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서 책읽기] <혁명의 추억, 미래의 혁명>
기사입력 2009-02-14 오전 7:27:07
지난 200년 동안의 경제 성장은 인류가 지구상에 출현한 이래 유례가 없는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풍요를 가져왔다. 이런 놀라운 산업문명은 그러나 딱 한 번뿐이다. 앞으로 이런 산업문명은 두 번 다시 생겨날 수 없을뿐더러 지금의 석유문명도 더 이상 지속불가능하다.
자본주의 산업문명을 가능하게 했던 석유를 비롯한 에너지가 고갈되어 가고 있다. 그 뿐만이 아니다. 땅도 고갈되고(Peak Soil), 금(Peak Gold), 리튬(Peak Lithium), 물(Peak Water) 등등 모든 자원이 정점(Peak Everything)을 향해 질주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지구 자원을 단 200년 동안 남김없이 몽땅 퍼다 쓴 흡혈귀 경제였다. 자원이 고갈되면 물론 산업문명은 붕괴되고 자본주의도 종말을 고하고 만다. 당연히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놀라운 풍요도 끝장나고 만다.
수백만 년 동안 인류는 수렵채취 경제로 살아왔다. 그리고 대략 1만 년 동안은 농업 중심의 자급자족 경제를 영위해 왔다. 수렵채취와 농업 사회를 살았던 우리의 선조들이 늘 굶주림에 시달렸고 늘 억압과 착취를 당한 노예의 삶을 살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선조들에 대한 모독이다. 이런 허구의 과거 역사상은 자본주의를 미화하기 위해 자본주의 경제학자들이나 이데올로그들이 히틀러의 선전술처럼 허위로 날조한 것들이다.
오히려 원시부족 사회는 하루에 두서너 시간만 일하고 나머지 시간은 다양하고도 풍부한 문화생활을 즐기던 '최초의 풍요사회'였다. 동양에서 오랫동안 지속돼 왔던 소농의 농업사회는 때때로 자연재해와 전쟁으로 피폐되고 힘든 고난의 시대를 되풀이 해 왔지만 그런 시기를 제외하면 오히려 여유 있고도 최소한 굶주림은 없는, 검소한 자립 정신과 높은 문화를 누리던 건강한 사회였다.
오늘날 한국 경제는 그런 문화를 즐기고 삶을 누리는 자립사회, '풍요사회'와는 너무도 거리가 멀다. 오늘날 한국의 대다수 일반 시민들은 솔직히 말하면 자본주의에 고삐가 매인, 단 한 시간의 여유도 없는 노동 노예들이다. 경제 성장에 중독된 도시의 기계인간들이다. 가족도 공동체도 파괴되어 없는, 철저한 사막사회의 모래알같은 소모품들이다.
우선 당장 식량 자급률 25%, 쌀을 제외하면 5%인 사회는 그야말로 파국 일보 직전의 위험사회이다. 국제 곡물 시장이 공급 부족으로 돌아서는 순간 한국 사회는 재앙을 피할 수 없다. 그리고 이런 사태가 바로 코 앞에 가까이 와 있다.
그 많던 혁명가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지금의 한국 경제는 경제가 성장해도 일자리는 오히려 줄어든다. 그리고 정규직도 비정규직으로 급속히 대체된다. 극단의 개발 토건주의와 신자유주의를 향해 일로 매진하는 한국 경제의 갖가지 문제점에 대해서는 입이 아프도록 많은 사람들이 지적했기에 생략하자.
그런데 이른바 진보 세력은 이런 한국 경제에 대한 대안으로 무엇을 제시했던가. 과거 민주화 운동 세력의 일부가 참여한 이른바 개혁세력이야 좌파 신자유주의란 말까지 만들어내면서 부동산 투기를 조장하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야말로 살길이라고 외친 자본주의 경제성장론자들이므로 그렇다 치자. 한나라당과 똑같이 뉴타운 공약을 내걸었던 용산 참사의 공범 정당이니 그렇다 치자.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은 도대체 무슨 대안을 제시하고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미 철지난 사회주의나 북유럽 복지국가 모델을 들먹이며 사회적 일자리가 무수히 생겨난다고 얘기하면 그만일까. 그게 대안이 될 수 있을까. 그러면 일반 시민들이 여기에 동참해서 희망찬 새로운 진보의 미래를 만들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에너지와 농업에 대한 진보 세력의 대안은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진보 세력 또한 늘 경제 성장과 개발을 주장해 왔다. 사회주의가 더 좋은 경제 성장이라고 강변하면서 말이다.
이런 경제 성장과 개발 주장은 때문에 늘 박정희 경제 개발 신화에 패배할 수밖에 없다. 박정희는 단기간에 한국 경제를 자급자족의 농업경제에서 천지가 바뀐 것처럼 압축해서 자본주의 산업경제로 바꾸었다. 사회주의가 박정희보다 더 경제 성장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도 이른바 진보 세력 내에서도 별로 없을 것이다.
용산 참사는 그러므로 근본에서부터 한국 사회를 바꾸어 나갈 능력도 대안도 없는 진보 세력의 답답함과 무능 그 자체의 결과이다. 이른바 진보 세력이 지금과 같은 대안 부재의 상태로 있다면 용산과 같은 참사가 이어지는 것은 불문가지이다.
치열하게 논쟁하면서 또 꺼지지 않는 정열을 안고 한국 사회의 정의로운 변화와 근본 혁명을 주장하던 그 많던 혁명가들은 모두 다 어디로 가버리고 만 것일까.
녹색 경제, 녹색 사회가 대안이다
▲ <혁명의 추억, 미래의 혁명>(박세길 지음, 시대의창 펴냄) ⓒ프레시안
그러나 '녹색 경제'는 그런 자본주의 산업주의 성장 정책과는 정반대의 경제이다. 녹색 경제의 핵심은 녹색 농업과 녹색 공동체이다. 오히려 에너지 소비를 지금보다 더 혁명의 수준에서 절약하고 육류 소비도 줄이는 경제이다. 소비가 미덕이라는 끔찍하고도 비정상의 자본주의 범죄 경제학이 아니라 절약이 미덕이라고 가르치는 정상의 경세제민으로 돌아가는 경제이다.
이제 농업은 석유 투입의 대규모 농업에서 소농의 생태순환 농업으로 바뀌어야만 한다. 그것이 지속 가능한 사회의 기초이자 안전한 먹을거리, 자급의 농업이며 다가올 식량위기에 대한 가장 확실한 대비책이다. 지역 먹을거리 체계와 이런 소농 중심의 농업은 수많은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 녹색 농업은 비정규직 문제의 가장 확실한 해결책이기도 하다.
에너지 투입이 필요없는 녹색 건축, 대중교통 위주의 녹색 교통, 녹색 관광 등등 녹색 경제로의 전환은 한국 사회를 근본에서부터 바꾸는 일이며 그 과정에서 새로운 일자리를 무수히 만들어 낸다. 이른바 진보 세력이 낡은 진보 개념을 버리고 녹색으로 탈바꿈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럼에도 민주노동당이고 진보신당이고 이 땅의 진보 세력은 아직도 의연히 낡은 진보와 성장의 정치에 갇혀 있을 뿐이다. 대중이 아직도 외면한다고 이유를 들면서 말이다. 그들이 예전에 그렇게 비판하던 대중추수주의가 아니라면, 이제 사회를 바꾸겠다는 의지는 사라지고 생존가능한 소수의 진보에 안주하는, 현실과의 타협이라고밖에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박세길의 <혁명의 추억, 미래의 혁명>(시대의창 펴냄)은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열정을 잃지 않은 보기 드문 고뇌의 기록이다.
사실 세상을 바꾼다는 생각은 어찌 보면 참으로 주제넘고 건방지기 짝이 없는 오만과 치기와 편견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다만 우리 자신의 삶부터 바꾸고 해체된 공동체를 다시 복원하기 위해 세상을 향해 노력할 뿐이며 그것이 혁명일 수 있다.
그러나 박세길의 분석과 대안은 적어도 이른바 이땅의 지식인들이 거의 대부분 그렇듯 서구 지식인들의 이론을 수입하고 번안한 그런 것은 아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이 생각하고 자신이 결론을 얻은 얘기를 하고 있다. 사실 이런 태도야말로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첫걸음이다.
그 자신이 이른바 민족주의의 한 주장을 대표했던 이론가로서 끊임없는 성찰과 대안을 모색한다는 것은 미덕이 아닐 수 없다. 때문에 동의할 수 없는 많은 주장이 있음에도 이런 진솔한 기록을 읽는다는 것은 책의 두께에도 불구하고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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