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인권 위해 싸웠던 ‘우리시대의 목자’ | |
김수환 추기경의 발자취 11살부터 사제의 길 선택…1969년 세계 최연소 추기경 독재정권 아래서 항상 약자 편에…민주화 운동 구심점 타종교와 자유분방 교제…천주교 보수적 인식 허물어 | |
조현 기자 | |
김 추기경은 87년의 이승에서 가톨릭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삶을 살았다. 1969년 한국 첫 추기경으로 서임된 이후 그는 명실상부한 가톨릭의 대표자였다. 그는 가톨릭보다 더 많은 신자를 둔 불교와 개신교의 종교인들을 제치고 각종 여론조사에서 ‘영향력 1위의 종교인’ 자리를 지킨 인물이었다. 동시에 “나는 행운아였다”라는 고백에 걸맞게 이 시대에 가장 사랑받은 목자였다. 그는 1922년 대구에서 옹기장수였던 아버지 김영섭(요셉)과 모친 서중화(마르티나)의 5남3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할아버지 때부터 천주교 신앙을 이어온 터라 그는 신앙심 두터운 소년으로 자랐다. 하지만 아버지가 초등학교 1학년 때 해수병으로 세상을 떠난 뒤 굶기를 밥먹듯 할 만큼 생활은 궁핍했다. 그런 곤궁함을 이겨낼 수 있었던 큰 힘은 신심 있고 강단 있던 어머니와 훗날 사제가 된 세 살 터울의 형 김동한 신부의 사랑이었다고 한다.
해방과 함께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47년 서울 성신대학에서 신학 공부를 마치고 51년 9월 사제 서품을 받았다. 곧바로 경북 안동본당 주임신부로 발령을 받았는데, 그가 일선 성당에서 근무한 것은 안동과 김천성당을 합쳐 고작 2년 반에 불과했다. 훗날 그는 “끼니도 제대로 때우지 못했지만 정이 넘쳤던 가난한 신자들과 함께했던 그 시절이 가장 행복했다”고 회고하곤 했다. 53년 대구대교구장 비서를 거쳐 7년 동안의 독일 유학을 마친 뒤 그는 64년 가톨릭신문사 전신인 주간 <가톨릭시보>의 사장을 지냈다. 그리고 불과 42살 때인 66년 주교가 되면서 마산교구청의 초대 교구장을 맡았다. 당시 가톨릭 내에서도 “김수환이 누구냐?”는 얘기가 나돌 만큼 그의 두각은 눈부셨다. 그는 2년 뒤 한국 천주교 주교 가운데 막내임에도 대주교로 승품돼 서울대교구장에 올랐고, 69년 마침내 한국 천주교 사상 처음으로 추기경이 됐다. 당시 그의 나이 47살로, 전세계 136명의 추기경 가운데 최연소자였다. 추기경으로서의 삶은 그에게 영광이자, 동시에 ‘행복한 고난’이었다. 그가 추기경으로 본격 활동한 70년대는 온 나라가 박정희 독재 정권의 서슬퍼런 칼날에 신음하던 시기였다. 인권과 민주화를 위한 외침은 고문과 감옥행으로 이어졌고, 심지어는 죽음을 각오해야만 했다. 김 추기경은 71년 예수성탄대축일 때 장기 집권의 길로 들어선 박정희 정권을 처음으로 공개 비판했고, 이듬해 8·3 긴급조치, 10월 유신 때도 시국성명을 발표했다. 74년 지학순 주교가 구속되고 76년 명동 3·1절 기도회 등으로 사제들이 잇따라 영어의 몸이 되자 성명과 강론을 통해 인권과 민주 회복을 강조했다.
김 추기경은 80년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모든 신자들에게 광주를 위한 특별기도를 요청했으며, 87년 6월 항쟁 때는 명동성당에 진입한 시위대를 연행하려던 정부에 단호하게 맞섰다. 이런 ‘고난’ 속에서 명동성당에 붙여진 ‘민주화 성지’라는 영예는 한국 사회가 그와 가톨릭에 부여한 영광이기도 하다.
그는 평생을 사회적 약자인 노동자들의 삶에 큰 관심을 보였으며, 민족 화해와 통일에도 깊은 열정을 나타냈다. 89년 서경원 의원 방북사건이 발생하자 그는 기자회견을 열어 남북 관계의 호전을 바라는 교회의 입장을 표명하기도 했다.
한편으로 그는 ‘내 탓이오’ 운동을 이끌며 많은 이들에게 스스로를 성찰하게 했고, 유머와 재치가 넘치는 소탈한 인간미를 보였다. 또 다른 종교인들과도 스스럼없이 교우하는 관용을 실천했다.
그런 덕에 그가 서울대교구장에 착좌했던 68년 당시 성당 48곳에 14만여명이던 서울대교구 산하의 신자 수는 그가 은퇴하기 직전인 97년엔 성당 197곳에 신자 121만여명으로 열 배 가까이 급성장했다.
그는 무엇보다도 한국 천주교를 이끌고, 반석에 올리고자 매진한 인물이었다. 평소 세상에 태어나 가장 잘한 일로 “신부가 된 것”을 꼽았고, 묘비에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시편 23장 1절)라는 말이 새겨지길 바랐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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