 중시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박제가가 그런 삶을 중시했던 것은 단순히 인간이 욕망을 마음껏 충족시키며 살아야 한다는 쾌락주의와는 맥락이 다르다. 전통적인 검약주의에 대한 박제가의 비판은 어디까지나 궁핍한 백성의 삶을 개선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③ 중상주의 정책의 강조

박제가는 중국이 부유한 이유를 상업의 발달에서 찾는다. 중국과 조선의 상가를 비교하면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 종로 상가는 그 전체 거리가 일 리도 되지 못한다. 그러나 중국의 마을을 지나가면 가게가 계속 이어져 몇 리나 된다. 또한 수출입이 번성한 것과 품목의 다양함은 우리나라 전체를 더해도 미치지 못한다."

이처럼 박제가는 상업을 진흥시켜 각 지역 간의 물자 교류를 원활하게 만들고 소비를 장려하여 생산 활동을 진흥시키며 생산 기술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는데, 이 역시 전통적인 유학의 입장에서 보면 매우 혁신적인 생각이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는 전통적인 사회 계층 구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장사꾼을 천시하고 선비만을 존중하는 풍토가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 박제가는 이렇게 말한다.

"수륙 교통을 통해 물품을 판매하고 무역하는 일을 모두 사족(士族)에게 허락하여 호적에 돌릴 것을 청합니다."

박제가는 국내의 상업 유통뿐만이 아니라 더 나아가 외국과의 무역을 활성화할 필요성도 강조한다. 그 구체적인 방안이 『북학의』 의 통강남절강상박의(通江南折江商舶議)에 나와 있다. 이 제목을 풀어 옮기면, '중국의 강남 및 절강 지방과 상선을 통해 교역하는 것에 대한 견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의 등주, 내주의 배가 장연에 정박하고, 금부, 해개의 물건을 선천에서 교역하며, 장강, 절강, 천주, 장주 지역의 여러 재화를 우리나라의 은진, 여산 사이에 모이도록 합니다. 그렇게 하면 영남 지방의 면(綿)과 호남 지방의 모시와 서북 지방의 실과 삼베 등이 중국의 비단, 담요와 교환될 것이고, 각 지방의 산물을 중국의 금, 은, 병갑, 약재 따위와 교환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선박, 수레, 궁실, 기물의 이로움도 배울 수 있습니다."

요컨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지리적 특성을 이용해서 중국과의 해상 무역을 활성화 시키자는 견해이다. 이 글 다음에는 중국뿐만 아니라 안남(베트남), 유구(오키나와 지역), 대만 등으로까지 차차 무역 범위를 확대해야 한다는 의견이 이어진다. 이러한 박제가의 견해는 결국 조선의 문호를 여러 나라에 개방하자는 주장이나 다름없었으니, 당시로서는 무척 혁신적인 주장이었다.

 (4) 박제가는 자신의 주장을 실현했는가?

그렇다면 『북학의』에 나타나 있는 박제가의 주장들은 얼마나 실현되었을까? 안타까운 일이지만 박제가의 주장은 모두 『북학의』라는 책 속의 주장으로만 끝나고 말았다. 물론 박제가 뿐만이 아니라 실학자라 불리는 사상가들 대부분의 주장은 이와 같은 운명이었다.

박제가가 『북학의』에서 전개한 여러 주장은 당시 지배층의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만큼 그의 주장은 혁신적이었고, 어떤 의미에서는 시대를 앞선 주장이었다. 그가 양반의 서자 출신이라는 사실도 이러한 그의 주장과 연관 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비록 정조의 각별한 정책으로 서자 출신들도 제한적이나마 능력에 따라서 등용되기는 했으나 그들이 실질적으로 국가 정책의 입안과 집행에 참여할 수 있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러한 좌절 속에서 서얼 출신의 지식인들은 기존의 현실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지닐 수 이었다. 기존의 체제에 안주하기만 하면 가문과 일신의 영달을 누릴 수 있었던 고위 관료들에게 기존 체제의 개혁을 기대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박제가는 자신의 뜻을 제대로 펼치지 못한 실패한 사상가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의 모순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그것을 고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용기 있게 발언한 사람이라면, 비록 그의 발언이 현실화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그는 결코 실패한 사상가가 아니다. 오히려 위대한 사상가일수록, 어느 정도는 시대를 앞서 나가는 것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2.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은 과학적 경제학의 시작은 언제부터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아담 스미스가 『국부론』을 발간한 1776년부터라고 답한다. 아울러 경제학 분야를 대표하는 한권의 고전을 선택하라고 할 때에도 스미스의 『국부론』을 선택하는 사람이 많다. 이와 같이 스미스의 『국부론』이 가장 대표적인 경제학 저작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

 (1) 분업의 강조

『국부론』의 서두에서 아담 스미스는 『인간은 본성적으로 교환자이다.』라고 주장한다. 『국부론』의 1편 1장에 따르면, 노동 생산력의 향상, 곧 노동 과정에서 발휘되는 숙련, 기교, 판단이 향상되는 원인의 대부분은 분업의 결과였다. 그런데 수많은 이익을 가져오는 분업은 인간이 자신의 지혜로 그것이 가져다 줄 일반적인 풍족을 예상하여 사회에 도입한 것은 아니다. 분업은 인간성의 어떤 성향으로부터 매우 천천히 나타나게 된, 점진적이긴 하지만 필연적으로 발생한 결과이다. 그 성향이란 하나의 물건을 다른 물건과 교환하고 거래하는 성향이라고 말한다.

물론, 아담 스미스는 이 성향이 더 이상 설명할 수 없는 인간 본능 중의 하나인지 또는 이성과 언어의 속성에서 나오는 필연적인 결과인지는 『국부론』에서 다룰 주제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인간은 교환하려 하지만 동물들은 교환하려 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아담 스미스는 인간이 인간인 것은 교환하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결론짓고 있다. 따라서 인간은 본성적으로 교환자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인간은 교환자일 때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이다. 이는 곧 경제주의적 인간관을 나타내고 있는데, 경제주의에 따르면 경제행위 혹은 상업 행위는 인간이 자신의 사회적 혹은 합리적 본성을 삶 속에서 드러내 보여 주는 하나의 고유한 표현 양식이다. 결국 아담 스미스는 『국부론』의 출발을 경제주의적 태도에 맞춰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단지 아담 스미스가 가격 기구만을 분석했다면 시장 경제가 확립된 이후인 현대에 과연 『국부론』이 기여한 점이 있을까 의문시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국부론』의 분업 이론과 가격 이론, 나아가 아담 스미스가 윤리학, 법학, 신학 분야에서 남긴 다른 저작을 통합적으로 이해한다면, 아담 스미스가 현대 사회에도 여전히 기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국부론』에서 부의 원천은 노동이며, 부의 증진은 노동 생산력의 개선으로 이루어진다고 주장하고, 생산의 기초를 분업에 두었다. 그는 분업과 이에 수반하는 기계의 사용을 위해서는 자본의 축적이 필요하며, 자유 경쟁에 의해서 자본 축적을 꾀하는 것이 국부 증진의 정도(正道)라고 역설하였다.

(2) 보이지 않는 손과 개인의 이기심

자유 시장 경제 체제에서는 무엇을, 어떻게, 그리고 누구를 위하여 생산할 것인가라는 경제의 기본 문제를 결정짓는 요인이 바로 가격이다. 각 경제 주체는 가격의 변동에 따라 행동을 조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격 변동의 신호에 따라 소비자는 효용(만족)이 최대가 되도록 소비하고, 생산자는 이윤이 최대가 되도록 생산한다.

아담 스미스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의 처지를 개선하려고 하는 자연적인 이기심에 따라 행동하면 이른바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하여 모든 경제 활동이 조정되고 개인과 사회의 조화가 실현된다는 낙관론을 펼쳤다. 즉 가격의 능동적인 자동 조절 기능에 의해 경쟁 시장은 수요, 공급의 균형이 부지불식간에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에 아담 스미스는 개인의 이기심 추구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우리가 저녁 식사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정육업자, 양조업자, 제빵업자들의 자비심 때문이 아니라 그들 개인의 이익 추구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생산물의 가치가 극대화되는 방향으로 자신의 자원을 활용하려고 노력한다. 그들은 공익을 증진하려고 의도하지 않으며 또 얼마나 증대시킬 수 있는 지도 알지 못한다. 그는 단지 자신의 안전과 이익을 위하여 행동할 뿐이다. 그러나 이렇게 행동하는 가운데 보이지 않는 손의 인도를 받아서 원래 의도하지 않았던 목표를 달성할 수 있게 된다. 이와 같이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열심히 추구하는 가운데 사회나 국가 전체의 이익을 증대 시킨다."

아담 스미스가 말하는 ‘보이지 않는 손’이란 가격의 자동 조절 기능, 가격의 매개 변수적 기능을 말한다. 이 기능에 의해 경쟁 시장에서는 수요, 공급의 균형이 부지불식간에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유방임과 시장의 자동 조절 기능을 믿기 때문에 아담 스미스는 정부 정책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여러분은 선의의 법령과 규제로 경제에 도움을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자유방임하십시오. 간섭하지 말고 그대로 내버려 두십시오. ‘이기심이라는 기름’ 이 ‘경제라는 기어’를 거의 기적에 가까울 정도로 잘 돌아가게 할 것입니다. 계획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통치자의 다스림도 필요 없습니다. 시장은 모든 것을 해결할 것입니다."

결국 국가의 부를 증가시키기 위해서는 국민으로 하여금 자기의 본성을 자유롭고 안전하게 발휘하도록 해 주는 일밖에는 아무것도 필요 없다는 것이 그의 저서 『국부론』의 또 다른 핵심이다. 정부는 국토를 방위하고 정의롭고 평등한 법질서를 유지하며 개인이 할 수 없는 공공사업을 수행하는 일에만 전념하고, 그 나머지의 분야는 모두 개인에게 맡겨 두라는 자유방임주의를 추구한 것이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전통적 의미의 도덕 개념은 사회적 이익의 개념으로 대체된다는 낡은 도덕 개념은 사라지고, 새로운 도덕 개념이 등장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도덕 개념은 사익을 추구하는 개인에게 보이지 않는 손의 자비를 베풂으로써 도덕적 자유를 준다.

 (3) 중상주의 배격

사실 아담 스미스가 경제학 연구를 시작하던 1750년대는 시장 경제 체제가 확립된 환경이 아닌 중상주의 시대로서 자유로운 영업 활동을 막는 규제가 많은 시대였다. 스미스는 이러한 규제를 철폐해야만 경제가 발전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으므로, 『국부론』의 시대적 의미는 중상주의 비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중상주의에 의해 주로 진행되는 것은 부자와 권력자의 이익을 위한 산업뿐이다. 가난한 자와 빈궁한 자의 이익을 위한 산업은 너무나 자주 무시되거나 억압받고 있다."

아담 스미스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국가 중심적 무역 패러다임이란, 국가가 권력과 부를 유지하고 증대해야 한다는 책임과 목표를 가지고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경제 활동에 간섭하며 무역에 직접 관여하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일종의 보호 무역 등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러한 정부의 규제는 시장 중심적인 패러다임의 입장에서 용인될 수 없는 것이다. 왜냐 하면 국가의 통제에 따른 부작용은 곧 가난한 자에게 피해로 돌아간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고, 그 대안은 결국 자유방임이었던 것이다.

중상주의자들은 권력이 부를 창조하고 부는 다시 권력을 증대시키며, 이렇게 증대된 권력은 더욱 많은 부를 가져와 결국 안전과 번영을 가져다 준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담 스미스는 권력과 부의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형성하기 때문에 결국은 권력과 부의 악순환을 초래한다고 파악했던 것이다. 그는 바로 이 부분을 지적하는 동시에 극복하고자 자신의 경제 이론을 강조했다.

 (4) 『국부론』의 의의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을 통해서 우리는 세 가지 핵심적인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첫째, 필요에 의해서 일반적으로 만들어지는 사물의 질서는 어느 나라에서나 인간의 자연적 성향에 의해 촉진된다. 인간이 만든 제도가 이러한 자연적 성향을 방해하지 않는다면, 도시는 어디에서나 주변 지역이 개량, 경작될 수 있는 것 이상으로는 성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인간의 자연적 성향이란 합리적인 경제 행위를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인류 역사의 발전 단계를 보면 개인의 처지에서 우선적으로 가장 합리적인 행위는 농업에 투자하는 것이고, 그 다음에는 국내 상업에 투자하는 것이며, 마지막에는 해외 무역에 투자하는 것이다. 개인의 이러한 행위 유형의 변화에 따라 인류 사회는 농경 사회로부터 상공업 사회로, 최종적으로는 국제 무역 사회로 발전한다.

아담 스미스의 이러한 경제주의는 인류 사회의 역사 발전으로 이론화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아담 스미스 이론의 방법론적 특성인 개인 행위로부터 사회 질서와 구조를 유추하는 태도와, 역사적 관점과 초역사적 관점을 결합시키는 태도를 확인하는 동시에 이것의 방법론적 한계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둘째, 자유로운 개인들의 경제 행위로부터 사회 질서가 형성된다는 주장은, 사회 질서가 개인의 자유를 완전히 보장하지 않는 상태에서도 적용되기 때문에 더욱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더불어 모든 개인이 자신의 상태를 개선하려고 하는 자연스러운 노력은 자유롭고 안전하게 개인이 쏟을 수 있게 허용될 때, 그것만으로도 사회에 부와 번영을 가져다 줄 수 있다. 더욱이 인간이 만든 어리석은 법이 이러한 개인의 자연스런 노력을 방해하는 수많은 장애물을 만들고 있다. 그러나 개인의 자연스러운 노력은 인간이 만든 이런 장애물들이 개인들의 자유를 항상 침해하거나 자신들이 꾸준하게 노력하는 것을 방해하더라도, 이런 모든 방해와 장애를 극복할 수 있다. 경제적 자유주의는 한 사회의 정부나 입법가가 개인의 경제 행위를 방해할 필요가 없으며 방해해서도 안 된다는 주장만 하는 것에 멈추지 않고, 그러한 방해조차도 자신의 상태를 개선하려는 개인의 자연스런 노력인 경제 활동을 통해 극복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경제주의의 전형적 주장을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는 사회의 질서와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다른 어떤 것보다 자체 내의 상업과 제조업의 발전을 도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개인의 경제 행위에 대해 자유를 보장하기만 하면 인간 사회를 조화롭고 평화롭게 할 법과 정부, 그리고 다른 여러 가지 사회 제도가 저절로 생겨난다. ‘경제 발전이 민주 질서를 낳는다.’는 명제가 이 주장의 현대작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주장은 단순히 ‘경제주의’라고 하는 주장을 벗어나서, 인간의 역사 발전에 대한 이론, 그리고 미래에 대한 이론으로까지 발전한다는 측면에서 경제학이 역사 과학으로 발전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고 있다. 이것은 『국부론』이 단순한 경제주의로만 머무르지 않고 인간 사회에 대한 정치 경제학으로 자리를 잡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생각해 볼 문제

1. 박제가의 『북학의』는 실학적 태도를 취하고 있는 실용서이다. 그가 제시한 실학적 태도 중 현대 사회에서 적용하여 계승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2. 『북학의』의 서술 방식은 ‘중국 문물을 소개한 후 우리 것을 비판하고, 중국 문화를 도입했을 때의 이로움을 설파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서술 방식이 쉽게 빠질 수 있는 오류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3. 아담 스미스가 강조한 ‘보이지 않는 손’이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떻게 실현되고 있는지 예를 들어서 설명해 보고, 경제적 이기심이 갖는 긍정적 효과에 대해서 자신의 견해를 말해 보자.
4. 박제가는 중상주의를 강조하면서 조선이 발전되기를 원했고, 아담 스미스는 중상주의를 배격하면서 자유 방임주의가 실현되기를 원했다. 이들이 처한 역사적 상황은 달랐지만, 이들에 의해 자본주의가 싹트기 시작했다는 과정을 고려하면서 두 학자 간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말해 보자.

출처 : 대학입시수능정보(재수,점수공개)
글쓴이 : 교육길라잡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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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의 『군주론』

1. 『군주론』집필의 시대적 배경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집필한 개인적 배경보다도 중요한 것은 『군주론』에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정신이며 이러한 정신을 낳게 한 시대적 배경이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을 통해서 자신의 조국인 이탈리아를 재건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자 했고, 이는 그 당시 이탈리아가 처한 상황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탈리아는 로마 제국의 영광을 뒤로 한 채 외부의 끊임없는 침입으로 사회 혼란이 가중되어 있었고, 이탈리아 반도는 통일되지 못하고 여러 도시 국가들로 분열되어 있었다. 즉, 15세기 말 이탈리아의 정치적 상황은 프랑스와 독일이 통일된 국가 형태로 진전되어 가는 것과는 달리 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부터 지속된 국가 분열이 더욱 악화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마키아벨리로 하여금 사회 안정과 이탈리아 통일의 해결책을 찾도록 했으며, 이러한 맥락에서 집필한 저작이 바로 『군주론』이라 할 수 있다.

2. 군주론의 주요 논점

‘이탈리아의 통일과 안정은 어떻게 이룰 수 있는가?’ 마키아벨리는 이에 대한 답으로 ‘강력하고 전제적인 군주’를 제시했다. 사회 혼란을 잠재울 수 있는 사람은 군사력과 지도력을 가진 전제 군주라는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사회 혼란의 해결점을 일인 독제의 강력한 군주에서 찾았고, 이러한 군주에 대한 논의가 바로 ‘군주론’의 핵심적인 내용이라 할 수 있다.

‘이상적 군주’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논의는 크게 세 가지 내용으로 나뉜다. 첫째는 군주가 갖추어야 할 외적 요건에 해당하는 내용이며, 둘째는 군주의 인물됨에 대한 내용, 그리고 셋째는 군주에게 실질적으로 할 수 있는 조언에 대한 내용이다.

3. 군주의 외적 요건

먼저, 첫째로 ‘군주가 갖추어야 할 외적 요건’에 대해 알아보자. 이는 다름 아닌 군주 ‘자신의 군대’이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는 자신의 군대를 가져야만 자신의 지위와 국가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마키아벨리는 권력을 장악하고 유지하는 최선의 방법으로 군사력을 중시했다. 실제로 이탈리아에서 권력을 상실한 통치자들은 모두 ‘군사적 취약성’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 마키아벨리의 주장이다. 그러므로 마키아벨리는 군주에게 강력한 ‘자신의 군대’가 필수적임을 역설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마키아벨리는 군주는 항상 기본적으로 전사로서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며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의 군대를 직접 통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4. 군주의 인물됨

둘째로 ‘군주의 인물됨’에 대해 논의한 내용을 살펴보자. 마이카벨리는 군주의 관후(寬厚)함과 인색함, 잔인함과 인자함, 사랑받는 것과 외경(畏敬)받는 것 등, 군주의 인물됨과 그에 따른 행동들 중 어떠한 방향이 바람직한지에 대해 논의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마키아벨리는 ‘군주는 사적 개인이 아닌 공적 개인인 만큼 사적 개인이 가졌을 때 바람직하다고 생각되는 덕을 가질 필요는 없다.’고 본다. 예를 들어 사적 개인은 인색함보다는 관후함을 가지는 것이 좋지만 군주의 경우는 꼭 그렇지는 않다는 주장이다. 마키아벨리는 사적 개인이 가졌을 때 바람직하다고 평가되는 관후함, 인자함, 신의(信義)등은 군주에게 커다란 해악을 미칠 수 있다고 본다.

마키아벨리는 관후함을 가진 군주는 자신의 평판을 유지하기 위해 모든 자원을 과시적으로 낭비해야 하고, 이를 유지하기 위해 신민들에게 더 많은 세금을 거두어야 하는 역설적인 상황에 봉착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이에 비해 인색함을 가진 군주는 오히려 세입을 풍요롭게 하여 외적으로부터 몸을 지킬 수 있으며, 또한 신민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대사업(전쟁)을 추진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인색함을 가진 군주가 진정으로 관후한 군주라는 주장이다. 도한 마키아벨리는, 군주는 신민들을 단결하게 하고 충성스럽게 하려면 잔인하다고 불리는 것에 개의치 않아야 한다고 본다. 또한 군주는 사랑받기보다는 외경의 대상이 되어야 신민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다고 본다. 사랑받는 것과 외경을 받는 것을 모두 겸비하기란 어려운 일이므로 한쪽을 택해야 한다면 외경을 받는 것이 더 좋다고 보는 것이다. 인간이란 원래 은혜를 모르고 변덕이 심하며, 위선자요, 염치를 모르는데다가 몸을 아끼고 물욕에 눈이 어두운 속물이기 때문에 군주에게 금세 등을 돌릴 수 있다. 인간은 외경하는 자, 즉 두려워하는 사람보다 애정을 느끼는 사람을 더욱 쉽게 배반하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군주는 사랑받기 보다는 외경을 받아야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 민중을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통해 우리는 마키아벨리의 인간관도 알 수 있다.

군주의 인물됨에 대해 마키아벨리는 마지막으로 ‘군주는 신의를 어떻게 지킬 것인가.’ 에 대해 논의한다. 약속을 지키는 일이 기본적인 덕으로 알려져 온 바와는 달리, 마키아벨리는 군주라면 과감히 약속을 깰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약속을 지키는 일이 자신의 이익에 반하면 약속을 지켜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무릇 군주라면 나라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신의도 저버릴 줄 알아야 하며, 자비심을 버리고 인간미를 잃고 때때로 반종교적인 행동도 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실제 군주는 인색함, 잔인함 등의 덕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사적 개인으로서 바람직하다고 여겨지는 덕들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비록 군주가 보통 존경할 만하다고 여겨지는 성품을 갖지 않았더라도 갖추고 있는 것처럼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군주에게는 위장의 기술이 필요하다. 그러나 물론 군주는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전통적인 덕을 무시할 수 있어야 하며 필요하다면 비행을 저지를 수 있어야 한다.

5. 군주에 대한 조언

그렇다면, 이러한 군주의 인간됨이 좀 더 이상화된 군주의 모습이라면 실제 군주에게 어떠한 현실적인 조언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셋째로 마키아벨리는 군주에게 할 수 있는 실질적인 조언들을 제시하기 시작한다. 이는 ‘경멸과 증오를 피하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군주가 구축하는 요새 및 그 비슷한 것들은 과연 유익한가.’, ‘명성을 얻으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등의 내용이다.

마키아벨리는 ‘군주가 자신의 영토를 요새로 방비해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이에 대해, 마키아벨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만약 군주가 신민들의 증오를 두려워한다면, 군주는 확실히 자신의 요새를 구축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마저도 궁극적으로 통치자를 인민의 불만으로부터 보호해 줄 수 없다. 군주가 가질 수 있는 최선의 요새는 신민에게 미움을 받지 않는 것이다. 즉, 마키아벨리는 군사력뿐만 아니라 신민의 신임도 역시 중요시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신민의 미움과 경멸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마키아벨리는 군주가 미움을 받지 않기 위해서는, 반드시 신민의 재산을 강탈하거나 부녀자의 명예를 깎지 말아야 한다고 제안한다. 또한 군주가 변덕이 심하고 경박하며 여성적이고 무기력한데다가 결단력이 없다고 보이면 경멸을 받게 된다고 본다. 이러한 일들을 피해야만 군주는 자신의 지위를 견고하게 유지할 수 있다. 군주가 경멸을 받지 않는 또 다른 방법은 간신을 피하는 방법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마키아벨리는 모든 사람이 군주와 그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다면, 군주는 매우 쉽게 존경을 잃고 경멸의 대상이 된다고 본다. 즉, 군주는 완전한 논쟁의 자유를 허용해서는 안 된다. 군주는 단지 소수의 조언자에게만 귀를 기울이고 자신이 논의하기를 원하는 주제에 관해서만 상의해야 한다. 마키아벨리는 군주의 변덕스럽고 우유부단한 행동이 군주를 경멸스럽게 만들고 있으므로 소심함의 징표인 중립을 피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6. 『군주론』의 해석

이렇듯 마키아벨리는 그의 『군주론』에서 이상적인 군주의 상을 제시했다. 『군주론』의 가장 근본적인 주장은, 군주는 만약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있다면 악행을 저지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마키아벨리는 사회 불안의 해결책을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통치자에서 찾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단지 자기의 권력과 세력을 팽창, 유지하기 위해서 아무것에도 구속받지 말고 도의 정신, 종교심, 논리성을 저 버리며, 오로지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정치사상이라고 해석할 수는 없다. 이러한 해석 방식은 흔히 마키아벨리즘이라 불리는 해석 방식으로서 마키아벨리의 사상에 대한 단편적인 해석이라 할 수 있다. 왜냐 하면, 『군주론』은 15세기 이탈리아의 시대적 상황을 함축하고 있으며 분명 통치자의 정치 행위에 대한 깊은 통찰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군주론』의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고 『군주론』의 의미를 해석해야 하겠다. 물론 그 후에 『군주론』이 갖는 현대적 의미에 대한 지적도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다.

저자 소개

마키아벨리(Machiavelli : 1469~1527)는 1469년 5월 3일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 태어났다. 귀족 집안에서 태어난 마키아벨리는 1498년 피렌체 공화정에 참여하여 주로 외교 업무를 담당하는 중책을 맡았다. 그 당시 이탈리아에는 프랑스와 독일이 끊임없이 침입하여 사회 불안이 격하되고 국가 재정이 파탄 지정에 이르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키아벨리는 ‘독일 정세’, ‘프랑스 정세’, ‘국가 재정에 관한 진언’ 등의 논문을 발표했다. 그 후 1512년에 스페인의 공격에 의해 피렌체 공화정이 무너지고 메디치가의 왕정이 복원되었고, 이에 따라 마키아벨리는 공직에서 추방되었다. 메디치가의 전제 시대가 시작되면서 마키아벨리는 구정권에 봉직하였다는 이유로 1년간이나 억류 생활을 했다. 그 후 다시 공직에 봉직하지만 반(反) 메디치 혐의로 다시 구속되었다.

다시 석방된 후 마키아벨리는 메디치 정부의 공직에 참여하기 위해 1513년 말경에 『군주론(Il Principe)』을 집필했다. 이것이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집필한 개인적 동기였다고 할 수 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을 ‘각하’께 바치며 현재 자신이 ‘얼마나 엄청나고 지속적인 부당한 운명의 학대를 받고 있는가.’를 알아 달라고 호소했다. 이는 군주의 신임을 얻고 다시 공직에 참여하려는 의도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기대는 실현되지 않았고, 그 후 마키아벨리는 반메디치적이고 공화주의적인 다른 지식인들과 어울리게 되었고, 『전술론』과 자신의 공화주의적 사상을 담은 『로마사론』을 집필하게 되었다. 그 후 메디치 왕정은 프랑스의 로마 약탈, 이로 인한 교황의 도주 등의 이유로 붕괴되었고 피렌체에는 공화정이 복원되었다. 그러나 공화정이 복원된 후에도 마키아벨리는 공직에 복귀하지 못했으며 결국 1527년에 세상을 떠났다.

생각해 볼 문제

1.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서는 군주가 갖추어야 할 덕목들을 제시하고 있다. 제시문을 중심으로 각 덕목들을 정리해 보고, 자신이 생각하기에 좀더 추가될 덕목이 있는지 생각해 보자.
2. 마키아벨리의 『군주론』과 맹자의 ‘왕도 정치’를 비교해 보자.
3.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많은 비판점을 가지고 있다. 현대의 관점에서 『군주론』을 비판해 보고, 그처럼 비판받을 수 있는 요소들을 지니면서도 『군주론』이 현대의 고전으로 남아 있을 이유를 생각해 보자.

 

 

[자료출처-대성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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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국가』

■『국가』의 핵심내용

『국가』로 번역한 이 대화편의 원래 제목은 『폴리티아(Politeia)』이다. 이 대화편의 전체 분량은 플라톤 전집의 약 18%를 차지한다. 그 방대한 분량만큼이나 내용도 다양하다. 여기에는 비단 국가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고대 그리스의 모든 지혜가 망라되어 있다. 즉 철학, 정치, 경제, 교육, 문학 등 인류 문화의 원형이 담겨 있다. 또한 이 책은 철학적 이상주의의 가장 위대한 소산의 하나로서 오늘에도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뛰어난 이상주의에도 불구하고 플라톤의 국가는 역시 그리스적인 토대 위에 서 있다. 고대의 헬라인들이 생각하는 나라는 ‘폴리스(Polis)’였는데, 플라톤의 국가 이상은 결코 터무니없는 몽상이 아니라 실제로 그리스 공동체의 혼란을 구제하려는 데 있었으며, 이러한 의도에서 ‘국가’가 쓰여진 것이다.

플라톤은 국가의 기원과 발전에 관한 역사 철학적 고찰에서도 현실주의자였다. 그는 국가의 경제적 기반을 솔직히 인정하고 국가가 처음에는 경제적 필요에서 발생하였다고 서술하고 있다. 기술의 발달로 말미암아 산업이 발전하고, 교환 가치로서의 화폐가 널리 유통되면서 영리적, 군사적, 지배적인 여러 계급이 점차로 형성된 과정이 여기서 매우 명백하게 제시되어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 『국가』대화편은 유토피아 사상을 담고 있다. 지상의 어디에도 있을 수 없는 'paradeigma' - 플라톤의 경우에 ‘이데아’나 ‘형상’으로 불리는 것-의 성격을 갖는 국가를 말하고 있다. 그래서 이 국가를 ‘아름다운 국가’ 또는 ‘훌륭한 국가’라는 뜻으로 ‘kallipolis'(제 7권 527c)라 부르기도 한다. 이 국가의 목표는 단지 철학에 의해서만 학문적으로 인정되고 또한 실천될 수 있는 최고의 덕에 기초한 ’만인의 최고 행복‘이다.

플라톤의 사상에서는 마치 인간이 소규모의 유기체인 것처럼, 국가는 대규모의 인간 유기체가 된다. 그러므로 이른바 세 가지 영혼의 능력에 대응하여 세 가지의 분리된 계급이 생기게 된다.

(1) 욕구적인 것에 상응하는 것은 ‘서민’이다. 즉 일상생활의 여러 가지 수용에 대한 배려 - 이것은 욕구에서 비롯된다 - 를 하는 자로서 농민, 수공업자 및 상인 등이 있다. 그들은 다른 두 계급의 ‘보수와 영양을 공급하는 자’ 이며 국가의 경제적인 토대를 이루고 있지만 통치에는 전혀 관여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두 계급의 보호와 장려를 받는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여전히 사유 제산과 가족이 존재한다.

(2) 기개 있는 자에 상응하는 것은 군인, 즉 ‘수호자’ 또는 ‘보조자’로서, 밖으로 적을 방위하고 안으로 질서을 유지하여 국가를 확보해야 할 임무를 갖는다. 그들은 사욕을 가급적 소멸시키기 위해 교육과 부인 및 자식 그 밖의 모든 것을 공유해야 한다. 개인적인 이해가 전체에 대한 그들의 헌신을 방해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모든 사유(私有)가 해악으로 간주되며 모두가 하나의 대가족을 형성한다. 부인은 대체로 남자와 동등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

(3) 이성적인 것에 상응하는 최고 계급, 즉 통치자 또는 철학자는 국민 중에서 가장 고귀하고 현명한 자가 되게 마련이다. 이는 철인 치자로서 세상의 명예나 물욕을 초월하고 있는 자이다. 그는 지성(nous)의 화신이다. 이들의 사명은 입법과 그 실시, 특히 교육의 감독이다. 그들은 순번대로 최고의 관직에 취임하고 나머지 시간은 철학적 고찰에 소모한다. 즉 학문과 ‘선의 이데아’에 바치는 것이다. ‘선의 이데아’는 플라톤 윤리학의 정상이다. 그 본질적인 특성에서 보면, 플라톤의 국가는 최고의 도덕적 이상 실현을 위한 인간 사회의 교육 기관이다. 국가는 미래의 수호자와 통치자의 재능을 미리 아이들 때부터 배려하고 있다. 즉, 가장 고귀하고 건정한 남자는 가장 고귀하고 건정한 부인과 결합해야 한다. 철학자는 이 목적을 위해서 성적 생활에 대한 간섭도 주저하지 않는다.

플라톤은 『국가』제 5권에서 이러한 그의 이상에 대해 실현 가능성을 검토하고 있다. 그의 국가는 하나의 원형으로 어느 이데아도 다 그렇듯이 경험에 의해 완전히 도달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거의 도달할 수는 있는 것이다. 왜냐 하면, 이 국가의 여러 가지 요구는 사물의 본성에 입각해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이러한 국가의 존립을 원한다면 국민 생활은 물론 전혀 새로운 도덕 정신으로 충만되어 있어야 한다. 플라톤 자신이 아카데미아에서 실현하려고 한 새로운 교육이야말로 이것을 조성할 임무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당시의 성인들이 새로운 국가의 많은 혜택으로 말미암아 쉽사리 이 새로운 국가에 동의할 것이라고 플라톤은 낙관했다. 그러므로 실제로 “철학자들이 통치하기에 이르거나 혹은 국왕 및 권력자 등이 참으로 철학적 사색을 하게 되지 않는 한, 그 때까지 여러 나라들에서 아니 인간 족속에게서 해악이 그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한 그의 유명한 대목은 진지하게 도출된 결론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철인의 출현도, 그리고 이런 사람의 수용도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그는 노년에 이르러 '법률‘ 편에서 훌륭한 국가의 윤곽을 설계하고 있다. 즉 최고의 지성들이 모여서 입법을 하는데, 이들이 중지를 모아 모든 법조문 속에 지성을 최대한 반영한 다음 개인이 아닌 법이 국가를 다스리도록 하는 것을 제도화하고 있다.

또한 예나 지금이나 제 몫보다 더 차지하려는 인간의 탐욕이 얼마나 많은 문제를 야기하는지를 이 대화편은 잘 보여 주고 있다. 외국에서 전쟁 보다 더 무서운 내란도, 이 탐욕으로 인한 상호 불화에서 비롯되며, 이로 인해 이름으로는 하나인 국가이지만 더 이상 ‘하나의 국가’가 아닌 ‘여러 국가’로 분열된 상태에 있게 된다.

플라톤의 『국가』는 무엇보다도 인간이 어떻게 사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잘(훌륭하게) 사는 것’인지를 첫째 권부터 마지막 권까지 다루고 있다. 무분별하며 한없는 탐욕의 자제는 진정한 의미의 ‘잘(훌륭하게)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이해를 가질 때만이 기대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올바름의 문제도 이런 문제와 맞물려 다루어지고 있다.

저자 소개

플라톤(Platon : 기원전 427년~기원전 347년)은 아테네의 부유한 귀족 출신으로 이름은 아리스토클레스이며 유난히 어깨가 넓다고 해서 플라톤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는 글 쓰는 재주가 뛰어나 처음에는 시와 비극을 썼으나, 소크라테스의 문하에서 철학을 공부하게 된 후로는 이른바 애지자로서 진리 탐구에 주력했다. 후년에 그는 아카데미아를 세워 철학 강의를 생애의 주업으로 삼았다. 실제로 이 학원에는 각 분야의 학자들이 모여들어 학문 활동을 했으며, 여러 나라의 입법이나 정치적 자문에 응해 이 학원의 동료들이 파견되기도 했다.

그가 아카데미아의 입구에 “기하학을 모르는 자는 들어오지 말라.”고 써붙였다는 고사가 전해지고 있는데, 그것은 기하학이 무엇보다도 “이데아(Idea)"의 세계로 인도하는 좋은 길잡이가 되어 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경험적인 사물을 초월하는 이데아의 세계를 실재로 간주하고 개개의 사물을 그 이데아의 모사로 보았으며, 그 최고의 이데아를 ‘선의 이데아’라고 해서 역시 행동에 큰 비중을 두었다. 즉, 이 세상의 모든 훌륭함이란 완전한 이데아의 불안정한 영사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이다. 떠 이 이데아설은 혼의 불멸성과 성패를 같이한다. 이는 배움을 상기(想起)의 과정에서 설명한다. 이 지상에서 실재의 연약하고 불완전한 영상이 우리들로 하여금 과거에는 이미 알고 있었으나, 혼이 육신의 물질적인 불순물에 오염됨으로 말미암아 망각해 버렸을 것을 상기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국가관에서 지성의 화신인 철인에 의한 정치를 주장했다. 균등한 분배, 토지 개혁, 산아 제한 등의 선진적 개념도 이미 이 국가관에 내포되어 있었다. 특히 그의 철인 정치론은 ‘국가’편의 중심 사상으로 자리잡는다.

생각해 볼 문제

1. 플라톤의 ‘국가’에 나타난 사상 및 제도를 오늘날의 자유 민주주의 국가의 제도와 비교해서, 허용될 수 없는 부분은 어디인지 생각해 보자.
2. 플라톤은 국가를 사람의 신체에 비유해 설명하고 있다. 철학자는 머리, 군인은 가슴, 서민은 배에 해당한다. 앞의 글을 토대로, 이 비유가 갖는 오류에 대해 생각해 보자.
3. 플라톤이 현대 교육 제도에 끼친 영향을 생각해 보자.

 

 

[자료출처-대성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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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의 『장자』

『장자』의 핵심 내용

장자는 노자의 사상을 이어받아 자신의 사상을 심화시켰다. 그리고 그는 우화의 형식을 빌어, 즉 사람이나 사물에 의탁하여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있다. 장자의 사상은 인간관, 지식론, 자연관, 미학 사상 등 방대한 체계를 가지고 있다.

1. 장자의 인간관

장자는 인간을 일상적인 사람과 이상적인 사람으로 나눈다. 이상적인 사람은 도(道)를 깨달은 사람으로서 진인(眞人), 지인(至人)으로 표현된다. 반면 일상적인 사람은 공간적, 시간적으로 제한되어 있는 미미한 존재이다. 이러한 일상인은 환경과 교육에 얽매어 있기 때문에 더불어 도(道)를 논할 수 없다고 했다. 장자는 이를 우물 안 개구리에 비유한다.

우물 안 개구리와 더불어 바다에 대하여 말할 수 없는 것은 그가 살고 있는 터에 국한되어 있기 때문이오, 여름 벌레와 더불어 얼음에 대하여 말할 수 없는 것은 그가 살고 있는 때에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2. 장자의 지식론

장자는 인간의 감각 기관가 인식 능력의 한계 때문에 인간의 지식 역시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다고 설파한다. 즉 인간의 마음은 끊임없이 변화하며, 또 인간은 외부 사물에 의존하면서 그 마음이 밖을 향해 치달리기 때문에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얻은 지식은 상대적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특히 사람들은 자기를 기준으로 하여 선악과 시비를 판단하기 때문에 객관적인 제 3의 척도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장자에 의하면 지식은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즉 크다, 작다 하는 개념과 있다, 없다 하는 개념은 모두 상대적이다. 큰 것은 작은 것보다 크지만, 그것보다 더 큰 것의 관점에서 보면 작다. 지식은 사람과 지역, 시대,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을 뿐 아니라, 인간의 관점에서 보느냐 인간 이외의 사물의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다. 예컨대, 아름다움의 기준은 물고기, 새, 사슴의 입장마다 각각 다르다는 것이다.

장자는 인간이 누구나 승인할 수 있는 보편적 지식이 있는지에 대해 회의하였을 뿐만 아니라 삶과 죽음, 꿈과 생시, 나와 나 아닌 것을 구별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회의하였다. 그 유명한 호접몽(나비의 꿈)의 비유가 그것이다.

옛날에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된 일이 있었다. 훨훨 나는 나비가 되어 스스로 기분 좋게 느낀 나머지 장주는 자기 자신인지를 몰랐다. 갑자기 깨어 보니 놀랍게도 장주 자신이었다. 장주가 나비가 되었는지, 나비가 꿈을 꾸어 장주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장자는 참된 지식의 가능성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장자는 “진인(眞人)이 있은 뒤에 진지(眞知 : 참된 지식)가 있게 된다.” 고 말했다. 진(眞)이란 개념은 인위(人爲 : 억지로 무엇을 함)를 거치지 않은 ‘자연(自然 : 스스로 그러한 것)’ 그 자체를 의미한다. 여기에서 ‘자연’은 공기, 흙, 물, 동물, 식물 등 우리의 감각이나 의식의 대상을 뜻하지 않는다. 우리가 우리의 감각과 언어와 의식의 대상을 뜻하지 않는다. 우리가 우리의 감각과 언어와 의식의 대상으로 삼고 그것에 의존하며 살아야 하는 시공간적 존재는 ‘물(物)’ 또는 ‘만물(萬物)’로 표현된다. 자연은 이러한 만물을 만물되게 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자연은 곧 도(道)의 본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자연 곧 도에 관한 지식이 참된 지식인데 이는 인간의 감각이나 사유의 대상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내면세계에서 체득할 수 있는 것이다.

장자는 참된 지식을 얻기 위한 구체적 방법으로, 마음을 깨끗이 하는 심재와 마음을 오로지 한 뜻으로 모으는 전심일지와 세계를 잊는 좌망(坐忘)을 제시한다. 마음의 재계(齋戒)는 마음과 정신을 깨끗이 씻고, 사려 분별하려는 지적 활동을 신중히 하고, 오로지 구도자의 자세를 취하는 것이다. 심지(心地)를 전일(專一)하게 하는 공부는 분산된 의식을 하나로 집중하는 수양이다. 천지 만물의 뿌리는 둘이 아닌 하나이기 때문이다. 좌망은 정좌한 자세에서 자아, 사회, 자연 등 일체의 현상을 잊어버리는 정신의 경지이다.

그렇다면 장자가 말한 참된 지식을 얻은 경지는 어떠한 것일까? 장자는 포정해우(소 잡는 사람이 소의 살과 뼈를 분리하는 것)의 우화에서 득도의 경지를 묘사하고 있다. 그 경지는 두께 없는 칼날 즉 허심(虛心 : 마음을 비움)으로 골절 사이의 빈틈 즉 사물의 자연스런 결(天理 : 하늘 또는 자연의 이치, 理는 玉의 무늬결을 뜻하는 글자) 속에 있는 틈에 접하는 것이다.

포정(疱丁)이 문혜군을 위하여 소를 풀어내는데 손을 대고, 어깨를 기울이고 발로 짓누르고, 무릎을 버티며 소를 풀어 낼 때, 피륙이 갈라지면서 휙! 샹! 소리를 내고, 칼을 밀어 넣을 때 훅! 하며 내는 소리가 음악 소리에 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 탕임금 때의 악곡인 상림(桑林)에 맞추어 추는 춤과 합하며, 요임금 때의 함지(咸池)라는 악곡 가운데 하나인 경수(硬水)의 음절에도 들어맞았다. 문혜군 : 오! 훌륭하도다! 기술이 어떻게 이런 경지에까지 이를 수 있을까? (칼을 놓고) 포정 : 제가 좋아하는 것은 도(道)로서, 기술의 경지를 넘어선 것입니다. 처음 제가 소를 풀어 낼 때는 온통 소만이 보였습니다. 삼년 뒤에는 소의 몸체가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신명(神明)으로 만나되 눈으로 보지 않고, 감관과 사려 작용은 멈추어지고 신명이 움직이게 되었습니다. 소의 자연스러운 결(天理)을 따라 힘줄과 뼈의 틈 사이를 치고 칼을 골절 사이의 빈 곳으로 집어넣습니다. 소 몸체의 자연을 따르니 경락과 뼈에 엉킨 힘줄조차 부딪히지 않는데, 하물며 뼈이겠습니까? 훌륭한 백정은 해마다 칼을 바꾸나니 자르는 방법을 쓰기 때문이요. 보통의 백정은 달마다 칼을 바꾸나니 빠개는 방법을 쓰기 때문입니다. 지금 저의 이 칼은 19년을 사용하였고 풀어 낸 소도 수천 마리나 됩니다. 그러나 칼날은 아직도 숫돌에서 방금 갈아 낸 듯합니다. 소의 골절에는 틈새가 있으나, 칼날에는 두께가 없습니다. 두께가 없는 칼날로 골절 사이의 빈 틈에 넣으니 넓고 넓어서 칼날을 늘림에 반드시 넉넉함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19년이 지나도록 칼날이 숫돌에서 방금 갈아 낸 듯한 것입니다. 비록 그렇더라도 매번 뼈와 힘줄이 엉켜 붙어 있는 곳에 이르면 저도 쉽게 하기 어려움을 보고, 삼가고 조심하는 마음으로 경계하여 시력을 집중하고, 움직임은 서서히 하여 칼을 매우 가볍게 움직여 흙덩이가 땅에 쏟아지듯 휙 풀어냅니다.

3. 장자 사상의 현대적 의의

고전적 의미는 각자가 그것을 읽고 자신의 삶의 조건에서 그 의미를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장자의 가르침은 현대의 물질문명에 매몰되어 살아가는 우리에게 자신의 삶을 반성하게 하는 화두를 던져 준다. 장자의 사상에서 여러 가지 의의를 찾을 수 있겠으나, 여기서는 두 가지만 서술하겠다.

첫째로 상대주의적 관점이다. 사람마다 마음이 같지 않음은 그 얼굴이 갖지 않음과 같다는 말이 있듯이, 자신의 마음만을 표준으로 삼아 생각하고 말한다면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다. 특히 정치의 세계에서 독단에 기초하여 어떤 절대적인 기준을 강요하는 것은 전제적인 폭압이다. 사물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나아가 타인의 삶을 존중하여 더불어 살기 위해서는 상대주의적 관점이 필요함을 설파한 것이다.

둘째로 현대의 기술 문명사회에서는 전문가를 중요시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전문가들에게는 장자가 말한 참된 지식은 없고 기능만 있을 뿐이다. 참된 지식은 사물의 자연스런 결, 곧 천리(天理)를 깨닫는 것으로, 세속의 영달을 위해 추구하는 지식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참된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먼지가 끼고 오염된 마음 즉 사심(私心)을 정화하여 본래의 마음 즉 허심(虛心)으로 돌아가야 한다. 참된 지식에 도달하면 자신의 마음도, 사물도 해를 입지 않고 신명나게 어울릴 수 있게 된다.

저자 소개

장자(莊子)의 생애에 대한 기록은 매우 적다. 사마천의 ‘사기’에 다르면, 장자의 성은 장(將)이고 이름은 주(周)이다. 장자는 몽(蒙)땅에서 칠원리를 지냈으며, 맹자와 동시대 사람으로 생졸(生卒) 연대는 대략 기원전 369년에서 기원전 282년으로 추정되고 있다.

장자의 저술로 알려진 ‘장자(莊子)’ 라는 책은 ‘남화진경’, ‘남화경’ 등으로도 불린다. ‘장자’는 내편, 외편, 잡편을 합하여 총 33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편 7편은 장자의 직접적인 저작으로 여겨지며, 그의 주요한 사상은 대략 여기에 갖추어져 있다. 외편과 잡편은 장자의 문인과 후학들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장자 철학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생각해 볼 문제

1. 장자가 추구한 절대 자유의 정신세계는 개인 중심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공자는 사회적 관계를 중심으로 자신의 사상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장자가 정치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하였을까 생각해 보자.
2. 장자의 자연관에 근거를 두고, 현대의 환경 문제에 관하여 생각해보자.

 

 

[자료출처-대성학원]

출처 : 대학입시수능정보(재수,점수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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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자의 『순자』

1.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 : 성악설

순자의 사상에서 가장 먼저 논의되는 것은 언제나 『성악설(性惡說)』이다. 맹자가 사람의 본성은 원래 타고나면서부터 착하고 선하다는 주장을 펼친 것과는 대조적으로 순자는 사람의 본성이란 애초부터 공격적일 뿐만 아니라 자기 욕구를 채우려고 하는 이기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악하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그래서 그는 “사람의 성품이 악하고, 선하다는 것은 인위적인 것이다.”라고 했다. 이 말을 통해 순자가 강조하고자 한 것은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이 갖는 공격성과 이기심이다. 즉, 인간이 태어나서 아무런 교육이나 문화적 혜택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는, 자기의 감정에 따라 행동하게 되므로 서로 다투는 일이 생기게 되고 결국에는 인간의 질서를 깨뜨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순자가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고 주장한 것은 인간의 가치를 부정적인 시각에서 보고자 하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의도는 인간의 본성이 비록 이처럼 악하게 타고났지만, 그러한 인간의 본성을 선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교육이나 문화의 역할이 그만큼 더 강조되어야 한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나타내고자 한 것이다. 그래서 그가 ‘선하다는 것은 인위적인 것이다.’라고 말했을 때, ‘인위적’이라는 말 또한 우리가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가식적’이라는 의미보다는 ‘사람의 노력이 더해진다’는 의미로 읽어야 한다. 즉, 교육이나 문화적 교화 등을 통해 사람의 노력이 더해지면, 비록 인간이 악한 성품을 가진 존재일지라도 선한 인간으로 변화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사실 맹자가 성선설을 통해 강조하고자 한 것도 결국은 선천적인 착한 성품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꾸준히 교육하는 인간적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맹자의 경우에도 교육이나 문화적 환경의 중요성이 매우 강조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맹자와 순자는 비록 인간의 본성에 대한 시각은 서로 다르지만, 근본적으로 인간이 추구해야 할 교육과 문화에 대한 전망은 같은 지평에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다만 본성에 대한 인식이 다른 만큼 교육하는 방법에서 자율을 중시하느냐, 아니면 타율을 중시하느냐 하는 차이를 보이게 된다.

인간의 본성이 원래 착하기 때문에 이 착한 마음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스스로 자신을 끊임없이 되돌아보아야 한다고 주장한 맹자는 교육에서도 자율적인 자기 수양을 강조했다. 그러나 성악설을 기초로 하고 있는 순자의 생각에는 인간의 마음에는 언제나 이기적인 욕구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내버려두면 혼란만 초래할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러한 무정부적인 혼란을 막기 위해서는 타율적인 교화와 절제의 양식이 반드시 요구된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양식의 규범화로 요청된 것이 바로 순자의 ‘예(禮)’이다.

2. 예(禮)의 의미

순자가 언급한 예는 공자의 개념으로부터 출발하고 있지만, 그 외면적인 구체성과 현실성에서 더욱 확대, 발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순자는 인간의 이기적인 욕망과 욕구를 중화시키기 위해서는 새로운 기준의 형식을 엄격하게 제시하여, 이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시킴으로써 절제를 가르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개인들 간에 흩어진 이기적 욕망의 힘을 통일하게 되면 사회의 안락과 질서를 이룰 수 있는 것이고, 만약 이 힘이 통일되지 않고 흩어진다면 사회는 불행하고 비참한 결과를 낳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순자에게 ‘예(禮)’란 사회를 통제해 가는 하나의 중요한 사회 원리이자 동시에 사회 제도이며 법적 구속력을 갖는 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순자가 의미하고자 하는 ‘예(禮)’라는 것에는 문화적 개념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그는 책의 곳곳에서 ‘문식(文飾)’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문화적 형식을 의미하고 있으며, 모든 사람들의 정서를 통일하기 위한 순자의 의도가 담긴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이 먹고 입고 살아가는 데에 일정한 형식이 갖추어짐으로써, 그들이 행동과 생활방식 및 사회 규범이 절제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화적 작용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들의 정서를 일정한 수준으로 이끌어 올리면서, 동시에 위계질서를 지켜 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음악과 의식이다. 음악을 통해 사람들의 정서를 경건하게 유도하고, 의식 행사를 체계 있게 형식화함으로써 사람들의 생활 문화를 안정시킬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예의 문화적 기능이 살아나기 위해서는 전제 조건으로 사회적 계급의 안정이 마련되어야만 했다.

예의 확립을 통한 사회적 질서는 우선 현명한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 신분이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 재산이 많은 사람과 가난한 사람, 나이가 많은 사람과 젊은 사람 등의 차별을 확실하게 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즉, 순자는 일차적으로 사회적 신분 계급의 엄격한 구별을 통한 신분적 질서를 중요시한 것이다. 그리고 이에 따라 사회적 역할에서도 엄격한 분업이 중시되었다. 만약 각각의 계급이 자기에게 주어진 직분을 어기고 다른 계급의 직분까지 욕심을 내서 충돌이 생긴다면, 결국 사회적 혼란이 야기될 것이기 때문이다. 순자가 바라는 것은 사회의 질서가 안전하게 유지되고, 모든 사람들의 생활이 적절하게 윤택해지며, 사회 제도가 문화적으로 평화롭게 실시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신분의 차이에 따라 만족스럽지 못한 부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전체 사회의 안정된 질서를 위해서는 자신의 직분에 맞게 행동을 절제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순자의 예는 절제의 개념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의 자유 민주주의적 개념으로 볼 때, 계급 분리에 대한 순자의 이러한 정당화는 대단히 부조리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순자가 살고 있던 역사적 무대는 정통 왕조가 무너지기 직전이었으며, 자격을 갖추지도 못한 온갖 제후들이 왕 노릇을 흉내 내면서 힘자랑을 하던 대였다. 순자는 당시의 그러한 사회적 혼란이 바로 무질서한 이기적 욕망들을 방치한 데 있다고 본 것이었다. 사회적 구심점을 잃은 상태에서 어디에서도 체계 있는 기준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사회적 혼란이 초래되었다고 본 순자는, 무엇보다도 먼저 사회적 절제와 조화를 되찾기 위한 규범과 형식을 세우려고 한 것이다.

3. 순자의 정치사상

사회적 중심을 되찾아서 안정되고 평화로운 사회를 구축하려고 한 순자의 의도는 결국 필연적으로 나라의 ‘군주’를 옹호하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그는 절대적인 지배자가 존재하지 않음으로써 야기된 사회적 혼란을 목격한 사람이었다. 사회적 질서를 유지하고 사람들의 힘을 통일할 수 있는 구심점은 오로지 절대적 군주의 강력한 지배력을 통해서만 주어진다고 확신한 것이다. 순자가 절대적 군주에 대해 가진 이러한 희망은 서구의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피력했던 주장들과 매우 유사하다. 순자나 마키아벨리가 살았던 시대의 역사적 갈등이 그들에게 강한 군주의 존재를 그리워하게 만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까닭에 다른 일반 유학자들이 주로 공자의 생각에 따라 고대의 유토피아적인 이상 사회를 만든 성인들 즉 이전의 왕들을 회고하고 추앙한 반면, 순자는 자기 시대의 현실적 왕의 출현을 강조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시대의 왕을 버려두고 옛날만을 이야기 하는 것은 자기 임금을 버리고 남의 임금을 섬기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아무리 좋은 과거의 왕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에 대한 회고적 그리움만 가지고는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오히려 자기 당대에서 강력하고 통일적인 힘을 가진 군주를 얻고자 노력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타당하다는 주장이다. 그런 주장으로 인해 순자는 유교의 역사상 가장 급진적이고 현실적인 정치관을 가진 인물로 평가되고 있는 것이다.

4. 순자의 언어관

순자의 사상 가운데 매우 흥미로운 것 중에 하나는 ‘언어 사용’에 관한 것이다. 대개 모든 사회가 혼란기에 보이는 공통적인 현상은 ‘언어의 혼란’이다. 사회의 질서가 혼란에 빠지게 되면 유언비어가 난무하게 되고 사람들의 동요된 마음을 사로잡아 기회를 잡아 보려는 선동가나 궤변론자들이 등장하게 된다. 그래서 언어의 혼란은 곧 문화적 혼란을 야기하게 되어 사람들의 가치관을 어지럽히고, 그것은 결국 윤리적 혼란을 야기하여 사회 구성원들의 결집된 힘을 파괴하게 되는 것이다. 순자가 살았던 전국 시대의 혼란기 도한 이와 같아서, 순자가 나오기 이전까지 수많은 궤변론자들이 등장하여 언어적 혼란을 조장했던 것이다. 순자가 판단하기에는 당시의 정치적 혼란 역시 궤변론자들의 혼란스러운 개념들을 이용하여 정치적 야망을 이루려는 제후들의 계략으로 빚어진 부분이 많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정명(正名)’ 이란 편에서 언어적 혼란을 바로잡기 위해 신의 이론을 펴고 있다. ‘정명’이란 말은 말 그대로 ‘이름을 바로 잡는다’는 뜻이다. 그리고 여기서의 이름이란 곧 언어적 개념을 말한다. 원래 정명은 공자가 앞서 주장한 바 있지만, 공자의 주장은 주로 윤리적 개념에 국한된 것이었다. 즉 임금은 임금의 이름에 걸맞게, 신하는 신하의 이름에 걸맞게, 아버지는 아버지의 이름에 걸맞게, 아들은 아들의 이름에 걸맞게 행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순자는 공자의 이러한 윤리적 정명론에서 더 나아가 당시의 궤변론자들을 염두에 두고, 사물과 이름의 관계에 대해 논리적이고 인식론적인 접근을 하였다.

즉 언어적 개념이란 하나의 사회적 약속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는 공통된 개념을 벗어나서 사용되는 개념은 잘못된 것이라고 설파한 것이다. 그리고 잘못되고 혼란된 개념을 바로잡는 것이야말로 정치적 질서를 확립하는 데 가장 필수적인 일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그가 말하고자 한 것은, 언어적 상식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어떤 특수한 것이 아니라, 실제 사물과 부합하는 객관적인 개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이 자기 마음대로 개념의 일반적인 약속을 벗어나서 왜곡된 의미로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마치 사회의 약속된 도량형을 어기고 사기를 치는 행위와 같다고 보았다. 순자가 살았던 시대가 기원전 약 4세기인 점을 고려할 때, 언어적 개념에 대한 순자의 이러한 통찰은 대단히 탁월한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5. 요약과 평가

순자의 사상을 종합해 보면, 그는 우선 인간의 내면적 도덕보다는 외면적인 문화의 가치를 더 중요시했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의 도덕성에 매달려 윤리적인 호소를 하기보다는, 인간의 타고난 이기적 본능을 문화적인 환경 속에서 교화를 통해 개조하고자 한 것이다. 그래서 순자는 유학자로서는 보기 드물게 사회학적 인식을 갖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사회의 구체적인 현실에서 해결책을 모색했다는 점에서 그는 이상주의자라기보다는 현실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비록 후세에 많은 사람들이 맹자를 더 높이 평가했지만, 우리는 오늘날 순자의 사상을 통해 격변하는 역사의 수레바퀴에서 능동적으로 대처하고자 했던 치열한 정신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순자의 이러한 현실 개혁적인 태도는 오늘날 사회 전반에 걸쳐 갈등이 증폭되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더욱더 새로운 의미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저자 소개

고대 중국에서 유교가 하나의 학문으로 자리를 잡아 가는 과정 속에서 가장 중요한 역화을 한 인물로는 세 사람을 들 수 있다. 우선 유교의 창시자로 알려진 공자(孔子)가 있고, 그 다음으로 맹자(孟子)와 순자(荀子, 기원전 290~기원전 238)가 그 맥을 잇고 있다. 공자는 이른바 춘추시대(春秋時代)를 배경으로 등장했고, 맹자와 순자는 그 다음 전국시대(戰國時代)라는 특수한 역사적 배경에서 자신들의 학문을 세운 사람들이다. 전국 시대는 기존의 모든 전통이 파괴되고 새로운 열강의 제후들이 난립하면서 사회적으로 대단히 혼란한 시기였다. 특히 순자는 이러한 격동의 시대를 가장 현실적으로 대처하고자 했던 사람이었다.

공자가 세운 유교의 학통을 이어서 새로운 학문을 전개한 맹자와 순자는 여러 가지 면에서 대비되는 인물들이다. 두 사람이 모두 공자를 자신들의 출발점으로 여기고 있었으나, 학문과 이론을 전개한 방향은 매우 대조적이라고 할 수 있다. 맹자는 주로 의(義)를 강조한 반면 순자는 예(禮)를 더욱 중요시했고, 맹자가 인간의 본성을 선하다고 보고 성선설(性善說)을 전개한 반면, 순자는 인간의 본성을 악하다고 보고 성악설(性惡說)을 내세웠다. 그리하여 후세에 이 en 사람에 대한 평가에 따라 유교의 정통을 맹자로 보기도 하고 순자로 보기도 하였다.

‘순자(荀子)’라는 책은 순자가 남긴 책의 이름으로 지금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는 것은 32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이 모두가 순자 자신의 손에 의해 씌여졌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전해진다. 이 책 가운데 순자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중요하다고 보는 것은 ‘예론(禮論)’, ‘해폐(海?)’, ‘정명(正名)’, ‘성악(性惡)’, ‘권학(勸學)’등 다섯 편이다.

생각해 볼 문제

1. 교육의 필요성을 순자와 맹자의 관점에서 각각 생각해 보자.
2. ‘언어와 사회’에 대한 순자의 생각이 어떠했는지 생각해 보자.
3. 순자는 인간의 타고난 이기적 본능을 문화적인 환경 속에서 교화를 통해 개조하고자 했다. 우리나라의 교육 실태에서 이러한 순자의 교육관이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는 구체적인 사례를 생각해 보고, 그것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혀 보자.

 

 

[자료출처-대성학원]

출처 : 대학입시수능정보(재수,점수공개)
글쓴이 : 교육길라잡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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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의 『사기』와 에드워드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


1. 역사를 보는 눈

우리는 21세기를 살고 있다. 21세기 역시 또 한 세기가 지나면 역사가 된다. 수학적으로 선이 점들의 집합이라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매 순간은 역사라는 선 위의 한 점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인간은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을 끊임없이 제기하고 있다. 사람들마다 역사의 존재 자체에 대하여 생각하는 관점이 다양한 것도 그것을 바라보는 눈이 다르기 때문이다.

어느 한 사람이 오늘 학교에 가서 수업을 받고 집에 돌아온 사건, 이것은 과연 역사인가? 그 개인이 등굣길에 경험한 교통사고는 과연 역사인가? 또한, 흔히들 김대중 전(前) 대통령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난 것을 역사적 만남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과연 역사인가? 꼭 한번 만나고 싶다고 외치는 어느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입양아와 그 친부모가 만난 것은 과연 역사인가? 우리는 이와 같은 물음에 명확한 해답을 할 수 없다.

근대 역사학의 확립자 랑케는 역사가는 모름지기 자기 자신을 죽이고 과거의 본래 상태를 밝히는 것을 늘 과제로 삼아야 하며, 오직 역사적 사실만을 이야기해야 한다고 언급함으로써 역사적 사실들 그 자체에 큰 비중을 두었다. 그러나 크로체는 이와 같은 견해를 반대하는 역사 인식론을 주장했다. 그는 모든 사건은 현대의 역사이기 때문에, 서술되는 사건이 아무리 먼 시대의 것이라고 할지라도 역사가 실제로 서술하는 것은 현재의 요구 및 현재의 상황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란 본질적으로 현재의 눈을 통하여 현재의 눈으로 과거를 본다는 데에서 성립하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보다는 역사가의 비중이 크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이렇듯 역사를 바라보는 태도는 학자마다 다르고 시대에 따라 다르다. 그리고 서양과 동양이라는 서로 다른 세계관을 구성하는 공간에 따라서도 다르다. 그러므로 우리는 동서양의 고전을 통해서 역사를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을 알아볼 수 있다. 동양 역사서의 전범으로 알려져 있는 사마천의 『사기』와 서양의 역사 인식론에서 최근에 가장 주목을 받는 에드워드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는 그런 의미에서 시대와 동서양을 초월하는 좋은 고전이라고 할 수 있다.

2. 사마천의 『사기』

사마천의 『사기』를 언급하기 전에 괴테가 파우스트의 말을 빌려서 언급한 다음 내용을 화두로 던져 본다.

“역사라는 것은 한번 보기만 해도 도망치고 회피하고 싶은 것, 쓰레기통이 아니면 폐물 창고와 같은 것, 꼭두각시의 입놀림에나 맞을법한 것, 그럴싸한 격언이 붙어 다니는 그저 거창한 사건에 불과하지.”

과연 역사란 것이 그런 것인가? 그렇게 폄하될 수 있는 것인가? 괴테의 독설을 듣고 있노라면 사마천의 『사기』는 사기(詐欺)에 가까운 것인가 허구에 가까운 것인가? 아니면 인간 탐구를 위한 위대한 역사서인가? 그런데 2000년 전의 『사기』를 오늘날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시선은 괴테의 발언을 무색케 한다. 아버지의 유언을 계승하고자, 그리고 역사적 사실과 인물들을 올바로 평가하여 후세에게 역사적 교훈을 남기고자 온몸을 던진 사마천에게 그러한 부당한 평가는 너무나 가혹하다.

 (1) 『춘추』의 정신을 계승한 『사기』

사마천은 왜 이토록 방대한 역사서를 쓸 수 있었으며, 쓰고자 했는가? 그 내적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두 가지 차원에서 이해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개인적 차원이고 또 다른 하나는 역사적 차원이다.

역사적 차원에서 보면 진이 멸망하고 한이 성립되면서 각 정권이 흥망성쇠를 거듭하고 수많은 역사적 인물이 배출되던 그 시기는 사마천이 시야를 넓히고, 역사 인식을 다질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 준 셈이다. 그리고 한 대에 이르러서 진대에 일어났던 “분서갱유(焚書坑儒)”로 사라진 책들을 복원하려는 움직임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는데, 이것 역시 사마천에게는 사기를 쓸 수 있었던 또 하나의 계기가 된 것이다.

개인적 차원에서 살펴보면 그의 아버지와도 무관하지 않다. 그의 아버지 사마담은 태사령이 되어 벼슬을 하고 있었으나, 한무제의 무시로 화를 못 이겨 죽게 되었다. 아버지 사마담은 자신이 쓰지 못한 역사서를 서술하라는 말을 유언으로 남겼고, 이에 자극을 받은 사마천은 비로소 『사기』를 저술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이미 전국을 돌아다니며 지형과 역사적 고적들을 답사하는 경험을 했고, 타고난 박학다식함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사기』라는 역사서를 쓸 수 있는 개인적 소양은 충분했다. 그리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태사령이 되면서 더욱더 많은 자료를 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더욱 『사기』를 쓰는 데 심혈을 기울인 것은 ‘이릉의 화’에 연루된 것과 무관하지 않다. 흉노족의 포로가 되어 항복한 이릉을 처벌하고자 주장한 조정의 신하들에 맞서 이릉을 변호한 죄로 천자가 노하게 되고, 그는 치욕적인 궁형(宮刑)에 처해지게 되었다. 일반 사대부들은 궁형을 받는 것을 치욕으로 여기고 죽음을 택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사마천은 아버지의 유언을 받들기 위해 그 치욕을 감수하면서 『춘추』를 집필하기 위해 살아남은 것이다. 주위의 많은 손가락질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관으로서의 사명감과 아버지에 대한 유언을 저버릴 수가 없었다.

“(전략) 유왕과 여왕 이후에 왕도가 무너지고 예악이 쇠퇴하고자 공자는 사라진 옛 전통을 다시 복구하고 정리하여 『시경』, 『서경』, 『춘추』를 지었기 때문에 지금도 학자들이 그것을 본받고 있다. 『춘추』이래 400년이 흘렀고 이제 한나라가 흥하여 천하가 통일이 되었으나, 나는 태사로서 현명한 군주, 정의를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들의 행적을 기록하지 않았으니 천하의 역사 기록이 폐기될 것 같아 두렵구나, 너는 이것을 명심해라“

그것은 공자의 『춘추』를 계승하는 일이었다. 천하의 왕들에게서는 버림을 받은 공자는 현실에서 정의를 세울 수 없었고,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춘추』를 지어 세상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마천의 아버지 사마담은 이러한 공자의 역사의식을 계승하고 있었고, 그가 이루지 못한 것들은 자식인 사마천이 이어받도록 햇던 것이다. 역사적 사실과 인물들을 제대로 평가하여 후손들에게 남겨 주는 일은 사관의 신분을 지닌 사마천에게는 운명과도 같은 일이었다. 자신의 삶속에서 겪은 처절한 고통, 갈등과 방황,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고 고귀한 목적으로 승화시키고자 했던 노력이 결국 『사기』라는 위대한 역사서를 탄생 시키는 원동력이 된 것이다.

 (2) 『사기』구성의 특징

사기』는 본기(本紀), 표(表), 서(書), 세가(世家), 열전(列傳)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본기(本紀)』는 제왕의 행적을 연대기적으로 기술한 것으로 12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역대 최고의 집권 인물, 즉 제왕의 전기(傳記)로서 사건을 연대별로 나누어 기술했다. 제왕은 최고의 정권 대표자인 만큼 한 시대에 일어났던 대(大) 사건은 그와 관련된 일들이다. 그러므로 제왕의 전기를 통해서 그 시대의 전국적인 사건들을 편년체(編年體)로 읽어 나갈 수 있다. 그러나 완전한 ‘제왕의 역사’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왜냐 하면, 『본기』에는 『항우본기』나 『여후본기』처럼 제왕이 아니었던 사람들의 전기들도 수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본기』에서는 반드시 제왕의 역사만을 다룬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통치력을 지니고 있었던 사람을 정권 담당자로 보고 역사적 인물로 다루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표(表)』는 여러 가지 사건에 대한 시간적, 공간적 연관성을 도표화한 연대기로, 모두 10권으로 되어 있다. 대부분은 봉건 제국에서 일어난 즉위, 전쟁, 폐위, 사망 등을 기록한 연대란으로 성립되어 있다. 사마천은 『』에서 가까운 시기의 사건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다루고, 먼 시기의 사건에 대해서는 소략하게 다루는 일관된 방법론으로 서술했다. 또, 구체적인 요점을 간략하게 간추렸으며, 전후 관계를 분명히 밝히는 방식을 통하여 복잡다단한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알아볼 수 있도록 했다. 이와 같은 표의 활용은 기전체(紀傳體)가 지닐 수 있는 복잡한 사건들의 파편화를 면할 수 있다. 또한, 표 앞에 쓰여 진 짤막한 서문에는 자료의 완전함이나 정확함과 관련된 문제를 논의한 것도 있고, 주의멸망, 진의 흥망, 한의 급격한 부흥, 주한의 봉건 제도, 흉노와의 관계에 대한 짧은 철학적 논문도 있다. 즉, 『』를 통해서 읽을 수 있는 역사의 변화를 짤막한 서문으로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서(書)』는 특정한 사회 현상을 개별적으로 기술한 것으로, 천하의 문물제도에 관한 내용과 그 발달 및 원리를 기술하여 모두 8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조정의 제도, 천문, 지리, 예술, 경제 등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사마천은 역사를 단순한 권력 투쟁과 왕조의 흥망성쇠와 같은 사건들의 과정뿐만이 아닌, 제왕이 세계를 지배하는 원리와 수단이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다라서, 각 시대의 차이는 바로 이와 같은 원리와 수단의 차이에 있으며 정치의 성패 역시 시대의 변화에 맞추어 어떤 원리와 수단을 어떻게 구현하느냐가 문제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이것의 구체적인 표현인 문물제도의 변화에 관심을 가졌고, 이러한 문물제도를 8가지의 『』로 나누어 논한 것이다. 이를 통해 사마천은 좁은 의미의 정치사에서 문화 전반을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정치사로 역사를 확대시켰다.

세가(世家)』는 정치 질서에서 제왕의 다음 위치에 있는 제후들의 사건을 시대 순으로 정리한 것으로, 총 3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세가』는 봉건 제후들과 개국 공신들 같은, 주로 특수한 영향을 미친 인물들의 전기이자 나라별 역사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봉건 제후들의 기록에는 진섭세가와 공자세가와 같은 일시적인 정치적 지배자나 사상가에 대한 기록도 들어 있다.

사마천 자신은 “태사공자서” 에서 “스물여덟 개의 별자리가 북극성을 둘러싸 돌고, 서른 개의 수레바퀴살은 그 중심축을 향해 있어 그 운행이 영구히 그치지 아니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충성스럽고 신뢰할 만한 신하는 주군의 수족이 되어 참된 도덕 정치로써 주군을 섬긴다. 그들에 대해 30세가를 지었다.”라고 하였다. 스물여덟 개의 별자리라는 것은 오행설에 따라 하늘을 동, 서, 남, 북의 네 궁으로 나누고 다시 각 궁을 일곱 수로 나눈 것이다. 서른 개의 바퀴살은 바퀴의 중심부로 모여 바퀴통에 집결하는 것이다. 즉, 모든 별들이 북극성을 중심으로 하여 돌고, 수레바퀴의 바퀴살이 중심부오 모여 별과 바퀴의 운행이 끝이 없듯이, 군왕을 도와 그 수족이 되는 신하를 별자리나 바퀴살에 비유한 것이다. 이렇게 보면 『본기』와 『세가』의 관계가 분명해진다. 『본기』는 북극성이나 바퀴통에 해당하고, 『세가』는 스물여덟 개의 별자리나 서른 개의 바퀴살에 해당하는 것이다.

열전(列傳)』은 제왕과 제후를 둘러싸고 역사를 이끌어 가는 많은 영웅호걸들의 전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총 7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열전』은 『사기』의 가장 뒤에 있으며 가장 긴 부분에 해당한다. 사마천은 넓은 의미의 정치를 창조하여 움직일 수 있는 주체에 대해서 상당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 결국, 그 주체는 권력의 정점에 있는 제왕이나 제왕의 권력을 공간적으로 나눠 맡은 제후왕이 아니며, 정치, 경제, 문화와 같은 각 분야에서 활동하면서 생을 영위하는 구체적인 개인, 즉 인간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열전』은 바로 이러한 인간의 역사를 읊은 것이다. 또 『열전』은 단순한 개인의 생애만을 소개하기보다는 『본기』, 『세가』, 『』에서 전개되는 사건의 흐름과 서에 서술된 문화 전반의 변천을 그 주제를 통하여 더욱 구체적으로 이해시키려는 것이기 때문에, 역사 속에서의 인간보다는 인간의 행동과 의지를 통한 역사의 이해라는 관점으로 설정되어 있다. 열전에 한 시대의 각 분야나 요소를 상징할 수 있는 개인의 가장 상징적인 행적이 주로 서술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사마천은 이 『열전』에 대해서 “의(義)를 도와서 뛰어나고 스스로 때를 잃지 아니하여 천하의 공명을 세웠으므로 70권의 『열전』을 쓴다.”고 했다. 70권의 『열전』은 인간이 곧 역사의 주체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실현하고 있다.

열전』은 사마천의 문장을 가장 빛나게 하는 부분으로, 시대정신 또는 그 시대의 인간상으로 상징되는 인물을 부각시켜 독자로 하여금 시대와 인간을 탐구할 수 있게 만들었다. 열전 속에서 우리는 보편적인 인간이 운명과 싸우는 모습을 볼 수 있고 ,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괴로움과 기쁨을 찾을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더불어 그것을 공감하거나 또는 거기에 위화감을 느껴서 역사의 세계를 자기의 세계에 비추어 볼 수 있는, 역사를 읽는 효용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

이처럼 『사기』에서는 열전의 대상을 선정하는 과정에서부터 사마천의 역사가적인 안목까지 느낄 수 있다. 또 대상 선정 후의 서술을 통해서는 그의 인간 탐구자적인 지혜와 예술가로서의 문장의 힘도 함께 느낄 수 있다. 중국의 전통적 지식인들에게 사기가 단순한 역서사거 아닌 문학으로서도 높이 평가되었던 점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열전의 인물이 결코 사미천 자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일반적인 문학과는 다르며, 허구를 가미한 역사 소설과도 물론 다르다. 열전은 실제로 존재했던 상징적인 인간형 그 자체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그가 표현하고자 하는 바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게 서술되었다는 점이 바로 문학이며 예술인 것이다.

 (3) 『사기』의 역사판

사마천은 어렸을 때부터 부유한 사람은 아니었다. 열 살 이전에는 직접 논을 갈고 목축을 했다고 알려져 있을 정도였다. 사마천이 민간 생활과 하층민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생활을 잘 이해했던 것도 모두 이러한 점과 관련되어 있다.

사마천은 『화석열전』에서 “부유함이란 사람의 본성이라 배우지 않아도 모두들 추구할 수 있는 것이다.”, “예의라는 것은 재산이 있으면 생기고 없으면 사라지는 것이다.” 라고 말하며 많은 예를 들어 사회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직업, 귀천, 현명하고 우매함, 입장의 차별을 막론하고 근본적으로 부와 이익을 추구한다고 말한다. 『태사공자서』에는 “벼슬이 없는 평민들은 정치를 방해하지 않고 또 백성들의 생활에 해를 주지 않는 상황에서 때를 맞추어 거래하여 재산을 증식하였다. 이러한 점은 지혜로운 자들도 얻을 바가 있는 것이다.”라고 언급하며 사람들이 재산을 모으는 것을 격려하였다.

또한, 『유협열전』에서는 “유협은 그 행위가 반드시 저의에 의거하지는 못하였지만, 그들의 말에는 반드시 신용이 있었고 행동은 과감했으며 이미 승낙한 일은 반드시 성의를 다하였다. 또한 자신의 몸을 버리고 남의 고난에 뛰어들 때에는 생사를 돌보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지 않았고, 그 공덕을 내세우는 것을 오히려 수치로 삼았다. 아마 이 밖에도 찬미할 점이 많을 것이다.”, “평민들 중의 무리로서 가령 사람에게 베풀고 구함에 허락한 일을 이행하며 천리 먼 곳에서도 의리를 위해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의 비난을 마다하지 않는다면 이는 그들의 장점이며 또 그것은 아무렇게나 해 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라고 언급하며 유생이나 은사들을 비판하고 백성들의 무리 중에서 의협심이 강한 사람을 찬미하였다.

이렇듯 백성들에 대해서는 따뜻한 눈길을 보냈던 사마천은 『흑리열전』, 『봉선서』, 『효무본기』등에서 지배층의 잔학성에 대해서는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그는 역대 제왕들의 업적을 들춰 지적했을 뿐만 아니라 당대의 황제인 한무제에 대해서도 “더욱 귀신에 대한 제사를 중시하였다.”, “미신에 빠져서 여러 차례 기만을 당하면서도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무력을 함부로 사용해서 공리를 크게 일으켰고 매관매직을 일삼았다.” 등으로 냉엄하게 비판했다. 한나라를 세운 고조에 대해서도 “한고조는 속임수를 써서 한신을 진에서 사로잡았다.” 등의 표현을 통해 통치자의 기만을 폭로하였다.

그는 또한 하늘과 인간은 서로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천인상관론을 주창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역사가 자연의 변화에 상응하여 변화한다는 것을 부인했고, 반대로 인간의 주체적인 노력에 의해 자연의 질서도 대응한다는 인간 중심의 역사관을 피력하기도 하였다. 아울러 사마천은 ‘성(盛)’속에서 ‘쇠(衰)’의 모습을 통창함으로써 사회와 역사가 변화한다는 것을 지적하고, 역사는 갈수록 진보하며 그것은 앞을 향한 발전이라고 인식했다. 이것은 사회의 전진을 촉진시키는 개혁을 긍정하는 입장이기도 했다.

 (4) 인간 탐구의 역사서 『사기

사마천의 『사기』전체가 ‘인간 탐구의 역사서’라는 측면을 지니고 있는데 특히 『항우본기』와 같은 부분에는 그러한 성격들이 더욱 더 극명하게 드러난다. 세계 질서의 중심으로서 제왕의 행적을 기술하기 위해 마련된 본기에 제왕이 아닌 항우를 수록한 것은 항우의 행동이 한때 제왕과 같은 위치를 점하였다는 이유 때문인데, 이 이유만으로 항우를 『본기』에 수록한 것 자체가 매우 신선하다. 『항우본기』에는 천하의 쟁탈을 위한 유방과의 싸움을 중심으로 주로 항우의 사람됨이 묘사되어 있다.

우리 인간에게 내재한 두 개의 성향이 숨 막히는 대결을 벌이는 곳이 바로 『항우본기』다. 진의 시황제를 멀리서 바라보고 ‘저 놈의 천하를 엎어 놓고야 말겠다.’ 고 내뿜는 것은 항우였고 ‘사내란 저쯤 되어야지’ 하고 차갑게 말한 것은 유방이었다는 이야기를 사마천은 『본기』의 머리 부분에 실었다. 이는 두 사람이 가지고 있었던 제왕에 대한 집념과 그 방향의 차이를 인식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냉철하고 이해 타산적이며 음흉한 승자인 유방에 비하여, 정열적이고 직선적이며, 그래서 오히려 빈 구석이 있는 성격의 소유자인 패자 항우. 그는 유방에 비하여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갖기 쉬운 인간적 약점을 가지고 있어서 우리의 관심을 끈다면, 유방의 강인하고 끈덕진 성격은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은연중에 갖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에 또한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항우와 유방의 극적인 대결의 절정으로 유명한 홍문 잔치의 숨 막히는 장면은 수세에 몰린 유방의 전전긍긍한 계략과, 우위에 있으면서도 ‘차마’ 결단을 내리지 못한 항우가 대조적으로 부각되어 있다. 반진군의 총사령관으로서 진의 수도를 점령하여 약탈과 파괴를 일삼은 다음, 천하를 지배하기 위한 포석보다는 먼저 고향으로 가서 오늘의 영광을 자랑하고 싶어 하던 치기 어린 항우의 행동에서 우리는 보통 사람들과 통하는 인정을 발견한다. 한편, 먼저 입성하여 그것을 마음껏 노략하고 싶었으나 장량의 계략으로 그것을 참고 진나라 사람들을 회유하는 데 성공한 유방에게서 보통 사람들을 넘어선 인간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쉽게 선악으로 따져 나눌 수 없는 두 사람의 상대적인 성격이 한데 엉클어져 엮어 내는 인간의 비극을 역사의 장에 올려놓고, 차분하게 빛나는 문장으로 표현했던 예술가의 면모까지 갖춘 역사가 사마천! 그것은 후세인이 감히 모방할 수 없는 그만의 천부적인 재능이었다. 사마천의 『사기』가 단순한 역사서가 아닌 인간 탐구의 서적으로 평가받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것은 현재적 관점에서 보면 문학의 영역에 가까운 것이지만, 역사가의 섬세한 숨결과 냉정한 태도가 배어 있는 이 작품은 분명한 역사서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역사와 문학은 서로 만나기 어려운 영역이다. 역사는 사실을, 문학은 허구를 그 주된 지향점으로 삼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망천의 사기는 부조화의 두 요소를 잘 결합하고 엮어 나갔다는 점에서 높은 역사적 의의를 지니는 훌륭한 고전인 것이다.

3. 에드워드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

 (1)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에드워드 카(Edward Hallett Carr)는 과거에 중심을 두는 역사관과 현재에 중심을 두는 역사관의 중간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미 앞에서 언급한 랑케와 크로체의 변증법적 합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역사가와 역사가에게 주어진 사실들은 서로 평등한 관계에 있으며, 또한 서로 주고받는 관계라는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즉 역사가는 사실에 종속되는 종이 될 수도 없으며, 사실을 억압하는 주인이라고 볼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가란 자신의 해석을 바탕으로 사실을 형성해 내고, 사실에 바탕을 두어서 해석을 만들어 내는 과정에 복종하는 사람이다. 결국, 역사가와 역사상의 사실은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로 인정되는 것이다.

우리의 역사로 그 예를 들어 보자. 훈민정음은 15세기에 창제되었다. 이것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그런데 여러 문헌에서 나타나는 근거와 실증을 통해서 이 역사적 사실은 역사가의 중요한 해석 대상이 된다. 따라서 그저 훈민정음이 15세기에 만들어졌고, 그것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는 단순한 기술(記述)은 에드워드 카의 입장에서는 공허하기 그지없는 기술에 불과하다. 그 역사적 사실에 해석을 부여하는 것, 예컨대 위정자의 애민 정신에 입각한 훈민정음의 창제라든지 아니면 고도의 통치 이념(유교)을 설파하고자 했던 위정자의 교화적 의도라는 내용이 역사가에 의해 형성되고 만들어질 때, 역사에 대한 해답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사실에 바탕을 두지 못한 역사가는 그 존재의 의미를 상실한 채 무능한 존재가 될 수 있다. 그렇지만 사실만을 단순히 기술하는 데만 그치는 역사가 역시 무책임한 존재가 될 수 있다. 그렇지만 사실만을 단순히 기술하는 데만 그치는 역사가 역시 무책임한 존재가 될 수 있다. 결국, 역사가는 자신의 사관에 따라 해석하고 유의미한 역사로 만들어 내는 역량도 가져야 하는 것이다. 에드워드 카의 입장에서 볼 때 역사란 결국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부단한 상호 작용의 과정일 수 밖에 없으며, 이것은 곧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2) 역사가는 개인인 동시에 역사와 사회의 산물이다.

보편적인 입장에서 볼 때 사회와 개인은 대립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 간에 필요한 보충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런데 역사가도 사회에 속해 있는 하나의 개인이다. 다른 개인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하나의 사회 현상 속에 존재하는 인몰이다. 그리고 자기가 속해 있는 사회에서는 그가 의도하든 그렇지 않든 그 사회를 대변하는 사람이다. 에드워드 카는 바로 이러한 자격 때문에 역사가가 역사적 사실에 접근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역사가가 어떤 문제에 접근하는 입장과 어떤 역사적 사실을 해석하는 관점을 파악하지 않고서는 그의 연구를 충분히 이해할 수도 없고 평가할 수도 없다. 아울러 역사가의 입장 자체는 사회적 배경과 역사적 배경에 뿌리박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를 연구하기에 앞서서 우선 역사가를 연구하라. 역사가를 연구하기에 앞서서 우선 그의 역사적, 사회적 환경을 연구하라.”는 에드워드 카의 언급을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역사가 역시 그러하다. 또, 역사가는 어느 한 시대의 인물이며, 21세기의 역사가는 이 시대에 노출된 지식인이다. 예컨대, 이 시대의 사회적 환경을 보편적으로 20세기의 파시즘이 낡은 이데올로기라는 사실을 이해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적 환경 속에서 21세기의 역사가는 20세기의 파시즘적인 관점이나 태도로 역사를 볼 수 없다. 따라서 그것을 배제한 역사가 나름의 사관을 인지할 때, 우리는 그 역사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역사가를 이해하는 순간 그 역사가가 형성해 낼 과거 사실에 대한 해석의 방향을 어느 정도 파악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역사가는 개인인 동시에 역사와 사회의 산물이다. 역사가와 사실들과의 상호 작용이라는 과정은 이미 위에서 현재와 과거와의 대화라고 지적한 바 있지만, 그것은 추상적으로 고립된 개인들 사이의 대화가 아니다. 오늘날을 사는 역사가의 사회와 지난날의 역사적 사실들이 있는 사회와의 대화인 것이다. 따라서, 에드워드 카의 입장에서는 과거는 현재의 빛에 의해 그 본질을 이해할 수 있으며, 현재도 과거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조명을 근거로 제대로 파악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역사가 지니는 이중적 기능이라고 할 수 있다.

 (3) 역사는 과학이다.

역사는 인문 과학의 영역과 사회 과학의 영역을 넘나드는 학문이다. 그런데 역사가들이 연구 과정에서 사용하는 가설의 지위와 자연 과학자들이 사용하는 가설의 지위 사이에는 놀라운 유사성이 있다. 이러한 점에서 에드워드 카는 역사를 과학으로 보려 했다. 여기서 말하는 과학은 앞에서 언급한 ‘인문 과학, 사회 과학’의 과학과는 다르다. 과학의 외연은 두 가지가 있는데, 에드워드 카의 과학은 자연 과학을 지칭하는 것이다. 한편, ‘인문 과학, 사회 과학’에서의 ‘과학은 ’학문‘을 가리킨다. 따라서 에드워드 카가 역사를 과학이라고 부른 것에는 당연히 그에 대한 반론이 있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역사를 과학이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이라는 견해에 대한 에드워드 카의 반론을 살펴보면 다음의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역사는 특수하고 개별적인 것을 취급하고, 과학은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것을 취급한다. 그렇기 때문에 표면적으로 역사는 과학이 아니다. 그러나 역사가들이 진실로 관심을 가지는 것은 특수한 것이 아니라 특수한 것 속에 있는 일반적인 것이다. 역사적 사실은 특수하지만, 그 사실을 통해서 일반적인 해석을 덧붙여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3.1운동과 중국의 5.4운동은 각각 특수하고 개별적이지만, 이것은 당시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일반적인 운동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역사는 특수한 것과 일반적인 것의 관계를 취급하는 것이고, 이런 의미에서의 역사는 과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이 에드워드 카의 입장이다.

둘째, 역사는 그 성격상 예언할 수 없다. 그러나 자연 과학에서 발견하는 과학적인 법칙이란 것도 어쩌면 하나의 경향성을 이야기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런 맥락에서 역사가에게 일반화란 불가피한 것이고, 또한 일반화를 통해서 예언은 아닐지라도 미래 행동을 위한 타당하고도 유용하면서 보편적인 지침은 마련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 국민들은 과거에 군사 독재 시절을 경험한 바가 있다. 그리고 제 3세계는 아직도 군사 독재를 경험하고 있거나, 얼마 전까지도 경험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앞으로의 시대에는 그러한 역사가 되풀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보편적인 경향성을 가지게 되었다.

셋째, 역사는 주관적일 수 밖에 없다. 바로 역사가라는 인간이 인간 자신과 역사적 사실들을 관찰하기 때문이다. 물론 자연 과학도 객관성을 담보한 학문이라고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어느 정도까지는 그 자연 현상을 지각하는 주체인 인간과 지각의 대상이 되는 객체로서의 자연 현상 간의 상호 의존 관계를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역사는 다분히 주관성을 지니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객관적인 역사 서술은 이상에 가까운 것이고, 그 동안 이루어졌던 객관적인 역사 서술 역시 절대적인 객관성을 보장할 수 있는지는 의문점이 들 수 밖에 없다.

 (4) 역사의 연구는 원인의 연구이다.

역사가는 많은 원인의 연결 고리를 취급할 수 밖에 없다. 즉, 진정한 역사가라면 자기가 작성한 여러 가지 현상들의 원인에 대한 목록을 질서 정연하게 배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원인들의 상호 관련성을 규정하기 위해서 그것의 상하 관계도 설정해야 할 것이다. ‘결국’, ‘궁극적으로’라는 표현 방식을 통해서 수많은 원인 중 어떤 종류의 원인을 최종 원인으로 보고 그것을 모든 원인 중의 원인이라고 판단할 것에 대한 확실한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에드워드 카는 이것이 역사가의 책임이자 의무이기도 하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주제에 대한 역사가의 해석이다.

결국, 역사란 무엇이 역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는 것인가에 대한 선택의 과정이다. 역사가는 다수의 인과적 연쇄 사건 가운데서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것들을 선택하여 그것들만을 골라내는 것이다. 여기서 역사적 의의에 대한 기준이 되는 것은 자신의 합리적 설명과 해석의 원형 속에 인과적 연쇄 사건을 맞추어 넣는 역사가의 능력일 수 밖에 없다. 단순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반복은 그런 의미에서 가장 무책임한 역사 기술이다. 그렇기 때문에 “”라는 질문을 넘어서 ‘어디로’라는 질문으로 승화되는 과정이 될 때, 역사는 더욱 유의미하고 미래 지향적으로 기술될 수 있을 것이다.

 (5) 역사와 역사가의 만남, 그리고 부단한 상호 과정

인간의 본성 문제는 역사가가 직면한 난관 중의 하나이다. 이제 갓 태어난 영아기의 인간, 혹은 나이를 아주 많이 먹은 고령의 인간인 경우는 예외이지만, 인간은 환경의 지배를 무조건 받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인간이 환경으로부터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존재는 아니다. 역사가도 인간이고, 인간의 본성은 때로는 환경에 의존적이기도 하고, 때로는 환경으로부터 독립적일 수 있는 요소를 지니고 있다.

또한, 역사가가 실제로 생각해서 쓰는 자기 자신의 역사 서술 태도를 되짚어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역사가는 자신의 해석에 따라서 자신의 사실을 만들어 내고, 자신의 사실에 따라 자신의 해석을 만들어 내는 연속적인 과정에 종사하고 있다. 따라서, 이 중의 어느 하나를 다른 하나 위에 올려놓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역사가의 역할은 어떤 사실을 일시적으로 선택한 후, 또 그것을 일시적으로 해석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이 해석에 입각하여 자기 자신과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도 일시적인 선택을 하고 있는 것이지만, 역사 서술이 진척됨에 따라 해석과 사실의 선택, 그리고 정리도 서로 간의 상호 작용을 통하여 거의 무의식적으로 미묘하게 변화한다. 역사가는 현재의 일부에 속하는 존재이고, 어떤 사실은 이미 과거에 속하므로 이들의 상호 작용 또한 현재와 과거의 상호 작용을 포함하고 있다. 역사가와 역사상의 사실은 서로가 필요한 것이다. 사실을 소유하지 못한 역사가는 뿌리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며, 열매도 맺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역사가가 없는 사실은 생명도 없고 의미도 없다.

1980년에 우리나라를 풍미했던 『해방 전후사의 인식』이라는 책이 당대를 좌지우지하면서 과거에 대한 지평을 넓혀 주었다. 이 책이 나오기 전까지 보수주의적 사관에 길들여진 학생들은 그 책 자체가 충격이었다. 그리고 과거의 사실을 보는 눈은 그 당시 역사가의 해석에 따라 우리에게 스펀치처럼 흡수되었다. 최근에 그 해방 전후사의 인식에 대한 반론의 성격을 지니는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 이라는 책이 나왔다. 이러한 역사서의 출간은 과거의 사실을 역사가의 입장에서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나타난 자연스러운 귀결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양한 역사적 인식 태도에 대한 수용과 보편화는 그것을 인식하는 역사적 주체인 인간의 몫일 것이다. 그 인간은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 현재에도 존재한다. 그리고 역사가는 그 안에 있다. 결국,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부단한 상호 작용의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에드워드 카의 명제는 여전히 유효하고 의미심장하다.


생각해 볼 문제

1. 역사를 서술하는 역사가의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지 에드워드 카와 사마천의 역사 인식 태도를 분석하면서 자신의 견해를 말해 보시오.
2. 에드워드 카의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이다.”라는 관점에 따라 현재와 과거가 만나는 역사적 사건의 예를 들어 보고, 그러한 사건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지 알아보시오.
3. 역사는 대부분 문헌의 기록에 따라 형성된다. 그러나 그 문헌 기록자의 주관이 그 문헌의 기록 내용에 개입되면서 역사는 충분히 왜곡될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그러한 역사는 믿을 만한 것이 되지 못하고 버려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아니면 이러한 기록 역시 역사로 인식할 필요성이 있는지, 이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말해 보시오.

 

 

[자료출처-대성학원]

출처 : 대학입시수능정보(재수,점수공개)
글쓴이 : 교육길라잡이 원글보기
메모 :

맹자의 『맹자』

『맹자』의 핵심 내용

맹자는 공자를 정통으로 계승한 사람으로 자부했다. 그의 학설은 기본적으로 공자와 같다. 그러나 공자가 춘추 시대에 활동한 반면, 맹자는 전국 시대에 활동했기 때문에 사상의 차이점이 있다. 맹자의 독창적인 사상으로는 첫째, ‘인간의 성품이 착하다.’는 성선설(性善說)을 확실하게 선언했다는 데 있다. 둘째는 공자의 인(仁 : 어짊)의 뜻을 이어서 의(義 : 읆음)를 주장했고, 이를 도덕 실천의 규범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셋째는 ‘기를 기르라’,는 양기(陽氣)의 학설을 내놓은 것이고, 넷째로는 인의(仁義)를 근본으로 ‘왕의 길(王道)을 말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주요한 방법을 밝힌 것이다. 이를 간략히 살펴보자.

1. 인간의 성품은 착하다 : 성선설

먼저, 맹자의 주요 사상은 ‘인간의 성품, 혹은 본성이 착하다.’는 데 있다. 맹자는 자사의 제자에게서 배웠는데, 자사는 ‘정성스러움, 성실함’으로 인간성을 규정하였다. 그러나 맹자는 이를 발전시켜 ‘착함(善)’ 이라고 선언하였다. ‘인간성이 착하다.’는 논의는 고자(告者)와의 논쟁에서 밝혀졌다. 두 사람의 말을 들어보자.

고자 : 인간성은 오직 착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을 뿐이라네. 성(性)의 본체가 착하건 착하지 않건 상관없지. 따라서 타고난 것, 그 자체가 본성이라고 생각하네.

맹자 : 그렇다면 개의 성품과 소의 성품이 같으며, 소의 성품이 사람의 성품과 같다고 생각하는가? 어찌 짐승과 사람을 같이 볼 수 있겠는가? 개와 소의 성품은 반드시 착한 것이 아니고 오직 사람의 성품만이 착할 뿐이라네.

고자 : 다시 비유하자면, 성(性)은 버드나무와 같고, 의(義)는 버드나무로 만든 술잔과 같지. 따라서, 사람의 성품으로써 인(仁)과 의(義)를 행하게 하는 것은 마치 버드나무를 가지고 술잔을 만드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다네.

맹자 : 그래? 버드나무의 성품을 순히 하여 술잔을 만든다고? 그건 버드나무를 무리하게 구부리고 깎은 뒤에야 술잔을 만드는 것 아닌가? 만일 버드나무를 구부리고 깎은 뒤에 술잔을 만든다면, 그것은 버드나무의 원래 모습을 해쳐서 술잔을 만든 것이니, 사람을 해쳐서 인과 의를 행하게 하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닌가? 어찌 사람의 성품이 잘못을 바로잡거나 구부림을 기다린 후에 인과 의를 행하겠는가? 그렇게 하지 않아도 착한 본성에 따라 인의를 실천할 수 있는데 말이지.

고자 : 아직 이해가 안 된 모양인데, 그것을 물에 비유해 보면 이렇다네. 본성은 웅덩이에 고여 있는 빙빙 도는 물과 같아서, 동쪽으로 터놓으면 동쪽으로 흐르고 서쪽으로 터놓으면 서쪽으로 흐를 것은 뻔하지. 사람의 성품이 착하고 착하지 아니함에 구분이 없는 것은 마치 물이 동쪽과 서쪽의 구분이 없는 것과 같은 것이란 말이지.

맹자 : 물이 진실로 동쪽과 서쪽의 구분은 없지마는 위와 아래의 구분도 없는가? 사람의 성품이 착함은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과 같은 것이라네. 따라서, 물이 아래로 흘러가지 않는 것이 없듯이 사람도 착하지 아니한 것이 없지. 잘보라구. 지금 물을 손으로 쳐서 튀게 하면 이마를 넘어가게 할 수도 있으며, 아래를 막아서 거꾸로 흐르게 한다면 산 위로 올라가게 할 수도 있지. 하지만 이것이 어찌 물의 본성이겠는가? 그 형세가 그러한 것일 뿐이지. 사람이 때로 나쁘게 되는 것은 그 성품이 또한 이와 같기 때문이라네.

위의 논쟁에서 맹자는 ‘인간의 본성이 착하다.’는 것을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에 비유해서 자연스럽게 인정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맹자는 본성이 왜 선한지는 증명하지 않았다. 다만 고자의 주장에 대해 그것이 부당하다는 점을 반박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맹자는 인간의 행위를 보고 경험적으로 파악하여 성선의 내용으로 끌여 들였다. 그것이 바로 ‘사단설(四端說)’이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만약 지금 어떤 사람이 어린 아이가 우물에 빠지려고 하는 것을 본다면, 놀라며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어린 아이의 부모와 교제를 맺기 위한 것도 아니고 동네 사람들에게 좋은 소리를 듣기 위한 것도 아니다. 이로 말미암아 보면 측은한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사양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측은히 여기는 마음은 인(仁)의 실마리요,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은 지(智)의 실마리이다.” 이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실마리, 단초는 모두 인간 성품에 갖추어진다. 이런 네 가지의 기능이 갖추어져서 인간의 성품은 착함으로 가득 차게 된다.

그런데 인간의 악함은 어디에서 유래하는 것일까? 악함의 시초는 무엇인가? 그에 대한 근본적인 대답을 하기는 어렵다. 맹자도 그것을 인간의 욕심으로 설명했다. 인간의 본성은 착하기 때문에 악은 인간성의 자연스런 작용이 아니다. 악은 인간성을 다하지 않은 결과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산길은 사람이 다니지 않으면 풀이나 나무가 길을 꽉 메우고 우거지게 되어 아무도 다닐 수가 없게 된다. 마찬가지로 착한 인성을 잘 펼쳐 쓰지 않으면 가리워지고 잃어버리게 된다. 맹자는 인간에게 악이 생기는 이유를 착한 본성의 발현이 아니라 인간 욕심의 허물 때문이라고 보았다. 왜 인간은 무엇인가를 ‘하고자 하는가?’ 그것 자체가 인간성은 아닐까? 욕심이 생긴 이래로 인간은 서로 헐뜯고 싸우기 시작했다. 맹자는 본성의 착함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악한 인간의 상태를 제거하여 착한 본성을 회복하는 데 중점을 두었던 것이다. 맹자에게서 여전히 욕심의 기원에 대한 문제는 남는다.

2. 의(義)의 도덕 실천

본성 회복을 위한 맹자의 도덕 행위는 ‘인간 본성 자체가 착하다.’는 전제 속에 들어 있다. 따라서 사람은 이미 윤리의 법칙을 알고 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의 행동이 마땅함을 얻는 것이다. 이 행위를 얻고자 하는 것이 ‘의’이다. 측은(惻隱), 수오(羞惡), 사양(辭讓), 시비(是非)의 마음으로 마땅히 할 일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의’이다. 그러므로 의는 마음의 지향이며 조절 작용이다. 마음의 지향은 착함에 있다. 다시 말하면, 착함을 행하여 쌓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사람이 착하고 마땅한 행동을 할 때, 세상은 밝아진다. 의사(義士), 열사(烈士)들의 양심에 따른 실천은 의로운 해우이의 모범이다. 의는 다름 아닌 착함으로 가는 인간의 길일 뿐이다. 이런 의로운 행위 실천이 모여 인간의 올바른 생명력인 기(氣)가 된다. 맹자는 기를 기르는 일을 매우 중시했다. 이 기는 인간성의 착함을 발휘하는 가운데 있다.

3. 호연지기(浩然之氣)와 대장부(大丈夫)

기를 기르는 대표적인 방법은 호연지기이다. 호연지기는 인간의 마음, 의지 가운데 믿음을 돈독히 하고 행동을 건실하게 하는 상태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단순히 산에 올라 “야호! 야호!”를 외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인간의 마음은 착함으로, 인의예지의 실마리로 가득 차 있다. 이 힘은 인간의 잠재력으로 아주 조용히 자기를 숨기고 있다. 그러나 선하고자 하는 마음의 발동을 통해 무한정 활발하게 움직일 수 있다. 이런 과정에서 우리는 헛된 욕심에 눈이 멀어서는 안 된다. 자기의 착한 마음을 팽개쳐 놓고 다른 것에 욕심을 부리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맹자는 “사람들이 말과 개가 도망가면 찾을 줄은 알지만, 자기 마음을 잃고서는 찾을 줄을 모른다.”며 탄식했다. 인간의 배움은 바로 “자기의 놓친 마음을 구하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모든 인간은 본성이 착하기 때문에 누구나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잇다. 문제는 인간이 그 본성의 착함을 놓아 버리는 데 있는 것이다. 왜 착하려고 노력하지 않고 마음을 해이하게 만드는가? 왜 스스로 포기하고 버리는가? 마음에 꽉 차 있는 선을 활용해야 인간이 아닌가? 맹자는 자포자기 하는자, 즉 “스스로 포악해지는 사람과 함께 이야기 하지 않고, 스스로 버리는 자와 함께 일하지 않는다.” 고 선언했다. 왜냐 하면, 그들은 인과 의에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맹자는 호연지기로 근본을 삼으며 삶을 영위하는 사람을 대장부로 표현하였다. 이는 공자가 군자(君子)로 대표한 것과 비교된다. “이 세상의 넓은 곳에 살면서 올바른 자리에 서고 세상의 큰 도를 행한다. 그 뜻을 얻으면 백성들과 함께 그것으로 말미암고, 뜻을 엇지 못하면 홀로 그 도를 행한다. 부귀도 능히 음탕하게 못하며 빈천도 능히 변하게 하지 못하며 위세나 무력도 능히 그 뜻을 굴복시키지 못한다.” 이런 인간형이 대장부다. 세상에 부끄럽지 않으며 떳떳한, 어떤 어려움에도 쉽게 굴복하지 않는 마음을 체득하기란 쉽지 않다. 이것의 실현을 위해 힘쓰라고 맹자는 주문했다.

4. 왕의 길 : 왕도정치(王道政治)

앞에서 본 것처럼, 맹자에서 인간의 길은 의(義)였다. 인간은 그 의가 쌓이고 쌓여 생명력을 얻어 호연지기가 마음에 충만하게 된다. 그것의 전형적 인간이 대장부이다. 왕의 길은 이런 과정에 비추어 볼 수 있다. 맹자가 논한 왕의 길은 인간을 살리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즉, 백성을 보호하고 기르는 어진 정치를 말했다. “임금은 백성들의 재산을 늘려서 반드시 위로는 부모를 섬기기에 넉넉하게 하고, 아래로는 처자를 양육하기에 충분하게 해 주어야 한다.” 이것이 일차적으로 보장될 대 인간은 살맛을 느낀다. 가르치고 배움은 그 다음 일이다. 사람이 억압받고 죽어 가는데 누가 그 나라에서 살고 싶어 하겠는가? 백성들과 더불어 살고, 백성을 보호하는 길이 왕의 길일 따름이다. 맹자는 제 나라 선왕이 재화와 여색, 음악을 좋아한다고 했을 때, 이것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 만큼 ‘백성들과 더불어 함께 하라’ 고 말하였다. 그리고 어진 이를 등용하고 어질지 못한 자는 물러가게 하며 죄 있는 자는 죽이되 국민의 동의에서 모든 일을 시작해야 한다고 가르쳐 준다. 맹자에게서 왕은 군림자가 아니다. 왕은 백성에 근본 하여 민심에 따라 정치를 행해야 한다. 왕의 길은 바로 백성의 길, 백성의 착한 마음이 가는 길이었다.

5. 요약과 한계

맹자는 공자의 사상을 대체로 이어받았지만,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바로 보며 사상을 발전시켰다. 인간의 마음이 착하다는 성선설을 기본으로 하여, 인간의 길인 의(義) 사상, 인간의 생명력을 기르는 호연지기, 그리고 왕도 정치에 이르기까지 독특한 자기의 의견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당시에 그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역사를 통해 그의 주장이 사상적으로 보편성을 얻었더라도 실제의 현실 정치에서는 빛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어쩌면 위대한 사상이 대개 이런 과정을 거치는지도 모를 일이다. 중요한 것은, 맹자가 인간이 가야 할 바른 길을 적극적으로 제시했다는 점이다.

저자 소개

맹자(孟子)는 현재 중국 산동 추현 동남쪽에 있었던 중국 고대의 추(鄒)나라 사람으로, 대략 기원전 372년에 태어나 기원전 289년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이름은 가(軻)이며,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라고 알려져 있듯이,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교육적 노력은 대단했다.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의 제자에게서 공부를 배웠고, 당시 제후에게 왕도를 실현시키고자 제, 양, 송, 등, 위 등 여러 나라를 유세하며 돌아다녔다. 그러나 그가 전한 도가 제대로 행해지지는 않았다. 만년에 제자인 만장, 공손추, 악정극 등과 더불어 ’맹자(孟子)‘를 썼다. ’맹자‘는 7편으로 되어 있는데, 각 편마다 상하가 있어서 모두 14권이다. 맹자는 공자를 매우 존경하였으며, 공자를 계승하는 사람으로 자처하였다. 그 결과 맹자(孟子)는 공자(孔子) 다음가는 성인이 되었다. 따라서 그를 ‘둘째가는 성인’ 이라는 의미로 아성(亞聖)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생각해 볼 문제

1. 맹자와 고자 간에 벌어지는 성선과 성악에 대한 논쟁에서 그들이 사용하는 논증의 방법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그러한 방법의 한계 혹은 오류에 대해 생각해 보자.
2. 맹자의 왕도 정치가 현실 정치에 어떤 시사점을 주고 있는지 생각해 보자.

 

 

[자료출처-대성학원]

출처 : 대학입시수능정보(재수,점수공개)
글쓴이 : 교육길라잡이 원글보기
메모 :

공자의 『논어』

『논어』의 핵심 사상

1. 인(仁)이란 무엇인가?

‘논어’를 통해 드러나는 공자의 사상 가운데 가장 중요한 개념은 ‘인(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공자의 철학을 ‘인의 철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따라서, 공자가 창시한 이 유교의 핵심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인’의 개념을 잘 살펴보아야 한다.

원래 ‘인’이라는 글자는 ‘사람(人)과 둘(二)’이라는 글자가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둘 이상의 사람 관계에서부터 ‘인’이라는 개념이 출발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보통 우리가 ‘사람이 어질다’ 또는 ‘어진 사람’이라고 말할 때, 여기에는 이미 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갖게 되는 덕목이 포함되어 있다. 제자인 번지가 인에 대해 물었을 때 공자는 한 마디로 ‘타인들을 사랑하는 것(愛人)’ 이라고 대답해 주었다. 즉, 인이란 타인에 대한 사랑의 정신이다. 자기 몸이나 자기 욕망만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이외의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배려할 수 있는 마음 자세를 갖는 것이 바로 인의 정신이다.

따라서 인의 정신이란 막연한 어떤 관념이 아니라, 자기와 타인의 구체적인 관계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그래서 ‘논어’에는 자기와 타인의 관계를 통해 인의 정신을 설명한 구절이 많이 나온다. 예를 들어 “자기 자신이 바라지 않는 것은 남에게도 하지 말아야 한다.”거나 “어진 사람은 자기가 서고자 할 때에는 남부터 세워 주고, 자기가 이루고자 할 때에는 남부터 이루게 한다.”라는 구절이 대표적이다. 즉 인이란 이기적인 마음을 넘어서서 자기와 더불어 살고 있는 타인에 대한 존중과 배려에서 피어나는 정신인 것이다. 인간의 삶이란 크게 보면 넓은 사회적 관계에서 고려될 수 있는 것이지만, 모든 사회 관계의 출발점은 바로 ‘나와 너’ 또는 ‘자기와 타인’이라는 가장 기초적인 단위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 관계의 가장 기초적인 출발점에서의 마음 자세가 결국은 한 개인의 모든 사회적 관계를 결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공자는 인간답게 살아가는 데 필요한 덕목 중에서 그 무엇보다도 이 ‘인’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이러한 인의 정신을 몸소 실천하고 살아가는 사람을 ‘군자(君子)’라고 한다. 흔히들 오해하기 쉬운 것이지만, 군자는 단순히 사회 계급상의 귀족이거나 명목상의 학자를 지칭하는 것만은 아니다. 공자 자신도 결코 명문 집안의 후예나 높은 관직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다. ‘논어’에는 군자에 대한 언급이 대단히 많지만, 그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한결 같이 어떤 사람의 출신 성분이나 사회적 지위보다도 그 사람의 인격이나 덕성을 더 중요시하고 있다. 따라서 군자가 되는 중요한 조건은 바로 그 사람 자체의 됨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군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으로는 여러 가지가 제시되고 있지만,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펭서 말한 인의 정신이다. 타인을 배려할 줄 아는 인간이 되어야만 비로소 사람 구실을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군자는 말보다 실천을 더 중요시 하는 사람이다. 만약 사람이 행동보다 말만 앞서서 말로만 헛된 약속을 한다면, 그 말이란 의미 없고 헛된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군자는 말로 허황되게 장담하거나 공언하지 않고, 자기 자신이 실천할 수 있는 행위를 묵묵하게 해 나가는 사람이다. 그리고 나아가 자기의 말과 행동이 일치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자신을 단속하고 반성하는 사람이다. 오늘날 우리가 군자라고 할 때는 고리타분하고 점잖기만 한 인물을 연상하기 쉽지만, 사실상 군자가 되기 위해서는 이와 같이 강한 실천력이 갖추어져야만 한다. 또 자신의 말과 행동에 대해 이렇게 자기 단속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관리가 되거나 선생이 되었을 때 곧고 굳은 정신으로 자신이 맡은 일을 의롭게 할 수 있는 것이다.

2. ‘예(禮)’란 무엇인가?

공자는 군자의 이러한 인의 정신이 ‘예(禮)’라는 구체적인 형식을 통해 완성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할 때의 ‘예’는 우리의 자유로운 생각이나 행위를 구속하는 귀찮고 번거로운 것 정도로 이해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예’는 일종의 문화적 양식이자 방법이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인간관계의 모범적인 틀을 ‘예’라는 것으로 가시화한 것이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제각기 자기만의 방법과 방식으로만 자기의 생각이나 표현을 나타낸다면, 결국 그 사회는 무질서한 혼란의 상태에 빠지게 될 것이다. 따라서, 가장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해우이의 공통분모를 모아서 표준화하려는 시도가 바로 ‘예’인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법의 테두리 안에서 사회생활의 범위를 정하고 그 안에서 사회적 갈등이나 문제들을 조율하려고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처럼 예의 개념은 법의 개념과 매우 근접해 있기 때문에 ‘예법(禮法)’이란 말도 있는 것이다.

다만 시대적 한계로 인해 과거의 예법을 고집하다 보면 사회적 변화의 흐름에 역행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그러한 예법이 어떠한 의미를 지향하기 위해서 세워진 것인지에 대해서이다. 그런 까닭에 공자가 항상 강조한 것도 예를 지키고자 하는 내면적 정신이었다. 그는 형벌이나 형법으로 사람들을 억지로 억압하고 구속하기 보다는 사람들이 자율적으로 자신의 행위를 검속(檢束)하게 만드는 예를 더 소중하게 생각했다. 사람이 사람다워지기 위해서는 눈앞의 벌이 무서워 억지로 피하기보다는, 예의 형식을 통해 문화적 교양을 배우고 그 속에서 스스로 자기 행위를 조절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이와 같이 공자는 늘 인간의 자발적이고 자율적인 반성의 정신을 일깨우고자 노력한 사람이다.

‘극기복례(克己復禮)’란 이렇게 인의 정신을 바탕으로 예의 문화를 되살리고자 하는 공자의 생각이 함축된 주장이다. 여기에서 ‘극기(克己)’란 자기의 이기적인 욕망을 이겨 낸다는 것이고 ‘복례(復禮)’란 예법의 보편성을 되살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군자가 평생토록 힘써야 할 일이라고 했다. 한 개인이 자신의 정신을 휴머니즘으로 승화시킴으로서 자신이 속한 사회의 보편적 질서에 기여하고자 하는 이런 유교의 전통은, 오늘날 개인주의가 만연한 풍토에 비장한 경각심을 일깨워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 덕(德)과 도(道)는 무엇인가?

공자는 ‘논어’에서 ‘덕(德)’과 도(道)에 대해서도 많은 언급을 하고 있다. 덕은 주로 개인의 내면적 정신에 축적되는 것이고, 도는 인간과 자연 세계를 통틀어 내재되어 있는 도리를 지칭한다. 자신의 이기심을 극복하고 타인과의 공존을 지향하는 것이 인의 정신인데, 이 인의 정신이 마음의 내면 속에 쌓이고 쌓여서 얻어지는 것이 바로 덕이다. 그래서 ‘덕(德)’이란 글자는 예부터 ‘얻다(得)’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즉, 개인의 정신적 수양이 무르익어 마음 속에 차곡차곡 쌓여 가는 것을 덕이라 부른 것이다. 그러므로 덕이란 하루아침에 갑자기 생기지도 않으며, 어디 가서 그냥 얻어 올 수도 없는 것이고, 남이 함부로 가져가거나 빌려 갈 수도 없는 것이다. 오로지 자신의 오랜 내면적 수양과 반성적 생활을 통해서만 자기의 몸과 마음에 쌓여질 뿐이다. 따라서, 인의 정신을 꾸준히 실천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이러한 덕이 몸에 배어서 이른바 ‘인자하고 후덕한 사람’이 될 수 있다.

‘도(道)’라는 개념은 대체로 ‘올바른 도리’ 또는 '사람으로서 지켜야만 하는 길‘의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도는 개인의 윤리나 사회의 법도를 모두 통괄하여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가장 포괄적인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도가 한 개인을 통해 드러나면 인이 되고 덕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공자는 이것이 한 개인을 넘어서 집단이나 사회 또는 국가의 단위로 확대되기를 언제나 꿈꾸어 왔기에, 늘 ‘도가 행해지는 나라’ 라는 이상을 품고 있었다. 공자는 이러한 유토피아적인 세상이 자기 이전의 고대 사회에서 존재했었다고 믿었고, 그 시대처럼 평화롭고 의로운 세상이 자신의 시대에도 펼쳐질 수 있도록 노력했다. 물론 21세기를 눈앞에 둔 지금 세상에 이르기까지 공자의 그러한 열망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이 시대에도 참다운 인간 세상을 만들기 위해 몸과 마음을 다해 노력하는 사람들에게는 공자의 이러한 정신이 여전히 호소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인간 정신의 고귀함은 완성의 단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완성의 단계로 한 걸음씩 나아가는 노력의 과정에 있기 때문이다.

자시 자신의 내면을 반성하는 출발점으로부터 사회의 보편적 질서를 향해 나아가는 인간의 이러한 노력을 강조하면서 공자는 더불어 균형 있는 공부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가 말하는 공부란 단순히 ‘배우는 것(學)’ 에만 그치지 말고 ‘생각하는 것(思)’ 까지 겸하는 공부였다. 공자는 “만약 사람이 (남이나 책으로부터) 배우기만 하고 (스스로)생각할 줄 모르면 망막해지고, 만약 사람이 생각할 줄만 알고 배우지 않는다면 위태로워진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바깥으로부터 배우는 공부와 안으로부터 생각하는 공부가 다 함께 소중하다는 것을 일깨워 주는 구절로서, 오늘날 공부하는 사람들도 반드시 한번쯤 새겨 볼 만한 것이다.

공자는 살아 있는 동안 끊임없이 자기 성찰을 해 가면서 인생을 음미한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늘 죽음보다 삶의 문제를 더 소중하게 여겼다. 한 제자가 “선생님, 죽음이란 무엇인가요?”라고 물었을 때, “사는 것도 잘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말할 수 있겠느냐!”라고 대답했다. 그는 자신의 삶의 과정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열다섯 살에는 학문에 뜻을 두었고, 서른 살에는 뚜렷한 뜻을 세웠으며, 마흔 살에는 의혹이 없었다. 쉰 살에는 천명을 알았고, 예순 살에는 무슨 말이든지 귀에 거슬리지 않았으며, 일흔 살에는 마음이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법도를 어기지 않았다.(吾十有五而志干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感 五十而知天明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欲不逾矩)”

이러한 공자의 고백은 자신을 타고난 성인으로 묘사하기보다는, 삶의 과정에서 단계적으로 자신의 정신이 발전되었다는 것을 보여 주려는 데 그 의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공자가 말하는 이러한 단계를 통해 우리는 세월의 연륜에 따라 인간 정신이 어떠한 경지로 발전할 수 있는지를 간접적으로 배울 수 있다, 비록 그와 동일한 과정을 거치지는 못할지라도 그것을 우리가 살아가려는 인생에서 하나의 모범적인 지표로 삼을 수 있다.

오늘날의 현대 사회에서 공자의 ‘논어’는 이미 잊혀져 가는 과거의 낡은 고전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공자의 ‘논어’가 그 오랜 세월 동안 끊임없이 역사 속에서 거듭 조명을 받아 왔다는 사실은 결코 가볍게 치부될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공자의 사상이 시대적 변천에도 불구하고 가치를 가지는 보편성이 있으며, 그만큼 인간의 핵심적인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는 증거이다. 따라서 과거의 전통주의를 고수하기 위해 무조건 공자를 존숭하여 ‘논어’를 신성화할 필요까지는 없지만, 옛날 시대의 고루한 유물로만 취급해서 그 속에 담긴 참뜻을 보지 못하는 것도 안타까운 일이다. 이제 우리는 공자의 사상이 담긴 ‘논어’를 현재적 의미로 재해석함으로써, 이 시대의 인간 문제를 풀어내는 데 지침이 될 만한 교훈들을 다시 발견하려는 자세를 가져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이것이 고전을 참으로 고전답게 하는 것이며, 우리 시대의 새로운 고전을 창조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는 길이 될 것이다.

저자 소개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 등 동아시아 문명의 역사에서 유교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유교는 고대 및 봉건 시대에 국가 이념으로 채택되어 사회 전반의 문화 규범을 구성하는 데 가장 중요한 원리를 제공했으며,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일반인들의 생활과 의식 속에 문화적 관습으로 뿌리 깊게 남아 있다. 따라서, 동아시아 문명권에 속한 나라의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교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유교를 창시한 사람이 바로 공자(孔子)이다. 그는 대략 기원전 551년부터 기원 전 479년까지 살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 당시는 이른바 춘추시대(春秋時代)라고 부르는 역사적 시기로, 원래 주(周)나라가 정통 왕조였지만 정치적인 혼란이 매우 심해서 수많은 제후들이 내란을 일삼던 때였다. 공자는 바로 이렇게 어지러운 정치적 상황에서 인간과 사회가 올바른 길을 되찾기 위해서는 과연 무엇을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하였고, 그 고민의 흔적이 ‘논어(論語)’라는 책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논어’는 주로 공자와 그의 제자들 사이에 주고받은 말들을 기록한 책으로 알려져 있는데, 모두 20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편의 이름은 제일 앞에 나오는 글자를 그대로 따서 지었다.

‘논어’외에 공자의 저술로 알려진 것으로는 역(易)에 대해 해설한 ‘십익(十翼)’이 있다고 전해진다. 또 자신이 태어난 노(魯)나라의 역사를 편년체로 서술한 ‘춘추(春秋)’가 있으며, 이 춘추를 비롯하여 ‘시경(詩經)’, ‘서경(書經)’, ‘역경(易經)’, ‘예기(禮記)’, ‘악경(樂經)’ 등을 합쳐 유교의 기본 경전으로 삼아 이른바 ‘육경(六卿)’을 편집했다.

생각해 볼 문제

1. ‘논어’는 공자의 핵심 사상을 담고 있지만,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이 ‘논어’를 많이 보지 않는다. 그 이유를 공자가 제시한 덕목인 예(禮)라는 관점에서 생각해 보자.
2. 공자는 ‘배우기만 하고, 생각할 줄 모르면 망막해지고, 생각할 줄만 알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로워진다.’고 했다. 이 두 경우의 사례를 우리 주변에서 찾아보자.
3. 근대성의 위기에 대한 대안으로서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이 동양적 사고이다. 그 가운데에서 특히 유학은 하나의 학문이면서 동시에 통치 이념이었고 세속적으로는 종교 문화이기도 했다는 점에서 가장 큰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유학의 근본이념에 대한 이해를 토대로, 그것이 오늘날 현대인의 삶과 세계에 어떤 긍정적 영향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자.

 

 

[자료출처-대성학원]

출처 : 대학입시수능정보(재수,점수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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