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모습도 아름다운 스님 법정스님
그분의 무소유개념은 우리 현대 사회에 무한한 깨우침과 감동을 준다. 우리도 그분처럼 살 수 있을까? 단호한 느낌과 보통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사고방식으로 우리에게 경종을 주신 분... 그분의 모습을 블로그에 담게 되어 영광스럽다.
법정 스님이 우리에게 남긴 것
법정 스님 다비식
<리포트>
보통의 경우 24시간 정도 다비를 하게 됩니다.
이럴 경우 내일 오전 10시에서 12시 정도면 타다 남은 뼈를 수습하는 습골이 진행될 예정입니다.
사리도 찾지 말아달라는 법정 스님의 유언에 따라 사리 수습은 생략될 것으로 보입니다.
습골한 뼈는 바로 빻는 절차인 쇄골 작업을 거치게됩니다.
보통의 경우는 부도탑에 안치하게 되지만 스님의 유언에 따라 상좌 스님들이 이를 뿌리는 산골을 하게됩니다.
산골 장소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법정 스님이 정진했던 강원도의 산골 오두막 부근과 송광사 등으로 전망됩니다.
이에 앞서 법정스님의 법구는 어제 오전 서울 성북동 길상사를 떠나 출가 본사인 순천 송광사로 이동해 문수전에 모셔져 하룻밤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앞서 보셨듯이 오전 10시에 송광사 입구 주차장에서 800미터 정도 떨어진 언덕에 있는 다비장으로 옮겨졌습니다.
<질문> 추모 분위기가 대단한 것 같아요.
<답변>
네, 그렇습니다. 사실 지금 이시각은 원래 예정대로라면 이미 다비식이 시작돼야 하는 상황이거던요.
좀전에 말씀드렸지만 다비장이 송광사에서 조금 떨어진 곳이라서 법구를 옮겨야 하는데 그 과정에 시간이 많이 걸린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바로 추모 인파가 너무 많아서 그렇습니다.
어제 밤 부터 송광사에는 법정 스님의 입적을 안타까워하는 일반 신도와 스님들 해서 만5천여명 정도 운집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만큼 스님이 떠나는 것을 아쉬워하는 일반 대중이 많다는 것인데요.
일체의 장례식을 거행하지 말라는 유언에도 불구하고 각 지역에서 자발적인 분향소가 차려지고 이곳을 수많은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또한 이런 다비식이나 분향소에 가시지 못하는 분들은 서점으로 가서 그가 남긴 책들을 찾는 경우가 많아 서점에는 스님이 남긴 책들이 많이 팔리고 있는 실정이라고 합니다.
<질문> 법정 스님은 어떤 분이었는지 간략하게 정리해주시죠?
<답변>
네, 법정스님은 탁월한 문장력을 바탕으로 한 산문집을 통해 일반 국민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은 한마디로 '스타' 스님입니다.
지난 1932년 10월8일 전남 해남에서 태어난 스님은 목포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법정 스님은 한국전쟁을 경험하면서 인간 존재에 대한 물음 앞에서 고민하다 1954년 마침내 입산 출가를 결심한 뒤 당대의 선승인 효봉스님 만난 뒤 머리를 깎습니다.
그리고 통영 미래사에서 행자 생활을 했고 그 뒤 양산 통도사, 해인사 등을 거쳐 출가 본사 송광사로 내려왔습니다.
1975년 10월부터 송광사 뒷산에 불일암을 짓고 홀로 살기 시작했지만 76년 산문집 '무소유'를 낸 후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지자 1992년 다시 출가하는 마음으로 강원도 화전민이 살던 산골 오두막에서 지금까지 혼자 지내왔습니다.
그러다 지난 96년에 고급 요정이던 성북동의 대원각을 조건없이 기부 받아 길상사로 탈바꿈시켜 창건하기도 했습니다.
<질문> 법정 스님이 우리에게 남긴 것은 무엇일까요?
<답변>
스님의 산문집 '무소유'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울림이 가장 큰 것일 것입니다.
스님은 그의 법정 스님의 일생은 무소유와 버리고 떠나기의 실천이었습니다.
법정 스님은 스님으로 55년을 살았지만 그 흔한 사찰 주지 한번을 지내지 않았습니다.
손수 짓고 , 홀로 17년간 수행한 송광사 뒷산의 불일암에서는 잔솔깨비로 군불을 때고 방석 하나와 어둠을 밝히는 호롱불이 전부였습니다.
이를 스님은 아무것도 없는 빈방에 있으면 전체적인 자기, 온전한 자기를 누릴 수가 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산문집 무소유로 유명세에 시달리자 다시 모든 것을 버리고 강원도 화전민이 살던 산골의 오두막으로 홀연히 떠난 것도 바로 무소유의 실천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마지막에도 그동안 풀어 놓은 말 빚을 다음생에 가져 가지 않도록 출판한 저서를 모두 절판하라고 유언을 남긴 것은 남은 사람들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법정 입적> 법정스님, 불길 속에서 먼길 떠나
(순천=연합뉴스) 조채희 기자 = '무소유'의 가르침을 전하고 실천한 법정(法頂)스님이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에 몸을 맡긴 채 먼 길을 떠났다.
지난 11일 오후 1시51분 서울 성북동 길상사에서 입적한 법정스님의 법구는 13일 오전 스님의 출가 본사인 전남 순천 송광사 전통다비장에서 다비됐다.
법정스님의 이번 생 마지막 길을 지켜보려고 이날 송광사에는 아침 일찍부터 전국 각지의 불교신자와 스님 등 추모객 3만여 명이 몰렸고, 송광사를 품은 조계산 언덕에 자리 잡은 다비장에도 1만5천여명이 운집했다.
`아름다운 마무리..' 법정 스님 가시던 날 (순천=연합뉴스) 형민우 기자 = 무소유와 청빈으로 평생을 살아온 법정스님이 우리 곁을 떠났다. 단아하면서 맑은 문체로 사랑을 받아 온 시대의 작가이자 철학자였던 법정 스님은 떠날때도 무소유 그 자체였다. 13일 전남 순천 송광사에서는 영결식 등 일체의 행사 없이 조촐하게 다비식이 열렸다. 2010.3.13 minu21@yna.co.kr |
전날 길상사를 떠나 송광사 문수전에서 밤을 지낸 법정스님의 법구가 이운되기 시작한 것은 이날 10시, 범종 소리와 함께였다.
법구는 길상사를 떠나던 모습 그대로 대나무 평상에 모셔진 채 가사를 덮은 상태였고, 대웅전 앞에서 부처님께 마지막 3배를 한 후 다비장으로 향했다.
하늘 가는 길 (순천=연합뉴스) 형민우 기자 = 무소유와 청빈으로 평생을 살아온 법정스님의 다비식이 13일 순천 송광사에서 열려 스님의 법구가 거화의식을 위해 옮겨지고 있다. 2010.3.13 minu21@yna.co.kr |
추모객들은 일제히 합장하고 "나무아미타불" 등을 염불하면서 법정스님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봤고, 다비장으로 향하는 거대한 행렬에 동참했다. 또 상당수 추모객은 일찍부터 다비장으로 모여들어 자리를 잡기도 했다.
학인 스님 8명이 조를 짜 교대해 이운한 법구는 송광사 주차장 입구에서 약 800m 산길을 올라 오전 11시께 다비장에 도착했다.
하늘 가는 길 (순천=연합뉴스) 형민우 기자 = 무소유와 청빈으로 평생을 살아온 법정스님의 다비식이 13일 순천 송광사에서 열려 스님의 법구가 거화의식을 위해 옮겨지고 있다. 2010.3.13 minu21@yna.co.kr |
법구는 장작더미가 쌓인 인화대 위에 모셔진 후 다시 참나무로 덮였고, 이어 11시41분 스님 9명이 장작에 불을 붙이는 거화(炬火) 의식을 거행하면서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에 맡겼다.
이날 법정스님의 법구를 이운하는 행사에는 전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스님, 조계종 원로의원 법흥스님, 덕숭총림 수덕사 방장 설정스님, 쌍계사 조실 고산스님, 전국선원수좌회 전 대표 혜국스님 등 불교계의 큰스님과 중진스님이 대거 참석했다.
'법정 스님의 마지막 길' (순천=연합뉴스) 이지은 기자 = '무소유'의 법정 스님의 다비식이 거행된 13일 오전 전남 순천시 송광사에서 법정 스님의 영정을 앞세운 법구가 문수전을 나와 대웅전을 향하고 있다. 2010.3.13 jieunlee@yna.co.kr |
또 이계진, 김학송 한나라당 의원, 이강래, 서갑원 민주당 의원, 강기갑 민주노동당 대표,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 등 정계인사도 자리를 함께했다.
법정스님의 법구는 14일 오전 10시까지 계속 다비된 후 타다 남은 뼈를 모으는 습골 의식을 거쳐 문도들에게 전달된다. 유골은 법정스님이 오래 머무르던 강원도 오두막, 송광사 불일암, 길상사 등지에 산골될 것으로 전해졌다.
“삶과 죽음이 하나라지만…”
"스님께서 극락전 앞에서 부처님께 마지막 세 번 인사를 올리고 떠나실 때는 제 마음이…"
법정스님께 받았다는 법명 '지광(智光)거사'로 자신을 소개한 변택주(58) ㈔시민모임 맑고향기롭게(맑고향기롭게) 이사는 스님의 마지막 모습을 그리며 마음이 애통한지 말을 잇지 못하고 안경을 들어 올려 눈물을 닦았다.
그는 "스님께서 삶과 죽음이 하나라고 하셨지만, 제자된 저로서는 왜 (마음속에) 울림이 없었겠느냐"며 스승을 잃은 제자의 슬픈 심정을 내비쳤다.
13일 성북동 길상사에 있는 '맑고향기롭게' 사무실에서 기자와 만난 변 이사는 2000년 법정스님에게 계를 받은 제자다.
"사실은 26년 전에 이미 계를 받은 적이 있었지만, 꼭 스님께 받고 싶은 마음이 들어 특별히 다시 부탁했던 거죠. 어떻게 보면 욕심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가 처음 법정스님을 만난 것은 길상사가 창건되던 1998년 법회에서였다. 평소 스님의 글을 읽고 흠모하던 그가 스님을 뵙고 싶어 이날 길상사를 찾았다. 이후 그는 그해 가을부터 10여 년 동안 꾸준히 법정스님 법회의 진행을 도맡아 했다.
그는 "스님의 '무소유' 정신이 널리 알려졌지만, 사실 스님이 늘 하셨던 말씀은 '착하게 살라'는 단순한 메시지였다"며 "부처와 보살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부처와 보살이 돼 가는 것이라고 설파하셨다"고 회고했다.
그가 지금 '맑고향기롭게' 이사직을 맡아 일하는 것도 '착하게 살라'는 법정스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해서다.
원래 '맑고향기롭게'는 1993년 법정스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법정스님의 뜻을 받들어 만든 사회봉사 단체다. 이들은 결식아동과 독거노인을 돕고, 양로원을 찾아가 봉사하는 등 몸으로 하는 봉사를 꾸준히 해왔다.
고(故) 정채봉 동화작가를 비롯해 이계진 의원, 윤청강 불교작가 등이 법정스님의 뜻에 공감해 발기인격으로 모임에 참여했고, 이후 각지에서 종교를 불문하고 수많은 사람이 동참했다. 지금은 지역모임만도 부산과 대전, 대구, 광주와 경남 등 5곳에 이를 정도로 커졌다.
2003년 길상사 회주 직을 비롯해 모든 직책에서 물러나 강원도 오두막으로 들어간 법정스님이 마지막까지 내려놓지 않았던 것이 '맑고향기롭게' 이사장직이라는 것만 봐도 이 모임의 상징적 의미를 짐작할 만하다.
변 이사는 "모임을 운영하면서도 스님은 '무소유' 정신을 실천하셨다"고 강조했다. 구청에서 자금지원 제의를 해왔는데도 "그 자금은 다른 기관에서도 필요한 곳이 많을 것"이라며 "약소해도 내 주머니에서, 힘들어도 내 몸으로 봉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는 "스님은 당시 많이 썼던 '베품'이라는 말 대신 '나눔'이라는 말을 좋아하셨다"며 "아마 나눔이라는 말이 보여주는 수평적인 모습이 마음에 드셨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이런 활동을 하면서도 법정스님은 도움을 주고도 얼굴이나 이름을 알리지 않는 무상보시(無相布施)의 원칙을 일평생 철저히 지켰다. 이 때문에 기부 활동을 비롯한 스님의 선행은 '맑고향기롭게' 쪽에서도 다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변 이사는 "옛날 양(梁)나라 무제(武帝)가 불교를 위해 했던 일을 자랑하며 자신의 공덕이 얼마나 되는지 묻자 달마대사가 무공덕(無功德)이라고 답했다는 일화가 있다"며 "스님께서도 '내가 무얼 했노라고 얼굴을 내밀면 보시가 아니라 거래'라고 늘 강조하셨다"고 전했다.
하지만 그는 "몇 겹의 종이로 향(香)을 싸도 향기가 배어 나오는 것은 막을 수 없듯이 법정스님이 쌓은 덕도 차차 알려지리라 생각한다"며 "'맑고향기롭게'를 통해서 하신 부분은 지극히 적은 부분이라고 알고 있다"고 전했다.
실제로 '맑고향기롭게'는 1994년부터 매년 4000~5000만원을 '맑고향기롭게 길상화 장학금'으로 책정하고, 형편이 어려운 중ㆍ고교 학생 30여명을 선발해 돕고 있지만, 누가 얼마나 기부를 했는지는 밝히지 않는다. 이 가운데 상당 부분이 법정스님의 기부액이라고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맑고향기롭게'를 통하지 않은 기부 활동도 상당했을 것으로 보인다. '무소유'를 비롯한 법정스님의 인세 수입은 10억원이 넘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각 출판사에서는 이들 인세가 장학금 등에 쓰였을 것을 추측한다.
변 이사는 "스님께 장학금을 받아서 석사와 박사 공부를 한 사람이 있다고 들었다"고 말했고, 출판사 마음의숲의 고세규 대표도 "스님께서 일본 유학생에게 많은 돈을 학비로 대줬다는 소식을 한 문인에게 들은 적이 있다"고 말을 보탰다.
하지만 변 이사와 '맑고향기롭게' 사무국 측은 "스님의 뜻에 어긋난다"며 법정스님이 한 기부와 선행을 구체적으로 밝히기를 한사코 거부했다.
법정스님께 받았다는 법명 '지광(智光)거사'로 자신을 소개한 변택주(58) ㈔시민모임 맑고향기롭게(맑고향기롭게) 이사는 스님의 마지막 모습을 그리며 마음이 애통한지 말을 잇지 못하고 안경을 들어 올려 눈물을 닦았다.
그는 "스님께서 삶과 죽음이 하나라고 하셨지만, 제자된 저로서는 왜 (마음속에) 울림이 없었겠느냐"며 스승을 잃은 제자의 슬픈 심정을 내비쳤다.
13일 성북동 길상사에 있는 '맑고향기롭게' 사무실에서 기자와 만난 변 이사는 2000년 법정스님에게 계를 받은 제자다.
"사실은 26년 전에 이미 계를 받은 적이 있었지만, 꼭 스님께 받고 싶은 마음이 들어 특별히 다시 부탁했던 거죠. 어떻게 보면 욕심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가 처음 법정스님을 만난 것은 길상사가 창건되던 1998년 법회에서였다. 평소 스님의 글을 읽고 흠모하던 그가 스님을 뵙고 싶어 이날 길상사를 찾았다. 이후 그는 그해 가을부터 10여 년 동안 꾸준히 법정스님 법회의 진행을 도맡아 했다.
그는 "스님의 '무소유' 정신이 널리 알려졌지만, 사실 스님이 늘 하셨던 말씀은 '착하게 살라'는 단순한 메시지였다"며 "부처와 보살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부처와 보살이 돼 가는 것이라고 설파하셨다"고 회고했다.
그가 지금 '맑고향기롭게' 이사직을 맡아 일하는 것도 '착하게 살라'는 법정스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해서다.
원래 '맑고향기롭게'는 1993년 법정스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법정스님의 뜻을 받들어 만든 사회봉사 단체다. 이들은 결식아동과 독거노인을 돕고, 양로원을 찾아가 봉사하는 등 몸으로 하는 봉사를 꾸준히 해왔다.
고(故) 정채봉 동화작가를 비롯해 이계진 의원, 윤청강 불교작가 등이 법정스님의 뜻에 공감해 발기인격으로 모임에 참여했고, 이후 각지에서 종교를 불문하고 수많은 사람이 동참했다. 지금은 지역모임만도 부산과 대전, 대구, 광주와 경남 등 5곳에 이를 정도로 커졌다.
2003년 길상사 회주 직을 비롯해 모든 직책에서 물러나 강원도 오두막으로 들어간 법정스님이 마지막까지 내려놓지 않았던 것이 '맑고향기롭게' 이사장직이라는 것만 봐도 이 모임의 상징적 의미를 짐작할 만하다.
변 이사는 "모임을 운영하면서도 스님은 '무소유' 정신을 실천하셨다"고 강조했다. 구청에서 자금지원 제의를 해왔는데도 "그 자금은 다른 기관에서도 필요한 곳이 많을 것"이라며 "약소해도 내 주머니에서, 힘들어도 내 몸으로 봉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는 "스님은 당시 많이 썼던 '베품'이라는 말 대신 '나눔'이라는 말을 좋아하셨다"며 "아마 나눔이라는 말이 보여주는 수평적인 모습이 마음에 드셨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이런 활동을 하면서도 법정스님은 도움을 주고도 얼굴이나 이름을 알리지 않는 무상보시(無相布施)의 원칙을 일평생 철저히 지켰다. 이 때문에 기부 활동을 비롯한 스님의 선행은 '맑고향기롭게' 쪽에서도 다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변 이사는 "옛날 양(梁)나라 무제(武帝)가 불교를 위해 했던 일을 자랑하며 자신의 공덕이 얼마나 되는지 묻자 달마대사가 무공덕(無功德)이라고 답했다는 일화가 있다"며 "스님께서도 '내가 무얼 했노라고 얼굴을 내밀면 보시가 아니라 거래'라고 늘 강조하셨다"고 전했다.
하지만 그는 "몇 겹의 종이로 향(香)을 싸도 향기가 배어 나오는 것은 막을 수 없듯이 법정스님이 쌓은 덕도 차차 알려지리라 생각한다"며 "'맑고향기롭게'를 통해서 하신 부분은 지극히 적은 부분이라고 알고 있다"고 전했다.
실제로 '맑고향기롭게'는 1994년부터 매년 4000~5000만원을 '맑고향기롭게 길상화 장학금'으로 책정하고, 형편이 어려운 중ㆍ고교 학생 30여명을 선발해 돕고 있지만, 누가 얼마나 기부를 했는지는 밝히지 않는다. 이 가운데 상당 부분이 법정스님의 기부액이라고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맑고향기롭게'를 통하지 않은 기부 활동도 상당했을 것으로 보인다. '무소유'를 비롯한 법정스님의 인세 수입은 10억원이 넘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각 출판사에서는 이들 인세가 장학금 등에 쓰였을 것을 추측한다.
변 이사는 "스님께 장학금을 받아서 석사와 박사 공부를 한 사람이 있다고 들었다"고 말했고, 출판사 마음의숲의 고세규 대표도 "스님께서 일본 유학생에게 많은 돈을 학비로 대줬다는 소식을 한 문인에게 들은 적이 있다"고 말을 보탰다.
하지만 변 이사와 '맑고향기롭게' 사무국 측은 "스님의 뜻에 어긋난다"며 법정스님이 한 기부와 선행을 구체적으로 밝히기를 한사코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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