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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블루·화이트칼라 아닌 ‘뉴칼라’가 4차 산업혁명 이끈다

 
데이비드 래퍼 IBM 아태·중국 사회공헌 총괄 
데이비드 래퍼 IBM 아태·중국 사회공헌 총괄은 “학생들은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연구개발하는 데 익숙해져야 한다”며 “이를 위해 교육방식부터 달라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진 한국IBM]

데이비드 래퍼 IBM 아태·중국 사회공헌 총괄은 “학생들은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연구개발하는 데 익숙해져야 한다”며 “이를 위해 교육방식부터 달라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진 한국IBM]

“더 이상 4년제 대학 졸업장은 필요 없습니다. 인공지능(AI)과 정보기술(IT) 능력을 갖춘 실무자를 길러 내야 합니다.”
 

IBM 임직원 3분의 1은 뉴칼라
학위 있는지 없는지는 중요 안 해
과학기술에 친숙한지가 더 중요
‘P테크 학교’ 세워 인재 양성
6학년제로 교과서 없이 실무교육
현장 투입했을 때 일할 수 있어야
인공지능 ‘왓슨’ 교사들 도와
학습·토론 주제, 교육방식 등 최적화
교육의 질 업그레이드할 수 있을 것

지난해 11월 지니 로메티 IBM 최고경영자(CEO)는 당시 대통령 당선인 신분이었던 도널드 트럼프에게 이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과감한 주장이 담긴 이 서한은 많은 화제를 낳았다. 당시 IT 기업인들과의 회동을 앞두고 있던 트럼프에게 로메티는 “AI·데이터 사이언스부터 실무교육까지 병행하는 새로운 학교를 미국 전역에 100곳가량 만들겠으니 트럼프 당신이 도와줘야 한다”고 당당하게 요구했다. 로메티는 공식석상에서 발언 기회가 주어질 때면 “새로운 교육방식으로 양성된 ‘뉴칼라(new collar)’ 인재가 앞으로의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움직일 것”이라고 반복해 강조한다.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AI 컴퓨터 ‘왓슨’을 개발한 기업의 CEO는 왜 이런 주장을 할까. ‘뉴칼라’는 어떤 인재를 뜻할까. 지난 10일 데이비드 래퍼 IBM 아태·중국 사회공헌 총괄을 한국IBM 사무실에서 만나 ‘뉴칼라’에 대한 IBM의 생각을 들어봤다.
 
래퍼는 “인공지능과 빅데이터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세상에서 블루칼라(생산직 등 노동자)와 화이트칼라(전문 사무직)의 역할은 갈수록 미미해진다는 게 IBM의 생각”이라며 말문을 열었다. 이어 “뉴칼라는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연구개발하는 능력이 뛰어난 계급인데 이들이 미래 세상을 이끌어 간다는 것이 IBM과 로메티의 생각”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4차 산업혁명에서 대부분의 노동은 자동화되고 세상은 자동화로 필요 없어진 사람들에게 새로운 종류의 기술을 익히라고 요구하지만 학생들이 그런 기술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이어 “성공적인 사회와 기업을 만들고 싶은 사람들이라면 응당 생각해 봐야 하는 문제”라며 “다른 분야도 아니고 교육만큼은 IBM은 물론 모든 기업과 정부가 어마어마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래퍼는 IBM이 가지고 있는 최신 기술과 전문성을 사회 문제에 적용하고 최대한 많은 사람이 IBM이 만든 기술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다.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주요 국가에 ‘뉴칼라’에 대해 알리고 관련 교육 프로그램을 보급·확대하는 것도 그의 역할이다. 호주 출신인 그는 호주 국무총리실, 뉴욕 비영리 기업 등에서 도시·교육·건강 등의 문제를 해결해 온 공공영역 전문가다. 그는 이번 방한기간 중 서울교대에서 석사·박사 과정에 재학 중인 대학원생과 현직 교사들을 만나 ‘4차 산업혁명과 미래 인재’를 주제로 강의를 하기도 했다.
자료 : IBM

자료 : IBM

 
그는 미국 IBM 본사에서 근무하는 임직원 3분의 1은 ‘뉴칼라’에 해당한다고 소개했다. 직원 중 3분의 1은 2년제 대학 학위를 가지고 있다. 세계 최고 IT 기업이지만 채용할 때 학력 자체가 중요한 기준은 아니기 때문이다. 래퍼는 “학위가 있는지 없는지, 학위가 없는 사람이 회사에서 몇 %를 차지하는지는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고 말했다. 그는 “얼마나 많은 직원이 STEM(과학·기술·엔지니어링·수학) 분야를 친숙하게 느끼며 일하는지, 그리고 세상의 변화에 얼마만큼 적응하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했다. 또 “‘뉴칼라’라는 말은 IBM이 처음 사용한 용어지만 특정 기업·국가에만 해당하는 단어가 아닌 보편적인 용어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자료 : IBM

자료 : IBM

실제 IBM은 ‘뉴칼라’ 인재를 직접 길러 내기 위한 학교를 세웠다. IBM은 뉴욕시 교육청·뉴욕시립대와 손잡고 2011년 브루클린에 ‘P테크 학교’를 처음 선보였다. P테크 학교에는 9학년(우리나라로 치면 중학교 3학년)부터 입학할 수 있다. 6년짜리 커리큘럼으로 구성돼 있지만 성적이 뛰어나면 더 빨리 졸업할 수 있다. 졸업생들은 2년제 대학 졸업자들에게 수여하는 준학사 학위를 받는다. 설립된 지 6년이 안 됐지만 이미 40여 명의 조기 졸업생이 나왔다. 이제 갓 20대에 접어든 졸업생 8명은 현재 IBM에서 일하고 있다.
 
P테크 학교에는 기존 학교에서 배우던 교과서가 없다. 대신 P테크 학생들은 기초이론부터 실무교육까지 모두 배운다. 여름방학 때는 인턴십 과정도 있다. 학교는 학생과 파트너 회사의 직원을 연결해 주고 진로를 상담할 수 있게 해 준다. P테크 학교는 현재 미국 뉴욕·일리노이·코네티컷 등 전역에 55개로 늘어났다. IBM은 올해 연말까지 미국은 물론 호주·모로코 등에도 P테크 학교를 설립할 계획이다.
 
미국 뉴욕 브루클린의 P테크 학교를 2013년 11월 버락 오바마 당시 미국 대통령이 방문했다. 등록금이 전액 무료인 이 학교는 저소득층·유색 인종 학생들을 우선적으로 받는다. [사진 백악관 홈페이지]

미국 뉴욕 브루클린의 P테크 학교를 2013년 11월 버락 오바마 당시 미국 대통령이 방문했다. 등록금이 전액 무료인 이 학교는 저소득층·유색 인종 학생들을 우선적으로 받는다. [사진 백악관 홈페이지]

눈에 띄는 점은 재학생 96%가 흑인이나 히스패닉 등 소수인종이라는 것이다. 또 학생들 중 70% 이상이 급식비를 감면받거나 지원받아야 하는 저소득층 가정의 자녀들이다. 이들은 기술이 발전할 때마다 사회에서 뒤처질 확률이 가장 높은 계층이기도 하다. 로봇이 인간 직업을 대체할 때면 소득이 낮은 단순 노동자들이 가장 큰 피해자가 되기 때문이다. 2013년 브루클린의 P테크 학교를 방문한 버락 오바마 당시 미국 대통령은 이 학교를 “학생들이 중산층으로 진입할 수 있게 도와주는 티켓”이라며 극찬했다.
 
래퍼는 “학교는 학생이 곧장 현장에 투입됐을 때도 일할 수 있을 정도의 교육을 수행해야 한다”며 “그런 정도의 커리큘럼을 만들기 위해서는 기업과 정부가 손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뉴칼라’ 인재들에게는 앞으로 무궁무진한 기회가 주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IBM의 가장 중요한 철학은 ‘회사가, 그리고 직원이 그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예 학교를 새로 만들어 기술을 전수하고 인재를 배출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근본적이고도 종합적인 대책이다. 래퍼는 “이 같은 과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IBM의 기술과 인프라를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일석이조”라고 강조했다.
 
CNN·타임 등 외신들도 첫 졸업생을 배출하기 시작한 P테크 학교의 성과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글로벌 기업이라면 으레 행하는 범위의 사회공헌 활동을 뛰어넘었다”는 칭찬이 쏟아진다.
 
IBM은 AI 컴퓨터 ‘왓슨’을 이용해 교사들을 돕기도 한다. 왓슨이 지난해부터 미국 학교에서 선보이고 있는 ‘티처 어드바이저 위드 왓슨’은 교사들이 가장 영양가 있는 교육자료에 접근할 수 있도록 돕는다. ▶학습 주제 ▶원하는 교육방식 ▶문제 유형 ▶토론 주제 등을 선택하면 ‘왓슨’이 교사에게 최적화된 교수방법을 알려 준다. 스스로 학습(딥러닝)하는 왓슨 때문에 교사가 이 시스템을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더 적합한 양질의 솔루션이 나올 수 있다. 아직은 수학교육에만 한정돼 있다. 래퍼는 “미국에서 현재 교사 800명을 대상으로 시범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며 “번역 과정을 거쳐 한국을 포함해 전 세계 국가로 확산되면 머지않아 지구촌 각 교실에서 ‘왓슨’이 선생님을 도와 교육의 질을 크게 업그레이드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S BOX] 일주일에 3시간은 뭔가 만드는 ‘메이커 교육’도
창립 50주년을 맞은 한국IBM도 ‘뉴칼라’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다양한 교수법과 교육 프로그램을 도입하고 있다.
 
IBM이 2014년 초 처음 선보인 교사 연수 프로그램 ‘과학에 도전하는 선생님’은 교사들이 교육현장에서 바로 활용할 수 있는 실용적인 교육자료들을 제공한다. 교과서로 배우는 자연과학 내용에만 한정되어 있지 않다. ‘로봇 팔을 만드는 방법’부터 ‘생산 공정 라인’까지 현장에서 반드시 필요한 주제에 대해 자료를 제공하고 수업방식도 안내한다.
 
학생들이 영상을 시청한 뒤 게임이나 토론을 통해 해당 주제를 함께 고민하도록 만든 시나리오도 있다.
 
이 프로그램은 4차 산업혁명 시대에서 가장 중요한 창의적인 문제 해결 능력과 협업 능력을 키우는 것을 목표로 만들어졌다. 한국IBM은 국내 교육 실정에 맞게 번역·재구성해 국내 초·중등 교사들을 대상으로 이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다. 3000명의 중고생이 ‘과학에 도전하는 선생님’을 통해 현장감 넘치는 교육을 받았다.
 
IBM은 2016년부터 ‘창의 융합형 미래 인재’를 기르기 위한 ‘메이커 교육’도 실시하고 있다. 2006년 미국에서 처음 등장한 메이커 교육은 무언가를 만드는 경험을 통해 창의적 사고력과 자신감을 키우는 동시에 과학기술·수학·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갖도록 유도하는 새로운 교육방식이다.
 
메이커 교육의 1차적인 목표는 ‘일주일에 3 시간은 메이커가 될 자질을 기르자’는 것이다. 교사들도 학생들에게 틀에 박힌 커리큘럼을 제공하지 않고 학생들이 직접 설정한 목표를 달성할 수 있게 도와준다.
 
학생들은 ‘자주 부러지는 안경테를 고정하는 장치를 만들고 싶다’거나 ‘노트북 마우스와 어댑터를 분실하지 않게 한데 보관할 수 있는 부품을 만들겠다’와 같은 주제를 설정할 수 있다.
하선영 기자 dynamic@joongang.co.kr

 




  •  이정동-정재승 ‘미래 토크’
    4차 산업혁명과 ‘축적의 시간’의 진화
(※ 클릭하시면 확대됩니다.)
2015년 9월, 서울대 공대 교수 26명이 함께 참여한 책 <축적의 시간>이 출간됐다. 한국 산업의 새로운 도전으로 “‘창조적 축적’ 지향의 패러다임”을 주창한 이 책은 반도체·조선·정보통신·자동차·해양플랜트·소프트웨어 등 여러 산업 현장과 사회 각 분야에서 폭넓게 읽혔다. 이정동(50) 서울대 교수(산업공학과, 기술경영·정책)가 이 프로젝트의 총괄자이자 대표 집필자였다. 이 책의 독자 중 한 명인 정재승(45) 카이스트(KAIST) 교수(바이오및뇌공학)는 뇌공학 분야를 이끄는 대표 학자로서, 뇌-기계 인터페이스, 뇌기반 인공지능 전문가이다. 두 사람이 지난 13일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 회의실에서 만났다. 둘 사이의 대화를 이끈 고민은 ‘2017년 이후, 축적의 시간의 진화’다./편집자 주

자신의 생물학적 한계와 조건을 뛰어넘으려는 인간의 공상은 인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다. 20세기 자동차와 컴퓨터에 이어 인공지능 로봇이 이제 ‘세상을 바꾼 기계’로 등장하고 있다. 미래는 항상 황홀한 멋진 신세계도 실망스러운 묵시록도 아니다. 갑작스럽고 어질어질하게 닥쳐온 제4차 산업혁명 물결에 야릇한 흥분과 경이, 불안과 충격이 교차한다. 산업과 기업, 사회, 사고방식의 관행…기존의 견고한 것들이 모두 인공지능 속에 녹아내린다. 19세기 초 러다이트가 기계와 싸우려했듯 로봇과 싸워야하는 어두운 여정에 우리가 들어서 있는지도 모른다. 이정동 교수가 먼저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이달 초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국제소비자가전전시회(CES)를 기사로 다룬 몇몇 언론이 ‘4차 산업혁명, 한국은 안 보인다’는 제목을 달았다.”

“4차산업혁명, 한국은 없다?” 정재승 교수는 지난해 말에, 틀림없이 곧 ‘4차산업혁명은 없다, 가짜다, 허구다’는 등의 얘기가 나올 거라 봤다며 말을 받았다. “사람들의 행동과 생각을 데이터로 얼마나 축적할 수 있는지가 4차 산업혁명의 관건이다. 우리는, 바로 시작하고 싶어도 데이터를 얻을 수 있는 사물인터넷(IoT)이나 페이스북 등 소셜미디어 플랫폼 기반이 많지 않다. 데이터 자체가 없고, 있는 정보도 사용하려 들면 개인정보보호법에 막혀 비식별 데이터마저도 서비스에 사용하기가 용이하지 않다. 빅데이터가 중요하다고 말했지만 키우지 않았고, 사물의 인터넷이 세상을 바꿀 거라 했지만 표준화 노력도 없었고 제품도 나오지 않았다. 전통 제조업이 정보기술(IT)을 받아들여 제품·서비스를 혁신하는 게 4차 산업혁명의 근간이다. 핵심 부품이나 물성 중심의 기존 사고에서 데이터라는 만질 수 없는 것이 중요하다는 쪽으로 제조업의 사고가 바뀌고 훈련돼야 한다. 물성과 데이터 이 둘의 결합·조합은 어려운 일이지만 서로 스며들어 성공하면 가히 혁명적인 변화가 산업 전반에 나타날 것이다. 해외 성공사례를 기다렸다가 뒤쫓아가지 않고 모든 가능성을 먼저 시도해보는 기업이 그 혁명을 이끌 것이다.”

정재승 카이스트 교수(왼쪽·바이오 및 뇌공학)와 이정동 서울대 공대 교수(오른쪽·산업공학과, 기술경영·정책)가 13일 오전 서울 공덕동 한겨레신문사 사옥에서 만나 4차 산업혁명 등 우리 앞에 펼쳐질 변화에 관해 이야기했다. 둘은 상호신뢰의 구축과 실패를 포함한 다양한 경험의 축적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정재승 카이스트 교수(왼쪽·바이오 및 뇌공학)와 이정동 서울대 공대 교수(오른쪽·산업공학과, 기술경영·정책)가 13일 오전 서울 공덕동 한겨레신문사 사옥에서 만나 4차 산업혁명 등 우리 앞에 펼쳐질 변화에 관해 이야기했다. 둘은 상호신뢰의 구축과 실패를 포함한 다양한 경험의 축적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이정동 서울대 공대 교수
“‘빅데이터’의 맨틀이 우리가 사는
‘경제의 지각판’ 뒤흔들어
생산자와 소비자, 생산과 서비스
경계가 무너지는 혼돈의 시대”

정재승 카이스트 교수
“사물인터넷, 빅데이터…
아무것도 키우지 않았다
‘나중에 쫓아가면 그만’이라는
한국의 전략 더는 안 통해”

무엇을 축적해야 할까? 두 교수 모두 ‘도전적 시행착오 경험’이라고 말한다. “4차 산업혁명을 물리적으로 뒷받침하는 센서 등 첨단의 부품소재를 육성하는 것도, 아키텍터(원천 개념설계 역량을 가진 사람)를 기르고, 빅데이터를 축적하는 것도 결국 수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꾸준히 시행착오를 해보도록 밀어주고 독려하는 쪽으로 사고방식과 사회적 인프라가 함께 바뀌어야 가능하다. 이것이 축적의 시간을 통한 진화 방향이어야 한다. 비유하자면, 4차 산업혁명 시대 빅데이터가 맨틀이고, 과거의 제조·유통 비즈니스 영역과 기존 관행적 사유는 그 위에 떠 있는 지각판들이다. 저 아래 꿈틀거리고 있는 거대한 맨틀이 지금 지각 판을 온통 뒤흔들고 있다. 생산에서 애프터서비스까지 비즈니스 영역의 경계가 무너져 누가 생산자이고 소비자인지도 모호해지고 있다. 경계를 정의하기도 어려우니 자꾸 경계 바깥으로 나가봐야 한다. 과거의 성공 경험과 전문가의 조언만으로는 안된다. 자꾸 변경을 더듬는 시도를 하고, 또 그 도전경험이 소실되지 않도록 꼼꼼히 축적해야 한다. 동전을 놓고 그 위에 종이를 얹어 긁어서 100원짜리인지 500원짜리인지 알아가는 아이들의 놀이와 같다. 많이 시도해본 사람일수록 더 빨리 정체를 파악할 수 있다. 중국의 선전이나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그런 시도가 엄청나게 이루어지고 있다. 꼭 성공하리라는 보장 없이 이런 저런 황당한 시도도 해본다. 우리는 이런 시도와 시행착오가 없다. 이것이 ‘4차 산업혁명, 한국은 없다’는 말이 나온 불안감의 정체일 것이다.”(이정동)

우리 제조업이 불안해하며 우물쭈물하고 갈팡질팡하는 사이 다른 나라들은 박차고 앞서나가고 있다. “명확한 비즈니스모델이 없는 상황에서도 미국은 과감하게 엄청난 투자를 하고 있는 반면, 우리는 누군가 데이터를 활용해 돈 버는 것을 보고나면 뒤쫓아가는 문화다. 뒤쫓아가는 기업은, 더 투자해도 데이터가 부족해 성과를 얻을 수가 없다. 수많은 시행착오 등 제조업과 아이티의 융합 경험을 축적하는 시간의 양에서 성패가 판가름될 것이다.”(정재승)

구글이 개발하는 자율주행차. 앞으로는 생산업과 서비스업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한겨레> 자료사진
구글이 개발하는 자율주행차. 앞으로는 생산업과 서비스업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한겨레> 자료사진
“이번은 다르다” 4차 산업혁명이 ‘이해할 수 없는 신세계’는 아니다. 기존 디지털정보화 시대나 지식기반경제와는 어떤 의미에서 단절이고 또 연속인 걸까? “디지털정보화는 ‘정보’가 중요한 가치를 만들어내는 비트의 시대다. 그 뒤에, 정보가 아니라 맥락을 갖고 사용되는 ‘지식’이 중요해졌다. 이제 맥락적 지식과 정보가 ‘물질’과 결합하고 있다. 다시 말해 아톰세계(사물인터넷)인 오프라인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이 고스란히 다시 비트세계(빅데이터)인 온라인으로 전환되고 있다. 아톰과 비트가 일치되는 세상(가상현실·증강현실·로봇)에선 인공지능이 맞춤형 예측 서비스를 제공할 것이다.”(정재승)

지금 목도하는 제4차 산업혁명은 흔히 “이번은 다르다”와 가공할 위력의 ‘파괴적 혁신’으로 수식되곤 한다. 그 범위와 규모, 속도에서 예상치 못할 정도로 우리의 삶 세계를 완전히 바꿔놓을 격변 속에 들어서 있다는 것이다. “4차 산업혁명의 핵심 경쟁력은 생산에서든 소비에서든 새로운 플랫폼을 설계하는 능력에 있다. 우리는 플랫폼의 틀이 되는 소프트웨어 아키텍처역량이 부족하다. 뿐만 아니라 물리적으로 4차 산업혁명의 플랫폼을 뒷받침하는 센서나 액추에이터(Actuator·동력을 이용해 시스템을 움직이거나 제어하는 기계장치) 등 핵심부품소재 역량도 약하다. 플랫폼 설계나 이것을 뒷받침하는 부품소재, 양쪽이 다 취약하기 때문에 다른 나라보다 4차 산업혁명의 충격이 더 클 것이다.”(이정동)

이 교수는 4차 산업혁명은 우리산업의 체력 중 어디가 강하고 약한지를 테스트 하는 시험장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체력은 산업 경쟁력뿐 아니라 사회, 그리고 사고방식에서의 체력도 포함한다. “4차 산업혁명 시기에는 소수의 전문가가 하향식으로 혁신을 주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혁신의 주체가 되는 ‘혁신의 분권화’가 일어나야 한다. 우리 산업과 사회를 지배해온 추격형 기성 패러다임은 분권화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체제다.”

혁명은 혼란의 끝자락에서 우리는 똑똑한 인공지능과 로봇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기계가 똑똑해진다 한들 기계로부터 답을 찾을 수는 없다. 인간은 스스로 운명을 결정한다. “세계경제포럼 창립자인 클라우스 슈바프는 앞으로 미래는 큰 물고기가 아니라 빠른 물고기가 느린 물고기를 잡아먹는 시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4차 산업혁명은 허구이며, 단지 융합과 결합뿐이고 새롭게 등장한 기술이 없다고, 이것을 ‘혁명’이라고 부를 수 있냐고 말한다. 또 아무리 아이티가 발전해도 제조업의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고 얘기한다. 실제로 인공지능은 아직 대단한 성취를 이루지는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현존하는 기술들을 융합하는 그 자체로도 큰 의미가 있다. 사물인터넷을 통해 데이터를 모으고 클라우드로 빅데이터를 모은 뒤 인공지능으로 분석하면 완전히 새로운 서비스와 비즈니스를 만들어낼 수 있다. 우리가 열심히 쫓아가면 5년 안에 성과가 나올 수 있다고 본다. 다만 실제로 시도해보고 경험 속에 축적되지 않는 한 쉽게 만들어질 수 없다.”(정재승)

정 교수는 우리가 ‘혁명의 전야’를 통과하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다. “기존처럼 분야가 정해지고 해결해야 할 고객서비스 문제도 명확하면 그 분야의 지식을 동원해 안정적 혁신이 가능하다. 그런 상태에서는 혁명이 일어나지 않고, 그저 퍼즐 맞추는 정도의 혁신이 일어날 뿐이다. 이와 달리 4차 산업혁명기는, 분야는 명확한데 제공해야 할 서비스가 불분명하거나 혹은 그 반대인 시기다. 이런 혼란은 외부 지식과 기술을 활용하는 오픈이노베이션으로 돌파할 수 있다. 지금은 아이티와 제조업 간 결합에서 분야도 뒤엉킨 채 총망라되고, 해결해야 할 제품·서비스가 뭔지도 잘 모른 채 가능성만 무한히 열려 있는 총체적 난국 상황이다. 혁명은 이 혼란의 끝자락에서 일어난다. 우리는 지금 ‘혁명의 전야’를 경험하고 있는 중이고, 필요한 건 축적의 시간이다. 산업화 시기에 필요했던 축적의 시간이 아니라, 사람에게 경험이 축적되는 ‘인간 중심의 새로운 축적의 시간’ 말이다.”

‘밀도있는 축적’ “서구에서 시작된 4차 산업혁명 물결은, 앞으로 이런 식의 제품·서비스들이 가능해지는구나, 제조업이 아이티 기술을 받아들여야하는구나 생각이 들고, 국가는 거기에 맞게 규제 개혁에 나서게 만드는, 우리 사회에 좋은 충격이 될 것이다. 하지만 전통 제조업이 아이티의 문화를 이해하고 존중하고 받아들이면서 스스로 바뀌어가는 데는 혼란이 수반될 것이다. 완전히 다른 사람들, 다른 분위기, 다른 문화이기 때문이다. 종의 다양성이 생태계 건강의 토대이듯 수많은 개인들의 다양한 실패·시행착오·성공의 축적된 경험, 그것이 곧 사회 전체의 ‘밀도 있는 축적’을 만들어내는 시간이 될 것이다.”(정재승)

정 교수는 지금 상황은 애플 아이폰이 등장하던 무렵과 유사하다고 말했다. “2008년 무렵 미국에서 아이폰이 나오고 2010년 한국에 들어올 때 아이폰 기술이래봤자 컴퓨터 기술을 핸드폰이라는 통신장비에 넣은 것일 뿐이고 ‘찻잔 속 태풍’에 그칠 거라고 사람들이 예측했다. 그러나 기술적으로 특별하지 않았어도 그 후 얼마나 큰 삶의 변화를 만들어냈는가? 조금 빨리 준비한 회사는 리더가 됐고 그때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회사는 여전히 고전하고 있다. 앞으로 사람과 사람을 넘어 물건과 물건이 서로 연결되는 시대에는 다시 새로운 기회가 엄청난 조합으로 일어날 것이다.”

물론 4차 산업혁명이 갑자기 툭 튀어나온 건 아니다. “기술 선진국들은 30여년 전부터 인터넷과 정보기술을 결합한 이(e-)비즈니스와 자동화를 시작했다. 물리적 투자뿐 아니라 기업 조직과 관행,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식과 문화도 거기에 맞춰 여러 가지로 바꾸어 보는 시행착오를 꾸준히 축적했다. 그러면서 지금 우리에게 다가온 4차 산업혁명의 전망을 성숙시켜 왔다. 반면에 한국 산업과 사회는 지난 30년간 선진 기술을 벤치마킹하거나 최종 애플리케이션을 빨리 받아들여 가시적 성과만 가져오라고 요구하면서 성장해왔다. 물리적 변화는 받아들이지만 생각의 변화가 수반되지 못해서 지금의 4차 산업혁명을 어떻게 해석하고 도전에 나서야 할지 두렵고 또 복잡하다. 시키면 시키는대로 하는 풍토가 아니라 도그마를 회의하고 더 좋은 가설이 나오면 항상 인정할 수 있는 ‘열린 사회’라야 4차 산업혁명에 대응하는 밀도 있는 축적이 가능하다. 정부출연연구소의 연구·개발 프로젝트 성공률이 중 99.5%에 이르고, 안전한 면세점 사업에 사활을 걸고, 공시족이 수만명에 이르는 현상은 우리 사회가 정상적이지 않다는 신호다. 조심스럽게 조율된 실험, 성공이 보장된 시도만 해서는 안 된다. 혁신은, 여기 저기서 실패도 해보면서 말랑말랑하게 이뤄지는 것이다. 그것을 뒷받침하는 사회체제가 긴요하다.”(이정동)

운송 네트워크 서비스의 창립자 트래비스 캘러닉이 지난 19일 인도 뭄바이에서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연하고 있다.  뭄바이/로이터
운송 네트워크 서비스의 창립자 트래비스 캘러닉이 지난 19일 인도 뭄바이에서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연하고 있다. 뭄바이/로이터
기술계급사회 도래 어느 시대이든 인간은 살아가면서 늘 가치와 윤리의 문제를 고민하기 마련이다. 기술이 바꿔놓을 사회경제 지형의 변화를 둘러싸고 우리는 이것이 ‘좋은 사회’인지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게 될 것이다. “인공지능시대의 주인공은 고도로 다양한 시행착오를 경험해본 아키텍트급 사람들일 것이다. 이들은 상상조차 어려운 막대한 보수를 받게 될 것이고, 반대로 로봇에 일자리를 위협받는 사람들과의 격차는 크게 벌어질 것이다. 아키텍처를 장악한 선진국과 그렇지 못한 개도국의 격차도 더 크게 벌어질 것이다.”(이정동)

그러나 인간은 자신이 만든 기술이 불평등을 심화시키면 항의 한마디 없이 적응하며 온순하게 있을 리 없다. 이를 교정하고 자신의 경제적 운명을 피하기 위해 투표 등으로 저항하고, 기술을 후퇴·중단시킬 지혜와 능력도 갖고 있다. “거북이도 생각보다 빨리 헤엄친다는 말이 있다. 인간과 사회는 새로운 기술변화에 접해서 생각보다 잘 적응할 것이다. 인공지능이 싱귤래리티(인공지능이 빠른 자기계발 사이클 속에 비약 발전해 인간지능을 넘어 도약하는 기점)를 넘어 인간을 지배할 것이라는 걱정은 기우다. 인간사회가 정치적 사고역량을 발휘해 자본·기계와 인간의 분배 몫을 공평하게 나누며 기계와 공존하는 방식을 어떻게든 찾아갈 것이다.”(이정동)

인공지능이 불평등을 심화시킬 거라는 두려움의 진원지로 정 교수는 거대 자본력을 꼽았다. “인공지능이 탑재된 로봇이 인간 고용보다 생산 효율적이므로 자본은 노동을 점차 대체해갈 것이다. 자본을 많이 가진 기업일수록 인공지능 혜택을 더 보게 될 것이고, 양극화가 심화될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인공지능 기술을 잘 알고 활용하면서 전체 시스템을 장악하는 사람이 그렇지 못한 채 결과값만 받아들이는 사람을 이용하고 지배하는 ‘기술계급사회’가 도래할 가능성도 있다. 전 세계적으로 인공지능 기술을 독점·선점하고 있는 구글·페이스북·아마존 같은 회사가 다른 기업과 지구촌 다른 지역을 장악하는 현상이 지금보다 심화될 수 있다.”(정재승)

‘라이프롱 러닝’ 1965년 미 항공우주국(NASA) 보고서는 “인간은 비숙련 노동으로 대량 생산할 수 있는, 70kg의 가장 저렴하고 비선형인 만능 컴퓨터”라고 했다. 인간의 본성은, 로봇이나 인공지능에만 전적으로 의존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어쩌면 인간은 어떤 기계보다 훨씬 더 민첩하고 재치 있으며, 상대적으로 가볍고 에너지 효율적이다. “가만히 놔두면 불평등·양극화는 가속화할 것이다. 인공지능 기계·로봇과 싸우는 사람의 경우 백년 인생 삶에서 자기 몸과 지적능력이 인공지능과 경쟁할 수 있는 시기는 30년이 채 안될 것이다. 인공지능을 앞세운 자본을 당해내기 쉽지 않다. 나머지 시간을 어떻게 경쟁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10대에 공교육, 스무살 무렵 4년간 학교 다니며 배운 것으로 남은 인생 시기를 버텨온 게 지금의 교육시스템이다. 이제 자기 스스로 문제를 찾고 해결하고, 맥락을 이해하면서 기존의 지식을 비판적으로 인식하는 능력이 핵심 역량으로 대두하고 있다. 살아오며 각각의 현장에서 무엇이 문제인지 경험해온 40~50대에게 꼭 필요한 능력이다. 20대에 배운 지식만으로는 이제 남은 생을 감당할 수 없다.”(정재승) 기업이 로봇을 고용할 때 로봇세를 물려 그 재원으로 인간의 존엄 유지와 경쟁력 향상에 재사용할 필요가 있다고 정 교수는 덧붙였다.

최근 발행된 영국 주간 <이코노미스트> 표지 기사가 ‘라이프롱 러닝(Lifelong learning)’이다. “이 주간지 표지만화를 보면 할아버지도 책가방을 메고 책을 보고 있다. 교육기관에서의 학습뿐 아니라 공식·비공식을 합쳐 사회 전체가 얼마나 학습하느냐는 총량이 중요하다. 우리의 학습역량이 다른 개발도상국 중에 매우 뛰어나다고 하지만 그건 교과서를 암기하고, 선도자를 벤치마킹하는 추격능력이었다. 이제 스스로 시행착오를 해보고, 그 경험을 축적하면서 학습해나가는 역량이 필요하다. 특정 기간동안 교과서를 배우는 ‘교육’개념에서 평생 스스로 축적해나가는 ‘학습’개념으로 전면 전환해야 하고, ‘학습사회’가 중요한 키워드가 되어야 한다. 우리 산업의 프레임도 자본 중심에서 사람 중심으로 바뀌어야 한다. 진정한 창의를 위해서도 사람을 귀하여 여기고, 사람에게 투자하는 패러다임 전환이 일어나야 한다. 아키텍트가 주인공이 되는 4차 산업혁명에 대비하기 위해서도 그렇다.”(이정동)

지난해 5월 스위스 제네바에 설치된 기본소득 광고 위를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다. 스위스는 기본소득 도입 여부를 국민투표에 부쳤으나 부결됐다.  제네바/로이터
지난해 5월 스위스 제네바에 설치된 기본소득 광고 위를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다. 스위스는 기본소득 도입 여부를 국민투표에 부쳤으나 부결됐다. 제네바/로이터
신뢰와 책임 정 교수도 축적의 결과물은 사람에게 쌓인다고 강조했다. ”단순 지식을 활용한 낮은 수준의 분석은 인공지능으로 대체할 수 있지만, 인간은 더 높은 수준의 창의성을 발휘한다. 그러려면 몰입해야 한다. 자기 스스로 계획해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성패에 연연하지 않고 ‘실패 가능성이 있으나 성공하면 대박’인 일에 도전할 수 있도록 도와야 몰입이 가능하다. 시스템이 학습·축적하는 것이 아니고 문제 해결은 사람이 하는 것이므로, 사람에게 경험이라는 형태로 축적되어야 한다. 사람을, 나태할까봐 의심하고 관리 대상으로 보고 실패 책임을 묻고 누군가 희생양을 찾아온 기성 조직문화와 결별해야 한다. 물건을 팔고 나서도 소비자 고객의 제품 사용과정을 끊임없이 모니터링하면서 기민하게 반응하고 책임을 다해야 한다. 즉 애프터서비스가 아니라 온고잉(on-going) 서비스의 시대가 될 것이다. 신뢰와 책임의 두 바퀴가 없으면 4차 산업혁명의 맞춤형 서비스는 허상이 돼버린다. 책임감은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도 필요한 자세다.”(정재승)

“축적의 시간을 견뎌내는데 가장 중요한 사회문화적 토양은 신뢰와 공감이다. 신뢰의 기반, 문제 제기하고 틀린 답을 제시해도 혼나지 않는다는 믿음에서부터 모든 축적이 시작된다. 과거 추격형 발전 모형에서는 신뢰 기반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정해진 매뉴얼대로 빠르게 벤치마킹해 실수 없이 일을 빨리 해내면 눈에 보이는 결과를 단기적으로 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은 달라졌다. 산업영역 사이의 변경이 불확실하고 더듬으며 가야하는 상황이다. 변경을 탐색하다가 실패해도 죽지 않는다는 신뢰가 필요하다. 종이 한 장의 약속, 법과 제도가 잘 지켜진다는 신뢰도 중요한 사회 인프라다.”(이정동)

초연결사회는 사람들 사이의 광범위한 협력과 관계맺기에 기반해 있다. 기업뿐 아니라 소비자의 책임도 중요한 시대이다. “4차 산업혁명은 어디가 또 누가 생산자이고 소비자인지 경계가 모호한 세계다. 예컨대 공유택시서비스 ‘우버’만 보더라도 생산자와 소비자 간의 상호 신뢰가 있어야 가능하다. 말하자면 사회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의 책임과 신뢰가 중요하다.”(이정동)

“작년 ‘촛불정국’은 우리가 신뢰 기반과 정부·기업의 책임감, 합리적 의사결정이 완벽하게 무너진 사회에 살고 있다는 것을 폭로하며,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했다. 4차 산업혁명을 따라 잡는데 있어 우리 사회의 결핍이 무엇인지 여실히 경험한 해였다. 예컨대 정부 주도형 정보보안 규제 아래서 기업은 그것만 충족만 하면 책임을 다했다고 여겨왔다. 그 뒤의 책임은 정부가 져온 셈이다. 정보보안 책임을 기업에 맡기고 제대로 관리 못하면 모든 책임을 기업이 지게 하자. 그래야만 기업마다 데이터 보안투자를 많이 하게 될 것이고 그것을 통해 신뢰하고 고객 맞춤형 비식별 데이터를 제공할 수 있다. 개인의 경우는 대담하게 위험을 무릅쓸 수 있는 능력을 갖출 수 있도록 사회가 (기본소득 등을 통해)실패로부터의 회복탄력성을 도와야 한다. 그래서 사회안전망이 무엇보다 중요하다.”(정재승)

익숙한, 낯선 “지금은 이미 본 듯한 기시감(deja vu)의 시대가 아니라 낯선 미시감(jamais vu)의 시대다.” 이정동 교수는 모든 것이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것인데도 낯설게 보이는 시대에 들어섰다고 말했다. “별 문제없이 우리는 지난 40여 년간 선진국의 설계도를 기초로 투자하고 매뉴얼대로 생산하고 수출하며 빠르게, 또 실수 없이 성장해 왔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이게 아닌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느끼게 되었다. 지금의 우리 사회의 정치적 혼란도 4차 산업혁명의 물결도 우리 마음을 흔들며 스스로를 돌아보게 한다. 지금까지 한국 산업과 사회를 발전시켜온 우리의 열정은 인정하되 그것을 구현하는 방식은 이제 바꿔야 한다.”

이 교수는 또 ‘다양한 축적, 다양한 측정지표’를 강조했다. “모든 사람이 같은 분야에서 같은 목표를 향해가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시도와 아이디어들을 관용하고 품어주며 축적해가야 한다. 심지어 개인의 삶을 규정하는 지표도 다양해져야 한다. 가수·학자·기업인으로서 각각 다양한 목표를 추구하면서모두가 자기 분야에서 ‘심층’을 가질 때 새로운 것이 축적될 수 있다.” 특히 4차 산업혁명 시대는 변경이 흐릿하고 융합적 성격이 강하다. “정말 가치 있는 융합은 각 분야에서 초절정의 고수들, 소위 프로들이 모여야 만들어진다. 여기서 프로는 특정 전문기능을 가진 사람이기보다 자기가 붙들고 있는 문제를 놓지 않고 끝까지 가 본 사람을 의미한다. 엔지니어든 가수든 누구든지 자기분야에서 깊이를 축적한 프로들이 다양하게 많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융합도 잘 일어난다. 이것도 ‘조금’ 알고 저것도 ‘조금’ 아는 사람들끼리는 절대 독창적인 융합을 만들어낼 수 없다. 단적으로, 각 부서를 돌며 순환보직하면서 정기 승진하는 기업조직 형태에서는 프로들이 성장하지 못하고, 융합이 생기지 않는다.”(이정동)

이 교수는 또 ‘사일로’(Silo·외부와 소통하지 않는 조직 부서)에 갇혀서는 융합이 일어날 수 없다고 말했다. “매뉴얼대로 하는 과거의 실행중심 발전단계에서는 사일로 조직문화가 각자 자기 역할만 빠르게 실행하고 그것들을 다 모으면 되는 효율적인 방식이었다. 그러나 경계를 돌파해 나가는 데 있어서는 수평적이고 개방적인 문화, 다양성을 인정하는 문화가 꼭 필요하다. 그래야 괴짜형 고수급 프로들이 생존할 수 있고, 사일로를 건너뛰는 창의적 융합이 탄생한다.”

이 대목에서 정 교수는 두뇌의 기초체력, 즉 ‘기초지력’ 얘기를 꺼냈다. “기술이 급속도로 변화하면서 2, 3년 후 미래를 예측하기조차 어렵다. 4차 산업혁명 대응의 단기적 전략과 적응력은, 역설적으로 장기 관점의 기초 실력에서 나온다. 세상이 어떻게 바뀌든 핵심 경쟁력은 사람들의 생각하는 능력, 즉 기초지력에 있다. 논리적 추론과 맥락적 이해, 비판적 사고, 창의적 사고 등을 바탕으로 한 문제해결 능력, 깊이 있는 자아성찰과 철학적 사고 말이다. 단기적 시야를 넘어, 기초지력이 훌륭해야 변화에 휩쓸려가지 않고 역동적인 상황 변화에 잘 대응한다.”

‘마음의 감옥’ 언제나 문제는 기계 자체가 아니라, 그 기계를 어떤 목적에 또 어떤 방향과 속도로 사용하는지에 있다. “4차 산업혁명의 빠른 파괴와 혁신 물결 속에 개별 기업의 성공과 실패의 신진대사 역시 더 빨라지게 될 것이다. 한국 사회 전체를 하나의 생태계로 간주하고, 생태계 전체의 활력을 중시하는 시각을 가져야 한다. 대담한 기업가적 시도가 더 많이 일어나고, 그 중에서 우수한 것이 살아남고 네트워킹하면서, 시행착오의 교훈을 꾸준히 축적해가야 한다. 이러한 진화 메커니즘이 살아 있으면 한국사회 생태계는 더 건강해지고, 장기 생존하게 된다.”(이정동)

이 교수는 ‘빨리 빨리’와 ‘실수 없이’, ‘메뉴얼대로’를 바탕으로 성장하는 동안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마음의 감옥’처럼 자리잡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4차 산업혁명을 맞이해서 창의와 도전이 중요하다고 외치면서도, 여전히 ‘실수 없이 빠르게 창의적이 되라’라고 요구한다. 이 모순을 극복하는 것이 지금의 시대정신이고, 이 변화를 이끌 축적 지향의 리더십이 필요하다. 시행착오는 자기 혼자 감당하기에는 부담이 너무 크다. 실패는 전형적인 공공재 성격을 갖고 있다. 이런 공공재 가치의 확산·축적을 위한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내고 이끌 리더십이 절실하다.”

정 교수는 리더십 이외에 ‘세계시민 의식’, 즉 지구인으로서의 사고와 기여를 강조했다. “한국형 알파고, 한국형 인공지능 왓슨을 만들겠다는 선언은 부질없는 일이다. 실리콘밸리에 세 명이 모여 조그만 스타트업을 만들어도 그들은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유용할 제품을 최전선의 최적화된 기술로 성취해 제공하려 애쓴다. 일국 사람들한테 잘 맞는 서비스를 제공하려는 게 아니다. 그것을 통해 세계 시민의식을 갖고 전 기구에 기여하려 한다. 그래야만 가장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 가장 의미 있게 사용할 수 있다. 우리는 전지구인들이 처한 글로벌 이슈에 관심 갖고, 지구 환경에 기여해야 한다. 비전과 도전의 사이즈를 키워야 한다. 한국형에만 만족하면 5천만 명의 시장을 벗어날 수 없고 다른 나라의 맹공을 받는 일이 벌어지게 된다. 전지구적 문제를 세계인과 함께 고민하고 국가와 민족을 넘어 전지구적 문제를 해결해 인류에 기여하려는 사고가 필요하다.”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2017-01-23 10:33

수정 :2017-01-23 18:38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cience/science_general/779819.html#csidxaf8977bdd043cc28743e881deca005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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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해운업 침체로 업황 부진 이어져…FLNG 선박 세계 최초 건조 등 기술 경쟁력은 여전히 우위

한국은 국가 경제의 대부분을 대외무역, 특히 수출에 의존하는 수출 주도형 국가다. 국민총소득(GNI)을 전체 무역액으로 나눈 ‘무역의존도’는 이미 100%(2013년 기준 103%)를 넘어섰다. 수출이 국가 경제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뜻이다. 1970년대 중화학공업 육성 전략을 택한 이후 한국 수출의 일등 공신은 조선 산업이었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가깝게는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한국 조선은 중국에 1위 자리를 내주며 비틀거리고 있다. 최악의 부진을 기록했던 2014년의 악몽을 넘어 올해는 턴어라운드할 수 있을까.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 전경.


196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국내 인구 규모는 2000만 명대에 불과했다. 내수 시장을 기반으로 성장을 논하기에는 국가 전체의 경제 규모가 너무 작았다. 우리 경제가 수출과 무역에 눈을 돌리게 된 배경이다. 그 사이 1960년 3200만 달러에 불과했던 대외 수출액은 2014년 현재 5731억 달러에 이르게 됐고 무역 흑자만 474억 달러를 기록할 정도로 눈부시게 성장했다.

국가 주도의 수출 주도형 시스템은 전략 산업 육성을 통해 이뤄졌다. 조선·반도체·자동차·전기전자·철강·반도체 같은 오늘날 한국의 주력 산업은 거의 대부분이 조세 감면, 독점 체제, 막대한 재정 지원 등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성장했다. 1970년대 들어 채택된 중화학공업 육성 전략은 당시 세계적인 고도성장과 맞물려 한국 경제의 고도화를 이룩하는 결정적 배경이 됐다. 이러한 중화학공업 발전의 핵심이 바로 조선 산업이었다.

1960년대가 조선 산업 발전의 기반을 닦은 시기였다면 1970년대부터 한국의 조선 산업은 비로소 후진성을 탈피하며 국제적인 규모로 성장하게 된다. 1973년에 완공된 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를 필두로 1975년엔 현대미포조선이, 1978년에는 대한조선공사(이후 대우그룹에 매각)의 옥포 제1도크가 완공됐다. 1977년에는 삼성그룹이 우진조선소를 인수해 2년 후인 1979년 1도크를 완공했다. 특히 1973년에 현대중공업이 건조한 26만 톤급의 초대형 유조선(VLCC)은 우리 조선 산업이 세계시장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신호탄으로 기록되고 있다.

1976년만 해도 조선 산업의 매출액과 부가가치가 전체 제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대에 불과했다. 하지만 정부의 강력한 육성 정책과 기업의 혁신을 발판으로 1985년 들어선 매출 3조3000억 원, 부가가치 1조3000억 원으로 전체 제조업 비중 가운데 4%를 차지할 정도가 됐다. 매년 30% 이상의 고속 성장을 유지했던 결과다. 1980년대 들어 오일쇼크 등으로 잠시 주춤했던 국제 조선 경기는 1990년대가 시작되면서 다시 한 번 호황을 맞았다. 당시 한국은 1990년에 이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조선전문위원회(WP6)에 가입하며 새로운 조선 강국으로 떠오른 상태였다. 1993년에는 엔화 강세 등의 영향으로 비로소 일본을 제치며 사상 최대 수주 실적을 올렸다. 수주량 기준으로 세계시장 점유율이 36.7%를 기록했는데, 당시 일본의 수주량은 33.3%에 그쳤다.


산업 육성 20년 만에 세계 1위
조선 산업이 수출의 일등 공신으로 떠오르면서 전체 수출에 대한 조선 산업의 영향력도 갈수록 높아졌다. 산업통상자원부 자료에 따르면 국내 조선 산업의 수출 기여도(총수출액을 선박 수출액으로 나눈 값)는 2009년 12.4%에 달했고 2010~2011년에도 10%대를 유지했다.

조선업은 고용 부문에서도 효자 산업이다. 한국은행의 취업유발계수를 보면 조선 산업의 취업유발계수는 12.0이다. 선박 10억 원어치가 팔리면 12명의 새 일자리가 생긴다는 뜻이다. 조선 산업의 취업유발계수는 다른 주력 산업인 반도체(4.3)의 28배, 석유제품(1.3)의 9배에 달한다. 수출의 본령인 외화벌이 면에서도 조선업의 위상이 나타난다. 전체 매출액의 95% 정도가 수출에서 발생하는데, 부품의 국산화율이 91.2%에 달해 외화가득률이 가장 높은 산업으로 꼽힌다. 비슷한 수출 주력 산업인 자동차의 부품 국산화율은 91.2%로 조선업보다 낮다.


효과 자체에 대한 찬반 논쟁을 차치하고라도 조선 산업은 대·중소기업 동반 성장을 통한 ‘낙수효과’가 큰 산업으로도 꼽힌다. 한 개의 대기업에 1000여 개의 중소업체가 협력 생태계를 이루고 있는데, 실제로 수주 대금의 60~70%가 중소 협력 업체에 돌아가고 있다.

국가 주도의 전략적 육성 이후 20여 년 만에 세계 1위에 올라섰고 한국 수출의 젖줄이었던 조선 산업에 위기의 징후가 닥쳐오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들어서다. 특히 중국의 기세가 무서운데, 중국은 이미 2010년부터 건조량에서 한국을 따돌리며 세계 1위에 올라섰고 2012~2013년에는 건조량·수주량·수주잔량 등 3대 지표에서 모두 세계 1위를 차지했다. 영국의 조선·해운 조사 전문 기관인 클락슨의 통계를 보면 2013년 기준으로 한국의 건조 능력은 1600만 CGT(표준 화물선 환산톤)로 세계시장의 29.5%를 차지한데 비해 중국은 무려 39.4%에 달한다. 일본이 16.8%, 유럽이 6.6%로 뒤를 잇는다.


2010년부터 중국과 엎치락뒤치락
세계시장 1위 자리를 중국에 내주면서 현실로 다가온 조선 산업의 위기는 2012년 들어 구체적인 수치로 나타났다. 2011년까지 10%대를 유지했던 조선 산업의 국내 수출 기여도가 7.2%로 떨어진 것. 반도체와 1, 2위를 다퉜던 수출 순위도 2012년 들어 석유제품·반도체·일반 기계 등에 밀리며 6위로 떨어졌다. 2013년 기준으로 건조량 부문 세계 1위였던 현대중공업은 지난해 3조 원이 넘는 사상 최악의 영업 적자를 기록하며 벼랑 끝에 몰린 실정이다.

사실 조선업의 불황은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2008년 미국에서 시작된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세계경제가 침체에 빠지기 시작한 것이 위기의 직접적 원인이기 때문이다. 조선 산업은 해운업의 경기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는다. 경기가 꺾이면서 줄어든 물동량은 해운업의 위축을 가져왔고 세계적 해운 선사들이 신규 조선 발주량을 줄이면서 그 타격을 고스란히 받는 식이다. 대표적인 해운 업황 지표인 발틱운임지수(BDI)는 2008년 5월 20일 1만1793을 정점으로 급락하기 시작해 2012년 2월 3일에는 647로 역사적인 저점을 찍었다. BDI는 1월 현재도 750대에 머물러 있다.

해운업이 침체에 빠지자 선박 발주량도 크게 줄었다. 전 세계 선박 발주량은 2003~2007년 사이에 연평균 5877만 CGT에 달했다. 하지만 금융 위기 이후부터 2013년까지 연평균 3945만 CGT로 급락했다. 또 금융 위기 이전에는 매년 발주량이 건조량을 초과했지만 이후로는 발주량이 건조량에 미치지 못하면서 수주잔량(발주 후 선주에게 인도되기 직전까지의 선박의 양)도 줄어드는 추세다.

작년에도 조선업의 침체는 이어졌다. 2014년 11월 기준으로 전 세계 누적 신조선 수주량은 전년 동기 대비 31% 감소한 3587만 CGT에 그쳤다. 선박 건조량도 감소 추세를 이어 가면서 전년 동기 대비 8.7% 줄어든 3245만 CGT를 기록했다. 2014년 12월 초를 기준으로 한 수주잔량도 연초 대비 2.9% 줄어든 1억1364만 CGT로 집계됐다. 수주잔량은 금융 위기 이후 2013년 들어 처음으로 증가세로 돌아섰지만 2014년에 다시 감소하면서 상승 추세를 이어 가는 데 실패했다.



유일하게 선전한 지표는 신조선가지수(새로 지은 배의 가격으로, 1998년 신조선가를 100으로 봄)다. 2014년 11월 현재 신조선가지수는 139를 기록해 2013년 말에 비해 5.3% 상승했다. 시장을 이끈 건 액화석유가스(LPG)·액화천연가스(LNG) 같은 가스선이다. LPG선은 미국의 셰일 혁명과 타이트 오일 개발로 석유제품 생산이 늘면서 발주가 증가했다. LNG선은 해상 운임이 하향세를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야말 프로젝트(러시아·프랑스·중국 등이 2000억 달러를 투자해 시베리아 야말반도에서 천연가스를 채취하는 사업) 같은 대형 사업 연계 수요와 셰일가스 수출 프로젝트에 대한 기대 수요로 발주량이 많은 상황이다.


삼성중공업이 세계 최초이자 최대 크기로 건조 중인 FLNG 선박 ‘프릴루드호’.


2014년은 LNG선이 그나마 선방
세계적인 업황 불황이 이어진 가운데 국내 조선업도 힘든 시기를 겪고 있다. 국내 기업이 강점을 지니고 있는 고부가가치 선박인 해양 플랜트와 상선 시장이 동반 침체를 겪으며 수주량이 전년에 비해 큰 폭으로 떨어졌다. 2014년 11월까지의 수주량은 전년 동기 대비 35.6% 감소한 1020만 CGT에 그쳤다. 금융 위기 전인 2007년 3000만 CGT를 넘어섰던 것과 비교하면 반 토막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2014년 11월 현재 수주액도 전년 동기 대비 34.5% 감소한 269억5000만 달러에 머물렀다.

선박 종류별로 살펴보면 가스선과 오일탱크선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선종의 수주가 크게 떨어졌다. 특히 고부가가치 선박인 드릴십과 FPSO(부유식 석유 생산·저장 기지)는 단 1척만 수주하는 등 해양 플랜트 선박의 부진이 극심했다. 중국에 비해 높은 기술력을 바탕으로 한 고부가가치 선박 건조 및 고액 수주 전략을 펴왔던 우리 조선 업계에는 그야말로 커다란 타격이 아닐 수 없다. 국제 유가가 급락하면서 연료비를 아낄 수 있는 에코십(친환경 선박) 발주가 세계적으로 줄어든 것도 한국 조선 업계에는 악재로 작용하고 있다. 선사로선 굳이 비싼 돈을 들여 기름값을 아낄 이유가 사라진 것이다.

선박 건조량 역시 감소 추세다. 2014년 11월까지 건조량은 전년 동기 대비 6.3% 감소한 1113만 CGT로 집계됐다. 2012년 이후 이어진 감소 추세가 한풀 꺾였다는 것이 그나마 위안거리다. 수주잔량도 2013년의 증가세를 이어 가지 못했다. 지난해 12월 초 기준 수준잔량은 연초 대비 7% 감소한 3243만 CGT를 기록했다. 건조량은 6% 감소한데 비해 수주량은 35% 이상 감소한 것이 수주잔량이 줄어든 이유다.


초대형 유조선 등 기술 우위 전략 펼쳐야
올해 전망도 밝지는 않다. 한국수출입은행은 ‘2015년 조선·해운 전망’을 통해 올해 수주량이 작년 대비 12% 감소한 950만 CGT, 수주액도 약 14% 줄어든 250억 달러 수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에코십, 해양 플랜트 등 국내 조선사가 강점을 지닌 선종에 대한 투자가 위축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다만 건조량은 2013년 다량 수주의 영향으로 작년 대비 1.7% 증가한 1230만 CGT 수준으로 전망된다. 신규 수준 부진으로 수주잔량은 작년 말 대비 8.7% 감소할 전망이다.

전체적인 업황 부진 속에서도 그나마 다행스러운 전망은 초대형 컨테이너선, VLCC(초대형 유조선), FLNG(부유식 액화천연가스 설비) 등의 전망이 비교적 밝다는 데 있다. 한국 조선 산업은 장기 불황에도 불구하고 몇몇 대표 선종들의 활약으로 버텨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13년 초반까지는 해양 플랜트가 그랬고 2013년에는 MR탱커 등의 제품 운반선, 이후 초대형 상선의 세대교체를 가져 왔던 에코십, 2014년의 LNG선 등이 주인공들이었다.



FSRU는 ‘부유식 액화천연가스 저장·재기화 설비’를 말한다. 바다에서 시추한 천연가스를 바다 위에 떠 있는 FSRU에서 영하 136도로 냉각해 저장했다가 다시 이를 기체로 바꿔 LNG선에 옮겨 싣는 배다. FLNG는 여기에 더해 직접 가스 채굴까지 가능한 배를 말한다. FLNG는 기존 LNG 설비에 비해 생산 단가를 30% 정도 절감할 수 있다. 이러한 이점 덕분에 세계시장의 수요가 증가하고 있다. 강동진 HMC투자증권 연구원은 보고서를 통해 “발주만 된다면 우리 조선 기업이 독식할 수 있을 만큼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다”고 말했다. FLNG는 보통 한 건의 수주액이 3조 원을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반 운송용 컨테이너선 수십 대와 맞먹는 가격이다.

삼성중공업은 2011년 영국의 에너지 기업인 로열더치쉘(Shell)로부터 세계 최초이자 최대의 FLNG 선박인 ‘프릴루드호’ 수주를 받았다. 2013년 11월 성공적으로 진수를 마친 프릴루드호는 현재 거제조선소 안벽에 정박해 상부 플랜트 모듈과 선체 내부 LNG 화물창 제작 등의 공정을 진행 중이다. 프릴루드호는 길이 488m, 폭 74m, 높이 110m에 달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선박으로, 화물을 가득 채우면 배수량이 60만 톤에 달한다. 항공모함 6척에 해당하는 무게다.


글 장진원 기자 jjw@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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톡톡 튀는 아이디어로 성공 신화 쓴다

차별성·경영마인드·성장성 뛰어나…콘텐츠 개발 아이템 각광

톡톡 튀는 아이디어와 도전 정신으로 순항하는 ‘주목받는’ 벤처기업은 어디일까. 국내 벤처 투자사로 손꼽히는 프라이머·본엔젤스벤처파트너스·동문파트너즈 등의 전문 투자자들에게 물었다. 이들은 총 11곳(중복 추천)의 벤처기업을 추천했다. 차별화된 사업 아이디어, 올바른 경영 마인드, 재능, 미래 성장성 등을 추천 기준으로 삼았다.

추천받은 11곳 중 6곳이 콘텐츠 생산 업체다. 이벤트 기획 및 홍보(온오프믹스), 엔터테인먼트 콘텐츠(마이돌), 화장품 성분 정보(버드뷰), 고객 분석(조이앤컴퍼니), 모바일 게임(피닉스 게임즈), 취업 준비생을 위한 기업 정보(잡플래닛) 등이다. 반면 호텔 예약(데일리호텔), 무료 통화(브릿지 모바일), 배달 서비스(매쉬코리아) 등의 서비스 중심 업체도 있다. 오프라인 매장을 온라인·모바일로 옮겨온 수공예품 시장(백패커), 자동차 온라인 수리 시장(카닥)도 추천받았다.



마켓
카닥_이준노 대표

작년 1월 다음커뮤니케이션에서 사내 벤처로 독립한 카닥은 자동차 수리 시장에 신선한 충격을 줬다. ‘가장 쉽고 편한 자동차 수리’를 콘셉트로 모바일과 웹에서 자동차 수리 견적을 해결하는 애플리케이션(앱) ‘카닥’을 개발한 것. 자동차 수리가 필요한 파손 부위의 사진 3장과 차량 정보 등을 입력하기만 하면 평균 10분 안에 업체별 5~6개의 견적이 나온다. 업체별 수리비를 비교할 수도 있다. 모든 수리 결과는 정식 수리 센터와 동일한 퀄리티를 제공하되 합리적 가격을 제공하는 게 목표다. 수리 내역별 금액을 상세하게 남기기 때문에 투명한 수리 견적을 보장받는다. 이용객은 현재(1월) 25만 명을 넘어섰다. “향후 자동차 수리 시장의 온라인화는 계속 가속될 것이고 초기에 시작하고 자리 매김한 카닥의 확고부동한 1위로서의 성과가 기대된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추천 사유다.


백패커_김동환 대표
일명 ‘스타 앱 제조기’라고 불리는 앱 개발 업체다. ‘잘 기획하고 잘 마케팅한다’고 소문난 이들이 만든 앱 중 3분의 1이 한국 iOS 유료 앱 랭킹 상위에 항상 오를 정도다. 굿슬립·푸시단어장 등이 히트 앱으로 꼽힌다. 이들이 유료 앱을 고수하는 이유가 있다. 바로 회사의 시드머니를 마련하기 위해서다. 최근에는 이렇게 모은 시드머니로 모바일 쇼핑 앱을 개발했다. 수공예 작가와 소비자를 잇는 플랫폼 ‘아이디어스 닷미’다. “미국의 유명 수공예 쇼핑몰 ‘에스티’와 비슷한 사업 모델을 갖췄고 현재 국내에 비교할 만한 회사가 없어 눈여겨볼만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서비스
데일리호텔_신인식 대표

데일리호텔은 전국 각지에 있는 호텔의 ‘당일 빈방’을 찾아 예약을 돕는 모바일 서비스다. 무엇보다 고급 호텔을 정상가의 50% 이상 할인된 가격에 이용할 수 있어 이용자들의 만족도가 높다. 호텔 역시 이들의 서비스가 반갑다. 데일리호텔을 통해 많은 할인율을 제공해서라도 당일 빈방을 판매하는 것이 호텔로서는 이익이기 때문이다. 다수의 전문가들은 “관련 당사자 모두에게 이익을 제공해 주는 혁신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좋은 비즈니스 모델”이라고 추천 사유를 꼽았다. 데일리호텔은 모바일 서비스로 초기에 시장을 선점해 지난해부터 꾸준히 성장세를 이어 가고 있다.


브릿지 모바일_최정우 대표
브릿지 모바일이 ‘브릿지 콜’이라는 스마트폰 ‘무료 통화 서비스’에 도전했다. 기존 무료 통화 서비스를 시행하는 카카오톡·라인·바이버 등과 달리 전화를 걸 때 앱에 따로 접속할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발신자와 수신자 모두 브릿지 콜 앱을 내려 받으면 평소처럼 통화 버튼을 눌러 와이파이 모드에서 무료로 통화할 수 있다. 국내 전화뿐만 아니라 국제전화에도 적용된다. 실제 브릿지 콜은 한국을 비롯해 인도·필리핀·말레이시아 등 동남아시아에 진출했다. 누적 다운로드 수는 이미 200만을 넘어섰고 올 2분기 중국 시장에 진출할 전망이다. 현재 출시된 앱은 안드로이드용이고 아이폰용은 올 3월 출시된다.


매쉬코리아_유정범 대표
배달의 신이 등장했다. 배달 서비스가 없던 식당의 음식뿐만 아니라 꽃·의류·전자제품·차(茶)까지 배달하는 앱 ‘부탁해’다. 이 앱을 개발한 매쉬코리아는 ‘부탁해’에 기존 배달 서비스 앱과 다른 배달 시스템을 시도했다. ‘무인화 자동 배차 시스템’이다. 콜센터 직원을 통하지 않고 배달이 필요한 상점과 배달 운전사들을 직접 연결해 이용객들이 빠르게 배달 서비스를 받을 수 있게 했다. 예를 들어 상점에서 주문이 들어오면 대기 중인 배달 운전사들에게 알림이 가고 운전사가 배정되면 최적화된 경로로 소비자에게 물건을 전달하는 식이다. 기존의 배달 앱과 달리 상점이 내야 하는 과도한 수수료 부담도 줄였다. 기존에 배달이 불가능하던 외식 프랜차이즈 업체와 홈쇼핑, 해외 직구 사이트 등과의 B2B 거래도 늘고 있다.



콘텐츠
온오프믹스_양준철 대표

‘모임 중개소’라고 하면 맞을까. 온오프믹스는 강좌·콘퍼런스·콘서트·동문회·소모임 등 모든 이벤트를 쉽고 간편하게 만들고 알리는 이벤트 홍보·관리 플랫폼 ‘온오프믹스’를 개발했다. 여기에 이벤트에 참여하길 원하는 이들에게는 다양한 이벤트 정보를 제공하는 검색 사이트의 역할도 한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모임 플랫폼 서비스를 시작했고 현재 40만 명 이상의 회원을 확보한 국내 최대 규모의 모임 플랫폼으로 자리매김했다. 현재까지 수행한 모임만 해도 3만여 건이다. 매월 평균 1200개 정도의 이벤트가 개설된다.


마이돌_이진열 대표
마이돌은 한류 붐을 이끄는 ‘아이돌’에서 사업 아이템을 얻었다. 일종의 스마트폰 잠금 화면 서비스로, 스마트폰 첫 화면을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돌 사진으로 꾸미고 스타로부터 가상의 메시지를 받아 보는 서비스다. 엑소의 팬이라고 가정했을 때 좋아하는 멤버로부터 아침에 “잘 잤어?”라는 문자를 받는 식이다. 내가 좋아하는 스타의 스케줄·동영상·기사도 확인할 수 있다. 그 덕분에 중국을 포함한 아시아 시장에서 인기가 폭발적이다. “국내보다 해외에서의 성과가 기대되고 한류를 이용한 정보기술(IT) 비즈니스는 잠재력이 크며 확장성 측면에서 향후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많다”는 게 투자자들의 의견이다.


버드뷰_이웅 대표
버드뷰는 화장품 성분 정보 서비스 ‘화해’를 개발한 스타트업이다. 화해에는 1273개 화장품 브랜드와 3만1190개의 제품 성분이 등록돼 있다. 인터넷 쇼핑몰 등에서 화장품을 사기 전에 화해 앱을 통해 제품이 내 피부에 맞는지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사의 수분 크림이 민감성 피부에는 트러블을 일으킬 위험이 있다고 알리는 것이다. 화장품별 사용 후기도 제공한다. 이미 여성들 사이에서 대규모 화장품 커뮤니티로 성장했다. 현재 가입자가 80만 명, 화장품 카테고리 1위 앱을 1년간 수성 중이다. “국내 화장품 온라인 쇼핑 규모는 2조 원으로 시장이 크며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 진출을 통한 서비스 확대도 기대된다”는 게 투자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조이코퍼레이션_최시원 대표
오프라인 리테일 매장을 위한 빅 테이터 분석 서비스 벤처기업이다. 실내외에 설치된 스마트폰 와이파이·블루투스 신호를 분석해 매장 인근 유동인구와 방문객 수, 방문율, 체류 시간, 체류 전환율, 구매 전환율, 재방문율 등을 집계해 ‘워크 인사이트’를 제공한다. 온라인에서 방문자를 분석하는 트래킹 솔루션 ‘구글 애널리틱스’의 오프라인 버전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2014년 1월 론칭 이후 국내외 400여 개 매장에서 사용 중이다. 아시아 지역 최초 기술로 일본·중국·대만 등 7개국으로 빠르게 확장 중이다. 조이코퍼레이션을 추천한 투자자들은 “국내 유사한 경쟁 서비스가 아직 없는 데다 오프라인 매장들의 내방 고객 데이터 분석 니즈가 갈수록 높아져 해외시장 진출에도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고 설명했다.


잡플래닛_황희승·윤신근 공동대표
2014년 가장 주목받았던 스타트업 중 하나로 꼽힌다. 황희승·윤신근 공동대표가 새롭게 창업한 회사라는 것만으로도 이슈가 됐던 이곳은 미국의 글래스도어와 유사한 서비스로 취업 준비생들에게 회사의 세밀한 정보들을 제공한다. 재직했던 직원이 직접 정보를 올리기 때문에 신뢰성이 높다는 게 최대 강점이다. 국내뿐만 아니라 아시아 시장 선점을 목표로 하고 있다.


피닉스게임즈_김정훈·신봉건 공동대표
모바일 게임회사 피닉스게임즈가 내놓는 게임을 보면 센스가 넘친다. 사회생활의 고됨을 풍자를 통해 그려낸 ‘치고박고무한상사’, 당구·축구·야구·농구·골프 등 다양한 스포츠를 지인들과 함께 즐길 수 있는 ‘명랑운동회’가 그것이다. 내놓는 게임마다 인기 게임 상위권에 진입하기 일쑤다. 투자를 받지 않고 4명의 적은 인원으로 시작했던 피닉스게임즈는 현재 55명의 규모의 중소 게임사로 성장했다. 지난해에는 매출 60억 원을 달성했다. ‘내공 있는 게임 회사’라는 게 추천인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김보람 기자 borami@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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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신문]서울 강남구 도곡동에 사는 중견기업 사장 A(72)씨는 칠순이 넘은 나이에도 남들에게 '혈색이 좋다'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지금까지 감기 등 잔병 치레도 거의 안 했다. 체력 역시 웬만한 40대에 뒤지지 않는다. 헬스 등 운동도 열심히 하지만 그만의 건강 관리 비법은 따로 있다. 줄기세포 주사를 정기적으로 맞는 것이다.

그는 한두 달에 한 번씩 부인과 함께 일본 오사카행 비행기를 탄다. 입국장에 도착하자마자 줄기세포 클리닉 관계자가 미리 잡아 놓은 택시를 탄다. 10분 정도 이동해 클리닉에 도착한 뒤 병실 침대에 누워 배양줄기세포 주사를 맞는다. 1억~2억개 정도의 세포를 투여하는 데 한 시간 정도 걸린다. 해외로 이동해야 하지만 시간 부담은 크지 않다. 오전 9시 비행기를 타고 출국했다가 오후 4~5시 비행기로 귀국하는 당일치기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가 줄기세포 주사를 처음 맞은 것은 4년 전. 친구를 통해 줄기세포 주사 알선 업체를 소개받았다. 한 차례 맞을 때마다 드는 비용은 비행기 요금을 포함해 500만~1000만원 정도다. 배양줄기세포의 개수에 따라 비용이 달라진다. A씨 부부는 지금까지 30번 정도 주사를 맞았다. 최근 4년간 부부는 줄기세포 주사 맞는 데만 5억원 가까이 썼다. 하지만 돈이 아깝지 않다. 관절염이 심했던 부인은 주사를 몇 번 맞더니 통증이 싹 사라졌다. 만병통치약까지는 아니더라도 효과는 분명하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그래서 주변 자산가들에게도 종종 권한다.

A씨는 "내가 가는 오사카의 병원에 가면 암 환자도 일부 있지만, 나처럼 아픈 데가 없어도 면역력을 강화하고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오는 사람이 대부분"이라면서 "돈이 있으면 (생존의) 시간까지 살 수 있게 됐다"고 했다. 줄기세포 주사 알선 업체 관계자는 "많게는 하루에 30명 가까운 국내 부자들이 외국 병원에서 줄기세포 주사를 맞기도 한다"면서 "요즘은 부유층 사이에서 줄기세포 주사가 '대세'로 떠오르면서 해외 병원과 자산가들을 연결해 주는 업체가 우후죽순 격으로 생기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이들이 맞는 줄기세포 주사는 혈액이나 골수 등에서 성체줄기세포를 추출한 뒤 이를 배양한 것이다. 태아의 탯줄에서 추출하는 제대혈과는 구분된다. 우리나라에서 제대혈을 그냥 주입받는 건 합법이다. 하지만 자기 몸에서 추출한 줄기세포라도 이를 배양해 의료 목적으로 사용하려면 임상시험 절차를 거쳐야 한다. 안전성을 높이기 위해서다. 임상시험에는 일반적으로 4~5년 정도가 소요된다. 그러나 중국이나 일본 등 외국에서는 임상시험을 거치지 않아도 된다. 우리나라보다 규제가 약해 줄기세포 주사를 맞기가 훨씬 간편하다는 얘기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배양 줄기세포 주사가 '불로초'로 알려지면서 위험성과 높은 단가, 불투명한 효과 등에도 인기가 식지 않고 있다"면서 "다만 일본 등에서도 규제가 강화되고 있어 앞으로 음성화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고 했다.

상위 1%는 정기 건강검진도 일반인들의 수준을 훌쩍 넘어선다. 이들이 대표적으로 선택하는 서비스는 VVIP 검진이다. 삼성서울병원과 세브란스병원 등 웬만한 대학병원들이 모두 내놓고 있다.

수도권 지역 중소기업 사장 부인 C(60)씨는 모 대학병원의 프리미어 의료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다. 건강검진뿐 아니라 병원 측에서 제공하는 건강 관리 프로그램에 따라 건강 관리를 받는다. 먼저 1년 중 하루를 잡아 집중 건강검진을 받는다. 개인이 직접 검사실을 찾아다녀야 하는 일반적인 건강검진과 달리 20평 크기의 VIP 병실(독방) 안에서 대부분의 검진이 이뤄지는 '황제검진'이다. 침대에 누워 쉬고 있으면 간호사가 들어와 혈압이나 혈액 등의 검진을 진행한다. MRI나 CT 등 특수의료 장비가 필요한 검사를 받을 때만 해당 검사실을 찾는다.

건강검진이 끝나고 결과가 나오면 1년간 C씨를 담당할 전담 주치의와 간호사를 배정받는다. 이들로부터 전문 상담을 받는 것은 물론 직통 전화번호도 따로 받아 365일 항상 문의를 할 수 있다. 여기에 영양사와 운동 코디네이터 등으로부터 건강증진 프로그램을 제공받는다. 해외 여행 때 현지에서 응급 상황이 발생하면 응급 헬기도 사용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쓰는 비용은 1년에 1900만원이다. 매달 150만원씩 내고 전담 건강관리팀으로부터 의료 서비스를 받는 셈이다. 한 대학병원 VVIP 검진팀 관계자는 "서비스의 질을 유지하기 위해 110명의 회원제로 운영하고 있다"면서 "원래 바빠서 건강 관리를 제대로 못 하는 최고경영자(CEO)를 대상으로 프로그램을 만들었지만 입소문이 퍼지면서 자산가들도 부부가 같이 회원으로 가입하는 경우도 많다"고 했다.

의료와 휴양을 결합한 '메디컬 리조트' 형태의 호텔도 제주도 서귀포에 등장했다. W호텔에서는 오전에는 제주 천연수를 이용해 '수(水)치료'를 받고 오후에는 의사에게 검진을 받는다. 한라산이 보이는 힐링센터에서는 요가로 몸을 단련할 수도 있다. 미용성형과 항노화 클리닉, 맞춤식 건강증진 프로그램 등도 갖추고 있어 국내 부자뿐 아니라 외국 부자들에게도 인기다. 이 리조트의 회원 가입 보증금은 1억~2억원대다.

상위 1% 부유층은 운동에 돈을 아끼지 않는다. 서울 논현동에 사는 자산가 D(42)씨는 신사동에 위치한 고급 피트니스 클럽에서 운동을 한다. 기존 헬스 시설에 종합격투기(MMA), 복싱, 스턴트 액션 등을 함께 연습할 수 있는 게 특징이다. 유명 무술감독과 방송인이 함께 세운 곳이어서 여기서는 치이는 게 연예인이다. 그는 이곳에서 연예인 트레이너로 유명한 강사로부터 1대1 퍼스널 트레이닝(PT)을 받는다. 비용은 시간당 10만원이다. 일주일에 3번 정도 이용한다. 그가 이곳에서 '몸짱'이 되기 위해 쓰는 비용은 한 달에 150만원 정도다. D씨는 "똑같이 한 시간을 운동하더라도 별다른 지도 없이 할 때와 PT를 받을 때의 몸 상태가 확연히 다르다"면서 "운동으로 1년에 차 한 대 값을 쓰지만 그만큼 투자할 가치가 있다"고 했다.

C씨도 아파트 단지 내 피트니스센터에서 1대1 웨이트 트레이닝을 받는다. 역시 한 시간에 10만원, 주 5회를 한다. 한 달에 200만원 정도 쓰지만 만족도가 높다. C씨는 "한때 골프도 배웠지만 체질에 맞지 않아 그만뒀다"면서 "꾸준히 운동을 하는 덕분에 허리와 부인병이 좋아진 것은 물론 취미인 여행을 다닐 수 있는 체력도 생겼다"고 했다.

회원제로 운영되는 고급 피트니스 클럽도 상위 1% 부유층이 많이 찾는 운동 장소다. 서울 남산 자락에 위치한 6성급 리조트형 호텔의 피트니스 클럽 보증금은 1억원에 달한다. 여기에 연 500만원의 회원비가 추가된다. 이 클럽은 강남의 '젊은 엄마'들에게 인기다. 엄마가 운동하는 동안 자녀를 돌봐 주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한편 스키, 승마 등 강습도 무료로 시켜주기 때문이다. 인근의 프라이빗 멤버십 클럽 역시 1인당 보증금 7000만원에 연 회원비가 400만원이다. 이곳은 돈만 있다고 회원이 될 수는 없다. 기존 회원 2명이 추천을 해 줘야 회원 자격이 주어진다. 회원들이 친구 등을 불러 가벼운 파티를 할 수 있도록 장소와 뷔페식 음식도 제공한다. 서울 압구정동에 사는 중소기업 사장 E(53)씨는 "단순히 운동을 하는 곳이 아니라 어느 정도 '급'이 되는 사람들이 친분을 쌓을 수 있는 사교 클럽의 성격이 더 강하다"고 했다.

최근에 리모델링을 한 남산 인근 특급호텔 피트니스 클럽도 부유층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이 클럽은 조지 소로스, 잭 웰치 등 억만장자들이 애용하는 미국 뉴욕의 '시타라스 피트니스'와 제휴해 화제를 불렀다. 여기서 제공하는 '시타라스 프로그램'은 먼저 고객이 개인 트레이너와의 상담을 통해 프로그램을 정한다. 이후 체형과 신체 특성 등을 상세히 측정한 뒤 이를 기반으로 개인 트레이너가 설계한 맞춤형 운동 프로그램을 체험할 수 있다. 이어 운동 효과와 향후 건강관리 계획 등을 조언받게 된다. 청담동에 거주하는 변호사 F(47)씨도 이 호텔 피트니스 클럽 회원이다. F씨는 "4000만원 정도인 보증금을 한 번에 내야 하는 부담은 있지만 수영장 수질이나 운동기구의 질이 다른 헬스클럽보다 월등하다"면서 "사람들과 부딪치지도 않고 조용한 편이라 일주일에 2번 정도 가서 운동한다"고 했다.

목동에 사는 자산 50억원대의 교수 G(57)씨는 사이클 마니아다. 그는 완성품 사이클을 사는 게 아니라 전문업체에 의뢰해 고가의 외제 부품을 수입한 뒤 스스로 조립한다. 부품값은 프레임 500만원, 크랭크 200만원, 휠세트 500만원 등 총 1200만원이 넘는다. 스위스(스캇)와 프랑스(마빅) 브랜드들이다. G씨는 "자칫 내리막길에서 체인이라도 끊어지면 큰 사고로 연결되는 만큼 자전거의 질에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라고 했다.

이두걸 유대근 송수연 기자douzirl@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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