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판 피케티 보고서 ① ◆토마 피케티 파리경제대 교수의 '21세기 자본론'이 전 세계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는 가운데 한국 소득 불평등이 미국 수준에 달한다는 최신 분석 결과가 나와 주목을 끈다.
피케티는 3세기에 걸친 20여 개 국가의 경제 성장과 자본 집적 및 분포를 분석한 결과 미국의 소득불평등 현상이 세계대전 이전보다 크게 높아졌으며 앞으로도 이 같은 추세가 더욱 심화될 것이라고 주장하며 화제를 낳았다.
1일 매일경제신문이 김낙년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의 주요 5개국 상위 10% 소득 비중 분석 결과를 검토한 바에 따르면 2012년 기준 우리나라 상위 10%의 소득 비중은 45.51%에 달했다. 이는 미국(48.16%)에 비해 불과 2.65%포인트 낮은 수치다.
심각한 문제는 우리나라 상위층의 소득 비중이 미국과 마찬가지로 점점 높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1979~1995년 30%에 머무르던 상위 10%의 소득 비중은 2000년 35%를 넘었고, 2006년 42%로 치솟았다. 김대중-노무현-이명박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15년 동안 상승 일로였다. 일본과 영국은 금융위기를 지나며 최근 이 비중이 떨어지고 있다. 상위 10%의 소득 점유율이 2000년 이후 지속적으로 상승한 국가는 미국과 한국 정도다.
이 같은 분배불균형의 원인으로는 최근 한국의 경제성장률 둔화와 고용 위축이 지목된다. 김 교수는 "한국 일본 미국 모두 고도성장기에는 각 계층의 평균 소득이 함께 상승했기에 불균형 문제가 심각하지 않았다"며 "성장 둔화가 분배 악화의 원인일 수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성장 둔화→분배불균형 심화→소비심리 악화→성장 둔화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문제라는 지적이다.
우리나라는 청년ㆍ여성 일자리 여건이 열악하고 고용유발 효과가 큰 서비스산업이 낙후돼 있어 일자리 창출을 통한 분배 문제 해결이 모색되지 않는 한 성장도 어려울 수 있다.
한편 우리나라의 소득불평등 현상은 갈수록 심화되고 있지만 통계청이 발표하는 지니계수는 실상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지니계수는 0.302로 2006년 이후 가장 낮다.
[노영우 기자 / 신현규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자를 줘야 저축을 하지. 그나마 몇푼 안 되는 이자에서 세금으로 떼가고. (yuda****님)
우리나라 저축률이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 소득 증가율보다 부채 증가율이 높은데다, 금리는 쥐꼬리 수준이니 저축의욕도 떨어진다는 볼멘소리가 많다.
그러나 저축률이 항상 소득에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지난해 12월, 서울시에서는 70명의 '올해의 노숙인 저축왕'을 뽑았다. 이들의 저축률은 무려 67%에 달했다.
이는 세계 최저수준이라는 우리나라 가계저축률(2.7%, 한국금융연구원 2011년 말 기준)보다 약 25배나 높은 수준이다. 이들은 지난해 4월부터 11월까지 8개월 동안 1인 평균 771만원을 벌어 516만원을 저축했다. 월 평균 100만원도 되지 않는 소득에서 60~70%를 저축한 셈이다.
만일 생활이 팍팍해서 저축을 못하겠다면 새해에는 '마음의 가난'부터 벗어버리자. '시작이 절반'이라는 말처럼 저축 결심을 세우는 것 자체가 부자의 꿈에 한발짝 다가가는 값진 밑거름이 될 수 있다.
◆ 단거리 전략/ 즐거운 소비 통장 만들어라
저축하면 흔히 절약, 인내 등의 단어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그 재미없는 인고의 과정을 어떻게 하면 이겨내고 달콤한 결실을 맛볼 수 있을까. 이에 대해 박종호 에듀머니 본부장은 "저축 만기를 채운 성공 경험이 매우 중요하다"며 단기저축부터 도전할 것을 권했다.
실제 재무컨설팅으로 노숙인의 자활을 도운 그는 엉뚱한 미션을 주기도 했다.
"노숙인들은 음주를 조절해야 저축에 성공할 수 있는데, 이들을 설득한 방법 중 하나가 '룸살롱통장' 만들기였습니다. 모아서 제대로 쓰라는 거죠."
평소 "나는 안 된다"는 좌절에 싸여 있는 사람이라도 작은 목표(만기)부터 이루게 되면 더 큰 목표를 향해 나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는 얘기다.
일반인들의 저축습관을 기르는 방법도 마찬가지다. 노후자금·주택자금 등 장기적인 목표에 도전하기에 앞서 '즐거운 소비를 위한 단기통장'부터 도전하라고 조언한다. 이를테면 '6개월 뒤 여행자금 50만원'같은 단기목표를 정하고 도전하라는 것. 기분 좋은 동기가 있으면 목표달성이 더 쉬워지고, 올바른 저축습관이 형성될 수 있다.
"같은 여행자금을 쓰더라도 카드 할부로 지출할 때는 스트레스가 되는데 저축해서 쓰면 기분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외상소비 습관을 버리고 모아서 쓰는 습관을 기르는 것이 건전한 저축생활의 기본입니다."
이러한 저축습관을 위해 박 본부장이 추천하는 방법은 6개월짜리 단기적금 가입하기다. 통장도 하나보다는 금액을 쪼개서 여러개에 가입할 것을 권한다. 즉 월 50만원씩 불입하는 통장 하나보다는 월 10만원, 20만원씩 불입하는 통장 여러개를 만들라는 것. 저축하는 도중에 돌발 지출상황이 생기면 일부 통장만 해약해서 사용하라는 의도다.
박 본부장은 "상당수 가정들이 이미 빚을 많이 갖고 있어 추가적으로 돈 쓸 일이 생기면 또 빚을 내기도 어려운 상황"이라며 "생활이 빠듯해도 월 5만원, 10만원씩이라도 저축을 하면서 가정의 숨통을 트여주는 안전판을 만들어가라"고 조언했다.
◆ 장거리 전략/ 10년 후 비밀계좌 만들기
· 적은 금액 단기저축 = 소고기 사먹기 딱 좋은 금액
· 적은 금액 장기저축 = 소도 살 수 있는 금액
저축에 도전하는 사람이라면 후자를 목표로 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이렇게 장기저축에 도전하는 사람들에게 조영경 희망재무설계 컨설턴트가 강조하는 것은 꼬리표(통장 목표) 붙이기도, 굳은 결심도 아니다. 조 컨설턴트는 "(저축하고 있다는 것을) 10년간 기억에서 지우라"고 얘기한다. 이를테면 월 10만원씩 등 형편에 따라 무리가 되지 않는 금액을 '없는 돈'이라고 생각하고 저축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10년 장기저축을 위한 권장 상품으로는 연봉 5000만원 이하일 경우 비과세 재형저축, 연봉 5000만원 이상일 경우 장기저축성보험이나 변액보험을 추천했다.
새해 저축목표를 새롭게 세운다면 목표 달성 시 금리우대 등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동기부여형 금융상품'을 주목해보자.
기업은행은 새해 소원 성취를 기원하는 '부자되는 새해적금'을 오는 2월 말까지 한시 판매한다. 계약기간은 1년으로, 1만원 이상 월 1000만원까지 자유롭게 적립할 수 있으며 금리는 기본 연 3%에 우대금리 최고 연 0.2%포인트를 더해 최고 연 3.2%를 제공한다. 우대금리는 총 적립금액에 따라 최고 연 0.15%포인트, 소원성취 목표를 등록 시 연 0.05%포인트 등이다.
또 청소년들의 저축습관을 돕기 위해 만 20세 미만 고객이 설 명절 전후 10영업일(2월 12~25일)동안 이 적금에 가입하면 첫 입금액에 대해 연 0.50%포인트를 추가로 준다. 기업은행 관계자는 "결혼과 다이어트 등 새해 목표를 통장에 새겨 다짐하고 우대금리도 쉽게 받을 수 있는 일석이조형 상품"이라고 말했다.
신한은행은 고객의 목표 달성을 돕기 위한 '미션플러스서비스·적금'을 최근 선보였다. 유학, 여행, 출산, 육아, 쇼핑 등 미래 목적을 위해 저축을 하면 우대금리 및 제휴처(GS SHOP, 유학네트, 하나투어, 하이마트 등) 할인서비스를 제공한다.
예금 만기는 6개월 이상 24개월 이내에서 자유롭게 정할 수 있으며, 월 100만원(최소 1000원)까지 저축할 수 있다. 1년 만기 적금의 경우 기본금리는 연 3.3%이며 미션 수행 실적·친구초대 실적 등에 따라 0.7%의 우대금리를 더해 최고 연 4.0%의 이자가 적용된다.
☞ 본 기사는 < 머니위크 > (www.moneyweek.co.kr) 제264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1월 6일 일요일 오전. 예상치도 못했던 사망 소식에 잠에서 깼다. 주인공은 조성민이었다. 그가 누구던가. 야구선수로 활동할 당시에는 스포츠계의 주목을 받았고, 2000년 12월 톱스타 최진실과 세기의 결혼식을 올리면서 연예계의 관심까지 한몸에 받던 인물이다. 이혼 후에도 다수의 사건·사고에 휘말렸고, 최진실과 그의 남동생 최진영이 생을 마감했을 때도 그의 이름은 꾸준히 대중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러던 그가 사망했다. 6일 오전 서울 강남구 도곡동의 한 아파트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고 한다. 자살로 추정되는 가운데 관할 경찰서인 수서경찰서는 7일 오전 시신을 부검하기로 했다. 빈소는 고려대학교 부속 안암병원에 마련됐으며, 최진실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최환희와 딸 최준희가 상주로 이름을 올려 안타까움을 더했다. 장례는 3일장으로 진행되며 발인은 8일 오전이다.
자. 여기까지가 조성민의 사망 사건을 보도하는 일반적인 기사에서 볼 수 있는 내용이다. 그러나 기사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대중의 알 권리'를 내세우며 경마장식 보도를 하고 있다. 누가 경찰에게 한마디 더 얻어내느냐, 누가 지인들의 이야기를 더 이끌어내느냐의 경쟁이다. "아이들이 걱정된다"며 안타까움을 표하면서도 "꿋꿋하게 상주 노릇을 하다 오후 늦게 빈소를 떠났다"는 기사가 재빠르게 올라온다.
2011년 고 채동하의 죽음 이후 합의된 사항에 따라 사진기자들의 과열 보도 경쟁은 눈에 띄게 줄었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진공동취재단이 구성돼 영정사진과 빈소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냈으며 상주와 조문객 등의 사진은 찍지 않았다. 그러나 취재기자들의 보도 경쟁은 여전하다. '기구한 운명', '기이한 운명' 등을 내세우는 것은 예사다. 자살 과정을 상세하게 담아내기도 주저하지 않는다.
▲ 고 조성민의 빈소가 6일 오후 서울 안암동 고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고인의 이름이 안내판을 통해 보여지고 있다.
한국기자협회의 정관에는 '자살보도 윤리강령'이라는 것이 있다. 죽음은 사적 영역인데다 언론의 자살 보도 방식은 자살에 영향을 미치므로 정당한 보도 대상임에도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에서다. 사회적으로 중요한 인물이라 정당한 관심의 대상이 되거나 묘사 자체가 사건을 이해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경우는 예외지만 자살 장소와 방법, 자세한 경위를 묘사해서는 안 된다.
아울러 흥미를 유발하거나 속보 및 특종 경쟁의 수단으로 자살 사건을 다뤄서는 안 된다는 내용도 이 강령에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6일 하루에 쏟아진 관련 기사만 봐도 이 자살보도 윤리강령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 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쯤에서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던질 질문 하나가 있다. "과연 너는 얼마나 떳떳하기에 다른 이들을 비판하는 거냐?"
이제, '우리'의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오마이스타>는 인터넷신문 <오마이뉴스>의 연예 매체다. 2011년 창간, 적어도 자살보도에서만큼은 정도를 지키려고 노력했다. 6일 조성민의 사망 사건과 관련된 <오마이스타>의 기사는 2건(조성민, 영동 세브란스 병원 안치..."경찰 검안 중"'조성민 사망' 충격 휩싸인 연예계)이다. 연합뉴스의 것을 제외하면 본판인 <오마이뉴스>의 기사 또한 2건이다.
그러나 6일 늦은 오후, 한계에 부딪혔다. <오마이뉴스>에서 "독자들의 알 권리"를 언급하며 현장스케치 기사를 요구했고, 7일 오전 이와 관련된 기사를 송고하라고 주문한 것. "현장 기사가 없다면 새로운 소식이라도 내놓아야 하는 것 아니냐"는 게 <오마이뉴스> 측의 뜻이었다. '무엇을 써야 하나'라는 고민보다 자괴감이 밀려왔다. 늘 비판해왔던 인터넷매체의 선정주의와 지금의 모습은 대체 무엇이 다른가.
지시를 받들어 늦은 오후 빈소에 달려갔다. 그러나 그가 왜 죽음을 택했는지, 아이들이 어떤 모습으로 빈소를 지키고 있는지는 쓸 수 없었다. 아니, 쓰고 싶지 않았다. "누가 '자살보도 윤리강령'에서 벗어나라고 했느냐" "너무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것 아니냐"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오마이스타>의 구성원들은 한뜻임을 밝혀 둔다. '후폭풍'이 만만치 않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이것이 최선일 것이라고 믿는다.
▲ 6일 오전 서울 강남구 도곡동의 한 아파트에서 숨진채 발견된 고 최진실의 전 남편인 전직 프로야구 선수 조성민의 빈소가 서울 안암동 고대안암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돼 있다.
나비효과(Butterfly Effect)라는 말이 있다. 나비의 날갯짓 같은 작은 변화가 폭풍우 같은 커다란 변화를 유발시키는 현상을 일컫는 물리학 용어로, 시작 단계에서의 아주 작은 차이가 결과에서는 매우 큰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의미다. 어찌 보면 이런 '자기 고백'은 나비의 날갯짓보다도 못한 작은 움직임일 수 있다. 그러나 끊임없는 자기성찰과 잘못된 것을 바로잡으려는 의지는 더 큰 효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믿는다.
마지막으로,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조성민 (야구 선수)-
모든 것이 공개되는 시대이다. 사생활과 속에 있는 아픔마저도 모두 낱낱이 공개되어 인간을 정말 인단답게 살지 못하게 하는 시대에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고 그리고 상처로 얼룩진 인생을 마감한다. 조성민 야구선수로 촉망받던 그가 부상으로 인해 인생의 절정에서 점차로 멀어지고 유명연예인 최진실과의 결혼, 그녀와의 불화로 이혼, 또 다시 재혼, 그리고 이번 자살을 하기까지 너무나 많은 기삿거리가 되었던 불행한 그들의 삶을 보며 인생이란 성공이 손을 흔들다가도 어느 순간 이런 아픔과 절망과 비운의 그림자가 그들을 품어가는 것을 보게된다. 위키백과에서도 아주 자세히 이들의 삶을 적어놓았다. 나는 그를 잘 알아 보려고 이것을 찾았다가 그의 명복을 빌어주는 것이 필요할 듯해서 이곳에 옮겨 놓았다. 아울러 최진실 남매와 조성민씨가 저승에 가서라도 화해를 했으면 하고 바란다.
1996년요미우리 자이언츠에 계약금 1억 5천만엔, 연봉 1,200만엔의 조건으로 입단하였다. 계약 기간은 7년이었다.[2]1997년 마무리 투수로 등판하여 1승 2패 11세이브 평균자책점 2.89를 기록, 가능성을 보였다. 1998년 선발 투수로서 전반기에 7승을 거두어 올스타전에 선발되었지만, 이 때 팔꿈치 부상을 당해 내리막길을 걸으면서 별 활약을 보여 주지 못했다. 빠른 직구와 포크볼 위주의 투구를 하였다. 일본 프로 야구 통산 11승 10패 11세이브, 방어율 2.84를 남기고 2002년에 퇴단하였다.
한국 프로 야구 시절(2005년~2007년)
2005년 5월, 계약금 없이 연봉 5천만 원의 조건으로 한화 이글스에 입단하여 주로 불펜 투수로 활동했다.[3] 컨트롤 위주의 투구를 하였다. 2007년 시즌이 끝난 뒤 한화 구단으로부터 방출된 뒤 은퇴하였다.
조성민은 2000년 12월에 배우 최진실과 결혼식을 올렸고[6], 최진실과의 사이에 1남 1녀를 두었다. 조성민은 최진실과의 결혼을 성사시키는 과정에서 자살 시도 등의 행위를 보여 주었고, 최진실과의 이혼을 성사시키는 과정에서도 여러 가지 행위를 보여 주었다.[7] 조성민은 2002년 12월에 가출을 하였고[8], 2002년 12월 18일 오후 2시에 이혼하고 싶다고 하소연하는 기자회견을 열었으며, 그 자리에서 최진실이 유책배우자라고 주장하였다.[9]2004년 9월에 최진실과 '협의상 이혼'을 하였다.[10][11][12] 이후 2005년 7월에 심 모 씨와 혼인신고를 하였다.[13]
정조의 의무 위반 행위
2002년 12월, 조성민은 이혼하고 싶다고 하소연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 자리에서 조성민은 자신이 왜 최진실과 이혼하고 싶은지에 대해서 기자들에게 설명하면서 최진실의 명예를 훼손하는 발언들을 하였다. 그 과정에서 조성민은 자신이 '불륜'을 저질렀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는 사실도 밝혔는데, 그 때 '술집 마담' 심 씨를 언급하면서 자신과 심 씨는 '불륜' 관계가 아니라 '친구이자 동업자' 관계라고 말하면서 최진실을 의부증 환자로 몰았다. 심 씨도 기자들과 인터뷰를 가졌는데, 그 인터뷰에서 심 씨는 자신과 조성민은 '불륜' 관계가 아니라 '술집 마담'과 '손님'의 관계라고 말하면서 조성민이 최진실을 의부증 환자로 몰아가는 일을 도왔다. 조성민과 심 씨는 최진실을 의부증 환자로 몰아가는 과정에서 자신들이 부적절한 메시지를 주고받았다는 사실을 자백해 버렸다.[11][8] 이에 최진실도 조성민의 주장에 대해 해명·반박하는 인터뷰를 가졌다. 그 자리에서 최진실은 조성민과 심 씨는 '불륜' 관계가 맞다고 확인해주었고 이혼에 대해서는 유보적인 입장을 표명하였다. 최진실은 2002년부터 2004년까지 이혼 숙려 기간을 가진 후에 이혼을 결정내렸다. 2008년 10월, 최진실의 사망으로 최진실의 두 자녀는 유산을 물려받게 되었는데, 그 유산을 관리하는 것에 대해 조성민이 권리를 행사하려고 하면서 조성민의 이혼과정이 사회적으로 다시 주목을 받았고, 시사주간지 시사IN의 주진우 기자는 이런 사회 분위기를 반영하여 최진실의 어머니 정옥숙을 인터뷰하였다. 2008년 11월, 주진우는 정옥숙을 인터뷰하면서 조성민의 이혼과정을 확인하였고 그 과정에서 최진실의 이혼 서류를 입수하였으며 그 이혼 서류에 심 씨의 서명이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11][14][15][8]
폭력 행위
조성민은 키가 194cm, 몸무게가 95kg이라고 알려져 있었고, 최진실은 키가 164cm, 몸무게가 45kg이라고 알려져 있었다.[16]폭력 행위는 성차이뿐만 아니라 이러한 현격한 체격 조건 차이 속에서 이루어졌다.[11][17][18]
2004년 8월, 조성민은 최진실의 집을 찾아가 최진실을 폭행하였고, 이에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 현행범으로 체포되었다. 이후 최진실은 조성민을 상대로 주거 등에 대한 접근 금지 신청을 냈고, 법원은 이 신청을 받아들였으며, 조성민은 2개월 간 최진실의 집 100m 이내에 대해 접근이 금지되었다.[19][20][21] 당시 조성민은 이 사건에 대해 쌍방 폭행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주장을 해명·반박하기 위해 최진실은 자신의 멍든 얼굴을 언론에 공개하였고, 이로 인해 광고주로부터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당했으며, 그 법정 공방이 2010년 2월에 마무리되었다. 이 법정 공방을 통해, 조성민의 폭행 사실은 인정되었고, 최진실이 그 폭행을 유도했다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법원은 최진실이 자신의 멍든 얼굴을 언론에 공개한 행위에 대해서는 그 책임을 물어 모델료 일부를 광고주에 반환하도록 판결을 내렸다.[22] 그런데 2010년 10월, 언론을 통해 조성민은 6년 전에 자신이 저질렀던 이 폭력 행위에 대해 그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발언을 하였다.[7]
사기 행위
2002년 8월과 10월, 조성민은 사업 투자자금 명목으로 최진실의 어머니 정옥숙과 최진실의 동생 최진영으로부터 돈을 빌렸다. 2002년 12월, 조성민은 최진실과 이혼하고 싶다고 하소연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는데, 이후 그 빌린 돈에 대해서 증여라고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대한 조치로 정옥숙과 최진영은 2003년 2월에 조성민에게 채무변제를 요구하는 내용증명을 보내었고 2003년 4월에 조성민을 상대로 2억 원의 대여금 반환청구 소송을 제기하였다. 2004년 8월, 법원은 조성민으로 하여금 1억 원은 정옥숙에게, 8750만 원은 최진영에게 배상하라고 판결을 내렸다. 최진영의 경우는 주식으로 양도된 것을 감안하여 책정한 액수였다.[18][23][11][24][25][26][27]
명예훼손 행위
2002년 12월, 조성민은 언론을 통해 최진실의 뱃속에 있는 아이가 자신의 자식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발언하였다. 이후 2008년 10월에 최진실의 사망으로 최진실의 두 자녀는 유산을 물려받게 되었는데, 조성민은 그 유산을 관리하는 것에 대해 권리를 행사하려고 함으로써 6년 전에 자신이 허위사실을 유포했음을 공공연하게 자인하였다.[14][28][15]
2003년 10월, 조성민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최진실과의 이혼 협의 과정을 상세히 설명하였고, 위자료와 양육권 문제 등이 적힌 이혼합의서 초안을 언론을 통해 공개하였다. 조성민은 이혼합의서 초안을 공개하면서 "거액의 위자료와 양육권·친권 포기를 요구하는 등 최진실이 받아들이기 힘든 조건을 제시해 결국 이혼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라고 말했다. 이에 최진실은 해당 언론사, 해당 기자, 조성민 등을 상대로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으로 민사상·형사상 소송을 제기하였다. 최진실은 이 소송에 대하여 "조성민은 고의적으로 사생활을 유포해 인격권을 침해했다. 조성민은 이혼합의서 초안을 공개하기 전에도 마치 내가 돈 때문에 이혼문제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 양 10억 원, 13억 원 등 위자료 금액을 임의대로 발설해 치명적인 상처를 줬다. 이번 사태뿐만 아니라 위기에 처한 부부의 사생활 문제를 끊임없이 화제 기사로 다뤄온 모든 스포츠신문들의 보도 행태에 분노를 느낀다"라고 그 이유를 밝혔다.[29][30][31][32] 한편, 조성민이 사적인 문서를 언론을 통해 공개한 것은 이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2003년 2월, 최진실의 어머니 정옥숙과 최진실의 동생 최진영은 조성민의 사기 행위에 대한 조치로 조성민에게 채무변제를 요구하는 내용증명을 보내었는데, 이후 조성민은 스포츠신문들과의 인터뷰를 자청하여 언론을 통해 그 내용증명 문서를 공개하였다.[33][34]
친권포기각서 작성 행위
2004년 9월에 이혼 협상을 할 때, 최진실은 조성민에게 제기했던 각종 소송들을 취하해 주었고 조성민이 졌던 각종 빚들을 변제해 주었다.[35] 이에 조성민은 친권을 포기하였고 친권을 포기한다는 각서도 작성하였으며 그 각서에 대해 공증도 받았다.[12][36]
최진실과 이혼 협상을 할 때, 조성민은 최진실의 자녀들과의 면접교섭권은 인정받았으나 이혼 이후 면접교섭의 의무를 이행하지는 않았다.[11] 2008년 9월, 조성민은 언론을 통해 자신의 배우자에게 미안해서 최진실의 자녀들을 만나지 않는다고 발언하였다.[37] 이 발언은 면접교섭권을 누릴 권리가 있는 최진실의 자녀들을 향한 하나의 메시지로서, 친권포기각서 작성의 의미를 말해주는 것이었고, 친권을 영구히 포기하였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행위였다.[38]
기타
2002년 12월, 조성민은 최진실이 임신 중에 담배를 피웠다는 발언을 하였는데, 이 발언은 최진실에 대한 험담으로서, 자신의 일방적인 주장에 불과했지만, 정작 자신은 임신부를 폭행하는 등 대놓고 태아를 공격하는 행위를 하였다.[39][11]
2005년 7월, 조성민은 '불륜' 상대자로 지목받았던 심 씨와 결혼하였다.[13] 2010년 10월, 조성민의 아버지 조주형은 조성민과 심 씨에 대해 "두 사람 관계는 정리된 걸로 안다. 두 사람은 10개월째 별거 중이다"라고 말했다.[40][41]2011년 12월, "대법원 법인 등기부를 통해 확인한 결과, B업체 대표 이사는 심 씨이고, 조성민은 2010년 10월 26일에 B업체의 사내 이사로 취임했고 2010년 11월 2일에 정식으로 등기부에 등재되었다"라는 사실이 알려졌다.[42]
2008년 10월, 조성민은 최진실의 두 자녀가 물려받은 유산을 관리하는 것에 대해 권리를 행사하려고 하면서 사회적 반발을 샀다. 그 와중에 배우 우연희가 조성민의 배우자라는 허위사실이 유통되었고, 그로 인해 우연희는 얼굴도 알지 못하는 시민으로부터 폭행을 당하는 등 고초를 겪었으며 또한 우울증도 앓았는데, 그 피해사실을 《MBC 스페셜》에 출연하여 공개하였다. 한편, 우연희의 본명은 심은우였고, 우연희의 둘째 아들 이름은 조성민이었다.[43][44][45]
2008년 12월 2일, 시사IN의 주진우 기자는 SBS 《좋은 아침》에 출연해 최진실의 아들 최환희가 조성민에게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공개했다.[46]2009년6월 25일, 조성민은 SBS 《좋은 아침》에 출연해 최진실의 자녀들과 교회에서 만나고 있고 최진실의 어머니와도 아이들에 대해 대화를 나눈다고 말했다.[47] 최진실의 동생 최진영은 노컷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조성민이 최진실의 자녀들과 만나고 있다는 보도는 사실이 아니며 아이들이 조성민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자신은 조성민이 아이들과 만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48] 2009년 8월 31일, 최진실의 어머니 정옥숙은 티브이데일리와의 인터뷰에서 “(조성민이) 교회에 매주 나와 아이들을 만난다고 하는데 만난 적 없다. 난 본 적도 없다. 교회에서 혼자 아이들을 지켜보는지는 알 수 없다. 이렇다 저렇다 말 나오는 것도 싫고 그냥 상대하기 싫다”라고 말했다.[49][50]
강남중앙침례교회는 최진실의 유가족들이 다니는 교회였는데, 조성민은 2009년 1월부터 이 교회에 출석했고 2009년 6월에 ‘기독교 어린이 야구 영성 캠프’를 기획했으며 이 캠프에 대해 강남중앙침례교회를 협력단체로 하고 강남중앙침례교회의 전도사 4명이 참가한다고 홍보했다. 과거의 행실로 인해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진 조성민이 한다는 이유로 또 상업적인 목적으로 하는 게 아니냐는 의혹 때문에 조성민의 ‘야구 영성 캠프’에 대해 기독교 내부에서 비판적인 여론이 있었다. 2009년 7월 17일, 기독교 언론사 뉴스앤조이는 조성민의 ‘야구 영성 캠프’에 관해 심층 취재 보도했고 조성민의 홍보 내용과 다른 점이 발견되었다.[18][51][52][53][54]
↑대한민국 국민은 이혼이 하고 싶을 경우 '기자회견'을 하는 것이 아니라 '협의상 이혼' 절차를 밟거나 '재판상 이혼' 절차를 밟는다. 대한민국 민법상 유책배우자에게는 이혼할 권리가 없고, 기자회견으로 자신의 배우자가 유책배우자라고 주장하는 행위는 명예훼손 행위이다. 배우자가 유책배우자일 경우 배우자의 협조를 받지 않더라도 '재판상 이혼' 절차를 통해 이혼할 수 있다.
최진실의 전 남편이자 전 프로야구 선수 조성민이 6일 숨진 채 발견됐다. 최진실이 세상을 떠난 지 4년 3개월 만이다.
당대 최고 여배우와 일본 명문 구단 요미우리 자이언츠 투수의 만남이었다. 최진실과 조성민이 결혼 소식을 발표할 때만 해도 두 사람의 행복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두 사람은 2000년 12월 5일 식을 올렸고, 환희ㆍ준희 남매가 태어났다.
↑ 2008년10월 최진실 사망
↑ 2004년 8월 파경
↑ 2000년 12월 5일 결혼식
결혼 생활은 순조롭지 못했다. 2002년 12월 파경을 맞았다는 조성민의 기자회견 후 두 사람은 별거에 들어갔다. 2004년 8월에는 조성민이 최진실의 집에서 폭력을 휘두른 혐의로 긴급체포됐다. 한 달 후 두 사람은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최진실은 이후 잠시 숨을 고른 후 KBS 2TV 드라마 '장밋빛 인생'(2005), MBC 드라마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2008) 등으로 화려하게 돌아왔다. 속내는 그렇지 못했다. 이혼 후 우울증은 극복하지 못했다. 2008년 10월 거짓말처럼 세상을 떠났다.
그는 하늘에서도 편하지 못했다. 사망 후 두 자녀의 양육권, 친권 등을 놓고 유족과 조성민 간에 갈등이 일었다. 2009년 8월에는 유골함 도난 사건이 발생했다. 급기야 자신의 빈자리를 채우던 동생 최진영이 2010년 3월 누나의 뒤를 따랐다.
조성민은 최진실과 관련된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도마에 올랐다. 자녀들에 대한 권리를 외할머니인 정옥숙씨에게 넘겼지만 그에 대한 비난은 여전했다. 한때 촉망 받는 야구 유망주였던 그는 제빵사업가 야구해설가 2군 코치 등에 도전했지만 번번히 재기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리고 향년 40세에 숨졌다.
지난해 9월 KBS 2TV 예능프로그램 '해피선데이'코너 '남자의 자격2'의 '패밀리 합창단'에 출연해 해맑은 모습을 보여줬던 환희ㆍ준희 남매는 약 5년 사이에 엄마와 외삼촌에 이어 아빠까지 떠나 보내게 됐다.
[TV리포트=오민희 기자] 최강 동안 외모 때문에 아들과 부적절한 관계로 오해받는 44세 동안엄마가 등장했다.
7일 오후 11시 20분에 방송된 KBS2 ‘대국민 토크쇼 안녕하세요’에서는 최강 동안 엄마 때문에 남들 시선이 불편한 아들 한상준씨가 출연해 고민을 토로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이날 한상준씨는 “제 어머니가 스무 살에 저를 낳아 올해 44살이다. 그런데 너무 동안이라 늘 모자지간이 아닌 부적절한 관계로 오해받는다”고 고민을 털어놨다. 일례로 엄마와 영화를 보고 나왔는데 여자친구한테 바람피는 것으로 오해받아 헤어지거나, 양다리 걸친 나쁜 놈으로 오해받는 경우가 다수였다고.
특히 한상준씨는 “친구들이 엄마를 보며 ‘어디서 낚았냐. 완전 쭉쭉빵빵이다’고 관심을 보인다”면서 “저희 엄마를 저렴하게 보는 이상한 시선이 더 고민이다. 여러모로 속상하다”고 말했다.
최강 동안 어머니가 스튜디오에 등장하자 방청석에는 감탄이 쏟아졌다. MC들은 “어머니께서 화면보다 실물이 더 동안이다”며 동안 비결을 물을 정도. 이에 한상준씨의 어머니는 “저는 계속 움직여야 하는 성격이다. 특별히 관리도 안 한다. 그냥 팩을 붙이는 정도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이어 한상준씨의 어머니는 “저는 제 나이대로 보였으면 좋겠다. 후덕하니 살도 좀 있어야 이영자씨처럼 엄마같이 느껴진다”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두 모자는 클럽까지 함께 다니는 사이. 한상준씨의 어머니는 “젊은 문화를 느끼고 아들과 함께해서 재미있다”고 말했지만, 아들 한상준씨는 “엄마에게 접근하는 남자를 막느라고 힘들다. 잠시라도 화장실에 다녀오면 엄마가 남자들 틈에 가려져 있다. 엄마 손목을 잡고 끌고 오면 엄마를 놔주지 않는다. 그때부터 남자들과의 기 싸움이 시작된다”고 말해 좌중을 놀라게 만들었다.
이에 한상준씨의 어머니는 “24세 청년이 쫓아온 적도 있다. 당시 제가 40세였는데 28살 정도로 보고 연상이라도 괜찮다고 하더라. 누나가 아니라 이모라고 말했는데도 계속 따라다녔다”고 자랑했다.
이어 한상준씨의 어머니는 “사실 제가 아들을 혼자 키우다보니 더욱 옆에서 챙겨주고 싶다. 아들이 때로는 친구 같고 때로는 동생 같다”면서 “누구보다 잘 통하고 함께 즐겁게 지냈다고 생각했는데 고민이었다고 말해 놀랐다”는 반응을 보였다.
결국 아들 한상준씨는 “만나는 사람마다 일일이 모자지간임을 설명하는 게 스트레스가 심하다. 2013년 새해에는 오해하지 말아 달라. 저희 어머니가 맞다”고 호소했지만 44표를 받고 탈락했다.
비는 지난해 5월 31일부터 3일 간 제주도에서 진행된 '2012 디지털케이블TV쇼'에 참석했다. 해당 기간 중 1박 60만원대 호텔 스위트룸에 머물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특혜 논란이 불거졌다.
7일 오후 국방부는 TV리포트와의 통화에서 "비가 위문열차 때문에 제주도에 묵었다. 11명과 국방홍보원장을 비롯한 직원 26명 등 49명이 함께 숙박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국방 홍보원(이하 홍보원) 직원이 동행했으며, 업무상 같이 잔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이어 "비가 KCM(본명 강창모)과 함께 단 둘이 묵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말이 안 된다. 5~6명이 한 방에서 함께 숙박했다"며 "더욱이 특급호텔 수준은 아니다. 60만원 정도의 호텔이었으며, 비용은 케이블 협회에서 지불했다"고 말했다.
국방부는 비가 호텔에서 숙박한 것에 대해 연예병사의 특혜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관계자는 "비가 지난해 인천에서 묵은 R호텔은 '무늬만 호텔'이지 모텔에 가깝다. 호텔에 묵은 것은 연예병사 특혜가 아니라 홍보원 직원들과 함께 이동해야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운전병들도 외부에 나가면 직원과 동행하기 때문에 호텔에서 묵는다. 군대에서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다. 일일이 다 따질 수 없다"라며 "비의 호텔 숙박에 대해 국방부가 징계를 내릴 수는 없다"라고 밝혔다.
한편 비의 군 특혜 논란은 지난 1일 연예매체 디스패치가 두 사람의 열애와 데이트 사진을 단독 보도하면서 불거졌다. 보도에 따르면 연예병사인 비는 지난해 11월부터 1주일에 1번꼴로 외박 또는 외출 형태로 김태희와 데이트를 했다. 사진 속 비는 규율에 어긋나는 탈모보행까지 했다.
비 측은 "복장 위반은 국방부의 조치를 따르겠다"라며 "하지만 휴가와 외박은 규정에 따랐다. 특혜는 없었다"라고 강조했다.
1970년대 어느 날 밤이었다. 문인들과 마신 술에 불콰해져 불 꺼진 집에 들어섰다. 라디오 소리만 방을 지키고 있었다. 조곤조곤 이어지는 이야기를 듣다 문득 일기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고은 시인(80)은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지금은 의식을 치르듯 반드시 몇 자를 적고서야 잠을 이룬다.
고은 시인의 70년대 일기 '바람의 사상'과 대담집 '두 세기의 달빛'을 한길사가 묶어 내놨다. 7일 한국언론재단(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그는 "전쟁이나 논쟁으로만 역사가 진행되는 건 아니다. 배추 값 같은 시정잡배들 미시사적인 서술행위도 의미가 있다. 비정치 분야 삶의 화석들, 궤적들, 고고학들이 우리를 얼마나 풍요롭게 하는가"라고 말했다.
'바람의 사상'은 73년 4월 6일부터 77년 4월 11일까지 하루하루를 담았다. 그의 일기는 시인의 개인사이자 당대 정치사회사다. 술 좋아하고 원고 쓰는 일에 쫓기고 그나마 받은 원고료를 또다시 술에 퍼붓는, 그의 표현대로 '폐허'처럼 살았던 모습과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지식인의 면모, 자기 글을 향한 비장한 각오도 엿보인다.
"문학 달지 마라. 문학 쓰디쓴 것이기를. 귀신이 토해내는 검은 핏덩이처럼 써라. 못 먹을 만큼 쓰디쓸 것. 달콤한 작가, 달콤한 계집, 달콤한 언어들을 살육하라."(1973년 4월 13일) 그는 "70년대의 나는 아주 순정 덩어리였다. 지금처럼 숙련된 눈으로만 파악해야 하는 시대와 상황이 아니었고 비논리적인 눈으로 세상을 보고 거리를 보고 울고 웃고 그랬다. 그때가 우리들의 소녀시절이었다"면서 "시인 고은의 시작점이자 또 하나의 고향이 70년대"라고 말했다.
반면 '두 세기의 달빛'에서는 소설가 김형수와 마주 앉아 그의 삶과 문학, 마주한 역사와 문명을 육성으로 들려준다. 그가 들추고 회상하는 과거는 1930년대에서 50년대 초까지다. 모국어를 잃은 식민지 소년이 광복을 맞고, 전쟁 뒤 폐허의 귀퉁에에서 마침내 시작의 첫걸음을 내디딜 때까지를 세밀한 기억력으로 더듬는다.
그렇게 술을 좋아하던 시인은 "요즘 술 먹는 시간이 아깝다.술보다 책이 더 좋다. 20대엔 언어도단이 나를 가장 신나게 했고 책을 부정하는 삶을 살았는데 후반 생애에 오면서는 전천후적으로 책과 함께 살고 있다"며 "그렇게 황홀하던 술집도 책보다는 부차적이 됐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문학의 시대가 쭈그러들고 있지만, 문학의 힘이 새로워질 거라는 확신을 늘 갖고 있다"고 했다.
신년에는 제법 긴 시간 외국에 머물 예정이다. 최근 이탈리아 베네치아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고 한 학기 강의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곳에 가서 장래 구상도 해볼 생각이다. 5월에는 아프리카 남아공에서 시인 몇몇과 모여 축제에 참여한다. 그는 "우리 조상이 시작됐다는 기점인 아프리카 체험을 해보고 돌아오면 시 몇 편이 나올지 모르겠다"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