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發 金.金…' 모처럼 국민 웃었다>
(서울=연합뉴스)이상학 기자 = 10일 오전 한강시민공원 잠원지구 수영장을 찾은 시민들이 베이징 올림픽 수영 400m에서 박태환이 금메달을 획득하자 환호하고 있다.  leesh@yna.co.kr

(서울=연합뉴스) 강건택 신재우 기자 =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와 독도 영유권 논쟁,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건, 또 고유가와 고물가에 따른 생활고...

   잇따라 터지는 정치.경제.사회적인 악재로 오랫동안 한숨만 지어야 했던 국민이 2008 베이징올림픽에서 연일 전해지는 `금빛 낭보'로 모처럼 환한 미소를 되찾았다.

   남자 유도 60㎏급에 출전한 최민호(28.한국마사회)가 9일 시원한 `한판승 퍼레이드'로 첫 금메달을 신고한 데 이어 10일 `마린보이' 박태환(19.단국대)이 남자 자유형 400m에서 우승해 한국인의 자부심을 한껏 높였기 때문이다.

   특히 박태환이 기초종목인 수영에서 올림픽 출전 사상 첫 금메달을 따낸 순간에는 일요일 오전임에도 서울지역 TV중계 시청률이 무려 42.1%에 달할 정도로 온 국민의 관심이 집중됐다.

   가정에서, 식당에서, 야외에서 각자 손에 땀을 쥐며 박태환의 `힘찬 팔놀림'을 지켜본 수많은 시민들이 한 마음 한 뜻으로 기쁨의 탄성을 합창한 것.

   불과 일주일 전만 해도 꼬리에 꼬리를 무는 어두운 뉴스와 경기침체로 시민들의 표정에는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올해 들어 휘발유 1ℓ당 가격이 2천원을 넘는 고유가 시대에 접어들면서 서민 생활에 큰 타격을 받은 데다 `쇠고기 파동'으로 지난 5월부터 연일 촛불집회가 열려 진보.보수 진영이 대립하는 등 국론 분열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던 것.

   여기에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과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건으로 독도 문제에 대한 국제 상황과 남북 관계가 악화했으며 대통령 부인의 사촌언니가 돈을 받고 `공천장사'를 했다는 의혹까지 터져나와 국민의 시름이 깊어가고 있었다.

   이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듯했던 악재 속에서 전해진 `올림픽 전사'들의 선전 소식은 마치 가뭄의 단비처럼 국민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고 있다는 평가다.

   회사원 박모(32)씨는 "박태환 선수가 터치패드를 찍는 순간 아파트 전체에서 환호성과 박수소리가 터져나와 정말 오랜만에 통쾌함을 느꼈다"며 "경제 악재에 미국산 쇠고기, 독도 문제로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잇따라 전해진 올림픽 희소식에 모두 희망을 갖고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최민호의 우승 장면을 지켜본 한 네티즌(아이디 `mightyphu')도 "너무 멋지다. 나도 눈물이 났다. 국민의 더위와 스트레스도 팍팍 날아가는 것 같다"며 그 동안 쌓인 국민적 시름이 한 방에 해소되는 것 같다고 시원해했다.

   메달 소식뿐 아니라 `국민 스포츠'인 축구와 야구 경기 일에 맞춰 열리는 대규모 거리응원전도 오랜만에 국민이 하나로 뭉치는 계기를 만들어주고 있다.

   지난 7일 올림픽 축구 카메룬전에 이어 이날 저녁 이탈리아전도 시민 응원단이 청계광장에 모일 예정이어서 3개월 이상 시위와 경찰 진압이 반복됐던 `촛불'의 마당이 `오 필승 코리아'를 외치는 붉은악마의 장으로 바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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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 박태환 금메달, 한국 수영 44년 만의 쾌거
박태환

(베이징=연합뉴스) 특별취재단 = '44년 도전 끝에 일궈낸 올림픽 금메달'
'마린보이' 박태환(19.단국대)이 10일 오전 2008 베이징올림픽 남자 자유형 400m에서 3분41초86으로 금메달을 따내면서 한국 수영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선물을 안겼다.

   1964년 도쿄 대회에 김봉조, 진장림 등 5명이 경영 대표 선수로 출전한 이래 그동안 한국 수영은 올림픽 무대에서는 변방에 머물러 있었다.

   아시안게임에서는 곧잘 금메달을 수확하곤 했지만 미국이나 호주, 유럽 등 세계와 경쟁에서는 힘을 쓰지 못했다.

   1970년 방콕 아시안게임 2관왕인 '아시아 물개' 조오련은 2년 뒤 뮌헨 대회에서 자유형 400m와 1,500m에 나섰지만 예선 통과에 실패하며 올림픽 무대에 섰다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아시아 인어' 최윤희도 마찬가지였다.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 3관왕의 타이틀을 달고 `84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 배영 100m와 200m에 출전했지만 100m는 32명 가운데 24위, 200m는 28명 중 21위에 그치며 세계의 높은 벽을 실감해야 했다.

   안방에서 열린 `88 서울 대회에서 한국 경영은 사상 최대인 15명의 대표 선수를 내보냈지만 현 대표팀 코치인 박성원이 평영 100m에서 1분12초32로 한국 신기록으로 42명 가운데 18위를 차지한 것이 최고 성적이었다.

   이후 나타난 수영 스타들도 아시아를 벗어나지 못했다.

   1990년 베이징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 지상준은 2년 뒤 바르셀로나올림픽 배영 200m에서 29위에 머물렀고, 4년 뒤 애틀랜타 대회 배영 200m에서도 예선을 11위로 통과한 뒤 9-16위가 겨루는 B-파이널에서는 6위에 그쳤다.

   애틀랜타에서는 오히려 여자 배영의 이창하가 선전했다. 배영 200m 예선에서 10위를 차지하더니 B-파이널에서 5위로 전체 13위의 '놀라운' 성적을 거뒀다.

   4년 뒤 시드니에서는 구월여중 3학년이던 구효진이 평영 200m B-파이널에서 11위를 기록했던 것이 최고였다.

   정점에 이르렀던 대회가 바로 아테네올림픽이었다. 당시 19살의 서울대 1학년생 남유선은 개인혼영 400m에서 일을 낸 것. 남유선은 사상 최초로 8강이 겨루는 결승에 진출해 7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한국 수영의 희망을 쏘아 올렸다는 평가를 받았던 아테네를 훌쩍 지나 4년이 흐른 2008년 박태환은 8강 진출도, 은이나 동이 아닌 금메달을 따내며 한국 수영 역사의 새 페이지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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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 파란만장했던 수난의 600년

2008년 2월 11일 (월) 12:05   매일경제

 

 

숭례문은 조선 시대 때 한양의 안과 밖을 연결하는 도성 8문 중 가장 으뜸되는 정문이자, 서울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이었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한국전쟁 등 숱한 격변기에도 살아남아 조선 전기 건축물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는 평가도 받았다.

지난 600여년간 역사의 주요 현장에 있으면서 크고 작은 수난을 겪으면서도 꿋꿋하게 버텨왔던 숭례문은 그러나 단 4시간만에 화마에 무너져 내리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파란만장했던 숭례문의 역사를 되돌아봤다.

▲숭례문 창건

숭례문은 조선 태조 4년(1395년)에 짓기 시작해 3년 뒤인 태조 7년에 완성됐다. 조선의 역사와 함께 한 건물인 셈이다. 세종은 1447년에 성곽부분을 높이는 등 더 웅장하게 숭례문을 개축했다. 성종 10년(1479년)에도 큰 보수 공사를 실시됐고 1961년부터 1963년까지 해체된 뒤 수리돼 오늘날에 이르렀다.

숭례문의 현액에는 다른 문들과 달리 세로방향으로 숭례문이라는 글씨가 있다. 태조 이성계가 도성을 건설할 당시 풍수지리상 관악상의 모양은 화기를 띄고 있고, 이 화기가 화재를 일으킨다고 믿었다.

숭례문(崇禮門)의 ‘례’는 음양오행 중 불 ‘화’에 해당돼 ‘숭’자로 세로로 배열하면 불이 활활 타오르는 모양이어서 관악산의 화기를 불로써 막기 위해 세로로 썼다고 전해진다.

숭례문에서는 조선의 주요 행사가 개최됐다. 조선왕조실록 등에 따르면 조정 주도로 비를 내리게 해달라는 기우제, 너무 자주 내리는 비를 멎게 해달라는 기청제가 숭례문에서 열렸다.

▲현판 분실

숭례문의 현판은 양녕대군이 썼다고 조선 중기 이수광의 지봉유설에 기록돼 있다. 그러나 세종의 셋째 아들이자 명필로 이름을 떨친 안평대군의 작품이라는 설도 있다.

이 현판은 임진왜란 때 사라졌다가 광해군 때 현재의 청파동 인근 한 개울 도랑에서 찾은 것으로 알려졌다.

▲임진왜란

임진왜란 때 도성 안에 있던 수많은 건물들이 불에 타고 파괴됐고 현판이 분실되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지만 숭례문은 살아남았다. 그러나 이 때부터 치욕의 역사가 숭례문에 스며들었다.

선조가 도성을 떠난 뒤 용인을 거쳐 북상하던 가토오 키요마사의 군대가 숭례문을 통해 한성에 들어왔다. 일제는 이를 기념해 숭례문을 헐지 않았다.

지난 1934년 ‘조선 고물 고적 명승 천연기념물 보존령’에 따라 581건의 문화재를 지정하면서 당시 남대문을 보물 1호로 지정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는 해석도 있다.

▲구한말

숭례문은 구한말 때부터 성문으로의 기능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1907년 일본 황태자 요시히토 친왕이 서울을 방문하면서 비루한 문을 통과할 수 없다며 문의 좌우를 헐고 지나간 뒤 급속도로 훼손되기 시작했다. 또 전차를 복선으로 확장하면서 좌우측 성벽은 더욱 무너져갔고 주변은 일본식으로 변했다.

이 밖에 시골에서 물건을 팔러 온 사람들과 객주들이 숭례문과 성곽에 그림 광고를 붙이거나 매달면서 숭례문은 계속 훼손됐다.

▲일제 강점기

1920년대에 일제는 남산에 조선 신궁을 세우면서 이곳으로 통하는 도로를 낸다며 숭례문 동측 성벽을 완전히 허물었다. 이 길이 지금의 소월길이다.

또 대부분의 성곽은 경성부의 가로정비 사업 시행과 함께 도로가 개설되거나 확장되면서 허물어졌다.

▲한국전쟁

전 국토가 초토화됐던 한국전쟁 때 다행히도 숭례문은 무사했다. 그러나 전쟁의 상흔이 스며드는 것을 모두 피할 수는 없었다.

미국 메릴랜드 주 칼리지파크의 국립문서기록보관소에서 발견된 1951년 3월의 숭례문 사진을 보면 누각과 성곽 곳곳에 생채기가 나 있는 모습이 눈에 띈다.

▲63년 이후

해체 수리된 1963년 이후 30여년 가까이 별다른 훼손 사고는 없었다. 그러나 지난 91년 술 취한 50대 남자가 훔친 자동차로 숭례문 철제 출입문을 들이받는 사고를 냈다.

97년에는 30대 남자와 일본인 관광객 2명이 기념사진을 찍는다며 무단 침입하는 과정에서 통제구역 외곽 출입문이 파손됐다.

2002년에는 숭례문의 균열로 문의 아치를 이루는 홍예석 모서리 부분이 일부 떨어졌다. 작년 3월에는 지붕을 장식하는 잡상 9개 중 1개가 사라진 사실이 확인됐다.

▲국보 1호 변경 논란

일제 때 지정된 문화재는 1962년 문화재보호법 제정 때 국보와 보물로 이름만 바뀌었을 뿐 그대로 유지됐다. 숭례문이 국보 1호가 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국보와 보물에 일련번호를 부착하는 것은 한국과 북한 등 2곳뿐이다.

지난 2005년 11월 정부가 이 같은 지적을 받아 들여 국보 1호 변경 추진안을 검토하고 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숭례문은 설화를 겪었다. 당시 감사원은 국보 1호만큼은 그 상징성에 걸맞은 문화재로 바꿔야 한다는 의견을 개진했고 유홍준 문화재청장이 국보 1호 교체를 공식화하면서 논란이 벌어진 것이다.

지난 1월10일 유홍준 문화재청장은 일본 제도를 차용한 문화재 지정제도를 바꿔 국보와 보물 뒤에 붙는 일련번호를 없애는 대신 문화재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하위분류번호를 붙이겠다는 새해 업무계획을 발표했다.

이로써 올해 하반기 문화재보호법 개정 등의 입법화 추진을 거쳐 국보 1호 숭례문은 국보 숭례문(건축문화재 제1호)으로 바뀔 예정이었다.

[매경인터넷 최기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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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우리용암
글쓴이 : 항바휘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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