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갑제 추적] 검찰이 덮은 핵폭탄 '노무현 돈줄'..그 증거물 나왔다

노무현 비자금 추정 '13억 돈상자' 사진 폭로

전달자가 비밀작전 공개..현금박스를 환치기로 송금, 노무현 딸의 미국 집값?

 

“노무현 전대통령의 딸 노정연씨 측으로부터 돈상자 일곱 개를 받아 경연희씨(노정연의 지인)쪽으로 넘겨주었고 그 돈은 100만달러로 환치기 되어 미국의 경씨에게 전해졌다. 이 사진을 보라.“

노무현 전대통령의 자살과 함께 검찰이 수사를 중단한 ‘노무현 비자금’ 내막에 대한 폭로가 터져 나와 4월 총선 정국에 큰 충격이 예상된다.

조갑제닷컴이 18일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조갑제 대표가 지난 1월8일 경기도 광주에서 만난 이균호(미국명: 제임스 리)씨는 자신이 2009년 1월 1만원짜리 지폐가 꽉찬 돈상자 7개(총13억원: 당시 환율로 100만달러)를 간첩 접선 같은 비밀작전으로 전달한 경위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그 돈상자들을 찍은 사진까지 증거물로 제시하였다.

이균호씨가 찍은 현금 돈상자 3개의 사진. 그는 경연희씨측 사람에게 이런 돈상자 7개를 전달하였다고 주장했다.
▲이균호씨가 찍은 현금 돈상자 3개의 사진. 그는 경연희씨측 사람에게 이런 돈상자 7개를 전달하였다고 주장했다.

그는 운반과정에서 미국의 형 이달호씨(미국명: 돈 리)가 전화를 바꿔준 경연희씨의 지시대로 돈상자들을 지정하는 사람에게 전달하였고 수령증까지 대신 써주었다고 증언했다. 그 며칠후 언론에서 노무현 일가를 둘러싼 불법자금 문제가 보도되었고 검찰이 수사에 나섰음을 알고 놀랐다고 한다.

조갑제 대표는 이균호씨와 인터뷰 한뒤 미국의 형 이달호씨도 전화로 인터뷰했다.
이달호씨는 “경연희와 노정연은 친한 사이”라면서 “경씨가 권양숙 여사 이야기도 여러번 하였다“고 말했다. 그에게 경씨는 2007년 여름 노무현 대통령의 국빈방미때 ”권여사가 100만달러 가방을 가져와서 자신에게 전해줬다. 40만 달러는 자니 워커 블루 상자에 꽉차 있었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이것은 2009년의 돈상자와는 다른 돈이라고 한다.
이달호씨는 경연희씨가 뉴저지 허드슨 클럽의 콘도를 170만 달러에 사서 노정연씨에게 240만 달러에 팔아 약70만 달러를 남겼다고 본다고 했다.

검찰은 2009년 노무현 비자금 사건 때 박연차 회장이 노정연씨의 부동산 매입(또는 생활) 자금으로 미국으로 불법 송금한 40만 달러를 확인하였다. 검찰은, 2007년 6월 말 노무현 대통령이, 시애틀 경유 과테말라 방문을 위하여 출국할 때 권양숙 씨가 100만 달러가 든 가방을 들고 (전용기를 타고)가 노정연씨에게 전달하였을 것이라고 의심하였다. 여기에 13억(100만 달러) 돈상자를 포함하면 노정연 씨에게 전달된 돈은 240만 달러 정도로서 콘도 매입자금 추정액과 거의 일치한다.

조갑제 대표는 또 이달호씨가 경연희씨로부터 이런 요지의 이야기를 들었다고 보도했다.

“국빈자격으로 방문하면 세관 검사를 받지 않기 때문에 가방에 현금을 넣어 가져 들어올 수 있다고 하더군요. 언젠가는 권양숙 여사로부터 받은 일련번호가 이어진 100 달러 지폐를 카지노로 가져와 며칠 걸려 묵은 돈과 섞어서 썼다더군요. 추적을 피하기 위하여 그렇게 한 듯해요. 한번은 경연희 씨가 ‘서민 대통령은 무슨 서민 대통령...’이라고 비아냥거리더군요.”

노무현 전대통령이 자살한 직후 경씨는 이씨에게 비밀을 지켜달라고 몇차례 협박과 회유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검찰이 수사를 중단하자 경씨의 협박도 잠잠해졌다고 한다.
경씨가 이씨에게 돈상자 운반을 부탁하게 된 것은 경씨의 카지노 출입 인연 때문이었다. 이씨가 일하던 카지노에서 한번에 1000만원씩 거액 베팅을 즐기는 경씨가 백억대 이상 탕진하고도 많은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는 배경 역시 알수 없는 미스테리라고 이씨는 말했다.

조갑제 대표는 상세한 관련 자료를 소재로 인터뷰 기사를 끝내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盧武鉉 세력은 2012년 정치 변혁의 主役(주역)으로 등장하고 있다. 이들은 자신들을 ‘정치적 수사의 희생자’로 선전하고 있다. 이들이 정치를 再開(재개)하려면 노무현 자살로 수사가 중단되고 수사 자료까지 봉인된 상태를 해소해야 할 정치 도의적 의무가 있다.
국민들도 세금을 들여 검찰이 수사한 결과를 알 권리가 있다. 국가와 국민의 法益(법익)을 수호해야 하는 검찰 수사는 결과를 알고 싶은 사람들끼리만 돌려보는 흥신소의 조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노무현 측의 돈 심부름꾼 역할을 한 정상문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은 작년 대법원으로부터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의 뇌물 및 범죄수익은닉처벌법 위반죄로 징역 6년에 추징금 16억 여 원을 확정 선고 받고 복역중이다. 이 사건의 중심 인물인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살하지 않았더라면 본인과 관련자들이 어떤 처벌을 받았을지 짐작하게 해준다. 
수사대상자가 자살하였다고 다른 관련자들에 대하여 수사를 중단하고, 더구나 수사 자료까지 비밀에 붙인 것은 法治(법치)국가에서 보기 힘든 경우이다. 수사가 계속되었더라면 노무현 세력은 도덕성에 치명적 타격을 입고, 정치 再開는 꿈도 꿀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노무현 세력의 政界(정계) 복귀는 수사기록의 공개를 요구한다고 볼 수 있다.
돈봉투는 캐면서 돈상자를 덮을 수 있을까?“

다음은 조갑제닷컴이 보도한 “이 13억 돈상자의 주인은 누구인가?” 기사 전문이다.

<본사=조갑제닷컴 특약>

추적(上) 마스크 쓴 사나이의 '13억 돈상자' 주인은?  

  
“내가 노정연(노무현 딸) 측으로부터 돈상자 일곱 개를 받아
경연희(노정연의 知人) 쪽으로 넘겨주었고 100만 달러로 환치기되어
미국의 경연희에게 송금되었다”는 이균호 씨의 주장과 그가 공개한 돈상자 사진 檢證(검증)


趙甲濟 조갑제닷컴 대표  
 
 

돈 상자 사진. 이균호 씨가 자신의 원 룸에 일시 보관하였던 일곱 개의 돈상자 중 네 개를 먼저 전달하고, 나머지 세 개의 돈상자를 휴대전화로 찍어 둔 것.
▲돈 상자 사진. 이균호 씨가 자신의 원 룸에 일시 보관하였던 일곱 개의 돈상자 중 네 개를 먼저 전달하고, 나머지 세 개의 돈상자를 휴대전화로 찍어 둔 것.
만 원 권이 꽉 찬 세 개의 사과상자를 이균호(미국명: 제임스 리)씨가 휴대전화기로 찍은 시각은 사진 밑에 2009년 1월12일 오후 3시6분으로 적혀 있었다. 지난 1월8일 경기도 광주의 한적한 카페에서 만난 李씨는 그 사진을 보여주면서 필자에게 이렇게 설명해갔다.

그 며칠 전 미국 코네티컷 주 팍스우드 카지노에서 한국인 담당 이사로 근무 중이던 형 이달호(미국명 돈 리)씨가 동생 이균호 씨에게 전화를 걸더니 경연희 씨를 바꿔주었다고 한다. 李 씨는 형이 관리하는 카지노의 단골손님인 경연희 씨(삼성석유 전 회장 딸)를 두 번 만난 적이 있었다. 경 씨는 누군가가 연락을 할 터이니 돈을 받아달라는 부탁을 하였다고 한다. 직후에 ‘경연희 씨로부터 소개를 받았다’면서 이균호 씨의 휴대전화로 연락이 왔다. 두 사람은 만날 약속을 확정짓기 위하여 서 너 번 전화를 더 하였다고 한다. 이균호 씨는 “내가 전화를 할 때마다 전화기가 늘 꺼져 있어 받기만 하였다”고 했다. 두 사람이 ‘접선’을 약속한 곳은 경기도 과천 전철역의 出口(출구), 시각은 2009년 1월10일 오전 10시 前後(전후)라고 李씨는 기억한다. 그는 운전기사가 딸린 남의 자동차를 빌어서 약속 장소로 갔다. 그날은 매우 추웠다.

마스크와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린 사나이

전철역 출구에서 만난 사람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내가 빌린 차에 그분을 태웠습니다. 그가 시키는 대로 우회전, 우회전 하니 비닐하우스가 있는 한적한 곳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길 가에 사과 상자와 라면 상자가 섞여서 일곱 개가 쌓여 있었습니다. 만 원 권으로 속이 찬 상자였어요. 이걸 가져가라는 거예요. 저는 수표로 받는 줄 알았는데, 난감하였습니다. 그런데 13억을 받았다는 사인을 해달라는 거예요. 그 전에 경연희가 ‘수령증을 써 달라고 할 터이니 그때는 내 이름을 써라’고 했어요. 수령증을 써주면서 이들이 일을 좀 서툴게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상자를 차에 실었어요?

“예. 싣고 이동중인데, 경연희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어요. 집으로 가는 길에 양재동에 들러 삼촌뻘 되는 누구에게 그 반, 즉 6억5000만원을 전해달라는 거예요. 제가 ‘운전기사가 옆에 있어 중간에 상자를 풀 수가 없으니 일단 내 집으로 간 뒤 연락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조금 있으니 한 남자가 휴대전화로 연락이 와서 만날 약속을 하였습니다. 저는 제가 세 들어 살던 역삼동의 원 룸에 돈 상자 일곱 개를 일단 올려다 놓고는 돈을 세어 6억5000만원을 네 개의 박스에 넣었습니다. 근처에 사는 누나를 불러 무거운 상자를 들고 르네상스 호텔 사거리로 가져갔습니다. 하도 추워서 큰길가에 돈 상자를 쌓아놓고는 던킨 도너츠 집으로 들어가서 커피를 마시면서 창 너머로 감시를 하였습니다. 이윽고 50대 남자가 나타났어요. 아우디를 몰고요. 명함도 받았는데, 이름이 ‘은oo’라고 기억되어요. 경연희와 동업관계인지, 여하튼 외제 자동차 판매상을 한다고 들었어요.” -그 사람도 마스크를 썼어요?
“아니에요. 그 사람이 ‘이게 뭐예요’ 해서 돈이라고 했더니 ‘어’ 해요. 그도 수표인 줄 알았는데 현금이니 놀랐을 거예요. 차로 실어 갔습니다.”

-나머지는 언제 전했습니까?

“다음 다음 날입니다. 경연희가 나머지도 그 사람에게 주라고 하더군요.”
李균호 씨는 세 개의 돈 상자를 이틀 묵히면서 휴대전화로 사진을 찍어 두었다고 하였다. 돈 상자를 받은 직후 언론에서 노무현 一家(일가)를 둘러싼 불법자금 문제가 보도되더니 검찰 수사가 본격화되었다. 李 씨는 조금 찜찜하였지만 부르는 곳은 없었다.

‘고다리’의 폭로

2010년 9월12일 미국 교포의 안치용씨가 운영하는 폭로 사이트 ‘SECRET OF KOREA’ 자유게시판에 ‘고다리(this4u2003)’란 사람이 이런 요지의 글을 올렸다(이 글은 같은 날 ‘전여옥을 지지하는 모임’이라는 네이버 카페에도 실렸다).
<저는 미 동부에 있는 호텔 카지노에서 10년 가까이 한국인 담당 마케팅 이사로 일해 왔던 사람입니다. 그러던 중 전 삼성사 계열 그룹 회장으로 있던 경00과 그의 딸 경연희가 미화로 천만 불이 넘는 돈을 밀반출하였고, 그중에 일부가 (노무현 딸) 노정연과 관련된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경연희 씨는 수차례에 걸쳐 노무현 전 대통령 가족들로부터 200만 불 이상의 돈을 전달 받았으며 처음 미화로 백만 불을 받았을 때는 일련번호가 차례로 나열된 새 돈이어서 모 카지노 호텔방에서 담뱃재를 털어가면서 구겨서 조금씩 세탁하였다고 털어놓은 바 있고, 2009년 초에는 코네티컷 주에 있는 폭스우즈(FOXWOODS) 카지노에서 노정연과 통화 후(통화 당시 옆에 있었음) 당시 환율로 14억(편집자 注-13억의 착각인 듯)은 제 가족 중 일인(一人)에게 전달되었고, 경연희와 관련된 은oo(注-편집자가 익명화)라는 이에게 전달되었습니다. 그중 30만 불 정도는 제가 아는 환치기 브로커에게 소개시켜주었고 나머지는 본인(注-경연희)이 밀반출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경연희는 2008년부터 2009년 초까지 천만 불이 넘는 돈을 도박으로 탕진하였고, 그밖에 다른 카지노를 더한다면 그 액수는 훨씬 더할 것입니다.>
9월22일에 올린 글에서 ‘고다리’는 이른바 ‘13억 돈상자 의혹’(편의상 필자가 붙인 이름)의 발단을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였다. <경연희가 그의 친구 왕잉(홍콩계 미국인)과 제가 있는 자리에서 노정연과 통화 후> 노정연의 송금이 이뤄졌다고 주장한 것이다.  

“내 옆에서 노정연 씨와 통화하였다.”

 

돈 상자를 전달했다는 역삼동 르네상스 호텔 앞 사거리. 맞은 편 던킨도너츠 앞 길가에 돈 상자를 쌓아두었다고 함.
▲돈 상자를 전달했다는 역삼동 르네상스 호텔 앞 사거리. 맞은 편 던킨도너츠 앞 길가에 돈 상자를 쌓아두었다고 함.
필자는 지난 1월9일 아침 미국 서부 지방에서 사는 ‘고다리’, 즉 이달호 씨와 통화를 할 수 있었다. 그는 폭스우즈 카지노 호텔 특실(하루 숙박료가 1200 달러라고 했다) 응접실에 자신과 경연희 및 왕잉 씨가 함께 있는 가운데서 경 씨가 노정연 씨에게 몇 번 전화를 걸었다고 주장했다. 왕잉 씨는 홍콩계 미국인(여성)으로 경 씨와는 친구 사이다.

-경연희 씨가 통화한 상대가 노정연 씨라는 것은 어떻게 알았습니까?

“그 전부터 경연희-노정연 관계를 알았고 그날도 여러 번 노정연 이름이 나왔어요. 경연희가 전화를 걸기 전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어요. (노정연에게) 아파트를 팔았는데, 지불이 안 끝났다 운운 했습니다.”
경 씨가 노정연 씨에게 판 아파트 대금의 잔금을 지불할 것을 요구한 전화라는 요지였다.

-통화중 ‘노정연’ 혹은 ‘정연’이란 말이 나왔나요? 경 씨가 노정연한테 전화를 건다고 했나요.

“그럼요. 그날 여러 차례 전화가 있었습니다. 경연희가 한국으로 전화를 걸어 ‘정연아’라고 부르면서 100만 달러를 보내라고 하고, 얼마 뒤 노정연이 언제, 어떤 방법으로 돈을 건네겠다고 경연희한테 다시 전화를 하여 설명을 하고, 나는 나대로 동생에게 연락을 해서 어떻게 돈을 받으라고 설명을 해주고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는 동생이 개입된 것은 경연희 씨가 심부름을 시킬 사람이 자리를 비워 응급조치로 동생에게 부탁을 하게 된 때문이라고 했다.
“동생에게 돈을 인수하여 하루만 보관하라고 했어요. 동생이 은oo라는 사람에게 돈상자를 넘겨주는 날 전화가 왔어요. 길가에 돈상자를 쌓아놓고 커피숍으로 들어와 커피를 마시면서 감시를 하고 있는데 ‘아무도 안 가져 가네’라면서 웃더군요.”

“100만 달러는 콘도 매입 잔금인 듯”

이달호 씨는 “경연희가 권양숙 여사 이야기도 여러 번 하였다”고 했다.
“어느 날 얼굴이 상기되어 오더니 권양숙 씨를 만나 식사하고 왔다면서 돈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2007년 여름으로 기억 됩니다. 권 여사가 (노무현 대통령의) 國賓(국빈)방문 때 100만 달러가 든 가방을 들고 와서 자신에게 전해주었다는 거예요. 40만 달러 이야기도 했습니다.”

-100만 달러 가방과는 다른 돈입니까?

“다른 돈이에요. 그 40만 달러는 자니 워커 블루 상자에 꽉 들어 차 있었다고 설명하였습니다.”
이달호 씨는 노정연 씨로부터 100만 달러를 받은 후 경연희 씨가 “며칠 여유를 줄려고 했는데 바로 되네”라면서 ‘즉시 현금이 조달되는 걸 보니 돈이 많이 쌓여 있는 모양이구나’라는 요지의 이야기를 하였다고도 했다.
李 씨는 “경연희가 아무리 부잣집 딸이라고 해도 미국에서 돈을 버는 것 같지 않은데, 1000만 달러가 넘는 거액을 카지노에서 날리고도 2, 3억 원짜리 자동차를 몰고 부동산을 여러 개 보유한 상태에서 잘 사는 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경연희 씨가 쓰는 돈이 부모가 붙여주는 것뿐이 아닐 것이란 주장이었다.

이달호 씨는 경연희 씨가 허드슨 클럽의 콘도를 170만 달러에 사서 노정연 씨에게 240만 달러에 팔아 약70만 달러를 남겼다고 본다고 했다. 검찰은 2009년 노무현 비자금 사건 때 박연차 회장이 노정연 씨의 부동산 매입(또는 생활) 자금으로 미국으로 불법 송금한 40만 달러를 확인하였다. 검찰은, 2007년 6월 말 노무현 대통령이, 시애틀 경유, 과테말라 방문을 위하여 출국할 때 권양숙 씨가 100만 달러가 든 가방을 들고 (전용기를 타고) 가 노정연 씨에게 전달하였을 것이라고 의심하였다. 여기에 13억(100만 달러) 돈상자를 포함하면 노정연 씨에게 전달된 돈은 240만 달러 정도로서 콘도 매입자금 추정액과 거의 일치한다.

“권양숙 여사가 100만 달러 가방 들고 왔다더라.”

이달호 씨는 경연희 씨로부터 이런 요지의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국빈자격으로 방문하면 세관 검사를 받지 않기 때문에 가방에 현금을 넣어 가져 들어올 수 있다고 하더군요. 언젠가는 권양숙 여사로부터 받은 일련번호가 이어진 100 달러 지폐를 카지노로 가져와 며칠 걸려 묵은 돈과 섞어서 썼다더군요. 추적을 피하기 위하여 그렇게 한 듯해요. 한번은 경연희 씨가 ‘서민 대통령은 무슨 서민 대통령...’이라고 비아냥거리더군요.”

이달호 씨는 경연희 씨와 결별한 과정을 이렇게 설명하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살한 직후 경연희가 절 부르더니 그동안 있었던 일에 대하여 입을 닫으라고 협박조로 이야기하였습니다. 카지노 회사 측에도 저에 대한 험담을 많이 하였습니다. 회사는, 경연희가 가장 큰 고객이므로 무시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회사에선 저에게 퇴직 후 6개월간 월 1000만 원 정도의 급여를 계속 지급해줄 터이니 그만두라고 통보하더군요. 그러다가 2010년에 조현오 경찰청장이 노무현 비자금 관련 발언을 하여 시끄럽게 되는 것을 보고 비밀을 많이 알고 있는 저로선 화가 났습니다. 우리 한국 교포들은, 대통령을 지낸 사람이 수사를 받던 중 자살하는 바람에 창피하게 생각하는데, 한국에선 그런 사람을 무슨 영웅처럼 미화하니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런 감정으로 인터넷(전여옥 의원 지지 카페)에 댓글을 올렸더니 일요신문과 SECRET OF KOREA 기자가 연락을 해왔습니다. 댓글이 나간 직후 경연희 씨도 저를 찾아와서 회유를 하려 했습니다.”

중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돈상자 사진

李 씨 형제의 증언과 돈상자 사진의 實在(실재) 등으로 미뤄 볼 때 13억 원이 노정연 씨에게서 나온 돈일 가능성이 있다. 이 가능성이 언론의 취재나 검찰 수사에 의하여 사실로 확인된다면 중대한 문제가 야기된다.

*2009년 5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로 중단된 비자금 수사와는 별도로 노무현 一家에 대한 추가 조사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노무현 비자금 수사를 맡았던 大檢(대검) 중앙수사부 관계자에 따르면 그때 노정연과 경연희를 조사하긴 하였으나(경연희는 전화 조사) ‘13억 돈상자=100만 달러 환치기’ 혐의는 수사선상에 오르지 않았다고 한다. 새로운 혐의(외환관리법 위반 등)가 드러났으니 새로운 수사가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13억 돈상자’가 전달된 2009년 1월10일은 노무현 一家(일가)에 대한 수사망이 좁혀오던 시기였다. 2008년 12월4일 노무현 형 노건평 구속, 12월12일 노무현 측에 비자금을 제공한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 구속. 이런 시기에 노정연 씨가 하루 만에 현금 13억 원을 만들어 미국으로 송금할 수 있었다면 노무현 一家(일가)가 관리하던 비자금이 상당히 많았다는 추리를 가능하게 한다.
*100만 달러가 노정연 씨의 콘도 매입 殘金(잔금)으로 보내진 것이라면 노무현 전 대통령이 검찰 조사 때 부인하였던 미국 내 주택 매입이 사실이란 이야기가 된다.
*2007년 6월 박연차 회장이 급히 마련하여 정상문 비서관을 통해 권양숙 씨에게 전달한(검찰 파악) 100만 달러의 그 후 행방에 대하여 권 씨는 검찰 조사 때 함구하였으나, 검찰은 대통령 전용기에 싣고 가 미국에서 딸이나 아들에게 전해졌을 것이라고 추정하였었다. 이 추리는, 이달호 씨가 전한 경연희 씨의 주장과 일치한다.
*노무현 세력이 민주통합당의 주도권을 장악해가고 정치권이 ‘돈봉투’ 사건으로 시끄러운데 그보다 훨씬 심각한 ‘13억 돈상자 사건’이 수사대상이 되면 상황이 복잡해질 것이다. (이 기사전문은 '월간조선'에도 게재함)


추적(下) '13억 돈상자' 미스테리
  
'권양숙 씨가 대통령 전용기에 100만 달러가 든 돈가방을 실어
미국으로 반출하였다'는 傳言에 대한 수사 검찰 측 견해, 경연희 부친의 반론 등.


趙甲濟   조갑제닷컴 대표

 
 ‘경연희, 1000만 달러 이상 도박으로 날려’

미국 코네티컷 팍스우즈 카지노 호텔의 전경(上)과 내부. 제보자 이달호씨는 경연희씨가 이 호텔 특실에서 노정연씨에게 전화하여 100만달러 송금을 부탁했다고 주장했다.
▲미국 코네티컷 팍스우즈 카지노 호텔의 전경(上)과 내부. 제보자 이달호씨는 경연희씨가 이 호텔 특실에서 노정연씨에게 전화하여 100만달러 송금을 부탁했다고 주장했다.
‘고다리’의 폭로 글에 맨 처음 주목한 이는 일요신문 李洙香(이수향)기자였다. 2010년 10월14일 일요신문은 <‘허드슨클럽’ 키맨 경연희 씨 미국 카지노서 100억대 탕진 전말. 카지노 VIP 담당자 “노정연한테 거액 전달받았다”>는 제목으로 긴 추적 기사를 썼다. 李 기자는 이달호씨를 A씨라고 호칭하였는데, 그와 전화 인터뷰를 하고 많은 자료를 받았다고 한다. 

일요신문은 <유명 재계인사의 딸이 해외에서 100억 원대의 상습도박을 해온 사실이 확인됐다>면서 <문제의 인물은 경00(注-편집자가 익명처리)전 회장의 딸 경연희 씨>라고 特定(특정)하였다.

<경 전 회장 딸 연희 씨의 상습도박 사실을 폭로한 인물은 미국의 한 카지노에서 오랫동안 VIP고객을 담당해왔던 A 씨>인데 이메일 및 국제전화를 통해 “경연희 씨는 미국의 유명 카지노에 상습 체류하며 도박을 일삼았고 적어도 130억 원 이상을 탕진했다”고 주장하였다는 것이다.
이수향 기자는, <재계(財界) 유명인사 딸의 100억대 상습도박 의혹을 넘어 ‘노무현 비자금’ 사건으로 확전될 조짐이 일고 있는 사건의 전말을 들여다봤다>면서 이렇게 썼다.

<경연희 씨가 출입한 문제의 카지노는 미국 코네티컷 주에 소재한 FOXWOODS CASINO(약 1만 8000㎡)로 현재 세계 2위의 규모를 자랑하고 있는 곳이다. A 씨에 따르면 경 씨가 F 카지노에 드나들기 시작한 것은 10년이 넘었고, 본격적으로 수십 억대가 넘는 거액의 도박을 하기 시작한 것은 2007년부터다. A 씨는 “2008년부터 2009년 초까지 경 씨가 F 카지노에서 바카라로 탕진한 돈만도 1000만 달러(당시 한화 130여 억 원)에 달하는데 또 다른 L, M 카지노에서 탕진한 금액까지 합하면 1000만 달러가 훨씬 넘는다”고 폭로했다.>
 A 씨는 경 씨가 카지노에 출입한 시간과 숙박기록, 액수 등이 체크된 컴퓨터 전산기록 등 구체적인 物證(물증)을 일요신문에 건넸다고 한다. 이수향 기자가 F 카지노 고객관리 시스템 전산기록을 확인한 결과 2008년 한 해 동안 경 씨가 F 카지노에 출입한 날짜는 총 173일로 그곳에서 탕진한 액수는 미화 750만여 달러였다고 한다.

盧 시애틀 체류 23시간, 무슨 일이?

李 기자가 입수한 F 카지노 전산기록을 보면 <문제의 허드슨클럽 공동매입자인 왕잉 역시 경 씨와 마찬가지로 광적으로 카지노 출입을 한 것으로 나와 있다. 전산자료 확인결과 왕잉이 F 카지노에 출입한 횟수는 2007년 199회, 2008년 243회에 달했다>는 것이다. A 씨는 “카지노 출입 횟수는 왕잉이 더 많지만 액수는 경 씨가 훨씬 많다. 경 씨는 한 번에 1000만 원 이상씩 베팅했다. 또 경 씨와 왕잉은 카지노 시스템상 스파우스(spous· 카지노 출입시 체크하면 같이 어카운팅되는 시스템)로 묶여 있었다”고 주장했다.
경 씨는 미국에서 투자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는데 한 명의 직원만 두고 있는 수준이라는 것이 A 씨의 얘기다. <경 씨 집안이 상당한 재산이 있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한 개인이 하기에는 도박액수가 너무 크고 2008년에서 2009년 사이 채 1년도 안 되는 기간 동안 1000만 달러 이상을 카지노에서 탕진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라고 李 기자는 판단하였다.
더욱 이상한 것은 엄청난 금액을 도박으로 탕진하고도 모자라 카지노에 거액의 빚을 지고 있던 경 씨가 상당한 부동산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이라고 한다. A 씨에 따르면 경 씨는 이미 드러난 허드슨클럽 400호와 435호 외에도 미국 내 다른 주택과 보스턴 등지에 부동산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고 한다.

특히 주목할 부분은 A 씨가 경 씨로부터 노 전 대통령 일가의 자금과 관련된 얘기도 여러 번 들었다고 밝힌 점이다.
“권양숙 여사가 일련번호가 나열된 새 돈 100만 달러를 국빈특권으로 세관통과해서 경 씨에게 전달했으며, 카지노 호텔방에서 구기고 섞는 식으로 돈세탁을 했다”는 얘기를 경 씨로부터 들었다는 것이다. “2006~2008년으로 기억하는데 여하튼 노 전 대통령 사망 전에 이런 얘기들을 수차례 들었고 불과 몇 달 전에도 들었다”는 게 A 씨의 주장이었다.
노무현 비자금 수사가 진행중이던 2009년 4월14일 연합뉴스는 <盧 시애틀 체류 23시간…무슨 일 있었나>란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노 대통령이
2007년 6월30일,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한 과테말라 IOC(국제올림픽위원회) 총회 참석차 출국하기 직전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 미화 100만 달러를 받았고, 경유지인 미국 시애틀에서 아들 건호 씨(당시 스탠퍼드 대학교에서 경영학 석사 과정)를 만나 이를 전달했다는 '그림'을 검찰이 그리고 있다고 했다. 검찰은 <노무현의 시애틀 방문 행적을 추적하기 위해 지난 13일 권찬호 당시 시애틀 총영사 등을 불러 조사했다>는 보도였다.

“100만 달러는 한 가방분”

당시 수사에 참여하였던 한 인사는 “박 회장이 급하게 마련한 100만 달러는 노 대통령이 출국하기 하루 전 청와대 정상문 총무 비서관에게 전달되었다”면서 “우리는 권양숙 여사가 대통령 전용기에 100만 달러가 든 가방을 실어 미국에 도착, 직접 아들이나 딸에게 전달한 것으로 봤지만 확인을 하지 못한 상태에서 수사가 종료되었다”고 했다.
필자가 “100만 달러를 혼자서 옮길 수 있느냐”고 했더니 그는 “100달러짜리로 100만 달러를 구성하면 여행 가방 정도이다”고 했다. A 씨, 즉 이달호 씨는 필자에게 “경연희가 뉴욕 맨해턴에서 권양숙 여사를 만나 식사를 하고 돈을 받아왔다고 말하였다”고 전했으나 지금으로선 확인되지 않는 주장이다. 

미국 교포 안치용 씨가 운영하는 ‘SECRET OF KOREA’라는 인터넷 매체도 2010년 10월12일 A씨(이달호)와 인터뷰한 내용을 <‘노무현 비자금 백만 달러 환치기 직접 개입’ 폭로: 삼성 전 임원 딸 관여-검찰 수사와 일부 일치>라는 제목으로 기사화하였다. 이 매체는 A씨를 코네티컷 주 모처에서 만났다고 하였다.  A 씨는 노정연 씨와 경연희 씨의 관계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하였다고 한다.
<경연희 씨는 1969년생, 노정연 씨는 75년생으로 여섯 살 차이가 나지만 경 씨의 친구(여자)의 여동생이 노정연 씨의 절친한 친구여서 서로 만나게 되었다. 노 씨 측의 자금을 받은 은모 씨는 (여동생의) ‘친척’으로 알고 있다. 은 씨는 외제차 중개상으로 알려졌다.>
A 씨는 또 2009년에 노무현 비자금 수사가 진행되고 노정연의 뉴저지 콘도 매입 의혹이 제기되자 경 씨가 자신에게 절대로 입을 열지 말라고 호소하였으며, 2010년에 들어 경찰청장 조현오의 노무현 차명계좌 발언 이후엔 ‘기자들과 접촉 말라’는 압력을 받았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李仁圭 당시 중수부장의 반격

노무현 비자금 수사에서 중요한 쟁점은 뉴저지 허드슨 클럽의 콘도 실소유주 문제와 송금 과정이었다. 
작년 6월,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으로서 '박연차 게이트' 수사를 총지휘했던 李仁圭(이인규) 변호사는 동아일보 인터뷰를 통하여 문재인 노무현 재단 이사장이 쓴 '문재인의 운명' 이란 책의 내용을 반박한 적이 있다. 李 변호사는, 문 이사장이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의 진술 말고는 아무 증거가 없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 것에 대하여 핵심적인 반박을 하였다.

그는, 2009년 4월30일 검찰의 소환조사 때 '노 전 대통령은 미국에서 집을 산 적이 없다고 부인했지만 바로 그날 오후 5시경 노 전 대통령의 딸 정연 씨가 미국 뉴저지에서 주택을 구입했음을 의심할 만한 미국 당국의 조회 결과가 한국 검찰에 도착했다”고 주장하였다. 한국 검찰의 조회 요청을 받아 노정연의 콘도 매입 자금을 조사, 통보한 기관은 美 재무부 소속인 금융범죄처벌기구(The Financial Crimes Enforcement Network : FinCEN)로 밝혀졌다. 한국 정부는 돈 세탁 및 테러자금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기 위하여 금융정보원을 통하여 이 기구와 정보 교류 체제를 구축한 관계이다.
미국의 FinCEN이 한국 측에 통보한 내용은, 노정연 씨와 관련된 5만 달러가 부동산 매입자금으로 입금되었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검찰은 이와는 별도로 홍콩에 개설된 왕잉의 은행계좌로 박연차 회장이 40만 달러를 입금시킨 것을 확인하였다.

경연희 씨의 아버지는 필자에게, 허드슨 강이 내려다 보이는 허스든 콘도 435호의 실소유주는 노정연 씨이고(서류상으로는 경연희 씨 소유) 정연 씨가 잔금을 치르지 않은 상태에서 비어 있다고 했다. 이는 딸이 미국에서 집을 산 사실이 없다고 부인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진술을 뒤엎는 것이다.

A 씨는, 2009년 1월의 100만 달러는 노정연 씨가 콘도 매입 잔금으로 경연희 씨에게 지불하는 돈인 듯하였다고 필자에게 말하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검찰 조사에서 미국 내 주택 매입 사실을 부인하였으나 자살 직후인 2009년 6월1일
문재인 전 비서실장은 한겨레 신문과 한 인터뷰에서 다른 이야기를 하였다.

“노 전 대통령은 정 비서관이 받았다는 3억 원과 100만 달러의 성격을 제대로 몰랐다. 그 돈이 그냥 빚 갚는 데 쓰인 게 아니고, 아이들을 위해 미국에 집 사는 데 쓰인 것을 알고 충격이 굉장히 크셨다. 그런데도 홈페이지에는 수사를 정치적 음모로 보고 대통령을 일방적으로 비호하는 글들이 올라오니까 ‘그건 아니다. 책임져야 할 일이다’고 생각하고 계셨다.”

경연희-노정연 이면계약서

2010년 12월6일자 일요신문에서 李洙香 기자는 후속 기사를 내보냈는데, 문제의 뉴저지 콘도 의혹과 관련, 중요한 정보를 소개하였다. <기자는 A 씨를 상대로 추가 취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문서를 입수했다>는 것인데, <허드슨클럽 435호 소유권에 대한 노정연-경연희 간의 ‘이면계약서’>를 A 씨로부터 구했다는 것이다.
경 씨가 운영하는 투자회사 문서로 작성된 이면계약서에는 “2007년 10월 5일, 경연희와 노정연 이 두 사람의 상호동의하에 24th Avenue Port Imperial, Unit #435, West New York, NJ 07093의 소유권이 노정연 앞으로 이전되었습니다. 이 재산은 경연희 명의로 2년 동안 돼 있지만, 노정연 앞으로 소유권이 이전될 것이기에 노정연도 똑같은 이 집에 대한 이익 권리를 가질 것입니다. 2008년 10월 5일부로 완전히 노정연 이름의 소유재산이 될 것입니다”라고 명시되어 있다는 것이다. 하단에는 2007년 10월8일자 두 사람의 자필 서명이 들어가 있었다. 이수향 기자는, <핵심은 두 사람이 435호에 대한 이면계약을 맺은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라면서 <정연 씨가 435호의 실소유주가 아니라면 이면계약서가 존재할 필요가 없다. 경 씨로부터 435호를 사들인 정연 씨가 자신 소유임을 표면상 감추는 동시에 추후 소유권을 주장하는 데도 문제가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 이면계약서를 작성한 게 아니냐는 의혹의 시선이 쏠리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다 털어놓았는데 왜 수사를 않나?”

A 씨는 이수향 기자에게 “다 걸고 털어 놓는데 수사 않는 이유 뭐냐”고 하소연하였다고 한다.
“경연희 씨는 엄청난 금액을 해외로 빼돌렸고 그 중 100만 달러가 유출되는 과정에는 내가 직접 개입하기도 했다. 그녀는 빼돌린 자금 중 상당 금액을 도박으로 탕진했고 확인된 것만 130억 원이 훨씬 넘는다. 돈을 건네받고 전달한 사람, 환치기에 개입한 사람, 도박사실을 증명해주는 카지노 전산자료와 증인, 통화기록 등 빼도 박도 할 수 없는 증거들이 있다. 연예인들의 푼돈 해외도박에는 거품을 물고 늘어지면서 지저분한 수법으로 거액을 해외로 빼돌리고 수 백 억대 도박을 일삼은 사람에 대한 수사를 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손 놓고 있는 한국 수사기관을 이해할 수 없다.”
A씨는 이수향 기자와 수십 차례에 걸친 국제전화와 이메일 인터뷰를 통해 “(경연희씨가) 다른 카지노에서 탕진한 금액까지 합하면 몇 백억에 달한다. 경 씨의 집안이 아무리 돈이 많다 해도 말도 안 되는 얘기다. 그 자금에 대해 검찰과 국세청 조사가 진행돼야 한다. 철저히 조사하고 법대로 하면 된다”고 강조했다는 것이다.

경연희 父親의 주장

필자는 경연희 씨의 설명을 듣기 위하여 미국으로 여러 차례 전화를 걸었으나 받지 않았다. 그 대신 경연희 씨의 부친을 만났다. 景 전 회장의 한 시간에 걸친 설명을 정리하면 이렇다.
<딸은 친구 동생과 노정연 씨가 친구 사이라 오래 전부터 알고 지냈다. 딸이 권양숙 여사와 만난 적은 없다. 딸(경연희)은 미국에서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외동딸인데 국내 재산이 적지 않아 송금해준 적이 있다. 13억 원(100만 달러) 송금 건을 주간지에서 읽고 딸에게 물었더니 아니라고 하더라. 상식적으로 판단해도 A 씨가 곁에 있는데 그런 식으로 노정연한테 전화를 걸었을까? 딸이 도박을 그렇게 많이 한 사실도 없다. 허드슨 클럽의 콘도는 실제 소유주가 노정연이고 서류상 주인은 딸이다. 잔금을 다 못 받았다고 한다. 주간지에 보도된 기사를 읽었으나 반론을 하면 더 커질 것 같아 대응하지 않았다. 노무현 관련 수사 때는 내가 딸의 전화번호를 검찰에 알려주어 검사와 통화하도록 하였다.>

이런 주장에 대하여 13억 원 돈상자 사진을 찍어둔 이균호 씨는 “내가 그날 돈상자를 받아 넘기면서 대 여섯 번 경연희와 통화하였으니 수사기관에서 통화기록을 조회하면 알 것 아닌가”라고 했다. 李 씨 형제는 “이렇게 확실한 자료들을 공개하였는데 왜 수사를 하지 않느냐”고 불만이 대단하였다. 2009년 노무현 비자금 사건 수사에 참여하였던 한 핵심 인물은 “13억 송금 건은 수사를 중단한 뒤 들었다. 李 씨가 만들어서 하는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고 했다.
노정연 씨 측에도 일요신문 기사에 대한 해명을 요청하였으나 월간조선 마감 날까지 답이 오지 않았다. 

불발 상태의 폭발물

필자는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일요신문과 SECRET OF KOREA에 실린 경연희 노정연 씨 관련 기사를 읽고 놀랐다. 두 매체가 제기한 의혹은 엄청난 폭발성, 즉 큰 뉴스 밸류를 지녔는데도 ‘대사건’으로 폭발하지 않은 상태이다. 방송과 신문 등 주요 언론에서 다루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무현 비자금 사건에 관심이 많은 필자도 몰랐다. 정상적인 언론이 작동하는 나라에선 있을 수 없는 현상이다. 좌편향된 언론은 從北(종북) 좌파에 불리한 기사를 묵살, 축소하고 우파에 불리한 기사는 키우는 경향이 있다.
두 매체와 A 씨가 제기한 의혹은 아직 眞僞(진위) 가 확정되지 않은 상태이다. 언론의 추적 보도가 없고 검찰이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의혹의 스케일과 深度(심도)가 예사롭지 않다. 이균호 씨가 찍었다는 ‘13억 돈 상자 사진’이 여러 의혹들을 푸는 열쇠이다. 李 씨 형제는 13억 원이 노정연 씨가 준 것이며, 이는 ‘비자금’의 일부일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인규 변호사(당시 대검 중앙수사 부장)는 조현오 경찰청장의 노무현 측 차명계좌 발언에 대해 “틀린 것도 아니고 맞는 것도 아니다. 꼭 차명계좌라고 하긴 그렇지만. 실제로 이상한 돈의 흐름이 나왔다면 틀린 것도 아니지 않나'라고 말하였었다(중앙선데이 보도).
검찰이, 본격적인 비자금 수사로 확대될 수도 있는 단서를 포착, 파고들려고 하였을 때 노무현 씨가 자살함으로써 ‘노무현 비자금’은 미결상태로 남았다. 조현오 청장의 발언이 봉인된 수사기록을 열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였으나 그렇게 되지 않았다. 이번 ‘13억 돈상자 사건’이 두 번째 계기인 셈이다.
이수향 기자는 두 번의 침층 취재로 위의 의혹들을 제기하였음에도 노무현 및 경연희 씨 측으로부터 어떤 항의를 받거나 고소를 당한 적이 없다고 한다. 李 씨 형제도 마찬가지. 정치의 세계에선 ‘반박되지 않는 거짓말은 진실로 통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인데, 자신들에게 치명적으로 불리한 폭로에 대하여 피해 당사자들이 침묵한다는 건 ‘사실 인정’으로 간주될 소지가 있다. 

돈봉투는 캐고 돈상자는 덮을 수 있을까?

한편, 盧武鉉 세력은 2012년 정치 변혁의 主役(주역)으로 등장하고 있다. 이들은 자신들을 ‘정치적 수사의 희생자’로 선전하고 있다. 이들이 정치를 再開(재개)하려면 노무현 자살로 수사가 중단되고 수사 자료까지 봉인된 상태를 해소해야 할 정치 도의적 의무가 있다. 국민들도 세금을 들여 검찰이 수사한 결과를 알 권리가 있다. 국가와 국민의 法益(법익)을 수호해야 하는 검찰 수사는 결과를 알고 싶은 사람들끼리만 돌려보는 흥신소의 조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노무현 측의 심부름꾼 역할을 한 정상문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은 작년 대법원으로부터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의 뇌물 및 범죄수익은닉처벌법 위반죄로 징역 6년에 추징금 16억 여 원을 확정 선고 받고 복역중이다. 이 사건의 중심 인물인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살하지 않았더라면 본인과 관련자들이 어떤 처벌을 받았을지 짐작하게 해준다. 
 수사대상자가 자살하였다고 다른 관련자들에 대하여 수사를 중단하고, 더구나 수사 자료까지 비밀에 붙인 것은 法治(법치)국가에서 보기 힘든 경우이다. 수사가 계속되었더라면 노무현 세력은 도덕성에 치명적 타격을 입고, 정치 再開는 꿈도 꿀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노무현 세력의 政界 복귀는 수사기록의 공개를 요구한다고 볼 수 있다. 돈봉투는 캐면서 돈상자를 덮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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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보다 빠른 입자 있나" 진실 검증
올해 주목해야 할 과학기술 핫이슈
  • 힉스 입자와 관련, 지난해 말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의 아틀라스(ATLAS)와 CMS 연구팀은 약 95%의 신뢰도로 각각 116~130GeV와 115~127GeV 영역에서 힉스 입자의 붕괴 흔적을 찾았다고 발표했다.
올해는 그 어느 해보다 많은 중요한 과학기술계 이슈들이 예고돼 있다. 현대 물리학의 대변혁을 초래할 빛보다 빠른 입자의 존재 여부 규명부터 나로호 3차 발사까지 올해 주목해야 할 국내외 핫 이슈들을 소개한다.

# 빛보다 빠른 입자의 진실
중성미자 물질 추가실험 나서… 검증 땐 상대성 이론 뒤엎어져

지난해 9월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은 빛보다 빠른 입자의 진실 검증이 올해 완료된다. 당시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는 거대강입자가속기(LHC)에서 이탈리아 그란사소 실험실까지 중성미자(neutrino)를 발사한 결과 빛보다 60.7(±6.9)ns(나노초) 빨리 도착했다고 발표했다.

이후 57.8(±7.8)㎱로 정정되기는 했지만 이는 빛보다 빠른 물질은 없다는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 이론에 정면 배치되는 결과로 현대과학의 일대 변혁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특히 지난해 11월 CERN의 중성미자관측 프로젝트오페라(OPERA)팀은 추가 보완실험에서도 중성미자가 62.1(±3.7)㎱ 빠르게 도착했다고 알려왔다. 하지만 워낙 중대한 사안인 만큼 CERN과 학계는 다른 곳에서 동일한 결과가 재현돼야 이를 확신할 수 있다는 입장을 피력해왔다.

이와 관련, 현재 미국 페르미가속기연구소의 미노스(MINOS)와 일본 T2K 연구팀이 관련 실험을 진행 중이며 올해 내 그 결과가 나온다. 오페라 실험의 한국팀 대표인 경상대 고에너지물리연구팀의 윤천실 박사는 "미노스와 T2K에서 오페라 실험과 같은 결과가 나오면 중성미자가 빛보다 빠르다는 게 거의 확실해진다"며 "T2K는 측정거리나 중성미자 에너지가 오페라 때와 달라 신뢰성에서 의미가 더 크다"고 밝혔다.

# 소행성 지구 접근, 충돌 위험은?
오는 31일 '에로스' 통과 앞둬… 학계 "100년 내 부딪침은 없다"

이달 31일 직경 13㎞의 소행성 '에로스(Eros)'가 37년 만에 가장 가까운 거리로 지구를 지나친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최대 근접거리가 지구에서 2,655만4,000㎞나 돼 충돌 가능성은 전혀 없다.

이번은 그렇지만 다음 번에도 그럴까. 천문학자들에 따르면 지구와 이동궤도가 겹치는 직경 1,600㎞급 소행성 중 3분의1이 30만년에 한 번 꼴로 지구충돌 가능성이 있다. 지난 1989년 3월에는 지구가 6시간 전에 지나친 지점을 직경 1㎞의 소행성이 통과하기도 했다. 이에 미 항공우주국(NASA) 등은 '지구근접물체(NEO)'의 발견과 감시에 많은 공을 기울이고 있다.

NASA에 의하면 현재 가장 위험도가 높은 NEO는 직경 130m의 '2009 FD'로 오는 2185년 3월29일 지구충돌 확률이 556분의1이다. 또 2040년 2월5일에는 충돌 확률 625분의1인 직경 140m의 '2011 AG5'가 지구로 다가온다. 둘 모두 도시 하나는 날릴 수 있는 크기다. 다만 한국천문연구원 우주과학연구센터의 문홍규 박사는 수치에 너무 놀랄 이유가 없다고 강조한다. 문 박사는 "충돌 확률이 높은 NEO 대다수는 근래에 발견된 것으로 충분한 관측이 이뤄지지 못해 오차범위가 크다"며 "천문학계는 존재가 파악된 8,500여개의 NEO 중 100년 내 지구와 충돌할 것은 없다고 판단하고 있다"고 밝혔다.

# 힉스 입자와 표준모델
우주 생성 비밀 밝힐 키워드… 규명 못하면 물리학계엔 딜레마

올해 과학계의 또 다른 핵심 이슈는 신의 입자라 불리는 '힉스 입자(Higgs boson)'의 존재 규명이다. 현대 입자물리학의 근간이 되는 표준모형 이론에서는 우주가 17개의 기본 입자로 구성돼 있다고 보는데 오직 힉스 입자만이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게다가 힉스 입자는 나머지 16개 입자에 질량을 부여한 주체로 추정돼 질량의 기원과 우주 생성의 비밀을 밝힐 핵심 키워드이기도 하다.

바로 이 힉스 입자의 존재 여부가 올해 최종 결론지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LHC를 활용, 1년 넘게 힉스 입자를 찾아온 CERN 연구팀에 의해 힉스 입자 존재 가능 영역, 즉 수색해야 할 구간이 질량 기준 115~135GeV(기가전자볼트)로 좁혀지면서 연말쯤 신뢰도 100% 수준의 결론 도출이 예견돼 있는 것. 그런데 혹여 발견에 실패한다면. 최기운 한국과학기술원(KAIST) 물리학과 교수는 "그때는 표준모형에 치명적 결함이 입증돼 기존 입자물리학 법칙의 패러다임이 무너진다"며 "물리학계는 힉스 입자가 없는 이유를 설명해야 하는 새 도전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 나로호 삼고초려
항우연, 10월내 세번째 발사… 이달까지 성능평가 마치기로

두 차례의 발사 실패라는 시련을 겪은 나로호가 올해 마지막 3차 발사를 시도한다.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은 러시아 흐루니체프와 나로호의 2차 발사 실패 원인에 분석을 마치고 개선∙보완 조치를 적용한 뒤 1단 발사체 제작 점검 및 이송 등의 준비를 거쳐 올해 10월 내 3차 발사를 추진할 계획이다. 러시아 측이 맡은 1단 로켓은 이미 제작에 착수됐으며 항우연은 2단의 제작을 4월쯤 마무리할 방침이다.

이와 관련, 나로호는 2단부 비행종단시스템(FTS)의 화약장치를 제거하고 고전압 기폭 장치가 저전압으로 변경되며 페어링 분리용 고전압 장치도 저전압 장치로 바뀔 예정이다. 또한 3차 발사에서는 1∙2차 발사 때와 달리 과학기술위성 2호가 아닌 100㎏급 나로과학위성이 탑재된다.

나로과학위성 제작을 책임지고 있는 강경인 KAIST 인공위성센터 실장은 "현재 위성 제작을 완료하고 이달 내 진동, 환경시험 등 성능평가를 마칠 예정"이라며 "나노호 발사가 성공하면 지구 1,500㎞ 상공에서 1년간 우주방사선량 측정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고 전했다.

재산 7조원 아일랜드 갑부 ‘마이티 퀸’의 이상한 파산

[중앙일보] 입력 2012.01.09 00:00 / 수정 2012.01.09 10:38

꼬리에 꼬리 무는 의혹

션 퀸
아일랜드 최고 갑부가 파생 금융상품으로 거액을 날리고 막대한 은행 빚까지 진다. 갑부가 파산 신청을 한 가운데, 그의 회사 자산관리 책임을 맡은 신임 CEO의 차량엔 폭발물이 터진다. 본사 건물에 느닷없이 불도저가 돌진한다. 그의 해외 자산 추적 과정에선 회사 주주 의결권이 노트북 한 대 값에 양도됐던 사실이 밝혀지는 등 희한한 일이 꼬리를 무는데….

 미스터리 금융소설 줄거리가 아니다. 아일랜드에서 벌어지고 있는 실화다. 주인공은 한때 60억 달러(약 7조원, 2008년 포브스 집계)의 부를 자랑했던 아일랜드의 전설적 자수성가 사업가 션 퀸(65). 막대한 영향력 때문에 ‘마이티(Mighty·힘센) 퀸’이라고 불렸던 그는 지난해 11월 법원에 파산 신청을 하고 공식적으론 ‘무일푼’이 됐다.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IHT)은 7일(현지시간) 퀸의 롤러코스터 같은 인생과 파산 뒷얘기를 전했다.

아일랜드 밸리콘넬에 있는 션 퀸 일가 저택의 조감도. 실내골프장과 수영장에 영화관도 갖춘 이 호화저택은 당초 퀸 부부 명의로 등록됐다가 지금은 다섯 자녀의 명의로 돌려졌다는 의혹을 사고 있다. [데일리메일 웹사이트]

 북아일랜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퀸은 28세이던 1975년 100파운드(약 18만원)를 빌려 채굴 사업을 시작했다. 아일랜드 경제 호황과 맞물려 사업은 시멘트·호텔·부동산·보험 등으로 확장됐고, 퀸은 아일랜드 최고 부호로 떠올랐다. 14개국에 70여 회사를 거느렸고, 팰컨사의 전용 제트기까지 소유했다. 그러나 2007년 앵글로 아이리시 은행(이하 앵글로)의 파생상품에 투자하면서 몰락이 시작됐다. 2008년부터의 세계 금융위기와 함께 은행의 주가는 곤두박질쳤고 끝내 정부의 구제금융을 받아 국유화됐다. 퀸은 앵글로의 주가가 하락하는 동안에도 이 은행으로부터 대출을 받아 투자규모를 늘리다가 결국 은행 측에 총 28억 유로의 빚을 졌다. 지난해 영국령 북아일랜드 법원을 통해 파산 절차를 밟을 당시 그의 손엔 “1만1000유로(약 1600만원)와 구식 메르세데스 자동차, 약간의 땅”(퀸 주장)만 남은 신세였다.

 진짜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퀸에게서 돈을 떼이면 은행 손실이 고스란히 납세자에게 돌아갈 상황. 아이리시 은행 정리공사(IBRC·앵글로 은행의 법정관리주체)는 전 세계에 흩어진 퀸그룹의 자산 찾기에 나섰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조직화된 배후라도 있는양 물리적 방해가 번번이 일어났다. 자산을 압류하려고 하면 딱 그 가치만큼 담보를 설정했던 채권자가 등장했다. 우크라이나·인도 등에선 지방법원이 태클을 걸어왔다. 퀸이 절세 목적으로 설립한 회사도 복잡한 구조로 인해 정리책임자를 혼란에 빠뜨렸다.

 IBRC 측은 퀸이 5억 유로에 이르는 은닉 재산을 빼돌리고 있다는 입장이다. 반면 퀸의 자녀들은 “정부가 아버지를 희생양 삼아 금융위기 책임을 모면하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퀸이 다섯 자녀 명의로 된 호화저택에 살면서 사업 재기를 모색하고 있는 것도 IBRC 측의 불신을 산다. 몇 주 전엔 퀸그룹 지주회사의 국제 자산을 퀸의 미성년 손자들에게 넘기려는 목적의 기밀문서가 발각되기도 했다. 퀸과 IBRC는 파산 선고의 유효성을 둘러싸고 조만간 다시 법정에서 맞붙는다. “도시개발과 금융신화는 어디 가고 냉전시대 이중 스파이 소설 같은 이야기만 남았다.” 퀸그룹 몰락 스토리를 추적해온 더블린대 경제학자 브렌던 윌리엄스 교수의 말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17일 오전 8시30분 과로로 열차 안에서 사망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19일 보도했다.

다음은 중앙통신이 전한 ‘전체 당원들과 인민군장병들과 인민들에게 고함’이라는 제목의 보도전문.

『우리의 전체 당원들과 인민군장병들과 인민들,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와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내각은 조선로동당 총비서이시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위원장이시며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이신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 주체100(2011)년 12월 17일 8시 30분에 현지지도의 길에서 급병으로 서거하시였다는것을 가장 비통한 심정으로 알린다.

주체혁명위업의 계승완성을 위하여 한평생을 바쳐오시였으며 사회주의조국의 강성번영과 인민의 행복을 위하여,나라의 통일과 세계의 자주화를 위하여 불철주야 정력적으로 활동하시던 우리의 위대한 김정일동지께서 너무도 갑자기,너무도 애석하게 우리곁을 떠나시였다. 사회주의강성국가건설위업수행에서 전환적국면이 열리고있으며 우리 혁명이 중첩되는 난관과 시련을 뚫고 승승장구하고있는 력사적인 시기에 우리 당과 우리 인민의 위대한 령도자이신 김정일동지께서 뜻밖에 서거하신것은 우리 당과 혁명에 있어서 최대의 손실이며 우리 인민과 온 겨레의 가장 큰 슬픔이다. 혁명의 성산 백두산에서 빨찌산의 아들로 탄생하시여 위대한 혁명가로 성장하신 김정일동지께서는 장구한 기간 우리 당과 군대와 인민을 현명하게 령도하시여 조국과 인민,시대와 력사앞에 영구불멸할 혁명업적을 쌓아올리시였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는 위인이 지닐수 있는 품격과 자질을 최상의 높이에서 완벽하게 체현하시고 심오한 사상리론과 비범한 령도로 혁명과 건설을 백전백승의 한길로 이끌어오신 걸출한 사상리론가,희세의 정치원로이시고 불세출의 선군령장이시며 조국과 인민에 대한 열렬한 사랑과 숭고한 헌신으로 혁명투쟁의 전로정을 수놓아 오신 절세의 애국자,인민의 자애로운 어버이이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개척하신 주체혁명위업을 대를 이어 계승완성하는것을 필생의 사명으로 내세우신 김정일동지께서는 어버이수령님의 가장 친근한 동지,가장 충직한 전우가 되시여 혁명과 건설을 수령님의 사상과 의도대로 줄기차게 전진시켜오시였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천리혜안의 예지와 정력적인 사상리론활동으로 어버이수령님께서 창시하신 영생불멸의 주체사상,선군사상을 전면적으로 심화발전시키시고 자주시대의 지도사상으로 빛내이시였으며 백두의 혁명전통을 견결히 옹호고수하고 순결하게 계승발전시키시여 조선혁명의 명맥을 굳건히 이어놓으시였다. 혁명과 건설의 영재이신 김정일동지께서는 온 사회 주체사상화의 기치높이 우리 당과 군대,국가를 김일성동지의 당과 군대,국가로 강화발전시키시였으며 민족의 존엄과 국력을 최상의 경지에 올려세우시고 반만년력사에 일찌기 없었던 륭성번영의 대전성기를 펼치시였다. 혁명적도덕의리의 최고화신이신 김정일동지께서는 인류정치사가 알지 못하는 수령영생위업실현의 위대한 귀감을 창조하시여 위대한 수령님의 거룩한 존함과 불멸의 혁명생애와 업적이 주체조선의 무궁한 력사와 더불어 영원히 빛을 뿌리도록 하시였다.

정치의 대가이시며 천출명장이신 김정일동지께서는 세계사회주의체계의 붕괴와 민족 최대의 국상,제국주의련합세력의 악랄한 반공화국압살공세와 혹심한 자연재해속에서 선군정치로 어버이수령님의 고귀한 유산인 사회주의전취물을 영예롭게 수호하시였으며 우리 조국을 일심단결된 불패의 정치사상강국으로,그 어떤 원쑤도 감히 건드릴 수 없는 핵보유국,무적의 군사강국으로 전변시키시였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어버이수령님의 유훈을 받들어 강성대국건설의 웅대한 목표를 제시하시고 그 실현을 위한 전인민적인 총진군을 진두에서 이끄시여 온나라에 혁명적대고조의 불길이 세차게 타오르게 하시고 사회주의건설의 모든 전선에서 대혁신,대비약이 일어나게 하시였다. 민족의 어버이이시며 조국통일의 구성이신 김정일동지께서는 위대한 수령님의 조국 통일유훈을 실현하실 철석의 의지를 지니시고 온 겨레를 자주와 민족대단결의 길로이끌어오시였으며 우리 민족끼리의 숭고한 리념이 실현되는 6.15통일시대를 열어놓으시였다. 사회주의와 정의의 위대한 수호자이신 김정일동지께서는 반제자주의 기치를 높이 드시고 사회주의위업의 승리를 위하여,세계의 평화와 안정,인민들사이의 친선단결을 위하여 정력적인 대외활동을 벌리시여 우리 나라의 국제적지위와 권위를 비상히 높이시고 인류자주위업수행에 불멸의 공헌을 하시였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장구한 혁명령도의 전기간 인민을 제일로 아끼고 사랑하시며 언제나 인민들과 고락을 함께 하시였으며 강성국가건설과 인민생활향상을 위하여 불면불휴의 로고와 심혈을 바치시며 초강도의 현지지도강행군길을 이어가시다가 겹쌓인 정신육체적과로로 하여 렬차에서 순직하시였다. 위대한 김정일동지의 전생애는 혁명의 붉은기를 높이 들고 강철의 의지와 초인간적인 정력으로 전인미답의 험난한 초행길을 헤쳐오신 위대한 혁명가의 가장 빛나는 한생이였으며 오로지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것을 다 바쳐오신 절세의 애국자의 한생이였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그처럼 바라시던 강성국가건설위업의 승리와 조국통일,주체혁명위업의 완성을 보시지 못하고 애석하게도 서거하시였으나 우리 혁명이 대를 이어 줄기차게 전진해나갈수 있는 강력한 정치군사적지반을 다져놓으시고 우리 조국과 민족만대의 무궁번영을 위한 튼튼한 토대를 마련하여주시였다. 오늘 우리 혁명의 진두에는 주체혁명위업의 위대한 계승자이시며 우리 당과 군대와 인민의 탁월한 령도자이신 김정은동지께서 서계신다. 김정은동지의 령도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개척하시고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동지께서 승리에로 이끌어오신 주체의 혁명위업을 대를 이어 빛나게 계승완성해나갈 수 있는 결정적담보로 된다. 우리에게는 당의 위업을 앞장에서 받들어 나가는 무적필승의 백두산혁명강군이 있고 당의 두리에 굳게 뭉친 군민대단결이 있으며 가장 우월한 인민대중중심의 우리 식 사회주의제도와 자립적민족경제의 튼튼한 토대가 있다.

우리는 김정은동지의 령도따라 슬픔을 힘과 용기로 바꾸어 오늘의 난국을 이겨내 주체혁명의 위대한 새 승리를 위하여 더욱 억세게 투쟁해나가야 한다. 우리 군대와 인민은 절대불변의 신념과 숭고한 도덕의리심을 지니고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를 영원히 높이 우러러모시며 김정일동지의 유훈을 지켜 주체혁명,선군혁명의 길에서 한치의 양보도,한치의 드팀도 없을것이며 장군님의 불멸의 혁명업적을 견결히 옹호고수하고 천추만대에 빛내여나갈것이다. 전체 당원들과 인민군장병들,인민들은 존경하는 김정은동지의 령도를 충직하게 받들고 당과 군대와 인민의 일심단결을 굳건히 수호하며 더욱 철통같이 다져나가야 한다. 우리는 선군의 기치를 더욱 높이 들고 나라의 군사적위력을 백방으로 강화하여 우리의 사회주의제도와 혁명의 전취물을 튼튼히 지키며 새 세기 산업혁명의 불길,함남의 불길을 온 나라에 세차게 지펴올려 경제강국건설과 인민생활향상에서 결정적전환을 이룩하여야 한다.

 

우리는 조국통일3대헌장과 북남공동선언을 철저히 리행하여 온 민족의 단합된 힘으로 조국의 자주적통일을 기어이 실현할것이다. 우리 당과 인민은 자주,평화,친선의 리념에 기초하여 세계 여러 나라 인민들과의 친선단결을 강화하며 지배와 예속,침략과 전쟁이 없는 자주적이며 평화로운 새 세계를 건설하기 위하여 적극 투쟁할것이다. 우리 혁명의 길은 간고하고 조성된 정세는 준엄하지만 위대한 김정은동지의 현명한 령도따라 나아가는 우리 당과 군대와 인민의 혁명적진군을 가로막을 힘은 이 세상에 없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의 심장은 비록 고동을 멈추었으나 경애하는 장군님의 거룩한 존함과 자애로운 영상은 우리 군대와 인민의 마음속에 영원히 간직되여있을 것이며 장군님의 성스러운 혁명실록과 불멸의 혁명업적은 조국청사에 길이 빛날것이다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

주체100(2011)년 12월 17일』

드라마보다 극적인 스티브 잡스의 일생

[연합] 입력 2011.10.06 09:26 / 수정 2011.10.06 14:19

미혼모 아들로 태어나 가난한 집에 입양..대학도 중퇴
창업한 회사서 쫓겨나고 긴 암투병까지..'굴곡의 인생'
어려움도 신념 잃지 않고 성공신화...죽음까지 혁신도구로 이용

"곧 죽을 거란 사실을 기억하는 것은 인생에서 커다란 선택을 내리는 데 도움을 주는 가장 중요한 도구입니다. 외부의 기대, 자부심, 좌절과 실패 등은 모두 죽음 앞에서 덧없이 사라지고, 진정으로 중요한 것만 남기 때문입니다."


죽음까지 혁신의 도구로 이용했던 글로벌 IT업계의 위대한 구루(스승.거장) 스티브 잡스.

그는 애플과 애플 제품에 대해서는 현란한 미사여구와 화려한 영상까지 활용해 '프레젠테이션(PT) 달인'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지만 개인사에 대해서는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 최고경영자(CEO)로 유명하다.

그러던 그가 2005년 미국 서부 명문대학인 스탠퍼드대학 졸업식 연설을 통해 자신이 살아온 불우했던 어린 시절, 암투병, 좌절과 성공 등에 대해 상세하게 털어놓아 화제가 됐다.

잡스는 1955년 2월24일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난 지 몇 주 만에 입양기관을 거쳐 폴과 클래라 잡스 부부로 입양됐다. 잡스의 생부 압둘파타 존 잔달리와 생모 조앤 심슨은 위스콘신대 대학원에 재학 중일 때 캠퍼스 커플로 만났으나 심슨 가족이 잔달리가 시리아인 유학생이라는 이유로 결혼에 반대해 미혼모인 상태로 잡스를 낳았다.

생모인 조앤 심슨은 입양 당시 대학을 나오지 않은 잡스 부부가 마음에 들지 않아 주저하다가 "스티브를 꼭 대학에 보내겠다"는 약속을 받은 후에야 입양을 허락했다. 잡스는 학창시절 내내 '사고뭉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다행스럽게도 입양 부모인 잡스 부부는 그를 사랑으로 감싼 것으로 전해졌다.

잡스는 명문 리드대학에 입학했으나 6개월 만에 중퇴하면서 어려운 생활을 이어갔다. 당시 친구의 방바닥에서 자고 먹을 것을 위해 콜라병을 반납해 5센트를 모았으며 한 사원에서 일주일에 한 번 주는 식사를 얻어먹으려고 7마일(11.3㎞)을 걸어가기도 했다.

잡스는 1976년 '컴퓨터 천재' 스티브 워즈니악과 미국 캘리포니아 로스알토스에 있는 입양부모의 집 창고에서 애플을 창업한 후 이듬해 개인용PC 애플Ⅱ를 내놓아 성공을 맛보지만 30세 때인 1985년 자신이 영입한 CEO 존 스컬리과 이사회에 의해 쫓겨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그는 스탠퍼드대 연설에서 "모든 것이 사라지고 너무나 비참한 기분을 느껴 몇 달 동안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며 "공식적으로 실패한 사람이었고 실리콘밸리에서 도망가고 싶었다"고 당시 심정을 털어놓았다.

그는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컴퓨터 개발사 넥스트와 컴퓨터그래픽(CG) 영화사 픽사를 설립해 또다시 일어섰으며, 경영난을 겪고 있던 애플로 복귀해 아이맥에 이어 2001년 아이팟, 2007년 아이폰, 2010년 아이패드를 잇따라 성공시키면서 애플을 세계 최대 IT업체로 성장시켰다.

하지만 잡스는 이 같은 외적인 성공에도 불구, 2004년 췌장암 진단을 받고 수술을 한 뒤 2009년 간이식 수술까지 받는 등 치열하고 긴 투병생활에 시달려야 했다.

잡스는 미혼모의 아이로 태어나 입양되는 등 복잡한 가정사, 대학을 중퇴하고 방황했을 뿐 아니라 자신이 창업한 회사에서 쫓겨난데다 암 선고를 받고 간이식 수술까지 받는 등 고통으로 점철된 인생을 살았지만 결코 좌절하지 않았다.

그는 대학을 중퇴한 후 배운 서체교육이 이후 맥컴퓨터의 서체에 응용할 기회를 제공했다고 지적했으며, 애플에서 축출된 것은 인생에 있어 최고의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로 바꾼 뒤 "자신에게 일어날 수 있었던 최고의 사건"이라고 일갈했다.

심지어 그는 암선고를 받은 후 죽음에 직면한 후에도 "죽음은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품"이라면서 아이폰과 아이패드 신화를 일궈냈다.

그는 성공과 좌절이 교차하는 '롤로코스터'와 같은 인생을 살면서도 스탠퍼드대 연설 말미에 밝혔듯이 "늘 갈망하고 우직하게 전진하면서(Stay Hungry. Stay Foolish)" 항상 자신의 신념에 따라 치열한 삶을 살다 떠났다. (연합뉴스)


 


"내가 애플의 최고경영자(CEO)직을 떠나는 날, 불행히도 그 날이 왔습니다"

불과 한달 남짓 전인 지난 8월24일, 스티브 잡스가 애플 CEO직을 사임하면서 임직원에게 마지막으로 보낸 서한이다.

미국 애플의 전설이자 창업자인 스티브 잡스(56) 최고경영자(CEO)가 췌장암으로 5일(현지시간) 사망한 가운데 잡스가 임직원에게 마지막으로 보낸 서한이 다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잡스의 유언장은 현재까지 공개되지 않은 상태다.

당시 잡스는 CEO직을 사임하는 순간에도 애플의 미래를 걱정하며 자신이 설립한 애플에 대한 끈을 놓지 않고 싶다는 뜻을 밝혀왔다.

잡스는 21살에 자신이 설립한 애플에서 1985년 쫓겨났다가 12년 만에 복귀한 뒤에도 맥북, 아이팟, 아이폰, 아이패드 등 상상 속의 기기들을 현실 속에 구현하며 시대의 아이콘으로 자리잡았다.

<다음은 잡스가 애플 임직원들에게 보낸 서한 전문>

애플 이사회와 직원들에게

내가 항상 언젠가는 최고경영자(CEO)로서의 책임과 기대에 더 이상 부응하기 힘들어지는 날이 올 것이라고 말해 왔는데 불행히도 그 날이 왔습니다.

나는 애플의 CEO직에서 물러납니다. 이사회가 적합하다고 생각한다면 회장직과 애플 구성원으로 남고 싶습니다.

차기 CEO에 관해서는, 우리의 후임자 계획을 실행하고 팀 쿡을 차기 CEO로 임명할 것을 추천합니다.

애플은 가장 밝고 혁신적인 날들을 앞두고 있습니다. 나는 새로운 자리에서 애플의 성공을 보며 이에 공헌하기를 고대합니다.

애플에서 내 평생의 가장 귀한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당신들과 함께할 수 있었던 많은 날들에 감사를 전합니다.


신은 그에게 혁신과 리더십, 그리고 재능을 선물로 줬다. 하지만 너무 많은 것을 줬다고 생각한 걸까? 그에게 건강은 허락하지 않았다.

혁신 정신으로 세계인의 삶에 지울 수 없는 영향력을 끼친 스티브 잡스가 5일(현지 시간) 향년 56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애플은 이날 스티브 잡스 사망 사실을 공식 발표하면서 "그의 총명함과 열정, 힘은 우리 모두의 삶을 풍부하게 하고 발전시키는 끊임없는 혁신의 원천이었다"고 논평했다.

잡스의 뒤를 이어 애플 최고경영자(CEO) 자리에 오른 팀 쿡도 이날 전 직원에게 보낸 이메일을 통해 ""무척 슬픈 소식을 전하게 됐다. 잡스가 오늘 세상을 떠났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애플은 독창적인 천재를 잃었고 세상은 놀라운 사람을 보지 못하게 됐다"고 애도했다.

월스트리트저널, AP통신 등 세계 주요 외신들도 일제히 잡스 사망 소식을 속보로 전했다.

스티브 잡스와 경쟁하면서 IT 세상의 변화를 이끌었던 빌 게이츠는 올싱스디지털에 보낸 애도문을 통해 "스티브와 함께 일할 기회를 가졌다는 것은 엄청난 영광이자 행운이었습니다. 저는 스티브를 대단히 그리워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혁신 아이콘'으로 IT 혁명 이끌어

스티브 잡스의 삶은 영화보다 더 강렬했다. 부모의 이혼 때문에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던 잡스는 리즈대학에 진학했지만, 끝내 학업을 마치지 못했다.

그는 1976년 스티브 워즈니악과 함께 애플컴퓨터를 창업하면서 IT 시장에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후 애플1, 2 등으로 연이어 히트 행진을 하면서 20대 갑부로 떠올랐다.

특히 잡스는 1984년 매킨토시를 내놓으면서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GUI)란 새로운 흐름을 주도했다. 하지만 독선적인 성격에다 최고 제품에 대한 지나친 집착 때문에 1980년대 중반 이후 힘든 생활을 해야만 했다. 자신이 창업한 회사에서 쫓겨나는 수모를 당한 것.

이후 13년만인 1997년 다시 복귀한 그는 2000년대 들어 제2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아이팟, 아이폰, 아이패드 등을 연이어 성공시키면서 IT 시장의 새로운 아이콘으로 떠올랐던 것.



하지만 그의 삶은 강렬했지만, 그의 육체는 그렇지 못했다. 2007년 췌장암 발병 사실을 공개하면서 애플에 병가를 내고 요양에 들어간 것. 이후 놀랄만큼 초췌한 모습으로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내 보는 이들을 안타깝게 했다.

결국 지난 8월 팀 쿡에게 CEO 자리를 물려주면서 애플 경영에서 완전히 손을 뗀 지 2개월 여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잡스 떠난 애플, 어떻게 될까?

잡스가 사망하면서 애플의 향후 행보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또 삼성전자 등 경쟁업체와의 치열한 공방이 어떻게 전개될 지도 관심사다.

잡스는 지난 8월 자신이 가장 신뢰하는 팀 쿡에게 CEO 자리를 넘겼다.

쿡은 2002년부터 매킨토시 컴퓨터 부문을 맡았으며, 2004년 잡스가 췌장암 수술을 받을 때는 두 달 동안 회사를 이끌기도 했다. 3년 뒤인 2007년부터는 COO로 애플의 내부 살림을 책임져 왔다. 오랜 기간 잡스 밑에서 2인자 역할을 해 온 셈.

특히 지난 해 잡스의 건강이 악화된 이후엔 대부분의 일상 업무를 사실상 지휘해 오다시피 했기 때문에 당장 큰 틀의 변화는 없을 전망이다.

하지만 2, 3년 이후 차세대 성장 동력을 찾는 부분에선 '잡스의 부재'가 아프게 다가올 수도 있을 전망이다. '애플=혁신 기업'이란 이미지가 상당 부분 잡스의 지도력 덕분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차세대 성장 동력'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포레스터 리서치의 찰스 골빈은 지난 8월 잡스 사임 당시 "1년 반에서 2년 정도는 잡스 퇴진의 공백을 느끼지 않을 것"이라면서 "결국 관건은 최종 결정을 해줬던 (잡스란) 한 인물이 없는 상태에서 공동 작업을 통해 얼마나 효과적으로 운영하느냐는 것"이라고 전망한 적 있다.

이런 책임은 '잡스'란 거인이 짊어지고 있던 짐을 넘겨 받은 팀 쿡에게 맡겨졌다. 과연 팀 쿡이 잡스의 유산을 제대로 계승하면서 애플의 성장 엔진을 계속 가동할 수 있을까? 이 부분은 '뛰어난 천재' 잡스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을 애플에게 넘겨진 숙제가 아닐 수 없다.

김익현기자

 

 

다음은 누리집에 올라 있는 스티브 잡스의 연설문 전문이다. 번역문 제공자는 송윤주씨.

 오늘 저는,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대학의 한 곳을 졸업하면서 새 출발을 하는 여러분들과 함께하는 영광을 누리고 있습니다. 저는 대학을 졸업하지 않았습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이번이 제가 대학 졸업식이라는 곳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경우입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들에게 제 인생에 관한 세 가지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뭐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고 그저 세 가지의 이야기입니다.

 첫번째 이야기는 점(點)을 잇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저는 리드 대학이라는 곳을 첫 6개월 다닌 후 그만 두었습니다. 그 후 18개월 동안은 비정규 청강생으로 머물렀고 그 후 완전히 자퇴를 했습니다. 제가 왜 대학을 그만두었을까요?

 이야기는 제가 태어나기 전부터 시작됩니다. 제 생모는 젊은 미혼의 대학생이었는데, 저를 낳으면 다른 사람에게 입양을 시키기로 결심했습니다. 생모는 제가 반드시 대학을 졸업한 부부에게 입양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태어나면 바로 어떤 변호사 부부에게 입양되기로 되어있었고, 그것으로 모든 것이 다 끝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태어났을 때 절 입양키로 한 부부는 마음을 바꿔, 자신들은 여자아이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저의 양부모님은 한밤중에 “우리가 예기치 않은 사내아이를 갖게 되었는데 아이를 원하느냐”는 전화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분들은 흔쾌히 입양을 수락하셨습니다.

 저의 생모는 나중에야 양어머니가 대학을 나오지 않았고, 양아버지는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저의 생모는 이런 이유로 최종 입양서류에 서명을 하지 않다가 몇 달 후 양부모님이 저를 나중에 대학에 보낼 것이라는 약속을 하고서야 마음을 바꿨습니다.

 17년이 지난 후 저는 정말 대학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당시에 스탠포드와 거의 맞먹는 수준의 학비가 드는 대학을 선택했고, 평범한 노동자였던 저의 양부모님은 저축한 모든 돈을 제 대학등록금에 써야 했습니다. 그렇게 6개월이 지난 후 저는 그만한 돈을 쓰는 데 대한 가치를 느낄 수 없었습니다. 저는 저의 삶에서 무엇을 하길 원하는지 알지 못했고, 대학이 그것을 아는 데 어떤 도움을 줄지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저의 부모님은 전 인생을 통해 저축해놓은 모든 돈을 학비로 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대학을 그만두기로 했습니다. 저는 모든 것이 잘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 당시 그런 결정은 다소 두렵기도 했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것이 제가 지금까지 한 결정 중에 가장 탁월한 것이었습니다. 제가 학교를 그만두는 그 순간, 저는 흥미가 없었던 필수과목을 들을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관심 있는 다른 과목들을 청강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다지 낭만적인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기숙사에 방이 없었기 때문에 친구 방의 바닥에서 잠을 잤습니다. 음식을 사기 위해 콜라병을 반납해서 5센트씩 모았고, 해어 크리슈나 사원에서 일주일에 한번 주는 식사를 얻어먹기 위해 일요일 밤마다 7마일을 걸어가곤 했습니다. 저는 그걸 좋아했습니다. 제가 호기심과 직관을 따라서 한 일들은 나중에 값으로 매길 수 없는 큰 가치로 나타났습니다. 한 가지 사례를 들어보겠습니다.

» 스티브 잡스 2005년 스탠포드 연설.
 제가 다녔던 리드대학은 그 당시 미국에서 최고의 서체 교육 기관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캠퍼스 전체를 통해 모든 포스터, 모든 표지물들은 손으로 그려진 아름다운 손글씨로 장식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정규과목들을 더이상 들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이런 글자체들을 어떻게 만드는지를 배워 보려고 서체과목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세리프나 산세리프 활자체를 배웠고, 무엇이 훌륭한 활자체를 만드는지에 대해 배웠습니다. 그것은 과학이 알아내지 못하는, 아름답고 역사적이며 예술적인 미묘함을 갖고 있었습니다. 저는 거기에 매료되었습니다.

 당시 저에겐 이런 모든 것이 제 삶에 실제로 응용될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10년 후, 우리가 최초의 매킨토시 컴퓨터를 만들 때 그 모든 것이 도움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맥 컴퓨터는 아름다운 글자체를 가진 최초의 컴퓨터가 되었습니다. 제가 만일 대학의 그 과목을 듣지 않았다면 맥 컴퓨터는 결코 다양한 서체를 가진 컴퓨터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원도즈는 맥 컴퓨터를 단지 베낀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맥 컴퓨터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어떤 개인용 컴퓨터도 그런 아름다운 서체를 갖지 못했을 것입니다. 제가 만일 정규과목을 그만두지 않았고, 서체과목에 등록하지 않았더라면, 개인용 컴퓨터는 지금과 같은 놀라운 서체를 갖지 못했을 것입니다.

 물론 제가 대학에 있을 때는 미래를 내다보면서 점을 잇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후 과거를 되돌아 볼 때 그것은 너무나 분명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미래를 내다보면서 점을 이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과거를 돌이켜 보면서 점을 이을 수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은 지금 잇는 점들이 미래의 어떤 시점에 서로 연결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여러분들은 자신의 내면, 운명, 인생, 카르마, 그 무엇이든지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이런 접근법은 저를 결코 낙담시키지 않았고, 제 삶의 모든 변화를 만들어 내었습니다.

 저의 두번째 이야기는 사랑과 상실에 관한 것입니다. 저는 인생의 이른 시기에 하고 싶은 것을 발견한 행운아였습니다. 우즈(스티브 우즈니액, 애플 공동창업자)와 저는 애플을 우리 부모님의 차고에서 시작했습니다. 그때 저는 스무살이었습니다. 우리는 열심히 일했습니다. 10년이 지난 후 애플은, 우리 둘만의 차고에서 20억 달러에다 4000명의 직원을 가진 회사로 성장했습니다.

 제 나이 29살, 우리는 최고의 작품인 매킨토시를 출시했습니다. 그러나 이듬해 저는 해고당했습니다. 어떻게 자신이 만든 회사에서 해고를 당할 수 있냐구요? 당시, 애플이 점점 성장하면서, 저는 저와 잘 맞는 유능한 경영자를 데려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첫해는 그럭저럭 잘 되어 갔습니다. 그러나 그 후 우리들의 미래에 대한 관점에 차이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결국 내부적으로 분열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회사 이사회는 그를 지지했고, 저는 서른 살이 된 해에 그렇게 쫓겨났습니다. 성인이 되어 제가 초점을 맞춰왔던 모든 것들이 사라져버리고, 저는 너무나 비참한 기분을 느꼈습니다.

 몇 달 동안 저는 무엇을 할지 몰랐습니다. 마치 달리기 계주에서 바톤을 놓친 선수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선배 벤처기업인들에게 송구스런 마음이 들었고 . 저는 데이비드 팩커드(HP의 공동 창업자)와 밥 노이스(인텔 공동 창업자)를 만나 실패한 것에 대해 사과하려 했습니다. 저는 공식적으로 실패한 사람이었고 실리콘 밸리에서 도망가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제 맘속에 무언가가 천천히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여전히 제가 하는 일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애플에서 겪었던 일들조차도 그런 마음을 꺾지 못했습니다. 저는 해고당했지만 여전히 저의 일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새롭게 출발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때는 전혀 몰랐지만, 애플에서 해고된 일은 저에게 일어날 수 있었던 일 중 최고의 사건이었습니다. 그 사건은 제가 성공의 중압감을 벗어나 초심자의 가벼운 마음을 되찾게 해줬고, 내 인생의 최고의 창의력을 발휘하는 시기로 들어갈 수 있도록 자유롭게 해줬습니다.

 이후 5년 동안 저는 NeXT, 그리고 Pixar라는 이름의 다른 회사를 만들었고, 지금의 제 처가 된 여성과 사랑에 빠졌습니다. 픽사는 세계 최초로 컴퓨터 애니메이션 영화인 토이스토리를 만들었고,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애니메이션 회사가 되었습니다. 이후 놀랍게도 애플은 넥스트를 사들였고 저는 애플로 복귀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넥스트에서 개발한 기술은 애플의 현재 르네상스의 핵심이 되었습니다. 또한 로렌과 저는 함께 한 가족을 만들었습니다.

 저가 애플에서 해고되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중 어떤 것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것은 쓰디쓴 약이었지만, 환자에게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인생이란 때로 여러분들을 고통스럽게 하지만, 신념을 잃지 말기 바랍니다. 저를 이끌어간 유일한 힘은, 제가 하는 일을 사랑했다는 것에서부터 나왔다고 믿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찾아야 합니다.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찾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에서도 같습니다.

 여러분이 하는 일은 인생의 많은 부분을 채울 것입니다. 여러분이 진정으로 만족하는 유일한 길은 여러분 스스로 훌륭하다고 믿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훌륭한 일을 하는 유일한 길은 여러분이 하는 일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것을 아직 찾지 못했다면, 계속해서 찾으십시오. 주저앉지 마십시오. 언젠가 그것을 발견할 때 여러분은 마음으로부터 그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훌륭한 관계들처럼, 그것은 해가 지나면서 점점 좋아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발견할 때까지 계속 찾으십시오. 주저앉지 마십시오.

 세번째 이야기는 죽음에 관한 것입니다. 제가 열일곱 살이었을 때, 이런 구절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매일을 삶의 마지막 날처럼 산다면 언젠가 당신은 대부분 옳은 삶을 살았을 것이다.” 저는 그것에 강한 인상을 받았고, 이후 33년 동안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면서 제 자신에게 말했습니다. “만일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내가 오늘 하려는 것을 하게 될까?” 그리고 여러 날 동안 그 답이 ‘아니오’라고 나온다면, 저는 어떤 것을 바꿔야 한다고 깨달았습니다.

 제가 곧 죽을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는 것은, 제가 인생에서 큰 결정들을 내리는 데 도움을 준 가장 중요한 도구였습니다. 모든 외부의 기대들, 자부심, 좌절과 실패의 두려움, 그런 것들은 죽음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진정으로 중요한 것만을 남기게 됩니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당신이 무엇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의 함정을 벗어나는 최고의 길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마음을 따라가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약 1년 전 저는 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아침 7시30분에 검사를 받았는데, 췌장에 종양이 발견되었습니다. 당시 저는 췌장이라는 게 무엇인지도 몰랐습니다. 의사들은 이것이 치료가 거의 불가능한 종류의 암이라면서 제가 길어봐야 3개월에서 6개월밖에 살수 없다고 했습니다. 의사는 저에게 집으로 가서 주변을 정리하라고 충고했습니다. 그것은 내 아이들에게 앞으로 10년동안 해줘야 하는 말을 단 몇 달 안에 해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임종 시 가족들이 받을 충격이 덜하도록 모든 것을 정리하란 말이었고 작별인사를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하루 종일 검사를 받았습니다. 그날 저녁 늦게 저는 목구멍을 통해 내시경을 넣는 조직검사를 받았습니다. 세포를 췌장에서 떼어내 조사를 했습니다. 저는 마취상태였는데 나중에 아내가 말해주길 현미경으로 세포를 분석한 결과 치료가 가능한 아주 희귀한 췌장암으로 밝혀져 의사들까지도 기뻐서 눈물을 글썽였다고 합니다. 저는 수술을 받았고 건강해졌습니다.

 이것이 제가 죽음에 가장 가까이 간 경우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앞으로 몇 십 년간은 그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경험을 해보니 죽음이 때론 유용하다는 것을 머리로만 알고 있을 때보다 더 정확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누구도 죽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천국에 가고 싶다는 사람들조차도 그곳에 가기 위해 죽기를 원하지는 않죠. 하지만 죽음은 우리 모두의 숙명입니다. 아무도 피해 갈 수 없죠. 그리고 그래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이니까요. 죽음은 변화를 만들어 냅니다. 새로운 것이 헌 것을 대체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지금 이 순간, 여러분은 새로움이란 자리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머지않은 때에 여러분들도 새로운 세대들에게 그 자리를 물려줘야할 것입니다. 너무나 극적으로 들렸다면 죄송합니다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의 시간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삶을 사느라고 시간을 허비하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들이 생각한 결과에 맞춰 사는 함정에 빠지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들의 견해가 여러분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를 가리는 소음이 되게 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신의 마음과 직관을 따라가는 용기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당신이 진정으로 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마음은 이미 알고 있을 것입니다. 다른 모든 것들은 부차적인 것들입니다.

 제가 젊었을 때, 제 나이 또래라면 다 알만한 “지구 백과”이라는 책이 있었습니다. 그 책은 이곳에서 멀지 않은 먼로 파크에 사는 스튜어트 브래드란 사람이 쓴 책인데 그는 자신의 모든 걸 이 책에 불어넣었습니다. 그 책이 나온 게 1960년대로, 그 당시에는 개인용 컴퓨터도 PC 출판도 없었기 때문에, 그 책은 타자기와 가위, 폴라로이드 사진들로 만들어진 것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종이책 형태의 구글 같은 것이었는데, 구글이 나타나기 35년 전의 일입니다.

 스튜어트와 그의 팀은 이 책을 여러 번 개정했고, 수명이 다할 때쯤엔 최종판을 냈습니다. 그것이 1970년대 중반이었습니다. 바로 제가 여러분의 나이 때입니다. 그 최종판의 뒷 표지에는 이른 아침 시골길 사진이 있었는데 아마 모험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히치하이킹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지요. 그 사진 밑에는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늘 갈망하고 우직하게 나아가라.”(Stay Hungry. Stay Foolish) - 원문보기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가 5일(현지 시간)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에 네티즌 뿐 아니라 국내외 유명인사들의 애도가 잇따르고 있다.

트위터, 페이스북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는 스티브 잡스 관련 글들이 끊임없이 올라오고 있다.

네티즌들은 생전 그의 사진과 연설, 명언 등을 올리며 스티브 잡스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다.

한 트위터리안은 "스티브 잡스와 동 세대를 살 수 있었음을 큰 기쁨으로 생각한다"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고 글을 남겼다.

또 다른 네티즌은 "당신의 'Awesome'이 그리울 것 같습니다"고 그를 회고했다.

한 일본인 트위터 이용자는 "아이폰5가 아니라 '4S'로 발표한 것은 아마도 '4S'에 For Steve라는 의미를 담았기 때문으로 생각된다"는 글을 올렸다.



유명인사들도 스티브 잡스 애도를 함께했다.

이외수 작가는 트위터를 통해 "스티브 잡스, 그대는 갔어도 제 책상 위에 맥은 남아 있습니다. 명복을 빕니다"라는 글을 올렸다.

평소 애플 전도사로 알려진 이찬진 드림위즈 대표도 '1995~2011'이라고 적은 스티브 잡스의 사진을 올려놓고 그의 영면을 기원했다.

권영길 민주노동당 의원은 "애플 스마트폰을 들고 있는데 스티브 잡스의 별세 소식이 날아왔다"며 "인류 삶의 발전에 기여한 잡스 애플사 창업주의 명복을 빕니다"라고 애도를 표했다.

김홍선 안철수연구소 대표도 "PC산업의 개척, 최대 디지털 음악시장, MP3 플레이어, 진정한 의미의 스마트폰 시장, 태블릿 시장 개척 등. 선구자로서 한 일이 아주 많네요. 스티브 잡스의 비전은 영원히 기억될 겁니다"라고 글을 남겼다.



한편 민주당 전병헌 의원은 이날 방송통신위원회의 국정감사(확감)에 앞서 "방송장악에 매몰돼 IT정책 실종을 부른 최시중 방통위원장에게 떠나간 '스티브 잡스'를 어떻게 애도·설명하고, IT 정책 종용을 할 수 있을까요"라고 네티즌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17평 아파트 거주·자전거 출퇴근·이코노미석…


미국 금융소프트웨어회사인 인튜이트의 최고경영자(CEO) 아론 패처(30)는 2년 전 자신이 창업한 개인재정상담 사이트 민트닷컴을 1억 7000만 달러(약 1790억원)에 매각해 돈방석에 올랐다.

실리콘밸리의 대표적인 청년 갑부지만 사는 모습은 평범하기 그지없다.

호화 주택에 고급가구, 최첨단 가전제품 대신 그는 실리콘밸리가 있는 팔로 알토 지역에서 600평방피트(약 56㎡) 크기의 방 한개짜리 아파트에 살며 낡은 소파와 TV를 사용한다. 물려받은 39년 된 갈색 가죽구두를 애지중지 아끼고, 12달러짜리 이발소를 애용한다.

페이스북의 공동창업자로 세계 최연소 억만장자인 더스틴 모스코비츠(27)도 샌프란시스코의 작은 아파트에서 산다.

새로 창업한 회사인 아사나까지 자전거로 출퇴근하고, 비행기는 일반석을 탄다. 반면 자신이 만든 자선단체에 기부하는 돈은 아끼지 않는다. 하버드대 동창으로 페이스북을 함께 만든 마크 저커버그와 마찬가지로 생전에 재산을 모두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약속했다.

"부(富)는 큰 집이나 번쩍이는 차보다 더 가치있게 쓰여야 한다."(패처) "명품을 지닌 나를 상상해 봤지만 이것들로 인해 삶이 더 의미있는 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물질이 행복을 가져다줄 수 없다."(모스코비츠)는 게 이들의 생각이다.

실리콘밸리에서 성공한 젊은 기업가들이 신분 상승의 전통적 상징인 스포츠카나 요트, 호화저택 등 물질적 풍요 대신 사회공헌 등 정신적 가치를 중시하고 있다고 로스앤젤레스타임스가 최근 보도했다.

페이스북 창업자 저커버그도 자신이 보유한 재산에 비하면 '소박한' 삶을 살고 있다.

얼마 전 팔로 알토에 700만 달러짜리 주택을 처음 구입하기 전까지는 낡고 좁은 아파트에서 살았다.

지난해 공립학교 발전 기부금으로 1억 달러를 선뜻 내놓은 그의 페이스북 프로필에는 '미니멀리즘'과 '욕망 자제'가 관심사로 등록돼 있다.

뉴욕대에서 인터넷 기업가들의 사회적 지위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앨리스 머위크 마이크로소프트연구원은 이에 대해 "이들은 신분상승에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니라 찾는 방식이 다른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이들은 훌륭한 외모와 눈에 보이는 부, 멋진 몸매를 가꾸는 것을 가치있게 여기는 집단이 아니다."라면서 "실리콘밸리에서 성공의 척도는 무엇을 샀는지가 아니라 어떤 기업을 창업했는가에 좌우된다."고 말했다.

청년 갑부들이 과소비를 피하는 또 다른 이유로 에드워드 울프 뉴욕대 경제학과 교수는 "갑작스러운 재산의 증가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리고 자신들의 부가 언제까지 지속될지 몰라 조심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년 5천만원으로 위험처한 국민 구하라?

지진, 테러, 해적, 정변, 사건사고 느는데
국민 긴급구난비는 연 1억8천만원
 
 

매년 1000만 명이 해외로 나가고, 700만 명 가까운 재외국민이 세계 200여 나라에서 활동한다. 이런 ‘대한민국 국민’을 지키기 위해 24시간 뛰는 사람들이 있다. ‘영웅’과 같은 '초능력'도, '총 한 자루' 없으면서도 국민들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건다. 외교통상부 내에서 가장 힘든 부서로 꼽히는 재외동포영사국 직원들이다.

위기에 빠진 국민 구하는 부서 예산이 연 5,000만 원

이런 재외동포영사국을 지휘하는 ‘야전사령관’ 백주현 국장을 만났다. 백주현 국장은 2010년부터 이 자리를 맡았다. 그는 ‘외교부 사상 큰 일을 가장 많이 치른 고위 공무원’으로 꼽힌다.

실제 그가 부임 후 있었던 사건으로는 아이티 지진(2010년 1월 13일), 칠레 지진(2010년 2월 27일), 뉴질랜드 지진(2011년 2월 23일), 일본 대지진(2011년 3월 11일) 등 자연재해와 과테말라 인질사건(2010년 1월 18일), 온두라스 한지수 씨 사건(2010년 10월 16일 해결) 같은 재외국민이 얽힌 범죄, 삼호드림호(2010년 4월 4일), 금미 305호(2010년 10월 9일), 삼호주얼리호(2011년 1월 15일), 한진텐진호(2011년 4월 21일), 싱가포르 선적 MT제미니호(2011년 4월 30일) 등의 해적 피랍 사건 등에서 우리 국민을 지키기 위해 혹은 구하기 위해 뛰어다녔다.

사건사고가 일어났을 때마다 그가 지휘하는 재외동포영사국은 ‘비상’에 돌입했다. ‘정시출근 정시 퇴근’이라는 말은 이들에게는 ‘남의 나라 공무원 사정’이다. 피를 말리는 긴장 속에서 현장으로 달려가는 이들이지만, 잘 모르는 국민들은 ‘외교관은 어쨌거나 외교관’이라는 선입견에 싸잡아 비난하기만 한다.

이런 선입견은 삼호드림호 사건, 금미 305호 사건, 재외국민 긴급철수작전을 폈을 때 여실히 드러났다. 특히 지난 1월부터 한 달 동안 이뤄진 이집트의 우리 국민 철수 작전 때 ‘외교부가 밥도 제 때 챙겨주지 않아 굶었다’ ‘영사들은 우리 국민들에게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았다’는 말이 인터넷에 나돌면서 정부 내에서마저 그들을 비판하는 바람에마음 고생이 심했다. 이들의 임무가 갖는 기본 속성이 '잘해야 본전'이란 점을 감안한다하라도, 재외국민보호 체제가 갖고 있는 문제점을 냉정하게 따져 볼 여지는 존재한다.   

'욕 먹어도 목숨 걸어야 하는' 재외동포영사국은 외교부 제2차관 지휘를 받는다. 재외동포과, 재외국민보호과, 여권과, 영사서비스과로 구성돼 있다.

백주현 재외동포영사국 국장은 “2004년 김선일 씨 피랍살해 사건, 2007년 샘물교회 선교단의 아프가니스탄 피랍사건 이후 재외국민 보호를 위한 제도는 어느 정도 갖춰졌다”고 말했다.

하지만 지금도 이들은 마음놓고 활동을 못 한다. '황당한 수준'의 예산 때문이다. 실제 위기에 처한 재외국민을 구출하는 '신속대응팀'의 연간 예산이 단 5,000 만원에 불과하다. 국회의원 한 사람의 4개월치 세비 수준도 되지 않는다.

외교부 신속대응팀은 재외국민보호과에서 훈련받은 인력들로 보통 해당지역 근무 경험자, 해당지역 언어 능통자 등 10여 명으로 꾸려져 상시 대기한다. 이들 외에도 외교부 전체에 100 여 명의 전문가 풀(Pool)을 구성한 뒤, 상황이 발생하면 해당 지역 전문가를 차출해 긴급투입하게 된다고 한다.

하지만 신속대응팀은 인력과 예산, 기본 장비 부족으로 늘 어려움에 봉착한다. 가장 큰 문제는 예산. 5,000만원은 한 순간에 소진된다. 올해 이집트, 리비아 사태, 일본 동북부 대지진에 사용된 예산이 이미 4억 원. 결국 다른 부서의 예산을 전용할 수밖에 없다.

백주현 국장의 하소연을 들어보자.

“올해가 아무리 예외적인 상황이 많은 해라고 해도 몇 번 해외 출동하면 수 억 원이 넘는 돈을 쓰게 됩니다. 그런데 1년 예산이 5,000만 원이니 정말 난감하죠. 이 뿐만이 아닙니다. 살인범으로 몰려 큰 어려움을 겪었던 온두라스의 한지수 씨 경우처럼, 위험한 상황에 처했거나 도저히 자력으로는 불가능한 사람을 귀국시키는데 사용하는 ‘긴급 구난비’라는 게 있습니다. 그 예산이 연 1억 8,000만 원입니다. 없는 거나 마찬가지죠.”

이 또한 2007년 샘물교회 선교단의 아프간 피랍 사건 이후 그나마 늘린 예산이란다

재외국민보호는 정부의 가장 시급한 과제 중 하나라고 백 국장은 지적했다.

“우리나라 정부는 ‘글로벌 코리아’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다양한 정책을 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국민은 그 전부터 전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고 있죠. 그걸 정부가 모두 통제한다는 건 불가능한 게 현실입니다.”

백 국장은 “21세기 들어서 국경을 넘나드는 초국적 범죄가 일반화되고 있다”며 “그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게 테러, 납치, 해적 등인데 우리 국민들이 항상 이런 범죄에 노출돼 있다”고 우려했다. 게다가 최근들어서는 지진, 해일, 토네이도와 같은 자연재해에도 노출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기후변화 문제로 자연재해가 빈번해지면서 우리 국민도 언제든 피해를 볼 수 있는 상황입니다. 국민들이 위험에 처했을 때 구조하고 대응할 수 있는 국가 차원의 체계적인 준비가 필요합니다.”

백 국장은 “그나마 외교부는 김선일 사건, 아프간 피랍 사건 등을 겪으면서 신속대응팀 신설, 신속해외송금지원제도, 여행경보제도 등을 통해 체계를 갖췄다”고 답했다.

재외국민 보호의 시작은 ‘사건사고 예방’

“저희 국 직원들은 해외에서 우리 국민이 사고를 당하기 전에 미리 예방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뉴스에 사건사고가 보도되는 건 우리 국민이 이미 피해를 봤다는 말이 됩니다. 이걸 미리 막아야죠.”

재외동포영사국은 이런 ‘예방’을 위해 대륙별로 돌면서 각국에 주재 중인 ‘사건-사고 담당 영사’들과 주기적으로 회의를 갖는다고 한다. 이때 현지에서 우리 국민이 피해자인 사건-사고가 발생했을 때 어떻게 현지 정부와 협의할 것인지, 피해자를 구조할 때 필요한 조치가 무엇인지 등과 같은 노하우를 전수한다.

“해외에서 우리 국민이 위험에 빠지지 않게 하는데 필요한 일 중 하나가 바로 홍보입니다. 해외에 도착하자마자 로밍한 휴대폰으로 문자 메시지를 받도록 하고 있습니다. 우리 국민의 손끝에 정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연락처가 있 어야 한다는 게 저희들 생각입니다.”

재외동포영사국은 이를 위해 지하철, 공항의 카트 등에 부착하는 일반 광고 외에도 항공기보딩패스(Boarding Pass) 뒷면에도 영사 콜센터 전화번호를 표시하고 있다. 언제 어디서든 영사콜센터에 전화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백주현 국장은 "400만 부가 발행될 때까지 홍보를 계속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홍보대사’도 있다. 대학생들로 구성된 ‘해외안전여행 서포터스’가 그 주인공. ‘해안서’라고도 한다.

작년에는 수도권 소재 대학교에서 30명을 뽑았다. 그런데 학생과 해외여행객들의 반응이 워낙 좋아, 올해에는 서울 소재 대학에서 40명, 충청 6명, 영남 7명, 호남 7명 등 모두 60명의 ‘해안서’를 모집할 계획이라고 한다. ‘해안서’ 학생들은 스스로 해외 안전여행에 필요한 정보를 찾고, 안전여행 정보를 어떻게 전파할 것인지 고민한다. SNS는 물론 학교 축제 등에서 해외 안전여행 정보를 꾸준히 전파하고 있다고 한다.

백주현 국장은 ‘해안서’들에게 ‘창의적인 홍보’를 주문한다고 했다. 그는 학생들에게 "여러분들이 스펙 쌓기를 위해 지원한 걸 안다. 그것에다 앞으로 세계에서 활동하려면 해외여행 안전이 필수라는 점을 하나 더 배워야 한다"라는 이야기를 꼭 한다.

해외에서 사건사고 당하는 국민, 연간 7000여 명

백주현 국장은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해외여행객이 늘어나면서 사건사고를 당할 가능성은 높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 연간 7,000여 명이 해외에서 각종 사건사고를 당한다고 전했다. 지난 2년 동안 사망자 발생 사건은 과테말라에서의 인질극 사건 단 한 건일 만큼 심각한 사건사고가 없다는 건 그나마 다행이란다. 

“우리 정부의 신속대응능력이 상당히 발달되어 있다 보니 사망사고는 거의 없습니다. 대신 주재국 영사들은 주말이든 휴일이든, 위험하든 않든, 즉각 출동해야 하는 어려움을 안고 있지요.”

‘MT제미니호’사건 때도 이런 신속대응은 빛을 발했다. 지난 달 30일 싱가포르 국적 화물선이 토요일 오후 1시 30분 피랍됐다는 소식이 청해부대를 통해 들어왔다. 청해부대는 연합함대 체계를 통해 바로 정보를 취합, 외교부 신속대응팀을 통해 1시간 내 駐싱가포르 대사관으로 상황을 연락했다. 주싱가포르 대사관 측은 해당 선사와 싱가포르 외무성과 바로 접촉했다.

“대부분의 공관은 주말개념이 없이 사건처리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저희도 재외공관 영사들에게 강조하는 첫 마디가 우리가 가장 빨리 우리 국민을 구출하지 않으면 누가 하느냐는 것입니다. ‘MT제미니호’ 사건과 관련, 주싱가포르 대사가 싱가포르 외무성과 초기에 긴밀히 접촉했습니다. 이런 게 생각보다 굉장히 효과가 있습니다. 이를 외교부에서는 ‘초기 상황 장악’이라고 부릅니다. 우리 영사나 대사가 얼마나 빨리 대응하느냐에 따라 교민들의 피해가 크게 줄어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도 또 ‘예산’이 문제가 된다.

중국 등 재외국민 사건사고가 빈번하게 발생하는 곳에는 보통 경찰청 인력이 파견돼 있다. 이들이 현지 ‘네트워크’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평소에 인맥을 구축해야 한다. 절차가 제도화되어 있는 선진국에서도 네트워크 구축이 중요하지만, '제도'보다 '관계'가 중요한 중국 같은 나라에서는 평소 '관계'를 형성해 놓지 못하면, 막상 일이 벌어졌을 때 애를 먹게 된다.

그런데 ‘예산’이 없다보니 대부분의 파견요원들이 매월 수백 달러 이상의 ‘적자 생활’을 하게 된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민원수당'을 배정해 줄 수 있는 지를 예산부처에게 요청해봤지만, ‘택도 없다’는 답변만 들었다고 한다.

영사 서비스과, 청년층 위해 워킹 홀리데이 인원 10만 명으로

재외동포영사국 중에서도 ‘표시 나지 않으면서 일은 가장 많은 부서’도 있다. 바로 영사서비스과다. 영사서비스과에서는 비자 문제와 체류허가 문제를 다룬다.

“비자를 얼마나 쉽게 받느냐, 체류 허가를 계속 갱신하는 게 쉬우냐 하는 것들이 모두 국민들의 돈과 직결됩니다. 특히 기업인들은 출입국이 빈번하기 때문에 복수비자를 받아야 하죠. 이런 부분을 해결하기 위해 해당 국가와 쉬지 않고 교섭을 해야 합니다. 상호 운전면허 허용 또한 우리 국민의 해외활동이 늘어나면서 반드시 필요한 부분입니다. 현재는 美 메릴랜드州, 버지니아州하고 교섭 중입니다. 앞으로 이를 더욱 확대할 계획입니다.”

2011년 주요 과제로 추진 중인 것 중에는 ‘워킹 홀리데이 인원 10만 명 확대’도 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청년취업이 계속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단번에 일자리가 늘어나기 어렵습니다. 이럴 때 해외에서 경험도 쌓고 외국어도 배울 수 있는 ‘워킹 홀리데이’로 나가는 것도 방법이지요. 현재 5만 명인 워킹 홀리데이 인원을 올해 안에 10만 명으로 늘리는 것도 목표입니다.”

백주현 국장은 이 외에도 위조방지를 위한 전자여권 발행, 한 창구에서 모든 민원을 해결할 수 있는 ‘원스톱 민원서비스’ 등으로 ‘고객 위주의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영사콜센터는 외교부를 대표하는 서비스다. 영사 콜센터는 외주로 운영된다. 평소 근무인원은 20여 명. 하지만 긴급 상황 때는 인원이 늘어난다. 일본 대지진 당시 20명을 더 늘여 24시간 체제로 운영했다. 그 덕에 보름 만에 우리 국민들의 생사확인이 가능했다고 한다.

“사실 처음에 지진 소식을 접한 뒤 혹시나 사망 국민 수가 수백 명에 이르지 않을까 걱정했습니다. 불행 중 다행으로 10명 미만이었습니다. 물론 우리 국민들께서는 답답해했을 겁니다. 하지만 일본의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우리 국민들의 안전을 상당히 빠르게 확인했습니다.”

이런 노력의 결과 영사콜센터는 정부 부처의 콜센터 중 만족도 1위를 놓치지 않고 있다.

2012년 재외국민선거, 예산-인원 문제와 함께 가장 고민

2012년부터 실시하는 재외국민참여선거와 재외국민보호 예산 및 인원 확충은 재외동포영사국에게는 '난제 중의 난제'다.

재외국민참여선거를 위해 현재 선관위 직원 55명이 해외에 나가 영사들을 교육시키고 있다. 그런데 난제가 산적해있다. 해외에서는 우리나라 사법권이 없어 선거사범을 잡을 수가 없다는 문제가 있다. 중국 등은 재외국민선거에 아주 예민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또, 교민들이 선거를 치르기 위해서는 두 차례(투표인 등록과 투표) 대사관을 찾아야 하는데 이 또한 쉬운 게 아니다. 이런 문제는 사실 정치권에서 관심을 가져야 할 사안인데도 여의도는 무관심하다고 전했다.

“재외국민보호에 더해 재외국민투표에 이르기까지 이런 광범위한 업무를 처리하는데 인원도 예산도 턱없이 부족합니다.”

실제 지난 1월부터 한 달 동안 이집트에서 국민들을 철수시키느라 현지에 '신속대응팀'을 긴급출동시키는 한편 주변 공관 영사들까지 총동원했음에도 인원과 예산 부족으로 국민들의 '항의'만 들었다. 이런 속사정을 모르는 네티즌들은 이들을 '골프나 치러 다니는 외교관'으로 묘사하며 비판했다. 이들 모두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엄청 속앓이를 했다.

이런 재외동포영사국의 활동과 속사정을 아는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소속 여야 일부 국회의원들은 "빨리 재외국민보호법을 입법하라"고 권할 정도다.

하지만 직원들은 당장 우리 국민을 보호할 인력과 예산이 더 급하다고 외친다. 현재 국 전체의 연간 예산은 30억 원 가량, 신속대응예산은 기본 5,000 만원에, 이것저것 끌어다 써도 연간 2억2,000만 원에 불과하다.

인력은 '만성부족'이다. 국 전체 인원이라고 해봤자 20여 명 남짓이다. 특히 해외에서 사건사고가 발생했을 때 제대로 대응할 수 있는, 경험 있는 영사 인력들의 확보가 시급하다.

백국장은 경찰 인력 확충에 눈을 돌리고 있다.

“저희 생각에는 경찰 인력 중에서 영사를 더 뽑았으면 합니다. 현재 47개국에 경찰 출신 영사들이 파견되어 있습니다. 역시 사건-사고를 처리하는 노하우가 뛰어납니다. 경찰 중에는 특수어학을 공부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도 저희 업무에 큰 도움이 됩니다.”

이런 외교부의 영입 노력으로 외교관이 된 경찰이 20명을 넘는다. 하지만 이런 유능한 경찰들을 데려오는 데에 또 ‘돈 문제’가 걸린다. 백 국장은 ‘대통령의 의지’에 기대를 걸었다.

“대통령께서 올해에는 재정 건전성을 확보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만, 재외국민보호예산은 확실하게 반영해 주시리라 봅니다. 저희가 무조건 ‘많은 돈’이 필요하다는 건 아닙니다. 남는 예산은 반납하면 됩니다. 재외국민 보호를 위한 신속대응 예산이 남아 불용예산으로 반납하는 것만큼 즐거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최소한 '세계 10대 교역국'이라는 나라가 국민들이 위험에 처했을 때 돈이 없어 쩔쩔매는 일은 막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백 국장은 "정부 재정에 한계가 있다는 건 안다. 하지만 최소한의 예산과 인력은 확보해 놔야 한다"고 덧붙였다.

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공관이라는 이집트 대사관 인력이 불과 9명이다. 소말리아 해적들과 맞서야 하는 케냐 공관의 인원은 그보다 훨씬 적다. 백 국장은 “재외국민 보호를 제대로 하려면 최소한 500~600여명의 전문인력을 확충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처럼 재외국민을 보호하는 직원들이 적은 예산과 인력 때문에 몸을 혹사하다보니 심각한 질병을 얻는 경우도 생기고 있다. 실제 필리핀에 파견됐던 경찰 출신 영사 한 명은 과중한 업무를 처리하다 식물인간이 되어 귀국했다고 한다. 필리핀은 최근 현대캐피탈 해킹 사건처럼 국제범죄의 천국이면서 한국 범죄자들의 도피처이기도 하다. 필리핀 남부 지역에는 반군과 연계한 알 카에다 조직 '아부 샤아프'가 활동하고 있기도 하다.

“예산-인원이 부족하다는 핑계로 손을 놓을 수는 없죠. 올해에는 기업들과 함께 위기대응훈련을 실시하려 합니다. 일방적인 ‘대국민 서비스’가 아니라 함께 소통하며 훈련을 하다보면 보다 창의적인 해결책이 나올 수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골프나 치러 다닌다는 귀족 외교관’이라는 일반적인 선입견과는 'DNA'부터 다른, 재외동포영사국 '머슴 외교관들' 덕분에 700만 재외국민과 1000만 해외여행객이 그나마 무사한 모양이다.

 

'십자가 사망' 김씨 "예수가 되고 싶다"

경북지방경찰청에 따르면 지난 1일 오후 6시경 경북 문경시 농암면에 위치한 한 채석장에서 김모(58·택시기사)씨가 십자가 모양의 나무에 매달려 숨져 있는 것을 인근을 지나던 동네 주민이 발견해 경찰에 신고한 것으로 밝혀졌다.

시신이 발견된 곳은 오래 전에 문을 닫아 인적이 드문 채석장으로, 발견 당시 김 씨는 머리에 가시관을 쓰고 양손과 발에 못이 박힌 채 십자가에 매달려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 조사 결과 김씨의 오른쪽 복부에는 날카로운 흉기에 찔린 상처가 있었고, 사건 현장에서 몸을 때리는 데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채찍과 함께 거울·탁상시계 등이 발견돼 자살이 아닌 타살 가능성에 무게가 쏠리고 있다.

이에 따라 경찰은 기독교 기념일인 부활절을 맞아 예수의 처형 장면을 재현한 사이코패스나 광신도의 범행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관련 수사를 벌이고 있다.

그러나 경찰은 김씨가 숨지기 전 '광적인 종교관'을 털어놨다는 한 전직 목사의 진술을 확보, 김씨가 타인의 도움을 받아 자살했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십자가 시신' "내가 바로 예수 아닌가"

 


경북 문경에서 십자가에 매달려 숨진 채 발견된 김모(58)씨가 자신을 예수와 동일시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김씨의 시신을 처음 발견한 A씨는 4일 경찰에 "신앙 상담을 하는 인터넷 카페를 운영하면서 지친 사람이면 누구나 우리 집에 와서 쉬었다가 가도록 했는데 2~3년 전에 카페 회원이던 김씨가 한 번 찾아왔었다"며 "김씨는 당시 얘기를 나누던 중 '신체는 달라도 삶이 그리스도의 정신이라면 내가 예수가 아닌가'라는 말을 했다"고 말했다.

전직 목사로 현재 양봉업을 하는 A씨는 "그런 얘기를 하기에 맞지 않다고 대답한 후 가정사 등 다른 주제로 화제를 돌렸다"며 "신앙과 관련된 얘기를 했으나 서로 맞지 않는 부분이 많았으며, 뭐라고 할 수도 없어 그냥 내버려 뒀다"고 설명했다.

A씨는 그 이후 김씨와 연락이 닿지 않았으며 지난 1일 다른 2명의 토종벌 업자와 함께 문경시 농암면 궁기리의 한 폐채석장에 토종벌을 찾으러 갔다가 김씨의 시신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A씨는 최초 발견자로서 다른 두 명과 함께 경찰의 조사를 받고 있다.

A씨는 "사체 발견 당시에는 김씨인 줄 몰랐다. 나무 십자가에 매달린 시신이 있어 경찰에 신고했다"며 "신원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전에 우리 집에 왔던 김씨인 것을 알았다"고 밝혔다.

그는 "미리 실행계획을 짠 점이나 시신이 발견된 형태로 봐서 김씨는 살해된 것이 아니라 자살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덧붙였다.

숨진 김씨가 기거한 천막에서 십자가 제작방법과 '가슴 묶고, 손 박고' 등의 메모가 발견되고, 십자가 앞에 대형 거울이 있었던 점은 자살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해석됐다.

 경찰은 주씨가 지난 2002년부터 인터넷 카페를 여러 개 개설해 활동하면서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님의 뜻이다' 등의 글을 1000여건 이상 올렸다고 말했다.
한편 주씨는 "김씨가 평소 '예수가 되고 싶다'고 하더니 진짜로 예수처럼 저럴 줄은 몰랐다"고 언론에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은 “숨진 김씨가 평소 광신도적 경향을 보인 것으로 드러났다”며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자살했거나, 종교적 의식 등으로 타살됐을 가능성도 수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십자가 죽음’ 이렇다면 자살일 수 있다!
지난 1일 경북 문경 페채석장에서 십자가에 매달려 숨진 채 발견된 김모(58)씨의 자살 여부와 관련, 의학자들은 “김 씨가 망상상태였다면 통증을 덜 느꼈을 수 있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문경경찰서는 지난 6일 중간수사결과를에서 지금까지 김 씨의 죽음에 다른 누군가 개입한 정황은 확인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경찰은 누군가의 도움 없이 엽기적인 자살이 가능한지에 대해 "김 씨가 현장에서 다량 복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신경안정제가 통증을 반감시키는 작용을 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코메디닷컴은 8일 이와 유사한 사건이 2006년 미국에서도 벌어졌다고 소개했다.
미국에서 23세 남자가 십자가에 자신을 못 박는 방식의 자살을 시도했다. 나무판자 두 장으로 십자가 모양을 만들어 자신의 거실에 세우고 한 손에 못을 박은 그는 하지만 남은 한 손에 못을 박을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구급차를 불러 목숨을 건졌다.
그는 당시 망상증을 보였으며 “컴퓨터 화면에서 신의 모습을 봤다”고 경찰에 진술했다.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정신과 김경란 교수는 십자가 죽음에 대해 “자신이 하는 행동이 매우 고통스러워도 이미 판단력이 상실된 이후라면 그런 선택을 할 수 있다”며 “실제로 느끼는 고통보다 망상이 더 크면 고통을 못 느낄 수도 있다”고 코메디닷컴에 말했다.
또 순순천향대병원 정신과 한성우 교수는 “심한 정신병을 앓으면 뇌에 화학적인 변화가 일어난다”며 “섬망이나 해리 상태가 되면 신체의 감각 능력이 떨어지는데 특히 초점 감각은 극대화되고 말초 감각은 극소화되는 일종의 최면상태가 된다”고 설명했다.
의정부힐링스병원 박석준 원장은 “이런 상태가 되면 도파민 같은 신경전달물질에 교란이 생겨 뇌가 정상적인 반응을 하기 어려워진다”며 “김 씨가 최면 상태 때문에 통증을 못 느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반복적으로 자해를 하는 망상이나 정신분열증 환자 가운데는 자해당시 아픔을 덜 느낀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고 덧붙였다.

'십자가 사망' 메모 "채찍으로 39번" 의미는

최초 발견자 "간음에 대한 죄의식 의미하는 듯"

 
 

십자가 매달려 숨진 채 발견된 김모(58)씨의 텐트 내부에서 발견된 메모.ⓒ경북경찰청 제공
▲십자가 매달려 숨진 채 발견된 김모(58)씨의 텐트 내부에서 발견된 메모.ⓒ경북경찰청 제공
경북 문경 폐채석장 ‘십자가 사망사건’의 최초 발견자인 전직 목사 주모(53)씨가 7일 자신이 운영하는 인터넷 사이트(http://jayou.ne.kr/)에 ‘자살순서를 기록한 내용에 대하여’라는 글을 올렸다.
그는 숨진 김씨가 직접 적은 것으로 보이는 메모와 십자가의 도면 등 사진을 사이트에 올리면서 그가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추정했다.
그는 "채찍으로 39번" 앞의 메모에서 가려진 단어는 '고추'라고 밝혔다.
이어 "검사현장에 참여할 당시에 정면에서 오른쪽에 가방 같은 것이 있었는데 길쭉한 무엇에 포장 끈을 감아놓은 게 있어 저게 뭘까 했는데 이곳 메모를 보고 그것이 채찍이었구나라고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주씨는 "고추가 뭐지 곧바로, 곧추세우는 것을 말하는가 하고 한참 후에 시신의 하체를 떠올리고 파출소에 내려와서 조서를 받는 중에 고추가 성기를 말하는 것 같으며 아마 성기를 채찍으로 39번 때린 것 같다고 말해줬다"고 밝혔다.
그는 "그리고 그 뒤 기자들에게 시달리며 무슨 의미일까를 기도하며 나름대로의 답을 얻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섹스는 인간의 삶의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모든 도덕적 사회적 종교적으로 금기시되는 단어이며 비난과 정죄의 대상이다"라며 "모든 교인이 제일 괴로워하는 것이 간음이라는 죄로 괴로워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 죄의식의 고뇌를 가져본 자는 성기를 채찍으로 때리며 죽어가야 하는 이 사람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며 "이 내용을 설명해달라고 집요하게 물어온 방송사 피디가 있었는데 이 글로 답변을 대신하기 바란다"고 적었다.

그는 또 "서른아홉번이라는 회수는 예수께서 사십에 감한 하나의 채찍을 군병들에게 등에 맞았을 때의 회수를 따라한 것 같다"고 설명했다.

 

 

 

[월드이슈] 힐러리 美 국무장관 24시

역시 클린턴과 힐러리는 인물입니다.   



[서울신문] 아프가니스탄 상황이 악화될 때도, 한반도의 긴장이 고조될 때도, 아니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평화협상이 열을 뿜을 때도 꼭 등장하는 기관이 있다. 미국 국무부다. 이집트 반정부 시위 사태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질서 있는 정권 이양'이라는 입장 표명으로 혼돈의 이집트 정국의 큰 가닥을 잡아 나갔다. 여느 국가의 외교부처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그야말로 세계 경찰국가의 외교사령탑이다. 그 핵심에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이 앉아 있다. 말 그대로 국제 외교안보질서 전반을 주무르는 인물이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국제질서의 흐름을 좌우한다. 지구촌 구석구석에 뻗쳐 있는 각 공관은 물론 국내외 정보기관들로부터 헤아릴 수 없이 쏟아져 들어오는 각종 정보보고를 분석하고, 정세를 판단하고, 정책 방향을 결정해야 한다. 각국을 돌며 크고 작은 협상과 담판도 벌여야 한다. 숨 쉴 틈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분초를 쪼개 쓰는 힐러리의 24시간을 들여다본다.

이집트 시위사태가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던 10일(현지시간) 오후 힐러리 클린턴 미국 국무장관은 워싱턴 자신의 집무실에서 CNN 방송을 켜놓고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의 대국민 연설을 지켜봤다. 미 정보당국의 예상과 달리 무바라크 대통령이 퇴진을 거부하자 힐러리 국무장관실은 긴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현지로부터 상황을 보고받고 향후 변수들에 대한 검토에 들어갔다. 힐러리 국무장관은 곧이어 긴급 소집된 버락 오바마 대통령 주재 안보 관련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백악관으로 향했다.

하루 전인 9일도 미국의 대외정책을 총지휘하는 힐러리 국무장관의 일정은 마찬가지로 쉴 틈이 없었다. 세계에서 가장 막강하고 바쁜 국무장관, 웬만한 나라의 대통령보다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미국의 국무장관이라는 자리가 무게를 더한다.

힐러리 장관의 하루는 보통 오전 모든 공식일정에 앞서 자신의 집무실 내 사적인 공간에서 비서실장 등 최측근 6명이 참석한 가운데 현안을 짚어보는 것으로 시작된다.

9일 오전 9시 30분 국무부 회의실에서 15명의 국무부 고위 간부들이 참석한 가운데 회의를 주재하고 국별 현안들에 대한 논의를 시작으로 현안 점검에 나섰다.

이어 오후 3시 45분에는 백악관에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이집트 사태를 비롯한 국제적인 현안들에 대해 보고를 겸한 자리를 가졌다. 오바마 대통령과의 면담이 끝난 뒤 힐러리 장관은 백악관에서 안보장관회의에 참석했다. 역시 최대 현안은 이집트 사태였다.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이 과연 권력이양 등의 결단을 내릴지, 야권과 시위대의 반응, 향후 중동 정세에 미칠 여향 등에 대해 심도 있는 논의가 진행됐다. 1시간 동안 진행된 회의를 마친 뒤 힐러리 장관은 로버트 게이츠 국방장관, 톰 도닐런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과 별도로 다시 만나 이집트 사태에 대한 미국 정부의 입장과 향후 대책을 추가로 조율했다.

이날 일정은 미국을 방문한 외국 고위 인사들과의 면담 일정이 잡혀 있지 않아 오전이 그나마 여유가 있는 편이지만 보통 2~3건의 외국 외무장관이나 부통령 등의 면담이 포함돼 있다. 상·하원 의원 등 정치인들의 면담도 끊이질 않는다.

힐러리 장관에게는 이집트 시위 사태에서 북한 핵 문제, 중국과 미얀마의 인권 문제, 동남아 국가들과의 관계 강화, 아프리카 각국의 여성 인권 문제 등 매일 다뤄야 할 문제가 산적해 있다. 일정은 10분 단위로 쪼개 관리할 정도다. 그러면서도 짬이 날 때마다 미국 언론들과 인터뷰를 한다. 외국의 외무장관들과의 양자회담이 끝난 뒤에는 대부분 어김없이 5분이라도 언론들과 만나 짤막한 기자회견을 갖는다.

최근 이집트 사태가 심각해지면서 아랍어권 언론, 특히 중동에서 영향력이 막강한 알자지라 등을 중시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힐러리 장관은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이 거취에 대한 중대 연설을 앞둔 10일 오전 11시 20분 국무부에서 알아라비아·알자지라 방송과 인터뷰를 했다. 점진적인 권력 이양과 이집트 국민들의 뜻을 존중한다는 미국의 입장을 아랍권 언론매체를 통해 이집트와 중동 국가 국민들에게 직접 알리기 위한 대민전략의 일환이다.

힐러리 장관은 당초 우려와는 달리 오바마의 외교안보팀 내에서 뛰어난 팀워크를 발휘하고 있다. 특히 게이츠 국방장관과는 호흡이 척척 맞는 것으로 전해진다. 정치인답게 종종 거침없는 언사로 세인들의 입방아에 오르지만 큰 그림을 꿰고 있는 자신감의 표출이라도 분석도 있다. 하지만 이번 이집트 사태처럼 미 정부의 입장을 놓고 백악관과의 사전 조율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것 아니냐는 지적이 있을 때는 당혹스러운 것 또한 사실이다.담당 부처별로 약간씩 입장 차가 있을 수 있지만 일단 백악관에서 미국의 이집트 정책에 대한 입장이 정해지면 일사불란하게 한목소리를 낸다.

힐러리 장관은 오바마 행정부의 스마트 외교, 소프트웨어의 전도사 역할을 자처한다. 미국식의 소통정치를 외국 순방에서도 실천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직접 학생이나 여성들과 타운미팅식의 만남을 갖고 현지 일반인들의 여론을 청취하고 미국의 입장을 알린다.

그러다 보니 역대 국무장관들보다 해외 출장도 빈번하다. 힐러리 장관은 지난 2년간 총 40회에 걸쳐 해외를 방문, 역대 국무장관 가운데 재임 첫 2년간 가장 많은 해외 출장을 다녀온 것으로 집계됐다. 최근 워싱턴포스트가 집계한 자료에 따르면 힐러리 장관이 지난 2009년 1월 취임한 이래 해외를 방문한 횟수는 40번이며, 이에 소요된 출장일수는 165일이었다.

바지정장이 트레이드마크인 힐러리 장관. 활동성과 효율성을 강조하는 성격이 반영돼 있고, 힐러리 장관의 외교의 색깔이기도 하다.

워싱턴 김균미기자 kmki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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