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의 제국’<1>모든길은 페르시아로 통한다


독수리의 날개,염소의 뿔,사자의 얼굴을 지닌 이 상상의 동물은 세계의 중심에서 세계를 호령했던 페르시아의 위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페르시아 다리우스 1세의 궁전이었던 페르세폴리스 궁전에서 출토된 것으로,지금은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사진 제공 생각의 나무
만국을 호령하고 만인을 포용하다

 

동아일보가 국립중앙박물관 이란국립박물관 SBS와 공동 주최하고 컬쳐앤아이리더스가 주관하는 특별기획전 ‘황금의 제국 페르시아(The Glory of Persia)’.

 

이 전시는 인류 최초의 세계 제국이었던 페르시아(지금의 이란)의 영광의 역사를 한눈에 조망하는 자리다. 또 실크로드를 통한 고대 페르시아와 한국의 문화 교류 양상을 살펴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이기도 하다. 고대 동서문화교류사에서 로마와 페르시아는 실크로드의 시발점이었고 신라 경주는 실크로드의 종착지였기 때문이다.

 

페르시아는 우리에게 ‘아라비안나이트’의 나라로 잘 알려져 있으나 최근 드라마 ‘대장금’이 시청률 86%를 기록하는 등 이란에 한류 열풍이 불면서 한국과 이란 간 문화 교류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페르시아전은 한국과 이란의 문화 교류의 디딤돌이 될 것으로 보인다.

페르시아의 역사와 문화, 세계사적 의의 등을 소개하는 시리즈를 연재한다.

 

○ 기원전 6세기, 페르시아의 수도 페르세폴리스

 

기원전 6세기 어느 새해 첫날, 페르시아의 수도인 페르세폴리스 왕궁.

낙타를 타고 온 아라비아인, 들소를 몰고 온 간다라인, 전차를 끌고 온 리디아인, 상형문자가 가득한 파피루스를 들고 온 이집트인 등 세계 곳곳에서 온 사신들이 궁전 입구 ‘만국()의 문’ 앞에 줄지어 서 있었다.

서아시아부터 지중해를 건너 이집트에 이르기까지 28개 민족의 사신이 페르시아 다리우스 1세 대왕에게 조공을 바치기 위해 줄을 지어 서 있는 것이다.

사신들의 행렬을 바라보는 다리우스 1세의 표정은 흐뭇했다. 그 뒤로는 1만 명의 정예병으로 구성된 왕의 불사() 친위사수대가 당당하게 도열해 있었다.

그 다음 날, 다리우스 1세는 페르시아의 영광을 과시하기 위해 1만5000명의 왕족을 페르세폴리스 궁전으로 초청해 영광의 향연을 베풀었다.

 

○ 모든 길은 페르세폴리스로 통한다


기원전 525년 페르시아 아케메네스왕조는 아시리아를 격파하고 오리엔트를 통일했다. 페르시아가 로마제국에 앞서 최초의 세계 제국이 되었다.

페르시아의 영토는 지중해와 이집트로부터 서아시아를 지나 인더스 강 유역에 이르렀다.

당시 페르시아의 왕은 다리우스 1세. 그는 사람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가파른 절벽의 바위 위에 승리를 선포하는 글을 새겨 제국의 탄생을 널리 알렸다.

 

그는 제국을 20개 지역으로 나누어 통치했다. 그가 가장 역점을 둔 것은 교통과 유통. 전국 주요 도시를 연결하는 도로를 닦았다. 이 길을 통해 왕의 명령이 들고 났으며 경제와 문화가 오갔다.

그 핵심은 페르시아의 수도인 페르세폴리스였고 그래서 “모든 길은 페르세폴리스로 통한다”는 말이 나왔다.

다리우스 1세는 만국의 왕이 되었다.

이란의 페르세폴리스 궁정 터에 가면 ‘만국의 문’이 지금도 당당히 버티고 서 있다.

주변 민족의 사신들이 조공을 바쳤던 바로 그곳. 페르세폴리스 궁전 건축물의 기둥머리엔 용맹스러운 그리핀(사자의 몸에 독수리의 머리가 달린 신화속의 동물)과 황소 등이 조각되어 있다.

건물의 기둥과 벽에는 당시 주변 민족들의 조공 행렬 모습, 왕의 친위 사수대의 모습을 새긴 부조가 즐비하다.

 

○ 세계사에 길이 남는 불멸의 문화

 

페르시아 아케메네스왕조는 기원전 330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약 200년 동안 세계의 중심이었다.

페르시아가 세계사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포용의 정신.

다리우스 1세를 비롯해 아케메네스왕조의 왕들은 정복한 민족의 지역공동체와 종교, 문화를 존중했다.

페르시아의 지배하에서도 이집트는 파피루스 위에 상형문자를 기록할 수 있었다.

바빌로니아로 쫓겨난 유대인(헤브라이인)들은 그들의 신전을 세울 수 있었다.

 

정복지의 문화는 주요 도로를 통해 페르세폴리스로 들어와 더 멋진 문화로 다시 피어났다.

페르세폴리스 궁전의 화려한 건축은 아시리아의 궁정 건축, 이집트 건축, 바빌로니아 건축이 한데 녹아 새롭게 탄생한 것이다.

페르시아가 약 200년 동안 서아시아와 오리엔트를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은 이 포용정책 덕분이었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미리 보는 ‘페르시아 유물전’▼

 

○ ‘조공하는 사람 부조’

 

22일부터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는 ‘황금의 제국 페르시아’의 출품작 가운데 하나인 ‘조공하는 사람 부조’(사진).

페르시아에 복속된 28개 민족은 페르시아의 수도인 페르세폴리스의 궁전에 와서 다양한 상품을 조공으로 바쳐야 했다.

이러한 조공이 모습을 석회암 석판에 부조로 표현해 페르세폴리스 궁전 건축물의 벽을 장식했던 유물이다.

기원전 6세기 이후 약 200년 동안 오리엔트를 제패했던 페르시아의 세력과 위용이 어느 정도였는지 잘 보여준다.

또한 당시 페르시아 및 오리엔트 생활문화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조공을 바치는 각 민족의 신체적 특징, 의상, 생활 풍속 등이 각각의 부조에 세세히 나타나기 때문이다.

무기, 낙타, 들소, 상형문자가 쓰여 있는 파피루스, 각종 악기 등 부조에 등장하는 조공품도 매우 다양하다.

 

이번 전시엔 조공 모습을 표현한 부조를 비롯해 페르시아 왕을 지켰던 친위사수대의 당당한 모습을 표현한 부조, 페르시아 조로아스터교에서 선과 빛의 신인 아후라 마즈다를 표현한 부조 등 10여 점의 부조가 전시된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영상 취재 : 이훈구 기자
 
 
<2>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옛 페르시아인의 종교 의식을 보여주는 도기. 페르시아가 세계 제국을 건설하기 약400년 전인 기원전 10세기경에 제작된 것으로, 이란의 한 무덤에서 출토됐다. 두 마리의 동물이 조로아스터교에서 말하는 선과 악을, 그 위에 올라탄 사람은 선과 악 사이에서 투쟁하는 인간을 연상시킨다. 이란국립박물관 소장품. 사진 제공 생각의 나무
인간의 ‘자유의지’ 존중… 세계 종교의 모태
 
 
 
《기원전 6세기 오리엔트를 통일하고 약 200년간 세계의 중심이 되었던 페르시아. 그 명성에 걸맞게 페르시아의 종교 사상과 문화 예술도 인류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페르시아인들은 정복지 여러 민족의 정신과 문화를 존중하면서 그것을 하나로 녹여 더 위대한 종교와 문화 예술을 탄생시켰다.
 
다인종 다문화가 살아 숨쉬는 세계 국가의 가능성을 후대에 제시해 준 것이다. 페르시아 제국만이 보여 줄 수 있었던 위대한 업적이다.》
 
 
 
 
○ 자라투스트라(조로아스터)는 이렇게 말했다.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고 외치면서
20세기 서양 철학사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니체의 이 외침은 ‘인간의 자유 의지’를 상징한다.
 
여기서 말하는 자라투스트라는 페르시아의 예언자 조로아스터.
페르시아가 세계 제국이 되었던 기원전 6세기경 조로아스터교를 창시한 인물이다.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가 니체의 철학에 어떻게 영향을 준 것일까.
니체는 왜 조로아스터에 열광한 것일까.
 
조로아스터교는 선과 빛의 신 아후라마즈다와 악과 어둠의 신 아리만의 대결로 세상을 보았다.
개인의 삶이 발전하려면 선과 악 사이에서 끊임없이 투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선악 투쟁의 최후는 불이 심판한다. 불의 제단은 그래서 특별한 숭배의 장소이자 페르시아 종교의 중심이었다.
 
조로아스터와 페르시아인들은 인간이 선과 악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인간의 자유 의지를 중시한 것이다.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아후라마즈다의 편에 서면 최후의 심판 때 천국으로 갈 수 있다고 믿었고 그렇게 되길 기원했다.
 
세상과 삶을 선악의 투쟁으로 보고 동시에 인간의 자유 의지와 도덕성을 존중한 것은 인류의 종교사 지성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니체가 조로아스터에 열광한 것은 바로 그 자유 의지 때문이었다.
 
조로아스터교가 인간의 자유 의지를 존중했다는 점은 종교의 개방성 보편성과 연결된다.
그건 누구나 자신의 뜻에 따라 선을 쟁취할 수 있다는 개방성 보편성을 의미한다.
페르시아의 종교는 페르세폴리스로 통하는 길을 따라 지중해 이집트에서 중앙아시아 인더스 강에 이르는 28개 민족의 땅으로 구석구석 전파되었다.
 
선과 악의 대결, 최후의 심판, 천국과 지옥, 인간의 사후 운명에 대한 관심, 구세주 등 조로아스터교의 기본 정신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불교에 모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조로아스터가 석가 공자 소크라테스 등 기원전 5세기의 성인보다 한 시대를 앞서 살았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다양한 종교의 원형이 되고 시대를 넘어 20세기 니체에게까지 영향을 준 조로아스터교. 그 종교에 담겨 있는 페르시아인들의 정신은 지금도 일상 속에서 살아 숨쉬고 있다.
 
○ 세계 전역에 뻗어 나간 페르시아 예술
 
기원전 5세기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만큼 외국 관습과 문화를 기꺼이 받아들인 나라는 없다”고 말했다.
페르시아가 정복지의 다른 문화에 대한 관용과 융합을 통해 세계적 감각의 독창적 문화를 창조했다는 말이다.
이것은 후일 페르시아 예술과 문화가 인도 유럽뿐 아니라 동아시아까지 세계 전역으로 퍼져 나가는 원동력이 됐다.
 
페르세폴리스, 파사르가다에 등 페르시아 옛 수도의 웅장하고 화려한 건축도 엘람, 이집트, 그리스, 바빌로니아, 에티오피아의 다양한 건축 양식이 혼합되어 탄생한 결과물. 2500여 년 전 페르시아에 이미 ‘글로벌 아트’가 탄생한 셈이다.
이 장엄한 건축 예술은 인도 마우리아 왕조(기원전 317년∼기원전 180년)의 건축과 예술 전통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기원전 330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를 멸망시킨 비운의 사건은 역설적으로 그리스와 페르시아 문화가 융합된 헬레니즘 문화의 기원이 됐다.
 
둥근 천장과 돔으로 구성된 사산조 페르시아(서기 226∼651년)의 궁전 건축은 4세기 아드리아 해 스플리트(크로아티아의 한 지방)의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 10, 11세기 스페인 카탈루냐 교회 건축 등 유럽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기독교인들의 시각에서 보면 ‘이교도’들의 예술이 기독교 신을 모시기 위한 건축에 영감을 준 것이다.
 
유럽뿐 아니다. 아프가니스탄 바미안 석굴사원의 장식, 인도 아잔타 석굴, 중국 투루판 석굴 벽화에서도 사산조 페르시아 왕조 특유의 양식이 나타난다.
우리 땅 경북 경주의 신라 고분에서도 사산조 페르시아의 유리그릇이 발견되었고 일본 나라()의 왕실 보물창고인 쇼소인()에서도 사산조 페르시아의 영향을 받은 직물들이 남아 있다.
 
이처럼 페르시아 제국은 대형 건축물에서 작은 예술품에 이르기까지 많은 예술 분야에 영향을 미쳤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 미리 보는 ‘페르시아 유물전’▼
 
○ BC 10세기 제작 ‘동물 장식 잔’
 
 
 


‘황금의 제국 페르시아’에 선보이는 유물 가운데 하나인 ‘동물 장식 잔’(높이 17.5cm·사진).
 
페르시아가 세계 제국을 건설하기 약 400년 전인 기원전 10세기 무렵 제작된 것이다.
 
이 잔은 금과 은 구리 등이 천연적으로 합금된 상태인 호박금()으로 만들어졌다. 페르시아 즉 지금의 이란에서 많이 산출되는 호박금은 구성 성분의 비율에 따라 색이 다양하게 나타난다.
 
잔은 위쪽 입구(구연부)와 아랫부분에 가는 선으로 끈 모양의 무늬를 정교하게 새겼다. 잔의 위와 아래를 2개의 단으로 나누어 각각 반대 방향으로 행진하는 상상의 동물을 돋을새김 기법으로 표현했다. 잔의 입구 부분이 약간 벌어져 안정감과 세련미를 보여준다.
 
여기 등장하는 네 발 달린 동물은 이마에 뿔이 달린 상상의 동물이다. 신화적 상상력을 가미해 표현한 것으로, 이마의 뿔은 페르시아인의 용맹스러움을 상징한다.
 
잔에 장식된 동물의 표현을 보면 매우 정교하고 화려하며 전체적으로 조형미가 빼어나다. 목을 밑으로 내려 고개를 숙이고 걷는 동물의 모습이 다소 익살스럽지만 잔의 표면에 변화감을 주어 오히려 조형미를 더해 준다. 반대 방향으로 걷고 있는 동물들은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표면 장식에 생동감을 부여한다.
 
이 같은 돋을새김 기법의 잔은 오리엔트를 통일한 아케메네스 페르시아로 계승되어 페르시아 금속공예미술의 한 전형이 되었다.
 
전시는 22일부터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1만 원. 02-6273-4242∼3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영상 취재 : 이훈구 기자
 
 
<3>페르시아인들 경주를 활보하다
 


터번 쓴 서역의 8척 장수, 신라왕릉을 수호
실크로드 따라 골드 러시… 국제도시 경주로
 

용강 고분 서역인 문관상… 관직도 진출한듯

 

경북 경주 시내에서 울산 가는 길의 한적한 도로변에 있는 신라 괘릉(). 8세기 통일신라 원성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곳. 여기 있던 작은 연못에 왕의 유해를 걸어 놓았다고 해서 괘릉이란 이름이 붙었다.

 

그 괘릉에 들어서면 무시무시한 풍모의 페르시아 사내가 떡 하니 버티고 서 있다.

바로 페르시아인 조각상 한 쌍. 8세기 신라왕의 무덤 앞에 어떻게 페르시아인이 조각돼 있는 것일까.

 
○ 신라왕을 지키는 무시무시한 페르시아인
 
당시 신라 경주는 문물이 번창했던 국제도시였다. 그 명성에 걸맞게 멀리는 유럽의 로마, 페르시아에서부터 가깝게는 중국과 일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인종의 외국인들이 드나들었다.
그 흔적을 보여주는 대표 유물이 괘릉의 페르시아 무인상 2구(각 높이 257cm)다.
 
이 주인공이 페르시아인이라는 사실은 얼굴에서 찾아볼 수 있다.
깊숙한 눈, 우뚝 솟은 매부리코 등 전체적인 얼굴 형상이 페르시아풍이다.
이를 흔히 심목고비()라고 한다. 귀 밑에서 턱으로 흐르는 수염 역시 우리 모습이 아니라 페르시아 모습이다.
무늬를 새긴 천으로 곱슬머리를 동여맨 점, 헐렁한 상의에 치마 같은 하의를 걸친 점, 아랍식의 둥근 터번을 쓰고 있는 점 등 복장까지 영락없는 페르시아 계통이다.
 
이들은 무시무시하다. 8척이나 되는 키, 육중한 몸집, 가슴 앞에서 주먹을 불끈 쥐고 있는 오른손, 칼을 힘차게 움켜쥔 왼손이 역동적이고 무섭다.
신라인들이 왕의 무덤을 지키는 무인석의 모델로 페르시아인들을 채택했던 것은 그들의 무시무시한 풍모가 악귀를 쫓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 신라의 관료로 일했던 페르시아인
 
고분에서 출토된 토용(·흙인형)에서도 페르시아인 등 서역인의 모습이 나타난다.
경주 용강동 석실분(8세기)에서 나온 문관상은 홀()을 들고 서 있는 모습. 긴 턱수염과 얼굴 모습이 페르시아인의 풍모다. 그 분위기는 괘릉을 지키는 페르시아 무인석과 사뭇 다르다.
무시무시한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부드럽고 편안한 얼굴이다.
 
홀은 옛 관리들이 왕을 만날 때 손에 쥐는 물건이다. 이 홀을 들고 있다는 것은 1200여년 전 페르시아인들이 그 먼 곳에서부터 경주 땅으로 들어와 신라의 관료로 일했을 가능성을 말해준다.
 
9세기 ‘처용가’의 주인공인 처용도 빼놓을 수 없다.
헌강왕을 따라 경주에 와서 벼슬을 하던 중 어느 날 밤 아내를 범하려는 역신()에게 이 노래를 지어 불렀더니 그 역신이 물러갔다고 하는, 용의 아들 처용. 처용에 관한 조선시대의 기록 등에는 처용의 얼굴은 매우 이국적이었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처용도 페르시아 출신으로 신라 왕실에서 일했던 서역인일 가능성이 높다는 견해도 있다.
 
페르시아인과 서역인이 신라 왕실의 신하로까지 일했다면 경주 땅에 얼마나 많은 페르시아인과 서역인들이 들어왔는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 페르시아인들은 왜 신라에 왔을까
 
일부에서는 페르시아인과 서역인들이 실제로 경주에 들어온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당시 중국의 당나라에 남아 있는 조각이나 그림 등을 통해 페르시아인과 서역인의 이미지를 접하고 그것을 차용해 무인석과 토용을 만들었다는 견해다.
즉 직접 본 것이 아니라 간접적으로 보고 제작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페르시아인들이 실제로 신라에 들어왔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직접 보지 않고선 이렇게 생동감 넘치고 사실적으로 만들 수 없다는 것이다.
 
페르시아가 이슬람화한 뒤인 9세기, 아랍의 지리학자 이븐 쿠르다지바가 쓴 ‘왕국과 도로 총람’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중국의 맨 끝 맞은편에 산이 많고 왕들이 사는 곳이 있는데 바로 신라다.
신라는 금이 많이 나고 기후와 환경이 좋다. 그래서 많은 이슬람교도(페르시아인 포함)가 신라에 정착했다.’
 
이 기록에 따르면 페르시아인과 서역인은 신라의 금을 구하기 위해 먼 길을 마다 않고 실크로드를 거쳐 경주 땅을 찾은 것이다.
그들은 화려한 신라 금관을 탄생시킨 황금의 나라 신라를 찾아 우수한 금속 공예술을 직접 목격했을 것이다. 그 페르시아 사람들 중엔 상인도 있었고 용병도 있었다.
그들이 매일 신라의 수도 경주 거리를 활보했고 신라인들은 그 페르시아인을 모델로 삼아 무인상 등을 제작한 것이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영상 취재 : 이훈구 기자
 
 
<4>구약의 주인공이 되다
 

페르시아 에케메네스 왕조의 크세르크세스 1세 두상. 사진제공 생각의 나무
바사의 은 성서속의 목자였다

기원전 587년 바빌로니아 왕국의 네부카드네자르 2세(느부갓네살)가 유다의 예루살렘 성전을 무너뜨린 뒤 두 차례에 걸쳐 유대인들을 강제로 바빌론으로 끌고 간다. 이 유명한 사건이 ‘바빌론 유수’다.

 

6세기 중엽 바빌로니아를 멸망시킨 바사 제국은 당시 성서의 저자들이 세계를 장악한 초강대국으로 봤을 정도로 강력한 군사력과 수많은 식민지를 자랑했지만 정복지에 대한 정책은 바빌로니아와 전혀 달랐다.

바사 제국의 고레스 왕은 바빌로니아의 유대인 정책을 폐지하고 유대인을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등 정복지 여러 민족의 정신과 문화를 존중한 관용과 융합의 정신을 보였다.

바사가 바로 페르시아다.

고레스 왕은 기원전 6세기 중엽 이란 고원에서 절대 권력을 잡아 페르시아 세계 제국 시대를 연 아케메네스 왕조의 키루스 2세(기원전 585년경∼기원전 529년)다.

페르시아는 기원전 525년 서아시아에서 이집트에 이르는 광대한 오리엔트 땅을 통일했기 때문에 당대 유대인들도 페르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아야 했다.

따라서 구약성서 곳곳에 페르시아와 페르시아 왕들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황금의 제국 페르시아’를 기독교인들이 꼭 둘러봐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 ‘고레스는 나의 목자라…’

 

페르세폴리스 이전 아케메네스 왕조의 첫 번째 수도였던 파사르가다에 평야에 솟아 있는 키루스 2세의 무덤. 키루스 2세는 페르시아를 세계 제국의 반열에 올려 놓은 대왕으로, 구약성서에서는 유대인들의 신앙을 존중한 고레스 대왕으로 등장한다. 사진 제공 생각의 나무
키루스 2세는 ‘고레스 칙령’을 내려 유대인들이 언제든 팔레스타인의 유다로 돌아가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지을 수 있게 했다. 키루스 2세는 유대인의 신앙, 민족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게 해야 유대인들이 페르시아의 통치에 협조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해서 유다로 돌아온 유대인들은 기원전 515년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세웠다(구약성서 느헤미야 2장 9절∼3장 32절).
 

바빌론으로 끌려간 유대인 포로를 격려하기 위해 쓴 구약성서 다니엘서는 아예 키루스 2세가 바빌론을 점령할 때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

구약성서 이사야서에는 하느님이 키루스 2세를 ‘내 목자라 그가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하며’(44장 28절)라는 표현과 ‘여호와께서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은 고레스에게’(45장 1절)라는 표현이 잇달아 나온다.

키루스 2세는 유대인이 아닌데도 이처럼 구약성서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키루스 2세가 유대인의 하느님을 섬기지 않았지만 유대인의 신앙을 보장한 일을 성서 저자들이 높이 샀기 때문이다.

 

○ ‘고레스 칙령’ 발견된 곳은 페르시아의 보물창고

 
유대인에 대한 키루스 2세의 관용을 보여 준 ‘고레스 칙령’이 발견된 곳은 악메다다.
 
그 발견의 사연은 이렇다. 아케메네스 왕조 다리우스 1세 때 유대인들이 성전을 다시 짓던 중 사마리아 주민들의 방해로 성전 재건이 중단될 위기에 처했다.
유대인들은 키루스 2세가 성전 건축을 허락했다며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의 다리우스 1세에게 ‘고레스 칙령’을 찾아줄 것을 부탁한다.
‘악메다 궁성에서 한 두루마리를 찾았으니 거기에 기록하였으되….’(에스라 6장 2절)
 
이 유명한 악메다가 바로 하마단이다.
하마단은 다리우스 1세 시절 페르시아의 제3수도(여름 궁전)이기도 했다.
다리우스 1세는 페르세폴리스를 제1수도로, 수사를 제2수도(겨울 궁전)로 정했다.
하마단은 이란 수도 테헤란에서 서남쪽으로 337km 떨어져 있다.
 
현재까지 옛 궁전의 발굴 작업이 계속되면서 페르시아의 찬란한 문명을 상징하는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다. 아케메네스 왕조의 비문들도 잇달아 발견됐다.
구약성서 에스더서의 주인공인 에스더와 모르드개의 무덤도 있어 성서 고고학적으로도 중요한 곳이다.
 
‘황금의 제국 페르시아’에 선보이는 페르시아 문명 대표 유물 ‘날개 달린 사자 모양 황금 각배(·뿔 모양의 잔)’도 하마단에서 출토됐다.
사자와 염소를 화려하게 장식해 아케메네스 왕조를 대표하는 금제 공예품으로 불리는 ‘황금 단검’도 이곳에서 발견됐다.
 
○ 유대인을 구한 여성의 남편이 페르시아의 왕
 
그러면 하마단에 무덤이 있는 에스더는 누굴까.
 
유대인 여성인 에스더는 기원전 5세기 아하수에로 왕의 신하인 하만이 유대인을 몰살하려는 계획을 세우자 이에 맞서 아하수에로 왕의 비()가 된 뒤 양부()인 모르드개와 함께 하만의 음모로부터 유대인을 구출해 낸 영웅이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아하수에로 왕이 바로 다리우스 1세의 아들인 크세르크세스 1세다. 이집트, 바빌로니아의 반란을 진압하고 그리스와 전쟁을 벌인 주인공이다.
 
하마단에서 서쪽으로 5km 떨어진 아바스아바드 계곡에 다리우스 1세와 크세르크세스 1세의 돌 비문이 있다. 크세르크세스 1세의 비문에는 ‘많은 왕 가운데 뛰어난 왕, 많은 통치자 가운데 뛰어난 통치자, 나는 위대한 왕 크세르크세스다. 왕 중의 왕이며 수많은 거민()이 있는 땅의 왕, 끝없는 경계의 거대한 왕국의 왕 아케메네스의 군주 다리우스의 아들이다’라고 적혀 있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미리 보는 ‘페르시아 유물전’▼
 
○ ‘크세르크세스가 새겨진 황금 잔’
 

‘황금의 제국 페르시아’의 출품작 가운데 하나인 ‘크세르크세스가 새겨진 황금 잔’.
 
좁은 잔 바닥에서 부드럽게 넓어졌다가 입구로 올라오면서 다시 좁아지는 수려한 곡선, 잔 바깥쪽에 돋을새김 기법으로 조각한 여러 가닥의 꽃잎 모양 덕분에 활짝 핀 한 송이 ‘황금 꽃’을 보는 듯하다.
 
잔 입구엔 고대 페르시아어와 바빌로니아어, 엘람어 등 세 개의 언어로 ‘크세르크세스 위대한 왕’이라고 새겨져 있다. 엘람 제국은 기원전 4000년∼기원전 3000년 이란 고원에 정착한 세력이다.
 
‘크세르크세스’는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기원전 559년∼기원전 330년)의 왕인 크세르크세스 1세(기원전 519년경∼기원전 465년)를 지칭한다. 다리우스 1세의 아들인 크세르크세스 1세는 아버지에 이어 페르시아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인물.
 
이 황금 잔처럼 생긴 모양의 술잔을 피알레(phiale)라고 부른다. 고대의 신이나 왕에 대한 의례를 지낼 때 사용했다. 의례 때 음료나 술을 뿔잔에 부어 뿔잔 아래쪽에 난 구멍으로 흘러내리면 피알레로 받아 마시는 것이다.
 
이 황금잔은 크세르크세스 1세를 위한 의식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황금 잔이 출토된 하마단은 아케메네스 왕조의 여름용 궁전이었고 사산조 페르시아가 멸망한 7세기 이후에는 이슬람 세계의 중심 도시로 성장했다.
현재 이란 하마단 주의 주도()이며 옛 이름은 에크바타나(Ecbatana)다. 전시는 22일부터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1만 원. 02-6273-4242∼3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한손에 칼 한손에 코란’은 없다
 입력2008.04.18 03:03

 

《최초의 세계 제국을 건설했던 페르시아(지금의 이란). 그 영광의 역사를 한눈에 조망해 볼 수 있는 특별기획전 ‘황금의 제국 페르시아’(동아일보 국립중앙박물관 SBS 이란국립박물관 공동 주최)가 22일부터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다.
 

이를 계기로 국립중앙박물관은 ‘페르시아 및 이슬람 문화의 이해’를 주제로 특별 강좌를 마련했다. 박물관이 진행하는 ‘은하문화학교’ 강좌의 일환이기도 한 이번 특별 강좌는 16일부터 6월 25일까지 매주 수요일 오후 2시 국립중앙박물관 대강당에서 열린다.

 

이 강좌의 강연 내용을 매주 요약 소개한다.》

 

국립중앙박물관 ‘페르시아’ 특별 강좌… ‘이슬람의 실천 윤리’

 

“이슬람이라고 하면 우리는 흔히 ‘한 손에는 칼, 한 손에는 코란’이라는 말을 떠올립니다.

그런데 이슬람권에 가서 무슬림들에게 이 말을 전하면 그게 무슨 말이냐고 되묻습니다.

이슬람 교리에 이런 말은 없어요.

서구가 이슬람에 대한 편견으로 만든 말이 전해진 겁니다.”

 

강사의 말에 청중들은 지금껏 잘못 알고 있었던 사실을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16일 오후 2시 국립중앙박물관 교육관 대강당. ‘이슬람의 실천윤리’를 주제로 한 김정명 한국외국어대 교수의 강연에 400개의 객석을 가득 메운 청중들은 감탄사와 웃음을 쏟아내며 뜨겁게 호응했다. 강연 내용을 메모하는 모습도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김 교수는 “인구 증가율이 가장 높은 종교인 이슬람이 머지않아 인구수 기준으로 세계 제1의 종교가 될 것”이라면서

“세계 인구의 30%를 차지하게 될 우리의 이웃, 무슬림을 언제까지 테러리스트로만 볼 것인가”라고 청중들에게 물었다.

이어 이슬람을 제대로 이해하자는 취지로 이슬람의 기원, 이슬람권의 문화 등 이슬람에 대한 전반적인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청중들은 이슬람이 기독교와 뿌리를 같이한다는 김 교수의 설명에 큰 관심을 보였다.

 


▼영상 취재 : 이훈구 기자

 

“성경에도 나오는 아브라함은 후처인 하갈과의 사이에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이슬람 경전인 코란에 따르면 하갈은 이스마엘을 데리고 집을 떠나 현재 사우디아라비아에 있는 메카에 도착합니다.

이슬람을 창시한 마호메트는 이스마엘의 후손이지요. 그래서 무슬림도 기독교도와 마찬가지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김 교수는 “이슬람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다’는 의미, 무슬림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라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이슬람권에선 국가가 나서서 다른 종교의 신자들을 핍박한 적이 없다는 역사에서 알 수 있듯 이슬람은 다른 종교에 대해 매우 관대하다”며

이슬람에 대한 오해와 편견이 서구 중심의 역사에서 비롯됐다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한 손에는 칼, 한 손에는 코란’이란 말은 십자군 전쟁 때 아랍권 사람들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면서 유래한 말이라는 것.

 

모로코에서 공부한 김 교수는 자신의 경험담을 곁들여가며 예배, 종교세 등 이슬람의 5가지 실천윤리를 소개했다.

 

“무슬림은 하루 5번 메카를 향해 예배를 하는데 이슬람권 호텔에 가면 메카 쪽을 표시하는 화살표가 그려져 있기도 합니다.

무슬림은 소득의 2.5%를 종교세(자카트)로 냅니다. 과거 중동의 동방기독교도들이 이슬람으로 많이 개종했는데 10분의 1을 내는 기독교의 십일조보다 이슬람의 종교세가 싸다는 점도 개종의 이유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이어 김 교수가 “낮 동안 금식을 해야 하는 라마단 기간에 어떤 동네에선 오전 3시가 되면 ‘좀 있으면 날이 밝으니 어서 일어나 한 끼 더 먹으라’는 뜻에서 북을 울리기도 한다”고 경험담을 전하자 폭소가 터져 나왔다.

 

이날 참석한 김종국(72) 씨는 “강연을 들으면서 이슬람에 대한 오해가 참 많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면서 “강연 덕분에 페르시아 유물 전시회에 더 호기심이 생겼다”고 말했다.

금동근 기자 gold@donga.com

 

전시 안내

▽일시=22일∼8월 31일(매주 월요일 휴관)

▽장소=서울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

▽관람료=일반 1만 원, 학생 9000원, 어린이 8000원(5월 5일까지는 50% 할인)

▽문의=02-793-2080, www.persia2008.com


▼영상 취재 : 이훈구 기자
출처 : keiti
글쓴이 : 세발까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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