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자살하라' 김동길 교수 뭇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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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23 17:34 노컷뉴스 김민수 기자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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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전 대통령이 23일 오전 봉하마을 뒷산 바위 위에서 투신해 서거했다. 노 전 대통령은 인근 병원으로 긴급 이송돼
심폐소생술을 받았지만 끝내 숨졌다.

이같은 소식이 전해지면서 네티즌들의 애도물결이 이어지는 가운데 '노사모'와 '사람사는 세상' 등의 인터넷 홈페이지에 접속자가 폭주하면서 사실상 접근이 힘든 상태다.

다음 아고라에서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명복을 빕니다' 추모 서명이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오후 2시 26분 현재 5만여명의 추모객이 다녀갔다.

대화명 'pooh'는 "믿기지 않는다. 늘 존경했기에... 갑작스런 비보에.. 말을 더 잊기가.. 편히 잠드소서"라며 안타까워 했다. '자이'도 "억장이 무너집니다.
베란다
조기 걸었습니다"라며 애통해 했다.

한편, 지난달 15일 자신의 홈페이지에 '먹었으면 먹었다고 말을 해야죠'라는 제목으로 노 전 대통령의 비리 의혹에 대한 비판 글을 올린 김동길 연세대 명예교수가 네티즌들의 표적이 되고 있다. '자살'을 선택하라는
문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김 명예교수는 이 글에서 "그(노무현 전 대통령)가 5년 동안 저지른 일들은 다음의 정권들이 어떻게 바로잡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도덕적인 과오는 바로잡을 길이 없으니 국민에게 사과하는 의미에서 자살을 하거나 아니면 재판을 받고 감옥에 가서 복역하는 수밖에는 없겠습니다"라고 주장했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면서 네티즌들은 격렬하게 비난하고 나섰다.

대표적인 보수논객 조갑제 씨도 이날 자신의 홈페이지에 '盧武鉉의 자살, 南相國의 자살'이라는 글을 메인에 올려놓고 격한 비판을 쏟아냈다. 특히 2004년 3월 고(故) 남상국 전 대우건설 사장의 자살과 이번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을 결부 지으며 "그 생명의 값에는 차별이 없다"고 정리했다. 네티즌들은 옹호글과 비판글로 나뉘어 공방을 벌이고 있다.

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는 진보신당 당원
게시판에 '[근조] 노무현 대통령의 추억'이라는 글을 통해 노 전 대통령과 자신과의 인연을 소개하면서 "가장 매력적인 정치인이었다"고 회고했다. 진 교수는 또, 이명박 대통령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국민장이란?…'7일 이내·정상근무' hotiss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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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24 12:17 노컷뉴스 이기범 기자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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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전 대통령측이 '국민장' 의사를 정부에 전달함에 따라 정부는 조만간 국민장 준비에 들어갈 전망이다.

국민장은 대통령직에 있었던 사람이나 국가, 사회에 현저한 공훈을 남긴 사람에 대해 국무회의 심의를 거쳐 대통령이 결정한다.

9일간 진행되는 국장과는 달리 국민장은 최대 7일 이내로 한정되며 학교, 관공서 등은 정상적으로 운영된다.

보통 현직 대통령이 서거했을 경우는 국장, 전직 대통령의 경우는 국민장을 거행한다. 또한 국민장은 국민 전체의 이름으로 거행하며 비용일부를 국가가 대지만 국장은 국가 이름으로 비용전체를 국고에서 지불한다.

구체적인 국민장 준비는 장의위원회에서 한다. 장의위원회는 장례식의 방법과 날짜, 장소는 물론 묘지 선정과 조성에 관한 사항을 결정한다. 또한 장례예산을 편성하고 기타 장례에 관한 중요사항을 논의한다.

지금까지 거행된 국민장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부인인 육영수 여사의 국민장을 비롯해 임시정부의 김구 주석과 이시영 전 부통령, 김성수, 장면 전 총리, 신익희 전 국회의장과 조병옥 전 대통령 후보 등의 국민장이 있다. 80년대 이후에는 지난 83년 아웅산 폭발사건으로 순직한 이범석 외무장관 등 17인 합동국민장과 2006년 최규하 전 대통령의 국민장이 엄수됐다.

육 여사의 국민장은 지난 1974년 8월 15일부터 19일까지 5일간 치러졌다. 발인식은 청와대에서 치러졌으며 영결식은 중앙청(지금은 철거되고 없는 옛 정부종합청사, 경복궁 근정전 앞에 있었다)에서 거행됐다. 영결식을 마친 육 여사는 세종로와 서울시청,삼각지를 거쳐 동작동 국립묘지(국립현충원)에 안장됐다.

가장 최근 치러진 최규하 전 대통령의 국민장 역시 5일간 치러졌다. 영결식은 2006년 10월 26일 거행됐으며 서울대병원에서 발인식을 치른 뒤 경복궁 앞뜰로 운구돼 영결식을 거행했다. 장례위원장은 당시 한명숙 총리였으며 영결식에는 노태우 전 대통령을 제외한 전현직 대통령이 모두 참석했다.

장례위원장의 조사에 이어 3대 종교의식이 치러지고 의장대 조총의식을 마지막으로 최 전 대통령은 경복궁 동문을 거쳐 광화문 남대문, 삼각지를 거쳐 반포대교 쪽으로 운구돼 대전 국립현충원에 안장됐다.

전례에 비춰 노무현 전 대통령의 국민장도 서울에서 치러질 전망이며 영결식은 경복궁 등 시내 중심부에서 엄수될 것으로 예상된다. 운구는 광화문, 서울시청 앞을 거칠 것으로 보인다.

물론 장의위원회가 조만간 구성돼 노 전 대통령의 구체적인 국민장 형식과 장지 등을 결정할 것으로 보이지만 큰 틀은 전례를 벗어나지 않을 전망이다.

[포토] 청년 시절 노무현 전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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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전 대통령이 23일 오전 서거 한 것으로 확인됐다고 경남경찰청이 밝혔다. 사진은 청소년 시절, 군복무 시절, 사법연수원 시절의 노무현 대통령의 모습.

(사진/연합뉴스)

 

[포토] 청와대 노 전대통령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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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전 대통령이 23일 김해 사저 뒤 봉화산에서 투신해 오전 9시 30분께 서거했다. 23일 청와대 세종실 앞에 걸린 노무현 전 대통령의 초상화 앞을 직원들이 지나가고 있다.

[포토] '노사모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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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사모 회원이 23일 서거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캐릭터를 부여잡고 눈물을 흘리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파란만장했던 영욕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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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농의 아들, 노동현장의 투사에서 대통령, 그리고 검찰 출두와 자살...

23일 63세를 일기로 타계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삶은 대한민국 민주화의 숨길과 희비가 담긴 한편의 '서사시'였다.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다는 그만의 '원칙'과 지역주의에 항거했다가 번번이 좌절한 '소신'을 무기로 최고 권좌에 올랐지만 퇴임 후 짧았던 삶은 불행했던 전직 대통령들의 그것과 다를 바 없이 초라했다.

정치개혁을 외치며 현실정치의 벽과 온몸으로 맞섰지만 역설적이게도 '깨끗한 정치'를 향한 부르짖음은 그의 명예를 나락으로 떨어트리고 참담한 마지막 길을 걷게 한 족쇄가 됐다.

인권 변호사로 부산에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 대통령에 당선돼 재임할 때까지 그는 늘 한국정치의 이단아였다.

호남에 지역기반을 둔 민주당의 영남 출신 대선후보, 국회 탄핵소추안이 의결되고 야당에 대연정을 제안한 헌정사상 첫 대통령 등 그의 정치역정은 그야말로 파격과 기록, 그 자체였다.

그래서 세간에서 불리는 '바보 노무현'이라는 별칭이 늘 따라붙었고 또한 친숙했다.

노 전 대통령은 1946년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에서 3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학업에 두각을 나타낼 정도로 비상한 두뇌를 지녔지만 가난 때문에 대학 진학의 꿈을 일찌감치 접고 부산상고에 진학했다.

하지만 가난에서 벗어나 세상에 큰 뜻을 펼치고픈 야망은 고교 졸업 후 평범한 청년이었던 그를 법조인의 길로 이끌었다.

수차례의 고배를 마신 끝에 나이 서른에 사법고시에 합격, 판사의 길을 걷다 "적성에 맞지 않아" 7개월 만에 그만두고 변호사로 전직했다.

잠시 안락한 삶을 살던 그가 인권 변호사의 가시밭길로 접어든 것은 81년 부림사건 변론이 계기가 됐다. 이후 소외받는 노동자와 학생들의 편에 서서 군사정권에 저항했던 노 전 대통령은 87년 9월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씨 사건을 통해 이름 석자를 세상에 알렸다.

당시 사인 규명에 나섰다가 3자 개입 혐의로 구속됐지만 돈키호테 같은 용기를 눈여겨본 김영삼 (金泳三)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 측의 권유로 88년 13대 총선에 출마, 5공 실세였던 허삼수(許三守) 후보를 꺾고 제도권 정치에 입문했다.

초선의원에 지나지 않았던 그가 신데렐라처럼 부상, 한국정치의 새 희망으로 떠오르게 한 무대는 88년 5공 청문회였다.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등 힘있는 증인들을 정연한 논리와 송곳 질문으로 몰아세워 TV를 시청하던 국민을 열광시키면서 '청문회 스타'가 된 것.

그러나 이후 정치인으로서의 삶은 순탄치 못했다. 90년 1월 3당 합당 때 김영삼 총재의 손을 뿌리치고 합류를 거부한 뒤 지역주의의 벽에 막혀 낙선을 거듭하는 등 비주류 정치인의 길을 걸었다.

동시에 영남 출신임에도 김대중 전 대통령과 뜻을 함께한 그의 '소신'은 대통령의 길로 이끈 최대의 정치적 자산이 됐다.

98년 보선에서 '김대중 깃발' 아래 종로에 도전, 금배지를 달았지만 2000년 총선에서 지역주의 극복을 내세워 고향 부산에 내려갔다가 한나라당 허태열 후보에게 고배를 들었다. 하지만 이 선거는 '대통령 노무현'을 있게 한 소중한 패배였다.

그의 무모함은 '바보 노무현'이란 이름으로 인터넷을 타고 대중, 특히 영.호남 지역주의에 지친 표심을 파고들면서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바람과 2002년 대선을 휘감은 '노풍'을 일으킨 기폭제가 됐다.

노풍의 진원은 호남이었다. 민주당 대선후보 광주 경선에서 1위를 차지하는 이변을 일으켰고, 이는 '이인제 대세론'을 함몰시키면서 전라도의 압도적 지지를 받는 경상도 출신 후보로 나서는 발판으로 작용했다.

그는 대선날 새벽 국민통합 21 정몽준 대표가 후보단일화를 철회했지만 마지막 순간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도 정면돌파를 택했고, 정치 인생 내내 꼬리표처럼 따라붙었던 그 특유의 승부수는 청와대 입성의 '기적'을 이뤄냈다.

'정치인 노무현'의 승부사적 기질은 대통령 재임 중에도 옛 정치의 반동에 맞서며 그 위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2004년 3월 한나라당을 중심으로 한 야권이 여소야대 구도에서 열린우리당 지지 발언 등 선거법 위반 혐의를 걸어 헌정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발의했지만, 되레 메가톤급 역풍을 불렀고, 결국 제3당이었던 열린우리당이 한나라당의 의회 독주에 제동을 걸며 과반을 차지하는 제2의 기적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정치, 경제, 대북관계 등 거의 우리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노 전 대통령의 무모하게 보이는 정치 실험은 그칠 줄 몰랐고, 하루가 멀다하고 계속되는 청와대발 충격 발언은 민심이반과 열린우리당의 지지율 급전직하로 이어지면서 오히려 국정 난맥상을 야기한 자충수가 됐다.

거듭된 재보선 전패로 의회 과반을 잃고 뿌리채 흔들리던 열린우리당은 결국 2006년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에 참패했다. 사실상 국정운영의 동력을 상실, 조기 레임덕에 빠지자 한나라당에 대연정을 제안하는 승부수를 던졌지만 박근혜 전 대표의 '원칙'에 의해 일언지하에 외면당했다.

급진적 개혁정책으로 사회 전반에 피로감이 누적되는 와중에 아파트값 급등과 북한 핵실험 사태 등이 맞물리면서 여당 내부에서 탈당을 요구하고 나서는 등 '정치적 동지'들마저 돌렸다.

노 전 대통령은 정국 타개책으로 4년 연임제 개헌이라는 마지막 카드를 들고 나왔지만 역시 한나라당의 거부로 뜻을 접어야 했다.

대신 남북 화해협력 관계 정립에 매진, 8월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남북정상회담을 한 것이 대북관계에서 큰 업적으로 남았다.

대통령 권좌에 있는 동안에도 바람 잘 날 없었지만 퇴임 후 불거진 박연차 뇌물 게이트는 노 전 대통령의 거의 유일한 자산이었던 도덕성을 바닥에 떨어트리며 그를 '사지'로 몰고 갔다.

퇴임 전 입버릇처럼 "농촌으로 돌아가 아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삶을 살겠다"고 약속했던 그였지만 역시 전직 대통령들이 걸었던 굴곡을 피해가지 못했다.

인생행로를 함께 걸은 진보진영 정치인들과 젊은 386들, 특히 인생의 버팀목이었던 친형 건평씨와 부인 권양숙씨마저 수뢰 혐의로 검찰에 줄줄이 불려나가는 현실 속에서 구차한 삶보다 '정치인 노무현'으로서 후대의 평가를 택한 것으로 보인다.

(서울=연합뉴스) 


<盧전대통령 서거> 경호관이 밝힌 투신 순간

연합뉴스 | 입력 2009.05.23 21:26 | 수정 2009.05.23 22:06

 


바위에 20분 머물면서 가벼운 대화 뒤 갑자기 뛰어내려
(창원=연합뉴스) 김영만 기자 = 노무현 전 대통령은 투신하기 전 봉화산 중턱 부엉이 바위에서 20분 가량 머물면서 수행한 경호관과 가벼운 농담을 하는 등 대화를 나누다 갑자기 뛰어내린 것으로 경찰조사에서 밝혀졌다.

노 전 대통령 서거 경위를 수사 중인 경남경찰청은 이 모 경호관을 대상으로 23일 오후 2시간 여 동안 투신 당시의 정확한 상황에 대해 조사했다.

이 경호관은 경찰 조사에서 "노 전 대통령이 바위에서 갑자기 아래로 뛰어 내렸으며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어서 손을 쓸 틈조차 없었다"고 말했다고 경찰이 전했다.

경찰이 밝힌 이 경호관의 진술내용에 따르면 노 전 대통령은 투신하기 전 봉화산 7부 능선의 부엉이 바위에 20분 정도 머물렀다.

노 전 대통령은 바위에서 이 경호관과 일상적인 대화도 조금 나눴다.
노 전 대통령은 이 경호관에게 "담배가 있느냐"고 물어 경호관이 "없습니다. 가져올까요"라고 답하자 "됐다. 가지러 갈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노 전 대통령은 또 마을 길에 걸어가는 사람을 보고도 "저 사람이 누구지"라고 물었다.
또 "여기가 부엉이 바위인데 실제 부엉이가 살아서 부엉이 바위인가"라고 농담을 건네기도 했다고 이 경호관은 경찰에서 말했다.

이 대화를 끝으로 한동안 침묵이 흐른 뒤 노 전 대통령이 갑자기 바위 아래로 뛰어내렸다는 것이 이 경호관의 진술이다.

노 전 대통령이 이날 부엉이 바위에 간데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를 묻는 경찰의 질문에 이 경호관은 "경호 요원은 대통령이 가시는 뒤쪽 1~2m에서 그냥 뒤따라 갈 뿐이지, 왜 그 곳으로 갔는지는 모른다"고 말했다.

이전에 보통과 다른 낌새가 없었느냐는 질문에는 "마음 속 고민을 털어 놓는 등과 같은 사안은 비서 소관이고 단순히 수행하는 경호 소관이 아니어서 잘 모른다"고 대답했다고 경찰은 전했다.

경찰은 "현재 시신이 봉하마을에 있고, 검찰 지휘가 아직까지 없는 것으로 미뤄 부검은 하지 않을 걸로 본다"고 밝혔다.

한편 경찰은 이 경호관이 노 전 대통령의 투신을 막지 못한 것이 내부징계 대상일 지는 모르지만 입건 대상은 아닌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ymkim@yna.co.kr
 

극단적 선택 이유는?…도덕성 상처에 큰 부담

SBS | 입력 2009.05.23 21:00

 


< 8뉴스 >

< 앵커 >

유서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노 전 대통령은 검찰 수사를 받으면서 매우 괴로워했습니다. 도덕성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점이 무엇보다 견디기 힘들었을 걸로 보입니다.

이병희 기자입니다.

< 기자 >

검찰은 오늘(23일)이나 내일쯤 권양숙 여사를 재소환한 뒤, 다음주 중에 노 전 대통령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었습니다.

노 전 대통령의 극단적인 선택은 이런 검찰의 수사 일정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관측됩니다.

유서에 나오는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의 고통이 너무 크다",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밖에 없다"는 대목이 이런 관측을 뒷받침합니다.

유서에는 측근들은 물론 부인과 아들, 딸까지 가족들이 줄줄이 수사대상에 오르는 데 대한 비통함이 담겨있습니다.

수사 과정에서 최대 무기로 여겼던 도덕성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받게 된 것도 극단적 선택을 한 요인으로 분석됩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지난달 30일) : (왜 국민들에게 면목없다고 말씀하셨습니까?) 면목이 없는 일이지요.]

노 전 대통령은 지난달 자신의 홈페이지에 "더 이상 노무현은 여러분이 추구하는 가치의 상징이 될 수 없다." "여러분은 저를 버리셔야 한다"며 참담한 심경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결국 검찰수사로 인한 압박감과 그 과정에서 실추된 이미지, 여기에 낙담이 복합적으로 겹치면서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병희 able@sbs.co.kr
 

[포토] 오열하는 유시민  

 

김두관 전 장관... "이명박 정부가 너무 잔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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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 전 국회의원이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한 경남 양산 부산대병원으로 들어오며 엘리베이터 앞에서 눈물을 훔치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듣고 경남 양산 부산대병원으로 달려온 노 전 대통령의 지인들과 참여정부 시절 인사들은 갑작스런 변고에 오열했으며, 김두관 전 행자부 장관은 "이명박 정부가 너무 잔인하다" 고 현 정부를 비난했다.

양산 부산대병원에는 오후 1시30분 현재 문재인 전 대통령 비서실장, 조카사위인 정재성 변호사, 이병완 전 대통령 비서실장 등 노 전 대통령 측근 인사 20여명이 달려와 장례절차 등 사후 대책을 논의하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 귀향에서 서거까지  
환호 속 고향 안착→'박연차 게이트'로 '비극적 결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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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역대 대통령 가운데 처음으로 퇴임 후 고향으로 돌아온 노무현 전 대통령이 '박연차 게이트'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노 전 대통령은 지난해 2월 고향인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로 돌아온 뒤 친환경 농법 운동에 나서고 사저를 찾은 방문객들과 소탈한 대화에 나서는 등 권위를 떨쳐버려 박수를 받았다.

하지만 형 건평 씨의 구속 등 가족들이 잇따라 권력형 비리에 연루되면서 장기 칩거에 들어가는 영욕을 겪었고 특히 '권양숙 여사가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사과문 발표 이후 검찰 소환 수모 속에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주민 환호 속 고향 안착 = 노 전 대통령은 지난해 2월25일 서울에서 열린 퇴임식 직후 KTX를 타고 고향인 봉하마을로 돌아와 1만명이 넘는 환영인파의 큰 박수를 받았다.

노 전 대통령은 귀향 당시 47분간의 연설을 통해 "지난 5년간 대통령직을 좀 잘했으면 어떻고 못했으면 어떻냐"며 "그냥 열심히 했으니 예쁘게 봐 달라"고 말했다.

연설 끝 부분에서 "야~ 기분좋다"는 말로 사상 처음으로 귀향한 퇴임 대통령의 심경을 표현했다. 퇴임 후 생활의 첫발은 그만큼이나 경쾌했다.

◇친환경운동 실천..분주한 행보 = 노 전 대통령은 귀향 후 지난해 3월부터 봉하마을 주변 하천에서 직접 쓰레기를 줍고 습지인 화포천 환경정화활동을 벌이면서 봉하마을의 주변 환경을 개선하는 활동에 주력했다.

특히 노 전 대통령과 봉하마을 주민들이 작목반을 구성해 재배한 '노무현표 봉하오리쌀'은 전국적인 유명세를 타면서 불티나게 팔리며 봉하마을이 친환경재배를 통한 주민소득 증대의 모델이 될 가능성을 확인했다. 이는 노 전 대통령의 귀향이 가져온 큰 성과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이 같은 활동 덕분에 노 전 대통령은 봉하마을의 대표적 '관광자원'이 됐고 실제로 봉하마을은 하루 최고 1만명이 넘는 관광객이 방문할 정도로 김해의 최고 관광지로 떠올랐다.

◇'기록물 유출 논란'으로 타격 = 그러나 노 전 대통령은 잇따른 정치적 논란에 휩싸이면서 마음고생을 겪어야 했다.

귀향 4개월여 만에 불거진 국가기록물 유출 논란이 대표적이었다.

이 일로 국가기록원 관계자들이 노 전 대통령의 사저를 방문하기도 했고, 전.현직 대통령 주변 인사들간의 설전 끝에 경기도 성남의 국가기록원 산하 대통령 기록관에 컴퓨터 하드디스크 등을 반환하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이밖에도 한나라당이 '사이버 상왕 정치'라고 비판한 토론사이트 '민주주의 2.0' 사이트 개설이나 노 전 대통령의 사저 공시가격 논란 등 각종 정치적 이슈가 불거지면서 노 전 대통령은 정치적 소용돌이의 중심으로 끌려 들어갔다.

◇ 형 구속으로 칩거..활동 위축 = 고향 주민의 지지 속에서도 노 전 대통령은 귀향 첫해의 마지막을 사실상 '칩거'라고 할 만큼 대외활동을 극도로 자제해야 하는 상황을 맞았다.

친형인 건평씨와 자신의 오랜 후원자로 알려진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이 세종증권 매각 비리에 연루돼 각각 지난해 12월4일과 같은달 12일에 구속됐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노 전 대통령은 형 건평씨의 구속 직후인 지난해 12월5일을 마지막으로 방문객들과 인사하는 일정을 없애고 외부 행사 참석을 자제하고 사실상의 '칩거'에 들어갔다.

◇'박 게이트'에 가족 연루..침통한 일상 = 형과 자신의 오랜 후원자를 구속한 '박연차 게이트'에 권 여사와 자녀까지 연루되면서 노 전 대통령은 '가족형 비리'라는 여론의 비난에 직면해야 했다.

지난달 7일 '권 여사가 박연차 전 회장으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내용의 사과문을 발표한 이후 노 전 대통령은 설 자리를 잃었고 같은달 30일에는 역대 대통령으로서는 세 번째로 검찰에 소환되는 비운의 전직 대통령이 됐다.

특히 어느 정권보다도 도덕성을 강조했던 자신과 가족들이 부정한 돈에 연루된 상황에 침통해 했고 자신의 개인 홈페이지인 '사람 사는 세상'도 사실상 폐쇄하는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노 전 대통령은 검찰이 권 여사를 비롯해 아들 건호씨, 딸 정연씨 등 가족 모두를 소환한 데 이어 권 여사를 다시 소환하고 자신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를 검토하는 등 계속적으로 압박해 들어오자 결국 영욕으로 가득 찬 생을 스스로 마감하는 비극적 선택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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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인 사생활 폭로보다 '권력'에 대해 시원한 독설 한 방 기대
09.05.14 17:30 ㅣ최종 업데이트 09.05.14 17:30 진민용 (jmy386)

김구라가 <라디오스타>에서 동료연예인 권선국의 이혼을 언급하면서 물의를 빚고 있습니다. 콘셉트를 '독설'로 설정한 탓인지 그의 입은 방송수위를 늘 위태롭게 넘나들었습니다. 또한 지나치게 주변인들의 '치부'를 드러내는 폭로성 발언을 하면서 지탄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김구라의 연예인 '독설'은 인터넷방송 때부터 큰 인기를 끌었고, 마니아들을 중심으로 확산되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것 때문에 김구라는 지금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기도 하니까요.

 

그러나 김구라는 원래 정치인들에 대한 독설로도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가 지상파에 등장하면서부터 이런 '정치적'인 독설을 찾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우리나라 방송가의 분위기가 이미 '정치권'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말입니다.

 

정치권에 대한 방송에서의 다양한 견해와 심지어 독설을 통한 희화화를 용납하고 있는 외국의 사례를 보면 부러움을 넘어서서 '정치후진국'에 살고 있는 현실이 한심하기까지 합니다. 이를 보면 군사독재를 거치면서 수많은 희생자들이 지켜낸 '민주주의'는 딱 절반 밖에는 성취하지 못했다는 생각도 듭니다. 물론 외국의 경우라고 해도 다양한 의견에는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성공한 사람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난하면 '성공도 못한 찌질이들의 궁상'으로 몰아부칩니다. 그래서 권력과 돈, 그리고 명예를 쥔 이상 일반 서민들과는 '급'이 다른 대우와 대접을 받습니다. 거기에다 '독설'을 뿜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치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명박 서울시장, "시골출신이 서울 교육에 대해서 뭘 안다고.."

 

가난하고 못난 찌질이들이 권력을 가진 '귀하신'분들에 대해서 욕좀 하면 안 됩니까.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지난 수 십년 간 안 됐습니다. 심지어 노래 가사에 '간접적인' 내용 때문에 '금지곡'이 돼 버렸습니다. 절대권력을 가진 권력자들의 절대부패에 대해서도 관대한 사회였습니다.

 

그러나 서민들은 '머리카락'조차 기르지도 못했던 시절이 있었고, 짧은 치마조차 마음대로 입지 못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 분위기를 살아 온 세대들에게 인터넷은 그야말로 '돌파구'였습니다. 그 최초의 주인공이 바로 '김구라'였습니다.

 

그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계를 가리지 않고 당시 언론에 회자되던 사안에 대해서 거침없이 독설을 내뿜었습니다. 지금 이명박 대통령도 서울시장 시절에 했던 경솔한 발언으로 김구라의 '도마'에 올려져 '난도질'을 당했습니다.

 

지난 2003년 11월 3일,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이 고교 평준화제도를 비판하면서 윤덕홍 교육부총리를 "시골출신"이라고 비하하는 발언을 해 물의를 빚은 바 있습니다. 당시 프레스센터에서 서울시청 출입기자들과 저녁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교육부총리가 본연의 임무인 유치원, 초등, 중등교육은 도외시한 채 대학입시 제도에만 매달려 있다"며 "부총리제는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는(필요없는) 직책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시장은 또 "우리나라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두 가지를 극복해야 한다. 하나는 노조이고 또 하나는 전교조"라며 노조와 전교조도 비난했습니다. 이 시장은 이어 "부실 교육의 핵심은 교육을 책임진 사람들이 모두 시골출신이라는 데 있다"며 "교육부총리는 대구 출신인데 시골 중학교 교사 하다 대학교수하고 무슨 협회장 거쳐서 부총리까지 올라왔다. 이런 사람들은 서울의 교육실정을 모른다"고 막말을 쏟아내기도 했습니다. 

 

김구라, 이명박 시장 향해 "멸치대가리, 노가다 십장출신이.."

 

이 발언으로 이명박은 곤경에 처했지만 그저 '말실수' 정도로 넘어갔습니다. 그러나 인터넷은 뜨거웠습니다. 이명박 시장에 대해서 정면으로 비판하고 나선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김구라입니다. 그는 구봉숙(김구라, 황봉알, 노숙자)이라는 인터넷 시사방송을 통해서 '통렬히' 욕설과 독설을 함께 날렸습니다.

 

김구라는 "그렇게 따지면 이명박 시장은 뭐예요. 현대건설 출신 아녜요? 현대건설..그거 무슨 노가다 십장 출신 아닙니까?"라며 말문을 열었고, 이어 "현장에서 모래짬밥 먹고 튀다가 주영이형(정주영 명예회장) 눈에 띄어서 이렇게 된거 아닙니까? 자기는 무슨 *발, 건설회사 노가다 출신이 무슨 시골출신 운운하는거야"라며 거침없이 욕설을 쏘아댔습니다. 심지어 생김새까지 거론하면서 "멸치대가리"라며 놀리기도 했습니다.

 

기존 방송에서는 얌전 빼고 "이 시장의 발언이 적절치 못하다는 비판이 일고 있습니다" 정도의 멘트를 할 때, 김구라는 인터넷에서 온갖 욕설을 퍼부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이 때는 온라인상의 표현의 자유와 권력에 대한 비판이 자유로웠습니다.

 

시대가 바뀌니 언론도 바뀌고, 권력이 바뀌니 사상도 바뀌나

 

당시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집권한 직후 상황이었고,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에서 줄곧 '민주화'와 '자유'에 대해 관대하던 분위기였기에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이런 '직설적인' 인터넷 방송을 용납하지 않을 분위기입니다. 한나라당이 상정하려는 미디어법으로만 보더라도 '욕설'을 당한 상대방의 동의가 없어도 '모욕적인 발언'이라고 판단되면 그대로 처벌을 받게 되기 때문에, 권력을 가진 상대가 가만 있을 리 없고, 경찰은 당연히 처벌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김구라의 독설이 그리운 것입니다. 아니 그의 '독설'이 그립다기 보다는, 그와 같은 '독설'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던 시절이 그리운 것이겠지요. 지금 그가 인터넷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6년 전과 같은 그 독설은 듣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기껏해야 지금처럼 주변의 연예인에 대해 '이혼했다'며 신변잡기를 폭로하는 수준 밖에 더 하겠습니까.

 

왕비호와 김구라, 모두 방송에서 '낮은 수위'의 독설 밖에는 할 수 없는 처지들입니다. 그렇다고 '인터넷'도 자유롭지 못합니다. 정부 정책을 비판하면 '명예훼손'으로 처벌받을 걸 눈치봐야하는 시대입니다.

 

글 하나 잘 못쓰면 그대로 경찰에 잡혀가는 시대에 살고 있으며, 시위를 할 때 '마스크'를 쓰면 그것도 현행범으로 잡혀가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지금이 5.18 민주화 운동하던 군부독제시절이라는 착각을 일으킬 정도의 '민주주의 후퇴'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조만간 '노동가'와 '진군가'를 명동시내에서 듣게 될 날이 올 것 같기도 하고, 각목과 화염병을 들고 마스크를 쓰고 시내를 달려가는 모습을 보게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국민 주권이 점차 피라미드의 꼭대기로 옮겨가는 느낌이 듭니다.

 

특권 계층에게만 '자유와 민주주의'가 해당되며, 하층민들은 갈수록 그 '특권'을 차지하려고 하지만 결코 그렇게 되지 못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이럴 때 김구라의 '그때 그 독설'이 그립습니다.  


[Sports] EPL 36R: ManU vs ManC

이제 앞으로 승점 4점이다.

이번 시즌의 프리미어십을 세경기 남겨둔 상황에서
시티와의 맨체스터 더비를 맞이한 유나이티드는 최선의 선발 명단을 내세웠다.
베르바토프-테베즈 투톱에 호날두-박지성의 날개를 달았고 긱스까지 내보낸 것이다.
물론 루니가 벤치에서 경기를 시작하며 약간의 여유를 두기는 했지만
지난 시즌의 패배를 설욕함과 동시에 이번 시즌의 우승을 향해 나아가려는 의지는
시작부터 강력하게 몰아붙이는 유나이티드의 기세로 드러났다.

전체적으로 승리는 손쉬웠다.
호날두와 테베즈가 전반에만 각각 한골씩 성공시킨 것이 승부를 갈랐고,
이미 벌어진 뒤에는 더이상 시티가 유나이티드를 따라올 수조차 없었다.

전반 18분 호날두의 프리킥은 그 마법같은 궤적을 다시 한번 보여주었다.
골문 정면 25m가 넘는 거리에서 날아든 호날두의 슈팅은
시티 수비진의 벽을 살짝 스치며 한번 방향을 바꾸었고
골문 앞에서 한번 튀기며 또다시 방향을 바꾸어 버렸다.
이것은 올 시즌 시티 최고의 영입인 기븐 골키퍼의 눈부신 선방마저
날렵하게 피해내며 골문 구석을 정확히 노리는 결과로 이어져 버렸다.

호날두의 프리킥이 온전히 한 사람의 능력으로 만들어진 골이라면
전반 종료 직전에 터진 테베즈의 추가골은 유나이티드 공격진의 수준을 보여주는 골이었다.
수비 진영에서 얻은 프리킥을 플레쳐가 재빨리 연결한 것은 최전방까지 금새 날아들었고,
베르바토프의 우아한 오른발은 그 높이 떠올랐던 공을 사뿐히 피치 위에 앉혀놓았다.
그리고 파고들던 테베즈에게 이어진 패스는 금새 골대를 강타한 뒤 골망을 갈랐고,
올드 트래포드를 가득 메운 팬들을 향해 귀를 세워보인 아르헨티나 스트라이커는
유나이티드가 그를 꼭 잡아야만 하는 이유를 다시금 보여주었다.

최근 좋지 못한 상태에서 차츰 벗어나고 있는 베르바토프와
이미 좋지 못한 상태에서 상당히 벗어나 있는 호날두가 중심이 된 공격진이
경기 내내 나쁘지 않은 모습을 보이면서 시티를 압박한 것이 분명한 승인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수비진의 활약 역시 절대로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시티의 에이스인 호빙유를 막아낸 하파엘은 분명히 칭찬할만 하다.
아직 어린 이 브라질리언 풀백은 이미 완성된 수준의 선수인 대표팀 선배를 상대로
투지 넘치는 수비를 보여주며 대부분의 장면에서 상대를 끈질기게 따라붙어주었다.
물론 너무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다가 쉽사리 돌파당하는 장면을 몇차례 보여주었지만,
그의 측면 동료가 박지성이었다는 점과 플레쳐, 비디치 등의 적절한 도움을 생각했을 때
아직 어린 하파엘이 범하는 그 정도 실수는 성장을 위한 발판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하파엘이 오른쪽에서 호빙유를 상대하는 동안 에브라는 왼쪽에서 아일랜드를 틀어막았고
비디치와 에반스는 카이세도를 완전히 지워버리며 시티의 공격진을 무력화시켰다.
데 용과 콤파니가 지나치게 수비적인 위치에서 일관한 시티의 공격 흐름에서
최전방의 카이세도와 호빙유가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한 것은 대단히 치명적이었고,
교체 투입된 보지노프, 페트로프, 에반스 역시 유나이티드의 단단한 포백 앞에서
속도면 속도, 높이면 높이 모두 압도당한 것이 결국 유나이티드 승리의 근간이었다.

남은 일정에서 다소 걱정 거리가 될 수도 있었던 시티와의 맨체스터 더비에서
의외로 손쉬운 낙승을 거두며 호날두, 박지성, 에반스 등에게 휴식을 준 유나이티드는
주중에 있을 위건 원정에서 승리를 거두면 사실상 프리미어십 우승을 결정지을 수 있다.
남은 아스날, 헐 시티와의 경기에서 승점 1점만 따면 우승을 확정지을 수 있는 상황을
이번 시티와의 36라운드와 이어질 위건 원정에서 만들어내는 것은 무척 중요한 일이다.

많은 이들은 호날두의 교체 장면에서의 짜증 섞인 반응을 보며 떠들어 댈 것이고
테베즈의 슬픔 섞인 발언을 들으며 열심히 온갖 비현실적인 말들을 늘어놓겠지만,
어쨌거나 호날두도 테베즈도 유나이티드의 붉은 져지를 입고 최선을 다할 것이며
퍼거슨 감독을 위시한 유나이티드, 그리고 팬들은 그들이 떠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현재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남은 네경기를 모두 승리하는 것이고,
그렇다면 유나이티드는 다시금 잉글랜드와 유럽 최고의 클럽으로 우뚝 설 수 있다.

역사상 잉글랜드 프로축구 1부 리그 최다 우승 클럽.
역사상 최초의 챔피언스리그 2연패를 달성한 클럽.
08-09 시즌에만 네개의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린 클럽.
이 모든 수식어가 유나이티드에게 붙을 날이 멀지 않았다.
  
현재 춘천교도소에 수감 중인 가수 전인권.
ⓒ 오마이뉴스 남소연
전인권

'특종' 혹은 '단독보도' 따위의 욕심은 분명 아니었다. 갑작스럽게 결정된 나의 춘천행은 진실로 그의 안부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기자 일을 하며 밥을 벌어먹은 지 9년째. 인터뷰 혹은, 취재를 이유로 만난 예술가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일'로 맺어진 기자와 취재원의 관계가 내밀한 '인간적 교류'로 이어진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하지만, 가수 전인권은 특별했다.


각각 다른 이유로 그와 가졌던 4~5번의 인터뷰. 짧게는 몇 십분, 길게는 대여섯 시간의 만남이 네다섯 차례 반복된 후 그는 호칭을 '선생'에서 '형님'으로 바꾸라고 권할 만큼 격의 없었고, 가끔 뜬금없는 전화로 나를 감동시키기도 했다.


지나온 청춘의 한 시절, 그는 '도어스'의 짐 모리슨과 '비틀스'의 존 레논을 넘어서는 나의 우상이었다. 그런 사람이 한참 어린 내게 보여준 '우정' 비슷한 태도가 고마웠다.


허니, 추석 연휴를 하루 앞둔 21일, 청량리 발 남춘천 행 무궁화호를 타고 '마약 투약 혐의'로 춘천교도소에 수감돼 있는 전인권을 만나러 간 것은 그가 내게 보내준 우정에 대한 나름의 답례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오후 2시가 조금 넘은 시간. 초췌한 모습일 것이란 예상을 깨고, 짙은 푸른색에 검은 줄무늬가 세로로 쳐진 수의(囚衣)를 입은 전인권이 웃는 얼굴로 춘천교도소 수감자 면회실에 들어섰다. 유리벽이 가로막힌 '저 편'에 앉은 그가 '이 편'의 내게 교도소 안에서 만들었다는 노랫말을 들려준다.


사랑하며 살자/사랑하며 살자/사랑하며 살자
용서해주마/용서해주마/용서해주마
돌아 오라 철없는 아내여/아직 나는 네가 인간임을 믿는다…


건강을 걱정하는 내게 "한쪽 귀가 잘 안 들리긴 하는데 아무 문제없어. 여기서 나가면 정말이지 제대로 된 음악 한번 해야지"라며 특유의 시니컬한 웃음을 보여준 전인권. "아이들 걱정에 잠이 안 온다"는 말을 전할 때를 제외하곤 표정이 밝았다.


세상 눈치 보지 않고, 갈기 휘날리는 사자처럼 거침없이 살아온 그의 낙천성은 감옥 안에서도 변하지 않은 듯했다. 최근엔 마광수 교수의 소설을 읽고 있는 것인지 이런 말도 했다.


"그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죽이고싶은 사람이 많아졌다'고 하던데, 나는 안 그래. 나이가 드니까 살리고싶은 사람이 많아지더라고. 여기 갇혀 있는 노인들 보면서 생각을 많이 해. 결국 사람을 살리는 건 감동인데…, 어때? 마광수보단 내 말이 맞지 않아?"


허락된 면회시간 10분은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빨랐다. 돌아서는 내게 무대 위에서처럼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리고 손을 흔들어주던 전인권. 순간, 내가 위로를 해주러간 것인지, 위로 받으러 간 것인지가 헛갈렸다. 그는 의연했고, 또한 전혀 기죽어 있지 않았다.


'감동' 가득한 세상을 꿈꾸었던 '프로 소리꾼'


그를 찾아가던 날 아침. 하늘은 물에 적신 담요처럼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한바탕 비라도 흩뿌릴 것 같은 흐린 날씨. 물기 머금은 대기를 뚫고 기차가 청량리역 플랫폼을 빠져나갈 무렵 나는 전인권과 관련된 추억 몇 가지를 자연스레 떠올리고 있었다.


하나. 

2002년 겨울이었던가. 새벽 6시쯤 전인권이 전화를 걸어왔다. 며칠 전 콘서트에서 들어본 자기의 새로운 노래들이 어땠냐고 묻는 목소리엔 예술가로서의 오만이 묻어 있었다. 내다본 창 밖이 아직 깜깜했다. 그 시간에 사람을 깨워 신곡의 느낌을 질문하는 사람. 과연 그는 어쩔 수 없는 '가수'였다.


그리고, 나는 그날 새삼 깨달았다.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 예술가들의 두려움과 근심을. 새롭고 낯선 그것들을 세상이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 걱정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까지. 


그랬다. 전인권의 목소리에 묻어 있던 오만은 사실, 두려움을 숨기기 위한 위악이었던 것이다. '내 노래를 사람들이 계속 아껴줄까'라는 조바심. 그랬다. 조명을 받으며 울부짖는 야수의 모습은 그의 한 단면일 뿐, 전인권은 야수가 아닌 감동을 노래하고 싶었던 '사람'이었다.


  
무대 위에서의 전인권은 포효하는 사자를 닮았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전인권
둘.
2004년 크리스마스 이브. 서울 삼성동에서 '전인권 콘서트'가 열렸다. 소설을 쓰는 선배 하나와 공연장을 찾았다.

그 즈음 출간된 내 책을 전해주려고 무대 뒤편 대기실을 찾았던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오랜 시간 그를 괴롭혀온 병 '대상포진'이 얼굴을 엉망으로 만들어놓고 있었던 것이다. 입 주위가 갈라터진 논바닥 같았고, 목은 완벽하게 잠겨 있었다. 보고 듣기 끔찍할 정도였다.

그러나, 놀라워라.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전인권은 콘서트 내내 뛰어다니고 포효했다. 무대 위에 선 그의 어느 곳에서도 일렁이는 병마의 그림자를 찾아볼 수 없었다. 전인권을 치료했던 의사가 그랬다던가.


"그렇게 죽도록 고함을 질러대면 멀쩡한 사람도 아픕니다. 생명보다 노래가 중요하진 않잖아요. 충고하는데 무대에 서는 걸 자제하세요."


제 온 몸의 에너지를 모조리 쏟아 부은 그날 밤. 그가 응급실에 실려갔다. 소식을 전해들은 나는 자신의 일을 목숨보다 귀한 가치로 생각하는 전인권이야 말로 '진정한 프로'라고 생각했다. '2004년 12월 24일 전인권 콘서트'는 소신공양(燒身供養)의 다른 이름이었다.


셋.
2007년 2월. <오마이뉴스> 창간 7주년 축하자리에 전인권이 초청됐다. 축가를 불러주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런 실례가. 식전 여흥과 기념식이 예상보다 길어지는 바람에 일찌감치 행사장에 자리한 전인권을 1시간이 넘게 기다리게 한 것이다. 연예인에게 시간이란 곧 돈임을 주최측 역시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바쁜 스케줄을 이유로 사람들을 타박하지 않았다. 그저 빙그레 웃으며 참석자들과 이야기를 나누었고, 함께 사진 찍자는 팬들의 요구에 일일이 응해주며 자신의 순서를 조용히 기다렸다. 


이윽고, 앙코르곡까지 마치고 황급히 세종문화회관을 빠져나가는 전인권을 보며 '상대를 참 편하게 해주는 사람이구나'라는 혼잣말을 했다. 그날 행사장에 함께 한 사람들이 아이돌 스타의 '버릇없는 신비주의'와는 구별되는 전인권의 '아저씨 같은 편안함'에 너나 없이 박수를 보냈음은 물론이다.


감옥 속의 전인권이 아닌 무대 위의 전인권을 기다린다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이야기를 여기서 주절주절 반복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올 봄. 마 약 투약 혐의로 수사당국의 내사를 받던 전인권은 몇 개월을 필리핀에 머물다 돌아왔다. 그리고, 이어진 인천공항에서 체포와 강원경찰청 마약수사대에서의 조사, 구속영장 발부와 춘천교도소 수감. 모두 다 각종 언론을 통해 수도 없이 보도된 사실이다.


전인권의 체포와 수감이 촉발한 '대마초 비범죄화' 논쟁과 마약사범에 대한 교정시스템의 변화를 촉구하는 일각의 목소리, 여러 사람들의 비난을 부른 동료가수들의 변호사 비용 모금 논란 등에도 주제넘게 끼어 들지 않으련다.


다만, 하나. 이런 바람까지 숨길 수는 없을듯하다.


  
감옥 속의 전인권이 아닌 무대 위의 전인권과 다시 만나고 싶다.
ⓒ 노순택
전인권

전인권을 면회하고 돌아오는 길. 남춘천역을 출발해 서울 청량리로 돌아오는 밤 열차 안에서 2시간 내내 '그것만이 내 세상'과 '제발'을 반복해 들었다. 침잠해있던 감수성을 극한으로 끌어올리는 전인권의 목소리에 기차의 곁을 달리던 강물마저 훌쩍였다. 생경한 체험이었다.


누구도 함부로 큰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겨울공화국' 1980년대. 전인권은 '겁 많은' 우리를 대신해 한국사회의 부조리한 제도와 벽을 향해 사자의 목청으로 고함을 내질러 주었다. 그의 용기는 고스란히 우리의 '빚'으로 남았다. 누군가가 언젠가는 갚아야 할 빚이다.

견디기 힘든 신경통과 잘 들리지 않는 한쪽 귀. 빠져나가기 시작한 머리칼에 듬성듬성 내려앉은 하얀 서리.


자신을 파괴했을 뿐, 어느 누구에게도 해를 끼친 일이 없는 그를, '사랑과 용서, 감동을 노래하고 싶다'는 전인권을 감옥이 아닌 무대에서 다시 만나고 싶다는 내 바람은 '법을 조롱하는' 발칙한 꿈일 뿐인가.


 

신종 바이러스 인류 공습…'돼지독감' 전세계 확산

노컷뉴스 | 입력 2009.04.27 07:57 | 누가 봤을까? 50대 남성, 제주

 




[국제부 김규완 기자]

'돼지독감(돼지 인플루엔자)'이라는 신종 바이러스가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다.

멕시코에서 시작된 돼지독감은 북미 대륙은 물론 중남미와 유럽, 아시아 지역 등에서 잇따라 발견되면서 전 세계에 공포가 확산되고 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대재앙의 가능성을 경고하고 나섰고 미국은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 진앙지 멕시코 81명 사망

돼지독감이 지난 13일 멕시코 오하카주에서 처음 발견됐다.

이후 사망자가 급속히 늘어나면서 지금까지 모두 81명이 사망한 것으로 집계됐다.

멕시코 당국은 역학적으로 돼지독감에 따른 사망이라고 확인했다.

그러나 이는 멕시코 당국의 공식적인 집계일 뿐 주민들 사이에는 사망자가 100명을 훨씬 넘는다는 말이 나도는 등 민심이 흉흉해지고 있다.

이 때문에, 인구 2천만명이 몰려사는 멕시코시티 일대는 교통량이 크게 줄고 주요 백화점 등에는 손님의 발길이 급감하는 등 황량한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

멕시코는 멕시코시티를 중심으로 현재 1천324명의 돼지 인플루엔자 의심 환자가 치료를 받고 있다고 멕시코 당국은 밝혔다.

멕시코 정부는 특별포고령을 통해 국내외 여행객들에 대한 통제를 허용하는 특별포고령을 내리는 등 비상사태를 선언했다.

멕시코시티와 멕시코주 주변 일대 모든 학교들은 휴교에 들어갔다.

멕시코 남쪽 브라질에서도 돼지독감 감염이 의심되는 남성 환자가 발생해 당국이 조사를 벌이고 있다.

이 남성은 열흘 전 멕시코시티에서 항공기 편으로 귀국했으며, 감기 증세와 함께 근육통을 호소해 입원치료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 미국은 비상사태 선포

미국 정부가 26일(현지시간) 돼지독감 감염 확산과 관련해 공중보건 비상사태(public health emergency)를 선포했다.

재닛 나폴리타노 美 국토안보부 장관은 이날 백악관에서 열린 긴급 브리핑에서 돼지독감 감염 확산의 사전 예방차원에서 비상사태를 선포한다고 발표했다.

그는 다만 이번 사전 예방조치는 미국민들에게 직접적인 위협을 알리는 차원은 아니며, 연방정부와 주정부의 돼지독감 예방과 치료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조치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를 위해 현재 연방정부가 비축하고 있는 인플루엔자 항바이러스제인 오셀타미비르(Oseltamivir. 상품명 타미플루)와 자나미비르(Zanamivir. 상품명 리렌자)의 25%인 1천2백만회 복용분을 각 주로 방출한다고 밝혔다.

나폴리타노 장관은 그러나 "이번 비상사태 선포는 바이러스 예방활동 차원에서 연방정부와 주정부의 협력을 위한 표준운영조치"라면서 "돼지고기를 섭취한다고 해서 돼지 인플루엔자(H1N1)에 감염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이와 함께 돼지 인플루엔자 발생이 확인된 지역에서 미국으로 들어오는 모든 방문객들은 검역 과정을 거치게 될 것이며, 감염 증세가 있는 여행객들은 격리돼 보호조치를 받게 된다고 설명했다.

미 질방통제예방센터(CDC)도 이날 백악관 브리핑에서 미국 전역에서 돼지독감에 감염된 사례가 이날 현재 뉴욕 8건을 포함해 20건이 확인됐으며, 앞으로 추가 감염이 우려되는 상황이라고 밝혔다.

CDC에 따르면 뉴욕시 8명, 캘리포니아주 7명, 텍사스주 2명, 캔자스주 2명, 오하이오주 1명등 현재까지 20명이 돼지독감에 감염된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CDC의 리처드 베서 소장은 이와 관련해 "돼지독감 감염 추적작업은 '마라톤'처럼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라면서 "우선은 자주 손을 씻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앞서 CDC와 뉴욕시 당국은 이날 시내 한 고등학교 학생 8명이 돼지 인플루엔자에 감염된 사실이 확인됐다고 발표했다.

뉴욕시 당국은 세인트 프랜시스 고등학교(St. Francis Preparatory School) 학생들이 2주 전 봄방학 기간에 멕시코의 휴양도시 캔쿤을 다녀온 뒤 100여명의 학생들이 독감과 유사한 증세를 보였고, 이 가운데 8명의 감염이 확인됐다고 설명했다.

이런 가운데 캐나다 당국도 이날 노바 스코티아 지역에서 돼지독감 감염사례 4건을 확인했다고 밝혀 돼지독감이 북미 대륙으로 확산됐음을 나타냈다.

◈ 유럽과 아시아도 피하진 못해

돼지독감은 유럽과 아시아 지역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프랑스와 스페인, 이스라엘, 뉴질랜드 등에서도 의심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프랑스 보건당국은 26일 멕시코에서 돌아온 여행객 가운데 2명이 돼지독감에 걸린 것으로 의심돼 정밀 검진을 받았다고 밝혔다.

스페인 북동부의 카탈로니아 지역에서도 3건의 사례가 발견됐고 이스라엘에서도 20대 청년이 돼지독감 감염 증세를 나타내 격리 치료를 받고 있다.

이 청년은 멕시코를 여행하고 돌아온 직후 증세를 나타냈다.

뉴질랜드에서도 역시 멕시코를 여행하고 돌아온 학생 10명이 감염된 것으로 조사됐다.

◈ WHO "돼지독감 진화 가능성"

돼지독감이 전세계로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세계보건기구(WHO)는 돼지독감이 진화하면서 변이될 가능성을 경고했다.

WHO는 "돼지독감을 유발한 바이러스가 진화할 가능성이 매우 크고 인류에게 더 위험한 변종으로 바뀔 수 있다"고 경고했다.

조류 인플루엔자(AI)와 사스에 이어 인류에게 치명적 위협을 가할 대재앙의 가능성을 경고한 것이다.

WHO는 그러나 전 세계가 조류 인플루엔자(AI)에 잘 대응했듯이 이번 돼지독감에도 잘 대처하도록 대비돼있다고 밝혔다.

아직 공식적으로 돼지독감이 발견되지 않는 나라들도 방역을 위한 선제적 대응에 나섰다.

한국은 아직 의심사례가 발견되지 않았지만 해외 입국자들에 대한 검역을 강화하는 등 선제적인 방역체제에 들어갔다.

일본은 25일부터 멕시코와 직항편을 운행하는 국제공항에서 모든 여행자들을 검역하고 있다.

중국 보건당국도 돼지독감 발생지역에서 돌아온 여행자가 독감 증세를 보일 경우 즉각 신고하라는 긴급 통지문을 발표했다.

지난 2003년 사스 사태로 엄청난 피해를 입은 홍콩도 비상 검역체제를 가동하고 있다.

러시아는 돼지독감 확산을 우려해 멕시코를 비롯한 중남미 국가들에서 생산된 돼지고기에 대해 전격 수입금지 조치를 내리는 등 강력한 선제적 대응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kgw2423@cbs.co.kr

치매 증세 없이 건강하게 자주 골프를 즐기던 미국 캘리포니아 주의 엘지 맥린 할머니. 2007년 102세의 나이로 파3홀(100야드)에서 드라이버로 티샷을 날려 평생 처음 홀인원을 하였다. 이로써 2001년 101세난 할아버지가 세운 정규 골프코스 최고령 홀인원 기록을 깼다.

 

 


이 할머니는 유명한 “투나이트쇼(The Tonight Show)”에 출연하여 “누구든지 끊임없이 포기하지 말고 노력하면 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녹슬지 않은 기억력과 이야기 솜씨를 과시하였다. 어떻게 이런 고령에 홀인원을 할 수 있으며 좋은 기억력을 유지 할 수 있는가?

 

최근 연구결과 지속적인 운동을 하면 건강한 성인의 뇌에 새로운 신경세포가 생겨날 수 있음이 밝혀졌다. 과거에는 나이가 들수록 뇌의 신경세포가 감소한다고 생각하였다. 운동을 계속하면 새로운 신경세포가 생겨날 뿐만 아니고 늙은 신경세포 간에 새로운 연결망이 만들어지며, 뇌로 가는 혈류량을 증가시켜 뇌 세포에 더 많은 영양과 산소를 공급함으로써 뇌기능이 올라가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또한 뇌 신경망을 만드는 “뇌 유리 신경 성장 인자(BDNF: Brain Derived Neurotropic Factor)"생성도 증가시켜 뇌의 지적 능력을 더욱 향상시키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최근에 뇌에도 여러 가지 세포로 분화할 수 있는 줄기세포가 존재하고 있음이 밝혀졌다. 특히 기억력 중추인 해마와 뇌척수액이 순환하는 뇌실의 밑 부분(Subventricular Zone)에는 줄기세포가 어느 정도 있음이 알려지고 있다. 뇌가 일부 손상을 입거나 뇌의 혈관이 막히는 뇌경색, 혈관이 터져 출혈하는 뇌출혈이 발생하면 산소공급이 차단되어 신경세포가 죽게 된다. 이때 죽은 신경세포는 다시 살릴 수 없으나 뇌에 존재하고 있는 줄기세포가 병변 부위로 이동하여 일부의 죽은 세포를 대신하여 새로운 신경세포를 만들 수 있게 된다.

 

물론, 병변이 큰 경우는 모든 병변 부위를 줄기세포에서 나온 신경세포로 완전히 대체할 수는 없다. 앞으로 뇌 속에 있는 줄기세포를 활성화 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다면 외부에서 줄기세포를 넣어주지 않아도 망가진 신경세포를 보다 완벽하게 대체할 수 있어 세포치료의 신기원이 열릴 것이다.

 

쥐는 뇌실 밑 부분에 있는 줄기세포가 앞쪽으로 이동하여 후각 신경세포를 새로이 만들어 내기 때문에 늙은 쥐도 냄새 맡는 능력이 계속 유지 될 수 있다. 그러나 사람에서는 이런 이동이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억제되어 있어 60세 이후가 되면 후각이 상당히 떨어지게 된다. 앞으로 억제된 줄기세포의 이동을 풀 수 있게 된다면 늙어도 냄새를 잘 맡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운동과 몸의 평형유지에 중요한 소뇌가 호르몬 중추인 시상하부를 통해 감정중추인 변연계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최근 보고되고 있다. 즉, 운동을 하면 감정적인 균형이 잘 이루어져 우울증이 잘 생기지 않는다는 말이다. 하버드대의 존해티박사는 “운동은 집중력과 침착성을 높이나 우울증과 충동성은 낮춰 우울증 치료제인 프루옥세틴(프로작)과 ‘주의력결핍 과잉행동 증후군’(ADHD: Attention Deficit Hyperactivity Disorder) 치료제인 메틸페니데이트(리타린)를 복용하는 것과 비슷한 효과가 일부 나타날 수 있다”고 보고했다. 또한 많은 학자들이 운동을 하면 세로토닌 같은 신경전달물질들의 유리가 원활히 일어나서 우울증이 없어지고 뇌로 가는 혈류량이 증가하여 뇌기능이 올라 갈 수 있음을 보고하였다. 운동을 하다가 그만 두면 별 효과가 없으며 효과를 얻으려면 하루 40분 정도씩 지속적으로 운동을 하는 것이 좋다. 물론 욕심을 내서 매일 수 시간씩 운동을 하는 운동 중독증은 우리 몸과 두뇌를 지치게 만들기 때문에 좋지 않다. 이와 같이 운동은 신이 내린 귀중한 천연적인 ‘항우울제’이며 ‘집중력 향상제’라는 사실을 알아주기 바란다. 무리하지 않고 즐겁게 운동하면 뇌의 노화를 막을 수 있다.

 

 

그 동안 연구결과를 보면 근육처럼 뇌도 어떤 자극이나 좋은 경험에 대해서는 성장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즉 신경세포도 근육처럼 커지게 된다. 사용하면 커지고 기능이 좋아지나 쓰지 않으면 작아지고 기능을 잃어버린다(Use the brain or lose it)는 기본법칙은 근육과 마찬가지다. 버클리 대학의 마크로젠츠위그 박사와 다이아몬드 박사가 보고한 연구 결과는 우리들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그들은 쥐를 3종류로 나누어 실험을 해 보았다. 한 종류의 쥐는 장난감을 넣어주고 12마리가 같이 지내게 하였다. 두 번째 종류의 쥐는 장난감도 넣어주지 않고 아주 제한된 공간에서만 지내게 하였다. 3번째 종류의 쥐는 보통상태에서 키웠다. 장난감을 넣어줘서 마음대로 놀게 한 쥐는 뇌의 무게가 약 10%쯤 증가하였다. 처음에는 뇌가 증가된다는 사실을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믿지 않았다. 그 후 계속된 연구에서 뇌의 무게도 증가 될 수 있음이 밝혀졌다.

 

 


 

이런 결과는 환경이 뇌 발달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이 재미있고 신선한 자극은 뇌의 발달에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 다이아몬드 박사팀은 아주 늙은 쥐에서도 같은 결과가 나오는지를 실험해 보았다. 그들은 아주 늙은 4마리의 쥐를 8마리의 젊은 쥐와 같이 넣어주고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를 관찰 해 보았다. 늙은 쥐는 젊은 쥐와 같이 살고 있는 것을 즐겼으나 젊은 쥐는 별로 그렇지 않았다. 젊은 쥐와 같이 살고 있는 늙은 쥐의 뇌 무게는 10%쯤 증가하였으나 늙은 쥐와 같이 살고 있는 젊은 쥐의 뇌 무게는 증가가 없었다. 늙은 쥐는 젊은 쥐로부터 자극을 받아 뇌의 무게가 증가한 것이다.

 

최근 우리 연구실에서는 사람들이 사는 다양한 환경을 모방해 환경이 뇌 발달에 미치는 영향을 보기 위해 보다 복잡하고 정밀한 실험을 하였다. 쥐는 한 종류의 스트레스에 장기간 노출되면 점차 적응하기 때문에 첫 번째 그룹의 쥐는 강박스트레스, 진동스트레스, 수중 부동스트레스, 강제수영스트레스 등의 다양한 스트레스에 무작위로 노출시켰다. 두 번째 그룹의 쥐는 풍족한 환경, 즉 넓은 방에 다양한 장난감과 같이 지내게 하였다. 세 번째 그룹의 쥐는 스트레스 환경과 풍족한 환경이 교차 되게 하면서 사육하였다. 네 번째 그룹의 쥐는 보통 환경에서 키웠다. 다양한 스트레스환경에 노출된 쥐들은 보통 환경에서 자란 쥐들보다 기억력이 감소하였고 기억중추인 해마에서의 신경세포 사멸이 증가하였을 뿐만 아니라 줄기세포 숫자도 가장 적었다. 반면 풍족한 환경에서 자란 쥐들은 기억력도 증가하였고 해마에서의 줄기세포 숫자도 증가하였다. 스트레스와 풍족한 환경이 교차되는 환경에서 자란 쥐들은 스트레스 상황에서 나타났던 기억력 감소, 신경세포의 사멸과 줄기세포의 수적 감소를 점차 회복시켰다. 또한 11개월 된 유전자 조작 치매 마우스에 스트레스를 주면 24개월 된 유전자 조작 치매 마우스와 비슷한 기억력 감퇴와 조직 병변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우리가 보고하였다. 즉 스트레스가 치매 발병을 배 이상 앞당길 수 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스트레스는 80세에 생기는 치매를 40세에 생기게 한다는 의미이다

 

 

 

뇌의 성장을 자세히 검토 해 보면 신경세포의 성장은 주로 나뭇가지처럼 뻗어 나온 수상돌기가지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자극에 의해서 수상돌기가지가 두터워진다. 신경세포의 가지가 증가하고 두께가 두꺼워지기 때문에 뇌가 더 커지게 된다. 이 수상돌기들은 자주 사용하지 않으면 위축된다. 그러나 뇌를 새롭고 창조적인 방법으로 적절히 사용한다면 돌기의 연결점인 시냅스 회로가 활성화 되면서 정보가 지나갈 수 있도록 길을 넓혀줄 뿐만 아니라 새로운 회로를 만들어 흥분전도를 보다 원활하게 해준다. 평소에 잘 쓰지 않던 손으로 이를 닦는 등 일상적인 행동에 조금 변화를 주거나 아니면 악기연주나, 외국어를 새로 배우는 것 등을 하면 더 많은 돌기가 생겨날 수 있다.

 

미국 듀크대학의 캐츠교수는 “수수께끼나 문제를 푸는 것은 새로운 수상돌기를 만들어 내기 위한 의식적인 노력이며 잠자고 있는 정보의 통로들을 강화시키는 좋은 방법”이라고 조언한다. 누구든지 마음에 활기를 갖는 것은 치매를 모르고 건강하게 살아가기 위한 중요한 요소이다. 물리적인 나이보다 사물에 호기심이 사라지는 것이 진짜 노인이 되는 것이다. 여하튼 무슨 일이나 「 이 나이에 무슨」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용기를 내서 적극적으로 도전해보자. 그렇게 함으로써 여태까지는 「 노인의 분수를 모르는 짓」으로 여겼던 것이, 그것이야 말로 뇌를 신선하게 자극하여 젊음을 되찾는 「 생명수」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위의 실험에서도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재미있는 놀이와 함께 일이나 공부를 하거나, 나이가 들어도 젊은이와 같이 젊은 분위기 속에서 일을 하면 우리의 뇌 신경세포는 가지가 왕성하게 자라서 일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 나이가 들수록 옷차림이나 분위기를 밝고 활발하게 젊은이들과 어울려 일하는 것이 장수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저자 소개

 서유헌 / 서울대 의과대학 교수

서울대 의과대학 교수이며 신경과학 및 인지과학 연구소장을 겸하고 있다. 또한 교육과학기술부 치매정복 창의연구단을 이끌고 있다. 저서로는 <머리가 좋아지는 뇌과학 세상>, <천재 아이를 원한다면 따뜻한 부모가 되라>, <잠자는 뇌를 깨워라> 등이 있다.


이미지 gettyimages / 멀티비츠

조선일보 이슈토론방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내용이  헐~~~대한민국에는 비밀이 없는것 같네요~~

 

 

盧武鉉씨의 정신건강 검증자료




부인 권양숙씨에 대해 상습적으로 폭행

『그래도 남자한테는 여자가 서너 명은 항상 있어야지. 한 명은 가정용. 또 한 명은 함께 춤을 출 수 있는 뺑뺑이용, 그리고 또 한 명은 인생과 예술을 논하는 오솔길용, 이 정도는 있어야 되는 거 아니야?』 순간 청년들의 얼굴색이 갑자기 변해 버렸다. 『아니 변호사님이 어떻게 그런 말씀을 다 하십니까?』 - 본문 중에서..


『조져야 돼, 그래야 꽉 잡고 살 수 있어』      

《△『찍힌 거지요, 제가. 참여정부의 언론 정책이 괘씸죄에 걸린 것 아닙니까?』『우리 사회에서 가장 부실한 상품이 돌아다니는 영역은 미디어 세계입니다.』 (1.4 과천청사 공무원 격려 오찬 연설)

△『제가 그래도 왜 그래 인기가 없나 말을 막말을 많이 하다 보니 그렇다 하니까, 할 수 없죠』(2006.12.27 부산 북항 재개발보고회 후 오찬간담회)

△『미국한테 매달려 가지고 바짓가랑이 매달려 가지고, 미국 뒤에 숨어서 형님 백만 믿겠다, 이게 자주 국가의 국민들의 안보의식일 수가 있겠습니까』『미국 재무부가 BDA 계좌동결조치를 한 것을 국무부가 몰랐던 거 아닌가 이렇게 볼 수도 있고 또 나쁘게 보면 짜고 치는 고스톱 아니냐 이렇게 볼 수도 있죠』 (2006.12.21 민주평통 상임위 연설)

△『일본에서 국가가 일어나서 통일되면 한국에 와서 짓밟고 중국이 통일되고 또 중국에서 새 왕조가 일어났다 하면 꼭 한국에 와서 분탕질 쳤습니다』(2006년 12.9 뉴질랜드동포간담회)...》


노무현 대통령의 「막말」이 계속되면서 그의 정신 건강에 대한 의구심이 증폭되고 있다. 정신과의사 중에는 盧대통령에 대해 「境界線(borderline) 인격장애자」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思考와 가치관의 경계선을 넘나드는 불안정한 多重인격이란 것이다.

의학서적은 「境界線인격장애」에 대해 『대인관계와 정체성 혼란 및 불안정한 정서 그리고 심한 충동성을 광범위하게 나타내는 인격 장애』로 정의한다. 이들 환자는 『자신이 버림받을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자신과 맞는 사람과의 인간관계에만 집착한다』고 정의된다. 혹자는 대통령의 소위 「코드人事」가 그런 심리상태를 투영하는 것이라 해석한다.
  
이 증상의 가장 큰 특징은 『정체성 혼란과 불안정한 정서』이다. 의학서적을 좀 더 인용해 보자.

『이들 환자의 약한 自我는 좌절(挫折)에 부딪혀 혼란(混亂)을 느끼면 퇴행(退行)하여 정신병적 상태를 나타내기도 한다. 이들은 정체성이 분열돼 있어서 모순적(矛盾的) 행동을 잘한다. 어떤 대상을 좋아할 때는 우상화하다가, 돌연 악평을 하며 나쁜 사람으로 취급하기도 한다』

공교롭게도 盧대통령 언동의 가장 큰 특징은 모순적(矛盾的)이라는 것이다. 2006년 12월 민주평통 연설에서 주한미군 감축과 관련, 『피를 흘려도 우리가 흘려야지요』라고 말한 뒤엔 69만 명인 국군병력은 『50만으로 줄입니다. 더 줄여야 됩니다』고 했다. 美軍은 나가게 하고 國軍이 피로써 지켜야 한다더니, 같은 연설 끝 무렵엔 20만에 가까운 국군을 감축하겠다고 말한 것이다.

2002년 9월 대통령후보 시절 『反美주의면 또 어떠냐』고 말한 盧대통령은 2003년 5월 訪美 중엔 『만약 53년 전 미국이 우리 한국을 도와주지 않았다면 저는 지금쯤 (북한의) 정치범수용소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이후 盧대통령은 『대통령 재임 중 발언 중 이른바 「정치범수용소」 발언을 가장 수치스럽게 생각한다』고 주변에 털어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2006년 9월24일 오마이뉴스는 정부의 핵심고위관계자가 이 같은 말을 전했으며, 청와대의 前現職 고위 관계자들로부터도 사실임을 확인했다고 보도했다. 反美에서 親美, 다시 反美로 번복되는 모순된 언동의 전형인 것 이었다.

<부잣집 친구 가방 면도칼로 찢어>

심리적 특이증상은 대개 어린 시절의 성장환경에서 형성된다고 알려졌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盧대통령의 유년시절로 돌아가 볼 필요가 있다.

그는 1994년 출판된 자서전 「여보, 나 좀 도와줘」에서 유년시절 가난과 열등감, 그로 인한 반항적 태도로 거짓말·도둑질 등 엉뚱한 사건을 일으켰으며, 이것이 자신을 오늘날까지 몰고 온 지칠 줄 모르는 마음속의 풍차였다고 덧붙혔다. 가난, 열등감으로 인한 상처가 「무슨 말」이든 마다않는 자신의 에너지원이 됐다는 고백이다.

《국민학교 시절 기억에 남는 일의 대부분은 가난과 열등감, 그로 인한 반항적 태도, 이런 것이었다. 그러나 자존심과 우월감도 그에 못지않게 강했다. 우월감과 반항심이 가끔 엉뚱한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였을 것이다. 그때만 해도 다들 보자기에 책을 싸 들고 다니거나 퍼런 돗베로 만든 가방을 들고 다녔다. 가끔 고무에 헝겊을 댄 가방도 있었는데 읍내의 부잣집 아이들이나 간혹 가지고 다니는 고급 가방이었다. 어느 날 체육시간에 당번이 되어 친구와 둘이서 교실을 지키다가 그렇게 생긴 새 가방 하나를 발견했다. 둘이서 가방을 뒤적여 보다가 그만 면도칼로 가방을 죽 찢어 버렸다. 무슨 심술이었는지 모르겠다. 체육시간이 끝나자 교실은 곧 발칵 뒤집혔다. 담임선생님은 몽둥이를 들고 범인을 찾으려 했지만 나는 끝내 자백을 않고 버텨 넘어갔다. 그 일을 생각하면 본래 내가 모범생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 일 말고도 거짓말을 했거나 훔친 일이 몇 번 더 있었기 때문이다...

나만 가난했던 것도 아닌데도 어린 시절의 나는 유독 가난을 심각하게 여기며 자라났다. 그리고 그 상처는 나의 잠재의식 속에 어떻게 해서라도 나만은 가난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열망과 함께 모두가 가난하지 않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막연한 꿈이 동시에 심어졌던 것 같다. 어찌 보면 상반된 이 두 가지 생각이야말로 지금까지 지칠 줄 모르며 나의 삶을 오늘날까지 몰고 온 내 마음 속의 풍차였는지도 모르지만(「여보, 나 좀 도와줘」 169~172)》

盧대통령은 2002년 8월 사석에서 『나는 욕설이 체질화된 사람이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막노동판에 있었는데 그때 배운 게 욕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욕이었다』고 밝힌 적이 있다. 거친 성격이 성년이 된 후 더욱 굳어져 버렸다는 자기 고백이다.

<이불 개라면 물 젖은 발로 질겅질겅>

盧대통령의 거친 기질은 결혼 생활 이후에도 계속됐다. 그는 「여보, 나 좀 도와줘」에서 부인 권양숙씨에 대해 상습적으로 폭행했었다고 적고 있다. 다만 운동권생활을 시작하면서 과거의 사고방식에 대해 후회하고, 변화됐다고 적고 있다. 관련 부분을 인용해보자.

《나는 우격다짐을 해서라도 기를 꺾어 놓아야 한다는 생각에 눈을 부라리기도 했고 고함치기도 했다. 그러니 작은 말다툼도 걸핏하면 싸움으로 비화되기 일쑤였다. 나는 별 생각을 다 했다. 「아 속았구나」싶기도 했고 나도 잘못하다가는 큰형님처럼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나를 더욱 초조하게 만들었다. 견딜 수 없는 초조감과 불안감에 나는 급기야 아내에게 손찌검까지 하는 남편이 되고 말았다...나는 아내가 조금이라도 불평을 하면 소리를 질러 대었고 그 말에 심하게 반발을 하면 다시 손을 올려붙였던 것이다. 정말 기억하기에도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느 날 갓 결혼한 친구들과 함께 소주병을 들고 수유리 뒷산에 올라갔던 일이 있었다. 친구들 중 하나가 나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이었다. 『어떻게 盧형은 형수님을 그렇게 꽉 잡고 삽니까? 비결이 뭡니까?』 나는 그 자리에서 무슨 인생의 대선배나 되는 듯이 대답해 주었다. 『조져야 돼, 밥상 좀 들어 달라고 하면 밥상 엎어 버리고, 이불 개라고 하면 물 젖은 발로 이불을 질겅질겅 밟아 버리는 거야. 그렇게 해야 꽉 잡고 살 수 있는 거야.』 물론 농담이었지만 전혀 거짓말도 아니었다.(「여보, 나 좀 도와줘」 124~126)》

盧대통령은 이 같은 술회 이후 『「운동」을 시작하면서부터 나의 여성에 대한 잘못된 생각이나 아내에 대한 태도가 전혀 달라졌다. 「사회운동」은 나의 다른 모든 생각과 행동들을 바꿔놓은 것처럼 여성에 대한 사고방식도 바꾸어 놓았다. 사실 나는 이 말을 하기 위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숨기고 싶은 이야기들을 털어놓은 것』이라고 적고 있다.
  
<남학생이 화내는 것 이해 안 돼>

  盧대통령은 연이어 운동권변론을 벌이던 85년경의 또 다른 경험을 이렇게 적고 있다.

《부산에서 운동권 청년들이 만든 공해문제연구소에 내 사무실의 일부를 내주고 있을 때였다. 그때 나는 청년들과 그곳에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많았다. 어느 날 그렇게 이야기를 하던 중에 여성에 대한 이야기가 화제에 올랐다. 나는 대뜸 이렇게 농담을 했다. 『그래도 남자한테는 여자가 서너 명은 항상 있어야지. 한 명은 가정용. 또 한 명은 함께 춤을 출 수 있는 뺑뺑이용, 그리고 또 한 명은 인생과 예술을 논하는 오솔길용, 이 정도는 있어야 되는 거 아니야?』 순간 청년들의 얼굴색이 갑자기 변해 버렸다. 『아니 변호사님이 어떻게 그런 말씀을 다 하십니까?』 청년들의 표정은 농담이 아니었다. 나는 참 난처했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었다. 여학생이 화내고 덤비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데 남학생이 펄쩍 뛰는 것은 이해조차 되지 않았다.(「여보, 나 좀 도와줘」 126~127)》

  盧대통령은 역시 이 같은 고백 이후 『그 이후 나는 그때까지 나의 행동과 사고방식에 깊은 반성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점차 여성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고 책도 많이 읽고 생각도 많이 하게 되었다. 물론 나와 아내 사이도 달라졌다. 나도 아내를 존경할 줄 알게 된 것이다. 아직 실천은 제대로 하지 못하지만 어쨌든 달라진 것만은 틀림없다』고 적고 있다.

【수세에 몰리면「사퇴」虛言. 취임 후 그만둔다는 말 열네 번】

盧대통령은 정치적 수세에 몰리면 「공직 사퇴」를 공언하는 좌절-혼란-퇴행의 악순환을 반복해왔다. 그는 대통령직 취임 이후 『대통령 못 해 먹겠다』등 「자리걸기 식」발언을 14차례나 한 것은 물론 대통령 후보, 국회의원 시절에도 사퇴와 철회를 반복해왔다.

△『내각 구성권 이양하겠다』

盧대통령은 취임 직후인 2003년 4월2일 국정연설에서 『내년 총선에서 특정정당이 특정지역에서 3분의2 이상의 의석을 독차지할 수 없도록 선거법을 개정하면, 총선에서 과반수 의석을 차지한 정당에게 내각의 구성 권한을 이양하겠다』고 제안했다. 당시 발언은 한나라당이 국회를 주도하는 여소야대 상황이었던 점에서 충격적 발언으로 받아들여졌다.

△『대통령직 못해먹겠다』

盧대통령은 2003년 5월21일 청와대에서 『대통령직 못해먹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그는 한총련의 광주 5·18묘지 시위사태 등 사회각층의 기강문란을 빗대 『전부 힘으로 하려고 하니 대통령이 다 양보할 수도 없고, 이러다 대통령직을 못해 먹겠다는 생각이, 위기감이 든다』고 했다.

△『재신임 묻겠다』

盧대통령은 2003년 10월10일 기자회견에서 『(대통령직에 대한)재신임을 묻겠다』고 밝혔다. 그는 자신의 핵심측근인 최도술 前청와대 총무비서관이 SK자금 수수와 관련, 『불미스러운 일이 생긴데 대해 국민 여러분께 깊이 사죄드리고 책임을 지려고 한다』며 『수사결과 무엇이든 간에 이 문제를 포함, 그동안 축적된 국민들의 불신에 대해 재신임을 묻겠다』고 했다. 그는 당시 국민투표 등을 거론하며 『아무리 늦더라도 총선 전후까지는 재신임을 받을 생각』이라고 말했지만, 결국 재신임 절차는 이뤄지지 않았다.

△『10분의 1넘으면 정계 은퇴』

盧대통령은 대선 자금 관련 측근 비리가 불거지던 2003년 12월14일 4당 대표 회동에서 『우리가 쓴 불법 자금 규모가 한나라당의 10분의 1을 넘으면 대통령직을 걸고 정계를 은퇴 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이틀 후 기자회견에서도 『한나라당 불법자금의 10분의 1을 넘으면 정계를 은퇴하겠다고 말한 것은 사실이다』며 『실제로 10분이 1 넘지 않는다고 확신하고 있다. 그래서 넘으면 정계 은퇴 하겠다』고 했다.

당시 盧대통령의 발언은 수사를 진행 중이던 검찰에게 「노무현 캠프의 불법 대선 자금을 한나라당의 10분 1이 넘지 않도록 하라」는 가이드라인을 내린 것이라는 여론의 맹공을 받았다. 우여곡절 끝에 검찰은 2004년 3월8일 노무현 캠프의 불법대선자금 규모가 한나라당의 7분의 1의 수준에 이르렀다는 수사결과를 발표했지만, 盧대통령은 정계 은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수도이전, 『정부의 진퇴를 걸겠다』

盧대통령은 수도이전 논란이 한창이던 2004년 6월15일 국무회의 석상에서 『이 정책(수도이전)은 참여정부의 핵심과제이자 국운이 걸린 문제로 정부의 명운과 진퇴를 걸고 반드시 성사시키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헌법재판소가 같은 해 10월 「수도이전특별법」에 대한 위헌 결정을 내렸음에도, 盧대통령은 사퇴(辭退) 대신 대체 입법을 만들어 수도이전을 강행했다.

△『권력 절반 이상 내놓을 용의』

盧대통령은 2005년 6월 소위 연정(聯政)을 제안하면서 『권력을 통째로 내 놓겠다』는 등의 발언을 쏟아냈다.

그는 2005년 7월6일 인터넷을 통한 대통령 서신을 통해 『취임 후 첫 국회연설에서 국회가 지역구도 문제의 해결에 동의한다면 대통령이 가진 권한의 절반 이상을 내놓을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지금도 될 수만 있다면 그 이상의 것이라도 내놓을만한 가치가 있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튿날 중앙언론사 편집·보도국장 간담회에서도 『우리 정치의 구조적 문제를 해결한다면 대통령 권력을 내놓겠다. 내각제 수준으로 대통령의 권한을 이양할 용의가 있다. 선거를 다시 하기는 그러니까 실질적으로 권력을 이양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는 같은 달 28일 「당원동지 여러분께 드리는 글」에서도 『당장 총선을 하자는 것도 아니다. 정치적 합의만 이뤄지면 한나라당이 주도하는 大聯政을 구성하고, 그 聯政에 대통령의 권한을 이양하고 그리고 선거법은 여야가 힘을 합하여 만들면 된다』고 했다.

△『권력 통째로 내놓으라면 검토할 것』

聯政을 위한 「권력포기」발언은 집요하게 계속됐다. 盧대통령은 8월24일 청와대 출입기자들과의 오찬간담회에서 독일 슈뢰더, 일본 고이즈미 총리가 자리를 걸고 승부수를 던진다는 예를 들며 『참 부럽다. 대한민국 대통령은 뭐냐? 이것, 당을 걸고 승부할 수도 없고 자기 자리를 걸고 함부로 승부할 수 있는 것도 제도화되어 있지 않고, 그렇다고 명색이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무책임하게 사표만 낸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고 했다.

그는 이튿날 KBS에 출연, 『(한나라당이) 聯政 그 정도 갖고는 얽혀서 골치 아프니 권력을 통째로 내놓으라면 검토해보겠다』며 한나라당에 대해 『형식 논리가지고 게임하고 그러면 안 된다. 그런 점에서 (한나라당으로부터) 나한테 더 큰 요구가 있으면 검토하겠다』고 했다.

그는 8월30일 열린우리당 의원 130여 명을 초청한 청와대 만찬에서 聯政에 대한 필요성을 강조하며 『노무현 시대가 새 시대의 출발이 아니고 구시대의 마감이 돼야 한다. 새로운 정치문화와 새로운 시대를 열어 갈 수 있다고 전제된다면 「2선 후퇴」나 「임기 단축」을 통해서라도 노무현 시대를 마감하고 새 시대를 시작할 수도 있다는 의지와 결단도 생각해 봤다』고 말했다.

그는 이튿날 중앙언론사 논설·해설 책임자들과 간담회에서도 「2선 후퇴」「임기 단축」와 관련 『나도 구시대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몇 가지의 과오에 대해 그간 짊어지고 (노무현) 시대를 마감해 버리는 것이 좋지 않냐, 솔직히 그런 생각도 가지고 있다』며 『지역주의 극복이 聯政 제기의 근본 취지』라고 말했다.

△『내 임기는 이제 거의 끝났다』

盧대통령은 2006년 8월13일 4개 신문사(경향신문·서울신문·한겨레신문·한국일보)의 외교·안보 담당 논설위원들과 비공개 오찬간담회를 가진 자리에서 20%대 지지도 못 받는 대통령으로서의 심정을 토로하며 『내 임기가 거의 끝났다』는 자포자기 성 발언을 했다.
△『임기 다 마치지 않는 첫 번째 대통령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희망한다』

노무현 대통령이 2006년 11월28일 국무회의에서 『임기 다 마치지 않는 첫 번째 대통령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희망한다』고 말했다. 그는 국무회의 모두발언을 통해 전효숙 헌재소장표결과 관련, 『국회가 표결을 거부하고 방해 하는 것은 명백한 헌법 위반이고 불법 행위』라며 『대통령 인사권에 사사건건 시비를 걸어 대통령의 권한 행사가 어려운 상황』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의원직 사퇴 두 번 ·대선 땐 再신임 번복】
  
  盧대통령은 대통령후보, 국회의원 시절에도 사퇴와 철회를 반복해온 인물이다.「자리걸기」식 발언은 그의 정신세계를 이루는 주요 특징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盧대통령은 1988년 4월26일 총선에서 통일민주당 공천을 받아 당선되면서 정치에 입문했고, 같은 해 11월7일부터 사흘 간 열린 5공 특위 청문회에서 일약「청문회스타」로 떠올랐다.

그러나 그는 이듬해 3월17일 『의회 기능의 無力에 대한 회의감과 민중생존의 노동운동에 대한 불법탄압에 항의하기 위해』라는 이유로 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했다가, 17일 만에 철회했다.

당시 신문을 보면 그는 『돌아오게 된 당당한 논리는 없다. 마음이 흔들리던 중 주위에서 여러 사람이 얘기한 게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盧대통령은 이기택 의원을 총재로 하는 소위「꼬마 민주당」 활동 당시인 1990년 7월13일 다시 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그는 제51회 정기국회 개원을 앞 둔 같은 해 9월7일 이를 철회했다.

「정치판이 체질에 안 맞는다」는 첫 번째 사퇴와 달리 두 번째는 특별한 이슈가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2002년 노무현 캠프가 펴 낸「노무현 상식, 혹은 희망」이라는 책자는 『7월11일 당시 민자당이 국방위에서 일체의 토론 없이 국군조직법 개정안을 날치기 처리한 데 대한 항의였다』고 적고 있다.

2002년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이후에도 盧대통령의「자리걸기」식 허언(虛言)은 계속됐다.

그는 2002년 6월10일 비서실 회의에서 『6·13지방선거에서 영남권 광역단체장을 한 명도 당선시키지 못할 경우 후보 再신임을 받겠다』고 밝혔고, 6월12일 기자간담회에서도 『再신임을 받겠다는 약속은 변함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6·13지방선거가 영남권 광역단체장은 물론 全지역에서 민주당 대패로 귀결됐음에도, 盧대통령은 6월17일 『8·8 국회의원 재·보선 후 대통령 후보 국민 경선을 재실시할 용의가 있다.

재·보선 후 누구든지 입당시켜 원점에서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대통령 후보 국민 경선을 다시 하는 것에 반대하지 않는다』고 했다.「再신임」을「모든 기득권을 버린 再경선」으로 표현 강도를 높이면서 8·8 재·보선 이후로 쟁점을 빗겨간 것이다.

盧대통령은 이후 8·8 재·보선 역시 민주당이 대패했음에도(한나라당이 13개 지역 중 11곳에서 승리함), 국민경선을 다시 실시하지는 않았다.

盧대통령과「꼬마 민주당」을 같이 했던 동향 출신의 정치 선배인 박찬종(朴燦鍾) 前 의원은 2002년 6월호 월간조선에서 盧대통령의 의원직 사퇴 등 돌출행동과 관련, 이렇게 지적했다.

『대통령은 국민의 삶과 나라의 운명에 직접적, 충격적으로 파문과 영향을 줄 수 있는 자리이다...나이가 들고 수양을 하면 성격이 고쳐질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동지로서 경험하고 그 후로도 10년 동안 지켜본 바에 의하면 盧의원은 그의 말과 행동의 불가측성(不可測性) 때문에 대통령이 되기엔 적절치 않은 사람이다...대통령 자리는 순간적 감정이나 충동으로 권한 행사를 하는 자리가 아니다. 그런 점에서 盧후보는 전혀 안심이 안 된다.』

아래는 당시 朴 前 의원의 월간조선 인터뷰 全文이다.
  
《『꼬마 민주당 여섯 명은 기성 정치인들에게 식상한 국민들로부터 사랑과 기대를 모으고 있을 때였어요.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盧의원이 돌출행동으로 「이 ×판에 너희는 남아 있고, 나는 바이바이(bye-bye)다」 이거예요. 盧의원의 부산상고 선배인 李基澤 창당 준비위원장은 화가 나서 「나타나면 이 ×× 때려 죽인다」고 그러고…. 우리는 기분이 좋았겠나? 하루 종일 회의한 결과 나머지 다섯 명도 보조를 맞추기로 했어요. 모두 사퇴서를 내고, 의원 회관 사무실도 폐쇄했어. 결국 어찌 됐노? 다 돌아오는 거야. 돌아온 후, 두 달 치 歲費(세비)를 東京 YMCA 건물 매입비용으로 기탁했어요』

  朴 前 의원은 『꼬마 민주당 하면서 盧武鉉 의원이 말한 거라든지, 그 후에 말한 것들을 종합해 볼 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며 말을 이었다.

  『국회의원·장관·총리는 그저 고만고만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자리라고 생각해요. 어떻게 보면 아무나 할 수 있는 자리야. 그러나 5년 임기의 대한민국─국제정치 역학 관계 속에서도 대단히 불안정한 관계 속에 있고, 경제적으로도 성장 엔진이 나가서 취약한 상태에 있는 어려운 상황에 있는─ 대통령, 헌법상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는 대통령 자리는 말과 행동 하나하나가 국민의 삶과 나라의 운명에 직접적, 충격적으로 파문과 영향을 줄 수 있는 자리입니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 내가 아는 현재까지의 盧의원은…(여기까지 말한 朴燦鍾 前의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 벽에 걸려 있는 화이트보드로 다가가 「Character is fate(성격은 운명이다)」고 썼다.)』

『나이가 들고 수양을 하면 성격이 고쳐질 수도 있어요. 하지만 내가 동지로서 경험하고 그 후로도 10년 동안 지켜본 바에 의하면 盧의원은 그의 말과 행동의 不可測性(불가측성) 때문에 대통령이 되기엔 적절치 않은 사람입니다.

  대통령이라는 자리를 실험이나 연습으로 시킬 수 있는 자리라면 몰라도, 또 우리나라가 태평성대이고, 대통령 임기가 6개월 정도라면 이 사람도 해 보고 저 사람도 해 보는 가운데 盧武鉉 같은 독특한 사람도 해 볼 수 있을지 모르지요. 그러나 남북한 관계·경제·국제 정세 등 이 엄혹한 현실에서 말과 행동에 不可測性을 가진 盧武鉉 후보가 대통령이 된다고 하는 것은 절대로 적절하지 않다, 이거요. 이런 불안정한 사람에게 어떻게 나라를 맡길 수 있겠는가 말입니다』
  ...
『뭐가 위험한가 하면 그의 不可測性이 위험한 거지요. 대통령이란 누가 제어할 수도 없는 자리 아니요? 지금은 후보니까 불쑥불쑥 한 마디 해도 되지만, 대통령이 기자회견을 하거나, 미국 대통령과 전화통화나 정상회담을 하다가 기분이 나쁘다고 막 해 버리면 어떻게 되나?

YS가 중국 江澤民(강택민)과 얘길 하다가 「일본 놈들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고 했다가 韓日관계에 어떤 문제가 생겼소? 전혀 정제되지 않은 말을 해서 그것 때문에 국가적으로 엄청난 손해가 오지 않았소?

재벌 해체나 韓美관계 등에 대해 불쑥 불쑥 한 마디씩 한다고, 실제로 그렇게 하진 못하겠지만 그 과정에서 불상사가 생길 수 있다고. 뒷수습도 못 하고….지금 민주당 소속 의원들이 「우리도 盧武鉉을 잘 모르겠다」고 한 말이 不可測性을 얘기한 거 아니오?』
...
―(기자) 그렇다면 盧武鉉 후보의 장점은 무엇입니까?
『청문회에서 보인 순발력이지. 머리 회전이 아주 빨라요』

―옛날 13代 국회나 꼬마 민주당 시절, 盧武鉉 후보의 언론관 등을 엿보실 기회는 있었습니까?
『13代 국회 때는 의원직을 두 차례 사퇴했고, 마지막 청문회 때는 全斗煥 前 대통령에게 명패를 던지는 돌출적 행동 외에 盧武鉉 의원이 국회의원으로서 특별히 다른 걸로 주목받거나 한 기록은 없어요. 그래서 14代 때 낙선했지』
...
朴 前 의원은 盧武鉉 후보가 「노동운동의 代父, 민주화 투쟁의 化身, 젊은이들의 친구, 규격화·부패무능한 舊정치인 집단에서 신선한 충격과 바람을 일으키는 샛별」 이미지를 갖고 있는 데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

『나는 盧후보가 여기 있으면 反問하겠어요. 「과연 당신은 노동자의 代父답게 치열하게 그들의 삶에 다가갔는가?」, 「1980년대 그 엄혹한 군사독재 시절에 民推協 멤버도 아니었고, 6·29 이전 주요 시국 사건에 변론을 맡아 온몸을 던져 인권변호사로 일한 기록이 있느냐?」라고…』

朴 前 의원은 『그럼 그가 왜 그렇게 보여지느냐?』고 自問하더니, 바로 답을 내놓았다.

『13代 국회에서 그가 보여준 의원직 사퇴 소동이나 청문회 등을 통해 뭔가 조금 특별해 보이는 점도 있겠지만, 내가 보기엔 레토릭(修辭)이 특별해. DJ, YS, 李會昌, 朴燦鍾 類의 인간들과는 다른 레토릭을 쓰고 있어요.

가령 韓美관계 같은 경우 「전통적인 우호관계는 유지되어야 한다. 상호방위조약도 존중되어야 하고, SOFA는 독일·일본 수준으로 전향적으로 개정되어야 하고, 북한의 안보위협이 상존하는 한 駐韓 美軍 철수는 안 된다」고 얘기하게 마련이에요. DJ라도 그렇게 얘기한다고요.

그런데 盧武鉉 후보는 「韓美관계는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얘기한다고. 얼른 들으니까 독립선언하는 것처럼 들려요.

미국에 대한 감정은 朴대통령도, YS도, DJ도, 李會昌도, 朴燦鍾이도 가졌을 감정이에요. 盧후보가 韓美관계에 대해 얘기하는 것은 얼핏 들으면 미국의 영향권에서 우리가 완전히 벗어나야 하는 것처럼 얘기하는데, 감정은 감정이고 현실은 현실이요. 그러다가 미국 자본이 단숨에 빠져나가고, 주가가 폭락하고, 미국이 시장을 막아 버리면 어떻게 되겠느냐, 이겁니다.

李承晩 대통령 때 1950년대 중반 미국과 마찰을 빚다가 미국이 두 달 동안 기름을 끊는 바람에 두 달 만에 李대통령이 손을 든 적이 있어요.

대통령 자리는 순간적 감정이나 충동으로 권한 행사를 하는 자리가 아니에요. 그런 점에서 盧후보는 전혀 안심이 안 돼요』 》

【대통령 정신감정은 의무사항 되어야】
  
《(2006년 8월11일. 趙甲濟) : 오늘 필자가 8.11 서울역 국민대회에서 『노무현씨의 정신감정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 데 대해서 대회 직후 자리를 함께 한 전직 국정원 간부와 사단장 출신 예비역 장성은 『정말 그게 중요하다. 조종사의 정신감정은 거의 매년 하는데 安保의 열쇠를 쥔 대통령 이하 핵심 고위공직자에 대한 정심감정은 의무사항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국정원 간부 출신은 『노무현씨의 행태는 정말 아슬아슬하다. 국회에서 전직 대통령을 향해서 명패를 던질 때부터 정상이 아니라고 판단해야 했었다. 대통령이 된 뒤 보여준 행태는 그런 비정상을 재확인한 것이었다. 여객기 기장도 정신감정을 받는데 4800만의 안전을 책임진 대한민국호의 조종사는 반드시 정심감정을 정기적으로 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늘 아침 만난 한 서울法大 교수도 『우리 헌법엔 대통령이 치매, 조울증 같은 질병을 앓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규정이 없어 자칫하면 국가변란을 부를 소지가 있다』고 걱정했다. 그도 대통령의 정신감정은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新入사원을 뽑을 때도 신체검사, 정신감정을 하는데 대통령을 뽑을 때 그런 검증이 이뤄지지 않은 것은 크나큰 헛점이다. 선거에서 뽑히면 되지 않느냐 하는 것은 안이한 태도이다. 선동과 거짓말이 난무하는 선거에서는 유권자들이 정신질환자를 뽑을 위험성이 있다. 특히 한국인처럼 뭔가 돌출적인 행동이나 奇行을 하는 이들을 좋아하는 국민성이 있는 나라에선 선거가 정상인을 뽑는다는 보증장치가 될 수 없다.

늦지 않았으니 노무현씨의 정신감정을 공식으로 요구할 때이다. 그의 최근 행태는 분명히 비정상이다. 정상적인 직무가 불가능한 정도라면 有故로 판정하여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만들어야 한다. 盧씨의 최근 행태로 미뤄 그는 남은 재임기간 중 대한민국에 대해서 품었던 앙심으로 회복이 불가능한 치명상을 안기고 물러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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