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때 `운동하는 로봇`이란 생각에 그만둘뻔…"
'피겨스케이팅 세계챔피언이지만 자유와 평범을 꿈꾸며 단순하고 쿨한 O형에 안 먹는 거 빼곤 다 잘 먹는 꿈 많고 소탈한 스무 살의 피겨 스케이터.'
'피겨 여왕' 김연아(20 · 고려대)가 28일 출간될 자서전 《김연아의 7분 드라마》(중앙출판사)에 쓴 자기소개다. '7분'은 피겨 스케이팅 경기의 쇼트 프로그램을 연기하는 2분50초와 프리 스케이팅의 4분10초를 합친 시간.김연아는 이 책에서 7분간의 최고 연기를 위해 13년 동안 아이스링크에 쏟아부은 땀과 무대 뒷얘기들을 털어놨다.
그는 7세 때 처음 스케이트를 신고 '미셸 콴이 될거야'라고 다짐하던 '꼬꼬마 스케이터' 시절부터 지난해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자신의 쇼트 프로그램 세계 최고 기록을 76.12점으로 경신하고,종합 점수 207.71점으로 마의 200점대를 돌파한 뒤 2009~2010 시즌에 종합 210점을 달성하기까지의 성장 과정을 생생하게 들려준다.
열두 살에 트리플 5종 점프를 모두 마스터한 비결,국가대표가 된 후 시즌별로 프로그램을 준비하기 위해 음악을 고르고 안무를 짜는 과정,경기 전후의 심정,밴쿠버 올림픽을 준비하는 각오도 특유의 발랄한 말투로 전한다. 지난해 스케이트 아메리카 때 발가락에 티눈이 난 상태로 경기를 하고,쇼트 대회에서 신기록을 수립한 후 기쁨보다 프리에 대한 걱정으로 손이 덜덜덜 떨렸다는 고백도 눈길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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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하는 로봇'이 된 듯한 생각에 두 번이나 은퇴를 생각했던 시련기,발에 맞지 않는 스케이트화 때문에 고통스러워 피겨를 그만둬야 하나 고민했던 시절,2008년 국내에서 열린 4대륙 선수권대회 때 갑작스러운 부상으로 출전을 포기하고 남몰래 눈물을 흘린 사연도 공개했다.
'No pain,no gain(고통 없인 얻는 것도 없다)'의 좌우명,실수하거나 안 좋은 일이 있어도 '과거는 과거일 뿐,앞으로 잘하면 된다'는 지론도 공개했다. 책 속의 부록 '집중 인터뷰-연아의 스무 살 스케치'에서는 "내편인 사람들이 있다는 것,그것만으로도 마음이 든든하다"면서 팬들의 궁금증을 풀어준다.
고두현 기자 kdh@hankyung.com
◆이거 또 속 썩이는 거 아냐?
그런데 오른쪽 발가락 사이에 생긴 티눈이 조금씩 아프기 시작했다.
'이거 또 경기할 때 속썩이는 거 아냐?'
조금씩 부어오르는 것 같은데 도착하면 얼음찜질을 해야 하나,진통제를 먹어야 하나,해결 방법을 찾으려고 혼자 머리를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티눈 상태부터 확인했다. 다행히 그때는 붓기도 꽤 가라앉아 있었고 스케이트를 신어도 심한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휴,다행이다.
쇼트 경기 날,정말 불안하고 걱정이 돼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분명히 실수할 거야,실수해도 괜찮아,당황하지 말자,이런 생각만 수도 없이 하고 있었다. 내가 많이 긴장했다는 걸 (코치) 브라이언도 느낄 정도였다.
'침착하자,침착하자.괜찮아.잘할 수 있어.'
내 차례다. 호흡을 가다듬고 첫 포즈를 취했다. 음악이 나오기까지 그 짧은 순간,심장이 두근두근 미칠 듯이 뛰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음악이 시작되자 오히려 긴장이 풀리면서 호흡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첫 점프를 성공하고 공식 연습에서 실수가 좀 있었던 플립으로 가는 동안,실수해도 당황하지 말자,괜찮아,괜찮아,하고 속으로 주문을 외웠다.
그런데 공중으로 뜨는 순간 그 어느 때보다 편하게 올라갔고 높이 뛰어졌다는 게 느껴졌다. 랜딩 역시 너무 깨끗하게 됐다. 나 스스로도 너무 놀랐다. 연습에서 불안했기 때문에 뛰어도 간신히 랜딩할 줄 알았는데 보통 때보다 더 깨끗하게 되다니! 점프를 모두 성공하고 스텝도 잘했다. 마지막 스핀에서 흔들림이 조금 있었지만 그래도 잘 마쳤다. '으아,너무 잘했어.' 무지 긴장했었는데 끝나서 속이 시원했다. 그제야 안심이 됐다. 다행이다,너무 다행이다,속으로 소리쳤다.
◆헉! 웜업 막바지에 넘어지다니
프리 스케이팅이 시작되었다. 웜업 막바지에 플립을 시도하다가 좀 크게 넘어졌다. 나도 헉,했지만 관중들도 '헉!' 하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어쩌랴,잘 추스르고 백스테이지에서 대기했다. 그날따라 왜 그렇게 시간이 안 가는지,생각이 더 많아졌다. 점프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할 수 있어,할 수 있어,속으로 나를 세뇌시키고 있었다.
연기에서도 그 모습이 계속 이어졌다. 첫 오프닝 점프인 3-3에서 첫 점프 랜딩이 쭉 빠지지 않고 얼음에 박혀서 스피드가 확 줄어 버렸다. 다음 점프를 뛰려고 젖 먹던 힘을 다해 3회전을 했지만 부족했다. 망했다….두 번째 플립에서는 더 어이없게 회전하다 중간에 풀려서 넘어지고 말았다. 연기 내내 제정신이 아니었다. 다리는 힘이 없고 그날따라 얼음이 너무 미끄러워 넘어질 것만 같았다. 체력도 부족하고 첫 러츠에서 실수가 있어서 그 느낌이 남아 두 번째 러츠도 놓쳤다. 연기가 끝났다.
'내가 도대체 뭘 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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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가 없었다. 한동안 이렇게 많은 실수를 한 적이 없었다. 정신없이 지저분한 연기를 한 게 오랜만이라 그런지 더 당황스러웠다. 힘없이 인사를 하고 키스 앤드 크라이 존에서 점수를 기다리는데,아,제발 여기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이런 내 경기에는 몇 점이 나올까.
어제와 비교하면 너무 극과 극의 차이여서,어떻게 하루아침에 이렇게 딴 사람이 되어 있을 수 있는지,나도 내가 한 짓을 생각하면 기가 찼다. 예상대로 낮은 점수.200점은커녕 190점도 못 넘겼다. 그래도 1위를 했다는 것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어쩌면 잘된 일인지도 몰라,하는 생각이 들었다. 김연아도 실수할 수 있다,김연아도 부담과 긴장에 흔들리는 인간이다,라는 것을 보여준 기회였기 때문이다.
나에 대해 많이 실망하신 분들에게는 죄송하지만,무조건 200점 돌파,언제나 클린 프로그램,이런 기대가 조금은 사라지지 않을까. 내가 나 스스로에게 거는 기대와 부담도 마찬가지다.
발가락 티눈으로 고통
금간 엄지발톱 잘라내…
◆2009 일본 그랑프리 파이널 뒷얘기
2009년 12월 일본 도쿄에 도착하니 역시 많은 취재진이 기다리고 있었다. 잽싸게 인터뷰를 하고 빠져나와 버스를 타고 공식 호텔로 향했다. 호텔에 들어가 저녁식사를 하고 장시간 비행으로 피로해진 몸을 풀기 위해 반신욕을 했다. 나와서 티눈을 소독하려고 발을 살피는 순간,엄지발톱에 금이 가 있는 것을 발견! 발톱이 죽어서 새로 나왔는데,그 발톱이 또 죽어서 시커멓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게 물에 들어가서 불었는지 거의 반 이상이 떨어져서 너덜거렸다. '아이고,이거 큰일이네.이걸 떼어내,말아?'
떼었다가 피나고 아프면 이번 경기는 끝장인데? 엄마는 이미 잠이 들었고 나 혼자 발가락을 들여다보며 결정을 해야 했기에 쉽게 판단을 내리기가 어려웠다. 발톱을 살짝 들어 안에서 새 발톱이 자랐는지 확인했다. 다행히도 발톱이 반쯤 자라 있었다. 그래,그냥 떼어내 버리자.이미 죽어서 붙어 있어도 아무 의미없는 발톱이니깐! 하고 잘라냈다. 방 안에서 혼자 아픈지 안 아픈지 확인하기 위해 토 점프 할 때 토를 찍는 시늉도 해 보고 눌러도 봤지만 전혀 아픔이 없었다. 다행이다.
◆고모한테 받은 헌 스케이트화
처음 피겨스케이트를 접했던 그해 여름,엄마는 과천 아이스링크에서 방학 중에 피겨스케이팅 특강 접수 신청을 해 주셨다. 짧은 강습 기간 때문에 대부분의 아이들은 스케이트화를 대여해 신었지만,나는 나만의 스케이트화를 갖고 있었다. 노란 끈이 묶인 빨간 부츠.고모한테 받은 건데,이웃에서 버리려고 하는 것을 나한테 맞겠다며 가져다 주신 것이다.
나의 첫 스케이트화는 종잇장같이 얇고 부드러워서 그냥 발을 감싸는 가죽 정도에 불과했다. 선수용 스케이트화는 발목 보호를 위해 단단하게 만들어진다. 덕분에 발이 아프지는 않았지만 발목을 지지해 주지 못했기 때문에 오직 내 힘으로 버텨내며 스케이팅을 해야 했다. 엄마는 가끔 부실한 첫 스케이트화가 나를 일찌감치 큰 재목으로 단련시킨 게 아니냐며 우스갯소리를 하신다.
◆가장 즐긴 놀이는 '동계 올림픽 놀이'
내가 피겨 선수의 길을 가기로 한 다음 해에 1998 나가노 동계 올림픽이 열렸다. 나는 그때 내 꿈의 실체를 발견했다. 당시 은메달을 딴 미셸 콴. 막연하게 스케이트 선수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내게 닮고 싶은 사람이 생긴 것이다. 당시 내가 가장 즐겼던 놀이는 '동계 올림픽 놀이'였다. 각자 좋아하는 선수가 돼 피겨 경기를 하는 놀이였다. 나는 항상 '미셸 콴'이 되어 그동안 갈고 닦은 동작과 표정 연기를 따라 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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