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감독의 <여배우들>은 대한민국에서 '여배우'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그녀들을 한 자리에 부른다. 윤여정, 이미숙, 고현정, 최지우, 김민희 그리고 김옥빈. 세대를 아울러 자리한 그녀들의 이름만으로도 영화는 충분히 호사스럽고, 여배우들은 그저 서 있기만 해도 그림이 되는 아름다운 피사체들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만나는 진짜 '호사'는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서 튀어나온다. 그녀들이 '여배우'라는 화려하고 묵직한 갑옷을 벗어버리고, 말갛고 사랑스런 민낯을 드러내는 순간, <여배우들>은 빛을 뿜기 시작한다. 둑을 터뜨린 건 윤여정 선생이다. 그녀가 '여배우'를 벗어내자, 후배들은 기다렸다는 듯 무장해제하기 시작했다.
글 l 박혜은 (영화 저널리스트) 사진제공 | 뭉클픽쳐스 구성 | 네이버영화
“모여 준 얘들이 너무 예뻐서, 솔선수범해서 자폭해버린 거죠.”
Prologue
"세상에는 남자와 여자, 여배우들이 있다." 영화 <여배우들>은 이런 문구로 문을 연다. '여배우'는 일반적인 세상에서 저만치 떨어져 있는, 특별한 '종족'이라는 선언처럼 들린다. 100퍼센트 맞는 말이다. 관객에게 여배우는 신비와 열망의 대상이어야 한다. 분명 존재하지만, 저 멀리 절대 손 닿지 않는 곳의 '환상의 오아시스'가 되어야만, 끊임없이 관객들을 좇아오도록 만들 수 있다. 실존하는 '나' 대신 실존하지 않는 '판타지'로 살아야 하는 여배우의 숙명.
하지만 "세상에는 남자와 여자, 여배우들이 있다"는 말은 100퍼센트 틀린 말이기도 하다. 연기란 세상에 없는 누군가를 '실존'하게 만드는 작업이다. 배우는 시나리오에 이름만으로 존재하는 허구의 누군가에게 피와 뼈와 살을 제공해 '사람'으로 태어나게 한다. 배우 안에 살아 숨 쉬는 '사람'이 담겨 있지 않으면, 누구도 그의 연기를 보며 울고 웃지 않는다. 그러므로 저 문구엔 약간의 수정이 필요하다. "세상에는 남자와 여자, 그리고 그 모두인 배우가 있다." 최소한 40년을 배우로 살아 온 윤여정을 설명하기 위해선 그렇다.
- 이재용 감독의 말에 의하면, <여배우들>을 기획하게 된 직접적 계기가 윤여정 선생님이라고 하던데요?
에이, 직접적인 계기는 무슨. 나는 어부지리로 낀 거예요.(웃음) 지난 해, 우연히 이재용 감독과 (고)현정이와 셋이서 몰려다닐 기회가 생겼어요. 임상수 감독이 파리로 가면서, 이재용 감독에게 맛있는 것도 얻어먹고 좋은 영화도 함께 보라고 소개해줘서 알게 됐죠. 그때 어쩌다 보니 셋 다 백수였어요. 백수들끼리 몰려다니면서 재미있게 놀았지. 이재용 감독이 워낙 아이디어가 많은 사람이거든요. 어느 날, 여배우들의 세대를 다 아우르는 영화가 하고 싶다는거예요. 그러면 좋겠다고, 재미있겠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이재용 감독이 60대 여배우는 나 밖에 몰랐던 거죠. 그래서 이 예쁜 여배우들 사이에 내가 끼게 된 거예요.
- 어부지리라니요…. <여배우들>이라는 영화의 제목이 확 와 닿는 캐스팅은 굉장히 어려웠을 것 같은데, '윤여정'이라는 이름이 맨 앞에 오면서 확실히 무게감이 생긴 게 사실이거든요.
아니에요. 나 말고도 비슷한 연배에서 '여배우'라는 이름으로 설명되는 배우들이 많죠. 이재용 감독에게 그 동안 잘 얻어먹어 놓고서, 막상 영화 찍을 때는 안 한다고 할 수 없어서 했다니까요.(웃음) 처음의 아이디어는 화보 촬영이 아니라 뮤지컬 연습에 모인 여배우들의 이야기였어요. 그러면 나는 빠져야겠다고 했죠. 내가 워낙 음치니까. 그랬더니 이재용 감독이 설정을 바꿔주더라고.(좌중 웃음) 사실 시사회 본 다음에, 처음에 후회 많이 했어요. 내가 참 눈치도 없지…. 나만 빼고 저렇게 다 꽃답게 예쁜데, 내가 저길 왜 끼었을까. 현장에서 조명도 없이 자연광으로 찍었으니, 세상에! 가뜩이나 늙은 내가 잘 나올 리가 없잖아요.(웃음) 그래도 영화가 재미있게 나와서 우리끼리 행복해하고 있어요.
- 여배우들을 가장 아름답게 화면에 담는 이재용 감독의 장점이 십분 발휘된 영화가 아닐까요. 모든 배우가 어찌나 아름답던지, 눈이 호강하는 기분이었어요. 배우들에 대한 감독의 애정이 물씬 느껴지더군요.
그럼요. 나만 빼고, 다들 어찌나 예쁜지. 이재용 감독이 배우와 캐릭터에 대한 애정과 배려가 정말 많은 사람이에요. 역시 나만 빼고. 애정이 있는데 그렇게 찍을 순 없잖아요.(좌중 웃음) 내겐 애정은 아닐 거고, 개그 코드가 맞아서 좋아하는 거죠. 영화에서 내가 담배 피우는 장면이 너무 많이 나오잖아요. 숨길 생각은 전혀 없지만, 너무 많이 나오는 거야. 그래서 이재용 감독에게 "전매청에서 담배 줄이라고 전화 오겠다"고 타박했더니, 이재용 감독이 글쎄 "네, 담배 태우시면 피부 건강에 안 좋다는 광고 찍으실 지도 몰라요." 그러더라고요. 그렇게 이 늙은이를 많이 놀려요. 그런데도 나는 또 그게 참 좋아요.(좌중 웃음)
- <여배우들>은 굉장히 새롭고, 일면 도발적인 시도인 것 같아요. 이렇게 많은 여배우가 모여, 여배우들만의 영화를 만든 건 처음 있는 일이니까요. 이재용 감독님이 선생님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들었어요.
새로운 시도라는 점이 가장 좋았죠. 이재용 감독에게도 도전이었을 거예요. 세대별로 다양한 많은 여배우들을 모으고 싶어 했거든요. 행동대장은 현정이었어요. 거의 주먹 쥐고 "하자, 하자, 나가자" 하는 분위기였죠.(웃음) 나는 여배우들이 모일 때, 내 존재가 걸림돌이 될까 조심스러웠어요. 어떤 배우 캐스팅이 힘들다고 하면, 감독에게 "내가 한 번 개인적으로 만나볼까?"라고 묻게 되더라고. 나는 제작자도 아니면서, 영화를 만드는 데 왜 그렇게 마음이 쓰이고 나서게 되던지…. 이재용 감독이 나중에, 나랑 현정이가 없었으면 더 힘들었을 거라고 공치사를 살짝 해주더라고요.(웃음)
- 단지 한 자리에 모였다는 걸 넘어서, 여배우들의 민낯을 엿볼 수 있게 만들기란 쉽지 않은 작업인데요. 물론 극적 설정이 있는 영화지만, 여러 가십 기사에서 봤던 실제 이야기가 당사자의 입을 통해 흘러나올 때는 연기와 실제의 경계가 사라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어요.
이재용 감독이 워낙 배려가 많은 사람이라, 배우들 본인이 스스로 열고 싶어 하지 않는 부분은 건드리지 않았어요. 그런데 우리가 알아서 자폭을 한 거지. 세상에…!(좌중 웃음) 다들 이재용 감독의 새로운 시도에 마음이 맞아서 사심 없이 모인 거잖아요. 어린 옥빈이나 민희, 현정이나 지우, 미숙이도 사실 여배우로서 가릴 게 많아요. 내가 이런 말을 하면 나중에 뒤탈은 없을까…. 왜 걱정이 안 되고 겁이 안 나겠어요. 그런데 그런 걸 따지지 않고 모여 준 애들이 너무 예쁘니까, 내가 솔선수범해서 자폭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웃음) 내가 그러니까 분위기가 영화 촬영장 같지 않고, 정말 수다 떨고 노는 파티처럼 편해지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미숙이도, 현정이도 자살골 많이 넣었죠.(일동 폭소) 내가 영화 보다가 너무 웃겨서 기절했어요. 글쎄.(웃음) 여배우들이 그래요. 한 감독, 한 영화를 위해 마음을 열면 정말 아무 계산도 없이, 그렇게 물색 없는 데가 있어요.
"여배우들이 마음을 열면 그렇게 물색 없는 데가 있어요."
- '물색 없다'는 표현이 정말 좋네요. 여배우들의 천진함과 순수함을 한 마디로 정리하는 표현인 것 같아요.
여배우라고 하면 굉장히 계산적이고, 따지는 것 많을 줄 알잖아요. 하지만 작품에 꽂히면 그렇게 다 내려놓아요. 아기 같은 거죠. 아마도 그런 '물색 없음' 때문에 우리가 배우를 할 수 있을 거예요. 언제나 평정심을 유지하고 산다면, 완전히 한 인물에 몰입해서 새로운 걸 보여주는 연기가 힘들 거예요. 여배우들은 감정적인 기복이 심하다고도 하고, 소위 '똘기'가 있다고도 하는데, 그게 다 같은 이야기죠. 그렇게 감정이 살아 있고 종잡을 수 없는, '물색 없는 기질'이 있어서 연기를 할 수 있는 거죠.
- '영화 속 윤여정'을 연기하면서 혹시 마음에 안 드는 설정은 없으셨나요?
전혀 없었어요. 이재용 감독이 여배우들을 관찰하면서 특징을 잡아주는데, 굉장히 아이디어가 좋더라고요. 예를 들면 내가 촬영 장소에 너무 일찍 나타나서 겸연쩍어 하는 모습 같은 건, 실제 나이 들면 다 그래요. 왜 할머니들은 저녁 기차 타려면 점심 먹고 출발한다고 하잖아요.(웃음) 나이 들어보니까, 세상에 변수가 많고 위험이 많다는 걸 알거든요. 그래서 안전하게 늘 일찍 준비하는 거죠. 게다가 나는 원래 늦는 걸 싫어하는 성격이기도 하고. 나더러 "여운계 선생님 아니에요?" 하는 장면도 실제 있었던 일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거예요. 한 번은 이재용 감독과 밥을 먹으러 갔는데, 한 팬이 내게 너무 좋아한다고 사인해 달라면서 "여운계 선생님, 정말 팬이에요"라고 하더라니까요.(좌중 폭소) 다른 배우들도 전혀 자기 캐릭터에 불만이 없었어요. 이재용 감독이 여배우들을 많이 존중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문제 될 게 전혀 없었죠. 오히려 우리들이 나서서 설정을 너무 세게 잡으면, "앞으로 영화에서 보여줄 게 더 많은 데 이렇게 많이 나가면 안 된다"고 말릴 정도였으니까. 우리가 감동받았죠.
- 혹시 영화에서 못 보여준 장면 중에 아쉬운 장면이 있으세요?
아주 애통한 게 하나 있지. 지우가 개인 안마사를 데려왔는데, 미숙이가 받아보고는 나더러 얼른 받으라고 재촉하는 장면이 있거든요. 그 장면에서 미숙이의 애드리브를 내가 못 살린 게 하나 있어요. 안타깝게도 안마 받는 장면을 먼저 찍고, 미숙이 애드리브가 나온 거라서. 관객들이 보면 알 텐데, 감독에게 내가 후시녹음이라도 하고 싶다고 했다니까요. 감독이 나더러 그렇게 애통하면 극장마다 돌면서 라이브로 들려주라고 하더라고.(웃음)
- 영화 속에서 고현정 씨와의 관계가 유독 절친한 걸로 나오는데요.
내가 밥값을 잘 내서 나랑 친한 거예요.(웃음) 하하, 농담이고…. 내가 예전부터 현정이의 팬이었어요. 현정이 어릴 때였는데, 나를 감동시킨 일이 있어요. 드라마 촬영장에는 자기 세트가 각자 있어요. 거기서 자기 연기 준비하면서 선배들에게 일일이 인사하는 친구가 거의 없거든요. 그런데 현정이가 나를 보더니 벌떡 일어나서 인사를 하는 거예요. 그 모습이 너무 예쁘더라고요. 그리고 드라마 <작별>을 함께 하면서, 정말 탁월하게 잘하는 배우라고 생각했어요. 내가 못 가진 재주도 많고, 빼어난 감성도 있죠. 그래서 내가 현정이 팬이 됐어요.
- 이미숙 씨와 '여자로 늙는 것'과 '인간으로 늙는 것'에 대한 대화를 나누는 장면도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윤여정 선생은 항상 '여자'임을 자각하면서 사는 배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다는 말에 조금 놀랐습니다.
그러게요? 나는 인간으로, 사람으로 나이 드는 게 좋아요. 내가 '여자'임을 붙잡고 사는 사람은 아니에요. 그런데, 내게 그런 말을 해주는 사람이 많아요. 노희경 작가도 "나는 선생님에게 어머니가 안 느껴져요. 선생님은 내게 항상 여자"라고 해요. 이상해. 미숙이는 정말 많이 예뻤잖아요. '국민 미녀'였지. 그래서 나이가 들어도 '여자'임을 놓치고 싶지 않은 거겠지만, 나는 어릴 때도 미인이라는 소리는 못 들었어요. 그냥 "매력 있다" 정도였지. 하지만 그건 안 예쁜 여배우에게 그냥 다 해주는 소리고.(웃음) 그래서인지 나는 '여자'에 대한 미련도 별로 없는데. 어릴 때 사춘기가 되기 전까지 그냥 '아이'로 사는 것처럼,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럽게 '인간'으로 늙는 거 같아요.
"스타를 잊으면 늙어도 근사한 배우가 될 수 있어요"
- 여배우에게 나이가 든다는 건 조금 다른 의미가 있을 것 같아요.
내가 현장에서 오랜만에 미숙이를 보고, 참 잘 늙었다고 했어요.(웃음) 미숙이는 젊었을 때 정말 예뻤지만, 나이 들면서 너무 근사해졌어요. 젊을 때야 따질 게 많죠. 누구나 다 그래요. 그런데 정상에 서 있다가 나이가 들면서 여배우로서 서서히 페이드아웃 되는 순간이 와요. 여배우가 만날 스무 살 주인공 역할을 할 수가 없잖아요. 주인공에서 어느 순간 이모로, 고모로, 엄마로, 할머니로. 그러면 정말 힘들어요. 정말 형언할 수 없이 괴로워요. 그때 미련을 오래 붙잡고 있으면 근사해질 수가 없어요. 여배우가 멋있고 근사해 보이는 건, 속으로 정말 많이 상처받고, 희생하고, 가슴 아픈 역사를 잘 정리했기 때문이에요. 그 괴로움을 잘 정리하면 여배우 혹은 스타에서, 훌륭하고 근사한 배우가 되는 것 같아요. 영화 속에서도 그 울컥함이 드러나는 장면이 있어요. 나는 이미 늙었으니까 다독이면서 바라볼 수 있었죠. 늙었으니까.(웃음)
- 늙었다는 말은 선생님에게 별로 어울리지 않는 표현인데도, 굳이 그렇게 강조하시는 이유가 있으세요?
매 순간 나이가 들고 있고, 늙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곱게 늙어야 한다'는 말이 있잖아요. 왜 그렇게 강조하는지 알겠어요. 정말 곱게 늙기가 어렵거든요. 일단 늙으면 거죽이 늙고 주름이 지잖아요. 배우의 주름은 아름답다고? 아니에요. 그냥 위로하는 것뿐이에요.(웃음) 성격도 편협해져요. 경험이 많아지고, 내 판단을 확신하게 되면서 편견이 생기고 편협해지는 거지. 그걸 스스로 자꾸 각인시키려고 하는 거예요. 나는 늙었으니까 이래저래 더 신경 쓰고, 조심해서 곱게 늙자…. 이러는 거죠.
- 하지만 <여배우들>을 비롯해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 언제나 새로운 도전과 열정을 보여주시잖아요. 특히 영화에서는 <바람난 가족>이나 <가루지기>처럼 놀라운 변신을 불사하고 계시죠.
그게 다 물색 없이 넘어간 거라니까.(웃음) 내가 좀 무모하고 용감한 데가 있죠. 특히 영화를 선택할 때는 더욱 그런 기질이 나타나는 것 같아요. 임상수 감독이 <바람난 가족>의 시나리오를 줬을 때, 처음엔 고민을 많이 했죠. 대사도 세고, 거기다 옷도 벗어야 한다니까. 그런데 임상수 감독이 굉장히 똑똑한 사람이더라고요. 영화 하기 전에 하나 물어봤어요. "영화에서 왜 아기를 갑자기 죽이느냐. 그게 마음이 안 좋다"고 했더니, 답이 멋지더라고요. "선생님, 우리는 누구나 느닷없이 죽지 않습니까." 속으로 '이 감독 똑똑하네' 그랬지.(웃음) 내게 그 어머니 역을 달리 해석해달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물색 없이 하게 됐죠. <가루지기>는 더해요. 난 처음에 시나리오가 잘못 온 줄 알았어요. 그랬더니 신한솔 감독이 꼭 나를 만나야 한대요. 우리 아들 또래의 모범생 같은 청년이, 내가 이 인물을 안 하면 자긴 영화를 안 한다는 거예요. 고등학교 때 내가 드라마에서 담배 피우는 모습을 봤는데, 중년 여배우의 손이 저렇게 섹시할 수가 있을까 싶어서 담배를 피워봤다는 거예요. 세상에, 내가 거기 넘어간 거지.(좌중 웃음) 늙으면 칭찬이 그렇게 좋읍디다.(웃음) 예전에 김기영 감독이 그렇게 좋아하셨던 '영화'라는 작업을, 내가 앞으로 해보리라 생각했어요. 그땐 내가 어리고 잘 몰라서 그 분의 훌륭함도 잘 모르고 쌈박질만 했는데…. 이젠 내가 즐기면서 할 수 있는 역할을 하면서 살고 싶어요.
- 지금까지 연기했던 많은 캐릭터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인물들이 있으시다면요?
잘했다고 칭찬받은 인물보다는 힘들고 어려웠던 인물이 기억에 남더라고요. 우선 <관촌수필>의 어머니가 기억에 남아요. 내게 지금까지와는 다른 면이 있음을 찾아내서 보여줬기 때문에 변신을 확실하게 시켜준 작품이었죠. 그리고 <내 멋대로 해라>의 엄마가 좋았어요. 감독이 나를 섭외할 때 내게 '섹시한 엄마'라고 설명했어요. 그래서 내가 말했죠. "바꿔 말하면 천한 엄마?" 그랬더니 맞대요. 남자들에게 만날 당하면서도 사랑을 좇고, 여자를 좇는 엄마. 아들 도둑질 시킨 돈으로 통닭집 차린 그 엄마를 못 잊을 것 같아요. 나머지는 <사랑이 뭐길래>와 <목욕탕집 남자들>이에요. <사랑이 뭐길래>는 인간이 할 수 없는 엄청난 분량의 대사를 외워야 했고, <목욕탕집 남자들>은 일주일에 시를 2~3편을 외워야 했으니까. 그나마 대사는 맥락이라도 있죠. 시인의 감성이 튀는 대로 흘러가는 시를 불러 제끼면서 설거지를 한다는 게 정말 너무 힘들었어요.
- 언제나 특별한 캐릭터를 남기시잖아요. 아직도 욕심나는데 해보지 못한 캐릭터가 있으세요?
여건이 된다면 언제나 특별한, 새롭고 다른 캐릭터를 하고 싶죠. 그런데 이렇게 약속하고 맹세하는 건아닌 것 같아요. 다른 걸 하고 싶다고 해도 안 써주면 못하니까요. 대신 노력하겠다는 거죠. 해보고 싶은 건, 잘 늙은 할머니 역할이에요. 옷을 잘 입은 근사한 할머니 말고, 정말 멋진 할머니. 사실 내가 할머니거든. 아들들이 장가를 못 가서 아직 손주는 없지만, 내 나이 또래가 할머니죠. 그런데 요즘 텔레비전에서는 아직도 우리 어머니 때의 할머니들이 나와요. 방에서 요강 놓고 소변 보는 할머니. 세상에 요즘 그런 할머니가 어디 있어요. 대신 젊은 사람들에게 '늙어도 멋있을 수 있구나, 근사할 수 있구나'라는 걸 보여주는 할머니를 연기하고 싶죠.
- 언제나 독보적인 연기와 캐릭터를 보여주셨기 때문에, 별로 어려운 목표가 아닌 것 같은데요?
독보적이라뇨. 그런 말 무서워요. 그냥 여건이 되면 다양한 역할을 해보고 싶다는 바람일 뿐이에요. 목표, 도전이라는 말도 힘들어요. 대신 끝까지 오랫동안, 현장의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사람이라면 좋겠어요. 그런데 <여배우들>로 지금껏 바라던 결실 하나를 얻었어요. 사실 이 영화가 우리에게 이런 의미를 줄지 몰랐는데, 굉장히 큰 의미를 남겨 줬더라고요. 정말 행복해요.
epilogue
윤여정 선생이 말했던 최고의 결실은 영화 시사가 끝나고 이미숙이 보낸 문자 메시지였다.
"샘(선생님)이 중심에 서 계셔서 영화가 빛이 났어요. 잘난 척하셔도 되요. 흥행과 상관없이 우리 여배우들 너무 자랑스러워요."
함께 일한 동료에게 들은 최고의 칭찬. 윤여정은 그 칭찬이 너무 귀하고 중해서 시간이 날 때마다 메시지를 들여다본다고 했다. 서 있는 것만으로도 빛을 뿜고, 함께 하는 동료에게 영감을 주고, 40년 넘게 그녀를 봐온 관객들에게 또 다음 영화를 기다리게 만드는, 그녀의 이름은 윤여정, 아니 '여배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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