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대용의 『의산문답』

『의산문답』의 핵심 내용

30년간의 독서를 통해 당시의 유학을 통달했다고 자처하는 조선의 유학자인 허자는, 60일 동안 중국의 여러 학자들과 교유(交遊)하면서 그들의 학문이 형편없음에 실망하게 된다. 그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자신과 참된 진리를 논할 상대가 없음을 한탄하고 세상을 버리고 은둔하고자 만주 지역의 명산인 의무려산에 숨어 든다.

그러나 뜻밖에 의무려산에서 실옹을 만나 자신이 지금껏 자부해 왔던 학문이 헛되고 오류 투성이라는 것을 하나하나 깨우쳐 가게 된다. 실옹은 허자에게 지구설, 지구 회전설, 우주 무한론 등을 설파하며, 전통적인 우주관과는 판이하게 다른 새로운 우주관을 제시한다. 허자는 처음에 너무도 생소하고 혁명적인 주장에 경악하지만, 차츰 명쾌한 논리로 굴복시키는 실옹의 설명에 이끌려 새로운 우주관을 자연스럽게 수용하게 된다.

1. ‘땅은 둥글다.’ - 지구설

실옹은 먼저 ‘땅은 둥글다’는 ‘지구설’로 허자가 지녀 온 전통적인 우주관을 깨뜨린다. 허자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전통적인 우주관에 따라 직육면체 모양의 땅이 물 위에 떠 있는 우주의 모습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우주관을 바탕으로 허자는 땅의 위쪽 면에서는 사람이 똑바로 서 있을 수있지만, 옆면에서는 가로로 누울 수 밖에 없다고 실용의 지구설을 의심한다. 또한 땅은 아래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반드시 물 위에 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옹은 먼저 허자가 지는 기존의 상식을 모두 버릴 것을 주문한다. 편협한 경험에 의존하는 사고를 버리고 우주를 무한한 공간으로 생각하라는 것이다. 모든 천체가 우주 공간상에 떠 있다고 하면 상하의 구별이 없어지고 땅덩어리가 아래로 떨어질 것이라는 걱정도 필요 없어지는 것이었다. 실옹은

허공에 상하가 없는 것은 그 자체로 보아 분명한데, 세상 사람들은 평소의 속된 생각에 젖어 그 까닭을 찾아내려 하지 않는다. 진실로 그 까닭을 찾아낸다면, 땅이 떨어지지 않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고 하며, 아래에서 받쳐 주는 물이 없으면 땅덩어리가 ‘아래로 떨어진다.’는 허자의 생각이 무의미한 것임을 일깨운다.

그러나 허자는 여전히 “만일 땅이 둥글다면 지구의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은 거꾸로 서 있어야 할 것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라고 의심한다. 실옹은 지구상의 물체는 모두 중심을 향하는 성질이 있어서 지구의 반대편에서도 아무 어려움 없이 서 있을 수 있다고 허자를 설득한다.

또한 실용은

중국은 서양에 대해서 경도 차이가 180도인데, 중국 사람들은 중국을 바로 선 세계로 삼고, 서양을 거꾸로 선 세계로 여긴다. 이에 대하여, 서양 사람들은 서양을 똑바로 선 세계로 삼고 중국을 거꾸로 선 세계로 삼는다. 그러나 사실상 하늘을 이고 땅을 밟는 사람이면 기준을 어디로 한들 모두 마찬가지다. 옆으로 선 것도 없고 거꾸로 선 것도 없으니, 모두가 똑바로 선 것이다.

고 하며 둥근 지구에서는 모든 곳이 공간적으로 동등하고 똑바로 선 세계라고 주장한다. 이처럼 지구상의 모든 공간이 공간적으로 동등하다는 인식은 홍대용이 당시의 어느 지식인보다도 앞서, 그리고 편견 없이 서양 문물을 수용하고 정당하게 평가할 수있게 한 기반이었다. 허자는 서양의 문물은 변방 오랑캐의 것이라고 무시하며 중화사상에 젖은 당시 지식인의 목소리를 대변하지만, 실옹은 서양의 학문이 수학과 천문학 등에서 매우 뛰어난 것임을 인정하고 이것을 적극적으로 배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실옹은 서양의 과점에서 보면 중국이나 조선이 변두리에 해당하고, 중국의 관점에서 보면 서양이 변두리에 해당한다며 교만한 중화사상을 버릴 것을 주문한다.

학자들에 따르면, 이러한 지리적, 문화적 상대주의는 홍대용의 철학 사상 전반을 지배하는 중요한 사유 방식과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의산문답’에서 ‘인간과 모든 생물들은 본질적으로 동등하다.’는 주장을 펼 정도로 생태학적 시각이 강하게 견지되고 있다.

실옹은 자연의 모든 생물은 지(知), 각(覺), 예(藝)의 유무에 따라 식물, 동물, 인간으로 구분되기는 하지만, 이들이 모두 질(質), 정(精), 혈(血)의 교감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에서 차별이 없다고 주장한다.

생물의 종류에는 셋이 있는데, 사람과 금수와 초목이 그것이다. 초목은 거꾸로 서서 살아가는 까닭에 지(知)는 있어도 각(覺)이 없고, 금수는 옆으로 서서 사는 까닭에 각(覺)은 있어도 지(知)가 없다. 이 세 생물의 종류는 한없이 엉크러져 서로 망하게도 하고 흥하게도 하는데, 거기에 귀천의 차등이 있겠느냐?

결국 모든 생명체가 궁극적으로 자연계 안에서 상호작용을 하고 있으므로, 어느 것을 중심에 놓기보다 모두 동등한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이 같으냐 다르냐.’ 하는 당시의 철학적인 논쟁에서 홍대용이 인성과 물성이 동등하다는 입장을 취한 것으로, 철학사적인 의미에서도 상당한 주목을 끄는 주장이다. 또한 홍대용의 이러한 주장은 오늘날의 인간 중심주의적인 자연관 때문에 빚어지는 생태계 파괴의 문제에도 커다란 시사점을 던져 주고 있다. 인간 중심주의적인 사고는 인간이 자연을 이용하고 변형하는 것만을 정당화하면서 자칫 인간과 자연이 동등한 주체로서 상호 작용한다는 사실을 잊게 하는 것이다.

2. 지구 회전설

실옹은 허자의 박약한 우주관과 생명관을 교정한 후 본격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전개해 나간다. ‘의산문답’ 전체가 홍대용의 새로운 우주관으로 채워져 있지만, 그 중에서도 과학사적으로 가장 획기적인 주장은 지구 회전설(지전설)일 것이다. 이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중국과 조선에 정식으로 소개되기 이전에 조선의 지식인이 독자적으로 주장한 학설이라는 점에서 더욱 주목받고 있다.

홍대용의 선배인 김석문은 서양에서 주장된 상대 운동의 개념과 동양 전통의 천체 이론을 결합해, 지구가 중심에서 돌고 태양과 달 등 천체들은 지구의 운동에 의해 상대적으로 회전하는 것으로 보일 뿐이라는 지구회전설을 주장했다. 아마도 ‘의산문답’에서 제시된 홍대용의 지전설은 김석문의 지전설을 계승한 것으로 보인다.

처음에 허자는 “지구가 돌면 지구 표면의 생물체가 어떻게 쓰러지지 않을 수 있느냐” 며 지전설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이에 실옹은 대기층이 지구를 감싸고 지구와 함께 돌아가기 때문에 지구가 돌더라도 지구 표면의 생물이 넘어지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이는 마치 물속에서 물고기가 헤엄칠 때 물 전체가 움직여도 물고기는 아무런 영향 없이 헤엄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실옹은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마치 나는 새가 공중을 빙빙 돌고, 구름이 하늘에서 피어났다 흩어지고, 물고기와 용이 물에서 놀고, 쥐가 땅을 기어다니듯이, 고여 있는 기(氣) 속에서 헤엄치는 것들은 넘어지거나 쓰러질 염려가 없거늘, 하물며 지면에 붙어 있는 사람과 만물에 있어서랴!

3. 우주 무한론

자신의 세계관이 여지없이 깨지는 것을 목도하며, 허자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자신의 믿음만이라도 지키고 싶어 한다. 허자는 지구가 중심에서 돌더라도 천체들이 지구 주위에 있다면 어쨌든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 아닌가 하며 실옹을 물고 늘어진다.

그러나 허자의 믿음은 우주의 공간은 무한하고 우주는 지구와 같은 천체들이 무한이 많이 있다는 실옹의 우주 무한론에 또 다시 의미 없는 고집이 되고 만다. 실옹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며 우주의 한 부분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허자를 더욱 경악시킨 것은 지구는 우리가 살아가는 하나의세계일 뿐이며, 우주에는 지구와 같은 세계가 수 많이 있을 수 있다는 실옹의 다세계설이었다. 실옹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늘에 가득 찬 별들이 모두 각각의 세계이다. 별들의 세계로부터 본다면 지구의 세계도 또한 하나의 별일뿐이다. 한량없는 세계가 하늘에 흩어져 있는데, 오직 이 지구의 세계만이 우주의 중심에 있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없는 일이다.

지구설에 바탕해 지구상의 어느 곳이나 공간적으로 동등하다는 것만으로도 당시로서는 가히 혁명적인 주장이지만, 우주 공간이 무한하고 지구 외에도 생명체가 있을 것이라는 실옹의 주장을 보면 홍대용이 상상한 우주의 크기와 사고의 범위가 얼마나 넓고 혁명적인 것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홍대용은 이러한 우주론적인 인식을 바탕으로 ‘의산문답’ 후반부에서는 당시 지식인들이 교조로 삼고 한 번도 의심해 보지 않은 중국 중심의 사대주의를 여지없이 벗어 버린다. 이미 구형인 지구상에서 중심과 주변이란 구별이 무의미하고, 광활한 우주에서 중심과 주변이라는 구별이 무의미할 때, 중국은 대국이고 조선은 오랑캐라는 사대주의적인 화이관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이었다.

때문에 실옹의 입을 통한 홍대용의 마지막 주장은 “만약 공자로 하여금 오랑캐 땅에 살게 한다면, 그는 중국의 법과 풍속을 그 곳에 일으켰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당연히 그 곳 중심의 춘추(역사)가 있었을 것이다.”였다.

허자로 드러난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홍대용이 “의산문답”을 통해 진정으로 들려주고 싶었던 것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자각과 우리에게도 우리의 역사가 있다는 각성이었다. 그러기에 그는 전통과 권위에 얽매여 경전이나 암송하는 허자의 허학을 버리고 세계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고 실질을 숭상하는 실옹의 실학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일찍이 역사학자 정인보 선생은 ‘의산문답’을 평하기를, “진실로 선생의 학설에 따라 미루어 알아 가면, 정덕(正德), 이용(利用), 후생(厚生)이다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인데, 아깝게도 그 뒤를 이은 사람이 적었다.”고 했다. ‘의산문답’을 읽을 때마다 살아나는 조선의 실학자 홍대용의 면모는 이러했던 것이다.

저자 소개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의 호는 담헌(湛軒)이며, 조선 영조, 정조 연간에 활동한 문신으로 당시의 집권당인 노로 가문에서 나온 실학파의 선구자였다. 정치, 경제는 물론 특히 과학 분야인 수학과 천문학에 조예가 깊어 개인적으로 천문 관측기구를 소장하고 연구하기도 하였다. 천문학과 우주론에 대한 그의 지식은 중국을 토해 들어온 서양 천문학의 지식과 김원행의 문하에서 수학한 그의 선배 김석문에게 영향 받은 바 크다. 홍대용은 특히 1766년 작은아버지를 따라간 북경 방문을 계기로 중국인 학자, 서양 선교사들과 사귀고 서양 과학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저서로는 북경 방문의 여행기인 ‘연기’, 서양 선교사들과의 필담서인 ‘유포문답’, 수학책인 ‘주해수용’, 과학 사상을 담은 ‘의산문답’ 등이 있다. 그의 사후에 그가 남긴 시, 서를 포함해 그의 저작을 망라한 ‘담헌서’가 편찬되었다.

『의산문답』은 가상 인물인 실옹과 허자가 펼치는 대담이다. 홍대용 자신을 대변하는 실옹과 전통에 매몰되어 진정한 진릴ㄹ 보지 못하는 당시의 조선 지식인을 모델로 한 허자가 나누는 대화를 통해 자신의 철학적 입장과 실학 정신, 과학 사상 등을 서술하고 있다. 제목에 나오는 의산은 의무려산의 준말로, 그가 북경 방문길에 그가 보고 들은 신세계의 경험이 이 책의 저술에 크게 기여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생각해 볼 문제

1. ‘의산문답’의 과학 사상(지구설, 지구 회전설, 우주 무한론)이 18세기의 조선 사회에 미쳤을 영향을 생각해 보자.
2. 이 글에서 나타나는 허자와 실옹이 보여 주는 태도를 비교, 분석하고, 이를 ‘현대에 요구되는 과학하는 태도’와

 

 

[자료출처-대성학원]

출처 : 대학입시수능정보(재수,점수공개)
글쓴이 : 교육길라잡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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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콘의 『민족주의』와 베네틱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


박천홍 / 문화 평론가

1. 민족주의에 대한 두 가지 시각

민족주의는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하나가 해방의 긍정적 얼굴이라면, 다른 하나는 억압의 부정적 얼굴이다. 민족 단위의 공동체에 대한 소속 의식과 개인의 이기심을 초월한 헌신, 그리고 민족적 자유와 독립을 수호하려는 열정 등이 민족주의의 긍정적 측면이라면, 다른 민족 집단에 대한 배타적 감정이나, 개인의 자유와 권리 대신 민족 집단에 대한 희생을 강요하는 것 등은 민족주의의 부정적 측면이다.

서양의 민족주의가 자유, 평등, 박애를 기치로 내건 프랑스 혁명의 산물이었다면, 우리나라를 비롯한 제 3세계의 민족주의는 제국주의적 억압에서 해방되려는 과정에서 형성된 역사적 산물이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일제 식민지하에서 터져 나오는 3.1 운동이나 민족 해방 투쟁은 민족 공동체의 독립과 자유, 주권을 회복하기 위한 저항 민주주의적 성격을 띠었다. 이는 민족의 생존과 권리는 다른 민족에 의해 강요되거나 규정될 수 없다는 적극적 정치의식의 발현(發現)이었다.

그러나 민족주의는 때때로 지배 계층에 의해 피지배 계층을 억압하거나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편리한 수단으로 악용되기도 했다. 그 예로 박정희 정권이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민중을 동원하는 논리로 곧장 내세웠던 것이 민족주의였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의 경제 개발과 근대화의 정책은 외자 의존적이고 공평한 분배를 무시한 반민족, 반민중적 정책이었다. 북한의 사회주의도 민족 해방의 논리를 내세워 민중을 억압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근대 서양에서 시작된 민족주의는 원래 인민 주권, 공화주의, 시민적 자유와 평등권을 주요 이념으로 하여 성장했다. 그러나 민족주의는 다른 민족을 침략하고 억압하기 위한 논리로 동원되면서 본래의 해방적 기능을 상실하고 서로 다른 민족들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갈등하는 시대를 열었다. 그리고 이러한 민족주의는 각 민족의 역사와 전통, 특수성을 무시한 채 식민 본국의 이해만을 대변하게 되면서 피식민지의 광범위한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현대 민족주의는 여전히 분열과 갈등의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 예로 보스니아 내전이나 소말리아 종족 분규(紛糾) 등은 주변 국가들의 첨예한 이해관계가 대립하면서 여전히 전쟁의 불씨를 남기고 있다. 특히 과거 식민지에서 독립한 나라들은 복잡한 인종적, 종교적 갈등으로 언제든 폭발할 가능성을 안고 있다. 민족주의는 여전히 세계평화와 안정을 위협하는 요인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현대 민족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민족주의의 개념이나 기원, 역사적 전개 과정 등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스 콘의 민족주의는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민족주의의 역사적 전개 과정을 폭넓은 시각으로 조명하고 있다. 이 책은 특히 민족주의의 해방적 기능이 어떻게 근대 이후 왜곡되어 왔는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그리고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는 민족주의의 문화적 측면을 날카롭게 분석함으로써 민족주의를 이해하는 새로운 지평을 열어 준다.

2. 한스 콘의 『민족주의』

체코 출신의 역사학자 한스 콘은 민족주의 연구에서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고 있는 석학(碩學)이다. 그는 민족주의가 18세기 후반에 일어난 현상이지만, 그 근원은 고대 그리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주장하면서 민족주의의 역사적 전개 과정을 살피고 있다.

한스 콘은 민족주의가 근대사를 추진한 원동력 가운데 하나였다고 강조한다. 18세기에 영국과 프랑스의 혁명을 시작으로 일어난 민족주의는 19세기에는 유럽 전반에 퍼졌고, 20세기에는 세계적인 운동이 되었다. 민족주의의 중요성은 아시아나 아프리카에서 해마다 더욱 커져가고 있다. 그러니 민족주의가 나라나 시대를 막론하고 동일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역사적 현상이기 때문에 자연히 그것이 뿌리박힌 나라의 정치 이념이나 사회 구저에 따라 그 성격이 달라지게 마련이다.

종교를 이해하지 못하고는 중세의 기독교 세계를 알 수 없었던 것처럼, 오늘날 민족주의와 그 의미를 알지 못하면 근대사나 우리 시대를 올바르게 파악할 수 없다. 종교와 마찬가지로 민족주의 성격이 다른 수많은 형태를 취할 수 있다. 민족주의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발전해 왔고, 여러 형태들은 어떻게 다른가 하는 점을 비교하지 않으면 민족주의의 역사적 기여와 위험성을 파악할 수 없다.

 (1) 민족주의란 무엇인가?

한스 콘은 민족주의를 ‘개개인이 마땅히 민족 국가에 최고의 충성을 바쳐야 한다고 느끼는 하나의 심리 상태’ 라고 정의한다. 향토나 지방적 전통 또는 지역적인 기성 권위에 대한 간절한 애착은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어느 시대에나 존재해 왔다. 하지만 근대적 의미의 민족주의가 공적, 사적 생활을 규정하면서 공인된 감정이 된 것은 18세기 후반의 일이다. 각 민족은 제각기 자기의 국가를 형성해야 하며, 또 그 국가는 자민족을 전부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된 것은 극히 최근에 일어난 일에 지나지 않는다.
예전에는 개개인이 민족 국가에 충성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종족이나 씨족, 도시 국가나 봉건 영주, 왕조 국가나 종교 집단처럼 민족 국과와는 형태가 다른 사회적인 권위나 정치 단체, 이념상의 결합체 등에 충성을 바쳐 왔다. 여러 세기에 걸쳐 모든 나라의 정치적 이상은 민족 국가의 확립이 아니라,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일반적인 평화를 보전하기 위해 공통된 문명의 기반 위에 여러 민족과 인종 집단을 포함하는 세계 제국의 건설이었다.

민족은 생동하는 역사적 힘의 소산이다. 따라서 끊임없이 변동하는 것이지 결코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민족을 정의 내리기는 쉽지 않다. 비록 각 민족은 대게 같은 혈통, 언어, 영토, 정치적 실체, 관습, 전통, 종교 등과 같이 다른 민족과 구별되는 일정한 객관적인 여러 요소를 가지고 있긴 하지만 그와 같은 여러 요소 가운데 어느 하나도 민족의 실체나 정의에 본질적인 것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미국인은 하나의 국민을 형성하는 데 같은 혈통을 요구하지 않는다. 스위스인은 3~4개의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있으면서도 하나의 뚜렷한 국민을 이루고 있다. 이는 혈통이나 언어와 같은 객관적인 여러 요소도 국민을 형성하는 데 매우 중요하기는 하지만, 가장 본질적인 요소는 국민들의 적극적인 소속 의사라는 것을 말해준다.

민족주의는 바로 이 소속 의사를 가리킨다. 그것은 국민의 대다수를 하나로 묶고 있고, 나아가서는 국민 전체를 다 같이 통합하기를 요구하고 있는 하나의 심리 상태이다. 민족주의는 민족 국가야말로 이상적인 동시에 유일한 합법적인 정치 조직계이며, 민족이야말로 온갖 문화의 창조력과 경제 복지의 원천이라고 주장한다.

 (2) 근대 민족주의의 특징

민족주의 시대 이전에도 민족주의와 비슷한 감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가와 같은 감정은 개인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았다. 일반 대중은 자기의 생활이 민족의 운명에 직결되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페르시아 전쟁 당시의 그리스나 백년 전쟁 당시의 프랑스에서 그랬던 것처럼 외부에서 오는 위험은 전 국민에게 결속의 일시적 감정을 일으키게 할지는 모른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말해서 프랑스 혁명 이전에 일어났던 여러 전쟁들은 뿌리 깊은 민족적 감정을 일으키지 않았다. 예를 들어, 펠로폰네소스 전쟁 당시 그리스인은 같은 그리스인과 격렬하게 싸웠다. 또한, 근대 초기의 종교 전쟁 때나 왕조 간의 전쟁 때 독일인은 독일인끼리, 이탈리아인은 이탈리아인끼리 서로 싸웠지만, 그런 싸움이 동족상잔(同族相殘)의 성격을 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심지어는 18세기에 이르러서도 유럽에서는 외국인 통치자 밑에서 군인이나 문관으로 복무하면서 봉사했는데, 이는 당시 유럽 대부분의 국가들이 아무런 민족 감정도 지니고 있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또한, 극히 최근에 이르기까지 민족은 문화생활의 원찬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역사의 대부분을 통해 인간의 심성과 성격을 형성하는 교육과 학문도 그 어떤 민족적 경계에 의해서 한정되지 않았고, 오랜 기간 동안 종교가 모든 문화적 정신적 생활의 원천이라고 생각되었다. 르네상스 시대나 그 후의 교육은 유럽 여러 곳에서 고전 문명의 공통 전통에 의거하고 있었고, 중세 유럽의 기사도적 이상이나 17, 18세기의 프랑스적 궁정 생활양식은 민족의 경계를 넘어서 전파되었다.

유럽과 아메리카에서 사람들이 스스로를 민족과 동일시하고, 문화란 민족 문화를 의미한다고 생각하면서 그들의 생사를 민족의 존망과 직결시켜 생각하게 된 것은 19세기의 일이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는 20세기에 들어서 이러한 일이 생겨났다. 이때부터 민족주의는 대중의 감정과 마음을 지배해 왔고, 동시에 자민족이나 타민족에 대한 민족적 권리 행사의 합법화에 이바지해 왔다.

 (3) 고대의 민족주의와 보편주의 철학

민족주의는 근대의 산물이긴 하지만 그 근본적 특징은 오랜 옛날에 이미 나타났다. 민족주의는 서양 문명에 기원을 두고 있다. 고대 히브리인과 고대 그리스인들은 자기들이 다른 민족과는 다르다는 뚜렷한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즉, 히브리인은 ‘이방인’과는 다르고 그리스인은 ‘외국인’과는 다르다고 믿었다. 그들은 왕이나 승려가 아니라 전체 백성들이 집단의식을 소유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고대의 다른 민족들의 경우에는 오직 지배자나 제국만이 역사의 발자취를 남긴데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히브리인과 그리스인의 경우에는 그들의 문화적 연속성이 인종적, 정치적 또는 지리적 연속성보다도 강하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다. 그들은 민족 국가에 대한 이념 같은 것은 가지고 있지 못했지만, 강한 문화적 사명감은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히브리인에게서 근대적 민족주의의 세 가지 특징이 나타났다. 선민사상, 과거에 대한 추억과 미래에 대한 소망이 공통된다는 데에 대한 강조, 그리고 민족적 구원 사상이 그것이다.

그리스인은 히브리인과 마찬가지로 그들이 다른 민족들보다 문화적, 정신적으로 우월하다는 감정을 지니고 있었고, 그런 감정을 분명한 언어로 표현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리스인은 정치 공동체(도시국가, 폴리스)에 최고의 충성을 바쳐야 한다는 관념을 발전시켰다. 그리고 각 시민의 생활은 폴리스를 떠나서는 전혀 생각할 수 없었으므로, 그들의 생활은 철저하게 정치화되었다.

플라톤은 국가에서 시민에 대한 국가의 절대 우위를 주장하면서 폐쇄적이고 권위주의적인 국가를 이상화했다. 그러나 기원전 4세기 말에 이르러 세계 제국을 건설하려 했던 알렉산더는 보편주의 철학을 자극했다. 즉, 세계 제국을 건설하려 했던 알렉산더의 꿈은 그리스인과 외국인 사이에 놓은 차별을 허물고 모든 인종적 경계나 차이를 초월하는 보편적인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알렉산더의 영향을 받은 스토아 철학자들은 각 개인의 조국은 사람이 살고 있는 세계 국가이며, 각 개인은 특정 국가의 시민아 아니라 인류의 일원이라고 생각하도록 가르쳤다. 민족의 운명에 직결되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페르시아 전쟁 당시의 그리스나 백년 전쟁 당시의 프랑스에서 그랬던 것처럼 외부로부터 오는 위험은 전 국민에게 결속이라는 일시적 감정을 일으키게 할지는 모른다.

 (4) 로마 제국의 보편주의와 르네상스 및 종교 개혁

스토아 철학은 기원전 2세기 동안 로마인의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 로마는 지구상의 모든 지역을 동일한 법과 문명의 기반 위에 편성하면서 하나의 제국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그리스 문명에 기원을 두면서도 그리스 국가의 배타성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로마 제국의 보편주의는, 유대교에 기원을 두면서도 이스라엘의 인종적 배타성은 가지지 않았던 보편적 기독교가 전파되는 데 비옥한 땅을 제공했다.

그 후에 로마 제국은 기독교 교회와 일체화되었다. 제국 사상과 기독교의 영향을 받은 중세의 정치적, 문화적 사상은 인류는 하나이며, 따라서 하나의 사회를 이룩해야 한다고 확신한 데 그 특징이 있다. 근대에 이르기까지 종교는 사상, 사회생활, 및 심적 태도를 통일적으로 규제함으로써 이슬람 국가와 마찬가지로 기독교 여러 나라에서도 공사(公私) 생활을 전적으로 지배했다.

르네상스와 종교 개혁이라는 2대 정신 혁명은 중세에서 근세로 이행하는 과도기를 이룬다. 중세의 저술가들은 교회에 봉사하고, 신에 영광을 돌리기 위해 문필 활동에 종사했으나, 르네상스의 인문주의자들은 제후나 도시에 고용되어 그들에게 영광을 돌리기 위해 글을 썼다. 그러나 르네상스는 민족주의를 발전시키기에는 너무나 일시적인 현사이었고, 또 너무나 협소한 지식층에 국한된 현상이었다.

종교 개혁은 문예 부흥이라는 막간극의 막을 내리게 함으로써 기독교와 종교상의 논쟁은 또다시 온갖 생활과 활동의 중심이 되었다. 16, 17세기 유럽인은 민족적 가치를 위해서가 아니라 종교상의 진리를 위해 싸웠다. 사람들은 인종이나 언어의 차이 때문이 아니라 종교상의 이단 내지 배교 때문에 추방당하기도 하고 징벌을 받기도 했다.

종교 개혁은 근대의 종교 및 언어의 다원주의를 촉진시켰다. 르네상스기에 발전된 국가와 왕권의 새로운 개념은 중앙 집권화된 왕조 국가를 창건했다. 후에 그런 왕조 국가에서 민족 국가가 생겨났다. 절대 군주는 여러 봉건적 및 지방적 중심성을 타파하고 온갖 충성심을 하나의 중심으로 통합시켰다. 경제적 상호 의존도가 점점 높아감에 따라 전 시대의 장원(莊園)이나 도시보다도 훨씬 더 광대한 지역적인 단위를 요구하게 되었다. 이렇게 좀 더 광대했던 정치 단위는 새롭게 대두하던 중산 계급의 진취적 기상과 그들의 자본주의적 기업에 필요한 무대를 제공 할 수 있었다.

 (5) 근대 민족주의의 형성

근대 민족주의는 17세기 청교도 혁명과 명예혁명을 경험한 영국에서 최초로 완성된 형태에 이르게 되었다. 청교도 혁명은 후에 크롬웰의 의회 독재와 군사 독재로 타락하고 말았지만, 양심의 자유와 신민의 자유를 신이 부여한 신성한 권리로 확립시켰다. 그리고 명예혁명은 자유와 관용의 새로운 질서를 국민 생활과 국민성 속에 뿌리내리게 했다.
영국 혁명의 이념은 존 밀턴에 의해 명확하게 표현되었다. 밀턴에 따르면, 민족주의란 권위로부터 개인의 자유를 확립하는 것이고, 정부나 교회에 대해 개인의 인격을 주장하는 것이며, 예속과 미신의 멍에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영국에서 확립된 자유의 전통은 이후 미국의 민족주의를 출현시키는 데 강력한 요인이 되었다.

영국에서 분리, 독립한 미국의 혁명 정신은 미국 헌법에 요약되어 있었다. 미국 헌법은 “만인은 평등하게 창조되어 다 같이 창조주에 의해서 일정한 불가양도의 권리, 즉 생명, 자유 및 행복 추구의 권리를 부여받았다.”는 진리 위에 기초하고 있었다. 이런 진리는 프랑스 혁명 초기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은 근대 민족주의의 완성이자 새로운 출발이었다. 프랑스 혁명의 민족주의는 시민의 본분과 위엄이 정치 활동에 있으며, 그런 본분의 완수는 자기의 민족 국가와 완전히 일치하는 데 있다고 강조했다. 프랑스 혁명에서 여러 지리적, 계급적 경제는 제거되었고, 각 사회 계급과 계층은 각종의 특권과 역사적 권리를 모두 포기했다. 이렇게 해서 국민적 통일이 처음으로 이루어졌다.

프랑스 혁명의 산물인 인권 선언은 법에 의해 보호되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나라라는 새로운 질서의 기초를 닦았다. 자율적인 개인을 모든 사회의 출발점이자 동시에 목표로 확립한 인권 선언은 프랑스 명예혁명과 미국 독립 혁명의 완성이었다. 인권 선언은 정부와 집단의 압력에 대항해 개인의 존엄성과 사생활 및 행복을 보호했다.

처음에는 세계 평화를 선언했던 프랑스 혁명은 프랑스와 유럽을 종교 전쟁 이래 어느 전쟁보다도 더 오래 지속시키고 파괴적인 전쟁으로 휘몰아 넣고 말았다. 전쟁의 소란 속에서 옛 국가들은 자취를 감추고 새로운 충성심이 생겨났다. 아일랜드에서 러시아에, 스페인과 이탈리아에서 노르웨이에 걸쳐 민족 감정이 최초로 환기되었다. 프랑스 공화국이 행한 여러 전쟁은 전례가 없을 정도로 국민적 혁신과 단결에 호소했다.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한 프랑스의 승리와 지배는 프랑스의 모범에 따라 다른 근대 민족 국가를 창건하려는 욕망을 부추긴 동시에 그런 민족 국가들에게 프랑스의 이념에 관심을 돌리게 했다. 그런데 새로운 민족주의는 국민에게 침투하지 못하고 다만 일부 지식인 사이에 국한되어 있었다. 많은 지식인들은 나폴레옹을 정복자가 아니라 위대한 인물이며 개혁자라고 생각하며 그를 찬양했다.

그러나 지속된 전쟁과 프랑스 민족주의를 강조한 결과 국민감정이 결집되어, 마침내 러시아와 프러시아가 나폴레옹을 유럽의 권좌에서 밀어내는 데 성공했다. 나폴레옹 전쟁의 패배 이후 1848년에 일어난 여러 민족들의 봉기(蜂起)는 민족주의에 새로운 특징을 띄게 했다. 즉, 새로운 민족주의는 개인의 자유보다는 집단의 힘과 통일을 강조하게 되어 다른 나라로부터 독립하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20세기는 전 인류가 동일한 정치적 태도, 즉 민족주의를 국민적 이념으로 승인하고 있는 역사상 초유의 시대이다. 민족주의의 대두는 어느 나라에서나 국민을 결합시키고 사회를 새로운 질서 아래 통합시킬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각국의 독특한 역사적 조건과 사회적 구조에 따라 민족주의는 서로 성격을 달리한다. 또한, 세계적 규모의 민족주의는 단합되고 조화로운 인류 사회를 창조하는 과업을 촉진시키지는 못했다. 세계적 규모의 민족주의는 오히려 각 민족 사이의 첨예한 갈등만을 불러일으켰다.

3.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는 민족과 민족주의의 기원과 발달을 독특한 시각에서 연구한 책으로, 국내외 학자들에게 중요한 이론적 논거로 활용되고 있다. 앤더슨은 한스 콘과 마찬가지로 민족주의가 근대의 발전 과정에서 생겨난 것으로 본다. 다만, 한스콘이 민족의 기원을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파악하고 정치적 발전 과정에 주목한다면, 앤더슨은 민족과 근대 자본주의와의 관련성을 더욱 부각시키면서 문화적 측면에서 민족주의를 분석한다. 그는 민족을 ‘상상의 공동체’로 정의하는데, 이는 어떤 사람들의 머리 속에서 마음대로 상상하거나 꾸민 것이라는 뜻이 아니다. 그가 말하는 상상의 공동체는 특정한 시기에 사람들의 경험을 통해서 구성되고 의미가 부여된 역사적인 공동체를 뜻한다.

 (1) 민족은 ‘상상의 공동체’

앤더슨은 민족을 ‘본래 제한되고 주권을 가진 것으로 상상되는 정치 공동체’라고 정의 한다. 민족은 가장 작은 민족의 구성원들도 대부분 자기 동료들을 알지 못하고 만나지 못하며, 심지어 그들에 관한 이야기를 듣지도 못하지만 구성원 각자의 마음에 서로 친교의 이미지가 살아 있기 때문에 상상된 것이다.

앤더슨은 상상된 민족을 세 가지로 규정한다. 첫째, 민족은 제한된 것으로 상상한다. 왜냐 하면, 10억의 인구를 거느린 가장 큰 민족도 비록 유동적이기는 하지만, 한정된 경계를 가지고 있어 그 너머에는 다른 민족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민족도 그 자신을 인류와 동일시하지는 않는다. 또한, 모든 인류의 성원이 그들의 민족에 동참하는 날이 올 것을 꿈꾸지도 않는다.

둘째, 민족은 주권을 가직 넋으로 상상된다. 왜냐 하면 민족 개념은 계몽 사상과 혁명이 신이 정한 계층적 왕국의 합법성을 무너뜨린 시대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오늘날은 어떤 보편적인 종교를 추종하는 사람일지라도 보편적인 종교들이 여럿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잇다. 이런 인간의 역사 단계에서 민족들은 자유롭기를 꿈꾸고 있으며, 만일 신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면 직접 받기를 꿈꾼다. 이 자유의 표식과 상징은 주권 국가이다.

마지막으로 민족은 공동체로 상상된다. 왜냐 하면, 각 민족에 보편화되어 있을지 모르는 실질적인 불평등과 수탈에도 불구하고 민족은 언제나 심오한 수평적 동료 의식으로 상상되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지난 2세기 동안 수백만 명의 사람들로 하여금 그렇게 제한된 상상체들을 위해 남을 죽이기보다 스스로 기꺼이 죽게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이 형제애 때문이다.

 (2) 민족주의의 문화적 기원

민족을 상상하는 가능성 자체는 역사적으로 볼 때 아주 오래된 세 가지 근본적인 문화 개념이 인간의 사고에 대해 누리던 통제력을 잃어버린 때와 장소에서 일어났다. 첫째는 라틴어나 한자처럼 특정한 언어가 바로 진리와 분리될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에, 진리에 접근할 수 있는 특권을 제공한다는 개념이었다. 모든 종교 공동체들은 자신들이 우주의 중심으로부터 신성한 언어라는 매개체를 통해 초현실적인 힘의 질서에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기독교 세계 와 이슬람 세계 그리고 기타 세계의 초대륙적인 연대감을 낳게 한것은 바로 이 개념이었다.

그러나 중세 말 이후 유럽이 비유럽 세계를 탐험하면서 자신들이 속한 종교 공동체만이 유일하고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의식은 위기를 맞이했다. 또한 중세의 신성한 언어였던 라틴어가 몰락하고 지방어가 발전하면서 옛 언어의 신성한 권위도 도전받게 되었다. 신성한 언어에 의해 통합된 신성한 공동체들이 점차 분해되고, 복수화되고, 영토화되었다.

둘째는 다른 인간들과 구별되며 어떤 우주적 형태의 섭리에 의해 통치하는 군주라는 상위 중심부의 주변과 그 밑에서 사회가 자연스럽게 조직된다는 믿음이었다. 지배자는 경전처럼 신성한 존재에 접근할 수 있는 통로였으며 신적인 존재였기 때문에 인간의 충성심은 반드시 서열적이고, 구심점을 향해 있었다

그러나 17세기 동안 신성 군주제의 합법성은 유럽에서 서서히 퇴조하기 시작했다. 영국의 찰스 스튜어트는 단두대에 올랐고, 프랑스의 부르몽 왕가도 몰락을 맞이했다. 1914년까지도 왕조 국가들이 세계 정치 체제의 다수 구성원을 이루었다. 그러나 많은 왕조들은 정통성의 원칙이 조용히 시들어갈 때 민족이라는 단어에 손을 뻗었다.

셋째는 우주관과 역사가 구별되지 않고 세계의 기원과 인간의 기원이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시간의 개념이었다. 중세인들은 구세주적 시간 안에 살고 있었다. 구세주적 시간은 순간적인 현재에 과거와 미래가 동시에 나타난다는 의식이다. 중세인들은 교회에 있는 스테인드 글라스나 성화를 통해 성서에 기록된 역사의 창조와 성서에서 예언된 미래 사건이 현재에 재현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18세기 유럽에서 소설과 신문이라는 상상의 두 가지 형태가 출현하면서 민족과 같은 상상의 공동체를 재현할 수 있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같은 시기에 같은 사회에 살고 있다는 사실에 의해서 동시에 등장한다. 소설을 읽는 독자들은 실생활에서는 만나지 못하더라도 같은 시간에 존재하는 사람들이 있으며, 자신과 이들이 동시대인으로서 동일한 사회에 살고 있다고 상상하게 된다. 신문은 같은 시간에 생긴 서로 연결되지 않는 사건들을 기사화함으로써, 독자들에게 같은 시간에 일어나는 사건들과 이 사건에 대한 기사를 읽는 사람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상상을 하게 만든다.

이런 상호 연결된 확실성들이 서서히 퇴조하면서 우주관과 역사를 분리시켰다. 새 문화 개념들의 퇴조는 경제 변동, 발견(사회적인 발견과 과학적인 발견), 그리고 한층 빨라진 커뮤니케이션의 발달 등의 영향을 받아 처음에는 서유럽에서 일어나고 그 후에는 다른 곳에서 일어났다.

그렇다면 형제애와 권력, 그리고 시간을 의미 있게 서로 연결하는 새로운 방법을 모색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아마도 인쇄 자본주의보다 이러한 모색을 촉진시키고 성공적으로 만든 것도 없을 것이다. 인쇄 자본주의는 빠르게 늘어나는 사람들이 심오하게 새로운 방식으로 그들 자신에 대해 생각하고, 그들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연결할 수 있게 해주었다.

 (3) 민족의식의 기원

근대 민족의식을 형성하는데 인쇄 자본주의가 맡은 역할은 매우 중요했다. 초기 서적 시장은 라틴어를 아는 소수 엘리트를 겨냥했다. 그러나 16세기 초에 이미 기계적 재생산의 시대에 들어선 인쇄 자본가들은 라틴어를 해독할 수 있는 소수 엘리트 독자층을 겨냥한 출판에서 지방어 서적의 대량 출판으로 눈을 돌린다. 신흥 부르주아 계층을 중심으로 한 독서 계층과 잠재적 서적 소비 시장의 발달도 인쇄 자본주의가 지방어 서적 출판에 관심을 갖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16세기에 서구 사회에서는 지금보다 훨씬 다양한 구어가 다양한 방언 형태로 쓰이고 있었다. 이윤을 위한 지방어 서적의 대량 출판은 다양한 방언들을 소수의 표준어로 활자화함으로써 가능하게 되었다. 그 결과 동일한 지방 활자어 서적을 읽는 독자들은 다른 지방 활자어를 읽는 사람들과 구별되는 유대를 상상하고 의식할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지방 활자어로 된 서적의 발달은 언어가 민족의 경계를 정하는 역할을 할 수 있는 여지를 열어놓았다.

지방 행정어의 발달은 지방어의 발달에 기여한 또 하나의 요인이다. 특정 왕조의 영토에서 특정 지방 행정어를 사용하는 것은 처음에는 다분히 편의적이고 실용적이며 무의식적으로 진행되었다. 지방 활자어와 지방 행정어는 이후 서구에서 언어 대중 민족주의의 발달과 크게 관련되었다.

유럽의 민족주의는 종족과 언어가 민족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로 생각되는 종족 언어 민족주의의 성격을 띤다. 유럽에서 민족은 오래 전에 형성되어 있었지만 그 동안 사람들이 자각하지 못했다. 유럽인들은 그 동안 잠들었던 자신들의 민족의식을 깨워야 했다. 당시 유럽에서 발달하고 있던 언어 계보학(系譜學)과 문헌학, 지방어 사전과 고전의 지방어 번역 출판 등은 이들의 민족 식을 깨우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지방어로 번역된 고전을 읽으면서 사람들은 자신의 언어가 가지는 가치를 새삼 깨닫게 되었으며,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언어만큼 오래된 어떤 것, 즉 ‘민족성’을 공유하는 것으로 상상했다. 그리고 유럽에서 발달한 종족 언어 민족주의는 당시 제국주의적으로 팽창하고 있는 왕조 국가들에 의해 의식적으로 모방되었다.

언어 집단을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가 민족 구성원들의 동질성과 형제애라는 이념에 기반을 둔 ‘대중 민족주의’적 성격을 띈다면, 혈통의 우월성에서 자신들의 통치권을 정당화해 온 왕조 국가의 통치자와 지배 계층이 표방하는 민족주의는 ‘관(官)주도 민족주의’ 라 부를 수 있다.

언어는 매일 그것을 말하고 잇는 한 특정 집단의 소유이며,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는 집단은 동질성을 갖는 공동체라는 종족 언어 민족주의적 사고는 왕조들에게 딜레마를 가져다주었다. 왜냐 하면, 왕조 안에는 다양한 언어 집단이 존재할 뿐만 아니라, 식민 제국주의적 팽창 과정에서 이들은 자신들의 왕조 안으로 더 많은 종족 언어 집단을 통합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식민 제국주의 국가들은 무엇보다도 행정상의 목적을 위해 차츰 특정 지방 활자어를 모국어로 정착시켰다. 즉, 동일 언어와 문화를 소유한 민족 공동체가 공동체의 규범이 되어가는 시대적인 변화에 따라 식민 제국주의 국가들을 강요하는 동화(同化)정책을 추진한 것이다. 러시아 영토에 사는 사람들의 러시아화, 영국 식민지 사회인들의 영국화, 일본 식민지인들의 일본화는 동화 정책의 좋은 사례이다.

 (4) 제 3세계 민족주의의 모순

제 2차 세계 대전 이후 독립한 신생국에서 발달한 민족주의는 자신들의 고유한 언어를 소유했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중요한 쟁점으로 간주하지 않았으며, 종종 이전 식민 종주국의 언어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유럽의 민족주의와는 다르다.

식민지 민족주의를 형성하는 데 서구의 근대식 교육을 받은 엘리트들의 역할은 무척 컸다. 19세기 후반에 있었던 제국들은 소수의 민족들에 의해 통치되기에는 너무 방대하고 광범위했다. 따라서, 제국의 통치를 위해 식민주의자들은 이중 언어를 알고 식민 행정과 식민지인을 매개하는 다수의 하급 관리를 필요로 했다. 이러한 이유로 식민주의자들은 통치에 필요한 다수의 하급 관리를 배출하기 위해 식민지에 동화를 추구하는 서구의 근대식 교육 제도를 도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식민지에 서구식 교육 제도가 도입되면서, 식민주의자들이 의도하지 않은 결과가 나타났다. 즉, 근대식 교육을 받은 식민지 지식인 계층들이 식민 국가의 제국적 성격과 민족 국가적 성격 사이에 있는 모순을 간파(看破)하게 된 것이다. 근대식 교육이 프랑스 혁명과 근대적 민족 국가에 대한 이념을 가르쳤는데, 식민 제국은 이러한 이념에 배치되는 일상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학교 제도를 통해 추진된 동화 정책은 식민지 국민들에 대한 차별에 의해 그 모순이 노출되었다.

식민지에 세워진 근대식 학교 제도는 식민지 각지에 있는 시골 초등학교에서 대도시 상급 학교로 서열화 되고 중앙집권화 되었다. 식민지의 표준화되고 서열화 된 교육 제도는 시골 초등학교에서 대도시의 상급 학교까지 교육을 받기 위해 온 학생들 사이에 ‘우리’라는 의식을 심어 주었다. 예를 들어, 프랑스령 서 아프리카에 있는 윌리엄 퐁티 중등학교에서 교육받은 서아프리카 지식인들은 학교 제도에 의해 서아프리카 의식과 결속감을 느끼게 되었다. 즉, 중세 시대 기독교 세계의 여러 곳에서 성지 순례를 온 사람들이 성지에서 만난 사람들을 한 종교 공동체에 속하는 형제, 자매로 인식하듯이, 서아프리카 시골의 초등학교에서 식민 교육의 중심지로 가는 순례 과정에서 만난 서아프리카 지식인들은 서로를 서아프리카 공동체에 속하는 형제, 자매로 상상했다.

그러나 식민지 안에서 서열화 된 학교 제도가 곧바로 서아프리카 민족주의를 발달시키거나 서아프리카 민족 국가를 형성하지는 않았다. 서아프리카의 교육 제도와 행정 제도가 동일한 구조를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식민 교육 제도가 서아프리카 전 지역을 대상으로 서열화 되었다면, 식민지의 행정은 분할, 통치되었기 때문이다. 서구의 근대식 교육을 받기 위해 각처에서 식민지 교육 제도의 최고 중심지로 온 서아프리카 지식인들은 교육을 받은 후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들은 자신의 고향이 있는 특정한 식민행정단위 안에서 관리로 임용되었다. 그리고 이는 지식인들이 한정된 영토 안에서 관료로서 여행하면서 자신들이 속한 특정 식민 행정 단위를 민족의 경계로 상상하게 만들었다.

아프리카의 사례에서 잘 나타나듯이, 근대식 학교에서 통용된 식민주의자들의 언어가 민족주의 운동에서 사용된 것은 불가피한 측면이었다. 예를 들어, 포르투갈령 모잠비크에서 포르투갈어가 모잠비크 민족 국가를 상상하는 매개체가 된 것이다. 이는 민족주의 운동에서 언어는 민족을 연결해 주는 매개체이지 민족을 상상하게 하는 본질적인 토대는 아니라는 점과 함께, 다중 언어 집단으로 구성된 신생국의 초기 민족주의 운동에서 이중어를 구사할 줄 아는 엘리트 지식인들이 지도적 역할을 하게 된 배경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식민 국가에 의해 임의로 구성된 행정 단위가 민족으로 상상되어 신생 민족 국가로 독립한 후 국가와 지배 계층은 언어적, 종족적 다양성과 갈등을 극복하고 민족 공동체로 통합시키는 역할을 맡았다. 또한, 아메리카와 유럽에서 경험된 대중 민족주의와 관 주도 민족주의 등 다양한 민족주의 모형들이 모방되고 채택되었다. 이처럼 신생 민족 국가들에서는 국가와 지배 계층에 의해 민족주의 사상이 체계적으로 도입되고 일반에게 주입되며, 때에 따라서 특정 언어와 문화적 전통에의 동화 정책이 추진되었다.

 (5) 애국심과 인종주의와의 관계

인종주의는 민족주의가 만들어 낸 것이라기보다는 유전적 우월성을 내세운 왕조 국가의 지배 계층에서 유래했으며, 계층적 차별을 식민지 사회에까지 확장한 것이다. 예를 들어 영국의 군주가 보통 영국 사람보다 우월하다면, 이주한 영국인들이 통치를 받는 원주민들보다 우월하다는 논리가 암암리에(혹은 공공연하게) 작용하게 된다. 따라서, 식민지에서 이주민은 귀족과 같은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인종주의가 민족주의에서 유래하지 않았다는 것은 식민 통치에 대항하는 식민지 사회의 민족주의에서 역(逆) 인종주의를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식민지 민족주의는 자민족의 독립과 함께 모든 형태의 인류 억압에 대해 반대한다. 이는 스페인어를 쓴 메스티조 멕시코들이 자기 민족의 조상을 스페인 정복자가 아닌 원주민에게서 찾았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민족주의는 때로 인종주의와 같이 나타나는 것이 사실이지만, 민족은 기본적으로 심오한 자기 희생을 고취한다. 그런데 사람들이 민족 공동체를 위해 자기의 목숨을 기꺼이 내놓을 각오를 하게 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러한 질문은 민족의 의미를 인종주의적이고 배타적인 성격에서보다 이타적인 성격에서 찾게 한다.

사람들이 민족을 위해서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은 민족이 친족이나 고향처럼 숙명적으로 타고난 것으로 상상되기 때문이다. 즉, 타고난 어떤 것이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민족은 사람들에게 사심 없는 희생을 요구할 수 있는 것이다. 민족은 개인을 그 기원을 알 수 없는 고대의 조상에게 연결해 줄 뿐만 아니라, 그가 죽은 후에도 영원 불멸할것으로 생각된다. 민족을 위해 죽는 것은 조상으로부터 미래의 자손으로 이어지는 영원한 공동체에 참여하는 것이다.

메시아 적 시간 안에서 창조에서 종말로 이어지는 종교 공동체가 의미를 잃은 시기에 고대에서 미래로 이어지는 역사적 시간 안에 존재하는 민족은 영구 불멸을 약속하는 가장 의미 있는 대안적 공동체가 된다. 민족을 정치적 이념보다는 친족이나 종교와 같은 의미 체계로 보아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4. 배타적 민족주의를 넘어서기 위하여

우리는 민족주의와 세계 시민주의가 공존하는 시대에 살아가고 있다. 민족주의는 한 민족 집단의 자유와 평등, 국민 주권의 원리를 실현하는 강력한 수단이다. 그러나 그것이 자칫 우리 민족의 독립과 생존을 위해 다른 민족을 배척하는 논리로 전환될 때는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수단으로 남용될 여지가 있다. 또한, 민족주의는 민족 공동체에 충성심을 강조하면서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희생할 것을 강요하는 논리로 동원될 가능성이 크다.

요즘 세계는 한 민족의 경계선을 넘어 다른 민족과 자유롭게 교류하고 평등하게 의사 소통하면서 세계 시민으로서 살아갈 가능성이 높아졌다. 세계 시민이 된다고 해서 각 개인의 민족적 공동체 의식이나 민족적 정체성이 없어지거나 약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각 개인의 민족 공동체에 대한 소속 의식은 다른 공동체와 평화롭게 만나고 교류하면서 더욱 고양(高揚)될 수 있다. 즉, 민족주의와 세계 시민주의는 서로 갈등하는 것이 아니라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는 다양한 갈등과 모순이 뒤섞여 있다. 특히 해외 이주 동포를 우리 민족으로 볼 것인가, 한국 경제에 크게 기여하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가 한국인과 혼인했을 경우 우리 민족으로 인정할 것인가, 팽창주의 전략을 고수하고 있는 일본이나 한국 고대사를 자신의 역사로 편입시키려는 중국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등의 문제가 민족주의에 대한 새로운 도전으로 우리 앞에 놓여 있다.

민족 공동체는 단일한 혈통이나 언어만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건전한 민족 공동체를 건립하기 위해서는 한스 콘이 말한 대로 민족 공동체에 대한 헌신 의식이 중요하고, 앞으로의 민족 공동체는 베네딕트 앤더슨이 지적한 것처럼 친족이나 종교 같은 대안적 공동체로 자리 잡을 수 있다. 단일 혈통이나 언어는 민족을 구성하는 여러 요인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오히려 민족 공동체에 대한 헌신 의식이나 대안적 공동체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민족 내부의 불평등한 관계를 극복하고 다른 민족 공동체와 조화롭고 평등한 관계를 수립하는 것이 중요하다.

21세기 민족주의는 편협한 배타적 민족주의와 단일 혈통이나 언어의 순수성을 고집하는 신화적 민족주의를 넘어서, 다른 민족 집단의 특수성과 권리를 존중하고 지구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민족들이 서로 교류하고 협력하여 조화를 추구하는 보편주의적 민족주의로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바로 민족주의가 추구하는 민족의 독립과 자유, 평등함을 확보하는 가장 빠른 길일 수 있다.

생각해 볼 문제

1. 한스 콘의 민족주의 개념과 베네딕트 앤더슨의 민족주의 개념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2. 한스 콘은 서양 민족주의의 기원을 고대 그리스와 히브리까지 거슬러 올라가 설명하고 있다. 고대 민족주의와 근대 민족주의의 차이점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3. 베네딕트 앤더슨은 근대의 인쇄 자본주의가 민족주의의 형성에 미친 영향을 중요하게 취급하고 있다. 민족이라는 상상의 공동체를 형성하는 데 소설과 신문이 어떤 기능을 했는지 생각해 보자
4. 우리의 민족주의는 단일 혈통과 언어를 강조해 왔다. 그 결과 다른 혈통과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 공동체를 쉽게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편협한 민족주의를 낳았다. 21세기 세계화 시대에 우리의 민족주의가 나아갈 방향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자료출처-대성학원]

출처 : 대학입시수능정보(재수,점수공개)
글쓴이 : 교육길라잡이 원글보기
메모 :

제임스 E.러브록의 『가이아』와 노자의 『노자』


박천홍 / 문화 평론가


1. 인간과 자연

인간이 자연계의 일부라는 것은 지극히 자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근대 산업 혁명 이후 이런 자명한 명제는 망각되어 버렸다. 기계에 의한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의 자본주의 체제가 성립하면서 인간은 자연을 착취와 정복의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산업 혁명 이후 물질문명이 고도로 발달했지만, 그 결과 인류는 환경오염과 자연 생태계 파괴라는 자연의 재앙과 직면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지속 가능한 발전을 어떻게 달성할 것이냐의 과제는 오늘날 인류의 화두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근대 문명이 자연을 떠나고 마치 자연의 지배자처럼 군림하게 된 까닭은 바로 인간 중심주의 때문이다. 인간만이 이 지구의 유일하고 가치 있는 존재라는 오만과 착각 때문에 자연은 인간을 위해서 당연히 봉사해야 하며, 인간의 목적을 위해서 착취되거나 정복 되어도 좋다는 식으로 인식되어 왔다. 하지만 이제는 인간이 지구 생태계의 수많은 존재 가운데 하나일 뿐이며,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분리되려고 할 때 어떤 재앙이 초래되는지 알고 있다.

인간 중심주의에 대한 강력한 비판 가운데 하나가 제임스 E. 러브록의 가이아론이다. 러브록은 자기 조절적 시스템을 갖춘 하나의 생명체로서 지구를 관찰함으로써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새롭게 설정하고 있다. 또한, 동양 사상의 기원 가운데 하나인 노자의 도가 사상은 인간의 인위적인 질서와 도덕을 부정하고 인간과 자연의 합일을 추구한다. 이처럼 가이아론과 도가 사상은 오늘날 인간가 자연의 조화와 공존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2. 제임스 E. 러브록의 『가이아』

영국의 화학자이자 생물 물리학자이며 열대 의학자인 제임스 E. 러브록은 ‘가이아(Gaia)가설’을 통해 지구는 정밀한 자기 조절적 시스템을 갖춘 하나의 거대한 살아있는 생명체라고 주장했다. 지구의 모든 생물들이 서로 연계해서 지구의 토양과 해양, 그리고 대기까지 포함하는 지구 환경을 시시각각 변화시켰으며, 전체 생물권의 생존에 적합하도록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지구의 생물은 단순히 주위 환경에 적응해 진화하는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대기의 조성을 변화시키고 지구의 기온을 일정하게 유지시키며 심지어 화산 활동을 일으키기도 하는 등 어마어마한 기능을 수행하는 능동적 존재인 것이다.

러브록의 가이아 가설은 인간이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만 간주하던 지금까지의 독선적 견해에 대한 대안이 될 수 있다. 또한, 이 가설은 지구 생태계를 위협하는 환경오염이 지구의 장래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회의하는 사람들에게도 인류의 미래에 대한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1) 살아 있는 지구

지구가 살아 있다는 생각은 원시 시대부터 있어 왔다. 살아 있는 실체를 의미하는 명칭인 가이아는 이미 2천 년 전에 그리스 신화에 등장한 대지의 여신을 뜻한다. 지구가 살아 있는 존재라는 신념이 과학계에서 처음 제시된 것은 1789년 제임스 허튼 경이 영국 에든버러 왕립학회에서 연설할 때였다. 그는 지구에 대한 가장 적절한 연구 방법은 생리학적 수단을 동원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당시 하비가 제안한 혈액 순환의 원리가 지구의 원소 순환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 것이라고 설파(說破)했다.

가이아에 대한 탐구는 1960년대 중반 미국 항공 우주국(NASA)이 최초로 화성의 생명체를 찾기 위해 우주 탐사를 시도하면서 비롯되었다. 우주 탐사의 가장 탁월한 부산물은 새로운 기술의 진보가 아니었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우리가 외계로부터 지구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고, 지구를 관찰함으로써 새로운 종류의 질문과 해답을 할 수있게 되었다.

러브록은 이런 과학적 발전에 힘입어 지구에 대한 새로운 가설을 제안했다. 러브록의 ‘가이아 가설’은 바이러스로부터 고래, 또는 참나무로부터 해조류에 이르기까지 지구의 모든 생물이 하나의 살아 있는 실체를 구성한다는 것이다. 이 실체는 자신이 살아가는 환경을 일정하게, 그리고 생물들의 생활에 적합하도록 지구 대기권을 조절할 수 있고, 이 실체를 구성하는 생명체들은 각자의 능력을 합한 것보다 훨씬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한다.

화석의 기록이나 방사능을 측정한 결과 지구가 독립적인 천체로 존재한 기간은 약 45억 년에 이른다고 밝혀졌다. 그리고 10억 년의 시간이 지난 후 지상에 최초의 생물체가 출현했다고 한다. 퇴적암의 기록에 따르면, 지난 35억년 동안 지구의 기후는 단 한 순간도 생물의 생존에 부적합한 때가 없었다. 또한 그 기간 동안 지표의 온도는 일정하게 생물의 생활에 지장이 없는 적당한 수준으로 유지되어 왔다. 이 때문에 생물체가 처음으로 지상에 살기 시작하던 그 시절부터 생물권은 자신의 구성 요소로 중요한 물질들을 주위 환경으로부터 흡수해 이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물질들이 모두 고갈되자 대기, 해양, 그리고 지표로부터 원료 물질을 취해 그 구성 물질을 합성할 수 있는 기술을 익히게 되었다. 생물들이 지구적으로 퍼져 나가 점차 다양해지면서 다른 하나의 중요한 임무가 필연적으로 요구되었다. 그것은 작용과 기능을 유지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미량 원소들을 충분히 확보하라는 것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제까지 독립적이었던 미량원소 회수의 수단들이 더 높은 생산성을 위해 서로 합쳐지고 연계되었을 것이다. 이러게 해서 구성된 한층 복잡한 협조체제의 네트워크는 각 부분들의 가능한 합보다 훨씬 커다란 능력과 속성을 지니게 되었을 것이며, 바로 이런 점이 가이아의 여러 특징을 보여 준다.

 (2) 사이버네틱스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는 살아있는 생물체나 복잡한 기계에서 작동하는 자가 규제 시스템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 분야를 말한다. 가장 작은 것에서 가장 큰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물들의 속성 가운데 하나는 그들이 어떤 목표를 설정하고 시행착오를 겪는 사이버네틱 과정을 통해 목표를 달성하도록 노력하는 시스템을 개발, 가동, 유지하는 능력을 소유한다는 것이다.

사이버네틱 시스템은 순환 논리 회로를 갖는 것이 보통이다. 가장 간단한 사이버네틱 시스템인 온도 조절계를 예로 들어 보자. 많은 가정에서 사용하는 전자식 오븐의 온도 조절용 다이얼을 섭씨 150도로 고정시키고 스위치를 넣어놓고 가정하면, 전기 오븐에서는 니크롬선이 곧 발갛게 달아오르고 많은 열이 방출되어 순시 간에 오븐 내부의 온도가 섭씨 150도까지 상승할 것이다. 온도조절계가 섭씨 150도를 감지하는 순간 자동적으로 전기는 차단된다. 그러나 이때까지 달아오른 니크롬선에서는 계속 열이 발산되므로 오븐 내부의 온도는 잠시 동안 계속 상승하게 될 것이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오븐은 점차 식어서 온도가 떨어지게 되고, 이 때 온도 조절계는 내부 온도가 섭씨 150도 이하에 이르렀음을 감지해 다시 전기를 공급하게 된다. 그러나 스위치가 연결된다고 하더라도 니크롬선이 충분히 가열될 때까지 오븐 내부의 온도는 잠깐 동안 하강을 지속할 것이다. 니크롬선이 가열되면서 다시 온도 조절의 사이클은 반복 된다 따라서, 오븐 내부의 온도는 사실상 섭씨 150도에서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이온도를 축으로 해서 상하로 몇 도의 범위 내에서 오르락 내리락한다.

싸이버네틱 시스템을 이해할 수 있는 관건은 그것들을 마치 생명체와 같이 간주해 부분들의 집합체가 각 부분들의 단순한 합 이상의 존재로 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이다. 그것들은 오직 작동 시스템으로서 간주되어야만 이해될 수 있는 대상이다. 오븐의 스위치를 끄거나 오븐을 분해해 본다고 해서 오븐의 잠재적 효율성을 밝혀 낼 수는 없다.
태양은 통제 불가능한 복사열을 공급하는 근원이며, 지구는 그 주위를 영원히 돌고 있다. 그런데 지구에 생명체가 처음 나타난 35억 년 전부터 지구 표면의 온도는 현재 온도를 중심으로 불과 몇 도 차이의 범위 내에서 결코 벗어난 적이 없다. 그 동안 원시 대기의 조성과 태양의 복사 에너지 양에는 놀라울 만큼 변화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지구는 생물체가 살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춥거나 더운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생물들이 자신의 신체 대상을 최적의 정상 상태로 유지하도록 하는 여러 생리적 작용들은 너무나 복잡하면서도 미묘한 작용을 한다. 생물 그 자체뿐만 아니라 그의 부분품들인 신경계, 순환계, 소화계, 감각계 등은 모두 완벽하게 협력하여 작동함으로써 신체의 정상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이런 상태를 생리적 평형상태라 부른다. 이에 가이아도 자신의 존재를 보전하기 위해 끊임없이 최상의 온도 조절 메커니즘을 추구해 왔으며, 그 결과 오늘날에 이르러 비로서 정교한 시스템을 갖추게 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만약 이 행성에 범지구적 규모의 조절시스템이 존재하며, 그것이 동식물들을 부분품으로 이용하면서 능동적으로 기능을 비롯해 지구의 기후, 화학적 조성, 지표면의 지형 등을 변화시키고 있다는 이론을 뒷받침할만한 충분한 증거를 발견할 수 있다면, 가이아 가설은 기정사실로 밝혀지고 이론으로서 검증될 수 있을 것이다.

 (3) 대기권과 해양의 사이버네틱스

현재 대기권에 포함되어 있는 21퍼센트의 산소는 생물계의 생존을 가능케 하는 안전농도의 상한선이다. 현재의 수준에서 약간만 더 산소 농도가 높아지면 자연 발화의 위험성은 훨씬 커지게 된다. 현재의 공기 농도에서 산소 농도가 1퍼센트씩 증가될 때마다 삼림에서 번갯불에 의해 화재가 발생할 수 있는 가능성은 70퍼센트씩 상승되기 때문이다.

메탄가스는 대기권에 포함된 산소의 농도를 규제하는 역할을 맡는다. 메탄가스 대부분은 해저, 습지, 하구 등 탄소 화합물이 풍부히 묻혀 있는 곳에서 박테리아의 혐기성 발효(무 산소 발효)에 의해 만들어진다. 이런 미생물에 의해 생산되는 메탄가스의 양은 매년 약 10억 톤에 이른다. 만약 메탄가스가 없었다면 공기 중의 산소 농도는 최소 매 1만 2천년마다 1퍼센트씩 증가할 것이다. 이것은 생물학적으로 매우 위험해서 한 차례의 화재로 전 세계의 삼림을 모두 휩쓸어 버릴 그런 재난을 빈번하게 일어나게 할지도 모른다.

이산화질소도 메탄가스와 마찬가지로 산소의 규제를 담당한다. 또한, 이산화질소가 성층권에서 분해되면 다른 기기들과 함께 산화질소를 만드는데, 이런 산화질소는 오존층을 파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하지만 너무 과다한 오존도 너무 적은 것과 마찬가지로 해롭다. 자외선이 너무 강력해지면 피부암에 걸리게 되고, 너무 약하게 되면 구루병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가이아의 조절 시스템은 오존층을 통해 유입되는 자외선의 양이 너무 많거나 너무 적은 것을 측정하는 감지 수단이 있어서 이산화질소의 생산을 여기에 맞춰 조절한다.

암모니아는 토양 속과 바다 속에서 대량으로 생산되는데, 매년 약 10억 톤 정도가 만들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암모니아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주위 환경의 산도(酸度)를 조절하는 것이다. 생물권에 의해 생산되는 암모니아는 빗물의 폐하(pH)를 8 정도로 유지시켜 생물들이 적합한 환경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결정적인 도움을 준다. 자연계에서는 암모니아와 산성 물질이 균형을 이루기 때문에 빗물이 산성이거나 알카리성에 치우치지 않는 것이다. 이처럼 생물권은 우리 주변의 대기 조성을 능동적으로 조절해서 유지시키며, 그 결과 지사의 생물들을 위한 가장 적합한 환경이 자연스럽게 조성되고 있는 것이다.

가이아의 자기 조절 능력은 지구 표면의 4분의 3을 차지하는 바다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대양은 지구라는 거대한 증기 기관의 한 부분으로 이 기관이 태양의 복사열을 받아 들여서 공기와 물의 운동을 통해 에너지를 지구의 구석구석까지 골고루 분산시키는 막중한 역할을 하고 있다. 총체적으로 대양은 거대한 용존 가스의 저장고로서 우리가 호흡하는 공기의 조성을 통제하고 해양 생물들에게는 안정된 생활환경을 제공하면서 생물권에 기여하는 것이다.

지난 35억년 이상의 기간 동안 대륙은 지구 표면을 떠돌았으며, 극지방의 빙하는 녹았다가 다시 얼어붙곤 했고, 해수면은 오르락내리락 하는 지질학적 변화를 심각하게 경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다의 전체 부피는 거의 일정하게 변하지 않고 유지되었다.

현재 바닷물의 염분 농도는 약 3.4퍼센트 정도이다. 반면, 현재 우리 몸의 염분 농도는 0.8퍼센트에 지나지 않는다. 처음 지구상에 생물이 나타났을 때 그 해상 생물의 체액 농도는 바닷물의 농도와 같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후에 생물들이 진화를 시작하면서 그들은 해양에서 육지로 서식처를 옮겼다. 이 때 동물들은 처음 그 상태 그대로 체액 농도를 유지했지만, 그 후에 바닷물의 염분 농도는 점차 높아졌다고 한다. 그 결과로 인해 오늘날에는 생물체의 체액과 바닷물의 염분 농도가 많은 차이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런데 생물 세포가 살아 있기 위해서는, 자신의 내부 수용액과 외부 환경을 막론하여 염분 농도가 잠깐이라도 6퍼센트를 넘어서는 안 된다. 왜냐 하면 염분 농도가 6퍼센트를 넘을 경우 삼투압을 견디지 못해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적어도 지난 수억 년 동안 해양의 염분 농도는 거의 변함없이 유지되었다. 그리고 바닷물의 염분 농도 역시 어떤 경우에도 6퍼센트를 넘은 적이 없었다. 이것을 통해 바다에는 염분이 더해지는 만큼 이를 신속하게 제거할 수있는 어떤 메커니즘이 분명 존재할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이다.

바다에서 염분 농도를 조절하는 과정은 규조류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규조류는 규산염이 부족한 바다에서는 그것을 흡수하면서 번성하지만, 규산염이 풍부한 염분 호수에서는 성장하지 않는다. 규조류는 바다의 표층에서 짧은 생애를 보내다가 규산염을 흡수하고 죽으면 가라앉아서 자신의 몸을 해저에 묻는다. 이처럼 규산염을 사용하고 처분하는 생물학적 과정은 바다에서 규산염 농도를 조절하는 효율적인 기제이다.

 (4) 가이아와 인간

현재 인간의 산업 활동은 풍요로운 생물의 서식처를 파괴시키고 지구의 모든 생물을 위협하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매년 그 위협은 증대하고 있다는 게 모든 사람들의 의견이다. 하지만 현재 수준의 산업 활동과 가까운 미래의 공업 발달이 가이아의 생명을 전반적으로 위험에 처하게 한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증거는 사실상 매우 적은 편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물질 중에 맹독성이 가장 강한 것은 놀랍게도 자연의 생산품이다. 박테리아에 의해 만들어지는 보툴리누스 독, 바다에서 적조 현상을 야기하는 쌍편모 조류가 발산하는 치명적인 독성, 그리고 독버섯으 lehr 등은 모두 생물체가 만드는 유기 화합물질들이다. 이런 맹독성의 부산물을 생산하는 생물 그 자체는 이들의 유독 물질만 제대로 제거한다면 아무런 해가 없다.

환경오염이라는 개념은 인간 중심적인 것이어서 가이아의 입장에서 본다면 자신과는 별로 관련성이 없다. 소위 오염물로 불리는 것들 대부분은 사실상 자연계에 존재하는 것이며, 따라서 어느 정도 수준에서 그것들을 오염물로 간주해야 할지에 대한 결정을 내리기는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거의 대부분의 오염 물질들은 어느 정도까지는 자연적으로 만들어진다. 지구의 생물종으로서 인류는 적당한 범위 안에서라면 주위 환경에 널려 있는 오염 물질에 이미 잘 적응하고 있다. 만약 어떤 원인에 의해서 오염 물질의 g나 두 가지가가 더 증가한다고 하더라도 인간 개개인의 종으로서의 인류는 곧 적응력을 가지게 될 것이다. 예컨대, 만약 자외선의 강도가 증가한다면 우리들은 피부의 색을 갈색으로 바꾸는 정상적인 방어 기능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현재 대기 오염 물질에 의해 오존층이 궁극적으로 모두 파괴되어 버릴 것이라는 주장이 당연시되고 있다. 하지만 오존층이 파괴되거나 감소한다는 이론은 옳지 않으며, 오존층은 결코 심각할 정도로 감소되어 본 적이 없었다. 지구에 생물체가 나타난 이후 처음 약20억 년 동안에는 오존층이 전혀 형성되어 있지 않았음에 불구하고, 지사의 박테리아와 조류들은 그 기간 동안 강렬한 자외선을 무난히 견뎌 왔다는 것이 그 증거이다. 대기 중에 오전이 지나치게 풍부하게 되면 그것이 부족한 것에 못지않게 생물들은 불이익을 입을 수 있다. 따라서 이산화질소와 염화메틸 화학물이 생물계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도 범지구적 규모의 가이아적 조절 작용의 일환이다.

하지만 자연 생태계를 무리하게 교란시키면 언제든지 대기 성분의 조성을 무너뜨리는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 이산화탄소나 메탄가스와 같은 기체성 물질과 에어로졸 같은 입자성 물질의 생산량을 크게 변화시키면 전 세계적 규모의 교란(攪亂)을 야기할 수 있다. 그러나 가이아가 이러한 인간의 교란적 행위의 결과를 중화하고 보충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존재라는 것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인류는 궁극적으로 좀 더 사려 깊은 경제적 공업 기술을 발전시키게 될 것이며, 가이아의 나머지 부분들과 조화를 이루면서 살아나가는 방법을 체득하게 될 것이다.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반동적으로 ‘자연으로 돌아가자’고 외치기보다는 현재의 공업 기술을 점진적으로 변화시키고 개량시켜서 목표에 도달하는 것이 훨씬 쉽다.

인간의 활동 때문에 우리 지구를 위험에 처하게 하는 주된 요인은 도시화와 공업화뿐만이 아니다. 오히려 인류가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할 중요한 지역은 열대 지방의 삼림과 대륙 연안의 바다이다. 인류는 대륙붕과 열대 지역에서 생산성을 감소시키고, 그 곳의 생태계 유지에 필수적인 몇몇 생물 종들을 멸종시킴으로써, 가이아의 활력에 커다란 손상을 주고 있다. 또, 인류는 잠재적으로 가이아에 크게 유해한 독성 화학 물질들을 막대하게 바다와 공기 속으로 쏟아 부어서 가이아를 분노케 하고 있다.

우리 인류가 생존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가이아의 범주 내에서 인간이 차지하고 있는 지역적 경계가 어디까지인지 명백히 이해하고, 여기에 대한 충분한 지식도 축적하고 있어야 한다. 또한, 우리들은 범지구적으로 가이아의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꼭 필요한 핵심 지역들을 적절한 수준에서 보전해야 하며, 인류가 이곳을 주도면밀하게 보살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다행스럽게도 가이아의 몸체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들은 육지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강의 하구, 늪지와 습지, 대륙붕의 진흙 바닥 속에 있다. 탄소 화합물이 묻히면서 대기 중의 산소 농도를 조절하고 또 필수 원소들을 공기 속으로 되돌려 주는 장소가 곧 이런 지역들이다. 인류가 지구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될 때까지 그리고 이들 지역의 역할에 대해 더 잘 알게 될 때까지 우리들은 인간의 손길이 미치는 범위를 스스로 한정해 더 이상 이들 지역이 파괴되지 못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3. 노자의 『노자』

중국 사상 양대 뿌리는 유가(儒家)사상과 도가(道家)사상이다. 유가 사상이 중국 북방(황하 유역)의 기질을 대표하는 사상이라면 도가 사상은 중국 남방(양자강 유역)의 기질을 대표하는 사상이다. 북방은 날씨가 춥고 자연 조건이 거칠고 메말랐기 때문에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자기 주위의 조건들과 투쟁을 계속해야만 했다. 그러나 남방은 날씨가 온화해 생물이 잘 자라고 물산이 풍부해 사람들은 아무런 걱정 없이 삶을 영위해 나갈 수 있었다. 그 때문에 북방 사람들의 성격은 억세고 투쟁적이며 현실적인 데 비해, 남방 사람들은 부드럽고 평화적이며 낭만적이다. 이런 대조적인 성격은 이 같은 대조적인 문화와 사상을 낳게 했다.

유가 사상이 현실적이라면, 도가 사상은 초현실적이다. 공자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사회를 인의예지 같은 훌륭한 덕과 올바른 예의를 지킴으로써 다스리려고 애쓴 데 비해, 노자는 현실적인 차원을 넘어선 ‘도’라는 절대적인 원리를 추구하면서, 현실 사회가 어지러운 것은 사람들이 자기중심의 판단 아래 행동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노자의 사상은 사람의 이성이 지닌 한계에 대한 각성에서 출발하고 있다.

노자는 인간 이성의 한계성에 대한 각성에서 무의 사상과 자연의 사상을 발전시켰다. 결국, 노자는 인위적이고 의식적인 모든 것을 부정했다. 사람들이 인위적이고 의식적인 모든 것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상태가 자연이며, 무위란 자연을 따르는 것으로서 노자 사상의 핵심이다. 인간들이 불완전한 이성을 바탕으로 하나의 가치를 추구하면서 현대 사회가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할 때, 인간 개개인의 한층 완전하고 차원 높은 자유를 추구하고 인류의 불행을 해소하려는 노자의 사상은 오늘날 좀 더 적극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1) 도란 무엇인가

도(道)는 그릇이 텅 비어 있는 것 같지만 그것을 써 보면 절대로 차거나 넘치치 않는다. 도는 심원해서 만물의 조종(祖宗)인 듯하다. 예리한 것은 깎아 주고 얽힌 것은 풀어 주며, 빛나는 것은 부드럽게 해 주고 먼지 같은 것들과 함께 한다. 그것은 맑고 투명하지만 존재하고 있는 듯도 하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아름답게 보이는 것을 아름다운 것이라 여기고 있지만, 그것은 추한 것일 수도 있다. 모두가 선하게 보이는 것을 선한 것이라 여기고 있지만, 그것은 선하지 않을 수도 있다.

본래 유와 무는 상대적인 뜻에서 생겨났다. 어려운 것과 쉬운 것도 상대적인 입장에서 나온 것이다. 긴 것과 짧은 것도 상대적으로 비교하는 데서 있게 되며, 높은 것과 낮은 것도 상대적인 관념에서 있게 되고, 음악과 소리도 상대적인 소리의 조화를 구별하는 것이며, 앞과 뒤도 상대저인 개념에 불가하다.

그래서 성인은 무위로써 일에 처신하며, 불언(不言)의 가르침을 행하는 것이다. 만물을 생성케 하면서도 얘기하지 않으며, 생겨나게 하고서도 그것을 소유하지 않고, 공로를 이룩하면서도 그것을 자랑하지 않는다. 스스로 공로를 자랑하지 않기 때문에 공로도 그에게서 떠나지 않는 것이다.

하늘은 영원하고 땅도 영원히 존재한다. 하늘과 땅이 영원히 존재할 수 있는 까닭은 그들 스스로 생존하려 들지 않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영원히 생존할 수 있는 것이다. 최상의 선이란 물과 같은 것이다. 물의 선함은 만물을 이롭게 해 주면서도 다투지 않고, 여러 사람들이 싫어하는 낮은 위치에 처신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거의 도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서른 개의 수레바퀴 살이 한 개의 수레바퀴 통으로 집중되어 있는데, 그 중간에 아무 것도 없음으로써 수레는 효용을 지니게 된다. 진흙을 반죽해 그릇을 만들 때도 그 중간에 아무것도 없음으로써 그릇 또한 효용을 지니는 것이다. 문과 창을 내어 집을 만들 때 그 중간에 아무것도 없음으로써 집은 효용을 지니게 된다. 그러므로 유(有)가 유용하게 되는 것은 무(無)의 효용이 있기 때문이다.

만물은 아울러 생겨나고 있지만, 그 모두가 그 근원으로 되돌아감을 볼 수 있다. 만물이란 제각기 번성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 근원으로 돌아가고 있다. 근원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고요함이라 말하는데, 그것은 운명을 따라 되돌아가는 것은 영원불변하는 법칙을 두고 말하는 것이며, 영원불변하는 법칙을 안다는 것은 총명함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영원불변하는 법칙을 알지 못하고 함부로 행동하면 불길할 것이다.

 (2) 자연의 이법

남에게 들리지 않는 말이야말로 자연스러운 것이다. 하루아침을 넘기지 못하고 소나기는 하루도 계속되지 못한다. 누가 이런 현상을 일어나게 하는가. 그것은 천지다. 천지조차 그런 것을 오래 가게 하지 못하거늘 하물며 사람은 어떻겠는가. 그러므로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은 도를 만나면 도에 동화되고, 덕을 만나면 덕에 동화되며, 실수를 한 사람을 만나면 실수에 동화된다.

발돋움을 하고서는 오래 서 있지 못한다. 발걸음을 크게 떼어 놓는 사람은 멀리 가지 못한다. 스스로 드러내려 하는 사람은 밝게 알려지지 않는다. 스스로 옳다고 하는 사람은 분명히 인정받지 못한다. 스스로 자랑하는 사람은 공적이 인정되지 않는다. 스스로 뽐내는 사람은 재능이 알려지지 않는다. 그런 일들은 도의 입장에서 볼 때 먹고 남은 찌꺼기같은 쓸데없는 행동이 된다. 만물이 모두 그런 것을 싫어할 것이다. 그러므로 도를 터득한 사람은 그렇게 처신하지 않는다.

어떤 물건은 혼돈스럽게 이루어져 있는데, 그것은 하늘과 땅보다도 앞서 생겨난 것이었다. 고요하고 텅 빈 듯하지만 홀로 서서 변하지 않고, 두루 행해지면서도 위태롭지 않으니, 천하의 모체라 할 만한 것이다. 그것은 도나 대(大)라고 이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대가 대인 것은 그것이 끊임없이 가고 있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가는 것은 멀리 극도에까지 이른다. 멀리 극도에 다다르면 제자리로 되돌아간다. 그러므로 도란 위대한 것이다. 하늘도 위대하고 땅도 위대하며 왕 역시 위대하다. 사람은 땅을 법도로 삼고, 땅은 하늘을 법도로 삼고, 하늘은 도를 법도로 삼으며, 도는 자연을 법도로 삼고 있다.

도란 언제나 이름도 없고 자연 그대로 소박하며 비록 작게 보이지만 천하에 그것을 지배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임금이 만약 그것을 잘 지킨다면 만물은 왕을 스스로 존경하며 복종하게 될 것이다. 하늘과 땅이 서로 화합해 단 이슬을 내리게 할 것이고, 백성들은 아무런 명령을 받지 않아도 스스로 고루 다스려지게 될 것이다.

처음 인위적으로 제어하기 시작하자 이름이 있게 되었다. 이름이 있게 된 이상 또한 멈춰야 할 곳을 알아야만 한다. 멈출 곳을 알면 위태롭지 않다. 천하에서 도의 위치를 비유로 들면 마치 골짜기 냇물이 강과 합쳐져 바다로 흘러드는 것과 같다.

 (3) 도의 작용

위대한 도는 장마에 내리는 물처럼 어디에나 퍼져 있다. 만물은 이것에 의지해 생성되고 있지만 그것을 내세워 이야기하지 않으며, 공을 이룩하고서도 자기 이름을 내세우지 않는다. 도는 만물을 입혀 주고 길러 주면서도 그 주인 노릇은 하지 않는다. 언제나 도는 욕망이 없어 작은 존재라 보기 일쑤다. 그러나 만물이 귀의하는 데도 그 주인 노릇을 하지 않으니 위대한 존재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끝내 스스로 크다고 내세우지 않음으로써 그의 위대함을 완성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도는 언제나 무위하지만 하지 않는 일이란 없다. 임금들이 만약 이것을 지킬 줄 안다면 만물은 스스로 생성되고 변화될 것이다. 생성, 변화 하는데서 작위를 가하려는 일이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아무런 이름도 없는 통나무 같은 도로써 눌러야만 한다. 아무런 이름도 없는 통나무는 아무런 욕망도 없는 것을 말한다. 욕망이 없음으로써 고요해진다면 온 천하가 스스로 안정될 것이다.

돌아간다는 것은 도의 움직임이며, 약하다는 것은 도의 작용이다. 천하의 만물은 유에서 생성되고 있지만, 유는 무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도란 만물의 모든 것을 돌보아 주고 또 생성케 해 주는 것이다.

위대한 성취는 결함이 있는듯하지만 그 효용에는 결함이 없다. 크게 충만한 것은 텅빈듯하지만 역시나 그 효용은 한이 없다. 크게 곧은 것은 굽은 듯이 보이고, 크게 교묘한 것은 졸렬한 듯이 보이며, 크게 말 잘하는 것은 말을 더듬는 것처럼 보인다. 몸을 심히 움직이면 추위를 이겨 낼 수 있고, 고요히 있으면 더위를 이겨 낼 수 있는 것이니, 맑고 고요함으로써 천하를 다스리는 우두머리가 된다.

도는 낳아 주고 덕은 길러 주어 만물은 형제를 지니게 되고 형세가 이룩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물은 도를 존중하고 덕을 귀중히 여겨야 한다. 도가 소중하고 덕이 귀중한 것은 누군가가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라 언제나 자연스럽게 그러한 것이다. 그러므로 도는 낳아주고 덕은 길러주며 자라게 해 주고 생성케 해 주며, 안정되게 보호해 주는 것이다. 도는 낳아 주되 소유하지 않으며, 그렇게 해 주되 공을 내세우지 않으며, 생장케 해 주되 지배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것을 현묘한 덕이라 말하는 것이다.

사람들을 다스리고 하늘을 섬기는 일은 농사를 짓듯이 하는 것이 최사의 방법이다. 오직 농사를 짓듯이 하는 것은 일찍이 자연을 따르는 것이라고 말한다. 일찍이 자연을 따른 다는 것은 거듭 덕을 쌓는 것을 뜻한다. 거듭 덕을 쌓게 되면 곧 극복하지 못하는 것이 없게 된다. 급복하지 못하는 것이 없게 되면 그 능력의 한계를 곧 알 수가 없게 된다. 그 능력의 한계를 알 수가 없게 되면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게 될 것이다. 나라를 잘 다스리는 모체를 지니고 있다면 영원히 오래도록 생존하게 될 것이다. 이것을 가는 뿌리를 깊이 박고 굵은 뿌리를 굳게 박은 것이라 말하는 것이며, 이것이 장생불사(長生不死)하는 도이다.

사람이 살아 있을 때에는 부드럽고 약하지만, 죽고 나서는 굳고 강해진다. 만물이나 초목들도 살아 있을 때는 부드럽고 약하지만 죽고 나서는 말라서 뻣뻣해진다. 그러므로 굳고 강한 것은 죽음의 무리이고, 부드럽고 약한 것은 삶의 무리다. 그래서 군대가 강하면 승리하지 못하고, 나무가 강하면 꺾이는 것이다. 강대한 것이 아래쪽에 위치하고, 부드럽고 약한 것이 위쪽에 위치하는 원리다. 천하에는 물보다 부드럽고 약한 것이 없다. 그러나 굳고 강한 것을 공격하는 데 물보다 더 나은 것이 없고, 그 무엇으로도 물을 대신할 만한 것은 없다.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고 부드러운 것이 억센 것을 이긴다.

하늘의 도는 마치 활줄을 당긴 활과도 같다. 높은 것은 억누르고 낮은 것은 들어올린다. 남음이 있는 것은 덜어 주고 부족한 것은 보태 준다. 하늘의 도는 남음이 있는 것은 덜어 주고 부족한 것은 보태 주지만, 사람의 도는 그렇지 않다. 부족한 것을 더 덜어 내 남음이 있는 편에 갖다 바친다. 누가 남음이 있어 그것으로 천하를 받들 수 있겠는가. 오직 도가 있는 사람만이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래서 성인은 일을 하지만 한 일을 내세우지 않으며, 공을 이루지만 그 공로를 누리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현명함을 드러내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4.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위하여

러브록의 가이아 가설은 인류가 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볼 수 있게 되면서 본격적인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외계에서 바라보는 지구는 전체가 하나의 조화로운 시스템이다. 만약 우리들이 가이아의 존재를 인정한다면 이 세상에서 인간의 위치는 새로운 관점으로 제시될 것이다. 예컨대, 인간이라는 존재가 현대 과학 기술로 무장하더라도 가이아 속에서는 단순한 한 부분에 지나지 않게 된다.

가이아 가설은 현대 생태학의 주장과는 조금 다른 관점을 지니고 있다. 극단적인 생태학자들은 현대 과학 기술을 해체하고 파괴시킬 때 인류의 생존이 가능하다고 보고 있지만, 가이아 가설은 그렇게 하면 오히려 파멸의 길에 가까워질 것이ㅏ고 주장한다. 이처럼 가장 중요한 가이아의 속성은 모든 지상의 생물들이 적합하게 살 수 있도록 주변 환경의 조건을 끊임없이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가이아의 치명적인 부분만 손상 시키지 않는다면 가이아는 영속될 것이다. 물론, 그만큼 인류에게 주어진 책임도 크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노자의 도가 사상은 가이아 가설이나 생태학과는 무관한 것처럼 보인다. 도가 사상은 생태계 파괴라는 단어조차 없었던 고대 중국에서 주창된 사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인간의 인위적인 질서와 도덕 대신 자연에 순응하고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가이아 가설과 일맥상통(一脈相通)한다. 가이아 가설이 인간의 범위를 벗어나 범우주적인 차원에서 생명체 현상을 관찰한 것처럼, 도가 사상도 ‘도’라는 초월적이고 우주적인 개념으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설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에 생태주의적 관점이 널리 퍼지고 도가 사상과 생태적 사유 사이의 관계가 새삼 주목받고 있다. 이를 보면, 가이아 가설처럼 인류의 사상 속에도 자기 조절적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어서 인류가 바람직하지 않은 방향으로 가는 것을 막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러브록이 주장한 것처럼 가이아가 아무리 유능한 조절계라고 할지라도 인간이 가이아의 치명적인 부분을 파괴하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가 나타날 것이다. 그만큼 인류가 지구의 미래에 대해 맡고 있는 역할이 크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인류의 미래는 지금 우리의 손에 달려 있다.

생각해 볼 문제

1. 러브록의 가이아 가설은 어떤 점에서 보면 생태주의자들과는 그 주장과 시각을 달리하고 있다. 오늘날 생태계의 가장 큰 위험으로 손꼽히고 있는 오존층 파괴를 예로 들어 그 차이점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2. 노자의 도가 사상이 어떤 점에서 현대의 생태주의 관점과 연결될 수 있는지 생각해 보자.
3.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개발의 논리와 생태주의 사이에 갈등이 빚어지는 경우가 자주 있다. 핵폐기물 처리장 건설을 둘러싸고 지역 주민과 정부의 입장이 충돌했을 경우가 한 예이다. 이런 갈등을 극복하고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지속 가능한 발전을 이룩하기 위해 어떤 대안을 마련할 수 있을지 가이아 가설과 도가 사상을 참고로 해서 생각해 보자.

 

 

 

[자료출처-대성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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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가의 『북학의』

북학의’의 핵심 내용

박제가는 4차례 중국을 다녀오는 등 중국을 배우고자 했으니, 그 대표적인 저술이 1차 중국 기행 후 1778년에 저술한 ‘북학의(北學議)’이다. ‘북학의’는 내편과 외편으로 되어 있는데, 내편에는 수레, 배, 성, 벽돌, 도로, 상업, 종이 등 39항목이 있고, 외편에는 밭, 거름, 과거론(科擧論), 북학변(北學辯), 재부론 등 16항목이 있다. ‘북학’이란 ‘맹자’에 나오는 말이며, 중국의 풍속 가운데 조선에 통용할 만하고 편리할 만한 사항들을 기록하고 아울러 그것을 실행함으로써 얻게 되는 이득과 그렇게 하지 않음으로써 발생할 폐해를 첨부한다고 서문에 밝혔다,

1. 실사구시의 정신

여러 항목 가운데 특히 상세하게 서술된 것은 수레와 벽돌 부분이다. 그 중 ‘수레(車)’ 항목을 보면, 서문에서 밝힌 바와 같이, 우선 중국 수레의 제작 방식과 종류들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사람이 타는 태평차(太平車), 짐수레인 대차(大車), 소상인들이 이용하는 독륜차에 대해 설명하였고, 그 수레들이 분주하게 다니는 북경의 거리를 묘사하였다. 그리고는 우리나라의 지세가 험해서 수레가 적당하지 않다는 의견을 반박하면서, 다만 우리 수레는 차체가 무거워 실용성이 떨어진다고 했다. 그러므로 중국의 수레 제작법을 배워야 하는데 사신 행사 때 연구하면 좋을 것이라 했다. 수레를 이용하면 각 지역의 생산품을 유통할 수 있어 생활이 풍족해질 것이요, 사신 행차 등 원거리 이동 시에 걸어서 따라가는 이들의 고통을없앨 수 있을 것이요, 말에 짐을 실어 옮기는 것보다 몇 배의 효율을 걷을 것이라 했다. 그리고는 다시 당시 사용하던 초헌이나 쌍교(雙轎)가 불편하고 위태로우며 인부들의 고통이 크다는 점을 들어 비판하여 중국을 배워야 한다는 의견의 타당성을 부각시켰다.

이런 상세한 내용은 본인이 직접 관찰한 것이기도 하나, 신분을 가리지 않고 상대방에게 묻고 들은 결과이기도 하다. ‘소(牛)’ 항목을 보면, 심지어 길 위에서 백정에게 물어 알았다고 하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태도는 박지원이 서문을 쓰면서 “모르면 길거리 사람에게라도 물어야 한다.”고 한 한 실사구시(實事求是) 정신의 표명이다. 박지원 역시 ‘열하일기’를 통해 이러한 태도를 표명하였는데, 벽돌이라던가 거름 등에 관한 내용은 공통으로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2. 상공업의 장려

‘북학의’에서 보이는 특색 가운데 하나는 규격에 대한 강조이다. ‘종이’ 항목을 보면, 전국의 종이 길이가 일정하지 않아 이 때문에 종이를 허비하게 되는 경우 많다고 했다. 이에 비해 중국의 종이는 길이가 서로 동일하여 우리처럼 낭비할 일이 없는데, 다른 물건의 경우도 그러하다고 했다. 특히 벽돌의 이점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규격에 대한 강조가 두드러진다. 우리의 겨우 건축을 할 때 돌이나 흙을 이용하는 것이 대부분인데, 이것은 벽돌을 사용하는 것에 비해 힘이 많이 들 뿐만 아니라 튼튼하지도 못하다고 비판한다.

벽돌이 효율적이라면 국가 차원에서 사용하지 않더라도 개인 차원에서 사용할 수 있지 않느냐고 하는데 대해서 박제가는 반대한다. 일상 용품은 반드시 서로 유통하여서 사용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벽돌을 굽는 가마도 자신이 만들고, 운반하는 수레도 자신이 만들고 하는 등 모든 일을 자신이 한다면 그 이로움이 없게 된다는 것이다.

유통은 상업, 경제와 관련되지 않을 수 없다. ‘장사’ 항목을 보면 중국인은 가난하면 장사를 하는데 이는 진실로 현명한 일이라고 평했다. 중국은 선비들도 직접 책방에 들르고 재상도 직접 골동품을 사기도 하는데, 이는 청나라만의 풍습이 아니라 명나라 때부터 그래 왔다고 설명한다. 그에 비해 우리는 헛된 예절을 숭상하고 꺼리는 일이 많아 차라리 빌어먹을지언정 농사짓지는 않는데 그렇기에 부득불 권세가에 빌붙어 청탁하는 습성이 생기게 되니, 이는 장사하는 것보다 못하다고 비판한다. 허례허식을 배격하고 실제를 중시하는 이런 내용은 특히 ‘시정’항목에 두드러진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중국 시장이 성대한 것을 보면, 오로지 이끗만 다툰다고 비판하는데 이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이라 했다. 상업은 사농공상(士農工商) 가운데 하나로서 1/4의 비율을 차지해야 하는데, 만약 사람들이 먹고 입고 한 나머지를 유통하지 않고 그대로 둔다면 이는 무용지물이 될 것이라 했다. 이런 내용은 1798년 정조가 농서(農書)를 구하자 ‘북학의’를 28항목으로 축약하고 다듬어 올린 ‘진소본 북학의’에 말리(末利)라는 항목으로 기록되기도 했는데, 상업을 중시한 북학파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대목이다.

‘시정’ 항목의 계속되는 내용은 경제학적 사고를 극명하게 보여 준다. 그는 말하길, 사용할 줄 모르기에 생산할 줄 모르고, 생산할 줄 모르기에 백성들이 갈수록 궁핍해진다고 했다. 무릇 재화(財貨)는 우물과 같으니 물을 기르면 우물이 가득 차고, 긷지 않으면 말라 버리는 것과 같다. 비단을 입지 않으면 비단 짜는 사람이 사라질 것이고, 좋은 그릇을 좋아하지 않으면 기술자들이 없어질 것이다. 이렇게 되면 나라 전체가 가난해질 것이고, 이 때문에 우리는 재물이 타국으로 흘러들어가 타국은 점점 부유해지고 우리는 점점 가난해질 것이라 했다. 이러한 언급은 경제학상의 수요와 공급의 관계를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무역론’ 항목에서는“반드시 원방의 물품을 통상(通常)한 후에야 재화가 불어날 것이며 제반 일용품이 생길 것이다.”라고 하여 무역의 이로움을 주장하기도 했다.

3. ‘북학의’에 대한 비판적 수용

‘북학의’의 서술 방식은 먼저 중국 문물을 소개한 다음 우리의 경우를 비판하고 우리가 중국 문물을 도입했을 때의 이로움을 설파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지는데, 우리의 경우를 중국과 비교해 비판하는 대목은 혹 과도하게 비쳐지기도 하며, 대국 추수주의로서 또 다른 모화주의적 태도가 아닌 게 의심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러한 비판은 거의 매항목에 걸쳐 서술되어 있는데, 예를 들어 ‘약(藥)’ 항목에서는 “우리나라의 의술은 가장 믿을 수 없으며, 북경에서 사 온 약품도 진짜인지 걱정된다. 믿을 수 없는 의원이 진짜가 아닌 약으로 처방하니 병이 낫지 않는 게 당연하다.”고 했다. ‘농잠총론(農蠶總論)’에서는 우리나라는 매사가 중국보다 못하니, 다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의식의 풍족함이 중국 백성에게 비할 수 없다고 했다.

박제가의 북학론에 대한 의구심은 당대에도 제기되었다. 외편의 ‘북학변’에 보면 그가 중국 여행담을 이야기하자 친구들이 믿지 못하고 실망한 채 돌아서는 그가 오랑캐의 편을 든다고 했다는 것과 그에 따른 안타까움이 적혀 있다. 그러나 중국 문물에 대한 소개와 그에 따른 우리 문물에 대한 비판은 정치의 근본을 이용후생(利用厚生)에 둔 애민사상(愛民思想)에서 나타난 것이요, 당시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파악한 결과로 보아야 한다. ‘농잠총론’에서 ‘서경’의 이용후생(利用厚生)을 인용하여 도구의 효용과 의식의 풍족함이 중요함을 강조한 것과, ‘북학변’에서 친구들까지 자신을 의심하는 상황에 대해 “진실로 인자(仁者)를 보면 인자하다 하고, 지자(知者)를 보면 지혜롭다고 해야 한다.”는 해명은 저자의 태도가 어떠한지 알려 준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존주론’에서 “그 사람이 오랑캐라고 해서 그 법까지 버린다면 이는 큰 잘못이다. 진실로 백성에게 이롭다면 비록 그 법이 오랑캐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성인께서 취하실 터이거늘 하물며 중국의 경우에는 말할 것도 없다.”고 하는 데서도 명확히 알 수 있다.

저자 소개

박제가(朴齊家, 1750~1805)는 1750년 서울에서 서자(庶子)로 태어났으나. 어려서부터 문장, 글씨, 그림에 뛰어났다. 1776년에 이덕무, 유득공, 이서구 등과 공동으로 엮은 시집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이 청나라 문사들에게 서문과 평을 받게 되면서 조선 후기 사가(四家)로 이름이 났다. 1801년 윤행임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는데, 그 후 말년의 행적은 알 수 없고 1805년 세상을 떠난 것으로 보인다.

생각해 볼 문제

1. 앞의 글을 토대로, ‘북학의’에 나타난 경제학 이론들을 정리해 보자
2. ‘북학의’의 서술 방식은 중국 문물을 소개한 후 우리 것을 비판하고 중국 문화를 도입했을 때의 이로움을 설파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서술 방식이 쉽게 빠질 수 있는 오류에 대해 생각해 보자.
3. 박제가의 ‘북학의’에 흐르는 근본 사상은 ‘이용후생을 바탕으로 하는 애민 사상’이다. 이러한 애민 사상의 관점에서, 박제가의 ‘북학의’와 이광수의 ‘민족 개조론’을 비교해 보자.

 

 

[자료출처:대성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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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의 『목민심서』

'목민심서‘의 핵심 내용

‘목민심서’는 정약용의 대표적인 저술로서, 그가 강진에서 귀양살이를 하는 동안에 쓴 책이다. ‘목민(牧民)’이란 백성을 기른다는 뜻이다. 따라서, 목민관이란 백성을 가장 가까이에서 다스리는 고을의 수령을 뜻한다. 또한 ‘심서(心書)’란 귀양살이를 하고 있기 때문에 목민할 마음만 있을 뿐 몸서 실행할 수 없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목민심서’는 총 12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편은 다시 6조로 세분되어 있다. 각 편의 내용은 1. 부임(赴任), 2 율기(律己), 3. 봉공(奉公), 4. 애민(愛民), 5. 이전(吏典), 6. 호전(戶典), 7. 예전(禮典), 8. 병전(兵典), 9. 형전(刑典), 10. 공전(工典), 11. 진황(陳荒), 12. 해관(解官) 등이다. 이제 각 편의 내용을 살펴보기로 하자.

1. 부임(赴任)

부임(赴任)편에는 목민관으로 발령을 받고 고을로 부임할 때 유의해야 할 6가지 사항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다. 정약용은 목민관이 여러 벼슬 중에서 가장 어렵고 책임이 무거운 직책이라고 하였다. 목민관은 임금의 뜻에 따라 백성들을 보살펴야 하는 직책인 동시에 모든 면에서 모범이 되어야 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목민관은 부임할 때부터 검소한 복장을 해야 하며, 백성들에게 폐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나라에서 주는 비용 외에는 한 푼도 백성의 돈을 받아서는 안 되며, 일을 처리 할 때는 공과 사를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 또한 아랫사람들이 자신 모르게 백성을 괴롭히는 일이 없도록 단속해야 한다.

2. 율기(律己)

율기(律己)는 ‘몸을 다스리는 원칙’ 이란 뜻으로서, 율기 편에는 목민관이 지켜야 할 생활 원칙이 담겨 있다. 목민관은 몸가짐을 절도 있게 해서 위엄을 갖추어야 한다. 위엄이란 아랫사람이나 백성들을 너그럽게 대하는 동시에 원칙을 지키는 것을 통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이다. 마음가짐은 언제나 청렴결백해야 한다. 다른 사람의 청탁을 받아서는 안 되며, 생활은 언제나 검소하게 해야 한다. 집안을 잘 다스리는 것도 목민관의 중요한 덕목이다. 지방에 부임할 때는 가족을 데리고 가지 말아야 하며, 형제나 친척이 방문했을 때는 오래 머무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이는 쓸데없는 청탁이 오가고 물자가 낭비되는 일을 막기 위해서이다. 모든 것을 절약하고 아껴서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 또한 목민관이 지켜야 할 원칙이다.

3. 봉공(奉公)

봉공(奉公)은 임금을 섬긴다는 뜻이다. 따라서 봉공 편에는 위로는 임금을 섬기고 아래로는 백성을 섬기는 방법이 적혀 있다. 목민관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임금의 뜻을 백성에게 잘 알리는 일이다. 당시에는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 교문(敎文)이나 사문(赦文)과 같은 공문서를 각 고을로 내려 보냈다. 하지만 글이 너무 어려워 일반 백성들이 그 뜻을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목민관은 이것을 쉽게 풀어 써서 백서들에게 알려 주어야 한다. 목민관은 법을 잘 지키는 한편 지방에서 내려오는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는데 힘써야 한다. 공문서는 정해진 기간 내에 완벽하게 처리해야 한다. 또한 공납과 같은 세금을 공정하게 징수해서 아전들이 부정을 저지르는 일이 없도록 철저히 단속해야 한다. 외국 선박이 표류해 들어온 경우에는 예의를 갖춰 잘 보살펴 주어야 하며, 그들에 관한 모든 것(배의 모양, 크기, 문자 등)을 빠짐없이 기록해 상부에 보고해야 한다. 이 때 그들의 좋은 점은 보고 배워야 하며 백성들에게 폐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4. 애민(愛民)

애민(愛民)편은 백성을 사랑하는 방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목민관은 노인을 공경하고 불쌍한 백성을 보살펴야 할 의무가 있다. 특히 사궁(四窮)을 구제하는 데 힘써야 한다. 사궁이란 홀아비와 과부, 고아, 늙어서 의지할 곳이 없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목민관이 합독(合獨)이라 하여 홀아비와 과부를 재혼시키는 일에 힘써야 한다고 말한 점이다. 집 안에 초상이 난 사람에게는 요역을 면제해 주고, 환자에게는 정역(征役)을 면제해 주어야 한다. 목민관은 자연 재해가 나지 않도록 항상 대비해야 하며, 재해가 생겼을 때는 백성들을 위로하고 구호하는 데 힘써야 한다.

5. 이전(吏典)

이전(吏典) 편부터 공전(工典) 편까지는 각 방의 세부 업무에 대해 설명한 부분이다. 조선 시대의 지방 행정 조직은 수령 이래 이(吏), 호(戶), 예(禮), 병(兵), 형(刑), 공(工)의 6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목민관은 6방의 업무를 총괄하는 책임자이므로, 마땅히 모든 업무를 빈틈없이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이전(吏典) 편에서는 아전을 잘 다스리기 위해서는 목민관 스스로 자기 몸을 잘 다스려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목민관은 아랫사람을 은혜로 대하고 법으로 단속해야 한다. 아무리 학문이 뛰어나더라도 아전을 단속할 줄 모르면 백성을 다시를 수 없다. 그리고 백성을 잘 다스리려면 무엇보다도 인재를 등용하여 적재적소에 배치할 줄 알아야 한다. 관리를 뽑을 때는 충성과 신의를 첫째 기준으로 삼아야 하며, 재주나 지혜는 그 다음으로 보아야 한다. 또한 관리가 한 일은 반드시 공적을 따져 상벌을 주어야 한다. 그래야만 백성들로 하여금 믿고 따르게 할 수 있다.

6. 호전(戶典)

호전(戶典)편에서는 세금을 거두는 일에 대해 말하고 있다. 소출량을 기준으로 한 세금 징수는 정확한 실태 파악이 어렵기 때문에 문제가 있었다. 정약용은 이 점을 비판하고 공정한 세금 징수를 위해 해마다 직접 조사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목민관은 원활한 조세 업무를 위해서 호적(戶籍)을 정비하고 부정 방지에 힘써야 한다. 또한 국민 경제의 근본이 농업을 장려하는 정책을 펴야 한다. 농사를 권장하는 핵심은 세금을 덜어 주고 부역을 적게 하여 토지 개척을 장려하는 것이다. 권농 정책에는 벼농사 장려뿐만 아니라 목축과 양잠의 장려, 소의 도축을 막는 일 등이 모두 포함된다.

7. 예전(禮典)

예전(禮典) 편에서는 제사와 손님 접대, 교육, 신분 제도 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목민관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는 정성을 다해 제(祭)를 지내는 일이다. 미풍양속을 해치는 미신적인 제사가 있다면, 사람들을 계몽하여 없애 버려야 한다. 또한 교육을 장려하고 과거 공부를 권장하여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 문란해진 신분 제도를 바로잡는 일도 목민관이 해야 한다.

8. 병전(兵典)

병전(兵典) 편에서는 군대를 키우고 잘 훈련하여 외적의 침입에 대비해야 한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당시에는 병역 의무자가 군대에 가는 대신 옷감을 내고 면제를 받는 제도가 있었는데, 여기에는 부정이 많았다. 목민관은 이러한 부정을 가려내어 가난한 백성들이 피해를 입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또한 병기(兵器)들을 수리하고 보충하여 늘 비상사태에 대비해야 하며, 외적의 침입이 있을 때는 목숨을 걸고 지방을 지켜야 한다.

9. 형전(刑典)

형전(刑典) 편에서는 재판과 죄인을 다스리는 방법에 대해 말하고 있다. 재판을 할 때는 사건의 전말을 모두 파악한 뒤 신중하게 판결해야 하며, 특히 옥에 가두거나 형벌을 내릴 때 잘못이 없도록 해야 한다. 또한 거짓으로 남을 고발한 사람은 엄하게 다스려야 한다. 예로부터 어진 목민관은 형벌을 약하게 했으니 지나친 형벌은 피하는 것이 좋다. 옥에 갇힌 죄수에게는 집과 식량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그러나 폭력을 일삼는 흉악한 자들은 엄하게 다스려야 한다.

10. 공전(工典)

공전(工典) 편에서는 산림과 수리 시설, 환경 미화 등에 대해 말하고 있다. 목민관은 산림을 울창하게 가꾸고 농사의 기본이 되는 수리 시설을 관리할 책임이 있다. 수리 시설의 경우, 지방 토호들이 제멋대로 저수지를 파서 자기 논에만 물을 대는 행동ㅇㄹ 막아야 한다. 관청 건물과 성(成)이 낡거나 무너졌을 때는 마땅히 수리하여야 한다. 도로를 닦고 건전한 공업을 육성하는 것 또한 목민관의 책임이다.

11. 진황(陳荒)

진황(陳荒) 편에서는 재해가 났을 때를 대비해 준비해야 할 사항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흉년이 들 때를 대비해서 평소에 곡식을 저축하고 창고 안에 있는 식량의 양을 늘 파악하고 있어야 하며, 철저한 대책을 마련해 두어야 한다. 또 흉년이 들어 위급한 때는 조정의 명령을 기다리지 말고 창고를 열어 곡식을 나누어 주어야 한다. 백성을 구제하는 데는 두 가지의 관점이 있는데, 첫째는 시기에 맞추는 것이며, 둘째는 원칙을 세우는 것이다. 이는 정확한 실태 파악을 바탕으로 구휼(救恤)에 나서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또한 목민관은 집을 잃은 백성들에게 쉴 곳을 마련해 주고, 재해에 대한 구제가 끝나면 백서들을 따뜻하게 위로해 주어야 한다.

12. 해관(解官)

해관(解官)이란 관직에서 물러난다는 뜻이다. 해관 편에서는 목민관이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날 때와 그 이후의 일에 관해 말하고 있다. 벼슬에 연연하는 것은 선비의 도리가 아니며, 떠날 때 많은 재물을 가지고 가는 것 또한 선비가 할 일이 아니다. 백성들이 목민관이 떠나가는 것을 슬퍼하고 길을 막아선다면 훌륭한 목민관이었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오랜 명으로 눕게 되면 거처를 옮겨서 공무에 지장이 없도록 해야 한다. 또 죽은 뒤에라도 백성들이 내는 돈을 받지 않도록 미리 유언으로 명령해 두어야 한다. 송덕비(頌德碑)나 선정비(善政碑)는 죽은 이후에 세워야 하는 것으로 살아 있을 때 세우는 것은 예가 아니다.
이사에서 살펴본 것처럼 ‘목민심서’는 지방 수령이 갖추어야 할 덕목과 해야 할 일을 총망라해 놓은 책이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이 책은 여전히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관리들에게는 좋은 지침서가 되고 그 밖의 사람들에게는 생활의 교훈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목민심서’가 독자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것이다.

저자 소개

정약용(1762~1836)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실학자로서 1762년에 경기도 광주군 초부면 마현에서 정재원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미용, 또는 송보라고 하였으며, 호는 다산,(茶山), 자하도인, 문암일인 등이며, 당호는 여유당이다. 1789년에 문과에 급제한 이후 동부승지, 병조참의, 곡산부사, 형조참의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정약용의 형제들은 일찍이 천주교와 관련이 있었다. 그래서 정약용은 1801년 신유박해 때 경상도 장기로 유배되었다가 그 해 황사영 백서사건이 일어나자 전라도 강진으로 옮겨져 그 곳에서 18년간 귀양살이를 했다. 정약용은 이 기간 동안 목민심서를 비롯하여 경세유표(經世遺表), 흠흠신서(欽欽新書), 아언각비(雅言覺非) 등 이른바 ‘여유당전서’를 썼다. 정약용이 남긴 저서는 모두 500여권에 이른다.

생각해 볼 문제

1. ‘목민심서’에 나타난 지방 수령이 갖추어야 할 덕목을 토대로, 오늘날 공무원들에게 요구되는 가장 큰 덕목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2. 정약용은 목민관의 지침서로서 ‘목민심서’를 저술했는데, 이 책을 쓰게 된 역사적 배경과 사상들을 생각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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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의 『성호사설』

성호사설’의 핵심 사상

‘성호사설’은 일종의 백과사전이므로 그 내용을 요약하여 보여 준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 오히려 성호가 어떠한 입장에서 ‘성호사설’을 저술했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오히려 그의 학풍과 중요 사상을 살펴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1. 성호의 학문적 기반

성호의 학문은 철저한 유교적 기반 위에서 이루어졌다. 그의 공부 과정을 보면 사서삼경을 차례로 읽고, 이어서 정자, 주자, 퇴계를 공부하였다. 성호의 학문을 실학에 초점을 맞추어 그가 주자학을 반대하였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으나, 성호는 주자를 매우 존숭하였다. 다만 요즈음의 학자들이 주자의 글을 익히지 않는 것을 수치로 여기는 풍조와 공자, 증자, 자사, 맹자와 시경, 서경에 대해서 소홀하게 생각하는 태도를 좋지 않은 풍습이라고 비판하면서, 나아가 주자의 글에 조금이라도 의심을 품으면 주자를 배반한 것이라고 규정하는 세태는 옳지 않다고 보았다. 이러한 점은 당시 주자를 무조건 맹신하던 일반 유학자들과는 다른 태도이다. 성호는 유학의 근원인 공자와 맹자의 학문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러한 점은 ‘성호사설’의 경사문에 잘 나타나 있다. 경사문은 유학의 경전과 역서에 관한 내용이다.

한편 성호는 학문을 시작한 처음부터 실제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국정의 폐단과 백성들의 고통에 대하여 그 근원을 탐구하고 대책을 생각한 것이다. 성호는 성현들의 학문도 이론적인 것에 그친 것이 아니라 실제 생활에 필요한 학문이었음을 역설하였으며, 실무에 능한 자를 관직에 등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도덕면에서 퇴계를 존숭한 것처럼, 실무면에서는 율곡과 반계를 높이 세웠다. 이와 같은 그의 실학자로서의 면모는 ‘성호사설’ 곳곳에서 볼 수 있다. 특히 그의 실사구시 정신은 몸소 농사를 짓거나 또 여러 지방을 직접 답사하여 얻은 경험을 꼼꼼히 기록한 데에서도 볼 수 있다.

성호의 학풍에 영향을 미친 또 하나의 근원은 서학이다. 성호는 당시 중국에서 들어온 서양의 문물과 과학 서적 및 천주교 관계 서적에 많은 관심을 나타냈다. 이것은 ‘성호사설’에 들어 있는 서양 관계 항목에 잘 나타나 있다. 성호의 서학에 대한 이해는 천문, 역법, 지리 분야에서 가장 자세했고, 과학 기술 분야에서는 극히 단편적일 수밖에 없었으며, 천주교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다.

그런데 성호는 서학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그가 지니고 있었던 전통적 의식의 변화를 경험한다. 첫째로 세계관의 확대와 심화이다. 전통적으로 중국과 그 주변부를 세계의 전부로만 생각해 왔는데, 서양의 지리서와 지도를 통하여 중국이 세계의 일부에 지나지 않음을 깨달은 것이다. 이와 같은 지리적 세계관의 확대는 문화 의식에서도 종래의 중국 중심의 화이관에서 탈피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른바 중화 관념의 핵심은 예악과 문물에 있다고 하여 가령 요나라나 금나라 같은 이적이라 하더라도 예악을 갖추고 정치가 제대로 행해진다면, 이는 그것을 상실한 중국보다도 낫다는 논리를 세울 수가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서양 각국의 문화와 역사에 대한 저술을 접한 성호는 종래의 중국 중심의 역사관을 탈피하고 우리 나라 역사에 관심을 가질 것을 촉구한다.

둘째는 실증적이고 합리적인 것을 중시하였다. 성호는 서양인이 제작한 세계 지도가 실제 항해를 통해 제작되어 믿을 만하다고 하고, 망원경에 의한 천체 관측의 정교함을 찬탄한다. 특히, 서양의 역법은 중국에서 미처 깨닫지 못한 세차와 같은 지극히 미세한 것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고 하여, 과학 기술이 시대의 진전에 따라 발전한다는 관념을 지니게 된다. 성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기구의 법식은 후대의 것일수록 정교하여 비록 성인의 지혜라도 미진한 바가 있으며, 뒷사람이 그것을 더하고 고쳐 나가면 시대가 내려갈수록 더욱 더 정교해지기 마련이다.” 성호는 이 밖에도 서양의 과학 서적에서 볼 수 있었던 실증적인 과학 지식을 널리 수용하고 그 합리성을 인정하고 있다. 예컨대 밀물과 썰물 현상을 달의 영향에 의한 것으로 본다든지, 서양 의학의 인체 해부가 중국 의학에 비하여 상세한 것으로 본다든지, 종래 천재지변을 도덕적으로 해석하던 것을 부정하고 천재지변이 단순한 자연 현상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본 것 등을 들 수 있다.

2. 성호의 정치사상

성호의 정치사상은 왕도 정치이다. 성호는 왕도에 대하여 “성황이 천하를 다스리는 일은 백성들로 하여금 각기 그 즐거움을 질기도록 했을 따름이다.”라고 정의하고, “맹자가 왕도를 논하는 데는 ‘보민’의 한 구절에 지나지 않는데, 이른바 보민이라는 것은 바로 백성이 좋아하는 것은 주고 모이게 하며, 싫어하는 바를 베풀지 않을 따름이요, 집에까지 가서 날마다 보태어 주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여 민생의 안정이 곧 왕도정치임을 말하고 있다. 이어서 성호는 “선왕의 도는 애초부터 모두 백성의 실정에 따르고 사리에 쫓아서 만들어져 있어서 후세에 감히 고칠 수 없는 것이니 어찌 유독 정치만이 그렇지 않겠는가.”라 하여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자신이 기본적으로 유학자임을 표명하고 있다.

그러나 성호의 왕도 정치이념이 단순한 복고주의는 아니다. 성호는 “법이 오래 되면 폐단이 생기고 폐단에는 반드시 변혁이 따르게 마련인 것은 통상적인 이치이다.”라고 하여 자신이 복고주의자가 아님을 밝히고 있다. 나아가 그는 적극적으로 변혁론을 개진한다. “정치가 쇠하게 된 후에 변통의 설이 일어나게 되는 것은 부득이한 것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정치를 말함에는 그 폐단을 개혁하고 좋은 점을 따르자고 주장하지 않은 것이 없어 편안히 앉아서 궁색해지는 것을 기다릴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로써 정치를 논함에는 반드시 먼저 그 폐단을 밝혀서 개혁해야 하고 법을 고수만 해서는 안 된다.”

성호의 왕도 정치 이념은 그의 붕당론에 잘 나타나 있다. 먼저 그는 붕당의 근원으로 양반은 많은데 관직이 적다는 점을 들고 있다. “근세 이래로 관원의 자리는 적은데도 지원자는 많ㅇ나서 한번 임기가 그칠 때 끌어당겨 주는 길을 얻지 못하면, 딸린 권속들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가게 되어 추위에 떨고 굶주릴 일은 뻔하다. 그래서 재물을 도리어 명예나 절조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고 착취를 능사로 삼는 것이다. 그리하여 붕당의 논의가 무성하여 현명한 자와 어리석은 자를 가리지 못하고 국시라고 주장하는 쪽이 이겨서 선과 악이 뒤바뀌게 된다.”고 붕당의 폐단을 서술하고 있다.

이와 같은 붕당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한 방책으로 당시에 시행하던 탕평책에 대해, “붕당의 반대는 바로 탕평이지만 탕평을 실시하면 붕당의 폐해를 빨리 제거할 것 같기도 한데 근세에는 또 이른바 탕평당이라는 것이 있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며 중간에서 또 하나의 붕당을 세워 양편 사람을 천거하고는 혹 발언을 하면 양편을 다 그르다고 한다.”고 비판하였다. 따라서, 붕당의 근본적 대책으로 “양반도 마땅히 농사에 힘쓰는 일로 생계를 삼아야 하며, 장사하는 일이 비록 말단의 이익을 쫓는 것이나 의리를 잃지 않게 처리한다면 역시 불가할 것이 없다.”고 하여 사농합일을 주장하였다.

저자 소개

성호 이익(1681~1763)은 1681년(숙종 7년) 부친 이하진의 유배지인 평안도 운산군에서 태어났다. 성호는 형 잠이 역적으로 몰려 죽음을 당하자 과거를 포기하고 경기도 안산의 첨성리에 은거하면서 평생을 학문에만 전념하다가 1763(영조39년)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성호사설’은 백과 사전과 비슷한 성격의 책이다. 모두 30권으로 천지문 3권, 만물문 3권, 인사문 11권, 경사문 10권, 시문문 3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래, ‘사설’의 의미는 자질구레한 글이란 뜻이다. 일정한 계획에서 쓰여 진 글이 아니고 그때그때 의문나는 점이나 생각에 떠오르는 것을 기록해 두었던 것인데, 그 분량이 많아지자 항목별로 분류하여 책으로 엮은 것이다.

생각해 볼 문제

1. 성호의 학문이 어떤 점에서 근대적이라고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자.
2. 주자학과 실학의 관계가 연속적인지, 아니면 배타적인지를 생각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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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고전을 읽어야 하는가.

현재 논술고사는 제재를 고전에서 선정하는 것이 대체적인 경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는 직접적으로는 논술 문제의 제재를 너무 시사성 있는 내용에 치중한 결과, 짧은 시간 안에 요령 중심으로 논술고사를 준비하는 좋지 못한 분위기를 쇄신해 보려는 의도에서 발전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논술고사가 시종 유지해 온 주제가 고전적 혹은 다른 말로 보편적 가치를 지닌 주제였다는 점을 상기해 보면 고전 읽기에 대한 관심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우선, 고전이란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보자. 고전이란 수많은 사람들이 인정하는, 인류 공동의 정신적 자산이 되는 저작물이라고 할 수 있다. 고전은 시간적 · 공간적 제한을 뛰어넘는 보편적 가치를 담고 있다. 고전은 남다른 체험의 정제와 깊은 사념의 결실을 통해 태어난다. 이러한 고전은 고전이 쓰인 당대에만 머물지 않고 시대를 뛰어넘어 문제를 제기하며, 독자가 처한 현실의 문제에 대해서도 나름의 시각을 제시한다. 구체적으로 고전을 거론할 때 절대적인 선정 기준이 있을 수는 없겠지만, 인류의 지적인 역사 발전에 이바지한 고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일반적인 동의가 가능할 것이다.

현행 논술고사에서 지칭되는 고전의 범위도 위에서 살펴본 바와 다르지 않다. 흔히 논술고사에서 다루는 고전의 범위를 한국을 포함한 동서고금의 명저라고 규정하는데, 이 말에서 나타나듯이 옛 명저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명저도 고전의 범위에 포함될 수 있다.

이러한 고전 읽기의 중요성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고전은 시공을 초월한 인류 문화의 보편적 가치를 구현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고전은 역사적 가치와 현대적 의의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둘째, 고전은 인간 경험의 다양한 폭과 깊이를 반영하고 있다. 우리는 고전을 통해 동서양의 다양하게 넘나들면서 선인들의 다양한 경험과 지혜를 간접적으로 얻을 수 있다. 셋째, 창조적 사유 체계 형성에 도움을 준다. 창조적 상상력은 인간만이 지니고 있는 능력으로 모든 위대한 사상과 문학의 근본이다. 청소년기는 스스로 삶과 학문을 개척해 나가기 위한 기초를 닦는 단계에 있으므로, 특히 창조적 과업을 위한 사고 과정을 제공하는 고전은 매우 유익하다. 넷째, 고전과의 만남은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 우리가 지녀 왔던 선험적 전제에 물음을 던져서 우리가 빠져 있던 오류를 스스로 교정하고, 극에서 극에 이르는 다양한 인간 우형을 제시하여 이들이 보여 주는 사고와 행위 등을 적극적으로 체험할 수 있게 한다. 다섯째, 지적 성장을 위한 자극이 된다. 고전 내용이 하나의 범례 또는 암시를 제공함으로써 이를 통해 깨달음의 계기를 마련한다면, 이것 자체가 대단히 중요한 교육적 효과라고 말할 수 있다. 여섯째, 인간이 주어진 조건에서 존재의 본질을 탐색하고 구현하려는 체계적인 경험을 제공해 준다. 즉, 과학적 사고의 폭과 깊이를 체득하고 폭넓은 사물 이해의 방식을 얻도록 한다.

엘리엇은 고전 읽기를 두고 두 가지 효용성, 곧 바람직한 교양적 가치와 성숙한 인격의 수용을 제기한 바 있다. 고전은 그 자체가 이미 교양의 가치요, 인격의 가치이다. 여기서 교양이란 인간이 문화와 문명을 이해하면서, 지적으로나 감정적으로 또 윤리적으로 인간성을 성숙시켜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한 인간이 고전을 읽음으로써 지적으로 계몽되고 윤리적으로 건전해지고, 영혼으로는 독실하고 경건해지는 것을 우리는 교양이라고 부른다. 그것이 인간 성숙의 종국적 지표이며, 인문 교육의 지표이기도 하다.

이러한 고전을 읽는 방법으로는 자신의 시간이나 책의 종류에 따라 적당한 방법을 취하면 되는데, 기술적인 몇 가지 원칙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우선 전체적인 모습을 조망하고 세부적인 사항으로 들어간다. 고전이 다루고 있는 학문적 범위는 인간이 사유할 수 있는 모든 범위에 해당한다. 이를 크게 인문과학, 사회과학, 자연 과학 및 문화 예술로 나눌 수 있다. 각각의 영역에는 각 시대를 대표할 만한 근본 물음이 존재한다. 이를 중심으로 각 고전이 지적 역사에서 차지하는 의미를 고려하며 익어 가야 한다. 한 권의 책 안에서도 머리말, 서문, 차례, 후기 등 그 고전의 전체적인 핵심을 파악하고 읽어 나가야 한다. 둘째, 책의 내용과 종류에 따라 독서 방법을 달리해야 한다. 학교에서 공부하는 교과목도 각기 그것을 공부하는 방법이 다르다. 직관을 이용해서 익혀야 하는 과목이 있는가 하면, 오차가 없는 계산을 요구하는 과목도 있다. 마찬가지로 각 고전을 어떤 태도와 방법으로 대해야 하는지 각 고전이 지닌 내적 논리에 충실하게 결정해야 한다. 셋째, 글의 양면성, 즉 논리와 정서를 함께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다. 정서적이기만 한 글이 있고 논리적이기만 한 글이 있는 것이 아니다. 논리를 중심으로 쓰인 학술서라도 작자의 진리에 대한 열정이나 양심의 고뇌를 발견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정서적인 감동을 얻고 세계에 대한 넓은 안목과 치열한 인생관을 받아들일 수 있다. 넷째, 객관적 사실과 저자의 주관적 판단을 구분하면서 읽는 것이 좋다. 또한 사실과 허구를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편협하게 몰입하는 자세도 경계해야겠다. 다섯째, 독서 후에는 반드시 핵심적인 내용과 그에 대한 자기의 생각들을 메모해 두는 습관이 필요하다. 사람의 기억에는 한계가 있다. 고전 독서의 경험도 예외는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고전을 통해 정신에 씨앗을 뿌린 웅대하고 진실 된 안목과 자세조차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실제 글쓰기에 활용할 만한 체계적인 독서 활동과 그에 따른 체계적인 지식을 원한다면 핵심 내용을 메모하는 습관은 필수적이라 하겠다.

이와 같은 기술적인 원칙은 저자와 대등한 상대자로서 대화를 나누려는 적극적인 자세를 지녔을 때, 비로서 그 힘을 발휘하게 된다. 비범한 노력 끝에 만들고 닦은 거울에 자기 자신을 비춰 보며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사람에게 고전은 스승이 되고 벗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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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25
정시원서
접수기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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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수:서울(나)
단국(나,다)
단국(천/나,다)
국민(가,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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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수:
그외 모든 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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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술:
이화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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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접:성균관(가)
삼육(가,~5)
인성:성균관(가)
이화여(가)
경기(가)
영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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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술:
가톨릭(가)
면접:
가톨릭(가)
서울신학(가)
대전(가)
인성:대전(가)
서울신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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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접:
이화여(가)
한세(가)
천안(가,~7)
협성(가)
공주(가)
인성:충북(가)
최종:건국(가)
인하(가)
관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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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술:경희(가)
연세(가)
한양(가)
면접:연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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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술:
성균관(가)
면접:호서(가)
장로회신학(가)
최종:
동국(경/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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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술:고려(가)
면접:고려(가)
성결(가)
강원(가)
한라(가)
나사렛(가)
인성:
성결(가)
최종:
광운(가)
한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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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술:
숙명여(가,~12)
면접:극동(가),
서울시립(나),
숙명여(가,~12), 한신(가,~12)
인성:청주(가),
한국교원(가)
최종:동국(가),
영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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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접:
성공회(가)
한국교원(가)
한남(가)
인성:한남(가)
최종:
서울신학(가)
홍익(조/가)
홍익(가)
경기(가)
한북(가)
경기(서/가)
세명(나,다)
건국(충/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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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술:
동국(나)
서강(나)
안양(나)
면접:동국(나)
한국외국어(나)
안양(나)
인성:인하(나)
성신여(나)
최종:충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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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술:
중앙(나,~15)
홍익(조/나)
면접:
홍익(조/나)
최종:한양(가)
한양(안/가)
한국항공(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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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술:서울(나)
한국외국어(나)
면접:
용인(나,~19)
최종:
가톨릭(가)
숭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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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접:
서울(나,~21)
감리교신학(나)
성공회(나,~18)
한영신학(나)
명지(용/나,~18)
장로회신학(나)
총신(나,~19)
천안(나,~18)
논술:총신(나)
감리교신학(나)
인성:관동(나)
서울(나,~18)
최종: 성결(가)
청주(가,나,다)
18
최종:
강원(가)
한라(가)
극동(나)
한서(다)
중앙(안/가)
19
면접:단국(나)
최종:삼육(가)
건양(가,나)
20
면접:강원(나)
인성:상명(나)
최종:
이화여(가)
동덕여(나)
상지(가)
한성(가)
한신(가)
고려(가)
국민(가)
장로회신학(가)
고려(서창/가)
21
최종:
덕성여(나,다)
성신여(가,나)
추계예술(나)
22
면접:국민(나)
23
최종:호서(가)
건국(나,다)
건국(충/다)
단국(나,다)
단국(천/나,다)
동국(나)
인하(나)
홍익(나)
경기(나)
경기(서/나)
한국항공(다)
홍익(조/나)
24
논술:건국(다)
면접:건국(다)
삼육(다,~25)
추계예술(다)
중부(다)
한서(다,~26)
건국(충/다)
동국(경/다)
인성:건국(다)
최종:아주(다)
한양(나,다)
한양(안/나,다)
나사렛(가)
고려(서창/다)
25
면접:한라(다)
인성:영동(다)
최종:성균관(가)
한영신학(나)
상지(다)
서원(나,다)
26
최종:서강(나)
한국외대(나,다)
한국외대(용/나,다)
홍익(다)
협성(가)
한세(가,나)
강원(나)
관동(다)
홍익(조/다)
27
최종:
연세(가,나)
서울시립(가,나)
성공회(가,나)
연세(원/가,나)
장로회신학(나)
중앙(나)
강남(나)
경동(나,다)
세종(나)
한림(다)
건양(다)
충북(가,나)
한국교원(가)
호서(다)
중앙(안/나)
28
최종:
배재(1월말쯤)
29,5
최종:
덕성여(다)
경원(가,다)
평택(다)
공주(가)
중부(가,다)
30 31
최종:
인천(가,다)
안양(나,다)
대전(가,나,다)
한남(가,나)
2월 1일
최종:
국민(나,다),
용인(나),
감리교신학(나),
극동(가,나,다),
순천향(다)
2
최종:
명지(나,다)
경희(가,나,다)
경희(수/가,나,다)
명지(용/나,다)
총신(나)
한라(다)
상명(나)
숭실(다)
목원(가,나,다)
동국(경/다)
상명(천/나)
광운(다)
3
최종:
추계예술(다)
가톨릭(다)
서울(나)
삼육(다)
인하(다)
숙명여(가,나,다)
영동(다)
충남(나)
천안(가,나)
한서(다)
4
최종:건국(다)
동덕여(다)
서울여(나,다)
한성(다)
강남(다)
건국(충/다)
수원(나,다)
5 6
등록기간
(6-7)
         

 

 

[자료제공: 따뜻한 세상을 위하여 … 유니드림]

출처 : 교육혁명수능연구소
글쓴이 : 교육도우미 원글보기
메모 :
23일 2006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끝나면 수험생들은 대학입시를 향한 `8부 능선"을 넘어서게 된다.

그러나 대학별로 실시되는 논술과 면접고사에 철저히 대비해야만 `합격"이라는 열매를 따 낼 수 있으므로 수험생들은 긴장을 늦춰서는 안된다.

학생부와 수능이 배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수능이 쉽게 출제돼 점수의 `인플레이션"이 생겨 변별력을 잃게 되면 논술과 면접이 당락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2006학년도 수시 2학기와 정시 전형에서 논술과 면접을 실시하는 각 대학의 출제방향과 대비요령 등을 짚어본다.(가나다 순)
◇ 건국대 = 정시모집 "다"군에서 서울캠퍼스 인문계열을 대상으로 논술(3% 반영)을 실시하며 서울캠퍼스 수의예과와 사범대 일어교육과, 수학교육과, 교육공학과, 충주캠퍼스 유아교육과는 면접만 실시한다.

논술은 지문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기술하는 형식으로 120분간 1천101~1천200자 분량의 글을 완성해야 한다.

면접은 면접관 3명이 10∼15분간 수험생 1명에 대해 실시하며 반영비율은 5~10%다.

한성일 건국대 입학처장은 "평소 독서 능력을 지속적으로 배양하고 논리적인 글쓰기를 계속한 학생은 좋은 점수를 받도록 출제할 방침"이라며 "수험생은 제시문을 분석해 자신의 의견을 체계적으로 서술하는 학습이 필요하다"고 주문했다.

◇ 경희대(서울) = 인문계는 수능(67%)과 학생부(30%), 논술(3%)을 반영하며 자연계열은 논술 없이 수능(70%)과 학생부(30%)로 선발한다.

학생부와 수능 반영 영역 점수만 반영하기 때문에 당락의 계산도 손쉬워질 수 있으나 인문계 지원 수험생은 3%를 반영하는 논술이 중요한 변수가 될 전망이다.

수능에서 수리는 `가" 또는 `나"형을 택일하며 탐구영역은 상위 3과목을 반영할 예정이고 학생부는 국어, 영어 및 사회교과군(인문계)과 수학, 과학, 영어 교과군(자연계)을 각각 반영한다.

◇ 고려대= 기본적인 틀은 지난해와 같다. 수시 2학기 응시자의 경우 언어와 수리논술을 치러야 한다. 인문계는 언어 45점, 수리 25점이, 자연계는 언어 25점, 수리 45점이 각각 배점돼 있다. 나머지 30점은 학생부 25%와 서류평가 5%다.

정시 응시자는 인문계는 학생부가 40%, 수능이 50%, 논술이 10%의 비중을, 자연계는 학생부가 44.4%, 수능이 55.6%의 비중을 가진다.

학생부는 평어로 평가하는데 `우" 이상이면 만점을 받으므로 결국 인문계는 수능과 논술 성적이, 자연계는 수능 성적이 당락을 좌우하게 된다. 면접은 치르지 않는다.

김인묵 고려대 입학관리처장은 "수시 2학기에 출제되는 논술은 올해 수시 1학기에 출제된 유형과 비슷하고 정시 논술은 작년 정시와 비슷하게 출제되므로 각각 기출 문제 위주로 논술 유형을 파악해 준비하면 된다"고 말했다.

◇ 동국대 = 인문계열(영화영상전공 포함)을 대상으로 논술을, 사범대학ㆍ체육교육과ㆍ문예창작과를 대상으로 면접을 실시한다.

반영비율은 인문계열 논술고사와 문예창작과 면접고사는 전체 성적의 5%, 사범대학과 체육교육과 응시생이 치를 면접고사는 3%를 차지하게 된다.

논술은 국어로 제시된 지문에 대해 500∼600자로 기술하는 문제와 100∼300자 분량의 단답형 문제 3∼4개가 출제될 전망이다.

동국대 관계자는 "정시 논술도 수시2학기와 비슷한 유형이 출제될 것이므로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된 수시2학기 기출문제를 참고하면 될 것"이라고 말했다.

◇ 숙명여대 = 인문ㆍ자연계를 대상으로 논술고사를, 체육학과에서 구술고사를 보며 인문계열 중 교육학과는 논술과 구술을 모두 본다.

논술고사는 전체 성적의 3%로 반영되고 체육학과 구술은 5%를 차지하며 교육학과는 논술 3%, 구술 2%가 반영된다.

인문ㆍ자연계열 공통문항은 1천자(±100허용)분량으로 이해력과 사고력, 표현능력을 평가하고 각 계열별 1문항씩 출제되는 문제는 500자(±50허용) 범위로 응용력과 창의력을 평가한다.

숙명여대 관계자는 "정시 논술도 교육부 가이드라인을 따른 수시 2학기 논술의 출제 경향과 비슷할 것"이라며 "긍정적이고 논리적 사고를 하고 있는지, 문제가 요구한 사항을 제대로 따르고 있는지를 평가할 것"이라고 밝혔다.

◇ 서강대 = 모집단위별로 모집인원의 20%를 수능만으로 우선 선발하며 인문계는 언어.외국어.사회탐구 영역, 자연계는 수리(가).외국어.과학탐구 영역 등 3개영역을 반영한다. 1차 선발인원을 제외한 80%의 모집인원에 대해 인문계는 수능(40%), 학생부(50%), 논술(10%) 성적을 합해 선발하며 자연계는 수능(50%)과 학생부(50%) 성적을 합산해 선발한다.

◇ 서울대= 수시 2학기 지원자 중 25일 특기자전형 인문계열에 한해 논술고사를 본다. 중등 교육과정과 관련된 한국 및 동서고금의 고전을 포함한 다양한 소재의 제시문을 바탕으로 출제하며 180분간 2천500자(±300자 허용)를 써야 한다. 분량이 지나치게 부족하면 과락처리될 수 있으니 유의해야 한다. 면접은 특기자와 지역균형선발 전형 모두 12월 6일 치르게 된다.

인문계열은 지원자의 특기적성 능력, 모집단위 관련 지식과 소양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하며 자연계열은 자연과학ㆍ응용 분야에 필요한 기본 개념에 대한 이해, 논리적 사고력, 종합적 문제해결 능력, 응용 능력과 적성 등을 심층평가한다.

응시자 1인을 다수의 면접관이 평가하는 개인면접 방식이며 1인당 15분 내외가 소요된다. 특기자 전형 인문계는 논술 30%, 면접 20%를, 자연계는 면접만 50%를 반영하고 지역균형선발 전형은 면접만 10%를 반영한다.

정시는 수능과 교과성적을 50%씩 반영해 선발한 1단계 합격자 중 인문계열 지원자만을 대상으로 수시와 같은 방식으로 논술을 실시해 10%를 반영한다.

면접도 수시와 같은 방식으로 치러진다. 인문계는 2단계에 1단계 성적 80%에 면접 10%, 논술 10%를 반영하며 논술을 치지 않는 자연계열은 면접을 20% 반영한다.

이종섭 서울대 입학관리본부장은 "논술은 독서 중심으로 준비하되 시중에서 나온 책에서 아이디어를 얻기보다는 창의적인 사고 훈련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심층면접은 교과서 위주로 원리 중심으로 대비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 성균관대 = 인문계는 1단계에서 수능 성적으로 모집인원의 50%를 선발하고, 2단계에서 수능(57%)과 학생부(40%), 논술(3%)로 50%를 선발하며 자연계(건축학 제외)는 수능(60%)과 학생부(40%) 성적을 종합해 일괄 선발한다.

사범대와 건축학과는 1단계에서 수능으로 2∼3배수를 선발한 뒤 2단계에서 수능(57%)과 학생부(40%), 논술(3%)로 최종합격자를 선발한다.

◇ 중앙대 = 수시는 수능 최저학력 기준이 적용되는 의학부ㆍ약학부를 제외하고 합격자 발표까지 끝냈다. 정시는 서울캠퍼스 인문계열에만 논술을 실시해 3%를 반영하며 학생부 30%(서울캠 인문계는 27%)와 수능 70%를 반영해 선발한다.

논술은 1월 14일 120분간 치러지며 인문ㆍ사회과학 주제의 일반논술로 단일영역의 문제가 출제된다. 면접은 치르지 않는다.

◇ 연세대 = 일반전형에서는 수능 400점(인문계 410점), 학생부 400점, 논술 35점(인문.사회계만 해당)을 반영한다.

수능은 표준점수를 사용하며 학생부는 교과 320점, 출석 40점(원주캠퍼스는 80점), 비교과 40점(기본점수는 38점이며, 원주캠퍼스는 반영 안함)을 반영한다.

농어촌학생 특별전형에서 210명을 선발하며 실업계고교 출신자 특별전형은 119명을 선발한다. 특별전형은 해당 전형의 지원자격 요건과 대학수학능력시험 최저학력기준을 충족해야 지원할 수 있다.

◇ 이화여대 = 일반전형은 1단계에서 수능으로 모집인원의 50%를 선발하며 이중 자연계열은 모집인원의 20%를 수리 및 과학탐구영역 합산 성적순으로 우선 선발한다.

2단계에서는 학생부와 수능 성적을 각각 48∼50%반영하고 논술(인문계) 3∼4% 혹은 면접 1%(사범대)를 반영해 나머지 50%를 선발한다.

사회기여자 및 소녀가장, 농어촌학생, 특수교육대상자 등 3개 특별전형은 전형별로 수능 최저학력기준이 적용되며, 모집단위별로 정원 내 20명 이내, 정원외 80명 이내를 선발할 예정이다.

◇ 한국외대(서울) = 국제학부와 자유전공학부를 제외한 `나"군은 학생부(30%)와 수능(67%), 논술(3%)을 합해 선발하며 자유전공학부를 제외한 `다"군은 학생부(30%)와 수능(70%)을 합산해 선발한다.

서울캠퍼스 `나"군에서 모집하는 국제학부는 수능(70%)과 면접(30%)을 통해 선발하며 자유전공학부는 `나"군과 `다"군 모두 수능성적만으로 선발한다.

논술은 통합교과형으로서 교과영역이 혼합된 지문을 제시하고 각각의 제시문에서 요구하는 공통내용에 대한 논리적 사고를 측정한다. 분량은 1천200자 내외로 시험시간은 120분이다.

수능 제2외국어를 치른 수험생이 서울캠퍼스 `나"군의 해당 외국어학과(불어ㆍ독어ㆍ노어ㆍ스페인어ㆍ중국어ㆍ일어ㆍ아랍어)를 지원하면 제2외국어 표준점수 취득성적의 3%를 가산점으로 부여한다.

◇ 한양대 = 정시모집 "가"군에서는 수능만으로 정원의 30%를 우선 선발하고 서울캠퍼스 인문계와 자연계 공과대학 및 건축대학 지원자를 대상으로 논술을 실시한다.

논술을 치르는 수험생은 학생부 40%, 수능 55%, 논술 5%의 비율로 성적을 반영해 선발된다.

인문계는 2~3개의 국문 지문 중 하나의 지문에서 의미를 추출하고 나머지 지문에서 문제점을 파악한 뒤 이에 대한 원인을 설명하고 대처방안을 제시하는 형태의 논술을 실시하며 수험생은 2시간30분 동안 1천700자 분량의 글을 완성해야 한다.

올해 처음으로 실시되는 자연계 논술은 사고력, 판단력, 논리력, 종합적 문제 해결 능력을 수리적ㆍ과학적 관점에서 측정할 수 있는 문제로 출제되며 수험생은 2시간 동안 글자 수 제한 없이 4~7개의 문항에 답해야 한다.

최재훈 한양대 입학처장은 "학교 수업에서 배운 기본 원리를 충실하게 이해해 얼마나 논리적으로 설명하는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며 "문제풀이보다는 교과서의 기본 원리를 복습하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다.

[자료제공: 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출처 : 교육혁명수능연구소
글쓴이 : 교육도우미 원글보기
메모 :
[2006 대입수능] 주요대 정시모집 논술고사

대학

모집시기

모집계열

논술유형

출제형식

반영
비율

건국대
(서울)
정시(다) 문과대학,
정치대학,
법과대학,
상경대학,
경영대학
일반논술형 지문을 주고 지문에 대하여 논리적,비판적,
창의적 사고능력을 평가함
3%
경인교대
(인천)
(경기)
정시(나) 전 모집단위 일반논술형 교사로서 기본자질을 논술방법으로 평가,
 60~120분, 원고지 자수 900~1200자
10%
고려대
(서울)
정시 전 모집단위
(예체능 제외)
통합교과적 
논술형
고등학교 교육과정의 범위와  수준에 맞추어 
타당하고 신뢰도가 높은 문제를  출제하며,
 대학수학능력 시험과는 가능한 보완적인 
관계가 되도록 하여, 고등학교 교육의 정상화를
 유도할 수 있도록 출제한다.
인문계
10%
부산대
(부산)
정시(가) 인문·사회계,
예술문화영상학과
통합교과적
논술형
자료제시형 5%
서강대
(서울)
정시(나) 인문사회계열 통합교과형 -고등학교 교육과정을 정상적으로 이수한 
  학생이라면 누구나 관심을 가지며, 자기나름
  대로의  견해를 가질 수 있는 보편적인 주제를 
  대상으로 출제
2유형
10%
서울교대
(서울)
정시(나) 전 모집단위 통합교과적
논술형
-형식:자료제시형
-시간 및 분량:120분  1400자 내외
-수준:고등학교 전과정을  정상적으로 이수한 자가
  무리없이 답안을 작성할 수 있는 수준
-경향:창의적,논리적,비판적  사고능력과 폭넓은 
  독서를 요구하는 문제
5%
서울대
(서울)
정시(나) -인문사회계열
-음악대학 작곡과
(이론전공)
자료제시
논술형
-대학교육을 이수하기 위해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이해력,분석력,논증력,창의력,표현력 등을  
  평가하고, 중등학교 교과과정과 관련된 내용과 
  동서고금의 고전을 포함하여 다양한 소재의
   예시문을 제시함
2단계
사정반영
성균관대
(서울)
정시(가) 인문계 통합교과적
논술형
-기초수학능력,논리력,표현력,창의력  측정
-고사시간:150분
-B4용지 양면분량,글자수 제한  없음
2단계
3%
연세대
(서울)
정시(가) 인문계열,
사회계열,
상경대학,
경영대학
사회과학대학
법과대학,
신학계열
간호학과(인문)
생활과학계열
(인문)
일반논술형 고전에서  발췌한 제시문을 바탕으로 150분내에
 1,800자 내외로 작성함. 여기서 고전이라 함은 
중등교육  과정의 교과내용과 관련이 되는 한국 및
 동서고금의 중요한 텍스트를 의미함
2단계
4.1
~4.2%
이화여대
(서울)
정시(가) 인문자연
 전 모집단위
통합교과적
논술형
고교 교육과정을 정상적으로 이수하고 일정한 
기본상식을 갖춘 학생이라면 누구나 이해하고 
 답할 수 있는 수준으로 출제
2단계
4%
중앙대
(서울)
(경기)
정시(나) 인문사회,
자연과학,
공학,의학
-자료제시
  논술형
-통합교과적
   논술형
고등학교 교육과정의 내용과 수준에 맞추어 
출제하며,  전문 학문분야에 적합한 사고력과
  논리력 이해력 측정
3%
춘천교대
(강원)
정시(나) 전 모집단위 일반논술형 -교사로서의  기본 자질을 논술 방법으로 평가
-1문항 90분
-원고지 자수 1,000자 내외
10%
한국외대
(서울)
정시(나) 전 모집
(국제학부,
  자유전공학부
   제외)
일반논술형 ◎출제수준  및 경향
-현행 교육과정을 정상적으로 이수하고, 일정한 
  상식을 갖춘 학생이 자신의 주장을 합리적으로 
  서술할 수 있는 수준을 고려하여  출제
-문장 구성력, 논리력,창의적 사고력, 합리적 
  설득력을 측정하는 문제 출제
30%
한양대
(서울)
정시
(가)
인문 일반논술형   5%
◇자료제공=범성학원

 

[자료출처: 영남일보]

출처 : 교육혁명수능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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