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작 뉴턴의 『프린키피아』

『프린키피아』의 핵심 내용

뉴턴은 다른 과학자들과는 달리 자신이 발견한 것을 남에게 알리기를 그리 원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자신이 발견한 것을 홀로 즐기기를 좋아하였다. 그래서 어쩌면 그의 위대한 명저인 『프린키피아』는 핼리의 적극적인 권유가 없었다면 사장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아리스토텔레스의 역학을 교과서에서 배우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프린키피아』는 총 3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여기서는 1권에 대해서만 다룰 예정이다. 제1권은 앞의 뜻매김 부분과 공리(운동법칙), 그리고 물체들의 움직임에 대한 내용의 총 14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뜻매김 부분에서는 질량, 운동량, 관성, 구심력 및 이와 관련된 용어들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있다. 공리 부분에서는 뉴턴의 운동 법칙인 제1법칙 관성의 법칙, 제2법칙 가속도의 법칙, 제3법칙 작용·반작용의 법칙 및 그에 딸린 법칙들을 설명하고 있다. 그 다음으로, 본문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 기술되고 있다.


제1장 어떤 양들에 대해서 맨 처음과 맨 마지막의 비율을 이용하는 방법

이 장에서는 어떤 양이나 비율로 이루어진 수열의 수렴에 관해서 설명하고 있다. 적분을 처음 배웠을 때를 떠올려 보자. 어떤 곡선의 아래 부분의 면적을 알고자 할 때, 그것의 구간을 n개로 나누어, 곡선 안쪽에 내접하는 직사각형들의 넓이의 합이나 외접하는 직사각형의 넓이의 합은 n을 매우 크게 할 때 같아짐을 배웠을 것이다. 또한, 닮은꼴 도형들의 길이 비를 알면 그 도형들의 면적의 비는 길이의 비의 제곱임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그리고 임의의 원에서 두 점을 임의로 잡았을 때 한 점이 다른 한 점으로 무한히 가까이 간다고 하면, 그 두 점에 의해 생겨나는 호와 현의 길이 및 고정된 점에 이은 접선과 원의 중심이 만나서 생기는 선분의 길이는 같아진다. 그러므로 그 길이들 간의 비율이 결국에 가서 어떻게 되는지를 구할 때, 현, 호, 접선에 의한 선분 중 아무것을 선택해도 상관없게 된다. 이와 같은 방법을 이용하여 합과 비율의 극한을 증명하고, 앞으로는 무한소의 개념을 이용하여, 다음의 기본 원리들을 증명하게 될 것이다.

제2장 구심력을 구함

이 장에서는 구심력을 기하학적으로 구하는 방법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추에 실을 매달아 돌리고 있다고 상상해 보자. 이 때, 추가 회전하고 있는 궤도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우리가 주고 있는 힘이 바로 구심력이며, 우리가 일정한 힘으로 추를 돌리고 있다면 추가 한 바퀴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은 일정할 것이다. 따라서, 실이 그리는 호의 면적은 시간에 비례할 것이다. 역으로 생각해 볼 때 실이 그리는 면적이 일정하다면, 추의 속력은 실의 길이에 반비례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어떤 물체가 시간에 비례하는 넓이를 그리면서 움직이고 있다면, 그 물체는 어떤 중심이 있어서 그 중심으로부터 힘을 받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힘의 크기는 추의 속력의 제곱에서 실의 길이를 나눈 것에 비례하고, 이 때 추의 회전 주기는 실의 길이를 속력으로 나눈 것에 비례한다. 그러므로 회전 주기와 반지름의 관걔를 구심력을 중심으로 고려했을 때, 케플러의 법칙에서 밝혀졌듯이 주기의 제곱이 반지름의 세제곱에 비례하게 되면 구심력은 반지름의 제곱에 반비례하게 됨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 이외에도 물체가 움직이는 궤도가 원이 아닌 원뿔 곡선일 때 중심으로부터의 구심력을 계산하는 방법도 설명되어 있다.

제3장 원뿔 곡선들을 따라 움직임

이 장에서는 물체가 초점으로부터 구심력을 받으며 타원, 쌍곡선, 포물선의 궤도를 움직일 때 구심력의 크기는 초점에서 그 물체까지의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며, 역으로 힘의 중심이 고정되어 있고, 구심력은 그 중심으로부터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고, 또한 그 힘의 크기를 안다고 할 때, 이 물체가 그리게 될 궤도는 속도의 크기에 따라 타원, 포물선, 쌍곡선의 궤도를 그리게 됨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제4장 초점을 주었을 때 타원, 포물선, 쌍곡선 궤도를 구함

이 장에서는 우리가 초점을 이미 알고 있을 때 타원, 포물선, 쌍곡선의 자취의 방정식을 구하는 방법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으므로, 연필과 연습장만 있다면, 지금 당장 계산해 낼 수 있다. 뉴턴이 되었다는 생각으로 계산해 보기를……

제5장 초점을 주지 않았을 때 궤도를 구하는 방법

이 장에서는 초점이 주어지지 않았을 때, 물체가 움직이는 궤도를 구해 내는 방법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 이런 궤도를 구해 내는 것 역시 스스로가 적당히 가정을 하고 있고 일반적인 2차 곡선의 자취의 방정식을 구한다고 생각하면, 좀 복잡하기는 하지만, 모두 계산해 낼 수 있다. 참고로, 일반적인 2차 곡선을 계산하기 위해서는 6개의 미지수를 구해 내야 한다. 그렇지만 적당히 축을 잡고 회전 이동시키면, 3개의 미지수로 줄일 수 있게 된다. 자, 한번 도전해 보는 것이 어떨지?

제6장 주어진 궤도를 따라 움직이는 운동을 구함

이 장에서는 어떤 임의의 시간이 주어졌을 때, 주어진 궤도를 따라 움직이는 물체의 위치를 알아 내는 방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의 요점은 어떻게 시간과 그 물체가 움직임에 따라 생기는 면적을 연결시킬 수 있는지의 문제인데, 그 방법이 극히 기하학적이고, 고등 수학의 내용을 알아야 하므로, 대학에 들어가서, 고등 수학을 배운 후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제7장 직선을 따라 올라가고 내려감

이 장에서는 힘의 중심으로부터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해 구심력이 작용한다고 했을 때, 물체가 직선을 따라 수직으로 떨어지거나 수직으로 상승할 때, 주어진 시간 동안에 이 물체가 지나가는 거리, 혹은 일정한 거리만큼 움직였다고 할 때, 걸리는 시간을 어떻게 알아 내는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서 요점은, 앞장에서 설명한 시간과 면적의 관계 및 직선 운동을 원상에서의 운동으로 대체해서 생각한 후 극한을 이용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제8장 어떤 종류의 구심력이 작용하였을 때, 물체가 그릴 궤도를 구함

이 장에서는 어떤 종류의 구심력인지를 알고 있을 때, 물체가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를 설명하고 있는데, 예를 들어 물체가 진자 운동을 할 때, 이 물체는 항상 같은 높이에서는 같은 속력을 가질 것이다. 또한, 같은 구심력이 작용하는 상황에서 다른 물체가 직선으로 운동한다면, 이 물체 역시 진자 운동을 하는 물체와 같은 높이에서는 같은 속력을 가질 것이다. 이러한 점은 우리가 배웠던 사실로부터 이해할 수 있다. 자유 낙하하는 물체가 지상에 떨어질 때까지의 시간과 같은 높이에서 그 물체를 앞으로 던졌을 때 지상에 떨어지는 시간이 같다는 것과 동일한 원리이기 때문이다.

제9장 움직이는 궤도를 따른 운동, 원일점, 근일점의 움직임

이 장에서는 달과 같이 움직이는 궤도를 가진 물체들의 운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제10장 주어진 면에서 물체의 움직임, 그리고 물체의 진자 운동

이 장에서는 구심력의 종류를 알고 있을 때, 그 물체가 운동하는 평면에서 궤도를 고려하고, 또한 운동하는 물체가 운동하는 평면에서 궤도를 고려하고, 또한 운동하는 평면과 수직인 면에서 그 운동을 관찰했을 때 (수직인 평면에 정사영), 그 물체의 운동이 단순히 직선을 왕복 운동하는 것 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물론 그 물체가 곡면을 운동하고 있다면, 평면에 정사영한 후 다시 직선에 정사영하면 위와 같은 결과가 나오게 된다.

제11장 구심력에 의해서 서로 끌려가는 물체들의 움직임

이 장에서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작용·반작용의 법칙을 적용하여 물체들의 움직임을 설명하고 있다. 실제로, 자연계에는 한 물체가 일방적으로 잡아당기기만 하는 경우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인력을 두 물체가 일방적으로 잡아당기기만 하는 경우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인력을 두 물체 사이에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물체에서 작용하므로, 그 힘들을 모두 고려하여야만 한다. 그리고 그 힘들은 모든 물체들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무게 중심을 힘의 중심으로 하여 작용한 후 물체들의 궤도 운동을 이끈다.

제 12장 공처럼 둥근 물체들의 당기는 힘

이 장에서는 공처럼 둥근 물체들의 경우, 공 내부의 점들은 공 표면의 점들에 의해 어떤 방향으로도 당겨지지 않으며, 표면의 점들은 공의 중심을 향해서 반지름의 제곱에 반비례하는 힘으로 당겨지고, 곧 외부의 물체와의 인력은 마치 공의 모든 질량이 중심에 집중되어 있는 것과 같은 효과로 작용하는 것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제13장 공처럼 생기지 않은 물체들의 당기는 힘

이 장에서는 공처럼 생기지 않은 물체들 간의 인력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데, 공처럼 생기지 않은 물체들 간의 인력은 그 물체의 질량이 무게 중심에 집중되어 있다고 생각한 후, 공 모양의 물체 사이에 존재하는 인력과 같은 방법으로 고려하면 된다는 사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제14장 아주 작은 물체들이 매우 큰 물체의 여러 부분의 구심력을 받아서 움직임

이 장에서는, 빛이 매질이 다른 물질을 지날 때 일어나는 굴절, 반사와 각진 물체를 지날 때에 일어나는 회절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뉴턴의 명저인 『프린키피아』는 오늘날의 눈부신 과학의 발전을 이루는데 근간이 되었으며, 이 저서에서 증명된 모든 과학적 사실로 인하여 새로운 과학의 장이 열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뉴턴의 이런 과학적 사실의 발견보다 더욱 의미 심장한 것은, 그 전까지는 신비주의에 입각해 이루어졌던 과학적 사고를 실험과 관찰에 의해서 얻은 현상들을 바탕으로 얻어 냈다는 점이다. 그는 이러한 현상들을 분석하여 자연의 힘과 그 힘에 관련된 간단한 규칙을 구한 후, 이것들을 종합해서 나머지 것들의 구조를 밝혀 내는 분석적 사고와 종합적 사고를 과학에 도입하여, 이로 인해 근대적인 과학적 사고로의 전환을 이루게 하였다.

저자 소개

『뉴턴(Isaac Newton ; 1643~1727)』은 잉글랜드 동부 링컨셔의 울스소프에서 태어나, 1669년에는 스승인 베로의 석좌 교수직을 이어받아 수학을 강의했다. 그는 반사 망원경을 제작했으며, 1687년 핼리의 권유로 『프린키피아』를 출판하였다. 한때 조폐국 감사, 조폐 국장 또한 케임브리지 대학 선출 국회의원을 역임하기도 했으며, 1703년 왕립 협회 회장에 선출되어 죽을 때 까지 그 지위에 있었다. 1705년 작위를 받고, 1710년 그리니치 천문대 감찰 위원장에 취임했다.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고, 1727년 런던 교외의 켄징턴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그의 저서인 『자연 철학의 수학적 원리(Philosophia naturalis prin-cipia mathemetica)』는 흔히 『프린키피아』라고 불리 운다. 이 책은 당시 지식인 세계의 언어였던 라틴어로 쓰여 졌는데, 제1권과 제2권은 운동 현상의 일반적인 법칙들을 설명하고 있으며, 제3권은 이 법칙들을 적용하여 우주의 구조를 밝히고 있다.

그의 업적의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 중력의 인력과 프리즘을 통한 빛의 투과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업적이 지닌 더 중요한 의의는, 관측 사실들과 과학의 문제들을 보는 새로운 방법을 도입한 점과 낡은 접근 방법과 낡은 전통으로부터 근대적인 과학적 사고 방법으로의 전환을 이루었다는 점이다.

생각해 볼 문제

뉴턴적 세계관과 양자 역학적 세계관이 어떻게 다른지 자료를 찾아보고, 그 차이점에 대해 친구들과 이야 기해 보자. 또, 그러한 인식의 틀이 보여 주는 차이가 세계를 인식하는 데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서 도 생각해 보자.

 

 

[자료출처-대성학원]

출처 : 대학입시수능정보(재수,점수공개)
글쓴이 : 교육길라잡이 원글보기
메모 :

한스 요나스의 『책임의 원칙 : 기술 시대의 생태학적 윤리』

『책임의 원칙 : 기술 시대 생태학적 윤리』의 핵심 내용

인간의 기술적 착취에 의해 고통 받고 신음하던 지구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드디어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오존층 파괴, 멸종 위기에 처한 각종 생물들, 지구 온난화 현상, 이상 기후에 따른 자연 재해 등, 이와 같은 인간에 대한 자연의 보복은 역설적 성격을 띠고 있다. 즉, 인간이 기술을 통해 자신의 삶의 영역을 넓히면 넓힐수록, 진정한 삶의 터전은 이로 인해 더욱더 잠식당하고 있다. 우리가 일상 생활에 사용하고 있는 평화적 기술 역시 가공할 만한 불행의 잠재력을 함축하고 있으며, 설상가상으로 이런 불행의 치명성이 수많은 기술 문명의 성공들에 가려진 채 내부적으로 서서히 스며들어 가면서 환경 위기에 대한 인간의 반응을 둔감하게 만들었다.

이와 같은 인간의 생태학적 불감증에 경종을 울리는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철학에서는 '환경 윤리학'이라는 새로운 계보를 형성하게 된다. 따라서 사유의 혁명을 통해 기술에 의한 환경 오염을 극복하고자 하는 한스 요나스의 『책임의 원칙』은, 바로 자연에 대해 인간이 자신의 권력을 방종하게 남용하는 것을 고발하는 자연의 대변자 역할을 자청하게 된다. 즉 인간의 자유가 기술을 통해 실현되고 따라서, 기술에 의한 환경오염이 우리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치러야 할 대가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지구의 병은 치유할 길이 없다고 주장하게 된다.

요나스는 무엇이 위기에 처해 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 무엇인가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사실 자체에 대한 인식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는 생태학적 문제에 세 단계로 접근하고 있다. 즉, 그는 이 책에서 '왜 위기인가?', '어떻게 위기를 극복할 수 잇는가?', 이는 각각 전통 윤리학 비판과 마르크스적 유토피아론의 한계 분석, 책임의 원칙 수립이라는 절차에 근거하여 이루어진다.


1. 전통 윤리학 비판

올바른 행동에 관한 전통적 지혜는 모두가 인간 중심적이었으며, 과거의 경험을 의중에 두고 있었다. 다라서 행동이 영향을 미치는 범위는 작았고, 예견하여 목표를 설정하고 계산할 수 있는 시간적 간격은 짧았으며, 상황에 대한 통제는 제한되어 있었다. 즉, 전통적 윤리는 인간의 삶의 전(全) 지구적 조건과 종(種)의 먼 미래와 실존을 고려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인간 존재에 대하 자연의 도전은 그 종류와 규모면에서 아주 새로운 것이며, 이제까지의 그 어떤 것과도 유사하지 않다. 따라서 행위의 직접적 영역에만 제한되어 있던 전통 윤리학의 모든 도덕적 명령과 격률은 완전히 새로운 양태의 권력과 이를 예속시킬 수 있는 규범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제시해 주지 못한다.

2. 마르크스적 유토피아주의 비판

요나스가 보기에 마르크스주의(맑시즘)의 가장 치명적인 오류는 그것에 전제되어 있는 인간학, 즉 인간의 본질에 관한 그릇된 관점에 있다. 나비가 되는 애벌레의 현재와는 달리 인간의 현재는 불확실한 지금 그대로 항상 충분한 가치가 있다. 즉, 인류는 그 때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개체가 그러하듯이 미완성에서 완성으로, 임시적인 것에서 궁극적인 것으로 진행되는 미리 계획된 전체 형성 과정의 대상이 결코 아니다.

마르크스적 유토피아의 열정은 그것을 열망하는 현상태를 단순히 개선하겠다는 의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제까지 알려져 있지 않은 상태를 통하여 인간을 더욱 고상하게 변신시킨다는 약속에 있었다. 따라서 맑시즘에 따르면 이제까지의 환경은 좋은 적이 없었고 인간도 역시 그랬는데, 무계급의 사회가 비로소 선한 인간을 산출할 것이고 주장한다. 이것이 바로 맑시즘의 본질에서 말하는 '유토피아'이다.

이렇듯 처음부터 맑시즘은 기술의 권력을 찬양하였으며, 그것이 사회와의 합동으로 구원을 가져다주리라 기대하였다. 그러므로 맑시즘은 기술의 권력을 제어하려고 하기보다는, 그것을 자본주의적 소유자의사슬에서 해방시켜 인간 전체의 행복을 위하여 사용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요나스가 보기에 마르크스적 유토피아에 대해 비판하고 있는 점은 첫째, 오늘날의 조건하에서인간은 유토피아를 누릴 수 없다는 것이며, 둘째 그런 기대 자체가 하나의 허구적 이상이라는 것이다. 즉, 전 지구상의 부와 부를 이룩하였던 생산력을 무차별적으로 재분배하더라도, 현재 인간의 조건은 가장 가난한 지역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키기에도 넉넉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3. 책임의 원칙 수립

요나스는 지금까지 인간이 자연에 대하여 행사해 온 권력을 근거로 하여 책임의 원칙을 행위의 새로운 명법(明法)으로 수립한다. 그가 보기에 책임의 전제 조건은 인과적 권력이다. 즉, 권력에 위탁된 것에 대해 권력은 객관적으로 책임이 있으며, 권력은 책임감이 가담함으로써 감정적으로는 참여하게 된다. 오늘날 필요한 환경에 대한 미래 사회의 책임의 윤리는 이런 종류의 책임과 책임감을 뜻한다.

오랜 자연의 창조 기간을 거쳐 생성되어 현재 인간의 손에 넘어온 지구의 왕성한 생활력은 그것 자체로서도 인간의 보호를 요청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또한, 자연에 대해 지속적인 권력을 행사해 온 인간은 자연에 대해 엄중한 책임을 갖는다. 그러나 요나스는 생존 경쟁 속에서 경우에 따라 발생하곤 하는 인간과 자연의 양자 택일에서는 어쨌든 인간이 항상 유리하며, 자연의 존엄성이 인정되더라도, 자연은 인간과 인간의 지고한 존엄성에 굴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결국, 그의 『책임의 원칙』은 한편으로는 기술을 죄악시하는 생태학적 자연주의에 경도되지 않고, 다른 한편으로는 환경 문제를 기술적으로만 파악하는 개량주의에도 빠지지 않으며 생태학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자연에 대한 지나친 승리는 승자 자신을 위태롭게 할 수 있다는 철저한 인식으로부터 출발하여 책임의 영역을 인간에서 자연으로 확장해 갈 때, 인간은 비로소 존재의 타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 소개

『한스 요나스(Hans Jonas : 1903~1993)』는 프라이브르크, 베를린, 하이델베르크와 마르부르크에서 철학, 신학, 예술사를 공부하고 1928년 하이데거와 불트만에게서 '그노시스(Gnosis)' 개념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한 독일계 철학자이다. 1933년에 영국을 거쳐 1935년에 팔레스티나로 망명한 그는, 1955년 미국으로 이주하면서 오랫동안 프린스턴 대학, 콜롬비아 대학 등에서 객원 교수로 활동하였다. 1987년 책임의 원칙으로 독일 서적 판매 조합에서 주는 평화상을 수상하였고, 주요 저서로는 『아우구스티누스와 바울적 자유의 문제』, 『그노시스적 종교』, 『무(無)와 영원의 사이』, 『기술, 의료, 그리고 윤리』 등이 있다.

요나스는 특히 1979년에 『책임의 원칙』을 출간하면서 본격적으로 환경 윤리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는데, 여기서 그는 전통 윤리학의 근저에 있는 인간 중심주의를 비판하고 약한 생태 중심주의(weak ecocentrism)의 입장을 취하면서 미래 세대에 대한 현재인의 책임을 강조했다. 즉, 개별 생명체의 안위는 어디까지나 전체 생태계의 안정과 균형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환기시키면서 생태계 자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생태 중심주의의 입장을 표방함과 동시에, 과학적인 접근 방식 특히 생태학과 진화론에 입각해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고 있다.

요나스는 『책임의 원칙』의 머리말에서 시간이 촉박하다고 말하고 있다. 즉, 생각만 하고 있기에는 지구의 위기가 너무 심각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막연한 구원의 예언보다는 불행의 예언에 더욱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장기 예측(미래에 대한 청사진)의 불확실성 자체를 하나의 기정사실로 받아들여, 환경에 대한 인간의 결정이 최고의 선을 획득하기 위해서가 아닌 최고의 악을 회피하기 위해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인간에게조차 해가 되는 기술의 '부작용'이 자연을 침해함으로써 득을 흐리게 하거나 득보다 더 커지려고 할 때, 비로소 인간은 자연의 허용 한계를 처음으로 인지하게 된다. 또 인간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무리하게 자연을 착취하여 미묘한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자연 전체의 체계를 파멸로 몰아칠 때, 돌이킬 수 없이 인간은 자연의 허용 한계를 넘어서게 된다. 그러므로 요나스가 이 책에서 제기하고 있는 중심 질문은 무엇이 '한계'이며 어디에 놓여 있는가, 거기까지 얼마나 남았으며 또는 얼마만큼 가까이 있는가이다.

생각해 볼 문제

1. 요나스의 ‘책임의 원칙’은 ‘전통 윤리학’, ‘마르크스적 유토피아’를 각각 비판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와는 반대로 ‘전통 윤리학’과 ‘마르크스적 유토피아’의 관점에서 ‘책임의 원칙’을 비판해 보자.
2. 우리가 자연을 개발할 때, ‘한계’가 되는 기준에는 어떠한 것이 있는지 요나스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자.

 

 

[자료출처-대성학원]

출처 : 대학입시수능정보(재수,점수공개)
글쓴이 : 교육길라잡이 원글보기
메모 :

미르치아 엘리아데의 『성과 속』

『성과 속』의 핵심 내용

『성과 속』은 이 세계에서 성이 드러나는 여러 양태와 종교적 세계에 살고 있는 인간의 상황을 서술함으로써 우리를 종교학의 심오한 문으로 안내한다. 엘리아데는 이 세계가 태초부터 성스러운 것이라는 입장에서 논의를 출발한다. 다음은 이 책의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1. 성현의 개념과 종교적 인간

인간이 성스러움을 경험하는 것은 그 성스러움이 속된 것과는 전혀 다른 어떤 것으로서 스스로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종교의 역사는 가장 원시적인 것에서부터 고도로 발달한 것에 이르기까지 많은 성현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서 성현이란 어떤 성스러운 것이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성스러움이 드러남으로써 사물은 어떤 전혀 다른 것으로 변하지만 그 후에도 그 사물의 물질적 속성은 변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성스러운 돌도 여전히 한 개의 돌이다. 즉, 겉으로 볼 때는 그 돌을 다른 일반적인 돌과 구별할 수는 없다. 그러나 돌이 성스러운 것으로서 제시되는 사람들에게는 눈앞의 돌이 초자연적인 실재로 변한다. 다시 말하면 종교적 경험을 가진 인간에게는 모든 자연이 신성성으로 제시된다. 그 때 우주는 전체가 성현이 된다.

고대 사회의 인간은 성스러운 것 가운데에, 혹은 성화(聖火)된 사물에 아주 가까이 접근해 살려고 노력했다. 왜냐 하면 원시인 및 모든 전근대적인 인간에게 성스러운 것은 힘이며 궁극적으로는 무엇보다도 실재 그 자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성스러운 것은 존재로 가득 차 있다. 성스러운 힘은 실재와 동시에 영원성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종교적 인간은 존재하고자 하는 갈망, 실재에 참여하고자 하는 갈망, 힘으로 충만하고자 하는 갈망을 갖고 있다.

2. 인간에게 실재하는 공간의 의미

종교적 인간에게는 공간이 동일하지 않다. 종교적 인간은 성스러운 공간과 그 밖의 다른 공간, 그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넓은 공간 사이의 대립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비종교적 인간에게 공간은 동일하다. 성스러운 공간은 인간에게 세계를 발견하게 하고, 진정한 의미에서 삶을 획득하게 한다. 이에 반해 속된 경험의 공간에는 단지 흩어진 우주의 단편들만이 있을 뿐이다.

성스러운 공간의 체험은 '세계의 창건'을 가능케 했다. 성스러운 것이 출현하는 공간에서, 실재가 그 모습을 나타내고 세계가 출현한다. 성스러운 것의 출현은 지상과 천상 사이를 교류하게 하고, 하나의 존재 양식에서 다른 존재 양식으로의 이행을 가능하게 한다. 속된 공간에 이 같은 단절이 생김으로써 하나의 중심이 창조되고, 그것을 통하여 초세계적인 것과 교섭하고 그에 따라 세계를 창건한다. 공간의 성현 혹은 공간의 정화는 우주 창조에 대응한다.

모든 세계는 신들의 작품이다. 종교적 인간은 성스러운 세계 안에서만 살 수 있다. 왜냐 하면 이러한 세계 속에서만 진정으로 실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종교적인 욕구는 억제할 수 없는 존재론적인 갈망을 표현하고 있다. 종교적 인간은 존재를 갈망한다.

이 존재론적인 갈망은 여러 가지 형태로 드러난다. 종교적 인간은 실제의 핵심, 세계의 중심에 자리 잡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즉, 신들과 가장 가까운 곳에 머물고자 노력한다. 세계의 중심이라는 상징은 국가, 도시, 사원, 궁전뿐만 아니라 수렵민의 천막, 유목민의 유르트, 정착 농경민의 집과 같은 보잘것 없는 인간 주거의 형성 원리가 된다.
그러나 어떤 공간에 거주하는 것은 우주 창조의 반복과 같다. 그러므로 종교적 인간이 공간 안에 자리 잡는 것은 사실상 종교적 결단이 된다. 그는 자기가 거주하기로 선택한 세계를 창조할 책임을 떠맡으면서 혼돈을 우주화할뿐만 아니라 그의 작은 우주를 신들의 세계처럼 만듦으로서 성화한다. 종교적 인간은 '신의 세계'에 깊은 향수를 느끼고 후세의 사원이나 성전이 그러한 것과 같이 신들의 집과 유사한 집을 동경한다.

3. 인간에게 실제하는 시간의 의미

종교적 인간에게는 공간과 마찬가지로 시간 역시 동일하거나 연속적이지 않다. 한편에는 성스러운 시간, 축제의 시간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속된 시간, 즉 일상적인 시간이 지속된다. 이 두 종류의 시간 사이에는 물론 단절이 있다. 하지만 종교적 인간은 의례(儀禮)를 통해 일상적 시간에서 성스러운 시간으로 이행한다.

이 두 종류의 시간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성스러운 시간은 원초적인 신화적 시간을 나타낸다. 종교적으로 축제에 참여하는 것은 일상적인 시간에서 탈출하여 신화적인 시간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스러운 시간은 무한히 회복될 수 있고 반복 가능하다. 그러므로 종교적 인간은 두 종류의 시간 속에 살고 있다.

이에 반해 비종교적 인간도 역시 시간의 비연속성과 이질성을 체험한다. 그에게도 노동하는 단조로운 시간이 있는 한편, 오락과 위안의 시간, 즉 '축제의 시간'이 있다. 좋아하는 음악을 들을 때, 사랑에 빠져 있을 때, 애인을 기다릴 때나 혹은 만날 때, 그는 일하거나 피곤에 지쳐 있을 때 체험하는 것과는 다른 시간을 체험한다.

그러나 종교적 인간과 비교하면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종교적 인간은 '성스러운 시간'을 체험한다. 그 시간은 신들에 의해 성화되고 축제에 의해 재현된 원초적인 시간이다. 이 전례의 시간은 비종교적인 인간으로서는 도달하기 어렵다. 비종교적인 인간에게 시간은 단절도 신비도 아니다. 그에게 시간은 그 자신의 삶과 연결되어 있고, 따라서 처음과 끝이 있다.

4. 인간에게 실재하는 자연의 의미

이처럼 시간과 공간을 다르게 체험하는 종교적 인간에게는 자연도 결코 단순한 '자연'이 아니다. 그것은 항상 종교적 의미로 충만해 있다. 왜냐하면 우주는 신의 창조물이고 세계는 신들의 손으로 완성된 것이어서 성스러움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종교적 인간에게 세계는 성스러운 것으로 드러난다. 무엇보다도 세계는 실존하고, 실제로 거기에 있다. 세계는 카오스가 아니라 코스모스다. 따라서 세계는 신들의 작품인 피조물로 자신을 드러낸다. 하늘은 직접적으로 '자연스럽게' 무한한 거리, 신의 초월성을 계시한다. 대지도 우주적인 어머니이자 양육자로서 자신을 나타낸다.

따라서 종교적 인간에게 초자연적인 것은 자연적인 것과 밀접하게 연결 되어 있다. 자연은 항상 그것을 초월하는 무엇인가를 표현하고 있다. 성스러운 돌이 존경받는 이유는 그것이 신성하기 때문이지, 돌 그 자체 때문이 아니다. 돌의 진정한 본질을 계시하는 것은 돌의 존재 양식 안에 나타난 신성성이다.

종교적 인간은 열려진 우주 가운데 살며, 그 자신도 세계를 향해 열려 있다. 이것은 그가 신들과 교류하고 있다는 것, 세계의 신성성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인간은 신들과 교류가 가능한 중심에 거주하기를 갈망한다. 그의 거주지는 소우주이며, 그의 신체도 역시 소우주이다.

'신체ㅡ집ㅡ우주'의 동일시는 매우 일찍부터 나타났다. 인도의 종교 사상은 이런 '집ㅡ우주ㅡ신체'라는 상징을 풍부하게 사용하고 있다. 등뼈는 우주의 기둥, 호흡은 바람이나 배꼽, 심장은 세계의 중심과 동일시된다. 말하자면 인간은 그에게 미리부터 운명 지워진 상황 속에 의식적으로 순응함으로써 스스로를 우주화 한다.

5. 현대의 비종교적 인간

이에 비해 현대의 비종교적인 인간에게 우주는 불투명하고 둔하고 말 못하는 존재가 되었다. 우주는 어떤 메시지도 전해 주지 않으며, 어떤 암호도 갖고 있지 않다. 자연의 신성함이라는 의식은 오늘날 유럽의 경우 주로 농경민들 사이에 남아 있다. 왜냐 하면 그들 사이에는 아직도 우주적 제의로 체득한 그리스도교가 있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서 산업 사회의 그리스도교는 중세 시대까지 지녔던 우주적 가치를 오래 전에 상실해 버렸다. 그들의 종교 체험은 더 이상 우주를 향해 열려 있지 않다. 결국 그것은 전적으로 개인적 체험이 되어 버렸다. 즉, 구원은 인간과 그의 신에 대한 문제가 되었다. 기껏해야 인간은 신에게 뿐만 아니라 역사에 대해서도 책임을 느끼고 있음을 인정할 뿐이다. 그러나 이 같은 '인간ㅡ신ㅡ역사'의 관계 속에는 우주가 끼어들 자리가 없다.

그러나 '종교가 없는' 세속적인 인간도 여전히 종교적 인간의 후예이며, 그는 자신의 역사를 지워 버릴 수는 없다. 그는 존재의 깊은 곳, '무의식'이라 불리는 영역을 간직하고 있다. 이 무의식의 내용과 구조는 시노하의 이미지와 유사하다.

무의식의 내용과 구조는 특히 위기의 상황이 낳은 결과이다. 이 때문에 무의식은 종교적인 분위기를 갖게 된다. 왜냐 하면 모든 실존적 위기는 세계의 실재성과 세계 내에서의 인간을 다시 한 번 문제 삼기 때문이다. 이는 곧 실존적 위기가 결국 '종교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관점에서 보면, 비종교적이라고 주장하는 근대인들에게 종교와 신화는 그들 무의식의 어둠 속에 '은폐되어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것은 또한 이러한 인간이 내면 속에 생의 종교적 인식을 회복할 가능성을 감추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달리 말하면, 비종교적 인간은 '의식된 종교 체험', 즉 '종교를 이해하고 그것을 받아들일 능력'을 상실했지만, 그의 가장 깊은 존재 밑바닥에는 아직도 그 기억을 보존하고 있다.

저자 소개

『성(聖)과 속(俗)』은 세계 안에 있는 두 가지 존재 양식이다. 또한 인간이 역사의 흐름 가운데서 형성해 온 두 가지 생존 양식이다. 종교학자 『미르치아 엘리아데(Mircea Eliade : 1907~1986)』의 『성과 속(Das Heilige und das Profane)』은 성과 속이라는 개념으로 종교의 새로운 지평을 연 고전으로 손꼽힌다.

엘리아데는 1907년 루마니아의 수도 부쿠레슈티에서 태어났다. 부쿠레슈티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고 대학 시절에 만난 다스굽타 교수에게 산스크리트를 배우며 인도의 사상과 상상력에 매료됐다. 인도에 유학하여 1936년에 『요가 : 인도 신비주의의 기원』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후 연금술과 우파니샤드, 불교를 통한 상징 해석에 몰두했으며, 1949년에는 자신의 종교 연구를 집대성한 『종교 형태론』을 펴냈다.

1956년 미국으로 건너가 시카고 대학에 재직하면서 『이니시에이션의 의례와 상징』, 『탄생과 재생의 신비』등을 저술했다. 1982년에 『종교 관념의 역사』2권을 출간하고 그 보완 작업을 하던 중 1986년에 사망했다. 그는 신화, 상징, 의례 등을 연구함으로써 역사, 문화의 차이를 초월한 인류의 공통적 정신세계를 탐구했다.

엘리아데의 『성과 속』은 모두 4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장은 거룩한 공간의 세계의 성화, 제2장은 거룩한 시간과 신화, 제3장은 자연의 거룩함과 우주적 종교, 제4장은 인간의 실존과 성화된 삶 등이 그것이다.

생각해 볼 문제

1. 앞의 글을 토대로 종교적 인간과 비종교적 인간이 갖고 있는 공간과 시간과 자연의 의미를 각각 정리해 보자.
2. 엘리아데는 세계 안에 존재하는 양식을 성과 속으로 나누고, 또 그 범주를 토대로 인간을 종교적 인간과 비종교적 인간으로 나누었다. 이러한 분류가 현실적인 세계에 부합하는 분류인지 생각해 보자.
3. 엘리아데는 '현대의 비종교인들이 실존적 위기시에 나타나는 무의식을 바탕으로 종교적 인식을 회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견해가 오늘날 과학 문명의 부작용으로 나타나는 환경 문제, 인간 소외 문제 등에 시사하는 의미를 생각해 보자.

 

 

[자료출처-대성학원]

출처 : 대학입시수능정보(재수,점수공개)
글쓴이 : 교육길라잡이 원글보기
메모 :

미르치아 엘리아데의 『성과 속』

『성과 속』의 핵심 내용

『성과 속』은 이 세계에서 성이 드러나는 여러 양태와 종교적 세계에 살고 있는 인간의 상황을 서술함으로써 우리를 종교학의 심오한 문으로 안내한다. 엘리아데는 이 세계가 태초부터 성스러운 것이라는 입장에서 논의를 출발한다. 다음은 이 책의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1. 성현의 개념과 종교적 인간

인간이 성스러움을 경험하는 것은 그 성스러움이 속된 것과는 전혀 다른 어떤 것으로서 스스로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종교의 역사는 가장 원시적인 것에서부터 고도로 발달한 것에 이르기까지 많은 성현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서 성현이란 어떤 성스러운 것이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성스러움이 드러남으로써 사물은 어떤 전혀 다른 것으로 변하지만 그 후에도 그 사물의 물질적 속성은 변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성스러운 돌도 여전히 한 개의 돌이다. 즉, 겉으로 볼 때는 그 돌을 다른 일반적인 돌과 구별할 수는 없다. 그러나 돌이 성스러운 것으로서 제시되는 사람들에게는 눈앞의 돌이 초자연적인 실재로 변한다. 다시 말하면 종교적 경험을 가진 인간에게는 모든 자연이 신성성으로 제시된다. 그 때 우주는 전체가 성현이 된다.

고대 사회의 인간은 성스러운 것 가운데에, 혹은 성화(聖火)된 사물에 아주 가까이 접근해 살려고 노력했다. 왜냐 하면 원시인 및 모든 전근대적인 인간에게 성스러운 것은 힘이며 궁극적으로는 무엇보다도 실재 그 자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성스러운 것은 존재로 가득 차 있다. 성스러운 힘은 실재와 동시에 영원성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종교적 인간은 존재하고자 하는 갈망, 실재에 참여하고자 하는 갈망, 힘으로 충만하고자 하는 갈망을 갖고 있다.

2. 인간에게 실재하는 공간의 의미

종교적 인간에게는 공간이 동일하지 않다. 종교적 인간은 성스러운 공간과 그 밖의 다른 공간, 그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넓은 공간 사이의 대립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비종교적 인간에게 공간은 동일하다. 성스러운 공간은 인간에게 세계를 발견하게 하고, 진정한 의미에서 삶을 획득하게 한다. 이에 반해 속된 경험의 공간에는 단지 흩어진 우주의 단편들만이 있을 뿐이다.

성스러운 공간의 체험은 '세계의 창건'을 가능케 했다. 성스러운 것이 출현하는 공간에서, 실재가 그 모습을 나타내고 세계가 출현한다. 성스러운 것의 출현은 지상과 천상 사이를 교류하게 하고, 하나의 존재 양식에서 다른 존재 양식으로의 이행을 가능하게 한다. 속된 공간에 이 같은 단절이 생김으로써 하나의 중심이 창조되고, 그것을 통하여 초세계적인 것과 교섭하고 그에 따라 세계를 창건한다. 공간의 성현 혹은 공간의 정화는 우주 창조에 대응한다.

모든 세계는 신들의 작품이다. 종교적 인간은 성스러운 세계 안에서만 살 수 있다. 왜냐 하면 이러한 세계 속에서만 진정으로 실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종교적인 욕구는 억제할 수 없는 존재론적인 갈망을 표현하고 있다. 종교적 인간은 존재를 갈망한다.

이 존재론적인 갈망은 여러 가지 형태로 드러난다. 종교적 인간은 실제의 핵심, 세계의 중심에 자리 잡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즉, 신들과 가장 가까운 곳에 머물고자 노력한다. 세계의 중심이라는 상징은 국가, 도시, 사원, 궁전뿐만 아니라 수렵민의 천막, 유목민의 유르트, 정착 농경민의 집과 같은 보잘것 없는 인간 주거의 형성 원리가 된다.
그러나 어떤 공간에 거주하는 것은 우주 창조의 반복과 같다. 그러므로 종교적 인간이 공간 안에 자리 잡는 것은 사실상 종교적 결단이 된다. 그는 자기가 거주하기로 선택한 세계를 창조할 책임을 떠맡으면서 혼돈을 우주화할뿐만 아니라 그의 작은 우주를 신들의 세계처럼 만듦으로서 성화한다. 종교적 인간은 '신의 세계'에 깊은 향수를 느끼고 후세의 사원이나 성전이 그러한 것과 같이 신들의 집과 유사한 집을 동경한다.

3. 인간에게 실제하는 시간의 의미

종교적 인간에게는 공간과 마찬가지로 시간 역시 동일하거나 연속적이지 않다. 한편에는 성스러운 시간, 축제의 시간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속된 시간, 즉 일상적인 시간이 지속된다. 이 두 종류의 시간 사이에는 물론 단절이 있다. 하지만 종교적 인간은 의례(儀禮)를 통해 일상적 시간에서 성스러운 시간으로 이행한다.

이 두 종류의 시간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성스러운 시간은 원초적인 신화적 시간을 나타낸다. 종교적으로 축제에 참여하는 것은 일상적인 시간에서 탈출하여 신화적인 시간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스러운 시간은 무한히 회복될 수 있고 반복 가능하다. 그러므로 종교적 인간은 두 종류의 시간 속에 살고 있다.

이에 반해 비종교적 인간도 역시 시간의 비연속성과 이질성을 체험한다. 그에게도 노동하는 단조로운 시간이 있는 한편, 오락과 위안의 시간, 즉 '축제의 시간'이 있다. 좋아하는 음악을 들을 때, 사랑에 빠져 있을 때, 애인을 기다릴 때나 혹은 만날 때, 그는 일하거나 피곤에 지쳐 있을 때 체험하는 것과는 다른 시간을 체험한다.

그러나 종교적 인간과 비교하면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종교적 인간은 '성스러운 시간'을 체험한다. 그 시간은 신들에 의해 성화되고 축제에 의해 재현된 원초적인 시간이다. 이 전례의 시간은 비종교적인 인간으로서는 도달하기 어렵다. 비종교적인 인간에게 시간은 단절도 신비도 아니다. 그에게 시간은 그 자신의 삶과 연결되어 있고, 따라서 처음과 끝이 있다.

4. 인간에게 실재하는 자연의 의미

이처럼 시간과 공간을 다르게 체험하는 종교적 인간에게는 자연도 결코 단순한 '자연'이 아니다. 그것은 항상 종교적 의미로 충만해 있다. 왜냐하면 우주는 신의 창조물이고 세계는 신들의 손으로 완성된 것이어서 성스러움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종교적 인간에게 세계는 성스러운 것으로 드러난다. 무엇보다도 세계는 실존하고, 실제로 거기에 있다. 세계는 카오스가 아니라 코스모스다. 따라서 세계는 신들의 작품인 피조물로 자신을 드러낸다. 하늘은 직접적으로 '자연스럽게' 무한한 거리, 신의 초월성을 계시한다. 대지도 우주적인 어머니이자 양육자로서 자신을 나타낸다.

따라서 종교적 인간에게 초자연적인 것은 자연적인 것과 밀접하게 연결 되어 있다. 자연은 항상 그것을 초월하는 무엇인가를 표현하고 있다. 성스러운 돌이 존경받는 이유는 그것이 신성하기 때문이지, 돌 그 자체 때문이 아니다. 돌의 진정한 본질을 계시하는 것은 돌의 존재 양식 안에 나타난 신성성이다.

종교적 인간은 열려진 우주 가운데 살며, 그 자신도 세계를 향해 열려 있다. 이것은 그가 신들과 교류하고 있다는 것, 세계의 신성성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인간은 신들과 교류가 가능한 중심에 거주하기를 갈망한다. 그의 거주지는 소우주이며, 그의 신체도 역시 소우주이다.

'신체ㅡ집ㅡ우주'의 동일시는 매우 일찍부터 나타났다. 인도의 종교 사상은 이런 '집ㅡ우주ㅡ신체'라는 상징을 풍부하게 사용하고 있다. 등뼈는 우주의 기둥, 호흡은 바람이나 배꼽, 심장은 세계의 중심과 동일시된다. 말하자면 인간은 그에게 미리부터 운명 지워진 상황 속에 의식적으로 순응함으로써 스스로를 우주화 한다.

5. 현대의 비종교적 인간

이에 비해 현대의 비종교적인 인간에게 우주는 불투명하고 둔하고 말 못하는 존재가 되었다. 우주는 어떤 메시지도 전해 주지 않으며, 어떤 암호도 갖고 있지 않다. 자연의 신성함이라는 의식은 오늘날 유럽의 경우 주로 농경민들 사이에 남아 있다. 왜냐 하면 그들 사이에는 아직도 우주적 제의로 체득한 그리스도교가 있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서 산업 사회의 그리스도교는 중세 시대까지 지녔던 우주적 가치를 오래 전에 상실해 버렸다. 그들의 종교 체험은 더 이상 우주를 향해 열려 있지 않다. 결국 그것은 전적으로 개인적 체험이 되어 버렸다. 즉, 구원은 인간과 그의 신에 대한 문제가 되었다. 기껏해야 인간은 신에게 뿐만 아니라 역사에 대해서도 책임을 느끼고 있음을 인정할 뿐이다. 그러나 이 같은 '인간ㅡ신ㅡ역사'의 관계 속에는 우주가 끼어들 자리가 없다.

그러나 '종교가 없는' 세속적인 인간도 여전히 종교적 인간의 후예이며, 그는 자신의 역사를 지워 버릴 수는 없다. 그는 존재의 깊은 곳, '무의식'이라 불리는 영역을 간직하고 있다. 이 무의식의 내용과 구조는 시노하의 이미지와 유사하다.

무의식의 내용과 구조는 특히 위기의 상황이 낳은 결과이다. 이 때문에 무의식은 종교적인 분위기를 갖게 된다. 왜냐 하면 모든 실존적 위기는 세계의 실재성과 세계 내에서의 인간을 다시 한 번 문제 삼기 때문이다. 이는 곧 실존적 위기가 결국 '종교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관점에서 보면, 비종교적이라고 주장하는 근대인들에게 종교와 신화는 그들 무의식의 어둠 속에 '은폐되어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것은 또한 이러한 인간이 내면 속에 생의 종교적 인식을 회복할 가능성을 감추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달리 말하면, 비종교적 인간은 '의식된 종교 체험', 즉 '종교를 이해하고 그것을 받아들일 능력'을 상실했지만, 그의 가장 깊은 존재 밑바닥에는 아직도 그 기억을 보존하고 있다.

저자 소개

『성(聖)과 속(俗)』은 세계 안에 있는 두 가지 존재 양식이다. 또한 인간이 역사의 흐름 가운데서 형성해 온 두 가지 생존 양식이다. 종교학자 『미르치아 엘리아데(Mircea Eliade : 1907~1986)』의 『성과 속(Das Heilige und das Profane)』은 성과 속이라는 개념으로 종교의 새로운 지평을 연 고전으로 손꼽힌다.

엘리아데는 1907년 루마니아의 수도 부쿠레슈티에서 태어났다. 부쿠레슈티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고 대학 시절에 만난 다스굽타 교수에게 산스크리트를 배우며 인도의 사상과 상상력에 매료됐다. 인도에 유학하여 1936년에 『요가 : 인도 신비주의의 기원』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후 연금술과 우파니샤드, 불교를 통한 상징 해석에 몰두했으며, 1949년에는 자신의 종교 연구를 집대성한 『종교 형태론』을 펴냈다.

1956년 미국으로 건너가 시카고 대학에 재직하면서 『이니시에이션의 의례와 상징』, 『탄생과 재생의 신비』등을 저술했다. 1982년에 『종교 관념의 역사』2권을 출간하고 그 보완 작업을 하던 중 1986년에 사망했다. 그는 신화, 상징, 의례 등을 연구함으로써 역사, 문화의 차이를 초월한 인류의 공통적 정신세계를 탐구했다.

엘리아데의 『성과 속』은 모두 4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장은 거룩한 공간의 세계의 성화, 제2장은 거룩한 시간과 신화, 제3장은 자연의 거룩함과 우주적 종교, 제4장은 인간의 실존과 성화된 삶 등이 그것이다.

생각해 볼 문제

1. 앞의 글을 토대로 종교적 인간과 비종교적 인간이 갖고 있는 공간과 시간과 자연의 의미를 각각 정리해 보자.
2. 엘리아데는 세계 안에 존재하는 양식을 성과 속으로 나누고, 또 그 범주를 토대로 인간을 종교적 인간과 비종교적 인간으로 나누었다. 이러한 분류가 현실적인 세계에 부합하는 분류인지 생각해 보자.
3. 엘리아데는 '현대의 비종교인들이 실존적 위기시에 나타나는 무의식을 바탕으로 종교적 인식을 회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견해가 오늘날 과학 문명의 부작용으로 나타나는 환경 문제, 인간 소외 문제 등에 시사하는 의미를 생각해 보자.

 

 

[자료출처-대성학원]

출처 : 대학입시수능정보(재수,점수공개)
글쓴이 : 교육길라잡이 원글보기
메모 :

존 롤스의 『정의론』

『정의론』의 핵심 내용


여기에 케이크 하나가 있다. 다섯 사람이 공평하게 나누어 먹으려고 한다. 어떤 방법으로 케이크를 나누는 것이 가장 좋은가? 우리는 이 문제를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거나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대충 생각할 때 가장 좋은 방법은, 어떤 한 사람으로 하여금 케이크를 다섯 조각으로 나누게 한 다음, 다른 사람들이 케이크 한 조각씩을 갖고 마지막 남은 케이크 한 조각을, 케이크를 자른 사람이 갖게 하는 것이다.

다른 네 사람이 더 큰 케이크 조각을 가지려고 싸울지도 모른다. 그것이 걱정된다면 네 사람이 가위바위보를 하여 이긴 사람부터 케이크 조각을 골라 가지게 하면 될 것이다. 케이크를 나누어 먹을 때 이런 방법을 사용하면 그 누가 불평을 하겠는가? 아무도 불평하지 않는 이유는 그 절차와 방법이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만약 사회정의(社會正義)의 문제를 이와 같은 절차와 방법을 이용하여 풀어 간다면 모든 사람이 공감할 만한 해결책이 나오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가지고 사회 정의의 문제에 대해 일정한 모형을 제시한 사람이 바로 20세기 최대의 윤리학자 존 롤스(John Rawls)이고 그의 정의에 관한 이론이 가장 잘 드러나 있는 저서가 바로 『정의론』이다.

정의(正義)에 대한 정의(定議)는 상당히 많다. 어떤 사람은 자기 마음대로 일을 해서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받는 것을 정의(正義)라고 주장하고, 어떤 사람은 사회의 구성원 모두가 똑같은 몫을 받는 것을 정의(正義)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우리는 전자의 경우처럼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는 측을 ‘자유주의’라고 말하고, 후자의 경우처럼 똑같은 분배를 강요하는 측을 ‘평등주의’라고 말한다. 그래서 일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런 대가도 받을 수 없고, 열심히 일한 사람은 그만큼 많은 대가를 받는 사회를 자유주의 사회,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 사회’를 평등주의 사회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유주의와 평등주의를 적절하게 조화시킬 수는 없는가? 더 나아가 자유주의 안에 평등주의의 좋은 점을 도입할 수는 없는가? 이 문제를 구체적으로 다룬 철학자가 존 롤스이다. 그는 『정의론』에서 사회 구성원 개개인의 자유를 인정하면서도 사회의 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정의론을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롤스는 『정의론』의 요지를 다음과 같이 축약하여 설명하고 있다.

모든 사람은 사회 전체의 복지라는 명목으로도 유린될 수 없는 정의에 입각한 불가침성을 갖는다. 그러므로 정의는 타인들이 갖게 될 더 큰 선을 위하여 소수의 자유를 뺏는 것이 정당화됨을 거부한다. 즉, 다수가 누릴 더 큰 이득을 위해서 소수에게 희생을 가용해도 좋다는 것을 정의는 용납할 수 없다. 그러므로 정의로운 사회에서는 동등한 시민적 자유란 이미 보장된 것으로 간주되며, 따라서 정의에 의해 보장된 권리들은 어떠한 정치적 거래나 사회적 이득의 계산에도 좌우되지 않는 것이다. 최선의 이론이 없을 경우에는 결함 있는 이론이나마 따르게 되듯이, 부정의는 그보다 더 큰 부정의를 피하기 위해 필요한 경우에만 참을 수 있는 것이다. 인간 생활의 제 1덕목으로 진리와 정의는 지극히 준엄한 것이다.

롤스는 정의(正義)를 ‘정당화될 수 없는 불평등이 없는 상태’라고 규정한다. 그리하여 『정의론』의 중심 과제는 “어떤 차등이 도덕적으로 정당화 될 수 있는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즉 절차에 아무런 하자가 없다면 불평등이나 차등도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 여기서 우리는, 얼핏 들으면 모순되는 듯한 이러한 주장이 어떤 점에서 설득력을 가지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사람들은 다수의 커다란 이익을 위해서는 소수의 이익을 희생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자신이 소수가 될 때도 그런 일을 순순히 허용할 것인가? 다른 사람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이익을 기꺼이 희생시키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롤스는 타인들의 커다란 선을 위하여 소수의 자유를 뺏는 것을 정의라고 보지 않는다.

사람들이 사는 사회에는 능력이 탁월한 사람도 있고 남들보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도 있다. 만약 그 사람들의 자유로운 행위의 결과 때문에 결과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사회적 불평등을 야기 시킨다고 할 때 그들의 자유로운 행동을 금지시켜야 하는가? 어느 누구도 이러한 금지를 합리적이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자유를 직접 제한할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로도 손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롤스는 “부정의를 참을 수 있는 경우는 그보다 큰 부정의를 피할 수 있을 때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롤스가 소수의 이익을 보호하면서 동시에 사회 구성원들의 자유를 허용하는 사회 정의를 주장할 때 내세우는 정의는 ‘절차적 정의’이다. 가령 어떤 사람이 추첨에 의해 5억 원을 받게 됐다고 할 때, 공정한 절차만 지켰다면 어느 누구도 그 결과에 대해서 전혀 불평을 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는 다만 절차의 공정성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케이크를 나눌 때 케이크를 나눈 사람이 마지막에 자기 조각을 가져가는 것이나, 더욱 커다란 케이크를 갖기 위해 가위바위보를 하는 것도 이 속에 포함시킬 수 있다.

롤스는 절차의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계약(contract)이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이 점에서 롤스는 기본적으로 로크, 루소, 칸트의 전통 위에 서 있고 그들과 비슷한 계약론적 접근을 꾀한다고 말할 수 있다. 롤스는 순수한 절차적 정의의 원리를 수립하기 위해 계약 당사자들이 자신의 특수한 여건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는 원초적 입장(original position)이라는 가상적인 상황을 설정한다. 그렇지 않고 만약 자신의 특수한 여건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면 순수한 절차적 정의가 확보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어떤 사람이 법률을 만들 때 자신이 건설 회사 사장이라면 건물 주인보다는 건설 회사에 유리한 법률을 만들 것이고, 만약 법률을 만드는 주인이 변호사라면 의뢰인보다는 변호사에게 유리한 법률을 만들려고 할 것이다. 따라서 공정한 절차를 마련하려면 그런 특수한 여건을 배제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룰스는 계약 당사자들은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고 무슨 직업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전혀 모르게 만드는 무지의 베일(the vail of ignorance)'을 써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기가 갖게 될 케이크 조각이 어떤 것인지를 몰라야 케이크 자르는 사람이 케이크를 공정하게 자르지 않겠는가? 무지의 베일을 쓴 상태에 있는 사람은 원초적 입장에 서 있는 사람이다. 물론 이 말에는 계약 당사자들이, 상호 협동이 가능하고 합리적 선택을 할 수 있으며, 자신이 필요로 하는 권력이나 재화의 취득을 욕구한다는 사실 등을 전제하고 있다. 롤스의 기본적인 생각은 합리적인 사람들이, 원초적 입장에서 공정한 절차에 의해, 사회 제도나 규칙을 결정한다면 비록 그 결과가 부정의하더라도 우리는 그 결과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롤스는 자신이 주장하는 이와 같은 설명이 옳다면 합리적인 사람들은 다음의 두 가지 원칙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롤스의 정의의 두 원칙 중에 첫째 원칙은 자유 우선성의 원칙으로서, 모든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유사한 자유와 양립할 수 있는 가장 광범위한 기본적 자유에 대하여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는 것이다. 둘째 원칙은 차등의 원칙으로서,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은 다음 두 조건을 만족시키도록 조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불평등이 인정되려면 ⓐ최소 수혜자(the least advantaged)에게 이익을 보장하는 것이어야 하며 ⓑ모든 사람에게 직위와 직책이 개방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모든 사람에게는 똑같은 기회가 주어져 있고, 만약 불평등한 제도가 있다면 그 제도는 사회의 혜택을 못 받는 사람들에게도 이익이 되고 그 모든 절차가 공개되어 있을 때만 허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월수입이 천만 원인 공인 회계사 시험이 특정 사람들에게만 허용되어 있다면 어느 누가 그런 제도를 용납하겠는가? 또한 도시 계획이나 국가 기간 산업 건설에서 비록 그 결정내용이 타당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해 손해보는 사람들이 있다면 부정의한 결정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롤스가 말하는 절차적 정의에서는 정책과 제도의 투명성이 요구된다고 하겠다.

이런 원칙이 채택되면 좋은 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보다도, 자유주의의 기본 원칙을 고수하면서도 평등주의의 좋은 점을 도입할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만약 각 개인의 자유만을 인정한다면 소년 소녀 가장이나 불우한 처지에 놓인 노인, 그리고 장애인들에 대한 복지 문제를 소홀히 할 소지가 많다. 그러나 롤스의 정의론에 따르면 그들의 복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의 커다란 단점인 빈익빈 부익부 문제도 해소할 수 있다. 왜냐 하면 롤스의 정의론은 기본적으로 ‘최소 수혜자의 최대 행복’을 고려하는 이론이기 때문이다.

롤스의 정의론을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불평등을 인정하지 않는 국가는 사회주의 국가이고 개인의 능력만을 강조하는 국가는 자유주의 국가이지만, 둘 다 정의롭지 못한 국가이다. 정의로운 국가는 차등이나 불평등이 공정한 절차에 의해 정당화될 수 있는 국가를 뜻한다. 그러므로 창조적인 능력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도로 발휘할 수 있고, 가난한 사람이나 능력 없는 사람은 사회로부터 가장 많은 혜택을 받는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라 할 수 있다.

저자 소개

『존 롤스(John Rawls)』는 1921년 미국에서 태어나 코넬, MIT대학을 거쳐 현재 하버드 대학 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는 학계에서 주목을 받은 『공정으로서의 정의』, 『분배적 정의』 등 사회 정의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논문들을 근간으로 20여 년에 걸친 필생의 대작 『정의론(A Theory of Justice)』를 내놓았다. 이 책은 20세기 윤리학 저술 중 가장 유명한 고전이라고 할 수 있다.

생각해 볼 문제

1. 케이크 하나가 있다. 다섯 명이 공평하게 나누어 먹으려는데, 그 중 한 사람은 기아 상태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보다는 더 많이 먹어야 살 수 있는 특수한 상황에 놓여 있다. 롤스의 주장대로 ‘무지의 베일’을 사용하여 케이크를 다섯 명 에게 똑같은 크기로 분배하였다면 이것은 과연 정당한 일인지 친구들과 토론해 보자.
2. 존 롤스는 “부정의를 참을 수 있는 경우는 그보다 큰 부정의를 피할 수 있을 때이다.”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경우를 우리 일상생활에서 찾아보자.
3. 존 롤수는 정의를 크게 법적, 정치적 차원의 정의(자유주의적 관점)와 경제적 분배 차원에서의 정의(평등주의적 관점)로 나누어 살펴보고 있다. 그런데 이 둘이 상충될 경우, 어떤 것이 우선 할지 자신의 입장을 정리해 보자.

 

 

[자료출처-대성학원]

출처 : 대학입시수능정보(재수,점수공개)
글쓴이 : 교육길라잡이 원글보기
메모 :

슘페터의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1. 마르크스 학설 비판


이러한 맥락에서 슘페터는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의 내용을 구성한다. 슘페터는 먼저 기존 이론을 비판하고 자신의 이론을 제시한다. 그는 ‘제1부 마르크스 학설’에서 마르크스 이론을 비판한다.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붕괴 이론은 노동 가치설에서 시작되어 잉여 가치론, 축적 이론, 자본 집중론, 대중 궁핍화론, 산업 예비군 이론, 공황 이론. 그리고 제국주의론에 이르는 이론 구조를 가지고 있다. 슘페터는 이러한 마르크스 이론이 자본주의의 붕괴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널리 알려진 대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붕괴될 수 밖에 없는 내적 모순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내적 모순이 낳은 경제적 실패, 즉 공항에 의해 붕괴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슘페터는 이에 대해 반론을 펼친다. 슘페터는 자본주의 붕괴의 원인을 경제적 실패에서 찾지 않는다. 자본주의는 순경제적으로는 붕괴될 내적 원인을 가지고 있지 않다. 도리어 자본주의 경제의 그 훌륭한 성공이야말로 자본주의 붕괴의 여러 가지 조건을 형성하고 있다. 그러므로 슘페터는 경제적 실패라는 원인을 제시한 마르크스 이론으로는 자본주의의 붕괴를 설명할 수없다고 단정한다. 바로 이 점이 슘페터 스스로가 자신을 비마르크스주의자라고 부른 이유이다.

2. 자본주의는 잔존할 수 있는가?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붕괴 이론에 만족하지 않은 슘페터는 ‘제2부 자본주의는 잔존할 수 있는가?’에서 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본성을 설명한다. 그는 먼저 자본주의 문명의 눈부신 업적을 예찬하고 자신의 자본주의 붕괴 이론을 전개한다. 자본주의가 붕괴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자본주의의 눈부신 발전은 곧 경제 발전 자체를 기계화하고 발전의 추진력인 기업자의 기능을 무용화한다. 이는 기업자, 즉 부르주와의 경제적 기반을 무너뜨린다. 둘째, 자본주의의 발전은 중소 기업의 파산과 거대 기업의 발전 과정인데, 그 과정에서 자본주의를 옹호했던 계급(중소 기업 출신의 사람들과 그의 가족들)이 자본주의에 대해 적대적인 분위기를 갖게 된다. 이러한 상황은 자본주의의 정치 세력을 약화시키고 반대파의 정치 세력은 강화시킨다. 셋째, 거대 기업은 한 개인이나 한 집안에 의해 운영되지 않고 주식을 가진 여러 사람들에 의해 공동으로 운영되고, 주식이 여러 사람에게 분산됨에 따라 기업자 자체가 기업에 대한 열정과 자본주의 체제를 사수하려는 정열을 잃어버린다. 그렇게 되면 사물도 정신도 모두 점차 사회화되어 오늘날 안팎으로 지지자를 잃은 자본주의 체제는 머지않아 다른 체제에 자리를 야보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슘페터는 마르크스와는 달리 자본주의의 발전으로 인해 생기는 여러 현상들을 자본주의이 붕괴 원인으로 보았던 것이다.

3. 사회주의는 작동할 수 있는가?

자본주의의 붕괴 원인을 논의한 후, 슘페터는 ‘제3부, 사회주의는 작동 할 수 있는가?’에서 가능한 하나의 사회주의를 규정하고 이를 검토한다. 슘페터는 우선 제3부 첫머리에서 상업 사회 및 그 특수 형태로서의 자본주의 사회와 사회주의 사회의 개념을 규정한다. 상업 사회는 생산 수단의 사적 소유와 생산 과정의 사적 관리에 의한 규제라고 하는 두 가지 요소를 내포하는 제도적 유형을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 상업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와 동일하지는 않다. 자본주의 사회는 상업 사회가 내포하는 두 가지 요소, 즉 생산 수단의 사유와 생산 과정의 사적 규제 이외의 신용 창조라는 요소가 추가됨으로써 규정된다. 이에 비해 사회주의 사회는 생산 수단에 대한 지배권과 생산 과정에 대한 지배권이 중앙 당국에 귀속되어 있는 제도적 유형을 말한다. 여기서 중앙 집권적 사회주의란 용어는 중앙 당국이 반드시 절대적인 권력을 장악한다든가. 혹은 집행에 관한 일체의 일들이 오직 중앙 당국에만 귀속되어 있다는 의미의 주앙 집권주의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개념 규정 후에 슘페터는 몇 가지 질문을 던진다. 첫째 질문은 이와 같이 규정된 사회주의 체제가 경제적 측면에서 논리적으로 모순 없이 기능할 수 있는가의 문제인데, 슘페터는 이에 대해서 긍정적이다. 둘째 질문은 자본주의의 경제와 사회주의의 경제 중 무엇이 더 능률적인가의 문제이다. 우선 슘페터는 자본주의에서 완전 경쟁이 상실되고 그에 따라 자원 최적 재분배의 합리성도 상실되지만, 사회주의에서는 이것이 해결된다는 견해를 부정한다. 완전 경쟁 경제보다 독점 자본주의 경제가 오히려 더 능률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주의 체제가 가지고 있는 유리한 점으로 다섯 가지 요인을 든다. 이 다섯 가지는 ① 불확실성이 배제됨으로써 비용, 낭비의 절감, ② 과잉 생산력을 경제 후생성으로 이용할 수 있는 가능성, ③ 실업 배제의 가능성, ④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의 충돌이 해소됨으로써 이룰 수 있는 경제 능률의 향상, ⑤ 수입 원천의 국가 관리에 의한 조세의 폐지 등이다.

마지막으로 셋째 문제는 과도기의 문제이다. 즉,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회주의 사회로 넘어가는 시기의 문제를 말한다. 슘페터는 사회주의 사회가 성립되는 과정을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했다. 이 두 가지 경우가 성숙 상태에서의 사회주의화와 미성숙 상태에서의 사회주의화이다. 성숙 상태에서의 사회주의화는 자본주의 발전의 결과로서, 사회주의화를 이루기에 적합한 경제적 조건 및 심적 태도가 조성되고, 그에 따라 각종 계급에 속하는 모든 사람들의 노력에 의하여 헌법 개정이란 평화적 방법으로 채택되는 사회주의화를 말한다. 반면 미성숙 상태에서의 사회주의화는 일반적으로 중소 기업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매우 크고, 부르주아적 질서에 따라 사물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고, 사회주의에 대한 혐오감이 상당히 뿌리 깊게 깔려 있기 때문에 의회를 통한 헌법 개정이 불가능하고 단지 혁명에 의해 이룩되는 사회주의화를 말한다.

4. 자본주의와 민족주의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족주의』의 제 4부 ‘자본주의와 민족주의’에서 슘페터는 민족주의 이론을 전개한다. 슘페터는 우선 역사적 고찰을 통해서 비민주적인 사회주의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사회주의자들이 자기의 사상이나 이익에 도움이 되는 경우에만 민주주의의 이름을 빌리는 사례가 비일비재함을 지적한다. 그러나 동시에 슘페터는 민주주의적 사회주의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또한 슘페터는 민주주의란 목적이 아니라 하나의 정치 방식일 뿐이라고 강조한다. 그러므로 민주주의가 어느 사회에서나 반드시 최상의 정치 방식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민주주의적 방식이 효과적으로 작용하기 위해서는 여러 조건들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즉, 민주주의가 갖추어야 할 조건들을 무시한 채, 민주주의 그 자체를 최상의 가치로 이상화하면 안 된다는 주장이다.

5. 요약

이렇듯 슘페터는 그의 저서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에서 자본주의 사회는 붕괴하고 사회주의 사회가 출현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슘페터는 마르크스의 이론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자신만의 이론으로 자본주의 사회의 붕괴와 사회주의 사회의 출현을 설명한다. 즉, 자본주의 사회는 공황이라는 경제적 위기 상황에 의해서가 아니라 경제적 성공에 의해 붕괴될 것이며, 만약 자본주의 붕괴의 상황이 성숙된 상황이라면 민주주의적 사회주의로서의 평화적 이행이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이 슘페터 학설의 가장 핵심을 이루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슘페터는 저서의 마지막 부분인 ‘제5부 사회주의 정당의 역사적 개관’에서 점차적인 사회주의화의 길은 전 세계적인 경향이며 미국도 그 예외는 아니라고 결론을 짓는다. 슘페터가 보기에 자본주의의 발전으로 인한 점차적인 사회주의화는 역사적 대세였던 것이다.

저자 소개

『알로이스 슘페터(Joseph Alois Schumpeter : 1883~1950)』는 1883년 2월 3일, 체코슬로바키아령 모라비아의 트리시(Trisch)에서 태어났다. 네 살 때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의 총애를 한 몸에 받으면서 자란 그는 아름다운 고대 도시 빈의 귀족적인 분위기 속에서 성장해 갔다. 그는 중간 계급 출신이었지만, 빈이나 영국 상류 사회의 우아하고 자유스러운 환경은 그의 사상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슘페터는 1893년부터 1901년까지 귀족 자제를 위한 학교인 테레지아눔에서, 이 학교의 특징인 고전 중심의 교육을 받고 1901년 졸업과 동시에 빈 대학 법학부에 입학, 1906년 법학학사의 학위를 받았다. 1906년에서 1907년에 걸친 영국 상류 사회에서의 사교나 일류 경제학자와의 친교는 그의 교양과 학식을 높이는데 도움이 되었다. 슘페터는 그의 나이 25세에 ‘이론 경제학의 본질과 주요 내용’(1908년)으로 학계에 데뷔했다. 이 저서는 순수 경제학의 방법론적, 내용을 출발점을 확립시키려는 야심작이였으며, 이로 인해 그는 소장 경제학자로서의 확고한 지위를 보장받게 되었다. 그 후 슘페터는 대학에서 경제학을 강의했고 제 1차 세계 대전 기간에는 오스트리아의 단독 평화회의에 참석하는 등 정치에 관여하기도 했다.

1933년부터는 미국에서 활동하면서 대표적인 저작들을 집필했다. 그 시기의 대표적인 저작으로는 『경기 순환론』 2권, 『경제학사』, 『경제 분석의 역사』 등이 있으며 1942년에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Capitalism, Socialism and Democracy)』가 출판되었다. 이 저서는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으며 슘페터의 위치를 더욱 확고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학문적 업적을 쌓았던 슘페터는 1950년 1월에 그의 생을 마감했다.

생각해 볼 문제

1. 슘페터의 '자본주의 붕괴 과정'은 마르크스의 그것과는 다르다. 어떻게 다른지 앞의 글을 참조로 정리해 보자
2. 슘페터는 비록 자본주의 몰락 원인에 대해서는 마르크스와 견해를 달리하긴 했지만, 그 역시 자본주의의 몰락을 예견했다. 그러나 현대 사회의 자본주의는 더욱더 번성하고 있으며, 오히려 사회주의 국가들이 몰락하는 현실을 낳았다. 이러한 현대 자본주의 관점에서 슘페터가 제시한 자본주의 몰락의 과정이 타당한 것인지, 아니면 타당하지 않은 것인지 친구들과 토론해 보자.

 

 

[자료출처-대성학원]

출처 : 대학입시수능정보(재수,점수공개)
글쓴이 : 교육길라잡이 원글보기
메모 :

J.S. 밀의 『자유론』

1. 밀의 공리주의의 사상적 근간 - 자유


우리는 밀의 공리주의를, 벤담의 ‘양적 공리주의’와 구별하여 ‘질적 공리주의’라고 부른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것을 잘 드러내 주는 말이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라는 밀의 유명한 말이다. 그러나 공리주의에 대한 밀의 입장보다 더욱 중요한 문제는 그의 ‘공리주의’의 사상적 근간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이다. 공리주의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개개인의 자유가 전제되어야 한다. 자유가 전제되지 않는다면 합리적인 결과 예측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밀의 생각은 자유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형성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런 점에서도 우리는 밀이 말하는 ‘자유’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

『자유론(On Liberty)』에서 밀이 주장하는 기본적인 자유는 양심의 자유 즉 사상과 감정의 자유, 취미와 직업의 자유, 단결의 자유이다. 주지하다시피 이러한 자유를 존중하지 않는 사회는 그 사회가 어떤 종류의 사회이건 자유로운 사회가 아니다. 밀은 이와 같은 자유들이 ‘행복 추구의 자유’로 귀결된다고 보고, 자유라는 이름에 걸맞는 유일한 자유를 ‘우리들 자신의 방법으로 우리들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자유’ 라고 주장한다.

2. 사상과 토론의 자유

밀은 자유를 이와 같이 규정한 후에 『자유론』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사상과 토론의 자유’에 대해 제 2장에서 집중적으로 논의하고 있다.

만일 한 사람을 제외한 모든 인류가 같은 의견인데 단 한 사람이 그것에 반대하는 의견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인류가 한 사람을 침묵케 하는 것이 부당한 일임은, 그 한사람이 힘을 가지고 있어서 인류를 침묵케 하는 것이 부당한 것과 완전히 같은 것이다.

이 말 속에는 다수결의 원칙이 항상 좋은 것이 아니라는 뜻도 담겨 있다. 아니, 더욱 정확히 말하면 밀은 절대자에 의한 언론 통제보다 모든 일을 다수결의 원칙으로 해결하려는 다수파의 언론 탄압이 더욱 나쁘다고 보고 있다. 왜냐 하면 그와 같은 행위는 창조적인 소수의 의견을 말살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상과 토론의 자유가 세론(世論)과 무관하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밀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사상과 언론의 자유를 억압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만일 다른 사람의 의견이 바른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억압한다면 우리는 진리를 알 수 있는 기회를 잃게 된다. 그리고 그 의견이 틀린 것이라 하여 그것을 억압한다면 우리는 그 논쟁 속에서 얻을 수 있는 한층 더 명확한 진리를 알 수 없게 된다.

결국 의견 발표를 억압한다는 것은 전 인류에게서 행복을 빼앗는다는 말과 다를 바가 없다. 따라서 누구의 의견이 옳던 그르건 토론을 통해 그 진리성을 검토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 밀의 기본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3. 행복의 하나의 요소로서의 개성

『자유론』제 3장 ‘행복의 하나의 요소로서의 개성’ 에서 밀은 “독창성이 인간 사회에서 하나의 귀중한 요소임”을 지적하고 있다. 천재는 자유라는 분위기 속에서만 자유로이 호흡할 수 있기 때문에 밀은 독창성을 지닌 천재들을 확보하기 위한 토양 마련을 위해서라도 자유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천재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더 많은 개성을 지니고 있다. 자유가 없다면 천재는 개성을 발휘할 수가 없다. 천재가 사회에 기여하는 바를 생각한다면 사회 전체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자유는 절실히 필요한 것이다. 이 말에서도 우리는 자유가 행복을 위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식 할 수 있다.

사람에게는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본질적인 자유가 있다. 그러나 개인의 행복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의 행복을 위해 그러한 자유가 필요하다고 해도, 사회 구성원 개개인의 무조건적인 자유를 허용할 수는 없다. 아주 단순하게 생각하더라도,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는 자유는 엄청난 사회적 혼란을 야기하기 때문에 최소한의 제약이 필요하다. 사람들은 우선 서로의 이해를 침해하지 않아야 하며 다음으로 사람들은 사회와 사회 구성원들을 외부의 위험이나 간섭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자기 몫의 일을 해야 하며, 자기 몫만큼의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 따라서 사회는 이 두 조건을 이행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이행을 강제할 수 있다. 밀은 “사회가 할 수 있는 일은 이것뿐이다.”라고 말한다.

4. 개인에 대한 사회의 권위와 한계

『자유론』 제 4장 ‘개인에 대한 사회의 권위와 한계’에서 밀은 위와 같이 말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다음과 가은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어리석은 말이나 행동을 한다고 할 때,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우리는 그의 말과 행동을 막아야 하는가? 아니면 그대로 두어야 하는가?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말과 행동이 어리석은 말이나 행동이라고 해도, 심지어는 그 자신이 엄청난 손해를 보는 말과 행동이라고 해도,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만 않는다면’ 그것을 허용해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무엇이나 할 수 있는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억제든 억제는 그것이 억제라는 점에서 하나의 악이다.” 따라서 사회 역시 사회 구성원들이 서로의 이해를 침해하거나 사회의 존립을 해치는 행위가 아니라면 사회 구성원들을 억압하거나 탄압해서는 안 된다.

이런 생각을 밀고 나가면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정부의 역할이 적으면 적을수록 그 사회는 행복한 사회이다. 이와 같은 생각은 자유주의를 옹호하는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생각이다. “개인은 자연권적 권리로서의 자유 및 소유에 대한 권리를 가지며 어떤 사람이나 집단도 그에 대해서 함부로 행할 수 없는 것이 있다.”라는 ‘소유권적 정의’를 주장하는 노직(R. Nozick)과 같은 자유주의자도 마찬가지이다. 현대의 자유주의자들도 밀이 ‘자유론’에서 말하는 기본적인 이념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밀의 자유주의에 대한 옹호가 그의 ‘공리주의’로 이어질 수 밖에 없는 이유도 결국은 개인의 자유로운 결정을 그만큼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5. 자유론의 의지

밀의 『자유론』은 사회와 집단을 중시하는 사람들에게 개인의 가치, 더 나아가 개인이 향유해야 할 자유의 가치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역설적으로 보여 주었다는 데 그 의의가 있다. 이것은 밀이 개인보다 사회와 집단을 중시하는 사람들을 꾸짖는 듯한 경고의 말로 『자유론』을 마무리하고 있다는 데서도 알 수 있다. 그 말을 밀의 『자유론』을 소개하는 이 글에서도 결론 대신 사용해도 좋을 듯하다.

한 국가의 가치는 궁극적으로는 그 국가를 구성하고 있는 개인들의 가치이다. 개인들의 정신적 확충과 향상이라는 이익을 무시하고 세세한 사무를 처리하는 능력, 혹은 경험에서 얻게 되는 사이비 재능을 조금이라도 더 늘리기를 원하는 국가, 또는 국민을 위축시켜 국민을 자기 손으로 좌우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국민이 위축되어 있다면 어떠한 위대한 일도 성취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또한 국가가 모든 것을 희생시켜 이룩해 놓은 완전한 관료 기구도, 그 기구의 원활한 운행을 기하기 위해 배제해 버린 바로 그 활력의 결여 때문에 결국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저자 소개

존 스튜어트 밀(John Suart Mill)』은 1806년 런던에서 태어나 1873년 프랑스의 아비뇽에서 죽었다. 그의 아버지 제임스 밀은 공리주의(功利主義)를 창시한 벤담(Jeremy Bentham)의 제자였고, J.S. 밀은 아버지로부터 공리주의와 자유방임주의를 배웠다. 그는 다양한 저서를 남겼는데, 그 가운데 『논리학의 체계』, 『자유론』, 그리고 『공리주의』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고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나는 일을 마쳤다.”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생각해 볼 문제

1. 밀은 한 사람이라도 전체에 대한 반대 의견이 있다면 그의 의견을 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어리석은 말이나 행동을 한다고 할 때, 우리는 그를 막아야 하는지 아니면 그대로 두어야 하는지 친구들과 토론해 보자.
2. 정부의 역할이 적으면 적을수록 그 사회는 행복한 사회라고 자유주의자들은 말한다. 이러한 관점이 복지 국가를 지향하는 국가(예. 우리나라)에서는 어떤 문제점을 갖는지 우리 주변의 사례를 통해 생각해 보자.
3. ‘대한민국은 자유 민주주의 국가이다.’라고 할 때, 여기서의 ‘자유’의 한계를 밀의 관점에서 생각해보자.

 

 

[자료출처-대성학원]

출처 : 대학입시수능정보(재수,점수공개)
글쓴이 : 교육길라잡이 원글보기
메모 :

루소의 『사회 계약론』

1. 『사회 계약론』의 의의

루소는 사회의 온갖 부조리의 원인은 인간 본성이 악하기 때문이 아니라 사회 제도와 정치적 부조리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루소는 모든 사회 현상이 결국 정치에 따라 좌우된다고 생각했으므로, 정치 사상은 그의 사상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루소의 정치 사상을 집약해 놓은 것이 『사회 계약론』이다. 루소는 인간의 선한 본성과 자유를 토대로 국민들의 동의에 따라 국가가 형성된다고 보았다. 이러한 국가 권력의 근거는 국민들의 동의인 ‘사회 계약’에 의해서이다. 루소에 따르면 사회 계약의 구성적 실천 속에서 인간들은 이성과 도덕에 따르기로 약속하게 되는 것이다. 루소의 『사회 계약론』은 이상적인 사회 질서와 정부 수립을 논하면서 오늘날 민주주의가 지향해야 할 목표를 제시해 주고 있다.

2. 루소 정치 사상의 시대적 배경

루소가 살던 시대는 절대주의 말기였다. 봉건적 토지 소유와 신분적 지배를 기반으로 하고 있던 당시의 프랑스 절대 왕정은 겉으로는 험한 위세를 자랑했지만 안으로는 날이 갈수록 심한 사회적 갈등과 모순을 겪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루소는 모든 사회악(社會惡)의 근원이 ‘절대주의’라는 사회 제도에 있다고 생각했다. 소수의 특권자들을 위하여 선량한 절대 다수의 국민들을 고통 받게 하는 절대 왕정이야말로 모든 악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루소는 ‘인간의 자유를 보장하는 사회 제도는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3. 루소의 자유와 평등

인간의 자유를 보장하는 사회 제도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먼저, 루소가 생각하는 인간의 자유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루소는 인간의 자유를 두 가지로 나눈다. 그것은 자연적 자유와 사회적 자유이다. 자연적 자유란 개인의 힘 이외에는 어떤 것에 의해서도 제한될 수 없고, 얻고자 하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 무제한의 자유를 말한다. 이러한 고립된 동물로서의 자연적 자유는 사회 속에서 현실성이 없지만 실현되어야 할 자유의 원형으로 존재한다. 이에 반해 사회적 자유는 시민적 자유로 구체화되는데 자신이 만든 법률에 복종하면서 자기 자신이 주인이 되는 것이다. 사회적 자유는 ‘공동의 자유’라는 성격을 내포하므로 이러한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시민은 자신이 속한 사회가 정당한 법을 가졌을 때 자유롭게 된다.

이러한 루소의 인간 본성론에서 또 다른 한편으로 평등 개념이 도출된다. 인간은 홀로 존재하는 개체로서는 ‘참된 인간’이 될 수 없고 사회 속에서만 도덕적 존재가 될 수 있다. 도덕성에 의한 인간은 사회에서 자유로운 개인들의 논의를 가능하게 하고 이로부터 존재의 통일성을 부여받을 수 있다. 여기에서 사회 상태의 인간은 전제의 일부로 통합되는데 이것이 곧 참된 인간이다.

이처럼 루소에게 인간의 자유는 인간의 본성이고 자격이며 인간으로서의 가치이다. 그것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양도되거나 포기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결코 억압될 수 없는 존엄한 가치였다. 다라서 자유를 보장하는 문제는 루소에게 가장 근본적인 것이었다. 루소가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로 태어났다.’고 한 것은 그의 사상의 기본적인 전제가 된다.

4. 국가 권력의 근거는 무엇인가?

인간 본성으로서 정치적 자유가 겉으로 드러나게 되면 반드시 국가 권력의 권위와 충돌하게 되므로 자유는 곧 자유와 권력의 문제가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권력이 자유를 보장하게 되는가? 국가 권력의 근거가 무엇인가? 루소 사상의 기본적 출발점은 이처럼 권력의 정당성 문제로 집약된다.

국가 권력의 근거에 관하여 루소는 독특한 정치 이론을 제시하고 있다. ‘국가는 동의에 따라 성립된다.’ 즉 우리가 복종할 의무가 있는 정당한 국가 권력은 국민들의 자유로운 의지에 따른 약속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그에 다르면 인간 상호간에 자연적, 육체적 불평등이 있기는 하지만 인간은 본질적으로 평등하기 때문에 서로 평등한 조건 위에서 ‘공동의 힘으로 공동의 이익을 실현할 것’을 약속하게 되고 이 약속으로부터 개개의 인간들을 대신해 ‘정신적이고도 집합적인 하나의 단체’가 형성되는데, 이것이 곧 ‘국가’라는 것이다.

이처럼 국가 권력의 근거는 국가 구성원들의 자유로운 동의에 따른 사회 계약이다. 그런데 국가 권력이 이렇게 구성되고 행사될 때 개인의 자유와 이익을 올바로 보장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그는 사회 계약에 따라 성립된 국가 권력이 가장 상위에 위치한 ‘일반 의지의 지도’에 다를 때 비로소 개인의 자유와 이익을 보장하고 나아가 전체의 목적도 수행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5. 일반 의지란 무엇인가?

일반 의지는 루소의 독창적이고도 핵심적인 개념으로 국가 구성원의 동질성을 전제로 성립될 수 있다. 동질적인 사회 집단의 구성원들이 다 같이 바라는 공공의 복지와 의지가 곧 일반 의지이다. 일반 의지는 공동체 전체의 의지이므로 ‘언제나 공동의 이익만을 지향하고 항상 옳은 것’이며 그것은 개인의 사적이익에 반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시만 사회의 정당성은 오직 일반 의지의 차원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일반 의지는 구성원들의 입장에서 볼 때 항상 정장하고 항상 공공의 이익을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파괴되거나 분할할 수 없는 절대성을 갖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루소는 특수 의지의 단순한 양적인 합인 전체 의지를 일반 의지와 구분한다.

일반 의지가 공동체의 일반적 이익을 의미하는 것이고 항상 평등을 지향하는 데 반에 특수 의지는 개인의 사적 이익만을 추구하므로 본성상 사회의 정당한 기초가 될 수는 없다. 특수 의지가 공공 복지를 지향하는 일반 의지에 우선할 때 사회의 동질성은 무너지고 사회는 분열되어 국가의 안정성은 유지되기 어렵게 된다. 그러므로 시민으로서 가지는 의지와 개인으로서 가지는 의지가 다른 것이라면 공동체 내에서는 이들의 조화가 필요하다. 자유로운 인간들의 결합에 의해 형성된 일반 의지가 지배하는 사회는 인간 본성에 합당한 정당한 사회이기 때문이다.

일반 의지에 대한 복종은 타자와의 관련선상에서 자신의 이익을 결정하는 덕성의 표현이며 시민 사회가 가능하게 되는 도덕적 자유인 것이다. 루소에게 조국을 만드는 것은 영토나 국경, 법적 소속성이라는 형식적 속성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 실현을 위해 결합된 공동체와 그 구성원과의 관계라는 도덕적 측면이다. 그러므로 루소의 일반 의지가 구현되는 이상적인 정치 공동체의 구상은 개인의 자유와 완전한 사회 질서의 이상을 화해시키고자 하는 시도였다.

인민에 의해 형성된 일반 의지는 입법권으로 나타나고 그것의 실현은 집행권으로서 그 권리는 정부가 가진다. 일반 의지란 동질적인 사회에 토대를 둔 국가의 최고 이념이라고 할 수 있고 이러한 일반 의지를 행사하는 것이 주권이다. 다시 말해서 국가에서 일반 의지를 집행하는 최고 권력이 주권인 것이다. 그러므로 주권은 일반 의지의 주체인 모든 사회 구성원, 즉 인민의 주권이 되나. 주권이 군주에서 인민으로 옮겨간 것은 획기적인 의의를 가진다.

결국 루소의 일반 의지는 단순히 권력을 장악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서로 이해관계를 일치시킬 수 있을 만큼 평등하고 동질적인 사회 구성원들이 함께 지향하는 공동의 목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평등한 사회가 구현되지 않는 한 일반 의지는 나타나기 어렵고 일반 의지를 실행하지 않는 구각 권력은 정당한 권력이 될수 없다. 중요한 점은 권력 장악 그 자체가 아니라 권력이 일반 의지를 실행하고 있는지의 문제이다.

저자 소개

쟝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 ; 1712~1778)』는 1712년 6월 28일 즈네브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종교 전쟁 당시 프랑스에서 이주해 온 이래 거의 100년 이상을 즈네브에서 살았지만 경제적으로 그리 넉넉하지 못한 생활을 하였다. 루소는 태어난 지 불과 9일 만에 어머니를 여의고 형과 함께 숙모의 손에서 자라면서 내성적이고 수동적인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그 후 아버지가 즈네브를 떠나고 형마저 집을 나가, 가정을 잃어버린 루소는 모험과 방랑 생활을 시작한다. 비록 아무도 도와주는 이 없는 고아에 불과했지만 선량한 마음으로 일하고자 했던 그에게 사회의 부조리와 특권 계급의 온갖 만행은 인간 본성과 사회 제도에 대한 그의 사상적 기반을 형성하게 해 주었다.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그는 독학으로 철학과 문학뿐 아니라 음악과 자연 과학 및 신학에 대해서도 상당한 소양을 쌓았다. 그 후 가정 교사와 프랑스 대사의 비서일을 하면서 모든 사물은 결국 정치에 따라 좌우되고 국민은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정부의 성질에 따라 제한받는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그는 『학문과 예술론』 으로 디종의 아카데미 현상 모집에 합격하면서 파리의 관심을 받게 된다. 그 뒤 『인간 불평등 기원론』, 『정치 경제론』을 발표하면서, 그의 사상을 하나하나 정리해 갔다. 1758년 이후로 그는 저작에 전념하여 1761년 여름에는 『에밀』과 『사회 계약론(Du contratsocial)』을 완성하였다. 이 두 저작은 오늘날 무소를 불멸의 사상가로 만들어 주었지만 현실적으로는 그에게 심한 박해를 가져다 주었다. 현실의 개혁을 부르짖는 무소는 다시 방랑 생활을 하면서 1770년에 『고백록』을, 1776년에는 『대화ㅡ루소, 장 자크를 심판하다』를 완성하였으며 그 해 가을부터 『고독한 산보자의 꿈』을 쓰기 시작하였으나 1778년 7월 2일 글을 다 끝내지도 못한 채 생애를 마감하였다. 루소는 개인적으로 무질서하고 불안정한 방랑의 생활을 계속하였으나 자유와 인간애에 기초하여 끊임없이 절대주의의 부조리와 싸워 온 위대한 인물이다. 프랑스 혁명 이 후 구민 공회가 루소를 ‘위인의 전당’에 묻으면서 그의 위업이 후대에 높은 평가를 받게 되었다.

생각해 볼 문제

1. 루소는 일반 의지, 전체 의지, 특수 의지 등을 각기 구별하여 사용하고 있다. 각각의 의지들이 무엇을 뜻하는지 생각해 보고 그 예를 찾아보자.
2. 마르크스는 국가란 지배자와 피지배자 간의 갈등 속에서 생겨난 지배자의 억압, 착취 수단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을 루소의 사회 계약론의 관점에서 비판해 보자.

 

 

[자료출처-대성학원]

출처 : 대학입시수능정보(재수,점수공개)
글쓴이 : 교육길라잡이 원글보기
메모 :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

『유토피아』의 핵심 내용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발달하기 이전인 근대 이전의 시대에도 역시, 아무 데도 존재하지 않는 이상향을 그리는 갖가지 유토피아 사상이 있었는데,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가 그 대표적인 저술이다. 나아가 『유토피아』는 지금까지의 모든 유토피아 사상의 원천이 되고 있는 저서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 모어는 대양 한가운데의 외딴섬 『유토피아』를 찾아간 포르투칼인의 말을 받아 적는 식으로 이상향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모어가 『유토피아』를 집필했던 그 당시의 유럽은 어디나 할 것 없이 종교개혁에서 야기된 정치 문제로 시끄러운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각각의 종교적 파벌이 지닌 정치적 야심은 실제로 그 당시에 일어나고 있었던 근대 경제 체제, 즉 자본주의 체제가 낳고 있었던 중대한 경제 문제와 그 의미를 은폐시키고 있었다. 모어는 이 문제를 들고 나와 근대 경제 체제의 비인간적인 양상을 신랄하게 비판하고자 했다. 즉 이 책을 쓴 그의 의도는, 전쟁이 끊일 새 없이 계속되고, 양모 공업의 발달과 함께 빈부의 격차와 도시적 퇴폐가 확대대고 있던 당시 영국의 현실을 비판하는 데 있었다. 그런데 유토피아(utopia)란 단어는 그리스어의 우(u, 없다)와 토포스(topos, 장소)를 가지고 모어가 만들어 낸 것으로서 ‘아무 데도 없는 곳’이라는 뜻이다. 또한 이 책의 원제목은 『사회생활의 최선의 상태에 대한, 그리고 유토피아라고 불리는 새로운 섬에 대한 유익하고 즐거운 저서』인데 이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이 책에서 그리고 있는 유토피아는 비록 현실 속에는 ‘아무데도 없는 곳’이지만 인류가 반드시 도달해야 할 ‘이상향’임을 강력하게 암시하고 있다.

이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데 제 1부는 모어와 그를 방문한 라파엘이라는 학자와의 대화 형식으로 쓰여져 있다. 라파엘은 외국의 여러 문물을 많이 접하고 돌아온 인물로서, 대부분 그의 입을 통해 당시 영국 사회의 비참한 현실과 죄악이 낱낱이 폭로되고 있다. 그는 귀족들을 수벌처럼 남의 노동으로 하는 일 없이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로 평하며, 소작인을 쥐어 짜먹고 있다고 보았다. 또, 귀족이나 지주들이 양을 키우기 위해 경작지를 목장으로 만드는데 대해 신랄한 비판을 퍼붓기도 한다. 이는 바로 당시 영국에서 광범위하게 행해지고 있었던 '인클로저 운동[종획운동]'에 대한 비판이다. 당시 영국에서는 양모 공업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양의 방목지를 확보하기 위해 기존의공유지를 사유화하는 운동이 광범위하게 벌어졌고 그에 관한 법령도 제정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인클로저 운동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그 곳에 농사를 짓던 농민들이 쫓겨나 유랑생활이나 거지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책의 제 1부에서는 그와 같은 상황을 비판하면서 여러 병폐를 제거하기 위해 부자들이 모든 것을 매점매석하지 못하도록 규제하고 땅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정직한 생업을 갖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절도 행위를 사형으로 다스리는 제도에 대해서, 남의 돈을 훔쳤다고 해서 목숨을 잃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지적한다. 모어는 재판 제도, 전쟁 등에 대해서도 라파엘의 입을 빌려 비판하는데, 특히 왕은 그 나태성이나 자만성을 바로잡아야 하며 남에게 폐를 끼치지 말고 스스로의 수입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촉구한다. 또한 왕은 그의 신하들을 올바르게 가르쳐서 범죄를 예방해야지, 범죄 해우이가 만연하도록 해 놓고 그 다음에 처벌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혹독하게 비판한다. 그 밖에도 당시의 제도에 대한 여러 가지 문제점을 제기하며, 이런 문제를 해결하며 살고 있는 유토피아라는 곳에 대한 얘기가 진행된다.
이 책의 제 2부는 다음과 같은 9개의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번호는 편의상 매겨 놓은 것으로서 원저(原著)에는 번호가 없다.)

1. 유토피아 사람들이 사는 섬 / 2. 도시와 아마우로툼 / 3. 공무원 제도 / 4. 생업 / 5. 사회관계 / 6. 여행 기타 / 7. 노예 제도 기타 / 8. 군사 / 9. 유토피아의 종교

1. 유토피아 사람들이 사는 섬

유토피아 사람들이 사는 섬은 자연적으로나 인공적으로나 요새화되어 있어 조그만 힘으로도 외부의 침략을 막을 수 있다. 농촌에는 도처에 서로 적당한 간격을 두고 농기구들이 잘 갖추어져 있는 농가들이 있으며, 이 농가에는 도시에서 사람들이 번갈아 와서 산다. 매년 세대원의 반수가 도시로 돌아가고 각 개인은 2년마다 교대로 농촌과 도시에서 사는 것이다. 한 농가의 인원은 남녀를 합해서 40명 이상이며, 30호의 농가를 한 단위로 하여 한 부족을 이루고 이것을 ‘필라르크’ (phylarch)라는 우두머리가 다스린다.

2. 도시와 아마우로툼

시가는 교통과 방풍에 알맞도록 잘 짜여져 있다. 또한 집들은 모두 길을 향한 문을 가지고 있고, 뜰에 이르는 뒷문을 가지고 있다. 그 문들은 쉽게 열리고 스스로 닫히는 문들이라서 누구나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다. 즉, 아무것도 사유 재산이란 없는 것이다. 이 곳 사람들은 10년마다 집단적으로 집을 서로 바꾼다. ‘아마우로툼’(Amaurotum)은 유토피아의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는 수도로서 모든 점에서는 다른 모든 도시들과 같지만, 이곳에서 의회가 열린다는 것이 이 도시의 특징이다.

3. 공무원 제도

시민들은 삼십 가구를 한 단위로 하여 한 사람의 공무원을 뽑는데, 그들을 ‘필라르크’라고 부른다. 열 명의 필라르크와 그 필라르크들이 대표하는 가구에 대해 ‘프로토필라르크’(protophylarch)라 불리는 공무원이 있다. 필라르크는 모두 200명인데, 이들 모두는 비밀 투표로 뽑는다. 공통의 이해가 걸린 문제를 프로토필라르크 회의나 총회 이외의 장소에서 토의하면 사형에 해당하는 벌을 받는다.

4. 생업

주민의 기본적 생업은 농업인데, 성별에 관계없이 시민이면 누구나 농업에 종사하게 되어 있다. 각 개인은 그 외에 모직 · 면직 기술이나 석공 · 철공 · 목공 등의 일을 한 가지씩 배우게 되어 있다. 이들은 하루에 여섯 시간만을 일하며, 잠자리에는 여덟 시경에 들어 여덟 시간의 수면을 취한다. 저녁식사가 끝난 다음에는 한 시간 동안 오락을 즐기는데 여름에는 뜰에서, 겨울에는 식사를 하는 공공 회당에서 즐긴다. 유토피아에 사는 사람들 중 노동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서 노동을 면제받은 사람은, 학문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 등 전제 인구의 0.5% 이하이다.

5. 사회 관계

도시는 가정을 기초로 이루어지며, 인구의 과소 현상이나 과잉 현상이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하여 어떤 가정도 성인의 수가 열 명 이상 열여섯 명 이하가 넘지 않도록 규제한다. 또한, 한 가정에 초과 인원이 생기면 이것을 수가 적은 다른 가정으로 옮기며, 도시 전제의 가정을 합쳐 규정된 한도를 넘게 되면, 그 남은 만큼의 성인 인구를 인구가 적은 다른 도시에 보내서 그 곳의 수를 채우게 된다.

6. 여행 기타

여행은 필라르크와 프로토필리르크에게 허가를 받아야만 할 수 있다. 여행은 단체로 떠나는데, 이 때 시장이 서명한 여행 허가 증명서를 가지고 가며 거기에는 돌아올 날짜가 적혀 있다. 한편, 유토피아의 주민들은 옷이나 보석, 돈에 대한 욕망이 없고 남녀 관계에서는 엄격한 도덕을 지키고 건강과 자연 감상 및 학문에서 즐거움을 찾는다.

7. 노예 제도 기타

유토피아에서 노예란 전쟁 포로라 하더라도 유토피아 사람들이 직접 싸우다가 잡은 포로도 아니고 세습적인 노예도 아니며 외국의 노예 시장에서 사들인 자들도 아니다. 여기서 노예는 자기 나라의 죄수들이거나 아니면 외국의 사형수들이다. 이 중 전자가 더 나쁜 대우를 받는데, 왜냐하면 도덕적인 생활을 영위하도록 훌륭한 교육을 받고서도 죄를 범한다는 것은 다른 어떤 경우보다 더 나쁜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남녀 관계는 엄격하게 통제되어 부부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혼할 수 없으며 평생을 해로해야만 한다.

8. 군사

유토피아인들이 전쟁을 수행하는 유일한 때는 미리부터 충분히 상의해왔고, 또한 전쟁의 원인이 정당하며, 보상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해서 전쟁수단밖에 남지 않은 경우에 한한다. 그렇게 평화적인 방법이 불가능할 때에는, 앞으로는 겁이 나서 같은 짓을 다시 하지 못하도록 엄중히 처벌한다. 전쟁을 수행하면서 그들은 칭송이나 명예를 얻으려 하기보다는 위험을 줄이기 위해 더욱 노력한다.

9. 유토피아의 종교

유토피아에는 여러 가지 종교가 있는데, 이것은 이 나라 전체에서나 각 도시에서나 마찬가지이다. 어떤 사람들은 태양이나 달을 신으로 모시고, 또 어떤 사람들은 여러 유성(遊星)을 섬기기도 한다. 그런데 대다수의 사람들은 물질이 아닌 권능으로서의 어떤 유일한 존재를 믿으며 이 존재를 그들은 ‘아버지’라고 부른다. 유토피아인들은 설령 누가 그리스도교를 믿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믿는 것을 막지는 않는다. 물론 개종의 자유도 있다.

모어는 이 책에서 “섬 전체의 생활은 단일한 가족과 같은 것입니다.”라고 쓰고 있지만, 통제에 의해서 평등을 보장하는 이러한 이상 사회는 결국 잃어버린 과거의 세계를 추구하는 것이었다. 농업적 생활로 돌아가는 것과 결부하여 사유 재산 제도의 폐지와 화폐의 폐지를 주장한 것이 바로 그 증거이다. 모어는 라파엘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래서 사유 재산권이 추방되지 않는 한 평등하고 공평한 분배는 이루어지기 어렵고 우리들 사이에 완전한 행복도 확립되기 어렵다는 것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사유 재산권이 존속하는 한 대다수의 인간의 등에는 가난과 고난이라는 피할 길 없는 무거운 짐이 언제까지나 남아 있겠지요.”

이런 점에 근거해 볼 때, 모어가 생각한 유토피아는 근대화와 자본주의화에 저항하는 보수적 심성에 기반을 둔 근대화 비판이었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근데 이전 시기의 유토피아의 전형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저자 소개

토마스 모어(Sir Thomas More : 478~1535)』는 영국의 사상가이자 정치가이며 근세 유토피아 사상의 대표자이기도 하다. 런던에서 판사의 아들로 출생한 그는 14세에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하고, 이후 국회의원, 왕의자문관, 하원 의장, 대법관 등의 권력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그러나 헨리 8세가 앤과 결혼하여 앤의 소생을 왕이 계승자로 한다는 법안을 통과시킬 때, 이에 반대하여 반역죄로 사형 선고를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유토피아(Utopia, 1516)』는 토마스 모어의 사회 풍자 소설로서, 사유 재산제도 폐지와 도덕 혁명을 핵심으로 하는 그의 유토피아 사상을 담고 있다. 이 책이 쓰여 질 당시 영국에서는, 한편으로 자본주의가 성장하고 있었던 반면, 또 한편으로는 거지와 실업자가 들끓었는데 이런 사회적 모순 속에서 이상향을 추구하는 그의 사상이 형성되었다.

생각해 볼 문제

1. 『유토피아』의 제도에서 볼 수 있는 장단점을 오늘날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자.
2. 토마스 모어가 『유토피아』를 이상향의 사회로 생각했다면, 허균은 『홍길동전』에서 『율도국』을 이상 사회로 제시했다. 모어의 『유토피아』와 허균의 『율도국』의 공통점과 차이점에 대해 생각해 보자.
3. 인간이 꿈꾸는 모든 이상 세계와 실제 현실 세계의 근본적 차이점에 대해 친구들과 구체적인 예를 들어 가면서 이야기해 보자.

 

 

[자료출처-대성학원]

출처 : 대학입시수능정보(재수,점수공개)
글쓴이 : 교육길라잡이 원글보기
메모 :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

『유토피아』의 핵심 내용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발달하기 이전인 근대 이전의 시대에도 역시, 아무 데도 존재하지 않는 이상향을 그리는 갖가지 유토피아 사상이 있었는데,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가 그 대표적인 저술이다. 나아가 『유토피아』는 지금까지의 모든 유토피아 사상의 원천이 되고 있는 저서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 모어는 대양 한가운데의 외딴섬 『유토피아』를 찾아간 포르투칼인의 말을 받아 적는 식으로 이상향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모어가 『유토피아』를 집필했던 그 당시의 유럽은 어디나 할 것 없이 종교개혁에서 야기된 정치 문제로 시끄러운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각각의 종교적 파벌이 지닌 정치적 야심은 실제로 그 당시에 일어나고 있었던 근대 경제 체제, 즉 자본주의 체제가 낳고 있었던 중대한 경제 문제와 그 의미를 은폐시키고 있었다. 모어는 이 문제를 들고 나와 근대 경제 체제의 비인간적인 양상을 신랄하게 비판하고자 했다. 즉 이 책을 쓴 그의 의도는, 전쟁이 끊일 새 없이 계속되고, 양모 공업의 발달과 함께 빈부의 격차와 도시적 퇴폐가 확대대고 있던 당시 영국의 현실을 비판하는 데 있었다. 그런데 유토피아(utopia)란 단어는 그리스어의 우(u, 없다)와 토포스(topos, 장소)를 가지고 모어가 만들어 낸 것으로서 ‘아무 데도 없는 곳’이라는 뜻이다. 또한 이 책의 원제목은 『사회생활의 최선의 상태에 대한, 그리고 유토피아라고 불리는 새로운 섬에 대한 유익하고 즐거운 저서』인데 이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이 책에서 그리고 있는 유토피아는 비록 현실 속에는 ‘아무데도 없는 곳’이지만 인류가 반드시 도달해야 할 ‘이상향’임을 강력하게 암시하고 있다.

이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데 제 1부는 모어와 그를 방문한 라파엘이라는 학자와의 대화 형식으로 쓰여져 있다. 라파엘은 외국의 여러 문물을 많이 접하고 돌아온 인물로서, 대부분 그의 입을 통해 당시 영국 사회의 비참한 현실과 죄악이 낱낱이 폭로되고 있다. 그는 귀족들을 수벌처럼 남의 노동으로 하는 일 없이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로 평하며, 소작인을 쥐어 짜먹고 있다고 보았다. 또, 귀족이나 지주들이 양을 키우기 위해 경작지를 목장으로 만드는데 대해 신랄한 비판을 퍼붓기도 한다. 이는 바로 당시 영국에서 광범위하게 행해지고 있었던 '인클로저 운동[종획운동]'에 대한 비판이다. 당시 영국에서는 양모 공업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양의 방목지를 확보하기 위해 기존의공유지를 사유화하는 운동이 광범위하게 벌어졌고 그에 관한 법령도 제정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인클로저 운동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그 곳에 농사를 짓던 농민들이 쫓겨나 유랑생활이나 거지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책의 제 1부에서는 그와 같은 상황을 비판하면서 여러 병폐를 제거하기 위해 부자들이 모든 것을 매점매석하지 못하도록 규제하고 땅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정직한 생업을 갖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절도 행위를 사형으로 다스리는 제도에 대해서, 남의 돈을 훔쳤다고 해서 목숨을 잃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지적한다. 모어는 재판 제도, 전쟁 등에 대해서도 라파엘의 입을 빌려 비판하는데, 특히 왕은 그 나태성이나 자만성을 바로잡아야 하며 남에게 폐를 끼치지 말고 스스로의 수입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촉구한다. 또한 왕은 그의 신하들을 올바르게 가르쳐서 범죄를 예방해야지, 범죄 해우이가 만연하도록 해 놓고 그 다음에 처벌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혹독하게 비판한다. 그 밖에도 당시의 제도에 대한 여러 가지 문제점을 제기하며, 이런 문제를 해결하며 살고 있는 유토피아라는 곳에 대한 얘기가 진행된다.
이 책의 제 2부는 다음과 같은 9개의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번호는 편의상 매겨 놓은 것으로서 원저(原著)에는 번호가 없다.)

1. 유토피아 사람들이 사는 섬 / 2. 도시와 아마우로툼 / 3. 공무원 제도 / 4. 생업 / 5. 사회관계 / 6. 여행 기타 / 7. 노예 제도 기타 / 8. 군사 / 9. 유토피아의 종교

1. 유토피아 사람들이 사는 섬

유토피아 사람들이 사는 섬은 자연적으로나 인공적으로나 요새화되어 있어 조그만 힘으로도 외부의 침략을 막을 수 있다. 농촌에는 도처에 서로 적당한 간격을 두고 농기구들이 잘 갖추어져 있는 농가들이 있으며, 이 농가에는 도시에서 사람들이 번갈아 와서 산다. 매년 세대원의 반수가 도시로 돌아가고 각 개인은 2년마다 교대로 농촌과 도시에서 사는 것이다. 한 농가의 인원은 남녀를 합해서 40명 이상이며, 30호의 농가를 한 단위로 하여 한 부족을 이루고 이것을 ‘필라르크’ (phylarch)라는 우두머리가 다스린다.

2. 도시와 아마우로툼

시가는 교통과 방풍에 알맞도록 잘 짜여져 있다. 또한 집들은 모두 길을 향한 문을 가지고 있고, 뜰에 이르는 뒷문을 가지고 있다. 그 문들은 쉽게 열리고 스스로 닫히는 문들이라서 누구나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다. 즉, 아무것도 사유 재산이란 없는 것이다. 이 곳 사람들은 10년마다 집단적으로 집을 서로 바꾼다. ‘아마우로툼’(Amaurotum)은 유토피아의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는 수도로서 모든 점에서는 다른 모든 도시들과 같지만, 이곳에서 의회가 열린다는 것이 이 도시의 특징이다.

3. 공무원 제도

시민들은 삼십 가구를 한 단위로 하여 한 사람의 공무원을 뽑는데, 그들을 ‘필라르크’라고 부른다. 열 명의 필라르크와 그 필라르크들이 대표하는 가구에 대해 ‘프로토필라르크’(protophylarch)라 불리는 공무원이 있다. 필라르크는 모두 200명인데, 이들 모두는 비밀 투표로 뽑는다. 공통의 이해가 걸린 문제를 프로토필라르크 회의나 총회 이외의 장소에서 토의하면 사형에 해당하는 벌을 받는다.

4. 생업

주민의 기본적 생업은 농업인데, 성별에 관계없이 시민이면 누구나 농업에 종사하게 되어 있다. 각 개인은 그 외에 모직 · 면직 기술이나 석공 · 철공 · 목공 등의 일을 한 가지씩 배우게 되어 있다. 이들은 하루에 여섯 시간만을 일하며, 잠자리에는 여덟 시경에 들어 여덟 시간의 수면을 취한다. 저녁식사가 끝난 다음에는 한 시간 동안 오락을 즐기는데 여름에는 뜰에서, 겨울에는 식사를 하는 공공 회당에서 즐긴다. 유토피아에 사는 사람들 중 노동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서 노동을 면제받은 사람은, 학문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 등 전제 인구의 0.5% 이하이다.

5. 사회 관계

도시는 가정을 기초로 이루어지며, 인구의 과소 현상이나 과잉 현상이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하여 어떤 가정도 성인의 수가 열 명 이상 열여섯 명 이하가 넘지 않도록 규제한다. 또한, 한 가정에 초과 인원이 생기면 이것을 수가 적은 다른 가정으로 옮기며, 도시 전제의 가정을 합쳐 규정된 한도를 넘게 되면, 그 남은 만큼의 성인 인구를 인구가 적은 다른 도시에 보내서 그 곳의 수를 채우게 된다.

6. 여행 기타

여행은 필라르크와 프로토필리르크에게 허가를 받아야만 할 수 있다. 여행은 단체로 떠나는데, 이 때 시장이 서명한 여행 허가 증명서를 가지고 가며 거기에는 돌아올 날짜가 적혀 있다. 한편, 유토피아의 주민들은 옷이나 보석, 돈에 대한 욕망이 없고 남녀 관계에서는 엄격한 도덕을 지키고 건강과 자연 감상 및 학문에서 즐거움을 찾는다.

7. 노예 제도 기타

유토피아에서 노예란 전쟁 포로라 하더라도 유토피아 사람들이 직접 싸우다가 잡은 포로도 아니고 세습적인 노예도 아니며 외국의 노예 시장에서 사들인 자들도 아니다. 여기서 노예는 자기 나라의 죄수들이거나 아니면 외국의 사형수들이다. 이 중 전자가 더 나쁜 대우를 받는데, 왜냐하면 도덕적인 생활을 영위하도록 훌륭한 교육을 받고서도 죄를 범한다는 것은 다른 어떤 경우보다 더 나쁜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남녀 관계는 엄격하게 통제되어 부부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혼할 수 없으며 평생을 해로해야만 한다.

8. 군사

유토피아인들이 전쟁을 수행하는 유일한 때는 미리부터 충분히 상의해왔고, 또한 전쟁의 원인이 정당하며, 보상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해서 전쟁수단밖에 남지 않은 경우에 한한다. 그렇게 평화적인 방법이 불가능할 때에는, 앞으로는 겁이 나서 같은 짓을 다시 하지 못하도록 엄중히 처벌한다. 전쟁을 수행하면서 그들은 칭송이나 명예를 얻으려 하기보다는 위험을 줄이기 위해 더욱 노력한다.

9. 유토피아의 종교

유토피아에는 여러 가지 종교가 있는데, 이것은 이 나라 전체에서나 각 도시에서나 마찬가지이다. 어떤 사람들은 태양이나 달을 신으로 모시고, 또 어떤 사람들은 여러 유성(遊星)을 섬기기도 한다. 그런데 대다수의 사람들은 물질이 아닌 권능으로서의 어떤 유일한 존재를 믿으며 이 존재를 그들은 ‘아버지’라고 부른다. 유토피아인들은 설령 누가 그리스도교를 믿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믿는 것을 막지는 않는다. 물론 개종의 자유도 있다.

모어는 이 책에서 “섬 전체의 생활은 단일한 가족과 같은 것입니다.”라고 쓰고 있지만, 통제에 의해서 평등을 보장하는 이러한 이상 사회는 결국 잃어버린 과거의 세계를 추구하는 것이었다. 농업적 생활로 돌아가는 것과 결부하여 사유 재산 제도의 폐지와 화폐의 폐지를 주장한 것이 바로 그 증거이다. 모어는 라파엘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래서 사유 재산권이 추방되지 않는 한 평등하고 공평한 분배는 이루어지기 어렵고 우리들 사이에 완전한 행복도 확립되기 어렵다는 것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사유 재산권이 존속하는 한 대다수의 인간의 등에는 가난과 고난이라는 피할 길 없는 무거운 짐이 언제까지나 남아 있겠지요.”

이런 점에 근거해 볼 때, 모어가 생각한 유토피아는 근대화와 자본주의화에 저항하는 보수적 심성에 기반을 둔 근대화 비판이었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근데 이전 시기의 유토피아의 전형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저자 소개

토마스 모어(Sir Thomas More : 478~1535)』는 영국의 사상가이자 정치가이며 근세 유토피아 사상의 대표자이기도 하다. 런던에서 판사의 아들로 출생한 그는 14세에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하고, 이후 국회의원, 왕의자문관, 하원 의장, 대법관 등의 권력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그러나 헨리 8세가 앤과 결혼하여 앤의 소생을 왕이 계승자로 한다는 법안을 통과시킬 때, 이에 반대하여 반역죄로 사형 선고를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유토피아(Utopia, 1516)』는 토마스 모어의 사회 풍자 소설로서, 사유 재산제도 폐지와 도덕 혁명을 핵심으로 하는 그의 유토피아 사상을 담고 있다. 이 책이 쓰여 질 당시 영국에서는, 한편으로 자본주의가 성장하고 있었던 반면, 또 한편으로는 거지와 실업자가 들끓었는데 이런 사회적 모순 속에서 이상향을 추구하는 그의 사상이 형성되었다.

생각해 볼 문제

1. 『유토피아』의 제도에서 볼 수 있는 장단점을 오늘날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자.
2. 토마스 모어가 『유토피아』를 이상향의 사회로 생각했다면, 허균은 『홍길동전』에서 『율도국』을 이상 사회로 제시했다. 모어의 『유토피아』와 허균의 『율도국』의 공통점과 차이점에 대해 생각해 보자.
3. 인간이 꿈꾸는 모든 이상 세계와 실제 현실 세계의 근본적 차이점에 대해 친구들과 구체적인 예를 들어 가면서 이야기해 보자.

 

 

[자료출처-대성학원]

출처 : 대학입시수능정보(재수,점수공개)
글쓴이 : 교육길라잡이 원글보기
메모 :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