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원으로 태양열오븐 만든 청년기업가

머니투데이 | 이경숙 기자 | 입력 2009.06.01 13:02 | 수정 2009.06.01 18:39 | 누가 봤을까? 40대 남성, 전라

 




[머니투데이 이경숙기자][편집자주] 이해관계가 달라도 우리는 서로 연결된 하나의 존재다. 각자의 의도나 의지와 관계 없이 서로의 삶에 영향을 준다. 다른 나라의 경제위기와 환경파괴는 우리나라의 시장 축소와 기후변화로 이어진다. 우리는 서로에게 이로운 해결법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머니투데이는 2009년 쿨머니 연중 캠페인 '하나의 세상에 사는 우리, 하우(How)'를 통해 지구촌 당면 과제를 해결해나가고 있는 현장을 방문해 그 노하우를 전한다.

[[하나의 세상에 사는 우리] < 10-1 > '에너지팜'의 김대규 대표와 대안기술의 전파자들]

"자, 기둥 세웁니다. (기둥 사이에)볏짚 채우고요. (볏짚)이발 좀 해주고, (벽에) 흙 바릅니다. 이렇게 (집 한 채) 나옵니다. 안 된다고? 안 해봤으면 말을 하지 말아~."

21일 저녁 7시 열린 사회혁신기업가들의 월례모임. 한 청년이 개그맨 김병만 말투로 생태건축 과정을 설명한다. 30여 명의 청중이 웃다가 자지러진다.

에너지팜(Energy farm)이란 기업의 소개가 이어진다. 회사 이름 아래에 이런 설명이 붙어 있다. "대표의 휴가 중엔 잠시 회사명이 '에너지 안 팜'으로 바뀔 수 있음." 참석자들의 웃음보가 또다시 터진다.

대안기술을 '개그콘서트'보다 재밌게 느끼게 해준 주인공은 김대규 에너지팜 대표(33)다. 지난해 5월 소형 풍력 발전기 등 대안기술제품을 생산하는 사회혁신기업인 에너지팜을 설립했다.

◇신학도에서 대안기술의 전도사로=

김 대표는 신학도였다. 감리교신학대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에서 조직신학을 전공했다.

2003년의 네팔 여행과 대안기술센터의 이동근 소장이 그의 행로를 바꿨다. 여행에서 만난 네팔의 수많은 빈민들은 그에게 빈곤지역에 물과 전기를 보급하는 삶을 꿈꾸게 했다. 그는 바이오디젤 수익금으로 네팔의 가난한 농촌지역에 물과 전기를 공급하는 사업을 할 계획을 세웠다.

네팔 사업 준비 후 물건 선적 차 잠시 한국에 돌아왔다가 그는 경남 산청군에 대안기술센터를 차린 이동근 소장을 만났다. 15년 지인이던 이 소장은 "대안기술을 보급하고 교육하는 일을 누군가는 해야 한다"며 그의 손을 끌었다.

"고민했어요. 그것이 작든 크든 내게 나눌 수 있는 것들이 있다면, 그것을 이 땅의 소외되고 가난한 이웃들과 나누며 살자는 게 제 삶의 가장 큰 열망이거든요. 그래서 네팔행을 잠정 연기하기로 하고 소장님을 도와 이 일을 시작했어요."

대안기술센터는 지역의 에너지자립과 제3세계의 빈곤퇴치'를 고민하는 비영리교육기관이다. 2006년 영국의 대안기술센터(Center for Alternative Technology)에서 환경건축과 재생에너지를 공부하고 온 이동근 소장과 경남 산청군의 민들레공동체가 만들었다.

김 대표는 처음엔 대안기술센터에 간사로 합류했다. 이어 에너지팜을 설립해 소형 풍력발전기, 자전거 인력발전기, 소형 태양광 발전설비, 태양열 조리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대안기술센터는 에너지팜의 연구개발 부문을 지원했다. 또 공무원, 기자, 대안학교 학생들을 교육해 대안기술의 필요성을 널리 알렸다. 대신 에너지팜은 수익 일부를 대안기술센터와 나눴다.

에너지팜은 지난해 8000여만 원의 매출을 올렸다. 공공기관이나 학교, 다른 비영리기구들이 주요 고객이었다.

순이익 2500만 원 중 1500만 원은 가난한 학생들의 등록금이나 보육원·선교단체 운영비로 전달됐다. 지난해 9월엔 캄보디아 청년인 사론 씨를 초청해 석 달간 풍력발전 기술을 전수하고 자재를 사주기도 했다.

'이윤의 사회 환원'은 이 회사 설립이념 3가지 중 하나다. 다른 하나는 '환경과 자연을 생각하는 기업', 또 다른 하나는 '대표를 비롯한 모든 직원의 급여가 동일한 기업'이다. 김 대표의 꿈은 '아름다운 기업'을 만드는 것이다.

"그 자체로 아주 멋진 그림이 있습니다. 그 그림에 뭔가가 붙어 있습니다. 이것이 그림을 망친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지워야죠. 어떤 기업 때문에 이 사회가 병든다면 (그 기업을) 지워야죠. 아름다움을 더하는 기업이라면 키워야죠. 저는 사회의 아름다움에 기여하는 기업을 만들고 싶습니다."

◇50원으로 오븐을 만든다고?=

에너지팜과 대안기술센터는 '대안기술 보급'이라는 공통의 사명을 가지고 있다. 빈곤지역에서는 적정기술을 전파하고 있다. 적정기술은 현재의 지역조건과 지역민에 맞는 기술을, 대안기술은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 기술을 뜻한다. 첨단기술(High Tech)은 경제적 부가가치가 높은 기술이다.

'태양광'이라는 에너지를 사용하기로 했다고 치자. 폴리실리콘 태양광 모듈을 잘 만드는 첨단기술은 경제적 부를 가져다준다. 쿠킹호일로 태양열 오븐을 만드는 기술은 필요를 해결해준다.

그가 지난해 네팔에서 만든 '태양열 오븐'은 적정기술의 사례다. 오븐을 만드는 재료는 부엌에 있는 쿠킹호일과 신문지, 이웃집에서 얻은 철판과 나무판자. 제작비용으로는 각도기 값 50원이 들었다.

제작과정은 단순하다. 쿠킹호일을 댄 나무판자 4개를 67.5도 각도로 서로 붙여 깔때기 모양을 만든다. 나무판자 사이에 철판과 신문지를 넣어 사각형의 상자를 만든다. 맑은 날 이 위에 호일 깔때기 판을 얹으면 상자 속 온도는 210도까지 올라간다.

"네팔 농촌엔 연료가 귀해요. 물을 끓여먹지 못해 질병이 돕니다. 이곳에 도시에서 쓰는 가스렌지, 태양광 장치를 보급하면 어떻게 될까요?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쓸 수 있을까요? 그래서 제3세계엔 현지에 맞게 고안된 적정기술이 필요합니다."

재생에너지가 지역민의 필요를 넘어 '석유자원 고갈'이라는 인류의 문제를 해소할 때, 대안기술이 될 수 있다. 생태건축, 자연하수처리, 자연농업, 대체의학도 대안기술의 후보다.

"물 위에 선 사람은 어떻게 될까요? 가라앉겠죠? 우리 문명은 석유 위에 서 있습니다. 석유가 고갈되면 우리 삶의 기반도 무너집니다. 대안기술은 환경파괴와 에너지 위기라는 현 시대의 문제에 대해 삶의 대안을 만들어냅니다."

'미래 세대의 가능성을 제약하지 않고 현 세대의 필요와 미래 세대의 필요를 동시에 충족시키는 것.' 이것이 대안기술자들이 꿈꾸는 미래다. 과연 가능할까? 김 대표는 말한다. 그건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 조금 힘든 일일 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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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극선생님, 주식투자란 무엇입니까?"
"주식투자는 나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그렇다면 이 정글 같은 주식시장에서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습니까?"
"우직함과 단순함이 그 해답입니다"

1984년 주식에 입문한 뒤 25년이란 세월동안 온갖 풍파를 다 겪어온 '무극선생' 이승조(50·사진)씨. 재야고수 36명과 함께 세운 새빛인베스트먼트 리서치센터장을 맡고 있는 이승조씨는 일반투자자들과 이런 선문답을 주고받곤 한다.

무극(無極). 혹자는 주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상상을 하며 천정이 뚫린 '무극'을 떠올리지만 이씨는 "'무극'이란 양 극단에 치우치지 않는 중용(中庸)을 뜻한다"고 말한다.

2000년대 초 절정에 달했던 '무극선생' 이승조씨의 인기는 지금도 식지 않았다. 두 번의 치명적인 실패와 성공투자를 통해 현재의 안정적인 삶을 찾기까지 체험을 통해 터득한 노하우가 있기 때문이다.

주식에 갓 입문한 가정주부부터 증권업계에 진출하려는 햇병아리 경제학도에 이르기까지 무극선생으로부터 답을 얻으려는 노력들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지난 15일 오후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 둥지를 튼 새빛인베스트먼트 빌딩 5층 리서치센터에서 만난 이승조씨는 '정말 주식투자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란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시장과 맞서는 것이 아니라 나와의 싸움을 벌이는 지난한 투쟁"이라고 잘라 말했다. 몸의 힘을 빼고 미래의 경제흐름을 읽어내는 힘을 길렀을 때에만 성공할 수 있는 험난한 길이라는 점도 강조했다. 

이승조씨는 단한번의 주식투자로 500%의 수익률을 기록하며 50억원을 쓸어 담은 원조 '슈퍼개미'다. 하지만 결과는 비참했다. 50억원을 손에 쥔 지 몇 년 지나지 않아 가정은 파탄났고 형제들은 직장에서 쫓겨났다. 같은 길을 걸었던 친구 두 명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사채업자들의 괴롭힘을 피해 떠돌이 신세를 전전해야 했다.

주식투자로 인해 인생이 어떻게 망가질 수 있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준 삶 자체였다. 하지만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방법을 배웠고 결국 기사회생했다. 그것이 무극선생이 가진 힘이자 가치다.

무극선생은 현재 직접투자는 하지 않고 제자들을 양성하며 해외 진출을 모색하고 있다.

주식은 시간여행…"몸의 힘을 빼고 긴 호흡을 가져라"

"단언컨대 테마주는 속성 상 생명력이 6개월 안팎에 불과합니다. 이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승조씨는 정책주로 포장된 테마주의 속성을 바로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최근 테마주가 활개를 치고 있지만 그 생명력은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1992년 최악의 실패를 경험할 당시에도 테마주는 있었습니다. 당시는 정력과 미백 관련 바이오주와 유가폭등에 따른 에너지절감 관련 종목들이 테마를 형성했고 부광약품이나 선도전기가 대장주였습니다. 하지만 테마주 생명은 6개월을 가지 않았고 결국 개인투자자들은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대규모 투자자금과 정보력을 가진 기관투자자들이 미리 선점한 테마주 광풍에 휩싸일 경우 개인투자자들은 백전백패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다.

"최근 개인투자자들이 15%이상의 변동성을 보이는 테마주에 맛을 들여 1∼2%의 착실한 수익은 거들떠 보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함정이 있는 겁니다. 카지노 각도라는 것이 있습니다. 어느 순간에는 변동성을 보이면서도 수익률이 상승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결국에는 오른만큼 내려오는 이론입니다. 테마주는 결국 이런 양상을 보이기 마련입니다"

그는 앞으로의 경제 트렌드가 뭐가 될 것인가를 연구해 보고, 관련종목을 샀으면 당분간 주식시장을 떠나 있을 것을 권고했다. 심지어 증권사 객장 전광판은 3개월에 한번씩만 쳐다보라고 주문하기도 한다. 

"2008년 10월 주가 폭락기 때 많은 사람들이 '지금 손절매해야 하느냐'고 물어왔습니다. 저는 정확히 연구하고 매수했으면 연말까지만 지켜보자고 했어요. 10명 중 8명은 이를 참지못하고 가지고 있던 주식을 던졌습니다. 하지만 당시 공포를 샀던 투자자들은 주식시장이 급격히 회복되면서 엄청난 수익을 챙길수 있었습니다"

이씨는 몸의 힘을 빼고 '시간여행'을 즐길 것을 거듭 강조했다.

"주식 전문가라는 저도 적중확률은 50%밖에 안됩니다. 지수를 맞추려고 노력도 해봤고 절대적인 투자기법을 찾기 위해 온갖 방법을 강구해 봤지만 해답은 그 어느곳에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식은 '시간여행'입니다. 단기매매 보다는 파산하지 않을 알짜 우량주에 투자해 최소 3년은 기다리는 전략이 성패를 좌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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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투자는 또 '생각의 훈련'이라고 말하는 이승조씨는 주먹구구식 투자가 아닌 자기만의 철저한 시나리오 투자법을 찾을 것을 권했다. 자금의 배분과 시시각각 변하는 상황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미리 예상하고 시장의 에너지가 움직이는 방향을 간파해 몸을 실어야 된다는 얘기다.

초심자들에 대한 당부도 잊지 않았다.

"주식에 대한 공부를 적어도 6개월에서 1년정도는 하고 시장에 참여해야 실패확률이 적어집니다. 분석도 하지않고 논리도 없이 다른 사람에게 의지해 투자를 하면 변동성의 깊이를 이해하지 못하게 돼 백전백패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죠"

주식시장의 법칙을 알고 자신만의 매매 시나리오를 짤 수 있는 수준이 됐을 때 투자에 돌입해도 늦지 않다는 것. 특히 초심자는 전체 자산의 30%정도만 주식에 직접 투자해 이해력을 키우고 나머지는 적립식펀드 등을 통해 긴 호흡을 배워나갈 것을 주문했다.

50억 대박에서 17억 빚쟁이로 전락

학사장교 출신인 이씨는 주식시장에 발을 디딘 것은 1984년이다. 대우증권 조사부(현 리서치센터)에 입사해 '증권맨'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하늘같은 애널리스트 고참들이 기업탐방을 하면 관련 자료를 정리하고 주요 경제소식을 스크랩하는 시절을 보냈다. 조사부에서 허드렛일을 하면서도 귀를 활짝 열어 놓았던 이씨는 정부의 한 경제정책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당시 정부는 자본자유화  5개년계획을 입안하고 증권사들의 대형화를 통해 금융산업을 발전시키겠다는 야심찬 청사진을 내놓았다. 대우증권의 경우 자본금 500억원 규모를 최대 3000억원까지 키우겠다는 복안도 포함돼 있었다.

이씨는 '이 바닥에서 정부 정책을 믿는 사람도 있느냐'는 부정적 반응이 대세일 때 남몰래 대우증권 주식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단순하면서도 우직한 투자기법이었다. 배정받은 자사주를 비롯해 직업군인이었던 아버지와 장인어른을 통해 각각 5000만원씩을 변통, 1억원의 종자돈을 만들어 전액 대우증권 주식을 매수했다. 액면가 1000원짜리 주식이 800원~900원에 거래되던 시절이었다.

장기투자를 작심했던 이승조씨는 아예 대우증권 주식을 증권증서로 발행받아 장롱 속에 고이 모셔뒀다. 당시는 관련 법규가 느슨해 증권사 직원들도 자기 회사 계좌가 아니면 주식투자가 가능했다.

예상은 적중했다. 1985년까지 무덤덤하던 대우증권 주가가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으로 경제 활성화 붐을 타면서 1989년에는 5만4000원까지 치솟았다. 투자금 1억원이 50억원에 가까운 거액으로 불어나 있었다.

"지금도 1988년 올림픽을 전후로 수직상승했던 경기를 경험했던 세대들은 아무리 경제가 좋아져도 불만을 토로합니다. 당시 짜릿한 경기활성화를 경험했었기 때문입니다. 그 정도로 주식투자를 해서 돈을 벌수 있는 좋은 상황이었습니다"

주식투자의 '귀재'라는 입소문을 타면서 투자자들의 문의와 돈을 좀 굴려달라는 청탁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20대 초반에 꿈도 꾸지 못했던 거액을 만질 수 있게된 이씨는 자만에 빠지게 됐고 대리급 증권사 직원이라는 점도 실증나기 시작했다. 망설임없이 사표를 던진 이씨는 대우증권 입사동기와 각각의 성(姓)씨 이니셜은 딴 'L&K투자정보클럽'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종자돈을 대준 양가 부모님께 10억원씩 나눠 드리고 나머지 자금과 투자자들의 자금을 굴리기 시작했습니다. 자신감이 충만했고 이제는 100억원을 벌겠다는 목표도 생겨났습니다"

직업군인인 아버지와 안면이 있는 고위 퇴역장교들 모임에서도 투자금을 선뜻 내놓았고 지인들도 돈을 좀 불려달라며 조건 없이 맡기기도 했다. 이렇게 수중에 들어온 자금이 자그마치 500억원.

하지만 비극적 종말은 그리 먼 곳에 있지 않았다. 당시가 주식시장 장세로 보면 꼭지를 찍고 대세하락기로 돌아서는 이른바 '상투'였기 때문이다.  

 

"탐욕이죠. 50억원 가까이 현금이 손에 들어오니까 100억원이 보이고 200억원도 보였습니다. 실력으로 번 것도 아니고 그냥 묻어뒀던 주식이 급등하며 얻은 망외소득이었던 탓에 정통한 매매기술도 없었을 때입니다. 내 돈 그릇은 조그마한데 탐욕의 한도는 그 이상었던 겁니다"

1000선을 육박하던 코스피 지수가 1992년에 400선으로 곤두박질 쳤다. 수익을 내기는커녕 매번 꼬이기만 했다.

"1992년은 제 인생에서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최악의 순간이었습니다. 분산투자, 소수종목 집중투자, 심지어 시세조종(작전)의 유혹에 이르기까지 안 써본 투자방법이 없을 정도였죠. 하지만 깡통계좌가 속출했고 투자금은 거덜 나고 말았습니다"

손실금을 회복하기 위해 일가친척들에게 손을 벌리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명동 사채시장까지 찾았던 이씨는 결국 50억원의 대박에서 17억원의 빚쟁이로 전락했다.

"그래도 희망의 끈은 놓지 않았다"

빚쟁이로 쫓기는 몸이 되자 아내는 더이상 참아주지 않고 이혼을 요구했고 끝내 남남이 됐다. 군인 출신으로 완고한 성격이던 아버지한테도 쫓겨났고 당시 다섯 살인 딸, 세살 배기 아들과 함께 길거리로 나앉게 되고 말았다.

육군사관학교를 나와 앞길이 창창했던 당시 현역 대위 남동생은 월급을 차압당해 소령 진급은 커녕 군복을 벗어야 하는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공무원이던 매제는 공직을 떠나야 했다.

"죽고 싶었습니다. 투자로 돈을 모조리 날렸다는 소문이 돌자 증권사 재취직은 물론 친구들에게까지 기피인물 1호로 찍혔지요. 하지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었습니다. 친하게 알고 지냈던 선배가 유학을 가며 13평짜리 오피스텔을 무료로 사용하게 해줘 간신이 아이들과 함께 차가운 이슬을 피할 공간을 마련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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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부터 이씨는 작심했다. 실패를 거울삼아 다시 공부에 전념하기 시작해 투자의 역사에 대해 파고들기 시작했다. '미국의 대공황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은 어떤 형태의 주식매매를 했을까'가 화두였다. 1930년대 공매도로 희대의 자산가 반열에 올랐던 레시 리버모아가 왜 투자의 귀재에서 투기꾼으로 전략했나를 연구하기에 이르렀다.

앞으로 10년간 투자 트렌드가 어떻게 바뀔 것인가를 읽을 수 있는 안목을 키웠다. 미래의 직관을 키우면서 현재는 나쁘지만 미래에 과실을 얻을 수있는 종목을 연구해 나갔다. 공부를 계속하며 호구지책으로 잡다한 일을 다 해봤지만 살림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 1995년에 실패에 관대한 외국계증권사 동방페레그린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와 법인영업부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외국계 증권사라 성과급제도가 활성화돼 있어 펀드매니저들의 구두까지 닦아주며 실적을 높였습니다. 성과급으로 빚도 조금씩 갚아나가 일부는 종자돈으로 챙겼지요"

하지만 1997년 IMF 구제금융이라는 직격탄과 함께 파생상품으로 큰 손실을 입은 동방페레그린이 도산하면서 또 한번의 실패를 경험하게 된다.

"그래도 희망의 끈은 놓지 않았습니다. 대우증권에 남아 있던 직원들의 도움으로 영업을 뛰면서 근근이 생명을 이어갈 수 있었죠"

그러던 이씨는 어려운 시절 밤잠을 설치며 공부를 통해 쌓은 노하우를 풀어낼 기회를 잡고 기사회생하게 된다.

"2000년까지 증시가 큰 변동성을 보이면서도 상승세를 탔습니다. 당시 주식투자자들에게 종목정보 등을 전화를 통해 제공하는 자동응답시스템(ARS)이 생기기 시작했고 여기에 뛰어들어 빚을 갚을 수 있었습니다"

당시 ARS를 통해 한 달에 최대 5억원까지도 벌었다는 이씨는 이를 기반으로 일어설 수 있었고 현재의 안정적인 토대를 마련했다. '무극선생'이라는 필명도 그때부터 사용한 것이다.
 
빚을 갚고 김대중 정부 초기 IT(정보기술)업종이 한창 잘 나갈때 최대의 수익을 올린 이승조씨는 그 이후 탄탄대로를 걷게 됐다. 온갖 풍파를 겪으며 체득한 경험을 바탕으로 무릎에서 사서 꼭지에서는 파는 전략을 고수해 현재는 수십억원의 자산을 보유하고 있다.

이렇게 재기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수많은 실패 뒤 체득하게 된 우직함과 단순함이라는 철학 때문이라고 이씨는 말했다.

"1인 지식기업 100개 만드는 게 목표"

이승조씨는 최근 연예인 매니지먼트와 비슷한 주식시장을 주름잡을 능력있는 인재를 발굴하는 일에도 열중하고 있다. 똑똑한 제자를 키워 제도권 증권사에 투입하는 일을 새로운 목표로 삼았다.
 
"진정한 금융 싸움꾼을 키우려고 합니다. 제가 천당과 지옥을 오가며 경험한 노하우를 그대로 전수해 줘서 국내외 금융업계 어디서든 살아남을 자질을 갖춘 '지적 금융전사' 100명을 키울 생각입니다. '1인 지식기업'을 만드는 셈이지요."

인천국제공항 인근에 학교를 설립한다는 계획도 서 있다. 정글같은 주식시장에서 지친 금융전사들의 쉼터이자 세계로 뻗어나가는 전초기지를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에서다.

현재도 독신인 이씨는 하루 일과가 정해져 있지 않다. 하루 15시간을 일하는 강행군을 하면서도 한달에 50권의 양서들을 독파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 여기에 각종 지상파 방송과 케이블TV의 출연 요청에 쉴 틈이 없다.

"주식은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단순함과 우직함, 이 철학을 잊지 않는다면 반드시 성공으로 보답받는 날이 올 것입니다" 무극선생은 모두에 꺼낸 말을 다시 되뇌였다. 천당과 지옥을 넘나들었던 그의 말은 진정한 고수가 투자자들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아닐까.

글=한경닷컴 변관열·오정민 기자 / 사진=김기현 기자

유인촌·이윤호 `주가 하락에 울고 싶어라`
고위 공직자 감소 상위 주가 하락이 주된 요인
입력 : 2009.03.27 11:49
[이데일리 김세형기자] 27일 고위 공직자 재산 내역 공개 결과, 재산이 가장 크게 줄어든 공직자들은 주로 주가 하락 등 금융시장 불안때문에 피해를 본 것으로 나타났다.

장관중에서는 일본국채 투자로 재산이 늘었을 것으로 추정됐던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사진)과 펀드 가입이 많았던 이윤호 지식경제부 장관, 그리고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이 가장 큰 피해를 봤다.

재산 공개 내역에 따르면 중앙정부 고위 공직자와 공공기관장중 류철호 한국도로공사 사장의 재산이 최초 신고시 112억3000만원에서 56억5800만원으로 55억7100만원이 격감, 가장 큰 폭의 감소세를 탔다. 류 사장은 대우건설과 삼부토건, 유진기업 등의 주식을 매각하면서 손실을 본 것이 주된 사유라고 신고했다.

두번째는 유인촌 장관이었다. 유 장관의 재산은 116억8200만원으로 여전히 내각중 상위권에 속했지만 24억3300만원이 줄었다. 유인촌 장관은 펀드 평가액 하락 등이 사유라고 신고했는 데, 배우자 명의의 삼성증권 계좌 재산이 15억700만원 줄어든 22억9900만원으로 낮아진 게 가장 컸다. 특히 유인촌 장관은 지난해 배우자 명의로 30억여원 상당의 일본국채를 보유하고 있다고 신고했고, 이것이 엔화 가치 급등으로 재산이 늘 것으로 추정됐지만 실제 공개에서는 반대였다. 

LG그룹 등 재계 출신으로 주식 투자가 활발했던 이윤호 장관(사진)도 주가 하락을 피하지 못했다. 이 장관은 15억1400만원이 줄어든 44억원으로, 감소폭이 전체 3위에 해당했다. 특히 지난해 최초 신고시 36억8100만원에 달했던 예금과 펀드 등 예금 평가액이 16억8000만원으로 거의 반토막이 났다. 펀드 가입 때문에 갖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미래에셋증권 계좌 재산이 8억7000만원 줄어든 6억1000만원에 그쳤다.

김태효 청와대 대외전략비서관과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이 재산 감소 4위와 5위를 차지했다. 김태효 비서관은 12억3000만원, 최 위원장은 10억6200만원이 줄었다. 둘다 펀드 평가액 하락이 주된 사유다. 최 위원장의 경우 본인 명의 증권 등 예금 총액이 32억1500만원에서 27억4100만원으로 5억원 가까이 줄었다.

-부동산 평가액만 385억6800만원
-양도차익 커 35% 최고세율 적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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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대통령은 1년 새 재산이 4억3900만원 증가해 356억9100만원이라고 신고했다. 경기 침체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재테크 실력을 보여준 셈이다. 재테크 실력의 근원은 바로 ‘땅’.

이 대통령이 소유 중인 부동산의 가치는 서울 서초동 빌딩이 3억7200만원 감소한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상승했다. 부동산 침체 속에서도 이 대통령의 ‘부동산’은 선전한 셈이다.

이 대통령 부부의 부동산은 본인 소유의 논현동 단독주택과 서초동 빌딩 2개, 양재동 빌딩 1개, 김윤옥 여사의 논현동 대지, 대선 기간 전세를 냈던 종로구 가회동 단독주택과 사무실이다.

이 대통령은 대선후보 시절 전세로 살았던 서울 종로구 가회동 한옥의 임차권은 7억원으로 신고했다. 한옥 2채와 별채 등 3개의 건물이 들어서 있는 이 집은 ‘대권 프리미엄’이 붙어 50억 원에 매물로 나왔지만 이 대통령의 임차권이 여전한 것을 보면 아직까지 주인을 찾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 대통령이 청와대 입성 전 살았던 논현동 주택은 1979년 현대건설(58,200 하락세1,800 -3.0%) 사장 재임 시 회사에서 외국 손님들이 오면 접대하라고 지어준 집이다. 대지 673.40㎡에 건물 327.58㎡인 이 주택은 지난해 31억1000만원으로 신고했지만 올해는 3억1000만원 상승한 34억2000만원으로 신고됐다.

서초동 영포빌딩(대지 1245.80㎡, 건물 5795.91㎡)은 이번에 13억9000만원으로 신고 됐다. 지난해 보다 3억7200만원 떨어진 것이다.

양재동 영일빌딩(대지 651.70㎡, 건물 2745.79㎡)은 3억63000만원 올라 89억3800만원, 서초동의 상가(대지 1082.40㎡, 건물 896.89㎡)는 8700만 원 오른 102억8500만원으로 나타났다.

이 대통령은 서초동의 건물과 대지를 1976년 현대건설 부사장으로 있을 때 중동 공사 수주 건으로 상금을 받아 취득했다. 당시 총무담당 이사인 정택규 씨가 상금이 든 통장을 통째로 받아 관리했는데 정씨가 퇴직하면서 서초동 땅을 사 둔 것이다.

양재동에 있는 땅은 1972년 서울시가 강제로 이 대통령에게 떠넘긴 것이다. 당시 서울시가 공사참여 기업 중역들에게 2년 뒤 원리금을 상환한다는 조건으로 지하철 1호선 공채를 판매했는데 현금을 주지 않고 대신 양재동 자투리땅을 줬다. 당시 양재동은 변두리 중에서도 가장 변두리. 하지만 30여 년이 지난 지금 금싸라기 땅으로 변했다.

이 대통령 본의 아닌 타의로 인해 취득한 ‘땅’이 지금은 행정수반 최고 갑부의 타이틀을 안겨준 것이다. 돈을 쫓는 사람에게 돈이 오는 것이 아닌 무심한 사람에게 돈이 따른다는 것이 이 대통령의 재테크 ‘비법’인 셈이다.

이 대통령은 자서전 ‘신화는 없다’에서 “나는 한국의 전문 경영인으로서 최고의 대우를 받았고 이런 자부심으로 일해 왔다. 땅 투기를 했다면 나는 만주나 시베리아 벌판의 땅을 사는데 혈안이 되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한편 이 대통령이 소유한 부동산의 매입시점이 주로 1970년대인 것을 감안할 때 양도차익이 커 매각할 경우 35%의 최고 양도세율을 적용받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이 대통령이 장학재단을 설립해 사회에 기부하게 되면 감면혜택이 있어 ‘세(稅)테크’도 기대된다.

끝 김동일,`로스컷 2% 지키는 젊은 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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