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과주의 등정’ 자성론 “희생양 더이상 안 된다”
세계는 ‘과정’ 중시하는데 한국은 ‘높이·개수’ 집착
속도전에 위험 노출…언론 ‘과열 경쟁’ 부추기기도
한겨레 박수진 기자
고미영씨 사고 계기로 본 산악계 현실

“우리가 그를 죽음으로 떠밀었는지도 모른다. 문제를 뻔히 알면서도 지적하지 않았다.”

지난 13일 저녁 서울 인사동의 한 식당에서 공용현 전 한국등산학교 총동창회장, 박기성 월간 <사람과 산> 편집국장, 히말라야 원정대장을 했던 이아무개(43)씨 등 중진 산악인들이 모여 한목소리로 안타까움과 미안함을 토로했다.

이들은 무엇보다 ‘14좌 등정’의 의미에 강한 의문을 던졌다. 고씨의 도전이 언론의 주목을 받은 것은 14좌 등정 때문이었다. 고씨는 산악인 오은선씨와 함께 ‘여성 최초 14좌 등정’의 기록을 두고 경쟁을 벌여왔다. 국내 산악계에선 2001년 엄홍길씨, 2003년 박영석씨 등이 14개 봉우리를 모두 정복하면서 14좌 등정의 바람이 불었다.

히말라야 원정대장을 했던 이아무개씨는 “1986년 라인홀트 메스너가 최초로 미답의 14개 봉우리를 오른 것은 위대한 도전이지만, 이후 이미 개척된 14개 봉우리를 오르는 것은 개인적 차원에서야 큰 도전이지만 전문 산악인들이 경쟁적으로 도전할 것은 더 이상 아니다”라며 “그러나 언론이 14좌 등정이 대단한 것인 양 경마식 보도를 일삼아 이들을 과당경쟁으로 내몰았다”고 말했다.

정부도 마찬가지였다. 14좌 등정에 성공하면 정부의 체육훈장 가운데 가장 높은 등급인 청룡장을 받는다. 청룡장은 1000점 이상의 점수를 받아야 받을 수 있는데, 올림픽 금메달 점수가 500점인 반면, 14좌 등정은 1000점이다.

이처럼 속도와 기록을 요구하는 분위기 속에서 고씨는 올해 들어 강행군을 이어갔다. 지난 5월1일 마칼루(8463m)를 시작으로 이달 11일 낭가파르바트까지, 석 달 동안 4좌를 올랐다. 8000m 이상 산을 두 차례 올랐던 산악인 배아무개(34)씨는 “산을 올라갈 때 체력의 70%를 쓰고 내려올 때를 위해 30%를 비축해야 하는데, 3개의 봉우리를 오른 뒤 4번째 오르는 것이어서 비축할 힘이 없었을 것”이라며 “그렇게까지 서둘러야 했는지, 그리고 그 방식이 과연 가치 있는 것이었는지 생각하면 더 안타깝다”고 말했다.

‘산악 선진국’들은 ‘양’보다는 ‘질’을 평가한다. 프랑스의 세계적 산악잡지 <몽타뉴>와 유럽고산등산협회가 해마다 뛰어난 등반가에게 주는 황금피켈상은 △셰르파의 도움을 받지 않고 △고정 로프를 사용하지 않으며 △얼마나 적은 인원으로 등반했는지 등을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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