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익의 『성호사설』
성호사설’의 핵심 사상 ‘성호사설’은 일종의 백과사전이므로 그 내용을 요약하여 보여 준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 오히려 성호가 어떠한 입장에서 ‘성호사설’을 저술했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오히려 그의 학풍과 중요 사상을 살펴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
1. 성호의 학문적 기반
성호의 학문은 철저한 유교적 기반 위에서 이루어졌다. 그의 공부 과정을 보면 사서삼경을 차례로 읽고, 이어서 정자, 주자, 퇴계를 공부하였다. 성호의 학문을 실학에 초점을 맞추어 그가 주자학을 반대하였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으나, 성호는 주자를 매우 존숭하였다. 다만 요즈음의 학자들이 주자의 글을 익히지 않는 것을 수치로 여기는 풍조와 공자, 증자, 자사, 맹자와 시경, 서경에 대해서 소홀하게 생각하는 태도를 좋지 않은 풍습이라고 비판하면서, 나아가 주자의 글에 조금이라도 의심을 품으면 주자를 배반한 것이라고 규정하는 세태는 옳지 않다고 보았다. 이러한 점은 당시 주자를 무조건 맹신하던 일반 유학자들과는 다른 태도이다. 성호는 유학의 근원인 공자와 맹자의 학문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러한 점은 ‘성호사설’의 경사문에 잘 나타나 있다. 경사문은 유학의 경전과 역서에 관한 내용이다.
한편 성호는 학문을 시작한 처음부터 실제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국정의 폐단과 백성들의 고통에 대하여 그 근원을 탐구하고 대책을 생각한 것이다. 성호는 성현들의 학문도 이론적인 것에 그친 것이 아니라 실제 생활에 필요한 학문이었음을 역설하였으며, 실무에 능한 자를 관직에 등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도덕면에서 퇴계를 존숭한 것처럼, 실무면에서는 율곡과 반계를 높이 세웠다. 이와 같은 그의 실학자로서의 면모는 ‘성호사설’ 곳곳에서 볼 수 있다. 특히 그의 실사구시 정신은 몸소 농사를 짓거나 또 여러 지방을 직접 답사하여 얻은 경험을 꼼꼼히 기록한 데에서도 볼 수 있다.
성호의 학풍에 영향을 미친 또 하나의 근원은 서학이다. 성호는 당시 중국에서 들어온 서양의 문물과 과학 서적 및 천주교 관계 서적에 많은 관심을 나타냈다. 이것은 ‘성호사설’에 들어 있는 서양 관계 항목에 잘 나타나 있다. 성호의 서학에 대한 이해는 천문, 역법, 지리 분야에서 가장 자세했고, 과학 기술 분야에서는 극히 단편적일 수밖에 없었으며, 천주교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다.
그런데 성호는 서학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그가 지니고 있었던 전통적 의식의 변화를 경험한다. 첫째로 세계관의 확대와 심화이다. 전통적으로 중국과 그 주변부를 세계의 전부로만 생각해 왔는데, 서양의 지리서와 지도를 통하여 중국이 세계의 일부에 지나지 않음을 깨달은 것이다. 이와 같은 지리적 세계관의 확대는 문화 의식에서도 종래의 중국 중심의 화이관에서 탈피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른바 중화 관념의 핵심은 예악과 문물에 있다고 하여 가령 요나라나 금나라 같은 이적이라 하더라도 예악을 갖추고 정치가 제대로 행해진다면, 이는 그것을 상실한 중국보다도 낫다는 논리를 세울 수가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서양 각국의 문화와 역사에 대한 저술을 접한 성호는 종래의 중국 중심의 역사관을 탈피하고 우리 나라 역사에 관심을 가질 것을 촉구한다.
둘째는 실증적이고 합리적인 것을 중시하였다. 성호는 서양인이 제작한 세계 지도가 실제 항해를 통해 제작되어 믿을 만하다고 하고, 망원경에 의한 천체 관측의 정교함을 찬탄한다. 특히, 서양의 역법은 중국에서 미처 깨닫지 못한 세차와 같은 지극히 미세한 것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고 하여, 과학 기술이 시대의 진전에 따라 발전한다는 관념을 지니게 된다. 성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기구의 법식은 후대의 것일수록 정교하여 비록 성인의 지혜라도 미진한 바가 있으며, 뒷사람이 그것을 더하고 고쳐 나가면 시대가 내려갈수록 더욱 더 정교해지기 마련이다.” 성호는 이 밖에도 서양의 과학 서적에서 볼 수 있었던 실증적인 과학 지식을 널리 수용하고 그 합리성을 인정하고 있다. 예컨대 밀물과 썰물 현상을 달의 영향에 의한 것으로 본다든지, 서양 의학의 인체 해부가 중국 의학에 비하여 상세한 것으로 본다든지, 종래 천재지변을 도덕적으로 해석하던 것을 부정하고 천재지변이 단순한 자연 현상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본 것 등을 들 수 있다.
2. 성호의 정치사상
성호의 정치사상은 왕도 정치이다. 성호는 왕도에 대하여 “성황이 천하를 다스리는 일은 백성들로 하여금 각기 그 즐거움을 질기도록 했을 따름이다.”라고 정의하고, “맹자가 왕도를 논하는 데는 ‘보민’의 한 구절에 지나지 않는데, 이른바 보민이라는 것은 바로 백성이 좋아하는 것은 주고 모이게 하며, 싫어하는 바를 베풀지 않을 따름이요, 집에까지 가서 날마다 보태어 주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여 민생의 안정이 곧 왕도정치임을 말하고 있다. 이어서 성호는 “선왕의 도는 애초부터 모두 백성의 실정에 따르고 사리에 쫓아서 만들어져 있어서 후세에 감히 고칠 수 없는 것이니 어찌 유독 정치만이 그렇지 않겠는가.”라 하여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자신이 기본적으로 유학자임을 표명하고 있다.
그러나 성호의 왕도 정치이념이 단순한 복고주의는 아니다. 성호는 “법이 오래 되면 폐단이 생기고 폐단에는 반드시 변혁이 따르게 마련인 것은 통상적인 이치이다.”라고 하여 자신이 복고주의자가 아님을 밝히고 있다. 나아가 그는 적극적으로 변혁론을 개진한다. “정치가 쇠하게 된 후에 변통의 설이 일어나게 되는 것은 부득이한 것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정치를 말함에는 그 폐단을 개혁하고 좋은 점을 따르자고 주장하지 않은 것이 없어 편안히 앉아서 궁색해지는 것을 기다릴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로써 정치를 논함에는 반드시 먼저 그 폐단을 밝혀서 개혁해야 하고 법을 고수만 해서는 안 된다.”
성호의 왕도 정치 이념은 그의 붕당론에 잘 나타나 있다. 먼저 그는 붕당의 근원으로 양반은 많은데 관직이 적다는 점을 들고 있다. “근세 이래로 관원의 자리는 적은데도 지원자는 많ㅇ나서 한번 임기가 그칠 때 끌어당겨 주는 길을 얻지 못하면, 딸린 권속들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가게 되어 추위에 떨고 굶주릴 일은 뻔하다. 그래서 재물을 도리어 명예나 절조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고 착취를 능사로 삼는 것이다. 그리하여 붕당의 논의가 무성하여 현명한 자와 어리석은 자를 가리지 못하고 국시라고 주장하는 쪽이 이겨서 선과 악이 뒤바뀌게 된다.”고 붕당의 폐단을 서술하고 있다.
이와 같은 붕당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한 방책으로 당시에 시행하던 탕평책에 대해, “붕당의 반대는 바로 탕평이지만 탕평을 실시하면 붕당의 폐해를 빨리 제거할 것 같기도 한데 근세에는 또 이른바 탕평당이라는 것이 있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며 중간에서 또 하나의 붕당을 세워 양편 사람을 천거하고는 혹 발언을 하면 양편을 다 그르다고 한다.”고 비판하였다. 따라서, 붕당의 근본적 대책으로 “양반도 마땅히 농사에 힘쓰는 일로 생계를 삼아야 하며, 장사하는 일이 비록 말단의 이익을 쫓는 것이나 의리를 잃지 않게 처리한다면 역시 불가할 것이 없다.”고 하여 사농합일을 주장하였다.
저자 소개 성호 이익(1681~1763)은 1681년(숙종 7년) 부친 이하진의 유배지인 평안도 운산군에서 태어났다. 성호는 형 잠이 역적으로 몰려 죽음을 당하자 과거를 포기하고 경기도 안산의 첨성리에 은거하면서 평생을 학문에만 전념하다가 1763(영조39년)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성호사설’은 백과 사전과 비슷한 성격의 책이다. 모두 30권으로 천지문 3권, 만물문 3권, 인사문 11권, 경사문 10권, 시문문 3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래, ‘사설’의 의미는 자질구레한 글이란 뜻이다. 일정한 계획에서 쓰여 진 글이 아니고 그때그때 의문나는 점이나 생각에 떠오르는 것을 기록해 두었던 것인데, 그 분량이 많아지자 항목별로 분류하여 책으로 엮은 것이다. |
생각해 볼 문제 |
[자료출처:대성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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