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가의 『북학의』
북학의’의 핵심 내용 |
1. 실사구시의 정신
여러 항목 가운데 특히 상세하게 서술된 것은 수레와 벽돌 부분이다. 그 중 ‘수레(車)’ 항목을 보면, 서문에서 밝힌 바와 같이, 우선 중국 수레의 제작 방식과 종류들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사람이 타는 태평차(太平車), 짐수레인 대차(大車), 소상인들이 이용하는 독륜차에 대해 설명하였고, 그 수레들이 분주하게 다니는 북경의 거리를 묘사하였다. 그리고는 우리나라의 지세가 험해서 수레가 적당하지 않다는 의견을 반박하면서, 다만 우리 수레는 차체가 무거워 실용성이 떨어진다고 했다. 그러므로 중국의 수레 제작법을 배워야 하는데 사신 행사 때 연구하면 좋을 것이라 했다. 수레를 이용하면 각 지역의 생산품을 유통할 수 있어 생활이 풍족해질 것이요, 사신 행차 등 원거리 이동 시에 걸어서 따라가는 이들의 고통을없앨 수 있을 것이요, 말에 짐을 실어 옮기는 것보다 몇 배의 효율을 걷을 것이라 했다. 그리고는 다시 당시 사용하던 초헌이나 쌍교(雙轎)가 불편하고 위태로우며 인부들의 고통이 크다는 점을 들어 비판하여 중국을 배워야 한다는 의견의 타당성을 부각시켰다.
이런 상세한 내용은 본인이 직접 관찰한 것이기도 하나, 신분을 가리지 않고 상대방에게 묻고 들은 결과이기도 하다. ‘소(牛)’ 항목을 보면, 심지어 길 위에서 백정에게 물어 알았다고 하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태도는 박지원이 서문을 쓰면서 “모르면 길거리 사람에게라도 물어야 한다.”고 한 한 실사구시(實事求是) 정신의 표명이다. 박지원 역시 ‘열하일기’를 통해 이러한 태도를 표명하였는데, 벽돌이라던가 거름 등에 관한 내용은 공통으로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2. 상공업의 장려
‘북학의’에서 보이는 특색 가운데 하나는 규격에 대한 강조이다. ‘종이’ 항목을 보면, 전국의 종이 길이가 일정하지 않아 이 때문에 종이를 허비하게 되는 경우 많다고 했다. 이에 비해 중국의 종이는 길이가 서로 동일하여 우리처럼 낭비할 일이 없는데, 다른 물건의 경우도 그러하다고 했다. 특히 벽돌의 이점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규격에 대한 강조가 두드러진다. 우리의 겨우 건축을 할 때 돌이나 흙을 이용하는 것이 대부분인데, 이것은 벽돌을 사용하는 것에 비해 힘이 많이 들 뿐만 아니라 튼튼하지도 못하다고 비판한다.
벽돌이 효율적이라면 국가 차원에서 사용하지 않더라도 개인 차원에서 사용할 수 있지 않느냐고 하는데 대해서 박제가는 반대한다. 일상 용품은 반드시 서로 유통하여서 사용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벽돌을 굽는 가마도 자신이 만들고, 운반하는 수레도 자신이 만들고 하는 등 모든 일을 자신이 한다면 그 이로움이 없게 된다는 것이다.
유통은 상업, 경제와 관련되지 않을 수 없다. ‘장사’ 항목을 보면 중국인은 가난하면 장사를 하는데 이는 진실로 현명한 일이라고 평했다. 중국은 선비들도 직접 책방에 들르고 재상도 직접 골동품을 사기도 하는데, 이는 청나라만의 풍습이 아니라 명나라 때부터 그래 왔다고 설명한다. 그에 비해 우리는 헛된 예절을 숭상하고 꺼리는 일이 많아 차라리 빌어먹을지언정 농사짓지는 않는데 그렇기에 부득불 권세가에 빌붙어 청탁하는 습성이 생기게 되니, 이는 장사하는 것보다 못하다고 비판한다. 허례허식을 배격하고 실제를 중시하는 이런 내용은 특히 ‘시정’항목에 두드러진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중국 시장이 성대한 것을 보면, 오로지 이끗만 다툰다고 비판하는데 이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이라 했다. 상업은 사농공상(士農工商) 가운데 하나로서 1/4의 비율을 차지해야 하는데, 만약 사람들이 먹고 입고 한 나머지를 유통하지 않고 그대로 둔다면 이는 무용지물이 될 것이라 했다. 이런 내용은 1798년 정조가 농서(農書)를 구하자 ‘북학의’를 28항목으로 축약하고 다듬어 올린 ‘진소본 북학의’에 말리(末利)라는 항목으로 기록되기도 했는데, 상업을 중시한 북학파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대목이다.
‘시정’ 항목의 계속되는 내용은 경제학적 사고를 극명하게 보여 준다. 그는 말하길, 사용할 줄 모르기에 생산할 줄 모르고, 생산할 줄 모르기에 백성들이 갈수록 궁핍해진다고 했다. 무릇 재화(財貨)는 우물과 같으니 물을 기르면 우물이 가득 차고, 긷지 않으면 말라 버리는 것과 같다. 비단을 입지 않으면 비단 짜는 사람이 사라질 것이고, 좋은 그릇을 좋아하지 않으면 기술자들이 없어질 것이다. 이렇게 되면 나라 전체가 가난해질 것이고, 이 때문에 우리는 재물이 타국으로 흘러들어가 타국은 점점 부유해지고 우리는 점점 가난해질 것이라 했다. 이러한 언급은 경제학상의 수요와 공급의 관계를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무역론’ 항목에서는“반드시 원방의 물품을 통상(通常)한 후에야 재화가 불어날 것이며 제반 일용품이 생길 것이다.”라고 하여 무역의 이로움을 주장하기도 했다.
3. ‘북학의’에 대한 비판적 수용
‘북학의’의 서술 방식은 먼저 중국 문물을 소개한 다음 우리의 경우를 비판하고 우리가 중국 문물을 도입했을 때의 이로움을 설파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지는데, 우리의 경우를 중국과 비교해 비판하는 대목은 혹 과도하게 비쳐지기도 하며, 대국 추수주의로서 또 다른 모화주의적 태도가 아닌 게 의심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러한 비판은 거의 매항목에 걸쳐 서술되어 있는데, 예를 들어 ‘약(藥)’ 항목에서는 “우리나라의 의술은 가장 믿을 수 없으며, 북경에서 사 온 약품도 진짜인지 걱정된다. 믿을 수 없는 의원이 진짜가 아닌 약으로 처방하니 병이 낫지 않는 게 당연하다.”고 했다. ‘농잠총론(農蠶總論)’에서는 우리나라는 매사가 중국보다 못하니, 다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의식의 풍족함이 중국 백성에게 비할 수 없다고 했다.
박제가의 북학론에 대한 의구심은 당대에도 제기되었다. 외편의 ‘북학변’에 보면 그가 중국 여행담을 이야기하자 친구들이 믿지 못하고 실망한 채 돌아서는 그가 오랑캐의 편을 든다고 했다는 것과 그에 따른 안타까움이 적혀 있다. 그러나 중국 문물에 대한 소개와 그에 따른 우리 문물에 대한 비판은 정치의 근본을 이용후생(利用厚生)에 둔 애민사상(愛民思想)에서 나타난 것이요, 당시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파악한 결과로 보아야 한다. ‘농잠총론’에서 ‘서경’의 이용후생(利用厚生)을 인용하여 도구의 효용과 의식의 풍족함이 중요함을 강조한 것과, ‘북학변’에서 친구들까지 자신을 의심하는 상황에 대해 “진실로 인자(仁者)를 보면 인자하다 하고, 지자(知者)를 보면 지혜롭다고 해야 한다.”는 해명은 저자의 태도가 어떠한지 알려 준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존주론’에서 “그 사람이 오랑캐라고 해서 그 법까지 버린다면 이는 큰 잘못이다. 진실로 백성에게 이롭다면 비록 그 법이 오랑캐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성인께서 취하실 터이거늘 하물며 중국의 경우에는 말할 것도 없다.”고 하는 데서도 명확히 알 수 있다.
저자 소개 박제가(朴齊家, 1750~1805)는 1750년 서울에서 서자(庶子)로 태어났으나. 어려서부터 문장, 글씨, 그림에 뛰어났다. 1776년에 이덕무, 유득공, 이서구 등과 공동으로 엮은 시집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이 청나라 문사들에게 서문과 평을 받게 되면서 조선 후기 사가(四家)로 이름이 났다. 1801년 윤행임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는데, 그 후 말년의 행적은 알 수 없고 1805년 세상을 떠난 것으로 보인다. |
생각해 볼 문제 |
[자료출처:대성학원]
'학교 소식 > 동서고전 100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한스콘의 『민족주의』와 베네틱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 (0) | 2007.03.10 |
---|---|
[스크랩] 제임스 E.러브록의 『가이아』와 노자의 『노자』 (0) | 2007.03.10 |
[스크랩] 정약용의 『목민심서』 (0) | 2007.03.10 |
[스크랩] 이익의 『성호사설』 (0) | 2007.03.10 |
[스크랩] 왜 고전을 읽어야 하는가. (0) | 2007.03.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