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콘의 『민족주의』와 베네틱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
박천홍 / 문화 평론가
1. 민족주의에 대한 두 가지 시각
민족주의는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하나가 해방의 긍정적 얼굴이라면, 다른 하나는 억압의 부정적 얼굴이다. 민족 단위의 공동체에 대한 소속 의식과 개인의 이기심을 초월한 헌신, 그리고 민족적 자유와 독립을 수호하려는 열정 등이 민족주의의 긍정적 측면이라면, 다른 민족 집단에 대한 배타적 감정이나, 개인의 자유와 권리 대신 민족 집단에 대한 희생을 강요하는 것 등은 민족주의의 부정적 측면이다.
서양의 민족주의가 자유, 평등, 박애를 기치로 내건 프랑스 혁명의 산물이었다면, 우리나라를 비롯한 제 3세계의 민족주의는 제국주의적 억압에서 해방되려는 과정에서 형성된 역사적 산물이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일제 식민지하에서 터져 나오는 3.1 운동이나 민족 해방 투쟁은 민족 공동체의 독립과 자유, 주권을 회복하기 위한 저항 민주주의적 성격을 띠었다. 이는 민족의 생존과 권리는 다른 민족에 의해 강요되거나 규정될 수 없다는 적극적 정치의식의 발현(發現)이었다.
그러나 민족주의는 때때로 지배 계층에 의해 피지배 계층을 억압하거나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편리한 수단으로 악용되기도 했다. 그 예로 박정희 정권이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민중을 동원하는 논리로 곧장 내세웠던 것이 민족주의였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의 경제 개발과 근대화의 정책은 외자 의존적이고 공평한 분배를 무시한 반민족, 반민중적 정책이었다. 북한의 사회주의도 민족 해방의 논리를 내세워 민중을 억압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근대 서양에서 시작된 민족주의는 원래 인민 주권, 공화주의, 시민적 자유와 평등권을 주요 이념으로 하여 성장했다. 그러나 민족주의는 다른 민족을 침략하고 억압하기 위한 논리로 동원되면서 본래의 해방적 기능을 상실하고 서로 다른 민족들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갈등하는 시대를 열었다. 그리고 이러한 민족주의는 각 민족의 역사와 전통, 특수성을 무시한 채 식민 본국의 이해만을 대변하게 되면서 피식민지의 광범위한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현대 민족주의는 여전히 분열과 갈등의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 예로 보스니아 내전이나 소말리아 종족 분규(紛糾) 등은 주변 국가들의 첨예한 이해관계가 대립하면서 여전히 전쟁의 불씨를 남기고 있다. 특히 과거 식민지에서 독립한 나라들은 복잡한 인종적, 종교적 갈등으로 언제든 폭발할 가능성을 안고 있다. 민족주의는 여전히 세계평화와 안정을 위협하는 요인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현대 민족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민족주의의 개념이나 기원, 역사적 전개 과정 등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스 콘의 민족주의는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민족주의의 역사적 전개 과정을 폭넓은 시각으로 조명하고 있다. 이 책은 특히 민족주의의 해방적 기능이 어떻게 근대 이후 왜곡되어 왔는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그리고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는 민족주의의 문화적 측면을 날카롭게 분석함으로써 민족주의를 이해하는 새로운 지평을 열어 준다.
2. 한스 콘의 『민족주의』
체코 출신의 역사학자 한스 콘은 민족주의 연구에서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고 있는 석학(碩學)이다. 그는 민족주의가 18세기 후반에 일어난 현상이지만, 그 근원은 고대 그리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주장하면서 민족주의의 역사적 전개 과정을 살피고 있다.
한스 콘은 민족주의가 근대사를 추진한 원동력 가운데 하나였다고 강조한다. 18세기에 영국과 프랑스의 혁명을 시작으로 일어난 민족주의는 19세기에는 유럽 전반에 퍼졌고, 20세기에는 세계적인 운동이 되었다. 민족주의의 중요성은 아시아나 아프리카에서 해마다 더욱 커져가고 있다. 그러니 민족주의가 나라나 시대를 막론하고 동일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역사적 현상이기 때문에 자연히 그것이 뿌리박힌 나라의 정치 이념이나 사회 구저에 따라 그 성격이 달라지게 마련이다.
종교를 이해하지 못하고는 중세의 기독교 세계를 알 수 없었던 것처럼, 오늘날 민족주의와 그 의미를 알지 못하면 근대사나 우리 시대를 올바르게 파악할 수 없다. 종교와 마찬가지로 민족주의 성격이 다른 수많은 형태를 취할 수 있다. 민족주의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발전해 왔고, 여러 형태들은 어떻게 다른가 하는 점을 비교하지 않으면 민족주의의 역사적 기여와 위험성을 파악할 수 없다.
(1) 민족주의란 무엇인가?
한스 콘은 민족주의를 ‘개개인이 마땅히 민족 국가에 최고의 충성을 바쳐야 한다고 느끼는 하나의 심리 상태’ 라고 정의한다. 향토나 지방적 전통 또는 지역적인 기성 권위에 대한 간절한 애착은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어느 시대에나 존재해 왔다. 하지만 근대적 의미의 민족주의가 공적, 사적 생활을 규정하면서 공인된 감정이 된 것은 18세기 후반의 일이다. 각 민족은 제각기 자기의 국가를 형성해야 하며, 또 그 국가는 자민족을 전부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된 것은 극히 최근에 일어난 일에 지나지 않는다.
예전에는 개개인이 민족 국가에 충성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종족이나 씨족, 도시 국가나 봉건 영주, 왕조 국가나 종교 집단처럼 민족 국과와는 형태가 다른 사회적인 권위나 정치 단체, 이념상의 결합체 등에 충성을 바쳐 왔다. 여러 세기에 걸쳐 모든 나라의 정치적 이상은 민족 국가의 확립이 아니라,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일반적인 평화를 보전하기 위해 공통된 문명의 기반 위에 여러 민족과 인종 집단을 포함하는 세계 제국의 건설이었다.
민족은 생동하는 역사적 힘의 소산이다. 따라서 끊임없이 변동하는 것이지 결코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민족을 정의 내리기는 쉽지 않다. 비록 각 민족은 대게 같은 혈통, 언어, 영토, 정치적 실체, 관습, 전통, 종교 등과 같이 다른 민족과 구별되는 일정한 객관적인 여러 요소를 가지고 있긴 하지만 그와 같은 여러 요소 가운데 어느 하나도 민족의 실체나 정의에 본질적인 것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미국인은 하나의 국민을 형성하는 데 같은 혈통을 요구하지 않는다. 스위스인은 3~4개의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있으면서도 하나의 뚜렷한 국민을 이루고 있다. 이는 혈통이나 언어와 같은 객관적인 여러 요소도 국민을 형성하는 데 매우 중요하기는 하지만, 가장 본질적인 요소는 국민들의 적극적인 소속 의사라는 것을 말해준다.
민족주의는 바로 이 소속 의사를 가리킨다. 그것은 국민의 대다수를 하나로 묶고 있고, 나아가서는 국민 전체를 다 같이 통합하기를 요구하고 있는 하나의 심리 상태이다. 민족주의는 민족 국가야말로 이상적인 동시에 유일한 합법적인 정치 조직계이며, 민족이야말로 온갖 문화의 창조력과 경제 복지의 원천이라고 주장한다.
(2) 근대 민족주의의 특징
민족주의 시대 이전에도 민족주의와 비슷한 감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가와 같은 감정은 개인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았다. 일반 대중은 자기의 생활이 민족의 운명에 직결되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페르시아 전쟁 당시의 그리스나 백년 전쟁 당시의 프랑스에서 그랬던 것처럼 외부에서 오는 위험은 전 국민에게 결속의 일시적 감정을 일으키게 할지는 모른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말해서 프랑스 혁명 이전에 일어났던 여러 전쟁들은 뿌리 깊은 민족적 감정을 일으키지 않았다. 예를 들어, 펠로폰네소스 전쟁 당시 그리스인은 같은 그리스인과 격렬하게 싸웠다. 또한, 근대 초기의 종교 전쟁 때나 왕조 간의 전쟁 때 독일인은 독일인끼리, 이탈리아인은 이탈리아인끼리 서로 싸웠지만, 그런 싸움이 동족상잔(同族相殘)의 성격을 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심지어는 18세기에 이르러서도 유럽에서는 외국인 통치자 밑에서 군인이나 문관으로 복무하면서 봉사했는데, 이는 당시 유럽 대부분의 국가들이 아무런 민족 감정도 지니고 있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또한, 극히 최근에 이르기까지 민족은 문화생활의 원찬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역사의 대부분을 통해 인간의 심성과 성격을 형성하는 교육과 학문도 그 어떤 민족적 경계에 의해서 한정되지 않았고, 오랜 기간 동안 종교가 모든 문화적 정신적 생활의 원천이라고 생각되었다. 르네상스 시대나 그 후의 교육은 유럽 여러 곳에서 고전 문명의 공통 전통에 의거하고 있었고, 중세 유럽의 기사도적 이상이나 17, 18세기의 프랑스적 궁정 생활양식은 민족의 경계를 넘어서 전파되었다.
유럽과 아메리카에서 사람들이 스스로를 민족과 동일시하고, 문화란 민족 문화를 의미한다고 생각하면서 그들의 생사를 민족의 존망과 직결시켜 생각하게 된 것은 19세기의 일이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는 20세기에 들어서 이러한 일이 생겨났다. 이때부터 민족주의는 대중의 감정과 마음을 지배해 왔고, 동시에 자민족이나 타민족에 대한 민족적 권리 행사의 합법화에 이바지해 왔다.
(3) 고대의 민족주의와 보편주의 철학
민족주의는 근대의 산물이긴 하지만 그 근본적 특징은 오랜 옛날에 이미 나타났다. 민족주의는 서양 문명에 기원을 두고 있다. 고대 히브리인과 고대 그리스인들은 자기들이 다른 민족과는 다르다는 뚜렷한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즉, 히브리인은 ‘이방인’과는 다르고 그리스인은 ‘외국인’과는 다르다고 믿었다. 그들은 왕이나 승려가 아니라 전체 백성들이 집단의식을 소유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고대의 다른 민족들의 경우에는 오직 지배자나 제국만이 역사의 발자취를 남긴데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히브리인과 그리스인의 경우에는 그들의 문화적 연속성이 인종적, 정치적 또는 지리적 연속성보다도 강하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다. 그들은 민족 국가에 대한 이념 같은 것은 가지고 있지 못했지만, 강한 문화적 사명감은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히브리인에게서 근대적 민족주의의 세 가지 특징이 나타났다. 선민사상, 과거에 대한 추억과 미래에 대한 소망이 공통된다는 데에 대한 강조, 그리고 민족적 구원 사상이 그것이다.
그리스인은 히브리인과 마찬가지로 그들이 다른 민족들보다 문화적, 정신적으로 우월하다는 감정을 지니고 있었고, 그런 감정을 분명한 언어로 표현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리스인은 정치 공동체(도시국가, 폴리스)에 최고의 충성을 바쳐야 한다는 관념을 발전시켰다. 그리고 각 시민의 생활은 폴리스를 떠나서는 전혀 생각할 수 없었으므로, 그들의 생활은 철저하게 정치화되었다.
플라톤은 국가에서 시민에 대한 국가의 절대 우위를 주장하면서 폐쇄적이고 권위주의적인 국가를 이상화했다. 그러나 기원전 4세기 말에 이르러 세계 제국을 건설하려 했던 알렉산더는 보편주의 철학을 자극했다. 즉, 세계 제국을 건설하려 했던 알렉산더의 꿈은 그리스인과 외국인 사이에 놓은 차별을 허물고 모든 인종적 경계나 차이를 초월하는 보편적인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알렉산더의 영향을 받은 스토아 철학자들은 각 개인의 조국은 사람이 살고 있는 세계 국가이며, 각 개인은 특정 국가의 시민아 아니라 인류의 일원이라고 생각하도록 가르쳤다. 민족의 운명에 직결되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페르시아 전쟁 당시의 그리스나 백년 전쟁 당시의 프랑스에서 그랬던 것처럼 외부로부터 오는 위험은 전 국민에게 결속이라는 일시적 감정을 일으키게 할지는 모른다.
(4) 로마 제국의 보편주의와 르네상스 및 종교 개혁
스토아 철학은 기원전 2세기 동안 로마인의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 로마는 지구상의 모든 지역을 동일한 법과 문명의 기반 위에 편성하면서 하나의 제국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그리스 문명에 기원을 두면서도 그리스 국가의 배타성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로마 제국의 보편주의는, 유대교에 기원을 두면서도 이스라엘의 인종적 배타성은 가지지 않았던 보편적 기독교가 전파되는 데 비옥한 땅을 제공했다.
그 후에 로마 제국은 기독교 교회와 일체화되었다. 제국 사상과 기독교의 영향을 받은 중세의 정치적, 문화적 사상은 인류는 하나이며, 따라서 하나의 사회를 이룩해야 한다고 확신한 데 그 특징이 있다. 근대에 이르기까지 종교는 사상, 사회생활, 및 심적 태도를 통일적으로 규제함으로써 이슬람 국가와 마찬가지로 기독교 여러 나라에서도 공사(公私) 생활을 전적으로 지배했다.
르네상스와 종교 개혁이라는 2대 정신 혁명은 중세에서 근세로 이행하는 과도기를 이룬다. 중세의 저술가들은 교회에 봉사하고, 신에 영광을 돌리기 위해 문필 활동에 종사했으나, 르네상스의 인문주의자들은 제후나 도시에 고용되어 그들에게 영광을 돌리기 위해 글을 썼다. 그러나 르네상스는 민족주의를 발전시키기에는 너무나 일시적인 현사이었고, 또 너무나 협소한 지식층에 국한된 현상이었다.
종교 개혁은 문예 부흥이라는 막간극의 막을 내리게 함으로써 기독교와 종교상의 논쟁은 또다시 온갖 생활과 활동의 중심이 되었다. 16, 17세기 유럽인은 민족적 가치를 위해서가 아니라 종교상의 진리를 위해 싸웠다. 사람들은 인종이나 언어의 차이 때문이 아니라 종교상의 이단 내지 배교 때문에 추방당하기도 하고 징벌을 받기도 했다.
종교 개혁은 근대의 종교 및 언어의 다원주의를 촉진시켰다. 르네상스기에 발전된 국가와 왕권의 새로운 개념은 중앙 집권화된 왕조 국가를 창건했다. 후에 그런 왕조 국가에서 민족 국가가 생겨났다. 절대 군주는 여러 봉건적 및 지방적 중심성을 타파하고 온갖 충성심을 하나의 중심으로 통합시켰다. 경제적 상호 의존도가 점점 높아감에 따라 전 시대의 장원(莊園)이나 도시보다도 훨씬 더 광대한 지역적인 단위를 요구하게 되었다. 이렇게 좀 더 광대했던 정치 단위는 새롭게 대두하던 중산 계급의 진취적 기상과 그들의 자본주의적 기업에 필요한 무대를 제공 할 수 있었다.
(5) 근대 민족주의의 형성
근대 민족주의는 17세기 청교도 혁명과 명예혁명을 경험한 영국에서 최초로 완성된 형태에 이르게 되었다. 청교도 혁명은 후에 크롬웰의 의회 독재와 군사 독재로 타락하고 말았지만, 양심의 자유와 신민의 자유를 신이 부여한 신성한 권리로 확립시켰다. 그리고 명예혁명은 자유와 관용의 새로운 질서를 국민 생활과 국민성 속에 뿌리내리게 했다.
영국 혁명의 이념은 존 밀턴에 의해 명확하게 표현되었다. 밀턴에 따르면, 민족주의란 권위로부터 개인의 자유를 확립하는 것이고, 정부나 교회에 대해 개인의 인격을 주장하는 것이며, 예속과 미신의 멍에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영국에서 확립된 자유의 전통은 이후 미국의 민족주의를 출현시키는 데 강력한 요인이 되었다.
영국에서 분리, 독립한 미국의 혁명 정신은 미국 헌법에 요약되어 있었다. 미국 헌법은 “만인은 평등하게 창조되어 다 같이 창조주에 의해서 일정한 불가양도의 권리, 즉 생명, 자유 및 행복 추구의 권리를 부여받았다.”는 진리 위에 기초하고 있었다. 이런 진리는 프랑스 혁명 초기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은 근대 민족주의의 완성이자 새로운 출발이었다. 프랑스 혁명의 민족주의는 시민의 본분과 위엄이 정치 활동에 있으며, 그런 본분의 완수는 자기의 민족 국가와 완전히 일치하는 데 있다고 강조했다. 프랑스 혁명에서 여러 지리적, 계급적 경제는 제거되었고, 각 사회 계급과 계층은 각종의 특권과 역사적 권리를 모두 포기했다. 이렇게 해서 국민적 통일이 처음으로 이루어졌다.
프랑스 혁명의 산물인 인권 선언은 법에 의해 보호되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나라라는 새로운 질서의 기초를 닦았다. 자율적인 개인을 모든 사회의 출발점이자 동시에 목표로 확립한 인권 선언은 프랑스 명예혁명과 미국 독립 혁명의 완성이었다. 인권 선언은 정부와 집단의 압력에 대항해 개인의 존엄성과 사생활 및 행복을 보호했다.
처음에는 세계 평화를 선언했던 프랑스 혁명은 프랑스와 유럽을 종교 전쟁 이래 어느 전쟁보다도 더 오래 지속시키고 파괴적인 전쟁으로 휘몰아 넣고 말았다. 전쟁의 소란 속에서 옛 국가들은 자취를 감추고 새로운 충성심이 생겨났다. 아일랜드에서 러시아에, 스페인과 이탈리아에서 노르웨이에 걸쳐 민족 감정이 최초로 환기되었다. 프랑스 공화국이 행한 여러 전쟁은 전례가 없을 정도로 국민적 혁신과 단결에 호소했다.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한 프랑스의 승리와 지배는 프랑스의 모범에 따라 다른 근대 민족 국가를 창건하려는 욕망을 부추긴 동시에 그런 민족 국가들에게 프랑스의 이념에 관심을 돌리게 했다. 그런데 새로운 민족주의는 국민에게 침투하지 못하고 다만 일부 지식인 사이에 국한되어 있었다. 많은 지식인들은 나폴레옹을 정복자가 아니라 위대한 인물이며 개혁자라고 생각하며 그를 찬양했다.
그러나 지속된 전쟁과 프랑스 민족주의를 강조한 결과 국민감정이 결집되어, 마침내 러시아와 프러시아가 나폴레옹을 유럽의 권좌에서 밀어내는 데 성공했다. 나폴레옹 전쟁의 패배 이후 1848년에 일어난 여러 민족들의 봉기(蜂起)는 민족주의에 새로운 특징을 띄게 했다. 즉, 새로운 민족주의는 개인의 자유보다는 집단의 힘과 통일을 강조하게 되어 다른 나라로부터 독립하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20세기는 전 인류가 동일한 정치적 태도, 즉 민족주의를 국민적 이념으로 승인하고 있는 역사상 초유의 시대이다. 민족주의의 대두는 어느 나라에서나 국민을 결합시키고 사회를 새로운 질서 아래 통합시킬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각국의 독특한 역사적 조건과 사회적 구조에 따라 민족주의는 서로 성격을 달리한다. 또한, 세계적 규모의 민족주의는 단합되고 조화로운 인류 사회를 창조하는 과업을 촉진시키지는 못했다. 세계적 규모의 민족주의는 오히려 각 민족 사이의 첨예한 갈등만을 불러일으켰다.
3.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는 민족과 민족주의의 기원과 발달을 독특한 시각에서 연구한 책으로, 국내외 학자들에게 중요한 이론적 논거로 활용되고 있다. 앤더슨은 한스 콘과 마찬가지로 민족주의가 근대의 발전 과정에서 생겨난 것으로 본다. 다만, 한스콘이 민족의 기원을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파악하고 정치적 발전 과정에 주목한다면, 앤더슨은 민족과 근대 자본주의와의 관련성을 더욱 부각시키면서 문화적 측면에서 민족주의를 분석한다. 그는 민족을 ‘상상의 공동체’로 정의하는데, 이는 어떤 사람들의 머리 속에서 마음대로 상상하거나 꾸민 것이라는 뜻이 아니다. 그가 말하는 상상의 공동체는 특정한 시기에 사람들의 경험을 통해서 구성되고 의미가 부여된 역사적인 공동체를 뜻한다.
(1) 민족은 ‘상상의 공동체’
앤더슨은 민족을 ‘본래 제한되고 주권을 가진 것으로 상상되는 정치 공동체’라고 정의 한다. 민족은 가장 작은 민족의 구성원들도 대부분 자기 동료들을 알지 못하고 만나지 못하며, 심지어 그들에 관한 이야기를 듣지도 못하지만 구성원 각자의 마음에 서로 친교의 이미지가 살아 있기 때문에 상상된 것이다.
앤더슨은 상상된 민족을 세 가지로 규정한다. 첫째, 민족은 제한된 것으로 상상한다. 왜냐 하면, 10억의 인구를 거느린 가장 큰 민족도 비록 유동적이기는 하지만, 한정된 경계를 가지고 있어 그 너머에는 다른 민족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민족도 그 자신을 인류와 동일시하지는 않는다. 또한, 모든 인류의 성원이 그들의 민족에 동참하는 날이 올 것을 꿈꾸지도 않는다.
둘째, 민족은 주권을 가직 넋으로 상상된다. 왜냐 하면 민족 개념은 계몽 사상과 혁명이 신이 정한 계층적 왕국의 합법성을 무너뜨린 시대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오늘날은 어떤 보편적인 종교를 추종하는 사람일지라도 보편적인 종교들이 여럿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잇다. 이런 인간의 역사 단계에서 민족들은 자유롭기를 꿈꾸고 있으며, 만일 신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면 직접 받기를 꿈꾼다. 이 자유의 표식과 상징은 주권 국가이다.
마지막으로 민족은 공동체로 상상된다. 왜냐 하면, 각 민족에 보편화되어 있을지 모르는 실질적인 불평등과 수탈에도 불구하고 민족은 언제나 심오한 수평적 동료 의식으로 상상되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지난 2세기 동안 수백만 명의 사람들로 하여금 그렇게 제한된 상상체들을 위해 남을 죽이기보다 스스로 기꺼이 죽게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이 형제애 때문이다.
(2) 민족주의의 문화적 기원
민족을 상상하는 가능성 자체는 역사적으로 볼 때 아주 오래된 세 가지 근본적인 문화 개념이 인간의 사고에 대해 누리던 통제력을 잃어버린 때와 장소에서 일어났다. 첫째는 라틴어나 한자처럼 특정한 언어가 바로 진리와 분리될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에, 진리에 접근할 수 있는 특권을 제공한다는 개념이었다. 모든 종교 공동체들은 자신들이 우주의 중심으로부터 신성한 언어라는 매개체를 통해 초현실적인 힘의 질서에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기독교 세계 와 이슬람 세계 그리고 기타 세계의 초대륙적인 연대감을 낳게 한것은 바로 이 개념이었다.
그러나 중세 말 이후 유럽이 비유럽 세계를 탐험하면서 자신들이 속한 종교 공동체만이 유일하고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의식은 위기를 맞이했다. 또한 중세의 신성한 언어였던 라틴어가 몰락하고 지방어가 발전하면서 옛 언어의 신성한 권위도 도전받게 되었다. 신성한 언어에 의해 통합된 신성한 공동체들이 점차 분해되고, 복수화되고, 영토화되었다.
둘째는 다른 인간들과 구별되며 어떤 우주적 형태의 섭리에 의해 통치하는 군주라는 상위 중심부의 주변과 그 밑에서 사회가 자연스럽게 조직된다는 믿음이었다. 지배자는 경전처럼 신성한 존재에 접근할 수 있는 통로였으며 신적인 존재였기 때문에 인간의 충성심은 반드시 서열적이고, 구심점을 향해 있었다
그러나 17세기 동안 신성 군주제의 합법성은 유럽에서 서서히 퇴조하기 시작했다. 영국의 찰스 스튜어트는 단두대에 올랐고, 프랑스의 부르몽 왕가도 몰락을 맞이했다. 1914년까지도 왕조 국가들이 세계 정치 체제의 다수 구성원을 이루었다. 그러나 많은 왕조들은 정통성의 원칙이 조용히 시들어갈 때 민족이라는 단어에 손을 뻗었다.
셋째는 우주관과 역사가 구별되지 않고 세계의 기원과 인간의 기원이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시간의 개념이었다. 중세인들은 구세주적 시간 안에 살고 있었다. 구세주적 시간은 순간적인 현재에 과거와 미래가 동시에 나타난다는 의식이다. 중세인들은 교회에 있는 스테인드 글라스나 성화를 통해 성서에 기록된 역사의 창조와 성서에서 예언된 미래 사건이 현재에 재현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18세기 유럽에서 소설과 신문이라는 상상의 두 가지 형태가 출현하면서 민족과 같은 상상의 공동체를 재현할 수 있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같은 시기에 같은 사회에 살고 있다는 사실에 의해서 동시에 등장한다. 소설을 읽는 독자들은 실생활에서는 만나지 못하더라도 같은 시간에 존재하는 사람들이 있으며, 자신과 이들이 동시대인으로서 동일한 사회에 살고 있다고 상상하게 된다. 신문은 같은 시간에 생긴 서로 연결되지 않는 사건들을 기사화함으로써, 독자들에게 같은 시간에 일어나는 사건들과 이 사건에 대한 기사를 읽는 사람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상상을 하게 만든다.
이런 상호 연결된 확실성들이 서서히 퇴조하면서 우주관과 역사를 분리시켰다. 새 문화 개념들의 퇴조는 경제 변동, 발견(사회적인 발견과 과학적인 발견), 그리고 한층 빨라진 커뮤니케이션의 발달 등의 영향을 받아 처음에는 서유럽에서 일어나고 그 후에는 다른 곳에서 일어났다.
그렇다면 형제애와 권력, 그리고 시간을 의미 있게 서로 연결하는 새로운 방법을 모색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아마도 인쇄 자본주의보다 이러한 모색을 촉진시키고 성공적으로 만든 것도 없을 것이다. 인쇄 자본주의는 빠르게 늘어나는 사람들이 심오하게 새로운 방식으로 그들 자신에 대해 생각하고, 그들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연결할 수 있게 해주었다.
(3) 민족의식의 기원
근대 민족의식을 형성하는데 인쇄 자본주의가 맡은 역할은 매우 중요했다. 초기 서적 시장은 라틴어를 아는 소수 엘리트를 겨냥했다. 그러나 16세기 초에 이미 기계적 재생산의 시대에 들어선 인쇄 자본가들은 라틴어를 해독할 수 있는 소수 엘리트 독자층을 겨냥한 출판에서 지방어 서적의 대량 출판으로 눈을 돌린다. 신흥 부르주아 계층을 중심으로 한 독서 계층과 잠재적 서적 소비 시장의 발달도 인쇄 자본주의가 지방어 서적 출판에 관심을 갖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16세기에 서구 사회에서는 지금보다 훨씬 다양한 구어가 다양한 방언 형태로 쓰이고 있었다. 이윤을 위한 지방어 서적의 대량 출판은 다양한 방언들을 소수의 표준어로 활자화함으로써 가능하게 되었다. 그 결과 동일한 지방 활자어 서적을 읽는 독자들은 다른 지방 활자어를 읽는 사람들과 구별되는 유대를 상상하고 의식할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지방 활자어로 된 서적의 발달은 언어가 민족의 경계를 정하는 역할을 할 수 있는 여지를 열어놓았다.
지방 행정어의 발달은 지방어의 발달에 기여한 또 하나의 요인이다. 특정 왕조의 영토에서 특정 지방 행정어를 사용하는 것은 처음에는 다분히 편의적이고 실용적이며 무의식적으로 진행되었다. 지방 활자어와 지방 행정어는 이후 서구에서 언어 대중 민족주의의 발달과 크게 관련되었다.
유럽의 민족주의는 종족과 언어가 민족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로 생각되는 종족 언어 민족주의의 성격을 띤다. 유럽에서 민족은 오래 전에 형성되어 있었지만 그 동안 사람들이 자각하지 못했다. 유럽인들은 그 동안 잠들었던 자신들의 민족의식을 깨워야 했다. 당시 유럽에서 발달하고 있던 언어 계보학(系譜學)과 문헌학, 지방어 사전과 고전의 지방어 번역 출판 등은 이들의 민족 식을 깨우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지방어로 번역된 고전을 읽으면서 사람들은 자신의 언어가 가지는 가치를 새삼 깨닫게 되었으며,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언어만큼 오래된 어떤 것, 즉 ‘민족성’을 공유하는 것으로 상상했다. 그리고 유럽에서 발달한 종족 언어 민족주의는 당시 제국주의적으로 팽창하고 있는 왕조 국가들에 의해 의식적으로 모방되었다.
언어 집단을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가 민족 구성원들의 동질성과 형제애라는 이념에 기반을 둔 ‘대중 민족주의’적 성격을 띈다면, 혈통의 우월성에서 자신들의 통치권을 정당화해 온 왕조 국가의 통치자와 지배 계층이 표방하는 민족주의는 ‘관(官)주도 민족주의’ 라 부를 수 있다.
언어는 매일 그것을 말하고 잇는 한 특정 집단의 소유이며,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는 집단은 동질성을 갖는 공동체라는 종족 언어 민족주의적 사고는 왕조들에게 딜레마를 가져다주었다. 왜냐 하면, 왕조 안에는 다양한 언어 집단이 존재할 뿐만 아니라, 식민 제국주의적 팽창 과정에서 이들은 자신들의 왕조 안으로 더 많은 종족 언어 집단을 통합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식민 제국주의 국가들은 무엇보다도 행정상의 목적을 위해 차츰 특정 지방 활자어를 모국어로 정착시켰다. 즉, 동일 언어와 문화를 소유한 민족 공동체가 공동체의 규범이 되어가는 시대적인 변화에 따라 식민 제국주의 국가들을 강요하는 동화(同化)정책을 추진한 것이다. 러시아 영토에 사는 사람들의 러시아화, 영국 식민지 사회인들의 영국화, 일본 식민지인들의 일본화는 동화 정책의 좋은 사례이다.
(4) 제 3세계 민족주의의 모순
제 2차 세계 대전 이후 독립한 신생국에서 발달한 민족주의는 자신들의 고유한 언어를 소유했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중요한 쟁점으로 간주하지 않았으며, 종종 이전 식민 종주국의 언어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유럽의 민족주의와는 다르다.
식민지 민족주의를 형성하는 데 서구의 근대식 교육을 받은 엘리트들의 역할은 무척 컸다. 19세기 후반에 있었던 제국들은 소수의 민족들에 의해 통치되기에는 너무 방대하고 광범위했다. 따라서, 제국의 통치를 위해 식민주의자들은 이중 언어를 알고 식민 행정과 식민지인을 매개하는 다수의 하급 관리를 필요로 했다. 이러한 이유로 식민주의자들은 통치에 필요한 다수의 하급 관리를 배출하기 위해 식민지에 동화를 추구하는 서구의 근대식 교육 제도를 도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식민지에 서구식 교육 제도가 도입되면서, 식민주의자들이 의도하지 않은 결과가 나타났다. 즉, 근대식 교육을 받은 식민지 지식인 계층들이 식민 국가의 제국적 성격과 민족 국가적 성격 사이에 있는 모순을 간파(看破)하게 된 것이다. 근대식 교육이 프랑스 혁명과 근대적 민족 국가에 대한 이념을 가르쳤는데, 식민 제국은 이러한 이념에 배치되는 일상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학교 제도를 통해 추진된 동화 정책은 식민지 국민들에 대한 차별에 의해 그 모순이 노출되었다.
식민지에 세워진 근대식 학교 제도는 식민지 각지에 있는 시골 초등학교에서 대도시 상급 학교로 서열화 되고 중앙집권화 되었다. 식민지의 표준화되고 서열화 된 교육 제도는 시골 초등학교에서 대도시의 상급 학교까지 교육을 받기 위해 온 학생들 사이에 ‘우리’라는 의식을 심어 주었다. 예를 들어, 프랑스령 서 아프리카에 있는 윌리엄 퐁티 중등학교에서 교육받은 서아프리카 지식인들은 학교 제도에 의해 서아프리카 의식과 결속감을 느끼게 되었다. 즉, 중세 시대 기독교 세계의 여러 곳에서 성지 순례를 온 사람들이 성지에서 만난 사람들을 한 종교 공동체에 속하는 형제, 자매로 인식하듯이, 서아프리카 시골의 초등학교에서 식민 교육의 중심지로 가는 순례 과정에서 만난 서아프리카 지식인들은 서로를 서아프리카 공동체에 속하는 형제, 자매로 상상했다.
그러나 식민지 안에서 서열화 된 학교 제도가 곧바로 서아프리카 민족주의를 발달시키거나 서아프리카 민족 국가를 형성하지는 않았다. 서아프리카의 교육 제도와 행정 제도가 동일한 구조를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식민 교육 제도가 서아프리카 전 지역을 대상으로 서열화 되었다면, 식민지의 행정은 분할, 통치되었기 때문이다. 서구의 근대식 교육을 받기 위해 각처에서 식민지 교육 제도의 최고 중심지로 온 서아프리카 지식인들은 교육을 받은 후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들은 자신의 고향이 있는 특정한 식민행정단위 안에서 관리로 임용되었다. 그리고 이는 지식인들이 한정된 영토 안에서 관료로서 여행하면서 자신들이 속한 특정 식민 행정 단위를 민족의 경계로 상상하게 만들었다.
아프리카의 사례에서 잘 나타나듯이, 근대식 학교에서 통용된 식민주의자들의 언어가 민족주의 운동에서 사용된 것은 불가피한 측면이었다. 예를 들어, 포르투갈령 모잠비크에서 포르투갈어가 모잠비크 민족 국가를 상상하는 매개체가 된 것이다. 이는 민족주의 운동에서 언어는 민족을 연결해 주는 매개체이지 민족을 상상하게 하는 본질적인 토대는 아니라는 점과 함께, 다중 언어 집단으로 구성된 신생국의 초기 민족주의 운동에서 이중어를 구사할 줄 아는 엘리트 지식인들이 지도적 역할을 하게 된 배경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식민 국가에 의해 임의로 구성된 행정 단위가 민족으로 상상되어 신생 민족 국가로 독립한 후 국가와 지배 계층은 언어적, 종족적 다양성과 갈등을 극복하고 민족 공동체로 통합시키는 역할을 맡았다. 또한, 아메리카와 유럽에서 경험된 대중 민족주의와 관 주도 민족주의 등 다양한 민족주의 모형들이 모방되고 채택되었다. 이처럼 신생 민족 국가들에서는 국가와 지배 계층에 의해 민족주의 사상이 체계적으로 도입되고 일반에게 주입되며, 때에 따라서 특정 언어와 문화적 전통에의 동화 정책이 추진되었다.
(5) 애국심과 인종주의와의 관계
인종주의는 민족주의가 만들어 낸 것이라기보다는 유전적 우월성을 내세운 왕조 국가의 지배 계층에서 유래했으며, 계층적 차별을 식민지 사회에까지 확장한 것이다. 예를 들어 영국의 군주가 보통 영국 사람보다 우월하다면, 이주한 영국인들이 통치를 받는 원주민들보다 우월하다는 논리가 암암리에(혹은 공공연하게) 작용하게 된다. 따라서, 식민지에서 이주민은 귀족과 같은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인종주의가 민족주의에서 유래하지 않았다는 것은 식민 통치에 대항하는 식민지 사회의 민족주의에서 역(逆) 인종주의를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식민지 민족주의는 자민족의 독립과 함께 모든 형태의 인류 억압에 대해 반대한다. 이는 스페인어를 쓴 메스티조 멕시코들이 자기 민족의 조상을 스페인 정복자가 아닌 원주민에게서 찾았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민족주의는 때로 인종주의와 같이 나타나는 것이 사실이지만, 민족은 기본적으로 심오한 자기 희생을 고취한다. 그런데 사람들이 민족 공동체를 위해 자기의 목숨을 기꺼이 내놓을 각오를 하게 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러한 질문은 민족의 의미를 인종주의적이고 배타적인 성격에서보다 이타적인 성격에서 찾게 한다.
사람들이 민족을 위해서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은 민족이 친족이나 고향처럼 숙명적으로 타고난 것으로 상상되기 때문이다. 즉, 타고난 어떤 것이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민족은 사람들에게 사심 없는 희생을 요구할 수 있는 것이다. 민족은 개인을 그 기원을 알 수 없는 고대의 조상에게 연결해 줄 뿐만 아니라, 그가 죽은 후에도 영원 불멸할것으로 생각된다. 민족을 위해 죽는 것은 조상으로부터 미래의 자손으로 이어지는 영원한 공동체에 참여하는 것이다.
메시아 적 시간 안에서 창조에서 종말로 이어지는 종교 공동체가 의미를 잃은 시기에 고대에서 미래로 이어지는 역사적 시간 안에 존재하는 민족은 영구 불멸을 약속하는 가장 의미 있는 대안적 공동체가 된다. 민족을 정치적 이념보다는 친족이나 종교와 같은 의미 체계로 보아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4. 배타적 민족주의를 넘어서기 위하여
우리는 민족주의와 세계 시민주의가 공존하는 시대에 살아가고 있다. 민족주의는 한 민족 집단의 자유와 평등, 국민 주권의 원리를 실현하는 강력한 수단이다. 그러나 그것이 자칫 우리 민족의 독립과 생존을 위해 다른 민족을 배척하는 논리로 전환될 때는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수단으로 남용될 여지가 있다. 또한, 민족주의는 민족 공동체에 충성심을 강조하면서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희생할 것을 강요하는 논리로 동원될 가능성이 크다.
요즘 세계는 한 민족의 경계선을 넘어 다른 민족과 자유롭게 교류하고 평등하게 의사 소통하면서 세계 시민으로서 살아갈 가능성이 높아졌다. 세계 시민이 된다고 해서 각 개인의 민족적 공동체 의식이나 민족적 정체성이 없어지거나 약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각 개인의 민족 공동체에 대한 소속 의식은 다른 공동체와 평화롭게 만나고 교류하면서 더욱 고양(高揚)될 수 있다. 즉, 민족주의와 세계 시민주의는 서로 갈등하는 것이 아니라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는 다양한 갈등과 모순이 뒤섞여 있다. 특히 해외 이주 동포를 우리 민족으로 볼 것인가, 한국 경제에 크게 기여하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가 한국인과 혼인했을 경우 우리 민족으로 인정할 것인가, 팽창주의 전략을 고수하고 있는 일본이나 한국 고대사를 자신의 역사로 편입시키려는 중국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등의 문제가 민족주의에 대한 새로운 도전으로 우리 앞에 놓여 있다.
민족 공동체는 단일한 혈통이나 언어만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건전한 민족 공동체를 건립하기 위해서는 한스 콘이 말한 대로 민족 공동체에 대한 헌신 의식이 중요하고, 앞으로의 민족 공동체는 베네딕트 앤더슨이 지적한 것처럼 친족이나 종교 같은 대안적 공동체로 자리 잡을 수 있다. 단일 혈통이나 언어는 민족을 구성하는 여러 요인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오히려 민족 공동체에 대한 헌신 의식이나 대안적 공동체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민족 내부의 불평등한 관계를 극복하고 다른 민족 공동체와 조화롭고 평등한 관계를 수립하는 것이 중요하다.
21세기 민족주의는 편협한 배타적 민족주의와 단일 혈통이나 언어의 순수성을 고집하는 신화적 민족주의를 넘어서, 다른 민족 집단의 특수성과 권리를 존중하고 지구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민족들이 서로 교류하고 협력하여 조화를 추구하는 보편주의적 민족주의로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바로 민족주의가 추구하는 민족의 독립과 자유, 평등함을 확보하는 가장 빠른 길일 수 있다.
생각해 볼 문제
1. 한스 콘의 민족주의 개념과 베네딕트 앤더슨의 민족주의 개념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2. 한스 콘은 서양 민족주의의 기원을 고대 그리스와 히브리까지 거슬러 올라가 설명하고 있다. 고대 민족주의와 근대 민족주의의 차이점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3. 베네딕트 앤더슨은 근대의 인쇄 자본주의가 민족주의의 형성에 미친 영향을 중요하게 취급하고 있다. 민족이라는 상상의 공동체를 형성하는 데 소설과 신문이 어떤 기능을 했는지 생각해 보자 4. 우리의 민족주의는 단일 혈통과 언어를 강조해 왔다. 그 결과 다른 혈통과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 공동체를 쉽게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편협한 민족주의를 낳았다. 21세기 세계화 시대에 우리의 민족주의가 나아갈 방향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
[자료출처-대성학원]
출처 : 대학입시수능정보(재수,점수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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