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E.러브록의 『가이아』와 노자의 『노자』


박천홍 / 문화 평론가


1. 인간과 자연

인간이 자연계의 일부라는 것은 지극히 자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근대 산업 혁명 이후 이런 자명한 명제는 망각되어 버렸다. 기계에 의한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의 자본주의 체제가 성립하면서 인간은 자연을 착취와 정복의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산업 혁명 이후 물질문명이 고도로 발달했지만, 그 결과 인류는 환경오염과 자연 생태계 파괴라는 자연의 재앙과 직면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지속 가능한 발전을 어떻게 달성할 것이냐의 과제는 오늘날 인류의 화두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근대 문명이 자연을 떠나고 마치 자연의 지배자처럼 군림하게 된 까닭은 바로 인간 중심주의 때문이다. 인간만이 이 지구의 유일하고 가치 있는 존재라는 오만과 착각 때문에 자연은 인간을 위해서 당연히 봉사해야 하며, 인간의 목적을 위해서 착취되거나 정복 되어도 좋다는 식으로 인식되어 왔다. 하지만 이제는 인간이 지구 생태계의 수많은 존재 가운데 하나일 뿐이며,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분리되려고 할 때 어떤 재앙이 초래되는지 알고 있다.

인간 중심주의에 대한 강력한 비판 가운데 하나가 제임스 E. 러브록의 가이아론이다. 러브록은 자기 조절적 시스템을 갖춘 하나의 생명체로서 지구를 관찰함으로써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새롭게 설정하고 있다. 또한, 동양 사상의 기원 가운데 하나인 노자의 도가 사상은 인간의 인위적인 질서와 도덕을 부정하고 인간과 자연의 합일을 추구한다. 이처럼 가이아론과 도가 사상은 오늘날 인간가 자연의 조화와 공존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2. 제임스 E. 러브록의 『가이아』

영국의 화학자이자 생물 물리학자이며 열대 의학자인 제임스 E. 러브록은 ‘가이아(Gaia)가설’을 통해 지구는 정밀한 자기 조절적 시스템을 갖춘 하나의 거대한 살아있는 생명체라고 주장했다. 지구의 모든 생물들이 서로 연계해서 지구의 토양과 해양, 그리고 대기까지 포함하는 지구 환경을 시시각각 변화시켰으며, 전체 생물권의 생존에 적합하도록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지구의 생물은 단순히 주위 환경에 적응해 진화하는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대기의 조성을 변화시키고 지구의 기온을 일정하게 유지시키며 심지어 화산 활동을 일으키기도 하는 등 어마어마한 기능을 수행하는 능동적 존재인 것이다.

러브록의 가이아 가설은 인간이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만 간주하던 지금까지의 독선적 견해에 대한 대안이 될 수 있다. 또한, 이 가설은 지구 생태계를 위협하는 환경오염이 지구의 장래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회의하는 사람들에게도 인류의 미래에 대한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1) 살아 있는 지구

지구가 살아 있다는 생각은 원시 시대부터 있어 왔다. 살아 있는 실체를 의미하는 명칭인 가이아는 이미 2천 년 전에 그리스 신화에 등장한 대지의 여신을 뜻한다. 지구가 살아 있는 존재라는 신념이 과학계에서 처음 제시된 것은 1789년 제임스 허튼 경이 영국 에든버러 왕립학회에서 연설할 때였다. 그는 지구에 대한 가장 적절한 연구 방법은 생리학적 수단을 동원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당시 하비가 제안한 혈액 순환의 원리가 지구의 원소 순환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 것이라고 설파(說破)했다.

가이아에 대한 탐구는 1960년대 중반 미국 항공 우주국(NASA)이 최초로 화성의 생명체를 찾기 위해 우주 탐사를 시도하면서 비롯되었다. 우주 탐사의 가장 탁월한 부산물은 새로운 기술의 진보가 아니었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우리가 외계로부터 지구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고, 지구를 관찰함으로써 새로운 종류의 질문과 해답을 할 수있게 되었다.

러브록은 이런 과학적 발전에 힘입어 지구에 대한 새로운 가설을 제안했다. 러브록의 ‘가이아 가설’은 바이러스로부터 고래, 또는 참나무로부터 해조류에 이르기까지 지구의 모든 생물이 하나의 살아 있는 실체를 구성한다는 것이다. 이 실체는 자신이 살아가는 환경을 일정하게, 그리고 생물들의 생활에 적합하도록 지구 대기권을 조절할 수 있고, 이 실체를 구성하는 생명체들은 각자의 능력을 합한 것보다 훨씬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한다.

화석의 기록이나 방사능을 측정한 결과 지구가 독립적인 천체로 존재한 기간은 약 45억 년에 이른다고 밝혀졌다. 그리고 10억 년의 시간이 지난 후 지상에 최초의 생물체가 출현했다고 한다. 퇴적암의 기록에 따르면, 지난 35억년 동안 지구의 기후는 단 한 순간도 생물의 생존에 부적합한 때가 없었다. 또한 그 기간 동안 지표의 온도는 일정하게 생물의 생활에 지장이 없는 적당한 수준으로 유지되어 왔다. 이 때문에 생물체가 처음으로 지상에 살기 시작하던 그 시절부터 생물권은 자신의 구성 요소로 중요한 물질들을 주위 환경으로부터 흡수해 이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물질들이 모두 고갈되자 대기, 해양, 그리고 지표로부터 원료 물질을 취해 그 구성 물질을 합성할 수 있는 기술을 익히게 되었다. 생물들이 지구적으로 퍼져 나가 점차 다양해지면서 다른 하나의 중요한 임무가 필연적으로 요구되었다. 그것은 작용과 기능을 유지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미량 원소들을 충분히 확보하라는 것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제까지 독립적이었던 미량원소 회수의 수단들이 더 높은 생산성을 위해 서로 합쳐지고 연계되었을 것이다. 이러게 해서 구성된 한층 복잡한 협조체제의 네트워크는 각 부분들의 가능한 합보다 훨씬 커다란 능력과 속성을 지니게 되었을 것이며, 바로 이런 점이 가이아의 여러 특징을 보여 준다.

 (2) 사이버네틱스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는 살아있는 생물체나 복잡한 기계에서 작동하는 자가 규제 시스템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 분야를 말한다. 가장 작은 것에서 가장 큰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물들의 속성 가운데 하나는 그들이 어떤 목표를 설정하고 시행착오를 겪는 사이버네틱 과정을 통해 목표를 달성하도록 노력하는 시스템을 개발, 가동, 유지하는 능력을 소유한다는 것이다.

사이버네틱 시스템은 순환 논리 회로를 갖는 것이 보통이다. 가장 간단한 사이버네틱 시스템인 온도 조절계를 예로 들어 보자. 많은 가정에서 사용하는 전자식 오븐의 온도 조절용 다이얼을 섭씨 150도로 고정시키고 스위치를 넣어놓고 가정하면, 전기 오븐에서는 니크롬선이 곧 발갛게 달아오르고 많은 열이 방출되어 순시 간에 오븐 내부의 온도가 섭씨 150도까지 상승할 것이다. 온도조절계가 섭씨 150도를 감지하는 순간 자동적으로 전기는 차단된다. 그러나 이때까지 달아오른 니크롬선에서는 계속 열이 발산되므로 오븐 내부의 온도는 잠시 동안 계속 상승하게 될 것이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오븐은 점차 식어서 온도가 떨어지게 되고, 이 때 온도 조절계는 내부 온도가 섭씨 150도 이하에 이르렀음을 감지해 다시 전기를 공급하게 된다. 그러나 스위치가 연결된다고 하더라도 니크롬선이 충분히 가열될 때까지 오븐 내부의 온도는 잠깐 동안 하강을 지속할 것이다. 니크롬선이 가열되면서 다시 온도 조절의 사이클은 반복 된다 따라서, 오븐 내부의 온도는 사실상 섭씨 150도에서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이온도를 축으로 해서 상하로 몇 도의 범위 내에서 오르락 내리락한다.

싸이버네틱 시스템을 이해할 수 있는 관건은 그것들을 마치 생명체와 같이 간주해 부분들의 집합체가 각 부분들의 단순한 합 이상의 존재로 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이다. 그것들은 오직 작동 시스템으로서 간주되어야만 이해될 수 있는 대상이다. 오븐의 스위치를 끄거나 오븐을 분해해 본다고 해서 오븐의 잠재적 효율성을 밝혀 낼 수는 없다.
태양은 통제 불가능한 복사열을 공급하는 근원이며, 지구는 그 주위를 영원히 돌고 있다. 그런데 지구에 생명체가 처음 나타난 35억 년 전부터 지구 표면의 온도는 현재 온도를 중심으로 불과 몇 도 차이의 범위 내에서 결코 벗어난 적이 없다. 그 동안 원시 대기의 조성과 태양의 복사 에너지 양에는 놀라울 만큼 변화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지구는 생물체가 살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춥거나 더운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생물들이 자신의 신체 대상을 최적의 정상 상태로 유지하도록 하는 여러 생리적 작용들은 너무나 복잡하면서도 미묘한 작용을 한다. 생물 그 자체뿐만 아니라 그의 부분품들인 신경계, 순환계, 소화계, 감각계 등은 모두 완벽하게 협력하여 작동함으로써 신체의 정상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이런 상태를 생리적 평형상태라 부른다. 이에 가이아도 자신의 존재를 보전하기 위해 끊임없이 최상의 온도 조절 메커니즘을 추구해 왔으며, 그 결과 오늘날에 이르러 비로서 정교한 시스템을 갖추게 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만약 이 행성에 범지구적 규모의 조절시스템이 존재하며, 그것이 동식물들을 부분품으로 이용하면서 능동적으로 기능을 비롯해 지구의 기후, 화학적 조성, 지표면의 지형 등을 변화시키고 있다는 이론을 뒷받침할만한 충분한 증거를 발견할 수 있다면, 가이아 가설은 기정사실로 밝혀지고 이론으로서 검증될 수 있을 것이다.

 (3) 대기권과 해양의 사이버네틱스

현재 대기권에 포함되어 있는 21퍼센트의 산소는 생물계의 생존을 가능케 하는 안전농도의 상한선이다. 현재의 수준에서 약간만 더 산소 농도가 높아지면 자연 발화의 위험성은 훨씬 커지게 된다. 현재의 공기 농도에서 산소 농도가 1퍼센트씩 증가될 때마다 삼림에서 번갯불에 의해 화재가 발생할 수 있는 가능성은 70퍼센트씩 상승되기 때문이다.

메탄가스는 대기권에 포함된 산소의 농도를 규제하는 역할을 맡는다. 메탄가스 대부분은 해저, 습지, 하구 등 탄소 화합물이 풍부히 묻혀 있는 곳에서 박테리아의 혐기성 발효(무 산소 발효)에 의해 만들어진다. 이런 미생물에 의해 생산되는 메탄가스의 양은 매년 약 10억 톤에 이른다. 만약 메탄가스가 없었다면 공기 중의 산소 농도는 최소 매 1만 2천년마다 1퍼센트씩 증가할 것이다. 이것은 생물학적으로 매우 위험해서 한 차례의 화재로 전 세계의 삼림을 모두 휩쓸어 버릴 그런 재난을 빈번하게 일어나게 할지도 모른다.

이산화질소도 메탄가스와 마찬가지로 산소의 규제를 담당한다. 또한, 이산화질소가 성층권에서 분해되면 다른 기기들과 함께 산화질소를 만드는데, 이런 산화질소는 오존층을 파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하지만 너무 과다한 오존도 너무 적은 것과 마찬가지로 해롭다. 자외선이 너무 강력해지면 피부암에 걸리게 되고, 너무 약하게 되면 구루병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가이아의 조절 시스템은 오존층을 통해 유입되는 자외선의 양이 너무 많거나 너무 적은 것을 측정하는 감지 수단이 있어서 이산화질소의 생산을 여기에 맞춰 조절한다.

암모니아는 토양 속과 바다 속에서 대량으로 생산되는데, 매년 약 10억 톤 정도가 만들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암모니아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주위 환경의 산도(酸度)를 조절하는 것이다. 생물권에 의해 생산되는 암모니아는 빗물의 폐하(pH)를 8 정도로 유지시켜 생물들이 적합한 환경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결정적인 도움을 준다. 자연계에서는 암모니아와 산성 물질이 균형을 이루기 때문에 빗물이 산성이거나 알카리성에 치우치지 않는 것이다. 이처럼 생물권은 우리 주변의 대기 조성을 능동적으로 조절해서 유지시키며, 그 결과 지사의 생물들을 위한 가장 적합한 환경이 자연스럽게 조성되고 있는 것이다.

가이아의 자기 조절 능력은 지구 표면의 4분의 3을 차지하는 바다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대양은 지구라는 거대한 증기 기관의 한 부분으로 이 기관이 태양의 복사열을 받아 들여서 공기와 물의 운동을 통해 에너지를 지구의 구석구석까지 골고루 분산시키는 막중한 역할을 하고 있다. 총체적으로 대양은 거대한 용존 가스의 저장고로서 우리가 호흡하는 공기의 조성을 통제하고 해양 생물들에게는 안정된 생활환경을 제공하면서 생물권에 기여하는 것이다.

지난 35억년 이상의 기간 동안 대륙은 지구 표면을 떠돌았으며, 극지방의 빙하는 녹았다가 다시 얼어붙곤 했고, 해수면은 오르락내리락 하는 지질학적 변화를 심각하게 경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다의 전체 부피는 거의 일정하게 변하지 않고 유지되었다.

현재 바닷물의 염분 농도는 약 3.4퍼센트 정도이다. 반면, 현재 우리 몸의 염분 농도는 0.8퍼센트에 지나지 않는다. 처음 지구상에 생물이 나타났을 때 그 해상 생물의 체액 농도는 바닷물의 농도와 같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후에 생물들이 진화를 시작하면서 그들은 해양에서 육지로 서식처를 옮겼다. 이 때 동물들은 처음 그 상태 그대로 체액 농도를 유지했지만, 그 후에 바닷물의 염분 농도는 점차 높아졌다고 한다. 그 결과로 인해 오늘날에는 생물체의 체액과 바닷물의 염분 농도가 많은 차이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런데 생물 세포가 살아 있기 위해서는, 자신의 내부 수용액과 외부 환경을 막론하여 염분 농도가 잠깐이라도 6퍼센트를 넘어서는 안 된다. 왜냐 하면 염분 농도가 6퍼센트를 넘을 경우 삼투압을 견디지 못해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적어도 지난 수억 년 동안 해양의 염분 농도는 거의 변함없이 유지되었다. 그리고 바닷물의 염분 농도 역시 어떤 경우에도 6퍼센트를 넘은 적이 없었다. 이것을 통해 바다에는 염분이 더해지는 만큼 이를 신속하게 제거할 수있는 어떤 메커니즘이 분명 존재할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이다.

바다에서 염분 농도를 조절하는 과정은 규조류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규조류는 규산염이 부족한 바다에서는 그것을 흡수하면서 번성하지만, 규산염이 풍부한 염분 호수에서는 성장하지 않는다. 규조류는 바다의 표층에서 짧은 생애를 보내다가 규산염을 흡수하고 죽으면 가라앉아서 자신의 몸을 해저에 묻는다. 이처럼 규산염을 사용하고 처분하는 생물학적 과정은 바다에서 규산염 농도를 조절하는 효율적인 기제이다.

 (4) 가이아와 인간

현재 인간의 산업 활동은 풍요로운 생물의 서식처를 파괴시키고 지구의 모든 생물을 위협하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매년 그 위협은 증대하고 있다는 게 모든 사람들의 의견이다. 하지만 현재 수준의 산업 활동과 가까운 미래의 공업 발달이 가이아의 생명을 전반적으로 위험에 처하게 한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증거는 사실상 매우 적은 편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물질 중에 맹독성이 가장 강한 것은 놀랍게도 자연의 생산품이다. 박테리아에 의해 만들어지는 보툴리누스 독, 바다에서 적조 현상을 야기하는 쌍편모 조류가 발산하는 치명적인 독성, 그리고 독버섯으 lehr 등은 모두 생물체가 만드는 유기 화합물질들이다. 이런 맹독성의 부산물을 생산하는 생물 그 자체는 이들의 유독 물질만 제대로 제거한다면 아무런 해가 없다.

환경오염이라는 개념은 인간 중심적인 것이어서 가이아의 입장에서 본다면 자신과는 별로 관련성이 없다. 소위 오염물로 불리는 것들 대부분은 사실상 자연계에 존재하는 것이며, 따라서 어느 정도 수준에서 그것들을 오염물로 간주해야 할지에 대한 결정을 내리기는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거의 대부분의 오염 물질들은 어느 정도까지는 자연적으로 만들어진다. 지구의 생물종으로서 인류는 적당한 범위 안에서라면 주위 환경에 널려 있는 오염 물질에 이미 잘 적응하고 있다. 만약 어떤 원인에 의해서 오염 물질의 g나 두 가지가가 더 증가한다고 하더라도 인간 개개인의 종으로서의 인류는 곧 적응력을 가지게 될 것이다. 예컨대, 만약 자외선의 강도가 증가한다면 우리들은 피부의 색을 갈색으로 바꾸는 정상적인 방어 기능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현재 대기 오염 물질에 의해 오존층이 궁극적으로 모두 파괴되어 버릴 것이라는 주장이 당연시되고 있다. 하지만 오존층이 파괴되거나 감소한다는 이론은 옳지 않으며, 오존층은 결코 심각할 정도로 감소되어 본 적이 없었다. 지구에 생물체가 나타난 이후 처음 약20억 년 동안에는 오존층이 전혀 형성되어 있지 않았음에 불구하고, 지사의 박테리아와 조류들은 그 기간 동안 강렬한 자외선을 무난히 견뎌 왔다는 것이 그 증거이다. 대기 중에 오전이 지나치게 풍부하게 되면 그것이 부족한 것에 못지않게 생물들은 불이익을 입을 수 있다. 따라서 이산화질소와 염화메틸 화학물이 생물계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도 범지구적 규모의 가이아적 조절 작용의 일환이다.

하지만 자연 생태계를 무리하게 교란시키면 언제든지 대기 성분의 조성을 무너뜨리는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 이산화탄소나 메탄가스와 같은 기체성 물질과 에어로졸 같은 입자성 물질의 생산량을 크게 변화시키면 전 세계적 규모의 교란(攪亂)을 야기할 수 있다. 그러나 가이아가 이러한 인간의 교란적 행위의 결과를 중화하고 보충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존재라는 것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인류는 궁극적으로 좀 더 사려 깊은 경제적 공업 기술을 발전시키게 될 것이며, 가이아의 나머지 부분들과 조화를 이루면서 살아나가는 방법을 체득하게 될 것이다.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반동적으로 ‘자연으로 돌아가자’고 외치기보다는 현재의 공업 기술을 점진적으로 변화시키고 개량시켜서 목표에 도달하는 것이 훨씬 쉽다.

인간의 활동 때문에 우리 지구를 위험에 처하게 하는 주된 요인은 도시화와 공업화뿐만이 아니다. 오히려 인류가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할 중요한 지역은 열대 지방의 삼림과 대륙 연안의 바다이다. 인류는 대륙붕과 열대 지역에서 생산성을 감소시키고, 그 곳의 생태계 유지에 필수적인 몇몇 생물 종들을 멸종시킴으로써, 가이아의 활력에 커다란 손상을 주고 있다. 또, 인류는 잠재적으로 가이아에 크게 유해한 독성 화학 물질들을 막대하게 바다와 공기 속으로 쏟아 부어서 가이아를 분노케 하고 있다.

우리 인류가 생존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가이아의 범주 내에서 인간이 차지하고 있는 지역적 경계가 어디까지인지 명백히 이해하고, 여기에 대한 충분한 지식도 축적하고 있어야 한다. 또한, 우리들은 범지구적으로 가이아의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꼭 필요한 핵심 지역들을 적절한 수준에서 보전해야 하며, 인류가 이곳을 주도면밀하게 보살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다행스럽게도 가이아의 몸체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들은 육지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강의 하구, 늪지와 습지, 대륙붕의 진흙 바닥 속에 있다. 탄소 화합물이 묻히면서 대기 중의 산소 농도를 조절하고 또 필수 원소들을 공기 속으로 되돌려 주는 장소가 곧 이런 지역들이다. 인류가 지구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될 때까지 그리고 이들 지역의 역할에 대해 더 잘 알게 될 때까지 우리들은 인간의 손길이 미치는 범위를 스스로 한정해 더 이상 이들 지역이 파괴되지 못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3. 노자의 『노자』

중국 사상 양대 뿌리는 유가(儒家)사상과 도가(道家)사상이다. 유가 사상이 중국 북방(황하 유역)의 기질을 대표하는 사상이라면 도가 사상은 중국 남방(양자강 유역)의 기질을 대표하는 사상이다. 북방은 날씨가 춥고 자연 조건이 거칠고 메말랐기 때문에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자기 주위의 조건들과 투쟁을 계속해야만 했다. 그러나 남방은 날씨가 온화해 생물이 잘 자라고 물산이 풍부해 사람들은 아무런 걱정 없이 삶을 영위해 나갈 수 있었다. 그 때문에 북방 사람들의 성격은 억세고 투쟁적이며 현실적인 데 비해, 남방 사람들은 부드럽고 평화적이며 낭만적이다. 이런 대조적인 성격은 이 같은 대조적인 문화와 사상을 낳게 했다.

유가 사상이 현실적이라면, 도가 사상은 초현실적이다. 공자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사회를 인의예지 같은 훌륭한 덕과 올바른 예의를 지킴으로써 다스리려고 애쓴 데 비해, 노자는 현실적인 차원을 넘어선 ‘도’라는 절대적인 원리를 추구하면서, 현실 사회가 어지러운 것은 사람들이 자기중심의 판단 아래 행동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노자의 사상은 사람의 이성이 지닌 한계에 대한 각성에서 출발하고 있다.

노자는 인간 이성의 한계성에 대한 각성에서 무의 사상과 자연의 사상을 발전시켰다. 결국, 노자는 인위적이고 의식적인 모든 것을 부정했다. 사람들이 인위적이고 의식적인 모든 것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상태가 자연이며, 무위란 자연을 따르는 것으로서 노자 사상의 핵심이다. 인간들이 불완전한 이성을 바탕으로 하나의 가치를 추구하면서 현대 사회가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할 때, 인간 개개인의 한층 완전하고 차원 높은 자유를 추구하고 인류의 불행을 해소하려는 노자의 사상은 오늘날 좀 더 적극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1) 도란 무엇인가

도(道)는 그릇이 텅 비어 있는 것 같지만 그것을 써 보면 절대로 차거나 넘치치 않는다. 도는 심원해서 만물의 조종(祖宗)인 듯하다. 예리한 것은 깎아 주고 얽힌 것은 풀어 주며, 빛나는 것은 부드럽게 해 주고 먼지 같은 것들과 함께 한다. 그것은 맑고 투명하지만 존재하고 있는 듯도 하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아름답게 보이는 것을 아름다운 것이라 여기고 있지만, 그것은 추한 것일 수도 있다. 모두가 선하게 보이는 것을 선한 것이라 여기고 있지만, 그것은 선하지 않을 수도 있다.

본래 유와 무는 상대적인 뜻에서 생겨났다. 어려운 것과 쉬운 것도 상대적인 입장에서 나온 것이다. 긴 것과 짧은 것도 상대적으로 비교하는 데서 있게 되며, 높은 것과 낮은 것도 상대적인 관념에서 있게 되고, 음악과 소리도 상대적인 소리의 조화를 구별하는 것이며, 앞과 뒤도 상대저인 개념에 불가하다.

그래서 성인은 무위로써 일에 처신하며, 불언(不言)의 가르침을 행하는 것이다. 만물을 생성케 하면서도 얘기하지 않으며, 생겨나게 하고서도 그것을 소유하지 않고, 공로를 이룩하면서도 그것을 자랑하지 않는다. 스스로 공로를 자랑하지 않기 때문에 공로도 그에게서 떠나지 않는 것이다.

하늘은 영원하고 땅도 영원히 존재한다. 하늘과 땅이 영원히 존재할 수 있는 까닭은 그들 스스로 생존하려 들지 않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영원히 생존할 수 있는 것이다. 최상의 선이란 물과 같은 것이다. 물의 선함은 만물을 이롭게 해 주면서도 다투지 않고, 여러 사람들이 싫어하는 낮은 위치에 처신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거의 도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서른 개의 수레바퀴 살이 한 개의 수레바퀴 통으로 집중되어 있는데, 그 중간에 아무 것도 없음으로써 수레는 효용을 지니게 된다. 진흙을 반죽해 그릇을 만들 때도 그 중간에 아무것도 없음으로써 그릇 또한 효용을 지니는 것이다. 문과 창을 내어 집을 만들 때 그 중간에 아무것도 없음으로써 집은 효용을 지니게 된다. 그러므로 유(有)가 유용하게 되는 것은 무(無)의 효용이 있기 때문이다.

만물은 아울러 생겨나고 있지만, 그 모두가 그 근원으로 되돌아감을 볼 수 있다. 만물이란 제각기 번성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 근원으로 돌아가고 있다. 근원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고요함이라 말하는데, 그것은 운명을 따라 되돌아가는 것은 영원불변하는 법칙을 두고 말하는 것이며, 영원불변하는 법칙을 안다는 것은 총명함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영원불변하는 법칙을 알지 못하고 함부로 행동하면 불길할 것이다.

 (2) 자연의 이법

남에게 들리지 않는 말이야말로 자연스러운 것이다. 하루아침을 넘기지 못하고 소나기는 하루도 계속되지 못한다. 누가 이런 현상을 일어나게 하는가. 그것은 천지다. 천지조차 그런 것을 오래 가게 하지 못하거늘 하물며 사람은 어떻겠는가. 그러므로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은 도를 만나면 도에 동화되고, 덕을 만나면 덕에 동화되며, 실수를 한 사람을 만나면 실수에 동화된다.

발돋움을 하고서는 오래 서 있지 못한다. 발걸음을 크게 떼어 놓는 사람은 멀리 가지 못한다. 스스로 드러내려 하는 사람은 밝게 알려지지 않는다. 스스로 옳다고 하는 사람은 분명히 인정받지 못한다. 스스로 자랑하는 사람은 공적이 인정되지 않는다. 스스로 뽐내는 사람은 재능이 알려지지 않는다. 그런 일들은 도의 입장에서 볼 때 먹고 남은 찌꺼기같은 쓸데없는 행동이 된다. 만물이 모두 그런 것을 싫어할 것이다. 그러므로 도를 터득한 사람은 그렇게 처신하지 않는다.

어떤 물건은 혼돈스럽게 이루어져 있는데, 그것은 하늘과 땅보다도 앞서 생겨난 것이었다. 고요하고 텅 빈 듯하지만 홀로 서서 변하지 않고, 두루 행해지면서도 위태롭지 않으니, 천하의 모체라 할 만한 것이다. 그것은 도나 대(大)라고 이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대가 대인 것은 그것이 끊임없이 가고 있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가는 것은 멀리 극도에까지 이른다. 멀리 극도에 다다르면 제자리로 되돌아간다. 그러므로 도란 위대한 것이다. 하늘도 위대하고 땅도 위대하며 왕 역시 위대하다. 사람은 땅을 법도로 삼고, 땅은 하늘을 법도로 삼고, 하늘은 도를 법도로 삼으며, 도는 자연을 법도로 삼고 있다.

도란 언제나 이름도 없고 자연 그대로 소박하며 비록 작게 보이지만 천하에 그것을 지배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임금이 만약 그것을 잘 지킨다면 만물은 왕을 스스로 존경하며 복종하게 될 것이다. 하늘과 땅이 서로 화합해 단 이슬을 내리게 할 것이고, 백성들은 아무런 명령을 받지 않아도 스스로 고루 다스려지게 될 것이다.

처음 인위적으로 제어하기 시작하자 이름이 있게 되었다. 이름이 있게 된 이상 또한 멈춰야 할 곳을 알아야만 한다. 멈출 곳을 알면 위태롭지 않다. 천하에서 도의 위치를 비유로 들면 마치 골짜기 냇물이 강과 합쳐져 바다로 흘러드는 것과 같다.

 (3) 도의 작용

위대한 도는 장마에 내리는 물처럼 어디에나 퍼져 있다. 만물은 이것에 의지해 생성되고 있지만 그것을 내세워 이야기하지 않으며, 공을 이룩하고서도 자기 이름을 내세우지 않는다. 도는 만물을 입혀 주고 길러 주면서도 그 주인 노릇은 하지 않는다. 언제나 도는 욕망이 없어 작은 존재라 보기 일쑤다. 그러나 만물이 귀의하는 데도 그 주인 노릇을 하지 않으니 위대한 존재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끝내 스스로 크다고 내세우지 않음으로써 그의 위대함을 완성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도는 언제나 무위하지만 하지 않는 일이란 없다. 임금들이 만약 이것을 지킬 줄 안다면 만물은 스스로 생성되고 변화될 것이다. 생성, 변화 하는데서 작위를 가하려는 일이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아무런 이름도 없는 통나무 같은 도로써 눌러야만 한다. 아무런 이름도 없는 통나무는 아무런 욕망도 없는 것을 말한다. 욕망이 없음으로써 고요해진다면 온 천하가 스스로 안정될 것이다.

돌아간다는 것은 도의 움직임이며, 약하다는 것은 도의 작용이다. 천하의 만물은 유에서 생성되고 있지만, 유는 무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도란 만물의 모든 것을 돌보아 주고 또 생성케 해 주는 것이다.

위대한 성취는 결함이 있는듯하지만 그 효용에는 결함이 없다. 크게 충만한 것은 텅빈듯하지만 역시나 그 효용은 한이 없다. 크게 곧은 것은 굽은 듯이 보이고, 크게 교묘한 것은 졸렬한 듯이 보이며, 크게 말 잘하는 것은 말을 더듬는 것처럼 보인다. 몸을 심히 움직이면 추위를 이겨 낼 수 있고, 고요히 있으면 더위를 이겨 낼 수 있는 것이니, 맑고 고요함으로써 천하를 다스리는 우두머리가 된다.

도는 낳아 주고 덕은 길러 주어 만물은 형제를 지니게 되고 형세가 이룩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물은 도를 존중하고 덕을 귀중히 여겨야 한다. 도가 소중하고 덕이 귀중한 것은 누군가가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라 언제나 자연스럽게 그러한 것이다. 그러므로 도는 낳아주고 덕은 길러주며 자라게 해 주고 생성케 해 주며, 안정되게 보호해 주는 것이다. 도는 낳아 주되 소유하지 않으며, 그렇게 해 주되 공을 내세우지 않으며, 생장케 해 주되 지배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것을 현묘한 덕이라 말하는 것이다.

사람들을 다스리고 하늘을 섬기는 일은 농사를 짓듯이 하는 것이 최사의 방법이다. 오직 농사를 짓듯이 하는 것은 일찍이 자연을 따르는 것이라고 말한다. 일찍이 자연을 따른 다는 것은 거듭 덕을 쌓는 것을 뜻한다. 거듭 덕을 쌓게 되면 곧 극복하지 못하는 것이 없게 된다. 급복하지 못하는 것이 없게 되면 그 능력의 한계를 곧 알 수가 없게 된다. 그 능력의 한계를 알 수가 없게 되면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게 될 것이다. 나라를 잘 다스리는 모체를 지니고 있다면 영원히 오래도록 생존하게 될 것이다. 이것을 가는 뿌리를 깊이 박고 굵은 뿌리를 굳게 박은 것이라 말하는 것이며, 이것이 장생불사(長生不死)하는 도이다.

사람이 살아 있을 때에는 부드럽고 약하지만, 죽고 나서는 굳고 강해진다. 만물이나 초목들도 살아 있을 때는 부드럽고 약하지만 죽고 나서는 말라서 뻣뻣해진다. 그러므로 굳고 강한 것은 죽음의 무리이고, 부드럽고 약한 것은 삶의 무리다. 그래서 군대가 강하면 승리하지 못하고, 나무가 강하면 꺾이는 것이다. 강대한 것이 아래쪽에 위치하고, 부드럽고 약한 것이 위쪽에 위치하는 원리다. 천하에는 물보다 부드럽고 약한 것이 없다. 그러나 굳고 강한 것을 공격하는 데 물보다 더 나은 것이 없고, 그 무엇으로도 물을 대신할 만한 것은 없다.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고 부드러운 것이 억센 것을 이긴다.

하늘의 도는 마치 활줄을 당긴 활과도 같다. 높은 것은 억누르고 낮은 것은 들어올린다. 남음이 있는 것은 덜어 주고 부족한 것은 보태 준다. 하늘의 도는 남음이 있는 것은 덜어 주고 부족한 것은 보태 주지만, 사람의 도는 그렇지 않다. 부족한 것을 더 덜어 내 남음이 있는 편에 갖다 바친다. 누가 남음이 있어 그것으로 천하를 받들 수 있겠는가. 오직 도가 있는 사람만이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래서 성인은 일을 하지만 한 일을 내세우지 않으며, 공을 이루지만 그 공로를 누리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현명함을 드러내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4.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위하여

러브록의 가이아 가설은 인류가 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볼 수 있게 되면서 본격적인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외계에서 바라보는 지구는 전체가 하나의 조화로운 시스템이다. 만약 우리들이 가이아의 존재를 인정한다면 이 세상에서 인간의 위치는 새로운 관점으로 제시될 것이다. 예컨대, 인간이라는 존재가 현대 과학 기술로 무장하더라도 가이아 속에서는 단순한 한 부분에 지나지 않게 된다.

가이아 가설은 현대 생태학의 주장과는 조금 다른 관점을 지니고 있다. 극단적인 생태학자들은 현대 과학 기술을 해체하고 파괴시킬 때 인류의 생존이 가능하다고 보고 있지만, 가이아 가설은 그렇게 하면 오히려 파멸의 길에 가까워질 것이ㅏ고 주장한다. 이처럼 가장 중요한 가이아의 속성은 모든 지상의 생물들이 적합하게 살 수 있도록 주변 환경의 조건을 끊임없이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가이아의 치명적인 부분만 손상 시키지 않는다면 가이아는 영속될 것이다. 물론, 그만큼 인류에게 주어진 책임도 크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노자의 도가 사상은 가이아 가설이나 생태학과는 무관한 것처럼 보인다. 도가 사상은 생태계 파괴라는 단어조차 없었던 고대 중국에서 주창된 사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인간의 인위적인 질서와 도덕 대신 자연에 순응하고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가이아 가설과 일맥상통(一脈相通)한다. 가이아 가설이 인간의 범위를 벗어나 범우주적인 차원에서 생명체 현상을 관찰한 것처럼, 도가 사상도 ‘도’라는 초월적이고 우주적인 개념으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설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에 생태주의적 관점이 널리 퍼지고 도가 사상과 생태적 사유 사이의 관계가 새삼 주목받고 있다. 이를 보면, 가이아 가설처럼 인류의 사상 속에도 자기 조절적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어서 인류가 바람직하지 않은 방향으로 가는 것을 막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러브록이 주장한 것처럼 가이아가 아무리 유능한 조절계라고 할지라도 인간이 가이아의 치명적인 부분을 파괴하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가 나타날 것이다. 그만큼 인류가 지구의 미래에 대해 맡고 있는 역할이 크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인류의 미래는 지금 우리의 손에 달려 있다.

생각해 볼 문제

1. 러브록의 가이아 가설은 어떤 점에서 보면 생태주의자들과는 그 주장과 시각을 달리하고 있다. 오늘날 생태계의 가장 큰 위험으로 손꼽히고 있는 오존층 파괴를 예로 들어 그 차이점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2. 노자의 도가 사상이 어떤 점에서 현대의 생태주의 관점과 연결될 수 있는지 생각해 보자.
3.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개발의 논리와 생태주의 사이에 갈등이 빚어지는 경우가 자주 있다. 핵폐기물 처리장 건설을 둘러싸고 지역 주민과 정부의 입장이 충돌했을 경우가 한 예이다. 이런 갈등을 극복하고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지속 가능한 발전을 이룩하기 위해 어떤 대안을 마련할 수 있을지 가이아 가설과 도가 사상을 참고로 해서 생각해 보자.

 

 

 

[자료출처-대성학원]

출처 : 대학입시수능정보(재수,점수공개)
글쓴이 : 교육길라잡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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