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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연합뉴스) 조채희 기자 = '무소유'의 가르침을 전하고 실천한 법정(法頂)스님이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에 몸을 맡긴 채 먼 길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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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일 오후 1시51분 서울 성북동 길상사에서 입적한 법정스님의 법구는 13일 오전 스님의 출가 본사인 전남 순천 송광사 전통다비장에서 다비됐다.
법정스님의 이번 생 마지막 길을 지켜보려고 이날 송광사에는 아침 일찍부터 전국 각지의 불교신자와 스님 등 추모객 3만여 명이 몰렸고, 송광사를 품은 조계산 언덕에 자리 잡은 다비장에도 1만5천여명이 운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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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마무리..' 법정 스님 가시던 날 (순천=연합뉴스) 형민우 기자 = 무소유와 청빈으로 평생을 살아온 법정스님이 우리 곁을 떠났다. 단아하면서 맑은 문체로 사랑을 받아 온 시대의 작가이자 철학자였던 법정 스님은 떠날때도 무소유 그 자체였다. 13일 전남 순천 송광사에서는 영결식 등 일체의 행사 없이 조촐하게 다비식이 열렸다. 2010.3.13 minu21@yna.co.kr |
전날 길상사를 떠나 송광사 문수전에서 밤을 지낸 법정스님의 법구가 이운되기 시작한 것은 이날 10시, 범종 소리와 함께였다.
법구는 길상사를 떠나던 모습 그대로 대나무 평상에 모셔진 채 가사를 덮은 상태였고, 대웅전 앞에서 부처님께 마지막 3배를 한 후 다비장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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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가는 길 (순천=연합뉴스) 형민우 기자 = 무소유와 청빈으로 평생을 살아온 법정스님의 다비식이 13일 순천 송광사에서 열려 스님의 법구가 거화의식을 위해 옮겨지고 있다. 2010.3.13 minu21@yna.co.kr |
추모객들은 일제히 합장하고 "나무아미타불" 등을 염불하면서 법정스님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봤고, 다비장으로 향하는 거대한 행렬에 동참했다. 또 상당수 추모객은 일찍부터 다비장으로 모여들어 자리를 잡기도 했다.
학인 스님 8명이 조를 짜 교대해 이운한 법구는 송광사 주차장 입구에서 약 800m 산길을 올라 오전 11시께 다비장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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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가는 길 (순천=연합뉴스) 형민우 기자 = 무소유와 청빈으로 평생을 살아온 법정스님의 다비식이 13일 순천 송광사에서 열려 스님의 법구가 거화의식을 위해 옮겨지고 있다. 2010.3.13 minu21@yna.co.kr |
법구는 장작더미가 쌓인 인화대 위에 모셔진 후 다시 참나무로 덮였고, 이어 11시41분 스님 9명이 장작에 불을 붙이는 거화(炬火) 의식을 거행하면서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에 맡겼다.
이날 법정스님의 법구를 이운하는 행사에는 전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스님, 조계종 원로의원 법흥스님, 덕숭총림 수덕사 방장 설정스님, 쌍계사 조실 고산스님, 전국선원수좌회 전 대표 혜국스님 등 불교계의 큰스님과 중진스님이 대거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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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스님의 마지막 길' (순천=연합뉴스) 이지은 기자 = '무소유'의 법정 스님의 다비식이 거행된 13일 오전 전남 순천시 송광사에서 법정 스님의 영정을 앞세운 법구가 문수전을 나와 대웅전을 향하고 있다. 2010.3.13 jieunlee@yna.co.kr |
또 이계진, 김학송 한나라당 의원, 이강래, 서갑원 민주당 의원, 강기갑 민주노동당 대표,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 등 정계인사도 자리를 함께했다.
법정스님의 법구는 14일 오전 10시까지 계속 다비된 후 타다 남은 뼈를 모으는 습골 의식을 거쳐 문도들에게 전달된다. 유골은 법정스님이 오래 머무르던 강원도 오두막, 송광사 불일암, 길상사 등지에 산골될 것으로 전해졌다.
“삶과 죽음이 하나라지만…”
"스님께서 극락전 앞에서 부처님께 마지막 세 번 인사를 올리고 떠나실 때는 제 마음이…"
법정스님께 받았다는 법명 '지광(智光)거사'로 자신을 소개한 변택주(58) ㈔시민모임 맑고향기롭게(맑고향기롭게) 이사는 스님의 마지막 모습을 그리며 마음이 애통한지 말을 잇지 못하고 안경을 들어 올려 눈물을 닦았다.
그는 "스님께서 삶과 죽음이 하나라고 하셨지만, 제자된 저로서는 왜 (마음속에) 울림이 없었겠느냐"며 스승을 잃은 제자의 슬픈 심정을 내비쳤다.
13일 성북동 길상사에 있는 '맑고향기롭게' 사무실에서 기자와 만난 변 이사는 2000년 법정스님에게 계를 받은 제자다.
"사실은 26년 전에 이미 계를 받은 적이 있었지만, 꼭 스님께 받고 싶은 마음이 들어 특별히 다시 부탁했던 거죠. 어떻게 보면 욕심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가 처음 법정스님을 만난 것은 길상사가 창건되던 1998년 법회에서였다. 평소 스님의 글을 읽고 흠모하던 그가 스님을 뵙고 싶어 이날 길상사를 찾았다. 이후 그는 그해 가을부터 10여 년 동안 꾸준히 법정스님 법회의 진행을 도맡아 했다.
그는 "스님의 '무소유' 정신이 널리 알려졌지만, 사실 스님이 늘 하셨던 말씀은 '착하게 살라'는 단순한 메시지였다"며 "부처와 보살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부처와 보살이 돼 가는 것이라고 설파하셨다"고 회고했다.
그가 지금 '맑고향기롭게' 이사직을 맡아 일하는 것도 '착하게 살라'는 법정스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해서다.
원래 '맑고향기롭게'는 1993년 법정스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법정스님의 뜻을 받들어 만든 사회봉사 단체다. 이들은 결식아동과 독거노인을 돕고, 양로원을 찾아가 봉사하는 등 몸으로 하는 봉사를 꾸준히 해왔다.
고(故) 정채봉 동화작가를 비롯해 이계진 의원, 윤청강 불교작가 등이 법정스님의 뜻에 공감해 발기인격으로 모임에 참여했고, 이후 각지에서 종교를 불문하고 수많은 사람이 동참했다. 지금은 지역모임만도 부산과 대전, 대구, 광주와 경남 등 5곳에 이를 정도로 커졌다.
2003년 길상사 회주 직을 비롯해 모든 직책에서 물러나 강원도 오두막으로 들어간 법정스님이 마지막까지 내려놓지 않았던 것이 '맑고향기롭게' 이사장직이라는 것만 봐도 이 모임의 상징적 의미를 짐작할 만하다.
변 이사는 "모임을 운영하면서도 스님은 '무소유' 정신을 실천하셨다"고 강조했다. 구청에서 자금지원 제의를 해왔는데도 "그 자금은 다른 기관에서도 필요한 곳이 많을 것"이라며 "약소해도 내 주머니에서, 힘들어도 내 몸으로 봉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는 "스님은 당시 많이 썼던 '베품'이라는 말 대신 '나눔'이라는 말을 좋아하셨다"며 "아마 나눔이라는 말이 보여주는 수평적인 모습이 마음에 드셨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이런 활동을 하면서도 법정스님은 도움을 주고도 얼굴이나 이름을 알리지 않는 무상보시(無相布施)의 원칙을 일평생 철저히 지켰다. 이 때문에 기부 활동을 비롯한 스님의 선행은 '맑고향기롭게' 쪽에서도 다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변 이사는 "옛날 양(梁)나라 무제(武帝)가 불교를 위해 했던 일을 자랑하며 자신의 공덕이 얼마나 되는지 묻자 달마대사가 무공덕(無功德)이라고 답했다는 일화가 있다"며 "스님께서도 '내가 무얼 했노라고 얼굴을 내밀면 보시가 아니라 거래'라고 늘 강조하셨다"고 전했다.
하지만 그는 "몇 겹의 종이로 향(香)을 싸도 향기가 배어 나오는 것은 막을 수 없듯이 법정스님이 쌓은 덕도 차차 알려지리라 생각한다"며 "'맑고향기롭게'를 통해서 하신 부분은 지극히 적은 부분이라고 알고 있다"고 전했다.
실제로 '맑고향기롭게'는 1994년부터 매년 4000~5000만원을 '맑고향기롭게 길상화 장학금'으로 책정하고, 형편이 어려운 중ㆍ고교 학생 30여명을 선발해 돕고 있지만, 누가 얼마나 기부를 했는지는 밝히지 않는다. 이 가운데 상당 부분이 법정스님의 기부액이라고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맑고향기롭게'를 통하지 않은 기부 활동도 상당했을 것으로 보인다. '무소유'를 비롯한 법정스님의 인세 수입은 10억원이 넘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각 출판사에서는 이들 인세가 장학금 등에 쓰였을 것을 추측한다.
변 이사는 "스님께 장학금을 받아서 석사와 박사 공부를 한 사람이 있다고 들었다"고 말했고, 출판사 마음의숲의 고세규 대표도 "스님께서 일본 유학생에게 많은 돈을 학비로 대줬다는 소식을 한 문인에게 들은 적이 있다"고 말을 보탰다.
하지만 변 이사와 '맑고향기롭게' 사무국 측은 "스님의 뜻에 어긋난다"며 법정스님이 한 기부와 선행을 구체적으로 밝히기를 한사코 거부했다.
법정스님께 받았다는 법명 '지광(智光)거사'로 자신을 소개한 변택주(58) ㈔시민모임 맑고향기롭게(맑고향기롭게) 이사는 스님의 마지막 모습을 그리며 마음이 애통한지 말을 잇지 못하고 안경을 들어 올려 눈물을 닦았다.
그는 "스님께서 삶과 죽음이 하나라고 하셨지만, 제자된 저로서는 왜 (마음속에) 울림이 없었겠느냐"며 스승을 잃은 제자의 슬픈 심정을 내비쳤다.
13일 성북동 길상사에 있는 '맑고향기롭게' 사무실에서 기자와 만난 변 이사는 2000년 법정스님에게 계를 받은 제자다.
"사실은 26년 전에 이미 계를 받은 적이 있었지만, 꼭 스님께 받고 싶은 마음이 들어 특별히 다시 부탁했던 거죠. 어떻게 보면 욕심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가 처음 법정스님을 만난 것은 길상사가 창건되던 1998년 법회에서였다. 평소 스님의 글을 읽고 흠모하던 그가 스님을 뵙고 싶어 이날 길상사를 찾았다. 이후 그는 그해 가을부터 10여 년 동안 꾸준히 법정스님 법회의 진행을 도맡아 했다.
그는 "스님의 '무소유' 정신이 널리 알려졌지만, 사실 스님이 늘 하셨던 말씀은 '착하게 살라'는 단순한 메시지였다"며 "부처와 보살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부처와 보살이 돼 가는 것이라고 설파하셨다"고 회고했다.
그가 지금 '맑고향기롭게' 이사직을 맡아 일하는 것도 '착하게 살라'는 법정스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해서다.
원래 '맑고향기롭게'는 1993년 법정스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법정스님의 뜻을 받들어 만든 사회봉사 단체다. 이들은 결식아동과 독거노인을 돕고, 양로원을 찾아가 봉사하는 등 몸으로 하는 봉사를 꾸준히 해왔다.
고(故) 정채봉 동화작가를 비롯해 이계진 의원, 윤청강 불교작가 등이 법정스님의 뜻에 공감해 발기인격으로 모임에 참여했고, 이후 각지에서 종교를 불문하고 수많은 사람이 동참했다. 지금은 지역모임만도 부산과 대전, 대구, 광주와 경남 등 5곳에 이를 정도로 커졌다.
2003년 길상사 회주 직을 비롯해 모든 직책에서 물러나 강원도 오두막으로 들어간 법정스님이 마지막까지 내려놓지 않았던 것이 '맑고향기롭게' 이사장직이라는 것만 봐도 이 모임의 상징적 의미를 짐작할 만하다.
변 이사는 "모임을 운영하면서도 스님은 '무소유' 정신을 실천하셨다"고 강조했다. 구청에서 자금지원 제의를 해왔는데도 "그 자금은 다른 기관에서도 필요한 곳이 많을 것"이라며 "약소해도 내 주머니에서, 힘들어도 내 몸으로 봉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는 "스님은 당시 많이 썼던 '베품'이라는 말 대신 '나눔'이라는 말을 좋아하셨다"며 "아마 나눔이라는 말이 보여주는 수평적인 모습이 마음에 드셨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이런 활동을 하면서도 법정스님은 도움을 주고도 얼굴이나 이름을 알리지 않는 무상보시(無相布施)의 원칙을 일평생 철저히 지켰다. 이 때문에 기부 활동을 비롯한 스님의 선행은 '맑고향기롭게' 쪽에서도 다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변 이사는 "옛날 양(梁)나라 무제(武帝)가 불교를 위해 했던 일을 자랑하며 자신의 공덕이 얼마나 되는지 묻자 달마대사가 무공덕(無功德)이라고 답했다는 일화가 있다"며 "스님께서도 '내가 무얼 했노라고 얼굴을 내밀면 보시가 아니라 거래'라고 늘 강조하셨다"고 전했다.
하지만 그는 "몇 겹의 종이로 향(香)을 싸도 향기가 배어 나오는 것은 막을 수 없듯이 법정스님이 쌓은 덕도 차차 알려지리라 생각한다"며 "'맑고향기롭게'를 통해서 하신 부분은 지극히 적은 부분이라고 알고 있다"고 전했다.
실제로 '맑고향기롭게'는 1994년부터 매년 4000~5000만원을 '맑고향기롭게 길상화 장학금'으로 책정하고, 형편이 어려운 중ㆍ고교 학생 30여명을 선발해 돕고 있지만, 누가 얼마나 기부를 했는지는 밝히지 않는다. 이 가운데 상당 부분이 법정스님의 기부액이라고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맑고향기롭게'를 통하지 않은 기부 활동도 상당했을 것으로 보인다. '무소유'를 비롯한 법정스님의 인세 수입은 10억원이 넘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각 출판사에서는 이들 인세가 장학금 등에 쓰였을 것을 추측한다.
변 이사는 "스님께 장학금을 받아서 석사와 박사 공부를 한 사람이 있다고 들었다"고 말했고, 출판사 마음의숲의 고세규 대표도 "스님께서 일본 유학생에게 많은 돈을 학비로 대줬다는 소식을 한 문인에게 들은 적이 있다"고 말을 보탰다.
하지만 변 이사와 '맑고향기롭게' 사무국 측은 "스님의 뜻에 어긋난다"며 법정스님이 한 기부와 선행을 구체적으로 밝히기를 한사코 거부했다.