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ECONOMICS
김수환 추기경의 삶과 신앙
기사입력 2009-02-16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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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의 정신적 지도자이자 종교계의 큰어른이었던 김수환 추기경은 천주교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운명을 안고 태어나 87년의 생애를 신앙 속에서 살다가 16일 선종(善終)했다.
김 추기경은 1922년 5월 8일(음력) 대구시 남산동 225-1번지에서 부친 김영석(요셉)과 모친 서중화(마르티나)의 5남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조부 김보현(요한) 때부터 천주교 신앙을 이어온 집안에서 유아세례를 받고 신앙이 돈독한 소년으로 성장했다.
박해가 끊이지 않는 상황에서 천주교 복음을 받아들인 조부는 1868년 무진박해 때 충남 논산군 연산에서 체포돼 서울 포도청으로 압송됐다가 감옥에서 아사(餓死)로 순교했다. 이때 조모인 강말손도 남편과 함께 체포됐으나 임신 중이어서 석방돼 부친 영석을 낳았다.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김 추기경은 신유박해 때 순교한 광산김씨 일파의 후손이다.
유복자로 태어난 부친은 성장한 뒤 영남 지방으로 이주해 옹기장사를 하다가 혼인한 뒤에 대구에 정착했다. 그러나 천주교에 대한 일제의 탄압으로 한 장소에서 옹기점을 운영하기 어려워 대구를 떠나 이곳저곳을 전전했다. 잦은 이주는 집안을 더욱 궁핍하게 만들었고 형제들은 부친을 도와 생계를 꾸려야 했다. 김 추기경의 나이 다섯 살 때 그의 집안은 경북 선산에서 군위로 이주했고, 이때부터 부친은 옹기점과 농업을 겸해 집안의 생계를 이어나갔다.
옹기장이 아버지를 따라 이곳저곳을 떠돌며 자란 탓인지 김 추기경의 어릴 적 꿈은 장사꾼이 되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는 회고록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읍내 상점에 취직해서 5-6년쯤 장사를 배워 독립한 후 25살이 되면 장가를 갈 생각"이었다고 술회한 바 있다.
그러나 장사꾼이 되려는 꿈은 실현되지 않았다. 순교자 집안에서 태어나 성소(聖召)를 받는 아들이 나오길 기대했던 부모의 깊은 신앙의 결실로 넷째 아들 동환과 막내아들 수환이 사제의 길을 걷게 됐기 때문이다.
모친의 희생과 사랑에 힘입어 동환과 수환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공부를 계속 할 수 있었다. 초등학교 과정인 군위공립보통학교 1학년 때 부친을 여의었던 수환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모친의 권유에 따라 세 살 많은 형 동환과 함께 성직의 길을 가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이에 따라 보통학교 5년 과정을 마친 김수환은 1933년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 예비과에 진학해 성직자로 나가는 첫걸음을 내디뎠다. 이후 서울의 소신학교인 동성상업학교에 들어갔다. 이 학교는 일반 상업학교인 갑조(甲組)와 소신학교 과정인 을조(乙組)로 나누어 운영됐는데 김 추기경은 전 원주교구장 지학순(1921-1993) 주교, 전 전주교구장 김재덕(1920-1988) 주교 등과 함께 을조에 입학했다.
신학교에 들어갔지만 그가 순순히 사제의 길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그는 신학교를 그만두고 싶은 마음에 꾀를 부려보기도 하고, 동성상업학교 3학년 때는 죄 같지 않은 죄까지 꼬치꼬치 고백해야 마음이 편한 이른바 '세심병(細心病)'을 앓으면서 스스로 신부가 될 자격이 없다고 여겨 신부를 찾아가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말했다가 "신부란 자기가 되고 싶다고 되고, 되기 싫다고 안되는 것이 아니다"라는 꾸지람만 듣고 방에서 내쫓긴 적도 있었다.
더군다나 동성상업학교 시절 김수환은 일제에 대한 울분을 일기장에 적을 정도로 강렬한 민족의식을 갖고 있었다. 졸업반인 5학년 때 '황국신민으로서 소감을 쓰라'는 시험문제를 받고 "황국신민이 아니어서 소감이 없다"고 썼다가 교장 선생에게 불려가 뺨을 맞기까지 했다.
교장 선생은 버릇이 없다며 김수환 학생의 뺨을 때렸지만 마음 속으로는 "괜찮은 녀석인데"라고 생각했던지 그가 대구교구 장학생으로 일본 유학을 떠날 수 있도록 추천했다. 그 교장선생은 제2공화국 때 국무총리를 지낸 장면(1899-1966) 박사였다.
김수환은 동성상업학교를 졸업한 해인 1941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도쿄의 상지대학 문학부 철학과에 입학했다. 이 무렵 청년 김수환은 성직의 길보다 항일 독립투쟁에 더 마음이 끌렸지만 1944년에 들어서면서 모든 상황은 변했다. 당시 졸업을 얼마 남겨 놓지 않았던 김수환은 일제의 강압으로 학병에 징집돼 동경 남쪽의 섬 후시마에서 사관 후보생 훈련을 받아야 했다.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어려운 상황에서 무모한 탈출을 감행하다 미수로 그친 적이 있지만 김수환은 이듬해 전쟁이 끝나면서 상지대학에 복학해 학업을 계속하다가 1946년 12월 귀국선을 타고 부산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음해 초 서울의 성신대학(가톨릭대 신학부)으로 편입한 그는 4년 뒤인 1951년 9월 대구 계산동 주교좌 성당에서 사제로 서품됐다.
한국전쟁의 와중에 장차 한국 천주교회의 버팀목이자 시대의 거목이 될 한 명의 사제가 탄생했다. 그가 사제 서품을 앞두고 고른 성구는 시편 51장 "하느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였다.
이에 대해 그는 회고록에서 "과연 한평생 착한 목자로 살 수 있을까? 장점보다 단점이 많은 내가 오히려 하느님 앞에서 죄인으로 남을 가능성이 더 높지 않은가. 그렇다면 내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성찰하고 고백해야 할 것은 '하느님 저는 죄인이오니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말 외에 무엇이 더 필요하겠는가"라고 밝혔다.
열두 살의 나이에 어머니한테 떠밀리다시피 소신학교에 들어갔던 김 추기경은 스물아홉 살에 사제품을 받고 경북 안동본당(지금의 목성동 주교좌 본당) 주임 신부로 사목의 첫발을 내디뎠다.
첫 부임지였던 안동본당과 그곳의 순박했던 시골 사람들은 김 추기경에게 유난히 애틋한 기억으로 남았던지 생전에 그 시절을 자주 회고하곤 했다. 당시 고해하러 온 주민들에게 몰래 돈을 나눠줄 정도로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이후 김천본당 근무를 포함해 2년 반 정도의 짧은 본당 사제 시절이 가장 행복했다고 김 추기경은 밝히곤 했다.
김 추기경은 안동본당 주임신부를 거쳐 1953년 4월 대구교구장 최덕홍(요한) 주교의 비서, 대구교구 재경부장, 해성병원 원장, 그리고 1955년 6월 경북 김천 본당 주임 겸 성의중ㆍ고교 교장으로 전임됐다.
1년 남짓 교장으로 근무하던 시절 김 추기경은 웃을 때 코가 벌름거린다고 해서 '인자하신 콧님'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권위를 앞세우지 않고 학생들과 장난을 쳐가며 격의 없이 지내다보니 붙은 별명이다.
배움에 대한 열정으로 1956년 독일 유학길에 오른 김 추기경은 뮌스터 대학에 적을 두고 7년간 그곳에 체류했다. 그 때 만난 요셉 회프너 교수에게 배운 '그리스도 사회학'은 김 추기경이 그리스도 사상에 기초한 인간관과 국가관을 정립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김 추기경은 회프너 교수에게 배운 이론적 토대가 없었다면 이념논쟁 등으로 요동쳤던 1970-80년대 한국사회를 헤쳐 나오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에게 회프너 교수를 소개해준 인물은 일본 상지대학의 은사이자 '영적 스승'의 역할을 했으며, 뒷날 서강대를 설립한 독일 출신 테오도레 게페르트 신부였다.
독일 유학시절은 교황 요한 23세가 소집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65)가 열리고 있었던 시기이기도 했다. 당시 독일에서는 공의회 정신에 따라 시대에 걸맞은 교회를 만들기 위한 변화와 쇄신의 물결이 요동치고 있었다. 자기 세계에 갇혀 있는 교회의 문을 활짝 열고 세상과 대화하고 소통하려는 쇄신운동이었다.
이에 대해 김 추기경은 회고록에서 "가톨릭교회가 쇄신을 통해 시대의 변화에 적응해야 한다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바람은 예전에 느껴보지 못한 강한 바람이었다"면서 "독일에서 겪은 그런 체험은 훗날 주교와 추기경으로서 소임을 수행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밝혔다.
그러나 김 추기경은 자신이 차분하게 앉아서 공부할 팔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서독에 파견된 광부와 간호사들은 고해성사와 미사는 물론 어려운 일만 있으면 김 추기경을 찾았다. "도와 달라'는 동포들의 요청을 뿌리치지 못해 여기저기 불려다니다 보니 학업에 지장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의 가족제도'에 대한 논문주제를 붙들고 씨름하던 그는 결국 박사 학위를 포기하고 귀국길에 올랐다. 귀국 후 가톨릭시보사(현 가톨릭신문사) 사장을 지내며 교회 언론의 초석을 다졌는가 하면, 1966년에는 신설된 마산교구의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됨과 동시에 주교품을 받았고 그로부터 2년 뒤 서울대교구장에 올랐다.
서울대교구장에 임명된 것은 그로서도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당시 주한 교황대사 히폴리토 로톨리 대주교로부터 급히 상경하라는 전갈을 받고 대사관에 들어선 김 추기경은 "대주교로 승품되어 서울대교구장직을 맡게 됐다"는 놀라운 말을 듣는다. 주교가 된 지 2년 밖에 안 된 주교단의 막내인 그에게 당시 빚에 쪼들리고 사제들이 분열되는 등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서울대교구는 무겁고 부담스러운 십자가였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시골뜨기 주교'에서 일약 한국 천주교의 중심인물이 된 김 추기경은 이후 30년 동안 서울대교구장으로 재임하면서 현대사의 한복판이 됐던 명동성당과 함께 한국사회의 영욕을 몸소 겪어야 했다.
서울대교구장 취임미사 강론을 통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정신에 따라 '세상 속의 교회'를 만들겠다"는 의지를 밝혔던 그는 이듬해인 1969년 우리나라 최초로 추기경에 임명된다. 당시 그의 나이 47세로 전세계 추기경 136명 가운데 최연소자였다.
그러나 추기경이 되었다는 영광은 잠시였다. 1970-80년대 격동의 시대 속에서 세상과 교회를 모두 돌보는 일은 녹록지 않았다. 특히 1970년대 가톨릭교회와 명동성당은 박정희 유신정권에 맞서 싸우는 민주화 운동의 구심점으로 인식됐다.
김 추기경은 회고록에서 "당시 본의 아니게 여러 사건과 사태를 겪으면서 인권 사회 정의 운동의 한가운데 있었다"면서 "정부 압력은 물론 교회 안에서 쏟아지는 비판까지도 홀로 감수해야 하는 내 심경을 말이나 글로 표현하기 힘들다"고 고백했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출범하면서 교회의 현실 참여문제로 내부에서 갈등이 빚어지고, 1974년 이른바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지학순 주교를 비롯한 여러 사제들이 옥살이를 하는 등 교회와 정부의 골도 깊어져만 갔다.
그러나 이 시기에 김 추기경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에 따라 교회의 현실참여는 옳은 방향이라고 여겼다. 김 추기경은 1971년 성탄 자정 미사에서 장기집권으로 향해가는 박정희 정권의 공포정치를 비판하는 강론을 했고, 이듬해 8월에는 시국 성명을 발표함으로써 박 정권과 충돌했다.
나아가 1980년대 명동성당은 민주화 운동의 해방구였다. 특히 1987년 6월 민주화운동 때 명동성당은 권력에 맞서 싸우는 마지막 보루였다. 김 추기경은 당시 명동성당에서 농성 중이던 학생들을 연행하려던 경찰 병력의 투입을 끝까지 막아냈다.
김 추기경은 당시 상황에 대해 "경찰 병력 투입과 학생 연행은 상징적으로 시국 방향을 바꿔놓을 수 있는 사안이어서 이 나라가 민주화의 길로 가느냐, 아니면 군사정권이 연장되느냐의 갈림길이라고 생각했다"고 밝힌 바 있다. 이처럼 살얼음판 같던 시대를 헤쳐오면서 얻게 된 불면증은 김 추기경을 30년 넘게 괴롭혔다.
그 시절에 대해 김 추기경은 "난 1970-80년대 격동기를 헤쳐 나오는 동안 진보니, 좌경이니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정치적 의도나 목적을 두고 한 일은 더더욱 없다. 가난한 사람들, 고통받는 사람들, 그래서 약자라고 불리는 사람들 편에서 그들의 존엄성을 지켜주려 했을 뿐이다"라고 회고했다.
김 추기경은 이 같은 정치적 격동기 속에서도 한국 천주교의 기틀을 다지는 굵직한 행사를 치러냈다. 1981년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기념 신앙대회, 1984년 한국 천주교회 창립 200주년 기념행사, 1989년 제44차 서울 세계성체대회 등은 한국 가톨릭교회가 도약하는 계기를 만든 행사들이다.
종교인이자 사회지도자로서 시대의 한복판에 섰던 김 추기경은 교황청에 사임 의사를 밝힌 지 6년 만인 1998년 서울대교구장직에서 물러났다. 그는 은퇴 이후 2002년 북방 선교에 투신할 사제를 양성하기 위한 옹기장학회를 공동 설립하는 등 북한 선교를 위해 노력했고, 우리 사회의 큰 어른으로서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왔다.
'너와 너희 모두를 위하여'라는 자신의 사목 표어처럼 '세상 속의 교회'를 지향하면서 현대사의 중요한 고비마다 종교인의 양심으로 바른길을 제시해온 김 추기경은 시대의 예언자로서의 역할을 뒷사람들에게 남겨놓고 하늘나라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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