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연민·배려·유머가 몸에 밴 ‘우리들의 바보’

지난 16일 선종한 김수환 추기경의 삶은 가톨릭 신자뿐 아니라 많은 이들에게 깊은 울림을 남겼다.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나 번민 끝에 사제가 된 그는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의 삶을 어루만졌고, 소탈한 웃음과 인간적 면모로 세상을 향해 사랑과 평화의 메시지를 전파했다. 지인들의 증언을 토대로 인간, 투사, 성직자로서 그의 삶을 3회에 걸쳐 되돌아본다.

성 라자로 마을 원장인 김화태 신부는 과거 김수환 추기경에게서 받은 성탄 축하 카드를 고이 간직하고 있다. 성탄절을 앞두고 김 추기경에게 카드를 보냈더니 답장이 왔더란다. 카드에는 김 신부의 상황을 묻고 안녕과 축복을 당부하는 내용이 빼곡히 담겨 있었다. 그 후로도 3~4년간 카드를 보내면 꼬박꼬박 답장이 왔다. 김 신부는 “나중에 알고 보니 나 말고도 김 추기경에게 답장을 받은 사람이 많았다”면서 “수많은 사람에게서 카드가 올 텐데 밤을 새워가며 일일이 답장을 하셨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김 신부는 “김 추기경이 각종 행사에서 자신과 함께 사진을 찍고 싶어하는데 기회를 놓친 사람이 있으면 기억해 뒀다가 행사가 끝난 뒤에라도 불러 함께 사진을 찍었던 모습도 인상 깊었다”고 말했다.

고 김수환 추기경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가 인간에 대한 연민과 배려, 겸손을 한시도 잃지 않았던 사람이었다고 입을 모은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현대사의 수많은 굴곡과 고통을 온몸으로 부딪치면서 살아왔음에도 그의 얼굴에는 항상 인자하고 장난스러운 웃음이 감돌았다. 고인은 빼어난 유머감각과 리더십을 지녔고 그런 재능으로 주변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최성우 신부는 김수환 추기경의 친화력의 비결로 노래실력을 들었다. 최 신부는 “추기경님 스스로는 노래를 잘하지 못한다고 하시면서도 노래를 불러야 할 자리가 되면 언제든지 흔쾌히 부르신다. 그런데 부르시던 노래가 늘 상황에 적합해 가칭 ‘김수환 추기경님이 부르실 노래 선곡위원회’가 있다고 할 정도였다”고 회고한다. 대중들이 기억하듯이 김 추기경이 KBS <열린음악회>에 나가 가수 김수희씨의 ‘애모’를 자연스럽게 부른 것도 이 같은 평소의 모습에서 비롯됐다.

1951년 9월15일 사제 서품을 받고 어머니 서중하 여사와 함께 한 김수환 추기경.

고인은 또 자신 때문에 남들이 불편해 하거나 어려워 하는 것을 피하려고 항상 신경을 썼다. 식당에 갔을 때 그의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이 “추기경님 아니시냐?”고 물으면 “저도 그런 얘기 많이 듣고 산다”고 웃어넘기는가 하면, 사무실에 손님이 찾아오면 상대방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상대방을 맞이했다. 인권실천시민연대 오창익 사무국장은 “손자뻘인 나를 그렇게 대하시는 것을 보고 처음엔 겉으로만 저러시나 싶었지만 상대방이 주눅들지 않도록 하기 위해 추기경님의 몸에 밴 습관이란 걸 알게 됐다”고 말했다.

‘어린 시절 가난이 싫어 장사꾼을 꿈꾸다 추기경이라는 높은 자리에 올랐으나 스스로를 ‘바보’라고 칭하고 떠난 사람.’

순교자의 집안에서 막내로 태어난 그가 성직자가 되기까지의 길이 그리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일까? 어릴 적 그의 꿈은 장사꾼이 되는 것이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읍내 상점에 취직해 5~6년쯤 장사를 배운 뒤 독립하겠다는 구체적인 계획까지 세웠다. 대구 시내에서 열린 사제 서품식을 보고 온 어머니가 그와 형을 앉혀 놓고 “너희는 커서 신부가 되거라”라고 ‘명령’했던 순간을 “청천벽력과 같았다”고 술회할 정도였다.

어머니의 강권으로 신학교에 입학했지만 학교를 떠나고 싶어 일부러 크고 작은 교칙을 위반하는가 하면 꾀병을 부려 입원을 하기도 했다. 신부가 되고픈 마음이 없었으니 공부에도 흥미가 별로 없었다고 한다. 김 추기경은 “그런데도 하느님께서 발목을 놓아주지 않으신 걸 보면 성직자의 길은 이미 정해진 운명이었던 것 같다”고 회고했다. 어머니의 질정 역시 그가 성직자의 길을 가는 데 결정적이었다.

종교를 초월해 한국인들의 존경을 받았던 그는 말년에 자신을 ‘바보’라고 부르며 몸을 낮췄다. 2007년 모교인 동성고(옛 동성상업학교) 개교 100주년 기념 미술전시회가 열렸을 때 자화상을 그리고 그 밑에 ‘바보야’라고 적어 넣었던 것이다. 다소 엉뚱한 이 그림에 대해 그는 “제가 잘났으면 뭘 그렇게 크게 잘났겠어요. 다 같은 인간인데…. 안다고 나대는 것이 바보지. 그런 식으로 보면 내가 제일 바보스럽게 살았는지도 몰라요”라고 말했다.

사제가 되는 순간에도 “과연 한평생 착한 목자로 살 수 있을까? 장점보다 단점이 많은 내가 오히려 하느님 앞에서 죄인으로 남을 가능성이 더 높지 않은가”라고 자문하며 ‘하느님,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시편 51장)를 평생 가슴에 담고 살았던 사람. 이 땅에 발딛고 서 있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그가 비춰주던 불빛은 이처럼 자기 자신과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과 연민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김재중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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